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남파랑길 6코스(송정공원~창원 제덕사거리)14.1km
* 일 자 : 2020년 02월15일 (토요일) 맑음.기온 7도~15도
*누구와 : 찰떡부부
*코 스 :송정공원~웅천안골외성~안성마을~황포돛대노래비~흰돌매공원~
주기철목사님 기념관~웅천읍성~제덕 사거리
*남파랑길 1463km 시작을 6코스부터 시작합니다
부산구간 99.5km는 얼마전에 끝난 부산 갈맷길과 거의 같은 코스라 이번
남파랑길 부산구간은 생략하기로 하였습니다.
울산에서 08시40분 출발 송정공원 네비에 82km(1시간) 찍힌다.
주말이라 그런지 아침길은 시원하게 막힘없이 정확히 1시간만에 출발점
송정공원앞 고가차도밑에 주차를 하고 대망의 남파랑길 6코스(14.1km)
걷기를 시작합니다.
*6코스 시작점 "송정공원"은 부산시 강서구 송정동에 속한 소공원 시작점
안내도는 여기서 출발 급좌회전 하여 200m 전방에 있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마음으로 다짐합니다.
*남파랑길 6코스 안내도
*6코스 상세 지도
*오늘 걸어면서 꼭 눈에 담고가야할 주요 지점
*시작점 인증샷
*주위에 사람이 없어 각각 한장식 남겨요.
*이고가 도로밑에 주차공간이 많이 있어 여기에 주차를 하고 출발.이도로가
부산신항과 가덕도를 연결하는 "녹산산업대로"네요.
*출발 첫번째 길잡이 "웅천안골왜성"방향으로 여기부터는 창원 용원이네요.
*오늘 처음으로 바다를 보게 되네요.용원 앞바다
*망 산 도
망산도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말무섬
자연환경 · 생태계
ㆍ지형 · 지질 : 주된 구성암질은 화강섬록암으로 된 바위섬(고도 약 3m). 약 60여개의 귀갑석으로 덮혀 있음
ㆍ주요 해양생물 : 관찰된 해안무척추동물은 우점군락인 조무래기따개비 · 사각게 등 3종
ㆍ주요 식생 · 식물 : 바위섬으로 식생은 비교적 미약. 사철나무 · 팽나무가 우점하고 해안가로 모감주나무군락이 분포. 관찰된 식물은 보리밥나무 · 송악 · 갯강아지풀 등 13종
ㆍ주변 해역(해중) 경관 : 육지에 바로 인접하고 망산도 서남쪽 약 300m거리에 유주암 위치
*망산도.유주암 설명문
*지금은 유주암은 어디에 있는지 표시가 없네요.
*유주암을 찾아 보지만 어디에도.....
*망산도를 배경으로 출발 신고합니다.
*강서구 관광안내도
*망산도 앞에는 "유주정"정자가 있네요
*어느 횟집 수족관에 복으로 가득....
*진행중 맛나 보이는 도넛집 여기서 30년째 하고 있다는 사장님의 진절에
4,000원 5개 골라 주시네요 . 진행중 간식으로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추천드리고 싶은 가격.맛 이네요
*출발 두번째 이정표
*유주각은 해매다 찾지 못하고 용원교를 건너 갑니다.
용원교를 건너자 바로 아파트 뒤 둑길과 하천을 끼고 계속 진행 해야하는데 표시를 찾지 못해 알바를 했습니다.
*길 알바중 아파트 뒤쪽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측으로 진행 했습니다.
*신항 물좋은 온천을 지나고....
*진해신항 초등학교가 보이네요 .학교 뒤길이 정상진행 길입니다.
*앞에 보이는 둑길로 진행하면 용원교가 나옵니다.
*남파랑길 코스안내도.
*세번째 이정표 출발 2.4km 왔네요 웅천안골왜성 400m 남았네요.
*웅천안골왜성 가는길
*안골왜성 관광안내도
*멀리서 안골왜성을 봅니다.
