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아리랑길1~3코스

밀양 아리랑길 1코스(밀양관아~영남루)6.2km

문수산 아래 2017. 12. 1. 11:47

*일  자 : 2017년 06월 11일 일요일  맑음.15도~26도

*누구와: 아내와 둘이서

*코  스 : 밀양관아~밀양읍성~무봉사~영남루~밀양교~상문송림~조각공원

            오리배선착장~영남루 원점회귀 (3시간20분 소요)


*밀양하면 우리나라의 아리랑3대명소의 하나로 우리선조의 애완이 깃든 애절

 한 가락으로 유명한 밀양아리랑의 고장으로 우리부부는 휴일을 맞아 울산에

 서 가까운 밀양아리랑길(3코스)중 1코스를 걷기위해 출발한다.

 울산에서 밀양까지 승용차로 1시간거리라 여유를 가지고 오늘의 아리랑길1

 코스를 걷는다.


*밀양 아리랑길1코스 시작점 밀양관아에서 출발합니다.

 현재도 관아주변이 밀양의 중심지 역활을하고 있으니 옛날에도 여기가 밀양

 의 중심지였나 봅니다.

*여기는 매죽당입구의 신랑 각시 모형의 포터죤이 있네요.

*동헌마당에 죄인을 다루던 형털이 있네요. 이러시면 아니되지요.

*밀양관아는 밀양읍성이 축조될 당시에는 관아도 백여칸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본래 있던 건물은 선조25년(1592년) 4월 임진왜란으로 모조리 불

 타 버렸는데 왜란 후 선조32년(1599년)에 당시 부사 이영이 영남루 경내에

 우선 초옥을 세워 집무를 하다가 광해군 3년(1611년)에 원유남 부사가 부임

 하여 원래 자리에 관아를 재건하였습니다.관아의 중심 건물인 동헌은 부사가

 행정을 처리 하던 곳으로 근민현이라 불렀고 동헌의 부속건물이라 할수 있는

 서헌과 별실 등이 있었지만 자세한 용도는 부사 부인이 거처하던 곳이라 적

 혀있는 점으로 비추어 볼때 부사의 내실.주방.창고 등으로 활용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1611년 중건후 300년간 관청으로 사용되어 오던 관아는 조선후기

 에 동헌.정청.매죽당.북별실.내삼문 이외에도 연훈당.전월당등 부속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정확한 위치나 규모를 헤아릴수가 없습니다.고종 32년

 (1895년)에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군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27년도에

 삼문동으로 밀양군청을 신축하여 옮겨 가게되자 본래의 용도가 폐지되었고

 구 밀양읍사무소.구 밀양시청.구 내일동 사무소의 청사 등으로 이용되다가

 2010년 4월 관아를 복원하였습니다.

*기념으로.....

*밀양 관야지 해설문.

*일제강점기에 여기 밀양에서도 의거가 있었던 뜻깊은 곳이네요.

*밀양의 공덕비(19개)가 여기 있어요.

*공덕비의 인물이 소개되어 있네요.

*밀양 아리랑길 안내판.

*두번째 코스 밀양읍성을 오르면서 바라 본 밀양시가지의 모습.

*밀양읍성 가는길 깔끔하게 길이 정리되어 있네요.

*저기 언덕위에 읍성이 있어요.

*더디어 읍성에 입성.

*읍성 성벽을 오르면서 바라 본 시가지의 모습.

*밀양읍성.

 밀양읍성(密陽邑城)는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읍성이다.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167호로 지정되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화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경상남도 밀양시 밀양읍성은 성종 10년(1479)에 만든 것으로, 다른 읍성들을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100년 이상 일찍 만든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밀양읍성은 둘레가 4,670척, 높이 9척이며 성 안에 우물이 4개, 연못이 1곳 있다고 한다. 1902년 경부선 철도부설 공사 때 성문과 성벽을 모두 헐어 철도부설공사에 이용하여, 지금은 성문의 위치와 일부 성곽만 남아 있다. 아동산과 아북산을 잇는 산등성이에는 성곽이 남아 있다.

