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갈맷길 걷기

부산 갈맷길3-2코스(동구도서관~영도대교)11km

문수산 아래 2017. 1. 23. 18:14

*날  자 : 2017년 01월 19일(목요일). 맑음.3~7도

*누구와 : 두팀 부부(4명)

*코 스 :동구도서관~초량성당~용두산공원~국제시장~영도대교(11km)

           4시간 55분


*평일인 1/19일 우리두팀은 갈맷길3-2코스 동구도서관에서 영도대교까지

 걷기위해 울산에서 출발.11시동구도서관도착 출발합니다.

 집사람과 같이하다 보니향상10km 정도의 거리가 적당한것 같아 코스에

 상관없이 거리기준으로 진행을 하고 있어요.

 그래도 부부가 같이할수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아요.

 갈맷길이 끝날때에는 집사람도 지금보다는 더 긴거리를 같이할수 있겠죠

 

*동구도서관에서 출발하면서 바라본 범1동의 모습

*도서관을 내려오면서 바라본 벽화그림.

*내려올때 그림작업을 하고 있어 옮겨봤습니다.

*성북전통시장 골목을 통과해요.

*성북시장 관통 후 좌측도로를 따라 성북고개로 향하여...

*계단을 통과해요

*오래된 계단을 배경으로.

*좁은 골목길을 통과

*시내에 위치한 다보사

*산복도로변에 위치한 유치환선생의 빨간우체통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시기에 활동했던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교육자.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와 애수, 강인한 의지가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대표작으로 <깃발>·<행복>·<생명의 서>·<일월>·<바위>등이 있다. 해방 직후에는 '생명파 시인'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특별시 문화상, 자유문학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부산시 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아버지 준수(焌秀)의 8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극작가 치진(致眞)은 그의 형이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豊山中學]에 입학했다. 이때 형이 펴낸 동인지 <토성>에 시를 발표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한의원을 경영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1926년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이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학년 때 중퇴했으며, 사진관을 경영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된 뒤 교육계에 종사했다. 1937년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주재했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펴냈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옌서우 현[煙首縣]에 가서 농장관리인으로 일하다가 8·15해방 직전에 귀국하여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일원으로 참여했다. 해방 직후 생명에의 열애를 노래한 점에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불렸다. 1954년 경상남도 안의중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어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경주고등학교·경주여자중학교·대구여자고등학교·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7년 교통사고로 죽었으며 묘지는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에 있고,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 공원, 통영 남망공원 등에 시비가 세워졌다.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 35년 동안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펴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특히 대표시 <깃발>(조선문단, 1936. 1)은 연민과 애수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상징이다. 또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절망의 애수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시세계는 첫 시집 <청마시초>(1939)와 제2시집 <생명의 서>(1947)에 잘 나타나 있다.

<청마시초>에 나타난 허무는 정신편력과 더불어 다양하게 변모하는데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의 죽음의 의미는 2가지로 나뉜다. 첫째, 일제 말기의 극한상황과 결부되어 자학적 분노와 생명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이는 결국 종교적 자아로 승화되고, 둘째, 인간의 숙명인 죽음이 역설적으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수로 나타난다. 이는 제6시집 <보병과 더불어>(1951)에 실린 종군시(從軍詩)들에 이어져 전장에서 애수에 젖기도 한다.

한편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실린 시는 만주에서 쓴 것이 대부분이며, 여기에 실린 <생명의 서>와 <일월>에서는 허무와 고독을 극복한 강인하고 웅건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후에 대표시 <바위>로 이어져 순수한 본질적 자아로 복귀하려는 의지로 나타났다. 그는 후기에 와서 허무에 회의를 느껴 이를 극복한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이루지 못했다. 시인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은 문학은 무엇보다 첫째 그것을 읽어 줄 독자가 없을 것"이라 했듯이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집으로는 <울릉도>(1947)·<예루살렘의 닭>(1953)·<청마시집>(1954)·<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류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다.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8년 자유문학상, 196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부산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산복도로 전망대에서.

*시원한 부산시가지의 모습

*잘정돈된 산책로.