창원 진해 안골왜성
대한민국의 사적(해지) | |
종목 | 사적 제53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1997년 1월 1일 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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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
창원 진해 안골왜성(昌原 鎭海 安骨倭城)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산27번지 외에 있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倭軍)이 쌓은 일본식 성곽(왜성)이다.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1938년 5월 3일 사적 제53호 『안골리성』으로 지정되었지만 그 후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 재평가에 의해 1997년 1월 1일에 국가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었고, 1998년 11월 13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시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가 축성을 지휘하였으며, 축성 후에는 축성을 지휘한 세 장수가 1년씩 교대로 수비를 담당한 일본 수군의 본거지였다.[1]
개요[편집]
성의 둘레는 594m, 성벽의 높이는 4∼7m 정도이며 성내의 전체면적은 약 5000평 정도의[2]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본식 성곽이다. 산의 지형을 3등분으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정상을 평평하게 깎은 뒤 혼마루를 이루고, 비탈을 깎아내면서 니노마루, 산노마루로 나누어서 따로 돌로 쌓고, 외곽(노보리이시가키)으로 각 부분을 연결하였는데, 외곽의 일부는 흙으로 쌓았다. 이 성곽의 축조에는 5만 명 가량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 만을 끼고 있는데, 이는 바닷길을 운용하기 쉽도록 해변까지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1] 성의 출입은 육지 쪽을 막고 바닷길을 이용하기 위하여 바닷가에 이르도록 해자를 파서 교통로로 이용하였는데, 해안으로 드나들기 위한 통로가 만들어진 것도 왜성이 가지는 특징이다. [3]
역사[편집]
1593년 1월 27일의 벽제관 전투 이후 일본군은 충돌을 피하며 강화 분위기로 돌아섰으며, 동년 2월경에는 서울에 결집한 제 장수들 사이에 경상남도 연안지대의 성곽 축성이 계획되었다.[4] 이후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으로부터 패전을 거듭하여 막대한 군사적 타격을 입고 일본으로부터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우리수군을 해상에서 억제하고 장기간 주둔을 위한 최후의 기지로 활용하기 위하여 1593년 남해안 연안일대의 요충지에 18개소의 왜성을 축성하였다.[2] 안골왜성도 이때 축성되었으며, 축성을 담당한 장수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이고 축성 후에는 축성을 지휘한 세 장수가 1년을 주기로 수비를 담당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제포진의 첨절제사 진영을 안골왜성에 두었다가 1625년 인조 3년에 옮겨가고, 다시 가덕진 소속의 수군만호 진영을 두었다. 안골왜성은 조선 수군이 이곳에서 철수한 뒤에는 폐성이 되어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생태통로를 넘어가요.
*나무에 걸려 있는 남파랑길 표식
*앞에는 안골포가 보이네요.여기서 길건너 우회전.
*네번째 이정표 "황포돛대 노래비"5.7km 가야 합니다.
*안골포를 배경으로 한컷.
*유치원이 어마어마 하게 큰데요.
*다섯번째 이정표 "황포돛대 노래비"1시간 23분 가야 하네요.
*이정표 앞에는 안청공원이 있어 여기서 휴식을 합니다.
*여기서 가볍게 커피와 진행중 싼도넛으로 잠시 간식타임을 가집니다.
*공원에 있는 논개상의 모습
*진행중 내려다 보이는 안골포 바다의 모습.
*여섯번째 이정표 급좌회전 진행
*장천마을 입구 표지석
*여기는 유독 대형 유치원이 많아요.
*다음은 "웅동만"볼려고 고개를 죽어라 넘어가요.
*안골포만의 포근한 모습.
*안성마을을 통과중....
*언덕위에 이쁜 커피집이 잘나 보이네요.
*고개마루에서 바라 본 "진해웅동경제자유구역"바다를 매립하여 조성
*웅동만이눈앞에....
*안골포 웅동만 한덩어리네요.
*어느 모텔의 돌탑으로 구성된 조경.
*언덕에는 해풍으로 피어난 황매화의 모습.
*목우언덕 한우 전문점인 모양인데 지금은 설렁한 분위기가 느껴지네요.
