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사찰여행

강원도 고성 금강산 화암사 순례

문수산 아래 2020. 10. 10. 18:37

*2020년 10월 09일 ,금요일,맑음,11~20도

*막내 여동생부부 백두대간 미시령에서 진부령까지 마지막구간 완주를 축하해 주기위해 첫째여동생과

 우리부부는 아침08시 울산을 출발 4시간30분을 달려 고성 금강산 화암사에 도착 남은시간에 화암사

 를 한바퀴 돌아본다.

 2006년에 시작한 백구대간완주를 오늘 더디어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700여km  무사히 완주를 축하

 합니다.

 저는 2000년에 백두대간 완주.낙남정맥.낙동정맥.갈맷길.해파랑길등 완주 결과 물을 만들었네요.

 

*울산에서 달려달려 도착한 강원도 고성 금강산 화암사 일주문 도착.

*2주차장에 주차 후 길을 따라 올라가요.

*인자한 부처님의 주위에 불상들이....

*화암사 경내의 팔각정.

*경내에 고성 관광안내도.

*화암사 경내에서 바라 본 앞산의 수바위.

 금강산 화암사 남쪽300m 지점에는 수바위라는 왕관모양의 우람한 바위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바위 밑에 위치한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이 시주를 청하기

 어려웠는데.어느 날 스님 두 분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있으니 그 곳을 찾아

 끼니때 마다 지팡이로 흔들라 고 애기하자,잠에서 깬 스님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수바위에

 올라 노인이 시킨 대로 했더니 신기 하게도 두 사람 분의 쌀이 쏟아져 나왔고 그 이후로는 식량 걱정 없이

 편안히 불도에 열중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몇년이 지난 어느 날 화암사를 찾게 된 한 객승이 화암사 스님들은 시주를 받지 않아도 수바위에서

 나오는 쌀로 걱정 없이 지낸다는 사실을 알고 세 번 흔들어서 두 사람분의 쌀이 나온다면 여섯 번 흔들면

 네 사람분의 쌀이 나올 것 이라는 엉뚱한 생각에 다음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아침 일찍 수바위로 달려가

 지팡이를 넣고 여섯 번을 흔들었더니 쌀이 나왔던 구멍에서 피가 나왔고 객승의 욕심에 산신의 노여움

 때문인지 그 후로는 수바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진다.

*화암사 입구의 요사체 지금은 보수 공사가 한창 이네요.

*화암사 대웅전의 모습.

시대건립시기성격유형소재지분야

고대/삼국
769년(혜공왕 5)
사찰
유적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종교·철학/불교

요약 강원도 고산군 토성면 설악산(雪嶽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진표가 창건한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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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용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769년(혜공왕 5)진표(眞表)가 창건하여 이름을 금강산 화엄사(華嚴寺)라고 하였다.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 금강산으로 들어온 진표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鉢淵寺)를, 서쪽에 장안사(長安寺)를, 남쪽에 이 절을 각각 창건했는데, 화엄사라고 한 까닭은 이곳에서 《화엄경》을 강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화엄경》을 배운 제자 100명 가운데 31명은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머지 69인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았다고 한다. 또 진표는 이 곳에서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地藏庵)을 창건하여 이 절의 부속 암자로 삼았다고 한다.

그 뒤 941년(태조 24)월영암(月影庵)을 창건했으며, 1401년(태종 1)지장암을 동쪽으로 옮기고 미타암(彌陀庵)으로 이름을 바꿨다. 1623년(인조 1) 불에 타자 1625년 중건하였다.

1628년에는 광명(廣明)이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안양암(安養庵)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1635년 산불이 일어나 다시 불탔다. 이에 동쪽 20리 지점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1644년(인조 22)에야 옛터에 중건하였다.

1662년(현종 3)에도 화재가 있어 중건하였고, 1716년(숙종 42)에는 산적들이 불태워 버렸다. 이듬해 승려들은 동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무릉도(武陵島)에 초옥을 짓고 거주하다가, 1721년(경종 1) 옛 절터로 돌아와 중건하였으며, 해성(海城)은 안양암을 중수하였다.

1760년(영조 36) 대웅전과 향각(香閣), 승당이 불 타자 승려들이 협력하여 이듬해 승당을 세웠고, 1762년에 대웅전과 향각을 중건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화성 도한(華城 道閑)이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21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放光)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제조상궁(提調尙宮) 최(崔)씨를 이 절에 파견하여 도한을 궁궐로 데려 오도록 하여 경위를 듣고 크게 감격하여 이 절을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으로 삼았으며, 요사채 2동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미타암의 화응전(華應殿)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음보살상과 정조의 친필 병풍 6폭, 연(輦)을 하사하고, 절의 사방금표(四方禁標)를 정해 주었다. 이로써 이 절은 창건 이래 가장 큰 사역(寺域)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60년(철종 11) 산불로 암자까지 모조리 소실했으며, 춘담(春潭)이 중심이 되어 중건에 착수하였다.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며 시주를 모으고 왕실의 도움을 받아 화엄사와 안양암을 중건했으며, 수봉(穗峰)은 탱화를 조성했다.

