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아리랑길1~3코스

밀양 아리랑길 2~3코스(밀양향교~밀양철교)9.8km

문수산 아래 2017. 12. 17. 20:38


*일  자 : 2017년 08월 19일 일요일  흐림.23도~32도

*누구와: 아내와 둘이서

*코  스 : 밀양향교~손씨고가~박물관~봉수대~추화산성~월연정~활성유원

            지~금시당~용두목~밀양철교 9.8km (4시간 소요)

*6월달에 1코스를 완주하고 오늘8월에 다시 밀양 아리랑길 2~3코스를 걷기

 위해 울산에서 밀양으로 날씨는 한 여름의 중간이라 아침부터 보통이 아니네

 요.어제 비가 내렸어 오늘은 습도가 높아 조금은 걷기가 .....


*여기는 밀양향교 주차장입니다.

*향교의 정문이라 할수있는 풍화루.

*향교 정문을 통과 정원의 모습.

*향교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배치된 강당인 명륜당의 모습.

*향교 마당에서 바라 본 풍화루의 모습.

*향교마당 양옆으로는 유생들이기숙하는 공간의 서재가 배치.

*대성전의 봉안 위치도.

*향교입구에서 밀양 아리랑길 2~3코스를 시작합니다.

*향교로 향하는 골목에는 고택이 있어요.

*밀양교동 손씨 고가는 현재 열 두대문이라는 한식집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밀성손씨 11대손인 손중배씨가 운영하고 열두대문이란 식당의 이름은 과거

 이집의 대문수가 열두개였다는데서 따온것인데 이집은 예약제로 운영중.


*밀양에는 두 손씨 가문이 있는데 밀양 손씨(밀성손씨) 와 일직 손씨가 그들

 이다.그중에서도 향교가 있는 마을 교동 주위에는 손병순씨 고가,손병준씨

 고가 등 30여채의 고택이 밀집해 있다.

*마을 고택 중에 특이 눈에 뜨이는 고택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161호인

 밀양 교동 손씨 고가이다.일명 만석꾼 집으로 알려져 있는 교동 손씨 고가는

 택지가 무려 1,000평이 넘은 규모인데 안채,사랑채,대문간채,중문간채,중사

 랑채 등으로 구성된 99칸의 큰 주택이다.


*돌담과 고택의 조화 아름다운 골목길.

*향교와 손씨 고택을 구경하고 도로횡단보도를 건너 좌측으로 진행.

*한참을 도로를 따라가면 밀양 아리랑아트센터 건물이 나오네요.

*건물 주위에는 각종 조형물이.....

*광장에 설치된 아트 조형물들.



이번에 개관하는 밀양아리랑아트센터는 2011년부터 2016년을 사업기간으로  밀양시 교동에 지상 4층 연면적 9,811규모로 건립되었다. 센터는 810석 규모의 지상 공연장과 256석 소공연장, 전시관뿐만 아니라 밀양아리랑과 백중놀이를 비롯한 무형문화재를 보존·전승할 수 있는 전수관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그간 문화예술회관이 없었던 밀양지역에 밀양아리랑아트센터가 개관됨에 따라 도내 전 시군에 문화예술회관 건립이 모두 완료되었으며, 지역 문화·예술의 부흥에 시너지 효과를 나타낼 것으로 기대된다. 경남도는 총사업비 337억 원 중 도비 100억 원이 지원됐다. 

홍준표 지사는 개관식 축사에서 밀양아리랑아트센터 개관을 계기로 밀양시가 나노융합 산업과 문화가 공생 발전하는 경남의 미래 50년 중심도시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밀양독립운동 기념관.

* 낙동강 유역 문화를 한 눈에 만난다, 밀양시립박물관 *
밀양시립박물관은 낙동강유역의 문화를 집대성하여 효율적인 보존·전시함은 물론, 향토사료의 수집, 조사, 연구, 정리 등을 통해 역사와 문화예술에 대한 고증 등 중심역할을 수행하고, 나아가 시민들에게 널리 공개하여 문화 향수 증대 및 사회교육에 이바지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박물관은 상설 1전시실, 상설2 전시실, 기획전시실로 나눠져 있으며, 밀양지역의 역사(삼한시대~조선시대)를 조명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주요 소장품은 밀양12경도(1566년 작. 경남도지정 유형문화재 308호), 용담취규정잡영(경남도지정 문화재자료 313호)외에 단원 김홍도 『선유도』, 오원장승업 『화조도』등 서화류와 이방중묘 출토 명기 및 지석(경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258호), 청자명문매호 등 도자기와 토기류 등 낙동강 유역과 밀양지역 출토 고고유물들과 소눌선생문집책판(경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 176호) 퇴로본 성호선생문집책판(경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 177호) 등 총 39종 4,835장의 문집책판(전시형수장고), 민속 및 생활유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시립박물관의 또다른 볼거리 화석전시관과 밀양독립운동기념관 *
밀양시립박물관에는 낙동강 문화 유물 외에 화석전시관,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어 또다른 재미와 볼거리를 선사한다.