*진해 바다70리길과 겹치는 구간이 많이 있네요.
*여기는 산으로 둘러싼 포근한 살기 좋은 동네 같아요.
*일곱번째 이정표 노래비 39분 남았어요.
*"진철교" 대장천 불모산과 굴암산에서 내려오는 하천.
*지금이 정월달인데 이런일이 .....
*어어마한 고압전선탑.
*남파랑길 6코스 중간지점 안내도.
*햇살에 반짝이는 웅동만의 아름다운 모습.
*여덟번째 이정표
*119 소방소 차량두대 아담하네요.
*아홉번째 이정표
*영길마을 도로를 따라 진행중....
*건너편에는 이런 입간판이 있어요.
*영길마을 입구 소공원 여기서 노래비 800m 이정표가 있네요.
*지나온 길을 한번 각인해 봅니다.
*여기는 낚시가 잘되는지 길가에는 주차선이 있네요.
*이미자의 "황포돛대노래비"노래를 계속 들을수 있게 음악시설이 되어있네요
*바닷가로 산책로가 멋지게 조성.
*노래비를 배경으로.....
*나도 인증샷 하고 떠나요.
*웅동만의 모습.
*흰돌매공원 도착
하얀바위나 흰돌이 많아 옛부터전해 내려오는 백석산.흰돌매라는 옛지명
*열번째 이정표 "주기철목사 기념관"3.1km
*창원 신항 조감도.
*흰돌매공원 전경.
*공원에서 내려다 본 신항의 모습.
*공원 육교에서 흰돌매공원을 배경으로....
*창원 관광 아내도.
*웅포해전 설명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있는 웅천왜성의 동쪽 바닷가는 웅포해전이 있던 곳이다. 웅천왜성은 본래 ‘웅포성(熊浦城)’이라 하여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쌓았던 성곽인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점령한 후 일본식 성으로 고쳐 쌓았다.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 나중에 일본군의 장기 주둔을 위한 근거지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웅포해전
1593년 1월, 이순신은 두 차례에 걸친 선조 임금의 유서(諭書)를 받았다. 명나라군대가 평양, 황해도 그리고 한성(서울)을 차례로 수복을 하려고 진군하면 일본군이 도주할 것이므로,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군의 귀로를 차단하고 전멸시키라는 내용과, 명나라군 장수 이여송이 평양을 수복하고 계속 진군하니 수군을 정비하여 해전으로 지원하라는 내용이었다.
웅포해전은 조선 수군과 해안 요새에 포진하고 있는 일본군과의 전투이다.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바다로 유인하여 격파하려고 했지만 조선 수군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바다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본격적인 해상전투는 전개되지 않았다.
웅포는 부산진 해상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해안의 요새였고, 일본 수군은 함대를 선창에 정박한 채, 선창 안 동서쪽 산기슭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넓은 매립지가 보인다. 웅포해전은 이 부근에서 벌어졌다.
이순신은 2월 6일 출전하여 다음날 견내량에서 경상우수사 이억기의 함대와 합류했다. 2월 8일 삼도의 수군을 연합함대로 편성한 이순신은 거제 온천량 송진포(장목면 송진포)에서 이틀을 정박하고, 10일 출항하여 바로 웅포로 향했다.
웅포 앞바다에 당도한 이순신은 먼저 경쾌선을 보내 일본 수군을 포구 밖의 바다로 유인하려 했으나 그들은 나오지 않았다. 2월 12일 새벽에도 연합함대를 지휘하여 웅포에 이르러 공격하다가 물러나는 등 유인전술을 펼쳤으나 그들은 이번에도 조총만 쏠 뿐 추격해 나오지 않았다.
2월 10일과 12일 이틀간의 유인작전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바다에서 육상의 웅천왜성을 향해 포격을 가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전과가 있었다.
2월 18일 이순신은 다시 연합함대를 이끌고 웅천에 이르러 공격을 개시했다. 이번에도 일본군은 싸우려 하지 않았고, 이순신 함대의 동정만 살피고 있었다. 조선 지상군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수군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하고 우선 유인작전부터 폈다.
