*일 시 : 2017년 05월 10일~13일
*누구와 : 작은아들,아내,나
*오랜만에 가족이 나들이 다녀왔습니다.
*첫번째 코스 제주도 돌 문화공원
*제주 돔 문화공원 주차장의 전기 자동차 충전소 여기는 전기차가....
*돌 문화공원 입구 표지석.
1999년 1월 19일 구 북제주군과 구 탐라목석원은 제주돌문화공원 조성사업을 위한 협약서를 체결한 바 있습니다. 탐라목석원에서 제출한 기획(안)을 최대한 반영한다는 협약서 제3조 1항에 따라, 제1단계 사업지구 30만평부터 철저히 지형 관찰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4개의 오름에 둘러싸여 있는 조천읍 교래리 남조로 2023번지, 3,269,731㎡ (100만평)의 방대한 지역을 혼자서 걸어 다니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늪서리 오름, 큰지그리 오름, 작은지그리 오름, 바농 오름, 오름들 정상에 오를 때마다 발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돌문화공원 예정지 곶자왈 원시림을 보면서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릅니다.그때마다 물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천혜의 원시림을 원형 그대로 보전하면서 목장 초지만을 이용하여, 어떻게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시설물들을 배치할 것인가.
지구(地球)는 약 70%의 바다와 30%의 육지로 구분되어 있다고 합니다. 왜 이런 비율로 형성됐는지 알 수 없지만 만일 반대로 생각해서 30%는 바다이고 70%가 육지였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요즘처럼 환경오염이 심각한 경우 지구는 스스로 자정능력을 잃어버려 벌써 죽음의 별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문화공원의 80%이상을 차지하는 ‘곶자왈’의 바다는 돌문화공원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푸른 여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돌, 나무, 넝쿨들이 엉켜있는 아름다운 ‘곶자왈’의 바다를 그대로 보전하여 생태공원으로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에 반드시 지켜내야 할 우리들의 사명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첫째도 환경, 둘째도 환경, 셋째도 환경이라는 원칙하에 아름다운 곶자왈 원시림과 조화를 이루며 제주의 정체성, 향토성, 예술성을 살려서 탐라의 형성과정, 탐라의 신화와 역사와 민속문화를 시대별로 총 정리하여 가장 심오하고 가장 아름다운 교육의 공간을 조성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 이것이 돌문화공원의 기획자가 한순간도 잊은 적 없는 신념인 것입니다. 만일 그런 신념 아래 만난(萬難)을 무릅쓰며 차근차근 15년에 걸쳐 추진해오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돌문화공원을 조성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민ㆍ관이 힘을 합치고 정성을 다해 이 돌문화공원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것을 물려받은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세대가 이룬 이 위대한 기념물을 입모아 칭송하는 날을 생각해 봅니다. 처음의 협약정신과 기획의도를 끝까지 지켜나가면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 처럼 제주도 여행에 동참한 작은 아들과 함께한 모자지간.
*평일이라 그런지 넘 조용한 것이 이상하다.
한라산 영실코스에서 만나는
영실기암과 오백나한 전설
*제주도에서는 돌을 빼놓으면 이야기가 안되지요.그렇게 돌이 많고 쓰임새도
많아으리라 생각이 든다.
*바위와 담쟁이와의 조화 가을이면 빨강 단풍으로 멋지게 어울리겠네요.
*이 한장의 사진이 제주도의 전부를 보는 곳 같네요.돌과 연의 조화 넘 평화
로운 모습.
담쟁이가 돌을 덮고 있네요.올 여름 더위는 .....
*하늘 연못 가는 길 숲속의 산책길.
*기념 석탑
2기의 기념 석탑은 북제주군과 목석원을 상징하는 돌탑이다.제주 돌문화 공
원 제1단계 계획사업이 성공적으로 조성될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북제
주군과 목석원 협의사항에 따른 신의성실의 원칙 준수했기 때문이다.이 돌탑
은 민,관이 협력하여 이루어낸 성공사례의 기념비가 될것이다.
*하늘 연못
한라산 영실에 전해 오는 전설속의 설문대할망은 키가 무려 49,000m나 되는
거녀 였다고 한다.전설은 설문대할망의 죽음을 두가지 형태로 전하고 있다.
하나는 자식을 위해 끊이던 죽솥에 빠져 죽었다는 것인고,다른 하나는 키가
큰걸 자랑하다가 물장오리라는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지극한 모성애
와 인간적 약점의 양면성을 함께 말해주는 이야기라 할 것이다.박물관 옥상
에 설치된 하늘 연못은 설문대할망 전설속의 죽솥과 물장 오리를 상징적으
로 디자인한 원형무대이다.지름 40m,둘레125m,로 연극.무용.연주회등을
위한 수상무대라는 전위적 공간으로도 활용될것이다.
*하늘 연못의 모습.
*하늘 연못의 수면의 모습.