화석전시관은 밀양시립박물관 내에 위치하며 고생대 중생대 등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주요화석(공룡, 어류 등)244점이 전시되어 있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은 독립의열단 단장이었던 약산 김원봉과 석정 윤세주 열사 등 밀양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을 조명해 볼 수 있는 곳이다. 1919년 3월13일부터 일어난 밀양지역의 주요 만세운동과 파리장서운동,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 등은 물론 밀양의 근현대사를 조명해 볼 수 있다.
  

*시립박물관 내부의 모습.

*각종 전시물 관람중,

*별도로 밀양 독립운동 기념관도 있어요.

*밀양독립운동 희생 추모관.

*독립운동 자료 전시관.

*역사속의 태극기 변천사.

*박물관 광장에서 바라 본 언덕위의 밀양성당.

*박물관 광장의 조형물.

*밀양시 독립운동가 추모공원.

*박물관 돌아보고 이제 추화산성으로 출발합니다.

*산을 오르면서 밀양시가지를 배경으로.



 

위치 경상남도 북동부
인구107,896 (2015)
면적799.01㎢
행정구역2개읍 9개면 5개동


         

요약 경상남도 북동부에 있는 시. 1995년 밀양시·군의 통합으로 지금에 이른다. 낙동강과 밀양강 유역에는 평야를 이루며, 북쪽에는 산지가 솟아 있다. 부산-대구 간의 교통의 요지이며 경상남도의 곡창지대이다. 영남루·표충사·아랑각 등의 명승지와 가지산도립공원·층층폭포·추화산·밀양강 등의 자연관광지가 많다. 면적 799.01㎢, 인구 107,896(2015).


경상남도 북동부에 있는 시. 1995년 밀양군과 통합시를 이루었다. 부산과 대구간의 교통의 요지이며, 도내의 주요 곡창지대이다.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유물·유적이 많아 영남지방의 일일관광지이다. 삼랑진읍·하남읍·부북면·상동면·산외면·산내면·단장면·상남면·초동면·무안면·청도면·내일동·내이동·교동·삼문동·가곡동 등 2개읍 9개면 5개동이 있다(행정동 기준, 법정동 기준은 8개). 시청소재지는 경상남도 밀양시 밀양대로이다. 면적 799.01㎢, 인구 107,896(2015).

밀양시


연혁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 일찍부터 인간의 거주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밀양은 삼한시대에 미리미동국(彌離彌東國)이 있던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신라 때에는 추화군(推火郡, 밀벌 또는 미리벌의 한자 표기)이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밀성군(密城郡)으로 고쳐졌고, 고려시대에 들어 995년(성종 14)에 밀주(密州)로 개칭했다.

1275년(충렬왕 1)에 군민의 모반 사건으로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어 계림부(鷄林府, 경주)에 병합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5년(태종 15)에 밀양도호부가 되었다. 별호는 응천(凝川)·밀산(密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6년에 경상남도 밀양군이 되었다. 1918년에 군의 중심지인 부내면이 밀양면으로 개칭되고, 1989년에 밀양시로 승격되어 밀양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대대적인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밀양군과 중심도시기능을 담당했던 밀양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밀양시가 되었다(→ 밀양군). 1998년 용활동이 내일동에 병합되었다.


인구

통합 전 밀양군은 해방 후 조금씩 증가해오던 인구가 1965년 21만 5,173명을 고비로 계속 줄어 전체적으로 인구유출지역이었다. 1970년 19만 5,429명, 1985년 15만 1,805명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는 비교적 인구감소율이 낮았으나 1989년 밀양시가 신설되면서 일시에 많은 인구가 빠져나갔다. 1990년 인구는 7만 9,958명으로 1970~90년의 20년 동안 59%나 감소했다.

한편 통합 이전의 밀양시는 1931년 읍으로 승격된 이래로 인구가 꾸준히 늘었다. 인구추세를 보면 1960년 3만 6,021명, 1970년 4만 2,165명, 1980년 4만 6,630명, 1990년 5만 2,995명으로 1960~90년의 30년간 약 47%의 인구증가율을 보였다. 통합시를 이룬 1995년의 인구는 13만 2,588명을 기록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2000년 12만 4,936명, 2010년 11만 1,472명으로 감소추세가 이어졌다. 2013년 기준 인구는 10만 9,749명이다. 행정구역별 인구분포를 보면 읍·면지역에 시 전체인구의 56%가 거주하며, 동지역에는 44%가 분포하고 있다. 1만 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는 지역은 상남면·내이동·삼문동 등이며 청도면(1,902명)에 가장 적은 인구가 분포한다(2013).