이순신은 사도첨사 김완(金浣)을 복병장으로 삼아, 여도만호 · 녹도가장 · 좌별도장 · 우별도장 · 좌돌격장 · 우돌격장 등을 거느리고 송도에 복병을 시켰다. 나머지 여러 전선은 포구 안으로 드나들게 하며 일본 수군이 바다로 나오게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 전함 10여 척이 조선 전함을 추격해 바다로 나왔다. 이에 유인하러 갔던 조선 전함이 물러 나오는 순간 복병선이 10여 척의 일본 전함을 포위하고 여러 가지 총통으로 포격을 가했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전함들은 재빨리 포구 안으로 되돌아갔고, 좌별도장 이설과 좌돌격장 이언량은 도망치는 전함 중 3척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 배에 타고 있던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했다.
웅포 상륙작전에서도 조선 지상군의 협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모두 바다로 끌어내지는 못했다. 일본군의 사기가 저하된 것을 안 이순신은 바다와 육상에서 동시 공격을 단행하기 위해 다시금 경상우도 순찰사에게 조선 지상군이 웅천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순찰사로부터 곽재우로 하여금 먼저 창원지역의 일본군을 토벌한 다음, 차차 웅천지역으로 진격하게 할 것이라는 답신을 받고 낙담했다.
2월 19일 연합함대를 소진포로 옮긴 이순신은 다음 날인 20일까지 이곳에 머무르면서 새로운 상륙작전을 구상했다. 그의 계획은 웅포에 있는 일본군의 저항력을 약하게 하여 포구 안에 깊숙이 감추어 둔 일본 전함을 공격하여 궤멸시킨다는 것이다.
2월 22일 두 승장(삼혜 · 의승)과 의병장 성응지는 서쪽의 제포로 상륙했고, 연합함대의 전함 가운데 일부가 동쪽의 안골포로 상륙했으며, 전함 15척이 주력부대를 형성하여 웅포로 돌진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일본군 다수를 사살했으나 웅천왜성의 견고함 때문에 왜성 안으로 진격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2월 28일에도 웅포를 공격했고, 3월 6일에도 다시 웅포를 공격했다. 웅포해전에서는 조소카베 모토치카(長曾我部元親)와 구와나 치카카쓰(桑名親勝)가 일본군을 지휘했는데 구와나는 이때 전사했다.
명나라 지원군은 소식이 없고, 장기간 계속된 전투로 병사들은 지쳐 있는 데다가 식량 · 화약 등의 병참물자 보급이 급했기 때문에 이순신은 4월 3일을 기해 삼도 연합함대를 해산하고 전라좌수영으로 귀항했다.
조정은 일본군이 부산 일대로 퇴각하니 수군은 해로를 차단하라고 명했고, 이순신은 이억기 · 원균 함대와 합류해 웅포 앞바다로 진격했다. 썰물로 인해 전함들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조선 전함끼리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제 6코스 끝이 보이네요.
*열한번째 이정표
*남해고속도로 제3지선 남문대교
*진해구 남문동 아파트 단지.
*남문동 신시가지 입구
*웅천초등학교의 모습.
*열두번째 이정표.횡단보도 건너 계속직진 600m
*우리를 유혹 하지만 우리는 계속 전진합니다.
*주기철목사 기념관 도착.
*십자바위 조형물
주기철 목사님께서 기도 하셨던 마산 무학산에 있는 십자바위를 창원시의 도
움으로 원형과 흡사하게 제작하여 기념관에 설치하였습니다.
*주기철목사 기념관
일제 강점기 마산 문창 교회와 평양 산정현 교회를 담임했던 목회자·설교자·순교자·민족 운동가.
[개설]
주기철(朱基徹)[1897~1944] 목사는 경상남도 창원시가 배출한 위대한 목회자이자 순교자였고 민족 운동가였다. 장로교 목사로 마산 문창 교회에서 목회하는 등 목회자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 정책에 반대하고 싸웠던 민족 운동가였다.
