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제 = 02월 17일 목요일 맑음 종일 -2~1도
*누구와 = 임무용,최현숙(부부)
*코 스 = 우수영광관지~충무마을~충무사~암화도입구~학상마을회관 16.5km(4시간32분소요)
*이번 서해랑길 걷기는 조금의 도피성으로 출발 친구들과 보름전날 마을 동제를 모시고 화요일날 동제음식으로
점심을 같이 했는데 그중 한친구가 수요일 코로나확진 판정을 받아 같이한 우리도 걱정이 되어 식구들과 격리를
하고 있다 별증상이 없은것 같아 우리 부부는 과감히 집을 떠나자 어차피 집에서도 격리니 둘만의 걷기로 서해랑길
출발합니다.그래도 서해랑길내내 별일없어 다행 집에왔어 키트 검사를 하니 음성으로 나와 현재는 일상생활로
돌아 왔습니다.
조금은 무모한 도전을 한것 같기도 하고 대단한 부부 맞아요.
코스개요
- 조선시대 전라수군기지였던 전라우수영과 이순신장군과 조선수군, 의병들의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는 코스
관광포인트
-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삶을 되새길 수 있는 문화공간 '법정스님생가터'
- 충무공 이순신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 '충무사'
- 매달 4,5일에 열리는 전통시장 '우수영5일장'
- 조선시대 수군진성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는 '전라우수영성지'
- 망해산 정산, 명랑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망해루'
여행자 정보
교통편) 진도공용터미널에서 농어촌 버스 승차 '문내면사무소' 하차 도보이동
- 종점: 해남군 화원면 산호리 학상마을회관
*울산출발 4시간을 달려 10시30분에 13코스 출발지 우수영국민관광지 도착 출발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바람도 심하고 추위도 영하의 날씨라 오늘일정 만만치 않겠다 생각이 더네요.
단단히 준비를 하고 걷기를 시작합니다.
*케이블카 승강장을 지나 매표소입구도 지나고 주차장 오른쪽 땅끝해남 자전거길 안내판 기둥에 13코스 시작점
패널이 부착되어 있어요 .낮게 부착되다보니 조금 찾은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13코스 출발 인증샷하고 갑니다.
*주차장에서 우측오름길 조금 후 다시 좌측으로 진행.
*우수영 유스호텔 방향으로 진행.
*우수영 유스호텔앞으로 통과 도로따라 진행.
*유스호텔앞 통과 도로따라 내려감.
*잠시 후 삼거리에서 우측도로로 진행.
*서바이벌장 지나 좌측 임도길 진입 .
*잠시 후 다시 좌측으로 청룡산 정상 방향으로 진행.
*청룡산 정자 오름길.
*능선의 정자도착 여기서 우측 능선으로 진행.
*진행길 능선에서 바라 본 진도 녹진방향의 모습.
*능선에서 진도를 뒤로하고.....
*간간히 체육시설도 눈에 띄네요.
*여기는 어제 눈이 왔다더니 잔설이 보이네요.
*청룡산 능선을 돌아 다시 충무마을로 내려 오네요.
*음달에는 제법 잔설이 있네요 눈이 얼어 미끄럽네요.
*앞에서 우측으로 마을길따라 진행.
*충무마을 안길로 진입.
*충무마을회관앞 통과.
*마을을 지나 모텔방향으로 진행.
*충무마을입구 표지석.
*모텔방향 오름길진행.
*모텔을 지나 앞에 보이는 옛 충무사 화장실 우측으로 진행.
*옛 충무사 방향 좌측으로....
*충무사 옛터 지금은 우수영으로 충무사 이전.
*옛 충무사를 내려와 굴다리 밑으로 통과.
*현재 우리가 걷고 있는 길과 함께 강강술래길도 같이 가네요.
*굴다리 지나 우측으로 진행 횡단보도가 없어 조심히 도로를 건너 해안가 데크길 진행.
*도로건너 해안가 데크길 진행 진도대교 방향의 울돌목 역사의 흔적이 가득한 곳이죠.
*데크길 끝에서 좌측으로 진행.
*우수영항의 모습 .
우수영
右水營요약 조선시대 수군의 주진(主鎭) 가운데 하나.