 읍성은 지방의 관청과 민가의 보호를 위해 그 주변을 둘러싼 성이다. 읍성을 가장 활발히 쌓은 시기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과 조선 초였다. 읍성은 조선 왕조 마지막까지 존속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병과 함께 일본이 읍성 철거령을 내리면서 전국의 읍성 대부분이 헐렸다. 밀양읍성은 조선 초기인 1479년(성종 10)에 축조되었으나, 1902년에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면서 파괴되었다. 동북쪽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하고 서남쪽의 평지에 성벽을 쌓은 밀양읍성의 규모는 길이 2.1km, 높이 27m였다고 하며, 성안에는 동헌과 객사를 비롯한 많은 관아와 연못 1개, 우물 4개가 있었다고 한다. 또 1590년(선조 23)에 전국의 성곽을 정비하면서 밀양부사 신잡(1541~1609)이 성 둘레에 못을 깊이 파고 물을 끌어들여 물을 이용해 성을 지키려 하였다고 하며, 뒤에 다시 연못 1개와 우물 8개를 맛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함락되어 성이 무너진 것을 전쟁이 끝난 뒤인 1606년(선조 39)에 다시 복원하였다.[1]

밀양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은 성 바깥이 절벽을 이루며, 절벽 아래로 남천강이 흘러 방어시설을 대신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남천강을 해천이라고 부른다. 1902년 성이 헐리고 난 뒤 그 석재는 1934년의 밀양교 가설과 1950년의 한국전쟁 때 진지를 쌓기 위해 옮겨가 버렸다고 한다.[1]

밀양읍성은 조선 성종 10년(서기1479)에 쌓았으며, "석축의 길이 4,670자, 높이 9자, 성내에 우물이 넷, 못이 하나"라는 기록(동국여지승람)이 있다.[2]

이 성과 성내에는 4대문·아사·동헌·객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많이 소실되었고 지금은 영남루 등의 건물과 일부의 유구만 남아 있다.[2]


*밀양읍성 망루에서 바라 본 밀양강의 모습.

*밀양읍성 망루에서 흔적을 남겨요.

*밀양읍성 망루.

*망루의 역활을 설명.

*밀양읍성의 연력소개.

*읍성을 내려오면서 사명대사(유정)의 동상
조선 후기 김천 직지사로 출가한 고승(高僧)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송운(松雲), 속명은 임응규(任應奎), 별호는 종봉(鍾峯). 아버지는 임수성(任守成)이다.


[활동 사항]
사명대사(泗溟大師)[1544~1610]는 직지사에 6년간 머물렀으며 주지를 지냈다. 1575년(선조 8) 왕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의 수사찰(首寺刹)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후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이듬해 해인사에 잠시 머물렀고, 다시 휴정의 곁에서 도를 닦다가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1586년(선조 19)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悟道)하였다. 그 뒤 오대산 영감사(靈鑑寺)에 머물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입어 강릉부의 옥에 갇혔으나, 강릉의 유생들이 무죄를 항소하여 석방되었다. 이듬해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수도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 구실을 담당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 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하였다.

제1차 회담은 1594년 4월 13~16일 서생포 일본 본진에서 열렸는데 강화 5조약으로 제시된 ①천자와 결혼할 것 ②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③전과 같이 교린할 것 ④왕자 한 명을 일본에 보내 영주하게 할 것 ⑤조선의 대신 및 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척파하였다. 제2차 회담은 1594년 7월 12~16일, 제3차 회담은 1594년 12월 23일, 제4차 회담은 1597년 3월 18일 열렸는데, 이때도 대표로 나아가 강화 5조약의 모순을 지적하여 적들의 죄상을 낱낱이 척파하였다.

특히 제2차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다. 문장이 웅려하고 논조가 정연한 토적보민사소는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실천 방도를 제시한 상소이다. 그 내용은 첫째 모든 국민을 총동원하여 빈틈없는 작전으로 적을 격퇴해야 하고, 둘째 교린하여 적을 돌려보낸 뒤 백성을 안위하게 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동시에 민력(民力)을 무장하여야 하며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무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1595년(선조 28)에는 장편의 을미상소를 올렸는데, 전쟁에 대비하여 역사적 안목과 현실을 적절히 파악한 면을 보여 준다. 즉 민력을 기르기 위하여 목민관을 가려 뽑아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소탕할 것, 일시적인 강화로 국가 백년의 대계를 망각하지 말고 국세 회복에 만반의 방어책을 세울 것, 인물 본위로 등용하여 천한 사람일지라고 나라에 쓸모 있는 역량을 갖춘 사람이면 적소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 국가 기강을 쇄신하며 문란한 기풍을 뿌리 뽑고 민력을 북돋우어 군정(軍政) 확립의 본을 보일 것, 소[農牛]를 매호하여 중농 정책을 확립할 것, 산성을 수축하여 산성마다 군량·마초·방어 무기를 준비할 것, 승려도 일반 백성과 동일한 처우를 하여 국가 수비의 일익을 담당하게 할 것 등이다.