[생애와 활동]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熊川面)[웅읍면이라고도 함] 북부리(北部里)에서 주현성(朱炫聲) 장로와 조재선(曺在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인 1906년 고향 웅천의 개통 학교(開通學校)에 입학하여 7년간 수학하였다. 이때부터 주기철은 신식 교육을 접하게 되었고 민족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그 후 전국을 순회하며 계몽 강연을 하던 이광수(李光洙)와의 만남을 통해 영향을 받고, 신교육과 서양 문화, 특히 민족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신앙과 민족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1913년 정주로 가 오산 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정주·선천·안악 그리고 평양은 민족 교육의 중심지였는데, 정주 오산 학교는 그 대표적인 학교였다. 이곳에서 주기철은 민족의 지도자 조만식과 이승훈으로부터 신앙·애국 그리고 민족정신을 배우고 이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1916년 3월 오산 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5년에 설립된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안질로 시력이 약해져 수학하기 어려워지자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웅천으로 돌아온 그는 약 4년 반 동안 실의와 좌절의 날들을 보냈다. 20세가 되던 1917년에는 김해 출신 안갑수(安甲守)[1900~1933]와 결혼하였고, 후일 5남 1녀를 두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 정신은 웅천에까지 파급되었고, 주기철은 ‘웅천 20인 지도부’의 일원으로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지명 수배를 받고 처가로 도피했으나 체포되어 헌병대에 연행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의 사촌이자 오산 학교 동창인 주기용이 웅동면 계광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여 1년 6개월의 형을 살았는데, 주기철 또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연희 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웅천에서 칩거하던 주기철은 마산 문창 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 집회에 참석하여 목회자의 길을 결심했다. 1922년 3월에는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5년 9월 졸업하였다. 그 후 그는 부산 초량 교회[1926~1931], 마산 문창 교회[1931~1936], 평양 산정현 교회[1936~1944]에서 담임 목사로 봉사하였다.
주기철은 마산 문창 교회에서 시무할 당시인 1933년 5월에 부인 안갑수와 사별하였고, 2년 후인 1935년 오정모(吳貞模)와 재혼하였다. 1935년 이후 신사 참배가 강요되었을 때 이를 반대하여 1938년 2월 제1차 검속 이후 약 6년간 옥중에서 투쟁하였고, 1944년 4월 21일 밤 47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사 참배 반대와 투쟁]
일제는 전쟁 정책 수행을 위한 소위 ‘국민정신 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운동의 일환으로 1935년부터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였는데, 주기철은 신사 참배 강요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고 보아 이를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일제는 1925년 조선에서의 신사 제도의 총 본산인 조선 신궁(朝鮮神宮)을 서울 남산에 건립하고 전국 각처에 신사(神社) 혹은 신사(神祠)를 건립하였다. 1925년 당시 42개의 신사(神社), 108개의 신사(神祠)가 있었으나 1935년에는 52개처에 신사(神社)가, 272개처에 신사(神祠)가 세워졌고, 1936년부터는 기독교회에도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신사에 대한 참배만이 아니라 동방 요배(東方腰拜), 일본 국기 게양, 황국 신민 서사의 제창 등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1923년부터 1945년까지 22년간의 신사 설립 통계를 보면, 신사(神社)는 총 79개소, 신사(神祠)는 총 1,062개소가 각각 설립되었다.
한국의 기독교회는 처음에는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탄압이 심화되면서 회유와 변절이 일어났다. 천주교는 처음에는 신사 참배를 반대하였으나 1936년 5월에 이를 수용하였고, 감리교는 1938년 9월에 신사 참배를 종교 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장로교회 또한 회유와 탄압을 받았고,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27차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일제의 강압에 의해 불법적으로 신사 참배를 가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주기철은 신사 참배는 기독교 교리에 위배된다고 보아 반대하고 저항하였다.