*아련한 옛생각을 하게하는 마중물이 있어야 작동을 하죠.

*초량성당의 모습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는 천주교 부산교구 소속 성당.

6·25 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부산에 모여 들어 신자 수가 증가함에 따라 동구 지역의 신자들을 사목하고, 지역 주민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초량성당을 설립하였다.

1951년 미국인 메리놀 외방선교회 선교사인 카놀 요셉(Josep-W. Connors)[한국명 권약슬(權若瑟)] 신부가 초량에 정착한 후, 대구교구에 본당 설립을 신청하였다. 대구교구에서는 카놀 신부의 요청을 수락하고 1951년 5월 1일자로 본당 설립을 인가하며 초대 본당 주임 신부로 카놀 요셉 신부를 임명하였다. 요셉 카놀 신부는 적산 가옥 두 채를 구입하여 초량공교회로 사용하였다.

1956년 11월 천주교 부산교구에서는 처음으로 임마꿀라타 꾸리아[쁘레시디움의 상급 기관]를 창단하여 동구 지역 외교인 선교에 앞장섰다. 1957년 5월 30일 초량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62년 2월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설립하여 부산 지역 노동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성당 건립 필요에 따라 성당 신축 기성회를 조직하여 모금을 하고 전 신자들의 노력으로 성당 건립이 완공되었다. 이에 1962년 8월 30일 신축 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1964년 1월 본당의 소식지인 『겨자씨』를 발간하여 현 천주교 부산교구의 주보인 『가톨릭 부산』의 모태가 되었다. 초량성당에서 1962년 7월에 수정성당이, 1967년 10월에는 구봉성당이, 1969년에는 화교성당과 영주성당이 분리해 나갔다. 1985년 12월 부산 지역 본당에서는 처음으로 ‘지속적인 성체조배회’를 발족하여 다른 본당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신자들의 성체 신심 함양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미사는 일요일에는 오전 6시 30분, 10시 30분, 오후 7시 30분 세 차례 있다. 평일에는 월요일 오전 6시 30분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에는 오후 7시 30분, 수요일에는 오전 10시에 있다. 토요일에는 초등부를 위한 오후 4시, 중고등부와 특전 미사를 겸해 오후 7시에 있다. 본당 지역의 인구 감소로 세례식은 연 1회 거행하며 10여 명의 신자가 세례를 받는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지역의 낙후와 인구의 감소, 그리고 신자들의 노령화로 인해 본당의 복음화 사업이 어렵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갖고, 그들에 맞는 사목 계획을 잡고 있다. 2013년 현재 평신도사도직협의회를 중심으로 사도히, 반석회, 빈첸시오회, 연도회 등의 단체들이 있다. 교역자로는 주임 신부 1명, 수녀 2명, 사무장 1명 등이 있다. 교우 수는 3,151명이며, 수호성인은 예수 성심이다. 성당은 대지 1,060㎡ 정도이며, 주요 건물로는 성당을 비롯하여 사제관, 수녀원 등 건평이 2,034㎡ 정도이다.

초량성당은 설립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동구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훌륭히 완수하면서, 다방면에 걸쳐 천주교 부산교구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특히 천주교 부산교구 최초로 꾸리아, 가톨릭노동청년회, 지속적인 성체조배회 등을 발족하여 신자들의 신심과 사회 교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부산의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약간의 차이나 색깔이 나네요.

 중국과의 외교 창구, 상해문.상해거리 *
동구 초량동 부산역 앞 큰길인 중앙로 맞은편 화교학교를 중심으로 중국영사관(1884년 8월 설치)이 있던 자리를 구한말에는 청관이라 했다. 중앙동의 용두산 주위는 왜관이 있었고, 초량동에는 중국조계지가 설치되어 왜관에 대칭되는 말로 청관이라 한 것이다. 당시 주위에는 중국(청국) 사람들의 점포를 겸한 주택이 형성되었다. 그 점포가 있는 거리를 청관거리라 했다. 그때의 청관거리는 초량 앞바다가 매축되기 이전이어서 청관거리 동쪽인 오늘날의 부산역 자리는 푸른 소나무가 우거지고 흰모래가 펼쳐진 백사청송(白沙靑松)의 바닷가였다. 그 당시는 초량에서 영주동으로 가려면 청관거리를 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청관거리 점포에는 비단, 포목, 양복지, 거울, 꽃신 등 중국의 상해 등지에서 수입해온 상품이 많았다. 소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창고에 쌓아두고 지방상인에게 도매도 크게 했다. "비단장사 왕서방 마음이 좋아 띵 호와"의 노래 그대로 영남 지방의 혼수감은 이 청관에서 많이 나왔다. 그러나 1900년대 이후 일본세력이 초량까지 밀려오자 청관거리도 그 빛을 잃어갔다.
 