국방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산성 수축에 힘을 다하였다. 사명대사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의 야로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594년(선조 27)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갖추도록 하였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의 벼슬을 내렸다. 1604년(선조 37)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왕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선조 37)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 성과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때 잡혀 간 3,000여 명의 사람을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7세를 전후하여 할아버지에게 『사략(史略)』을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1559년 아버지가 작고하자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의 제자가 되었다. 3년 뒤 승과(僧科)에 합격하면서 많은 유생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20세 연장인 박순(朴淳)과 5세 연하인 임제(林悌)와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당시 재상인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老子)』, 『장자(莊子)』, 『문자(文子)』, 『열자(列子 )』와 시를 배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泗溟堂大師集)』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등이 있다.


[묘소]
제자들이 다비하여 해인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상훈과 추모]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밀양 아리랑 노래비.


 

경상도 지역의 대표적인 민요로 신민요로 분류되는 노래.

역사

<밀양아리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매일신보』 1926년 10월 1일자에 소개된 김금화의 음반 ‘일츅조션소리판’의 목록에 보이며, 1929년 『별건곤』 에 수록된 차상찬의 「밀양의 7대 명물」 중 ‘구슬픈 밀양아리랑’이 두 번째 기록이다. 이후 1930년대에는 기생들에 의해 음반화가 이루어지면서 지역을 막론하고 유행가로 불리면서 통속아리랑으로 자리 잡았다. 누구나 알고 쉽게 부르는 노래, 유행가로서의 장점을 갖춘 특징으로 인해 일제강점기에는 <독립군아리랑>과 <광복군아리랑>으로 개사해서 군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기존의 후렴구를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광복군 아리랑 불러나 주소”로 바꾸었고 가사 내용도 군가에 맞게 바꾸어 부른 것이다. 이는1946년에 간행된 『광복군가집』과 김구의 『도왜실기』에 수록되어 있다. 1950년 6·25전쟁 때에는 중공군들이 밀양아리랑을 <빨치산 유격대아리랑(파르티잔아리랑)>으로 개사해서 불렀는데, 이는 1953년 중공군 발행 군가집인 『조선지가』에 <파르티잔아리랑>으로 수록되어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신밀양아리랑>, <통일아리랑>으로 개사되어 노동가로도 불러졌다. 이렇듯 <밀양아리랑>은 경상도지역의 대표 민요이면서 통속민요이고,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장점으로 인해 시대별로 변용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경상남도 밀양 지역에서는 매년 개최되는 밀양아리랑대축제를 비롯하여 밀양아리랑보존회, 밀양아리랑콘텐츠사업단이 결성되어 밀양아리랑체조, 밀양아리랑플래시몹 등을 개발하는 등 전승과 보존에 노력하고 있다.

사설

(후렴)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다 틀렸네 다 틀렸네/ 니가 잘나 내가 잘가 그 누가 잘나 구리백통 지전이라야 젤 잘났지/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각을 비추네/ 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 아랑의 애화가 전해 오네/ 아실랑살랑 춥거들랑 내 품에 안기고 비개춤이 높거들랑 내 팔을 비어라/ 물명주 단속곳 널러야 좋고 홍당목 치마는 붉어야 좋다/ 옥양목 겹저고리 연분홍 치마 열두 번 죽어도 못 놓겠네/ 앵기면 앵기고 말면 말지 고개만댕이 얹어 놓고 만단 말가/ 남의 집 서방님은 가마를 타는데 우리 집 저 문뎅이는 밭고랑만 탄다/ 길 가지 담장은 높아야 좋고 술집의 술어마씨는 곱아야 좋다/ 시어머리 죽고 나니 방 널러 좋고 보리방아 물 부어 논 게 생각이 난다/ 세상에 핀 꽃은 울긋불긋 내 마음에 핀 꽃은 울렁울렁

악보

밀양아리랑 악보

내용

3소박 3박자로 된 9/8박자의 세마치장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현음은 ‘미·솔·라·도·레’의 5음이며, ‘라’로 시작하고 ‘라’로 종지한다. 시작 부분은 고음부 ‘라’로 질러 내기로 노래한 후 서서히 하행된다. 반대로 후렴은 저음으로 시작하여 고음으로 상행한 후 다시 저음으로 마무리되는 형태이다. 음폭은 완전 8도이며, 가사에 따라서는 10도까지도 확대되어서 신민요의 특징이 강하다. 전체적으로 경토리의 성격이 강하지만, ‘라-솔-미’의 하행 선율이 주를 이루고 ‘라’로 종지하고 있어 변형된 메나리토리의 특징을 지닌다.