왜구와 접촉이 빈번하고 해안선이 길어 해안방어의 어려움이 극심했던 경상도와 전라도에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는 주진을 각각 2군데에 설치했는데, 서울에서 보아 각 도의 왼쪽, 즉 동쪽을 담당한 주진을 좌수영이라 했으며, 오른쪽인 서쪽을 담당한 주진을 우수영이라고 불렀다.
전라도우수영은 처음에는 무안에 두었다가 1465년(세조 11) 이후 해남으로 옮겼으며, 경상도우수영은 처음에 거제현에 두었다가 1604년 거제현 두룡포(지금의 통영)로 옮겼다. 전라도우수영 밑에는 27개 읍진(邑鎭)이 있었으며, 경상도우수영은 33개 읍진을 관할했다.
경상우수영의 소속 읍진에는 전선 24척, 거북선 12척, 병선 36척, 사후선(伺候船) 70척, 장졸 8,638명, 영·진(營鎭)의 방수군(防水軍) 2만 2,932명, 첨격사부(添格射夫) 2,532명, 선후운사부(先後運射夫) 5,804명, 차비군(差備軍) 100명 등이 있었다. 전라우수영에는 전라우수사 1명, 우후 1명, 대변군관 170명, 선장 7명, 포고관(布告官) 2명, 장교 28명 등의 인원과 전선 2척, 거북선 2척, 방선 1척, 병선 3척, 해골선(海鶻船) 1척, 사후선 8척 등의 군선이 있었다.
그리고 소속 읍진에는 전선 29척, 거북선 5척, 병선 33척, 방선 13척, 사후선 65척, 왜선 2척, 장졸 7,443명, 입방군(入防軍) 1만 3,950명, 윤번군(輪番軍) 1,114명 등이 있었다. 1907년(융희 1) 군대해산령에 의해 폐지되었다.
*우수영항이 강강술래길에 포함 소개글.
*우수영항 매표소 여기서 제주도와 주위 도서로 운항 매표소.
*도로를따라 진행.
*우수영 문화마을입구 .
*법정스님의 생가터.
*우수영문화마을 골목이 관리도 역활도 모두 사라져 황폐화 되어 가고있어 안타깝네요.
*진행길 우측으로 조그만 소공원 .
*쌈지공원 나무 몇그루에 관리도 부족하고 주위에 폐가도 늘어나고.....
*어릴적 우리들의 모습.
*황량한 문화마을 골목길 통과하고 있어요.
*진행길은 정면으로 진행.
*해남 명량대첩비가 여기에.....
명량대첩비
鳴梁大捷碑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955-6 |
해남 |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는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688년(숙종 14) 3월 이곳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다. 이순신이 해남 전라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 해협을 흐르는 급류를 이용하여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함선을 격침 혹은 격파하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숙종 임금은 명량대첩의 의의를 기리고 그 뜻을 후손에게 영원히 전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비문은 1686년에 쓰인 것이나 비가 건립된 것은 2년 뒤인 1688년이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박신주가 건립했다.1) 비석은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얹고, 구름무용무늬를 새긴 머릿돌을 얹었다.
비문은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해서체로 글씨를 썼으며,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횡서로 된 제자 ‘통제사 충무 이공 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 12자를 써서 1688년 3월에 건립했다.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패전, 만행, 약탈 관련된 기록이나 자료, 유적지는 모두 소각하거나 철거한다는 정책을 시행했다. 다수의 일본인이 문화재를 도굴하거나 왜란 관련 유적지를 훼손, 철거하는 데 앞장섰다.
1942년 전라남도 경찰은 명량대첩비 등을 철거하라는 조선총독부의 지령을 받았다. 경찰은 인부, 목수, 학생들을 동원하여 높이 2.67미터, 폭 1.14미터나 되는 비석을 500미터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옮겼으며 비각은 흔적도 없이 제거했다.