이 일로 주기철은 평양 산정현 교회 시무 때인 1938년 2월 이후 네 차례 투옥되는 등 일제의 강요에 맞서 투쟁하였다. 즉 제1차 구속[1938. 2.~6.], 2차 구속[1938. 8.~1939. 2.], 3차 구속[1939. 9.~1940. 4.], 4차 구속[1940. 8.~1944. 4.] 기간은 모두 5년 4개월에 해당한다. 1944년 4월13일, 네 번째로 투옥된 지 3년 8개월이 지났을 때 그의 몸은 극도로 쇠잔해졌고, 병고와 심한 고문으로 건강을 잃고 병감(病監)으로 옮겨졌다. 이때쯤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유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여드레 후에는 아무래도 소천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몸이 부어올랐습니다. 막내 주광조에게 생명 보험을 든 200원으로 공부를 시키십시오. 어머님께 봉양 잘해 드리고 ……. 어머님께는 죄송합니다.” 4월 20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대면했을 때 “내 하나님 앞에 가면 조선 교회를 위해 기도하오리다.”라는 말을 남긴 그는 그 이튿날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남기고 밤 9시 47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주기철의 신사 참배 반대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신사 참배는 하나님의 계명에 반하는 우상 숭배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신사 참배는 개인의 신앙 양심과 신교의 자유를 억압·탄압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셋째,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민족 독립운동]
주기철은 장로교 목사였고 목회 활동에 충실했으나,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민족 독립운동에도 기여하였다. 주기철 목사의 학교 교육, 목회 기간 그리고 그의 구금에서 순교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담론(談論)은 ‘민족주의’였다. 특히 1910년 이후 식민 지배 하에서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저항적 민족주의’가 형성된다. 이 시대를 살았던 주기철 목사 또한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청년기와 학창 시절 그리고 목회 활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는 1919년의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그 이후에도 민족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특히 두 번째 투옥은 유재기(柳載奇)[1905~1949] 목사가 주도하던 농촌 계몽 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였다. 유재기 목사는 선구적인 농촌 운동가로 1938년 배민수(裵敏洙)·김성원(金聲遠)·박학전(朴學全) 등과 함께 농우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농민 협동 조합 운동이었다. 일제는 이 농우회를 단순한 농촌 운동으로 보지 않고 반일 애국 운동의 전위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주기철은 신사 참배를 반대했으나 농우회와 관련시킨 것은 그의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민족 독립운동과 유관한 활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주기철은 순수한 목회자였다. 그는 신앙 양심에 따라 신사 참배를 반대하고 싸웠으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반일 독립운동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은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그는 독립 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의의와 평가]
주기철은 건실한 장로교 목사였고 저명한 설교가였다. 동시에 그는 신사 참배에 대한 투쟁과 이로 인한 희생의 대표적 인물로 신사 참배 반대의 상징적 존재였다. 한국 교회가 신사 참배의 폭풍 아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처음부터 단호한 거부 입장을 표명하여 신앙을 지켰고, 이를 통해 신교의 자유를 고양하였다.
주기철은 민족 교육을 받고 독립운동에도 가담했으나, 신사 참배 반대는 민족적 동기나 정치적 동기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참된 믿음이 참된 애국의 길’이라고 믿었고, 바른 신앙의 길이 애국의 길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확신과 신사 참배 거부는 결과적으로 민족 독립과 민족 해방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기념관에서 나와 바라 본 웅천읍성의 모습
성곽 방어를 위한 투척용 석탄(石彈)이 발견된 웅천읍성
웅천읍성(경상남도 기념물 제 153호)은 북쪽의 봉동산과 자마산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산에 의해 가려진 분지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남북방향으로 긴 직사각형의 평지성이다. 세종 16년(1434년)에 처음 축조되었으며, 단종 1년(1452년)에 원 성벽에 붙여 더 넓게 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웅천읍성의 동벽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덧붙여 쌓은 동문지 아래에서 원 성벽의 남쪽 외곽에 서쪽으로 굽어진 해자를 확인하였다. 단종 1년(1452년)에 원성벽의 남쪽 해자를 메우고 동문지의 옹성 및 치성, 그리고 그 외곽의 새로운 해자를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의 부속시설로서 동서남북 사방에는 반원형 옹성문을 두고 읍성 네모서리와 동, 서문의 왼쪽 또는 오른쪽에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활이나 창으로 쏘기 위해 성벽 밖으로 돌출되게 쌓은 구조물인 치를 총 6개 배치하였다. 그리고 성벽의 외곽으로는 해자를 둘러 방어했다. 후대에 확장하여 덧붙인 성벽의 성돌에서 창녕부, 진주부민 등의 이름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읍성축조 시 인근 군현의 읍민과 힘을 합하여 성을 쌓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동문지 남쪽 해자 내에서 너비 4.6m의 석축시설과 목제기둥이 2열로 4개 확인되었는데 평소 다리를 걸쳐 놓았다가 유사시에 들어 올리는 조교시설로 보고 있다. 성내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를 비롯한 일부 백자편의 경우는 임진왜란 이전인 15, 16세기에 해당되며 대부분의 자기 조각의 경우는 16~17세기 이후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편, 성벽 인근과 해자 내부에서 다양한 크기의 둥근 돌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성곽 방어를 위한 투척용 돌로 알려져 있다.