"1864년(고종 1) 다시 산불로 소실하자 불타지 않은 승당에 임시 법당을 마련하고 지냈으며, 1868년에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현왕탱화를 조성 봉안하였다."

그리고 화재를 면하고자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남쪽의 화기를 지닌 수암(秀巖)과 북쪽의 코끼리바위의 맥이 상충하는 자리를 피하여 100m 아래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1872년수봉이 새 터에 법당과 영각(影閣), 누각, 요사채를 중건했으며, 1882년(고종 19) 자허(耔虛)와 선월(船月)이 철원 장구사(長久寺)에서 아미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1893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안양암이 붕괴되었고, 1894년축성(竺星)이 중수했으며, 1909년영운(影雲)이 안양암에 칠성각을 건립하였다.

1912년에는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전국 31본산 중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된 뒤부터 화암사라는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했다. 1915년 9월 다시 불타서 1917년 중건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때 크게 파손되어 건물 1동만 남게 되었다.

1953년 휴전 뒤에 건봉사 극락암에 있던 한 비구니가 정착하여 머물렀다. 1986년에는 주지로 부임한 양설(良說)이 중창하여 다시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 삼성각, 인법당(因法堂), 금강루(金剛樓), 일주문, 미타암(彌陀庵), 요사채 등이 있다. 특별한 문화재는 없다.

수암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수암에는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끼니 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면 2인분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기를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욕심 많은 한 객승이 이를 보고 ‘3번 흔들어 2인분의 쌀이 나오면, 300번 흔들면 200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팡이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구멍에서는 피가 나왔고, 이후 쌀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화암사 종각.

*대웅전 마당에 있는 석탑의 모습.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대운전 뒤쪽의 부속건물.

*계곡에도 아직 단풍을 볼수가 없네요.

*화암사 삼성각.

*화암사에서 바라 본 수바위의 모습.

*저멀리 동해바다가 보이네요.

*렌즈를 당겨 한컷.

*백두대간 완주를 축하 합니다.

*고생 했습니다.

*요약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가장 크고 긴 산줄기.

목차접기

  1. 개설
  2. 연원 및 변천
  3. 내용
  4. 현황
  5. 의의와 평가

개설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에 이르러 우리나라 땅의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2005년 1월 1일부터 시행되고 2009년 3월 5일자로 개정된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에서 “백두대간이라 함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금강산·설악산·태백산·소백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큰 산줄기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산경표에 따르면 백두산부터 원산, 함경도 단천의 황토령, 함흥의 황초령, 설한령, 평안도 영원의 낭림산, 함경도 안변의 분수령, 강원도 회양의 철령과 금강산, 강릉의 오대산, 삼척의 태백산, 충청도 보은의 속리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인 신경준이 쓴 산경표(山經表)에서 한반도의 산줄기를 대간과 정간, 정맥으로 나타낸 체계를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산경표는 1913년 활자로 인쇄된 책자가 많이 남아 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던 나라 땅의 산줄기〔山經〕는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이루어졌다.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여러 갈래로 갈라진 산줄기는 모든 강의 유역을 경계지었다. 크게 나누어 동·서 해안으로 흘러드는 강을 양분하는 큰 산줄기를 대간·정간이라 하고 그로부터 다시 갈라져 하나하나의 강을 경계 짓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을 정맥이라 하였다.

내용

대간을 이루는 주요 산은 기점인 백두산(2,744m)으로부터 동남쪽으로 허항령(虛項嶺, 1,401m), 포태산(胞胎山, 2,289m), 최가령(崔哥嶺, 1,527m), 백사봉(白沙峰), 두류산(頭流山, 2,309m) 등 2,000m 정도의 높은 산으로 이어져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역을 동·서로 분계하였으며 북동쪽으로 장백정간(長白正幹)을 갈래하였다.

서남쪽으로 후치재〔厚致峙, 1,335m〕, 부전령(赴戰嶺, 1,445m), 황초령(黃草嶺)으로 이어져 압록강의 남쪽과 동해로 흘러드는 분수기를 이루며, 다시 남쪽으로 차일봉(遮日峰, 1,743m), 철옹산(鐵瓮山, 1,085m), 두류산(頭流山, 1,324m)으로 이어져 대동강의 남쪽 정맥인 해서정맥(海西正脈)을 서남쪽으로 두었다.

원산 서남쪽으로 이어진 대간은 마식령(馬息嶺, 788m), 백암산(白岩山, 1,110m), 추가령(楸哥嶺, 752m)으로 연결되어 임진강의 북쪽 유역의 경계를 이루었고 한강 북쪽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시점을 이루었다.

동해안을 끼고 국토의 척추인 양 이어진 대간은 금강산(金剛山, 1,638m), 진부령(陳富嶺, 529m), 설악산(雪岳山, 1,708m), 오대산(五臺山, 1,563m), 대관령(大關嶺, 832m), 두타산(頭陀山, 1,353m), 태백산(太白山, 1,567m)으로 이어 흐르다가 남쪽으로 낙동강의 동쪽 분수 산줄기인 낙동정맥(洛東正脈)을 형성시켰다.