광복과 한국전쟁이 일어나 미군이 진주하고 중앙동의 텍사스촌이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되자, 어느새 초량의 청관거리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청관거리란 이름을 잃어가면서 텍사스거리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갔다. 그때 여인들은 그 뒤 국제결혼을 하여 이곳을 떠난 사람도 많다.
 
주둔 미군이 줄어들자,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외국선원과 미국군함의 병사들이 찾아들었다.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상품을 판매하는 관광상품거래의 명소로 바뀌어 갔다. 1990년대에 들어 공산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자 러시아의 선원과 보따리 장수들이 이곳을 찾아 상가는 성업을 이루었다. 이 거리는 청국인에서 미국인, 외국선원, 그리고 이제는 러시아인들, 여러 외국인들을 거쳐 장사로, 환락가 이제는 관광상품의 명소로 역사의 장을 바꾸어가고 있다.
 
* 상해의 문 건립 배경 *
최근 부산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중국 상해와의 유대를 기념하고 1884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화교의 집단거주지인 이 지역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최근 상해의 거리로 명명하고 이전의 문화적 풍류를 되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새천년을 맞아 부산시와 상해시가 공동으로 "상해의 문"을 건립하였다.

*요런 조형물도 물지게

*뻥뛰기 할아버지도.

*지금 시골5일장에서는 가끔 볼수있죠.

*40계단입구에서.

 40계단은 부산 중구에 위치한 문화명소이다. 한국전쟁당시 이부근에 거주하던 피란민, 부두노동자들의 애환을 기리기 위해 국민은행 중앙동지점부터 40계단까지의 거리를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로 조성했다.[1]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오프닝신에 등장하여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40계단 표지석을 배경으로...

*백산 기념관도 있네요.

 백산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곳, 백산기념관 *
용두산 공원에서 중앙로 방향 계단을 내려오면 백산기념관이 있다. 백산기념관은 백산 안희제 선생의 항일 독립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백산선생께서는 이 기념관이 있는 자리에 백산상회를 설립 운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다.
 
선생께서는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여 대한민국임시 정부와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에 활동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독립운동가의 상호 연계 구축에도 심혈을 기울여 백산무역주식회사를 국내 항일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현재 기념관은 1995년 8월 15일 개관하여 부산·경남지역 독립운동의 교육장이 되고 있으며, 전시장에는 선생의 유품과 당시 구국운동 자료 등 8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 백산 선생에 대하여 *
백산 안희제 선생은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민족교육, 민족기업육성, 항일언론등 다방면에 걸쳐 국권회복을 위해 국내·외에서 활동한 민족독립운동가였다. 자는 태약, 호는 백산, 본관은 강진이다. 백산 선생은 어려서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러일전쟁(1904)과 일제의 을사늑약(1905) 강제체결 이후 백산선생은 계몽주의로 전환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신문학을 통한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부산의 대표명소 용두산공원 과 전망대의 모습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용두산 일대에 있는 공원.


[건립 경위]
용두산 주변은 조선 시대에 초량 왜관이 있었는데, 1876년에 개항하면서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되었다. 1899년 용두산 공원(龍頭山公園) 부지 내에 신사가 설치되었다.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일본인들을 위한 휴식 공간의 필요로 인해 이곳에 공원이 조성되었다. 1940년 1월 3일 용두산 공원으로 고시되었다.