*수급불류월
제주가 낳은 한국근현대서단의 서예가 소암 현중화 선생의 글씨.물박물관 벽
천계류에 걸맞은 수급불류월은 도록에서 한 자.한 자 찾아서 조화롭게 걸작한 것이다.물은 급히 흘러가건만 물속의 달은 흘러가지 않은다.다음과 같은 뜻으로도 해석 할수 있을것 같다.인생은 유수와 같이 흘러가지만 진리는 흘러
가지 않은다.
*하늘 연못 아래에 있는 돌 박물관 입구의 모습.
*박물관에 전시된 지구의 내부.
지구 반지름은 약6400km로,지구 내부를 통과하는 지진파를 이용한 간접적
방법으로 지구 내부가 물성을 달리하는 지각,맨틀,외핵,내핵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제주도의 돌 용암구 전시.
돌갤러리 들어가는 길목 양옆으로 20여개의 크고 작은 용암구들이 전시되어
있다.용암구의 표면은 치딜하고 매끄러우나 내부는 거칠고 엉성한 경우가
많은데 전시된 용암구들은 그 내외부의 특징을 한 눈에 관찰할수 있다.
오른쪽의 용암구는 내부의 단면을 볼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파낸 것들이고
왼쪽의 용암구는 원형 그대로이다.
*좌대위의 용암구들.
*풍화혈의 암석
풍화혈릉 암석이 풍화에 의해 형성된 구멍이나 동굴을 말하는데,대체로 집
단적으로 나타나며,각각의 크기는 작게는 수센치미터에서 크게는 수미터에
달한다.특이 작은 풍화혈들이 열을 이루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벌집
풍화라 한다.이들의 생성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일반적으로
에 노출되기 쉬는 절리나 균열대,혹은 약대를 따라 시작되는 풍화에 의해
생성된다고 여겨지고 있다.특이 바람이나 파도에 의해 암석이 침투된 염분이
결정화 됨으로써 풍화혈이 점진적으로 더커지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화산탄의 모습
제주도에는 360여개의 오름이 도처에 분포한다.오름의 90%는 스트롬볼리언
형태의 화산폭발로 터져나온 마그마덩어리들이 화구주변에 쌓여서 형성된 원추형의 분석구이다.특히 터져나오는 마그마방울들이 공중으로 날아갈때
굳어져 지표에 떨어진것이 화산터인데,방추형,원형,빵껍질형,리본형,소똥형 등 여러 형태를 가진다.
*용암 수형
용암류가 수목을 둘러싸면서 흐를때,수목은 타고 흔적으로 구멍이 남은 것을
용암몰드라고 한다.만약 나무를 둘러쌓던 용암이 다시 그 수위가 낮아져 마
치 굴뚝처럼 서 있는 경우 이를 용암수형이라 한다.용암몰드와 용암수형내
부 안쪽 벽에는 수목의 표면구조가 관찰되기도 한다.
*용암구 전시실의 모습.
*먼나무는 쌍떡잎식물 무환자나무목 감탕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가지
는 털이 없고 암갈색이다.잎은 어긋나고 두꺼우며 타원형 또는 긴 타원형
다.연한 자주색꽃이 5~6월에 피고 열매는 둥글고 지름 5~8mm이며 10원에
붉게 익은다.관상수, 조경수로 쓰이며,한국(제주도,보길도),일본,타이완,중
국 등지에 분포한다.이 먼나무는 높이 4m50cm,지름 60cm,100여 년이 넘은
수령을 지녔으며 제주의 자연석,돌민속품,민구류 등과 함께 탐라목석원에서
무상 기증함에 따라 2009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대형 수형석 구멍으로 새로운 세상이....
*대형수형석
나무 둥치 표면의 의해 형성된 용암류내의 실린더형 구멍으로 현무암질 용암
류가 흘러갈때 나무 둥치와 접촉하게 되면 접촉부의 용암은 빨리 낸각 고화
되고 ,용암류가 낮은 곳으로 흘러가버리면 나무 모양의 둥근 기둥이 생긴다.
둥근 기둥내부의 나무는 타서 숯이나 재로 변하여 제거되어 남긴 구멍을 말
한다(내부 직경 60cm)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지역에서 거대한 돌을 이용해 만든 선사 시대 거석 기념물의 일종.
[개설]
고인돌은 대부분이 묘제이나, 일부는 집단의 의식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기념물)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는 ‘고인돌’,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대개석묘(大蓋石墓)’, 유럽에서는 대체로 ‘거석 기념물’ 또는 ‘돌멘(Delmen)이라고 부른다.
고인돌의 일반적인 정의는 땅 속이나 땅 위에 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무덤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형식은 크게 북방식·남방식·개석식으로 분류된다.