조선총독부는 한때 대첩비를 아예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서울로 옮겨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우수영 지역 유지들은 명량대첩비를 되찾아 복구하기 위해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고 전라남도 경찰부와 조선총독부에 수소문한 끝에 대첩비의 소재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교통운반 수단이 여의치 않았던 당시로서는 대첩비를 우수영으로 옮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결국 미군정청(美軍政廳)에 협조를 요청하여 비석을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긴 후 목포까지는 열차로, 목포에서는 다시 선박을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으로 가져왔다. 1947년 이곳 해남 남쪽 끝 해안지역 학동리에 비석을 다시 세웠다.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이어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을 짓기 위한 모금 운동이 시작되었다. 크게 부족한 자금 마련을 위해 풍물패를 조직하여 나주 · 무안 등 8개 지역을 순회하기도 했고 대첩비 탁본을 수백 장 만들어 여러 관공서와 학교를 돌아다니며 판매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50년에야 비각이 완공되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그동안 해남 충무사 경내에 있던 비석과 비각은 2011년 3월 본래의 설립지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왔다. 해남 명량대첩비는 1969년 6월 16일 보물 제503호로 지정되었다.
명량대첩비 비문 (해남 충무사)
1597년 통제사 이공(李公)이 수군을 거느리고 진도 벽파정 아래에 주둔하고 있다가 명량으로 들어가는 목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이로 인하여 적은 다시 해로를 통하여 전라도 지역을 넘보지 못하였고 그 이듬해에 적은 마침내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분이 충무공이요 그의 전과 중에서 명량의 싸움은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 공이 처음에 전라좌수사로 있다가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비장한 각오로 병졸과 함께 서약을 행하고 경상도 지역으로 들어가 침입하는 적군을 맞아 옥포, 당포, 고성의 당항포에서 모두 적은 군대로써 많은 적군을 상대로 싸워 번번이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한산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나라에서는 공을 통제사에 임명하고 삼도의 수군을 다 지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그대로 한산도에 몇 해 동안 주둔하게 되어 적은 감히 바닷길에 나올 생각을 갖지 못하였다. 이해에 적은 크게 병력을 동원하여 두 번째의 침략을 감행하였다. 과거의 실패를 만회할 생각으로 전력을 기울여 해상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때 마침 공은 모함을 입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있었는데 나라에서는 사태가 위급함으로 다시 공을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이에 앞서 원균이 공을 대신하여 적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배와 장비와 병졸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한산도도 적에게 빼앗겼다. 공은 백지상태로 된 현지에 단신으로 부임하여 흩어진 병졸을 모아들이며 부서진 배를 수리하여 가까스로 십여 척을 마련하였다. 이것으로 명량해협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군은 큰 배와 많은 군대로 바다에 가득히 몰려왔다.
공은 여러 장군에게 명령하여 배를 명량으로 들여와서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곳은 좁은데다가 마침 세차게 밀려오는 밀물의 파도가 매우 급했다. 적은 상류를 이용하여 산이 내려 누르는 듯이 아군을 향하여 몰려들었다. 이를 본 우리 군대는 모두 겁에 질려서 어쩔 줄을 몰라 했으나 공은 힘을 내어 병졸을 격려하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장병들은 이공과 함께 결사적으로 싸웠고 배는 나는 듯이 적선들 사이로 출몰하여 대포를 쏘아대니 대포의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바닷물도 끓어오르는 듯하였다. 이러는 동안 적의 배는 불에 타고 부서져서 침몰되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적은 마침내 크게 패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적의 전함 오백여 척을 쳐부쉈고 적장 마다시도 죽였다.
임진왜란 중 연안 해주 등지에서 승전이 있었다 하나 이는 모두 가까스로 그 성을 지킨 것에 불과하며 공과 같이 한 해역을 도맡아 독자적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일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노량의 싸움은 중대한 결전이었고 또 위대한 승리였으나 공은 이 싸움에서 목숨을 바쳤고 적은 이 땅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정부에서는 왜란을 평정한 공적으로 공을 우두머리로 논정하여 선무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벼슬을 좌의정에 추증하고 노량에 충민사를 지어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공의 이름은 순신, 자는 여해, 아산 출신이다. 명량대첩비는 남방 인사들이 전적지인 명량에 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마련한 것이다. 원비 숙종 11년(1685) 3월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판돈녕 부사 이정영이 쓰고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를 쓰다.
1980년 9월 문화재위원 임창순 역술하고 김병남 쓰다
*충무사의 모습.
*우수영 골목길 진행.
*새마을금고 앞에서 좌측으로 진행.
*새마을금고 좌측으로 진행 곧 바로 좌측의 우수영5일 장터 가로질러 진행.