[변천]
1948년 11월 17일 화재가 발생하여 용두산 공원 내에 있던 신사가 소실되어 철거하였으며 1954년에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공원에 있던 판자촌이 전소하였다. 1957년 12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 공원이라고 명칭을 변경하였다가, 1966년 2월 9일 용두산 공원으로 명칭을 환원하였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1973년 부산 타워가 건립되었다. 1993년 5월 22일 부산광역시 기념물에서 해제되었다.


[구성]
용두산 공원은 국유지 6만 781㎡, 시유지 4,480.8㎡, 사유지 3,857.2㎡로 총 6만 9119㎡로 이루어져 있다. 용두산 공원은 부산 근대 역사관 쪽에서 들어오는 길과 광복로를 통해 에스컬레이터로 들어오는 길이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용두산 미술의 거리가 있고, 그 동쪽에는 체육 시설이 있다. 미술의 거리를 지나 북서쪽으로 가면 계단이 나오는데, 계단의 동쪽에는 초량 왜관비가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공원비가 있고 공원의 가운데 광장이 있으며, 중앙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높이 12m·폭 3.8m·길이 3.8m]이 있다.

광장의 남쪽에는 꽃시계[직경 5m]와 종각[높이 11.3m·부지 321㎡·면적 60.84㎡], 교육 헌장비가 있고, 동서쪽에는 백산 안희제 선생의 흉상[높이 4m·너비 2.45m], 구 충혼탑[높이 7m·넓이 10m·폭 3m], 부산 시민 헌장비가 있다. 북쪽으로는 용탑[높이 4.2m·폭 1.45m]과 전시관, 부산 타워[높이 120m], 팔각정이 있다. 이외에도 문학비 9개로 이루어진 시의 거리, 파고라, 정수사, 주차장 등이 있다.


[현황]
용두산 공원은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2가 1-2번지에 있다. 용두산이라는 지명은 산의 모양이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를 건너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매해 5월에 연등 축제, 12월에 제야 시민의 타종식 행사 등이 열린다. 부산시설공단 용두산공원사업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공원은 24시간 이용이 가능하며, 주변에는 보수동 책방 골목, BIFF 광장, 남포동, 자갈치 시장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용두산공원 과 전망대를 배경으로

*이순신장군의 동상과 전망대의 모습

*갈맷길 도보인증샷도장이 안찍혀 사람으로 인증샷.

*관리구청에서 도장관리가 되었으면 합니다.잉크가 없어요.

*용두산공원의 범종

*은행나무길 따라 내려가요.

*부산근대 역사관입구만 보고 통과


 

부산근대역사관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지어진 식민지 수탈기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해방 후인 1949년부터는 미국 해외공보처 부산문화원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부산시민들의 끊임없는 반환요구로 미문화원이 철수하면서 1999년 대한민국정부로의 반환과 함께 부산시가 인수해 2003년 7월 부산근대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이 건물이 침략의 상징이었던 만큼 시민들에게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부산근대역사관은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 부산의 근대거리관, 특별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전시실은 부산의 근대 개항, 일제의 부산 수탈, 근대도시 부산을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제2전시실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조선 수탈과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주제로 한 상설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부산근대역사관에 마련된 부산의 근대거리 전시관은 일제강점기 부산의 중심지였던 대청동 거리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특별전시실에서는 '사진엽서로 떠나는 근대기행', '근대의 기억, 학교에 가다' 등과 같은 근현대사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의 전시가 열린 바 있다. 그밖에 부산시민들을 위해 '교실에서 배워보는 부산의 근대역사 이야기', '엄마, 아빠와 함께 떠나는 근대 문화유적 답사'와 같은 사회 교육 및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별도의 관람료는 없다.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04에 위치한다.