북방식 고인돌은 ‘탁자식’으로도 불린다. 네 개의 판석을 세워서 장방형 돌방을 만든 후,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돌을 뚜껑돌로 올려놓은 형식이다. 유해가 매장된 돌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남방식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도 불린다. 판석·할석·천석 등을 사용하여 지하에 돌방을 만들고 뚜껑돌과 돌방 사이에 3, 4매의 받침돌이 있는 형식이다. 보통 매장유해가 묻힌 곽을 덮는 뚜껑돌이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개석식 고인돌은 뚜껑돌과 각종 지하 돌방 사이에 받침돌 없이 뚜껑돌로 직접 돌방을 덮고 있는 형식이다. ‘무지석식’이라고도 하며, 크게는 남방식 고인돌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분류 기준을 그대로 제주 고인돌에 적용하기는 곤란한 실정이다. 한반도 고인돌의 형식 분류와는 시기적·형태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탐라 형성기의 대표적인 묘제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일정한 인구의 규모, 이에 따른 취락의 형성, 본격적인 농경과 협업체의 구성, 불평등 사회 구조 등의 배경에서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분포]
제주도 고인돌은 대부분 단독으로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군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고인돌 간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 분포 지역은 해발 100m 미만의 해안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제주시를 비롯하여 서북부와 서남부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동남부에는 매우 드물다. 용담동 고인돌·오라 고인돌·도련 고인돌·삼양 고인돌·외도 고인돌·광령 고인돌·하귀 고인돌·창천 고인돌·신례리 고인돌 등이 시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형식]
하나의 사회 구조를 갖춘 탐라 형성기의 삼양동 마을 유적에 자리한 고인돌은 지하 매장 주체를 둔 2톤 미만의 개석식 고인돌이 주류를 이룬다. 여기서는 이청규의 제주도 고인돌 형식 분류안과 편년 체제를 전재하고자 한다. 최근에 고인돌 하부 구조에 대한 조사가 오라동·광령리·옹포리·가파도 지역에서 진행되었으나, 아직 이청규의 형식 분류와 편년 체제를 수정하여 보완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주도 고인돌의 형식 분류에 기준이 되는 것은 매장부의 위치와 지석의 고임 방식이다. 매장부의 위치는 시신을 매장하는 곳을 지하에 둘 것인지, 지상에 둘 것인지의 문제이다. 이것은 지석묘의 축조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지상형은 높이가 높은 지석을, 지하형은 높이가 낮은 지석을 사용한다. 그리고 반지상형은 상석 양 모서리에 작은 지석을 고여 아치 모양을 이루거나 때로는 지석 자체가 한 쪽은 높고, 다른 한 쪽은 낮은 것을 필요로 한다.
지석의 고임 방식은 곧 상석을 올리는 방식이 된다. 매장 시설 상부에 지석의 유무에 따른 구분이다. 지석을 고였다면 판석형인지 괴석형인지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두툼한 괴석 위에 상석을 올리는 것보다 높이가 높은 판석 위에 상석을 올리는 것이 더 복잡한 축조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매장 시설의 위치와 지석의 고임 상태를 기준으로 제주도 고인돌을 분류하면 대체로 6가지 형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 1형식은 지석 없이 상석이 지표에 바로 닿는 개석식 또는 무지석식 고인돌이다. 2형식은 남방식 유형에 속하나, 전형적인 남방식에 비해 지석 대부분을 제대로 다듬지 않은 할석을 사용하였다. 또한 지석의 숫자는 3~10매로 그 예가 다양하다.
3형식은 상석 한 쪽이 들려서 하부 매장부가 지상에 드러나 있고, 그 좌우와 들리지 않은 뒤쪽에 지석이 고인 형식이다. 들린 부분의 모양은 대체로 아치형을 취하고 있다. 4형식은 지석이 이중으로 고인 형식이다. 비탈면을 이용하여 한 쪽은 작은 할석이 받쳐져 있다.
5형식은 비탈면을 이용하여 높은 곳은 할석과 괴석을 고이고, 낮은 곳은 판석을 고인 형식이다. 6형식은 상석 밑을 완전하게 판석형 지석으로 에워싸 고인 형식이다. 지상에 장방형 또는 원형의 석실을 만든 것으로 보이는 형식이다.
대체로 1·2형식은 매장부의 위치가 지하형이고, 3·4·5형식은 축조된 지형과 축조 방법으로 보아 반지상형일 가능성이 많다. 5·6형식은 지상형으로 정리된다.
[출토유물과 연대]
고인돌의 축조시기를 판단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부장 유물이다. 한반도 육지부의 경우, 고인돌의 출토 유물은 마제 석검·비파형 동검·세형 동검·홍도·무문 토기 등이 있다. 이러한 유물은 그 연대가 대체로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철기 시대까지로 편년된다. 그러나 제주도의 경우, 시기적으로 앞선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다소 후행할 것으로 판단된다.
지하형인 2형식의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토기 중에는 대체로 곽지리식 토기에 속하는 것은 있어도 회색 경질 토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3형식의 고인돌인 광령리 23호 고인돌에서 직립 구연 발형 토기 구연부가 비교적 많이 출토되었다. 직립 구연 발형 토기는 곽지리식 토기와 공반하지만, 곽지패총 2지구 제3층 아래층에서 초기 철기 시대 순수 구멍무늬 토기와 공반하여 나타나므로, 이른 단계일 가능성이 있다.