축조과학
웅천읍성의 기초 부분 조성에 이어 흙을 파고 잡석을 다져 넣어 기초를 튼튼하게 쌓았다. 특히, 외벽 쪽 지대석은 지형조건에 따라 높낮이가 다른데 이는 읍성의 좌우로 흐르던 하천의 범람으로 인해 성벽의 유실을 막기 위한 축조수법으로 파악되고 있다. 성벽의 축조수법은 흙을 ‘ㄴ’자 모양으로 반반하고 고르게 다지고, 10cm 두께의 점토와 내벽쪽 1.6m 정도까지 축구공만한 크기의 돌을 3단 정도 깐 후 그 위에 두께 20cm 내외의 판돌로 된 지대석을 설치하였다. 성벽은 지대석 끝에서 약 20cm 정도 안으로 물리어 쌓았는데 아랫부분에는 200cm×160cm×150cm 정도 크기의 성돌로 세워쌓기나 눕혀쌓기하고, 위쪽으로 갈수록 이보다 작은 성돌로 눕혀 쌓았다.
북쪽의 원 성벽조사에서 세종 20년(1438년) 〈축성신도〉에서 법으로 정한 체성부의 축조양상과 동일한 축조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축성신도가 반포되기 이전인 세종 16년(1434년)에 연해읍성 축조 규정이 이미 적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원 성벽의 석축 내벽이 계단모양으로 조성된 것에 비하여 단종 1년(1452년) 덧붙여 쌓은 내벽은 수직되게 쌓은 점에서 이시기에 내벽을 쌓는 수법의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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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읍성 안내문
*열세번째 이정표
*웅천읍성의 상부의 모습
*읍성의 유일한 성문 "동문 견룡문"
*동문루의 설명
*읍성 안에서 바라 본 동문의 모습
*옹성의 모습.
*옹성의 설명
*웅천읍성의 해자조교
*읍성 주위의 모습
*잔디밭에서 꿀잠중.
*읍성에서 나오다 좌회전 직진중 시골 방앗간의 모습
*2번국도 진해대로 굴다리 통과.
*열세번째 이정표 끝지점 800m 다왔다.
*시골마을의 성황당 우리 마을에도 아직까지 음력14일 저녁에 마을의
안녕을 위해 올해도 제가 주제를 했는데...
잠시 후 농협주요소에서 좌회전 고개를 넘어면 제덕사거리 6코스 종점.
*6코스 끝지점 버스 정류소에서 바라 본 주위의 모습.
여기서 마침 지나가는 택시로 용원까지 1만원 택시비
*남파랑길은 아직정비 중이라 그런지 이정표 표시이 해파랑길과 달리 부족한
부분이 곳곳에 해파랑길과 같이 중요 지점에 띠를 이용한 표식이 멀리서도
잘보이니 건의 합니다.
*남파랑길 누적거리 : 113.6km
*거 리 : 울산집에서~송정공원 = 왕복164km
*경 비 : 통행료= 9.200원. 도넛=4,000원. 물과 음료수=3,000원.택시=1만원
*누적 지출경비 : 26.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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