*보수동 책방 골목의 안내판


 


8.15광복 직후 오늘날의 국제시장이 태평양전쟁으로 주택가가 철거되어 빈터로 놓여 있을 때 일본인이 남기고 간 책을 난전을 벌여 팔았는데, 그 장소가 개인소유가 되자, 보수동 앞길로 책장사들이 한 두 사람 자리를 옮겨 앉게 되면서부터 오늘의 골목이 형성되는 바탕이 되었다. 6.25전쟁으로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는 피난민이 가져온 귀중한 책을 생활을 위해 팔고, 피난 온 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의 필요로 사들이는 수요와 공급이 늘어나자 본격적인 가건물이 서게 되어 헌 책방 골목이 형성 되었다. 한때는 개인이 가진 헌 책들이 이 헌 책방 골목에 모여들어 진귀본이 나오면서 헌 책방의 가건물은 보다 더 늘어났다. 당시에는 약 70채가 되는 책방으로 중.고등학교 학생과 대학생들이 많이 찾아 들어 학생들이 요구하는 헌책이 사들여지고 팔려가곤 하였다. 60년대 초 출판문화가 거의 자리를 잡지 못했을 때는 학생과 지식인들이 자신의 헌책을 내다 팔고 다시 남들이 보던 헌책을 되 사오거나 헌 잡지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생겨난 보수동 헌 책방골목은 지금까지 전국에 몇 안 되는 유명한 책방골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헌 책인 경우 책의 상태나 흥정에 따라 값이 매겨진다.


*부평동 깡통시장 출입구의 모습.

 [정의]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 2가에 있는 전통 시장.


[건립 경위]
일제 강점기 도시 발달에 따라 일상생활 용품을 공급하는 공설 시장으로 부평정 시장(富平町市場)이 1910년에 개설되었다. 1914년에 발포된 「시장 규칙」에 따른 최초의 공설 시장이었다. 공설 시장이란 20인 이상의 영업자가 한 곳에서 주로 곡물 및 식료품을 매매하는 장소를 말한다.


[변천]
8·15 광복 후 미군 전시 통제 물자가 들어오면서 국제 시장과 함께 ‘돗대기시장’ 혹은 ‘도떼기시장’[한꺼번에 흥정하여 매매한다는 의미로 추정]으로 불리게 되었다.

1947년에 부평정(富平町)이 부평동(富平洞)으로 개칭되면서 부평정 시장이 부평 시장이 되었다. 6·25 전쟁 이후에 군용 물자와 밀수입된 상품을 판매하면서 깡통 시장[미군 부대에서 나온 통조림 등 깡통 제품을 판매]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2005년 12월 5일에 전통 시장으로 인정되었다. 2008년 2월 28일에 국제 시장, 창선 상가, 만물의 거리와 함께 상권 활성화를 위한 ‘국제 마켓 타운’을 결성하였다.


[구성]
부평 시장의 대지 면적은 3만 597㎡, 매장 면적은 2만 9942㎡이며, 총 1,008개의 점포가 있다. 주 판매 상품은 잡화, 수입 용품이며, 편의 시설로 화장실[1동 4칸]이 있다. 각종 죽을 파는 죽집 골목과 외제 상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깡통 시장이 있다.


[현황]
2012년 12월 현재 직영 점포가 146개소, 임차 점포가 8,862개소 있으며, 총 종사자 수는 2,130명이다. 상인 조직으로 부평시장상인회가 있다. 부평 시장은 깡통 시장, 도떼기시장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많은 수입품들이 전국적으로 공급된 곳이다. 현재 상권이 다소 위축되었으나 양주, 의류, 장식품, 액세서리, 패션, 잡화, 그리고 외제 전자 제품을 취급하고 있으며, 부평 시장 내 깡통 시장의 상인들을 위주로 구성된 월드 밸리는 백화점에 없는 다양한 품목을 갖추고 있다. 또한 부평 시장 일대의 장터 먹거리도 유명하다. 부평동 족발 골목의 냉채 족발, 비빔 당면 골목의 비빔 당면, 충무 김밥, 파전, 빈대떡, 유부 전골 등 음식점과 노점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외에도 부평동 한복 거리, 자갈치 시장, 용두산 공원, 남포동 BIFF 광장, 40계단 문화 관광 테마 거리, 보수동 책방 골목과 인접하여 유동 인구가 높아 상권이 활성화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깡통시장에서 비빔당면과 김밥.만두국으로 점심해결.

*국제시장도 통과.