용담동 무덤의 남쪽 묘역에 있는 석곽 무덤에서는 무문 토기가 출토되었다. 그 석곽 무덤은 고인돌과 같은 단계에 축조된 무덤이거나 원래 상석이 있는 1유형인 개석식 고인돌일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 제주도 고인돌의 축조 상한을 초기 철기 시대까지 올려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고인돌의 거의 대부분에서 곽지1식 토기가 공반하기 때문에 제주 고인돌의 축조 시기가 곽지리식 토기 사용 시기와 맞물리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5·6형식의 고인돌에서는 적어도 3세기 초반 이후의 회색 경질 토기가 출토되므로 지상형 제주도식 고인돌이 보다 늦은 단계의 것으로 이해된다.
[특징]
고인돌의 축조는 다수의 인원 동원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피장자의 위치를 해석할 필요성이 있다. 다수의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은 일정한 권위에 의해서 강제된 것이다. 반대로 자발적인 협업 체제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전자의 입장은 고인돌의 피장자는 우월한 지위에 있는 족장 또는 수장이라는 해석이 될 수 있다. 반면에, 후자의 입장은 모든 피장자가 우월한 지위에 있는 족장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이다.
제주도 내 고인돌의 축조 기간을 탐라 전기로 잡고 마을 구성원이 모두 고인돌 묘제를 채택했다면, 그 수는 실로 엄청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고인돌의 분포가 한정적이고 밀집된 곳이라도 10~20여 기에 불과함으로, 고인돌 피장자는 적어도 마을 구성원 중 일정한 지위에 있는 신분임은 분명하다.
제주도 고인돌 중 가장 발전한 판석 모양 지석을 가진 6형식은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형이다. 이러한 고인돌 형식은 제주시 한천 변과 외도천 변이라는 일정한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유형의 고인돌은 분명히 제주도의 다른 형식의 고인돌보다 많은 동력과 전문 인력이 동원되어서 축조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러한 제주도식 고인돌의 피장자는 우월한 지위에 있는 족장층에 버금가는 신분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러한 형식의 고인돌의 분포를 통해 당시 가장 번창했던 마을 또는 중심이 되는 마을을 추정할 수도 있다.
상석의 규모는 당시 사회의 성격을 살피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상석의 규모는 축조에 동원된 인력과 상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축조 집단의 인구 규모를 추정하고, 고인돌 피장자의 위세를 확인할 수 있다.
광령리 10호 고인돌인 경우, 그 무게가 약 15t 가량 될 것으로 환산되었다. 이 고인돌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성인 남자 1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100㎏으로 잡는다면, 단 1기의 고인돌을 운반하고 축조하기 위해 150명의 인력이 동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가구당 4~5인으로 구성된 생물학적 가족 요건에 1인의 성인 남자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고인돌을 축조할 당시 650~800여 명의 인구가 고인돌 인근에 거주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제주도 고인돌의 분포 지역을 보면, 약간씩 축조시기를 달리하더라도 이런 고인돌을 축조할 당시에 그 지역에는 약 200~300여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고인돌의 분포와 동일시기 토기의 공반 정도에 따라 살펴보면, 탐라 전기에 한라산 북쪽에는 용담동·오라동 일대와 광령리·고내리·귀일리·곽지리·옹포리 일대에 각기 규모를 달리하는 거주 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라산 남서쪽에는 일과리·동일리·화순리·창천리 일대에, 남동쪽으로는 신례리·신천리·신풍리·신산리 일대에 크고 작은 마을 집단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돌문화공원의 고인돌 공원에서.
*북촌리 바위그늘 유적
용암동굴의 무너진 곳을 이용한 대표적인 바위그늘유적이다.발굴 조사에
해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탐라시대 전.후기로 이어지는 4개의 문화
이 확인되어 이동굴이 지속적으로 주거공간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유적의 규모는 정면폭 11m,높이2.5m,길이 3m가량이다.신석기시대층에서는
기의 입술부분을 밖으로 접어 붙인 겹아가리토기,입술부분에 삼각형 또는
원형의 무늬를 줄지어 찍은 점렬문토기,석기, 골각기,불에탄 열매 등이 출토
되었다.
*선돌
선돌은 고인돌과 함께 거석문화의 하나로,무덤을 표시하는 성격을 가진 것으
로 보이며 민속학적으로는 전설 혹은 신앙의 대상물로 여겨지기도 한다.제주
도에는 가파도 고인돌군 주변에 1기의 선돌이 있다.
*금성리유적 석축시설
유적은 해발 7~10m,해안에서 300m 가량 떨어진 완만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
며 인근에 금성천이 흐르고 있다.석축은 높이1.8~2.1m,폭 4.2~4.5m,길이
62m규모로.석축의 외벽은 직경30cm 이상의 현무암을 이용하여 7단이상 쌓
았고 내부는 돌과 흑갈색 점토 그리고 토기편등으로 단단하게 다져 축조하
였다.석축 아래 암반층이 바닷물을 먹은 흔적이 있어 제방이나 항포구와 관
련된 일종의 접안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석축 내부와 벽돌 틈에서 곽지리식토기가 다량 출토되어 탐라시대 전기에 축조된 것임을 알수 있다.