특징 및 의의

1920년대 중반부터 서도창과 경기창을 하던 기생들에 의해 음반화가 되면서 전국적으로 불리게 된 유행가였고, 지금도 경기민요의 하나로 자주 불리는 민요이다. 반면 주요 사설이 경상도 사투리로 되어 있고, 가사가 밀양 지역의 명승과 인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토속성과 비토속성이 결합된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1900년대 이후 유행했던 아리랑의 고정부인 후렴이 나타나고, 경기잡가인 <양산도>의 선율 형태와 매우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 밀양 지역의 전래 토속민요라기보다는 1900년대에 생성된 신민요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정선아리랑>·<진도아리랑>과 함께 한국의 3대 아리랑의 하나로서 경상도 민요를 대표하고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군아리랑>·<광복군아리랑>으로 개사되어 항일운동가로도 활용되었다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참고문헌

  • 밀양아리랑가사집(밀양아리랑콘텐츠사업단·밀양아리랑보존회,2013), 밀양아리랑의 변용과 전승에 관한 연구(서정매, 한국민요학35, 한국민요학회, 2012), 밀양아리랑의 유형과 시대적 변천연구(곽동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논문, 2012), 밀양아리랑의 형성과정과 구조(김기현, 문학과 언어12, 문학과언어학회, 1991), 선율과 음정으로 살펴본 밀양아리랑(서정매, 한국민요학21, 한국민요학회, 2007).

    [네이버 지식백과] 밀양아리랑 (한국민속예술사전 : 음악, 국립민속박물관)


*무봉사 가는길.

*무봉사 일주문이 보이네요.

*밀양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있네요.

*무봉사 경내에서 바라본 밀양강의 모습.

*무봉사 대웅전.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773년(혜공왕 9)법조(法照)가 현재의 영남루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嶺南寺)를 순례하다가 큰 봉황새가 이곳으로 날아와 앉으므로, 상서로운 성지라 생각하고 창건하였다.

혹은 고려의 고승 범률국사가 이 절에서 하안거를 하면서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기 때문에 절 이름을 무봉사로 하였다고도 한다. 그래서 지금의 삼문동 지역에서 봉황이 알을 낳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밤나무를 심어 가려 주었으며, 무봉사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종소리를 울려 봉황을 날게 하였다고 한다.

1359년(공민왕 8)영남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무봉암이라 하였던 이 절을 무봉사로 승격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혜징(慧澄)이 중건하고, 1628년(인조 6)경의(敬儀)가 중창하였다. 1899년(광무 3)경봉(慶蓬)이 중건하고, 1942년에 중수,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 삼성각·종루·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보물 제493호로 지정된 무봉사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 봉황이 춤을 추던 성지, 무봉사 *
무봉사는 밀양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밀양 최고의 명소 영남루와 인접한 탓에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밀양강 상류 쪽 절벽 위에 아랑의 전설이 깃든 아랑각이 있고 계단을 올라서면 우리나라 3대 누각중의 하나인 훤칠한 영남루와 무봉사가 있다. 이곳에 가면 무봉사 참배 후 영남루와 밀양 박물관, 아랑각, 박시춘 생가지 등을 함께 둘러볼 수 있으며 강 아래로 펼쳐지는 대나무 숲과 강가 맞은편 공원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 전통의 도시 중심부에 우뚝 솟아 밀양의 상징이 되고 있는 영남루는 에워싸듯 흐르고 있는 밀양강과 함께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답고 평온한 풍치를 자랑한다. 보물 제493호 무봉사 석조여래좌상을 봉안하고 있는 무봉사는 밀양강의 흐름을 산 아래에 두고 그 강 언덕에 우뚝 솟은 영남루와 함게 그림같은 호산경색을 이루어 오랜 옛날부터 중국 악양루의 풍광으로 비유되면서 운치있는 사찰로서 시인묵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신라시대 때 법조선사가 당시 신라의 5대 명사 중에 하나였던 영남사에 주석하다 대낮에 큰 봉황새가 춤을 추며 이곳으로 날아와 앉아 상서로운 성지라 하며 법계로 삼았다는 이야기와 신라 혜공왕이 법조스님으로부터 받은 불은(佛恩)을 갚기 위해 영남루 자리에 가람을 짓고 무봉암으로 했다는 사적이 전해내려 온다. 강 언덕에 우뚝 솟은 영남루와 밀양강과의 조화로 그림같은 풍경을 지닌 사찰 무봉사는 경내에 보물 제493호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어 그 역사에 걸맞는 사격과 운치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밀양강의 모습.