 개요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대청동, 창선동 일대에 걸쳐있는 상설시장. 해방 이후 모여든 귀환동포들의 노점이 모이면서 이루어진 시장으로 '도떼기 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6·25전쟁과 함께 밀려온 피난민들의 생계 터전이기도 했으며, 각종 군용물자가 유통되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전체 6 공구로 된 지금에 이르렀고, 2008년에는 인근 시장과 연합하여 국제 마켓 타운을 결성했다.


역사

시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948년에 단층 목조건물 12개동을 건립하여 '자유시장'이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하면서부터이다. 6·25전쟁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피난민이 모여들고, 미국의 구호품과 군용품이 유통되면서 국제시장은 인근 광복동·남포동의 도심상가와 더불어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 상업기능의 중추 역할을 했다.

국제시장

꽃분이네

속칭 '케네디 시장'이라고도 부르는 창선동1·2 가의 의류도매 및 덤핑 시장은 6·25전쟁 당시 구호물자로 들어온 옷가지들이 많이 거래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보세 의류품 등이 싼 값으로 팔리고 있다. 한편, 1950년 12월과 1953년 1월의 대규모 화재와 새로운 경제질서의 확립으로 규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부산권의 도·소매시장으로 그 세력이 축소되고 있다.

1968년 1월에 목조건물 3개동을 제외한 나머지 9개동이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되었고, 상가대지 0.007㎢(2,177평)가 불하되어 1,489칸의 점포가 개인에게 등기되었다. 1969년 1월 사단법인 국제시장번영회가 설립되었고, 1977년에 비로소 정식으로 시장개설허가를 받았다. 2002년 시장 현대화 사업을 실시하면서 이후 2005년까지 공구를 나누어 아케이드를 설치했으며, 2008년에는 인근 부평시장, 만물의 거리, 창선상가 등과 함께 국제 마켓 타운을 결성했다.


현황

2층 상가 형태로 건축되어 있으며 대지 면적은 7,197m2, 매장 면적은 9,497m2이고, 총 580개 점포가 들어서 있다. 주력 품목은 기계공구, 주방기구, 의류이며, 미로처럼 얽힌 골목에 각종 점포들이 들어서 있다. 도·소매 시장이며, 가방·문구·공예품을 판매하는 1공구, 주방기기·칠기·안경 등을 판매하고 있는 2공구, 침구류·양품을 판매하는 3공구, 포목점·주단점·양단점 등이 있는 4공구, 가전제품·기계·공구 등을 판매하는 5·6공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함께 근처에 구제시장 골목, 팥빙수 골목, 화장품 골목, 먹자골목, 소품골목, 깡통 시장 등이 들어서 있다. 2016년 기준 약 1,500명 정도가 국제시장과 인근 일대를 중심으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2014년 개봉한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이 천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6.25를 전후한 한국 근대사에서 부산과 국제시장이 차지하던 역할을 알지 못하던 세대에게 당대의 풍경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면서 부산지역 관광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자갈치시장의 현대식 건물.


 요약 제2차 세계대전 및 6·25전쟁 이후 일본 등 해외로부터 귀국한 동포와 월남한 이북동포들이 현재 위치에서 노점상을 형성해 장사를 해오다가 1969년 공유수면 매립과 법인설립인가를 얻어 부산어패류처리조합이라는 사단법인체로 발족했다. 1970년 개장해 연근해에서 어획되는 모든 어패류가 집결되는 한국어패류종합백화점으로 성장했다. 1985년 4월 화재로 시장 전체가 타버렸으나 1986년 1월 현대식 시설로 보수·개선해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산의 10대 명소 중 하나로 지정되어 국내 관광객뿐만 아니라 멀리 동남 아시아까지 알려져 부산 관광길에 꼭 한번씩 찾는 곳이다. 1층은 활어·전복(패류)·선어·잡어, 2층은 건어·식품·회센터, 3층은 조합사무실·중매인사무실·수산관계사무실로 이루어졌다.


부산항의 남항에 위치한 3층 건물로, 연근해 어패류를 위판할 수 있는 부산수산업협동조합 및 잠수기수산업협동조합도 함께 들어서 있어 입지적으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및 6·25전쟁 이후 일본 등 해외로부터 귀국한 동포와 월남한 이북동포들이 현재 위치에서 노점상을 형성하여 장사를 해오다가 1969년 공유수면 매립과 법인설립인가를 얻어 부산어패류처리조합이라는 사단법인체로 발족했다.