*용담동 무덤유적
용담동 무덤유적은 중앙의 돌담을 경계로 석관묘3기가 획인된 남폭묘역과
석관묘1기 옹관묘7기가 북쪽묘역으로 구분된다.남쪽 묘역에서는 골아가리토
기,검은긴토기,대팻날석기1점이 출토되었다.구멍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 남
한지방에서 유행한 토기이다.이 유적에서 나온 구멍무늬토기는 제주도에 이
토기문화가 유입된 후 어느 정도 토착화 과정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북쪽묘
역의 석곽묘에서는 장검,단검창,끌형철기,고사리형 철기,토기등 많은 양의
철제류와 유리구슬이 출토되었으며 옹관묘는 곽지리식토기가 사용되었다.
석관묘에서 출토된 철제무기류는 2세기의 영남지역 고분출토품과 비슷하
여 당시 해로를 통한 문물의 유입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수있다.
*상모리유적 화덕자리
전시된 화덕은 상모리유적에서 확인된 원형의 화덕 중 하나를 재현한 것으로
음식을 익혀먹기 위해서 만든 시설이다.화덕은 지름 1.8m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10~30cm정도의 자갈을 깔아 만들었으며,조사 당시 화덕 내부
에서 숯이 확인되었다.상모리유적은 한반더의 청동기문화가 들어왔어 형성
된 생활유적으로 유적의 위치와 출토유물등을 보면,어로를 생활기반으로 삼
고 일부수렵,채집생활을 했던것으로 보인다.출토유물로는 구멍무늬토기,골
아가리토기,붉은긴토기,돌도끼,대팻날,돌화살촉,돌팔,갈판,뼈바늘,조개팔찌
각종 조개껍질과 동물뼈등이 있다.
*낮은 돌담과 시누대길을 걸어 다음의 여정으로 이동.
*석관묘
고인돌과 함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 형식이며, 석관묘라고도 한다. 구덩이를 파고 판돌·괴석·할석 등을 써서 돌널을 만들어 주검을 묻는다. 널빤지처럼 넓적한 판석을 이용하여 널의 바닥·뚜껑·네 벽을 만드는 상형 돌널무덤이 있으며, 넓적한 판석과 함께 괴석이나 할석을 이용하여 바닥·뚜껑·네 벽을 만드는 석곽형 돌널무덤이 있다. 널 길이가 160cm가 넘어 주검을 펴서 묻었을 것으로 보이는 신전장 형식도 있지만, 널 길이가 100cm 정도에 불과해 주검을 굽혀서 묻었을 것으로 보이는 굴장 형식도 있다.
돌널무덤은 우리나라와 함께 시베리아, 중국 동북부, 일본 등지에서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단양 안동리, 진양 대평리, 부여 가증리·중정리·송국리, 서흥 천곡리유적 등이 있다.
*돌확
주로 부식물을 빻는 자그마한 절구이다.남방에의 중앙에 박혀있던 소형 절구
를 빼서 사용하거나 부식물을 빻은 대만 사용하려구 따로 만들었다.
*연자매
알곡 및 가루를 내는 도구로 연자방아라고도 부른다. 방아는 디딜방아·연자방아·물레방아의 순서로 발달해왔다.
간단한 곡식은 맷돌이나 절구, 매통을 이용하지만 대규모로 찧는 데는 방아가 필요하다. 디딜방아는 소출이 작지만 소나 물이 없어도 쉽게 설치할 수가 있어서 가장 많이 보급되었다. 반면 물레방아는 효율성은 뛰어나지만 물이 귀한 농촌에서는 설치가 어려웠다.
연자매도 윗돌과 밑돌에 쓰이는 커다란 돌을 구해야 하고 축력에 의존하는 부담이 있어 소가 귀한 농촌에서는 설치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작업량이 많기 때문에 널리 보급되어 개인이나 마을공동 소유로 이용했다. 그 원리는 윗돌의 중심에 구멍을 뚫고 나무막대를 가로질러서 소의 멍에에 고정시키면 소가 돌면서 돌을 돌리게 된다. 돌은 요철(凹凸)로 만들어져서 집어넣은 곡식이 돌아가는 돌의 압력에 눌려 으깨지면서 껍질이 벗겨지거나 가루가 나게끔 되어 있다.
보통 소를 모는 사람과 곡식을 넣는 사람 2명 정도가 있어야 작업이 가능하다. 오래 사용 하면 돌의 요철이 마모되어 작업능률이 떨어지므로 주기적으로 대장장이를 불러다가 정으로 돌을 쪼아서 요철을 보강해주어야 한다.
*말방아
연자마는 농기구의 하나로서,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직경 120㎝ 안팎의 둥근 돌로 웃돌을 세우고 이를 말이나 소가 끌어 돌림으로써 곡식을 찧는 연장이다. ‘연자방아’라고도 하며, 제주도에서는 주로 말이 끌기 때문에 ‘말방에’, ‘말가레’라 하는데 가레는 맷돌의 사투리이다.