대간의 본줄기는 내륙 깊숙이 소백산(小白山, 1, 421m), 죽령(竹嶺, 689m), 계립령(鷄立嶺), 이화령(梨花嶺, 548m), 속리산(俗離山, 1,508m)으로 뻗어내려 한강과 낙동강을 남북으로 분수하였다. 이로부터 추풍령(秋風嶺), 황학산(黃鶴山, 1,111m), 삼도봉(三道峰, 1,177m), 덕유산(德裕山, 1,614m), 육십령(六十嶺, 734m), 영취산(靈鷲山)까지 금강의 동쪽 분수산맥을 형성하며 섬진강의 동쪽 분수령인 지리산(智異山, 1, 915m)에서 백두대간은 끝난다.

백두대간은 장백정간(長白正幹)과 함께 서쪽으로 해안선까지 많은 ‘골’과 ‘들’을 이루며 뻗어 내려간 13개의 정맥, 즉 청북정맥(淸北正脈)·청남정맥(淸南正脈)·해서정맥(海西正脈)·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한북정맥(漢北正脈)·한남정맥(漢南正脈)·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금북정맥(錦北正脈)·금남정맥(錦南正脈)·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호남정맥(湖南正脈)·낙동정맥(洛東正脈)·낙남정맥(洛南正脈)과 연결되고 있다.

이들 산줄기의 이름은 강줄기의 이름에서 얻어진 것이며, 호남정맥과 해서정맥은 호남지방과 해서지방이라는 지명에서 산줄기 이름이 유래하였다. 산과 물이 하나로 자연을 이루고, 언어·습관·풍속 등과 의식주의 다양함이 산줄기와 물줄기의 가름으로 세분화되어 생활 철학을 탄생하게 하였다. 산줄기마다 지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어 부족국가의 영역을 이루었고 삼국의 국경을 비롯하여 조선 시대의 행정경계를 이루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자연스런 각 지방의 분계선이 되었다. 이 땅의 지세(地勢)를 파악하고 지리를 밝히는 데 있어서 백두대간은 그 근본이 된다.

현황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백두대간보호지역이 지정되어 있는데, 이는 백두대간 중 특별히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된 지역에 대하여 산림청장이 지정 고시하는 지역을 말하며, 산림청장이 환경부장관과 협의하여 핵심구역과 완충구역으로 나누어 보호하고 있다. 이 가운데 핵심구역은 백두대간의 능선을 중심으로 일정 구역을 지정하며, 완충구역은 핵심구역의 연접지역으로서 핵심구역의 보호상 필요한 지역을 지정하도록 되어있다.

의의와 평가

고지도 상에 나타나는 백두대간의 의의는 한반도 산지체계의 근간을 이룬다는 점이고 이를 통해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한반도 전체의 영토, 정치, 인문사회적 측면에까지 민족 정서적 관점에서 삶의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형적으로는 정간과 정맥이 우리나라 하천의 주요 발원지가 되며, 이것을 중심으로 국토의 물줄기가 갈라지게 되어 현대적으로 의미에서 유역권 구분의 기본이 되고 있다. 정신적으로는 한반도의 역사가 백두대간 중심의 지맥에 뿌리를 둔다는 역사적 의미도 강한 편이며, 우리 고유의 땅의 흐름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자연관을 대표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백두대간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한반도 전체의 생물군집의 진화와 퇴보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경관생태학적으로도 백두대간은 지형적 연결성 때문에 생물의 이동통로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수바위에서 바라 본 울산바위의 모습.

*수바위에서 내려다 본 화암사 전경.

*오늘의 주인공 여동생 부부 자랑 스럽네요.

*진부령에 곰돌이가 있어요.

*진부령 아가씨 노래비.

*진부령 안내 표지판.

*진부령 표지석.

요약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간성읍 사이의 태백산맥을 넘는 험준한 고개.

목차펼치기

높이 530m. 칠절봉(1,172m)과 마산(1,052m) 사이의 안부에 있으며, 오래전부터 관동지방과 영서지방의 중요한 교통로가 되고 있다. 남쪽의 대관령, 북쪽의 추가령과 함께 3대 영으로 불린다. 고개길이는 약 60㎞이다. 이곳에 나 있는 도로는 1981년 국도로 승격되고, 1984년 10월에 2차선으로 확장 및 포장공사가 완료되었다.

고갯길 구비구비에서 바라다보이는 동해의 모습이 장관이며, 이곳에 안개가 감돌아 봉우리를 덮게 되면 대자연의 장엄한 모습이 연출된다. 단풍이 아름답고 겨울에는 강설량이 매우 많다. 흘리 마을에 있는 마산봉 산비탈인 진부령 남쪽 100m 지점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어도 훌륭한 스키장의 조건을 갖추었다. 1971년 북설악 스키장으로 개설, 진부령 스키장으로 불리다가 1984년 겨울부터 알프스 스키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500~1,000m 되는 슬로프 3개와 리프트 시설 등 현대장비가 갖추어져 있다.

진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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