1970년 개장하여 연근해에서 어획되는 모든 어패류가 집결되는 한국어패류종합백화점으로 성장했다. 1985년 4월 화재로 시장 전체가 전소되었으나 1986년 1월 현대식 시설로 보수·개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산의 10대 명소 중의 하나로 지정되어 국내 관광객뿐만 아니라 멀리 동남 아시아까지 알려져 부산 관광길에 꼭 한번씩 찾는 곳이다.

연건평 7,256㎡(1층 2,668㎡, 2층 2,902㎡, 3층 1,686㎡), 건물전장 149.6m이다. 이 시장은 활어·전복·선어·잡어·동식당·서식당·식품·건어부의 총 8개 부서로 되어 있으며, 1층은 활어·전복(패류)·선어·잡어, 2층은 건어·식품·회센터, 3층은 조합사무실·중매인사무실·수산관계사무실로 이루어졌다.

1일총물동량은 활어 8t, 선어 10t, 전복 및 패류 3t, 잡어 4t 등 총 25t, 연간총물동량은 활어 2,880t, 선어 3,600t, 전복 및 패류 1,080t, 잡어 1,440t 등 총 9,000t, 연간매출액 약 170억 원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로도 각종 어패류를 공급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및 중구청에서 관리 감독하고 있으며, 앞으로 복지시설을 비롯한 각종 시설 보강과 유통구조 개선 등으로 발전이 더욱 기대되고 있다.


*자갈치시장을 배경으로.

*우리부부도 인증샷.

*자갈치시장에서 영도다리로 가는길.

*영도다리 유라리 광장.

영도대교는 부산 최초로 건설된 연륙교이며 한국 최초의 '일엽식 도개교'형식의 다리이다. 그리고 일제시대와 전쟁의 수탈과 애환 그리고 이산과 실향의 역사가 담겨있는 다리이다. 개통 당시에는 다리가 하늘로 치솟는 신기한 모습을 보기 위하여 부산을 비롯, 인근 김해·밀양 등지에서 6만 인파가 운집했다.[2]

다리가 개통될 당시 육지쪽(중앙동) 다리 31.30m를 하루 2~7차례 들어 올렸으며, 도개속도는 고속(1분 30초), 저속(4분) 2가지가 있었다.

1935년 6월 25일부터는 다리를 들고 닫는 시간을 15분으로 줄였으며, 개통이후 교통량의 급증으로 도개 횟수를 점차 축소하다가 1966년 도개중단 직전에는 오전·오후 각 1회씩 여닫았다.

공사비는 착공 당시 360만원이 소요되었다.

1935년 2월부터 영도에 전차가 개통되면서 교량위로 전차가 다니기도 했으나, 교량이 고정된 이듬해 1967년 5월 2일 폐쇄되었다.

영도대교 부근에는 당시 부산 제일의 명물이었던 도개식 영도대교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기 위한 ‘도개식 영도대교 기념비’와 6.25 당시 피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대중가요‘굳세어라 금순아’의 시대적 배경을 담아 건립된 ‘현인노래비’ 등이 있어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2] 2013년 11월 27일 영도 대교가 재개통 되면서 도개 시간이 바뀌었다. 하루 한번으로 다음과 같다. 


*유라리광장에서 영도대교를 바라보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종점마을 이라는 의미를 붙여 만들어진 이름이란다.

부산에 살지만 여기와서야 처음본 이름이다.


*오늘의 목적지 영도대교의 모습

*피난민의 모습 조형물앞에서 ....





*3-2:구간 누계거리:65.7km+11km=76.7km

*3-2:구간 누계시간:27시간00분+4시간55분=31시간55분시간

*3-2:구간 집에서 이동거리누계:59km

       236.1km+59km=295.1km

*3-2*구간 경비누계 : 점심 : 27,000원:택시료9,000원

        종합:462,000원+36,000원=498,000원.....잔금:20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