따라서 연자매가 설치된 방앗간은 제주 사투리로 ‘말방이집’, ‘말방에집’, ‘말가레왕’ 등으로 부른다. 연자마는 제주도에서는 필수적인 농기구로, 개인이 소유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공동으로 제작하고 계(契)를 조직하여 관리 운용하였다.
*돗도구리
돗통시에서 기르는 돼지의 먹이통으로 사용되었던 돌그릇이다.돼지가 발아
도 쉽게 넘어지지 않도록 무거운 재료인 돌로 이용했으며 원형이나 사각형
으로 다듬어 사용했다.
*도구통
도구방에 또는 절구통이라고도 한다.적은 양을 도정,제분할때 사용하였다.
제주도에서는 전통적으로 곡물을 남방아에서,부식물은 돌확에서 빻았었다.
*보리통
말방아 곡물을 찧을 때 곡물이 깨어지지 않도록 물을 축였는데,이 때사용되
는 물을 보관하거나 직접 곡물을 넣고 불리는데 사용되는 것으로,말방아 주
위에는 반드시 보리통이 있었다.
*기름틀(봉애기)
기름의 재료를 볶고 압축시켜 기름을 뽑아내는 틀이다.나무로 된 기둥과 상
마루는 없어지고 받침돌만 남아있다.중앙에는 기름이 잘 흐르도록 골을내고
한쪽에 주둥이가 있는 경우도 있다.
*돌달구
땅을 다질때 무게를 분산시켜 작업의 능률을 올리는 도구이다.보통 돌덩이에
줄을 달아서 사용하며 2명이나 그 이상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 달구를 공중에
높이 올렸다가 땅에 떨어뜨려 집터나 묘지,둑 등을 다졌다.
*등경돌
송진이 많이 엉킨 소나무 조각인 관솔을 제주도에서는 솔칵이라고 한다.
솔칵을 올려놓고 불을 밝혔던 기둥형태의 돌로 원시적인 조명구이다.
*문지방석
문짝이 잘 열리고 서 있도록 골을 판 건축부자재이다.문지방은 공간의 경계
석 또는 칸막이 역활을 하는 것으로 문의 상징적인 부재이기도 하다.
*주춧돌을 발아래에...
*방사탑
신흥리 방사탑은 포구의 방파제 부근에 1기, 북서쪽 바닷가에 1기가 세워져 있다. 마을사람들은 탑을 세운 방향이 虛(허)하고 邪(사)가 비추기 때문에 탑을 세워 煞(살)을 막는다고 한다. 남쪽 포구에 있는 탑은 '큰개탑' 또는 '생이탑'이라고 한다. 탑은 포구밖 암반 위에 세워졌는데 하단부에는 바닷물에 잠길 때가 많다. 탑의 상단부 안 쪽은 50cm정도 패여 있어 새가 자주 앉는다고 하여 '생이탑'이라 하며, 상단부가 오목하므로 陰塔(음탑)을 뜻하기도 한다. 북쪽 '새백개'쪽에 위치한 탑을 '오다리탑'또는 '생이탑'이라고 한다. 이 탑은 역시 암반위에 세워져 있고 탑 위에 똑바로 세워진 길쭉한 돌은 陽塔(양탑)을 뜻한다
*제주초가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 일원에 있는 제주도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된 초가들.
[개설]
주거 양식은 부족이나 민족이 생존하면서 기후 조건에 따라 자연에 순응 또는 대항하면서 정형화되어 온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제주도의 초가는 바람과 싸우면서 살아온 제주인의 삶 그 자체를 잘 표현하고 있는 주거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형태]
1. 초가 지붕
초재(草材) 가옥은 자연적으로 자란 잔디·새·억새·갈대·왕골 등의 초근(草根) 식물을 이용하여 축조된 가옥을 말한다. 초재(草材)는 지면에서 수직으로 구멍을 파서 간단하게 목재로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지붕을 덮는 수혈식(竪穴式) 주거 단계에서 이미 주로 지붕 재료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농업 활동의 부산물로 얻어진 재료를 지붕의 재료로 사용하였으나, 제주도의 초가는 한라산 기슭 초원 지대에서 생산되는 자연적 초재(草材)인 새[모: 茅]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자연 초재이기 때문에 2년마다 한번씩 새롭게 이며, 그 시기는 10월~12월 초까지이다. 지붕을 이을 때는 자(子), 오(午), 묘(卯), 유(酉)의 천화일(天火日)을 피하여 지붕을 이게 되는데, 만일 천화일에 지붕을 손보게 되면 화재나 재앙이 집안에 생겨 멸망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초가 지붕은 집안에 중요한 의미를 지는 것이지만, 새를 펴고 그 위를 새줄로 그물처럼 얽어맨 지붕은 제주의 거센 바람에 대항하며 살아온 삶의 역사, 인내심을 표현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새줄은 동서에 따라 구별되는데, 동쪽 지역은 3㎝ 내외인 반면, 서쪽 지역은 4㎝ 내외로서 지붕의 중후한 감을 준다.
2. 돌담
제주도의 초가가 더욱 제주적으로 표현되는 데는 돌담이 있다. 바람·돌·여자가 제주의 삼다(三多)로 표현되는 것처럼, 돌은 제주 어느 지역에서나 구할 수 있는 재료이다.