*5일장터을 벗어나 우측 도로로 올라감.
*도로에서 좌측으로 진행 .
*다음에 만나는 교차로에서 2시방향으로 진행.
*포장로를 따라진행.
*앞의 작은 언덕에서 우측으로 진행.
*이길이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와 같이 하네요.
*진행길 언덕위에 망해루라는 루각이 있어요.
*해남 망해루의 모습.
망해루(望海樓)는 해남군 문내면 서상리 망해산 정상에 있는 전라우수영의 망루이다.
전라우수영 망루는 망해루 외에도 구 충무사의 남장대[정해루(靜梅樓)]와 북장대가 더 있었다.
망해루는 서상리 망해산 정상에 있는데 성과 함께 성루로 건설되었다.
건립된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밝혀진 건립 시기는 1665년 무렵이다.
2004년 발굴 조사 결과 망해루의 면모가 밝혀지고 2006년 복원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망해루 [望海樓]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망해루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출발 앞에는 문화재 발굴이 진행 중이네요.
*망해루에서 내려와 다시 서외마을을 통과함.
*서외마을 표지석에서 우측으로 진행.
*앞의 골목길 끝에서 우측으로 진행.
*계속 갈림길에서 11시방향으로 진행.
*다시 마을길을 벗어나 해안가 진행 바람이 엄청불어 느끼는 체감온도는 엄청 추워요 바람을 안고가니 더욱 힘드네요.
*주위에는 섬들이 많이 보이네요 .
*계속 직진 산밑에서 좌측으로 진행.
*작은 언덕을 올라가요.
*언덕넘어 다시 해안가 진행.
*계속 직진진행.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꺽어 진행.
*농로길따라 계속 직진진행.
*하늘과 맞다은 작은 언덕을 바라보면서 걷기의 좋은 코스 아름다운길입니다.
*민가도 별로없는 한적한 농로길 진행.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
*다시 도로와 합류 여기서 좌측으로 조금 후 도로건너 우측으로 진행.
*도로건너 우측으로 진행.
*아래로 작은 해안가 마을이 보이고 길따라 내려감.
*마을길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
*마을길 벗어나 앞에 보이는 건물앞에서 방조제길로 진행.
*건물앞에서 여기 방조길진행.
*방조제길 끝에는 해남 복터진마을 체험장이 대단위 공사를 하고 있어요 방조제 끝에서 여기를 통과해야 하는데
방조제끝에 길을 막아 공사를 하고 있어 앞으로 어떻해 될지 사전에 이야기가 있어야 할것 같은데요.
*대단위 공사를 하고 있네요 완공시 통과가 가능 할련지.......
*아름다운 해안가 모습.
*다시 도로와 합류 여기서 우측으로 진행.
*도로따라 조금 진행 후 다시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
*해안가 도로따라 진행 잠시 후 우측으로 진행 농로길 한참을 진행.
*농로길 한참을 진행 다시 도로와 합류 우측으로 진행.
*막다른 해안가 도착 여기서 좌측으로 진행.
*도로따라 진행 꺽어지는 도로에서 우측으로 진행.
*시멘트포장 농로길따라 진행.
*첫번째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
*계속직진진행.
*막다른 길에서 우측으로 진행.
*한참을 진행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 좀 후 다시 좌측으로 진행.
*길가의 잔디가 바람에 일정하게 누워 뭔가를 보여주네요.
*여기가 학상마을회관앞 13코스 종점 도착.
*도로건너 학상마을회관의 모습.
*서해랑길 13코스 종점이자 14코스 시작점 학상마을회관앞 도착
오늘은 최악의 날씨로 고생을 좀 했네요 바람도 심하고 기온도 영하로 내려가고 몸첵크도 해야하고 여러모로 힘든 13
코스 였네요 (4시간32분소요)
아직 조금의 여유가 있어 14코스를 오늘 2시간정도 더걷기로 하고 곧바로 14코스 출발합니다.
출발.도착 차량 주행거리 = 울산~우수영국민관광지 =373km
*누적 주행거리 =4,544km
*2차 통행료 = 울산~진도 = 14,700원
*누적 통행료 = 186,900원
*13코스 거리 =16.5 km .누적거리 = 216.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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