*무봉사 석조여래 좌상.


 

무봉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좌상. 보물 제493호. 높이 97㎝. 원래 영남사지에 전해오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대좌는 없고 광배는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이기 때문에 이 불상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굵은 나발의 머리에 낮은 육계가 있으며 내리뜬 눈, 오똑한 코, 미소 띤 꼭 다문 입, 양 볼에 오른 살이 잘 어울려 엄격하면서도 풍만한 인상을 준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고, 둥근 어깨에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다. 법의 사이로 간략하게 표현된 군의와 띠매듭이 보인다.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이고, 자세는 길상좌인데 손과 발이 비교적 큰 편이다. 광배는 주형거신광으로 2줄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나타내고, 두광 안에는 연꽃과 당초무늬를 장식했다. 선 위에 5구의 화불을 조각하고, 광배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장식했다. 광배의 뒷면에는 석불좌상이 1구 양각되어 있다. 이 불상은 위엄있는 풍만한 얼굴과 양감이 있는 불신 등으로 보아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봉사를 뒤로하고...

*작곡가 박시춘선생 옛집을 밀양시에서 복원.

*박시춘작곡가의 대표작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

*박시춘.

     박시춘은 한국 가요사의 산증인으로 알려져있으며, 1982년 대중가요 창작인 최초로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일본 유학시절 중학생의 신분으로 순회공연단을 따라다니면서 트럼펫과 바이올린 등 다양한 악기들의 연주방법을 익혔는데 특히 기타 연주솜씨가 뛰어났다. 우라타 연예단 시절 <몬테카를로의 갓난이> 등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 데뷔했고 가수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 1930년대 말부터 1960년대까지 3,000여 곡이 넘는 대중가요를 작곡하고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아 가요사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그의 작품들은 애상성 짙은 트롯 가요의 분위기 속에서도 비교적 밝고 소박한 곡들이 많다. 대표작으로는 첫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 외에 <가거라 38선>, <비내리는 고모령>, <굳세어라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본명은 순동(順童). 부유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다분히 풍류적인 분위기를 즐기면서 자랐으며, 일본 유학시절 중학생의 신분으로 순회공연단을 따라다니면서 트럼펫·바이올린·색소폰 등 다양한 악기들의 연주방법을 익혔다. 특히 기타를 치는 솜씨가 뛰어났고 한때는 연예단에서 영사기돌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우라타[浦田] 연예단 시절 〈몬테카를로의 갓난이〉·〈어둠 속에 피는 꽃〉 등의 곡들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 데뷔했다. 가수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이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이후 1930년대말부터 1960년대까지 40여 년 동안 무려 3,000여 곡이 넘는 대중가요를 작곡,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아 가요사의 산증인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1939년 조선악극단의 일본 공연에 참여할 때는 현경섭·송희선 등과 함께 '아리랑보이즈'라는 남성 보컬팀을 만들어 공연했으며, 일제말과 195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는 악극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 한국방송공사(KBS)의 경음악단을 이끌면서는 방송가요와 영화음악도 다수 작곡했다. 1958년에는 영화음악에서 한걸음 나아가 직접 오향영화사를 설립해 영화제작도 했으며 〈육체의 길〉과 같은 히트작을 내기도 했다. 대한 레코드 작가협회 초대회장(1958), 연예협회 초대 이사장(1961), 예술윤리위원회 부회장(1966) 등 대중문화계의 요직을 역임했다. 1965년 이후로는 창작활동을 중단했으며, 1982년에는 대중가요 창작인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을 수여받았다. 애상성 짙은 트롯 가요의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그의 작품들에는 비교적 밝고 소박한 곡들이 많다. 대표작으로는 첫 히트곡〈애수의 소야곡〉 외에 〈가거라 38선〉·〈럭키 서울〉·〈비내리는 고모령〉·〈전선야곡〉·〈굳세어라금순아〉·〈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박시춘 작곡가의 복원된 생가의 모습.

*이제 영남루로 향하여...