돌담은 고려 의종(毅宗)[1148~1170] 때 제주에 부임한 김구(金坵)라는 판관이 밭의 경계가 애매모호하여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쌓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되어 밭이나 집의 울타리로 쌓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돌담은 바람의 속도를 완만하게 해주며 특유의 향토성을 반영하는 시각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 민가(民家)의 돌담 높이는 165㎝로 내륙 지방의 139㎝보다는 평균 26㎝ 높은 편이다.
또한 기단의 높이에 있어서도 제주의 경우 평균 15.8㎝로서 내륙 지방 민가 30~45㎝에 비하여 평균 37㎝ 정도 낮아 실질적으로는 돌담의 높이가 더욱 높아지게 되어 주거 공간은 외부에 대해서 폐쇄적이게 된다. 이는 풍해(風害)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3. 풍차와 벽체
제주도의 초가 형태에서 바람과 관련된 것 중에는 풍차(風遮)와 벽체가 있다. 풍차(風遮)는 상방(上房) 처마에 설치되는 것으로 각목으로 뼈대를 짠 뒤에 그 위에 새를 얹어 만들며 단순히 차양(遮陽) 기능뿐만 아니라, 비바람이 칠 때 풍차를 내려서 막고 햇빛이 비칠 때는 올려서 상방(上房)에 뜨거운 햇살이 비치지 않게 하는 기능이 있다.
벽체는 2중벽으로 되어 있는데, 나무와 흙으로 축조된 주벽체와 자연석 현무암으로 축조된 외부 벽체[덧벽]로 구성되어 있다. 주벽체의 골격은 가시나무·참나무·괴목 등의 온대 상록수를 사용하였고 골격과 골격 사이를 대나무 혹은 잔나무 가지를 새끼로 엮어서 흙을 발랐다.
외부 벽체는 구조와는 관계없이 암회색 다공질 현무암을 막쌓기법으로 축조되는데, 모서리 부분의 벽체는 가능한 한 각(角)이 생기지 않도록 둥글게 쌓는데, 이 또한 각(角)이 생기지 않는 만큼 바람의 영향을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다. 현무암으로 마감된 외벽은 중후한 느낌과 아울러 지역성을 잘 표출하고 있다.
4. 건물 배치
제주도의 초가의 특징 중의 하나는 건물 배치이다. 기본적인 건물 배치는 풍수지리에 의한 배산임수(背山臨水), 사국형성(四局形成)을 따르고 있다. 안거리(안채)를 중심으로 밖거리(바깥채), 모거리(안채와 바깥채에 대하여 모로 배치된 건물), 눌굽(낫가리를 놓는 장소)의 배치를 하고 있다.
이러한 건물 배치와 돌담 등으로 인하여 외부 공간 구성의 전개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리듬적인 전개, 즉 올래→안마당→안뒤의 공간 전개를 이루고 있다. 부모와 자녀와의 주거 형태에 있어서는 ‘안채=여성, 사랑채=남성’이라는 성별로 공간 분리되는 육지의 주거 형태와는 달리 ‘안거리=부모 세대, 밖거리=자녀 세대’라는 세대별로 공간 분리되어 제주도의 독특한 주거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현황]
1978년 11월 14일 제주도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된 초가는 성읍민속마을을 포함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전역에 수십 가옥이 있다. 그러나 제주시 일대에 소재하고 있는 대표적인 초가로는 강운봉 가옥(제주시 삼양2동 2067), 문시행 가옥(제주시 애월읍 하가리 672), 오경호 가옥(제주시 애월읍 하가리 977[하가로1길 11-4]), 조규창 가옥(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2462[신촌북1길 17-1])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제주도의 전통 건축 양식은 개발 논리와 현대적인 생활 양식의 편리함 때문에 점차 사라져 가고 있고 성읍민속마을을 비롯한 몇 개의 가옥이 제주도민속자료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실정이다.
*제주의 옹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에서 전통적으로 생산하여 사용하던 옹기.
[개설]
단벌소성으로 완성되는 그릇으로 음료수·생활용수·곡식·씨앗 등을 보관하던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유약을 칠하지 않은 옹기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간혹 유약을 칠한 옹기들도 있다. 노랑그릇, 검은그릇, 옹기, 도기, 지새그릇, 토기 등이 있다.