*영남루의 부속건물 천진궁.

천진궁(天眞宮)은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영남루 경내에 있는 건축물이다.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효종 6년(1665년) 창건된 건물로서 단층팔작지붕 목조와가이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주심포(柱心包)건물로서 조선 중기의 건물이며, 단군의 진영을 봉안(奉安)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5일 어천대제, 음력 10월 3일 개천대제를 하고 있다.

개요[편집]

영남루 경내에 있는 건물로 원래 이곳은 요선관이 있던 자리이다. 효종 3년(1652)에 지었으며 공진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조 15년(1739)에 불탄 것을 영조 25년(1749)에 다시 지었으며, 헌종 10년(1844)에 크게 수리하였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 및 삼국의 시조왕, 고려 태조(재위 918∼943)의 위패를 모시면서 대덕전이라 하였으나 1957년에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1층이고,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목조로 된 기와집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기단은 낮은 2기단으로 앞면에만 문이 있고, 나머지 3면은 벽으로 되어있다.

최근에 원래의 문틀에 2중의 문을 덧대어 달았는데, 기법이 미숙하여 기둥의 높이를 전통적 비례에 비해 높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영남루의 전경.


 요약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


밀양 영남루

경남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 보물 제147호. 강변에 있으며 조선시대 밀양도호부의 객사 부속 건물이다.


내용

보물 제147호.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익공식(翼工式)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조선시대 밀양도호부의 객사 부속건물로, 손님을 접대하거나 주변 경치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던 건물이다. 처음 지어진 것은 고려시대로, 그뒤 여러 차례의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였다.

원래 그 자리에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이 있고 절의 종각으로 금벽루(金壁樓)라는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고려시대에 절은 없어지고 누각만 남아 있었던 것을 1365년(공민왕 14) 누각을 새로 짓고 절의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60년(세조 6)에 중수하면서 규모를 크게 넓혔으며, 선조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37년(인조 15) 다시 지었고 마지막으로 1844년(헌종 10) 불에 탔던 것을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넓은 강을 옆에 낀 절벽 위에 남향으로 있다. 세부적으로 조선시대 말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는데, 출목(出目)을 갖춘 3익공식의 공포구성과 공포 주변에 새겨진 부재의 장식 수법에서 그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외부로 뻗은 쇠서[牛舌]에 연꽃 또는 연봉 장식이 첨가되고 판재화(板材化)된 3익공의 내부도 초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밖에 고주(高柱) 위에도 복잡한 장식이 중첩되며 용머리를 장식한 충량(衝樑)이 올라와 있다.

전체적으로 부재도 크고 기둥 간격도 넓으며 중층(重層)으로 되어 우리 나라 건축 중에서는 크고 우람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건물 서편에 작은 부속건물이 딸려 있고 지붕이 여러 단으로 낮아지면서 연결되어 독특한 외관을 구성한다.

빼어난 경관과 건축미가 조화를 이룬 건물의 하나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건물을 노래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영남루를 뒤로하고 밀양강을 따라 앞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요.

*밀양강에 뗏목이 유유히 떠있네요.

*밀양교를 거너 가면서 난간에는 꽃으로 장식 이쁘요.

*밀양교 위에서 기념샷.

*밀양강의 오리배 시원해 보입니다.

*방금 지나온 영남루의 모습이 보이네요.

*반대편 강가에서 바라 본 영남루의 모습.

*강변의 공연장인가 보죠.

*밀양의 오솔길 솔숲길을 걸어요.

*정감이가는 징검다리 보기 좋아요.

*밀양철교도 보이고...

*때마침 철로의 주인공 총알열차가 지나가네요.

*야외조각 공원 조성취지문.

*여기는 우리나라 암각화를 총집합 전시하고 있네요.










*비들기도 사랑을 속삭이고....






*밀양강변의 산책로와 조각공원 잘정리 되어 있네요.










*밀양강둔치공원 안내도.

*공을들인 이한장의 사진 어떼요.

*이날은 한여름의 햇빛이 넘 더웠어요.

*밀양강변 산책로를 따라 가요.

*아파트와 체육시설도 강변에....

*강변에 파크볼을 즐기는 사람들로.....

*잔잔한 강물에 비친 가로수의 모습.

* 오리배 선착장을 지나고 있어요.

*이제 한물간 장미공원의 모습.

*그래도 나는 장미아이가.

*무척 무더운날 밀양아리랑길 1코스를 무사히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