[역사 및 변천]
『남사일록(南槎日錄)』에 수록된 1488년의 최부(崔溥)의 「탐라시」에 “허벅 진 촌아낙네 물 길러 샘으로 가고”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1658년의 『장수당기(藏修堂記)』에는 “장수당기… 학사를 짓기 시작하여 김진용이 주관하였다. 재목은 한라산에서 벌채하여 바다로 운반하고, 기와는 도기(陶器)를 만드는 양질의 점토(粘土)를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제주도의 도토(陶土)가 공식 거론되는 것이고, 1658년에는 이미 옹기의 생산과 사용이 보편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익태(李益泰)의 『지영록(知瀛錄)』에는 이증(李增) 목사의 「탁라가」가 있다. 그 2행에 “집집마다 항아리에는 굿을 할 때 올릴 술이 있고”, 3행에 “허벅 진 촌 아낙네 구슬픈 방아노래 ”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1679년(숙종 5) 제주도에는 항아리 술을 빚고 있으며, 굿을 할 때 사용하였다는 것과 허벅 진 여자들이 오가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당시의 항아리와 허벅은 이미 실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1703년(숙종 29) 이형상(李衡祥)의 『탐라순력도』에는 허벅을 지고 다니는 아낙네들이 그림으로 등장한다. 1750년대 간행된 『제주읍지』에는 “대정현성 서북 소로를 5리 정도 가면 ‘가미수’에 제주옹기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옹점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00년 전 쯤에 현재의 대정읍 신평리 부근에서 대량의 옹기가 생산되고 있었으며, 전문적으로 유통되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옹기는 1900년대 들면서 절정기를 맞았고 1948~1959년경까지 폐쇄기에 접어들다가 1960년대 말에 맥이 완전히 끊겼다. 서귀포시 영락리 ‘제주도예촌’에서 1994년부터 복원에 착수, 2000년에 복원에 성공한 옹기들과 그에 따른 기능들이 공개되면서부터 제주옹기가 생산 보급되고 있다.
[만드는 법]
제주 점토를 가지고 ‘토래미’라고 불리는 흙판을 만들고 난 다음에 통(桶)으로 붙여 나무도구를 이용하여 두들겨서 만든다. ‘움집’이라는 흙과 돌로 만든 집에서 6~10개월 정도를 보관한다. ‘섬피’라고 하는 살아 있는 나뭇가지를 묶어 말린 연료를 이용하여 3일 내외를 밤낮으로 소성한다.
제주옹기는 크게 노랑그릇과 검은 그릇으로 구분된다. 노랑그릇은 유약 없이 불의 온도로 옹기의 표면에 유약의 효과를 낸다. 1200℃ 내외에서 산화소성(酸化燒成)을 한다. 그래서 옹기의 표면 색깔이 갈색으로 나타난다. 물·술·간장과 같은 섭취용 액체, 된장·곡식·씨앗·소금과 같은 물질을 보관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검은 그릇은 소성하다가 대략 700℃ 쯤에서 아궁이와 배연구를 막아서 불연소된 연기가 그릇에 스며들도록 한다. 이른바 환원소성(還元燒成)을 하는 셈이다. 그래서 그릇이 표면이 회색으로 나타난다. 물이나 곡식을 보관하며, 시루와 같은 음식 제작용구 및 향로 같은 제사용 그릇들이 주류이다.
[형태 및 종류]
제주옹기는 허벅을 중심으로 하여 큰 것들을 ‘웃자리’, 작은 것들을 ‘알자리’라 한다. 전자에는 허벅·통개(항아리)들이 주류를 이룬다. 후자는 작은 규모의 허벅과 뚜껑으로 쓰이는 ‘장태’, 작은 항아리인 ‘망대기’, 그리고 병과 단지류이다. 노랑그릇과 검은그릇에서 생산된 형태가 120여 종이 있다.
[의의와 평가]
석요는 세계에서 유일한 돌가마이다. 특히 ‘노랑굴’이라고 하는 무시유 옹기는 희귀하여서 도자사(陶瓷史)와 미술사에서 구명되어 재평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돌하루방
제주도 방언으로 돌할아버지라는 뜻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져서 수호신 구실을 해왔다. 한라산 일대에 흔한 용암석으로 만든 돌하르방은 용암석 특유의 다공질의 재질을 잘 살려 입체감을 더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쏘아보는 듯한 야무진 눈망울로 마을에 침입하는 잡귀나 잡인을 쫓아내었다. 벙거지를 꾹 눌러쓴 불룩한 뺨 옆에는 길쭉한 귀가 달려 있고 두 손으로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 험상궂은 얼굴에 미소마저 담뿍 담고 있어 보는 사람들에게 퍽 익살스런 인상을 주기도 한다.
돌하르방의 명칭은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달라 제주시내에서는 '우석목', 보성리(옛 대정)에서는 '무석목', 성읍에서는 백하르방이라고도 일컬었다. 또한 한학자 간에는 옹중·옹중석·돌부처·미륵이라고도 불렸다. 돌하르방의 기원을 몽골풍에서 찾는 주장도 있다. 제주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오백장군 석상
한라산 영실이라는 명승지를 배경으로 전해 내려오는 설문대할망과 오백장
군 신화 속에 어머니를 그리며 한없이 통탄하다가 바위로 굳어져 버린 오백
아들의 심상을 다양한 형태의 사람 머리 모양의 자연석들을 이용하여 오백장
군들을 형상화한 석상들이다.
*세월이 느껴지는 모습이네요.
*여러 형태의 바위와 담쟁이들의 조화.
*돌탑을 배경으로....
*부부의 모습.
*흐린날씨지만 우리 가족의 제주도 여행 첫번째 여행지 돌문화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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