자연환경

지형은 대체로 태백산맥의 영향을 받아 그 지맥들이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있다.

밀양시

밀양강, 밀양시 삼랑진읍 임천리 일대

북동쪽이 높고, 남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며 낙동강과 밀양강 유역에는 저평한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북쪽에 가지산(1,240m)·운문산(1,188m), 서쪽에 천왕산(619m)·덕암산(545m), 동쪽에 천황산(1,189m)·향로봉(727m)·재약산(1,108m) 등의 험준한 산들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는 하천들은 모두 낙동강의 지류를 이루는데, 밀양강은 이 지역의 중앙을 남북으로 흐르다가 산내천·단장천 등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또 서쪽의 청도천과 남쪽의 해양강이 각각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과 합쳐진다. 밀양강을 따라서 남북으로 길고 넓은 지역에 걸쳐 발달한 하안평야(일명 삼문들)는 농경지와 시가지로 이용되고 있다.

기후는 남부내륙지방에 위치해 한서의 차가 심하며, 남서부지방보다 강수량이 적다. 연평균기온 12.9℃ 내외, 1월 평균기온 -0.6℃ 내외, 8월 평균기온 25.7℃ 내외로 기온의 연교차가 크며, 연평균강수량은 1,232.7㎜ 정도이다. 식생은 온대남부삼림대에 속하여 상수리나무·아카시아나무·밤나무·젓나무·소나무 등 온대낙엽활엽수림이 주종을 이루며, 북동부 산간지역에서는 침엽수림도 자란다.


인구

1995년 통합되기 전 밀양군은 해방 후 조금씩 증가해오던 인구가 1965년 21만 5,173명을 고비로 계속 줄어 전체적으로 인구유출지역이었다. 1970년 19만 5,429명, 1975년 17만 9,296명, 1980년 16만 1,444명, 1985년 15만 1,805명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는 비교적 인구감소율이 낮았으나 1989년 밀양시가 신설되면서 일시에 많은 인구가 빠져나갔다.

밀양시

밀양시내모습,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일대

1990년 인구는 7만 9,958명으로 1970~90년의 20년 동안 59%나 감소했다. 한편 통합 이전의 밀양시는 1931년 읍으로 승격된 이래로 인구가 꾸준히 늘었다. 인구추세를 보면 1960년 3만 6,021명, 1965년 4만 1,689명, 1970년 4만 2,165명, 1975년 4만 2,951명, 1980년 4만 6,630명, 1985년 4만 9,454명, 1990년 5만 2,995명으로 1960~90년의 30년간 약 47%의 인구증가율을 보였다. 통합시를 이룬 1995년의 인구는 13만 2,588명, 1996년의 인구는 13만 1,162명으로 증가했다.

2006년 현재 인구는 11만 2,847명으로 1996년 대비 약 14%가 감소했다. 행정구역별 인구분포를 보면 읍·면지역에 시 전체인구의 56%가 거주하며, 동지역에는 44%가 분포하고 있다. 1만 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는 지역은 상남면·내이동·삼문동 등이며 청도면(2,049명)에 가장 적은 인구가 분포한다. 취락은 주로 하천유역과 산록에 밀집되어 있으며, 괴촌이 일반적이다.


산업과 교통

부산과 대구 간의 교통요지이며, 도내의 주요 곡창지대를 이룬다. 총 경지면적 143.83㎢ 가운데 논이 85.34㎢, 밭이 58.49㎢로 경지율은 18%이다(2013). 농업가구가 전체가구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논의 85% 이상이 수리안전답으로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논농사가 활발하며, 쌀 생산량은 3만 841t 정도이다(2013).

밀양시

밀양시 상설시장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 등 곡물 외에 도시근교농업 형태로 이루어지는 사과·복숭아·감 등의 과수와 무·배추·풋고추·딸기 등의 생산이 많으며, 이들은 대부분 부산·대구 등지로 출하되고 있다. 삼랑진읍의 딸기, 무안면 등지의 단감, 단장면의 대추 등은 품질이 좋아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다. 또한 내이동에는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영남작물시험장이 있어서 여러 가지 농작물을 시험재배해 우수품종을 농가에 보급하고 있는데, 밀양 25호·30호 등 60여 종의 개량벼를 내놓아 녹색혁명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도시근교농업과 더불어 양계·낙농·양봉도 이루어지고 있다. 한때 양잠이 성하여 누에고치 생산량도 상당했으나 지금은 과거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은 규모이다. 수산업은 낙동강과 밀양강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지는데, 밀양강은 은어 산란장으로 알려져왔으나 수질오염과 모래채취 등으로 인해 은어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산외면에는 내수면개발시험장이 있다. 임야면적이 전체면적의 66%를 차지하며, 대부분이 구릉성 산지로 임야의 개발잠재력이 높다. 주요 임산물은 밤·대추·도토리·은행 등이다. 시내에는 38개의 광산이 있으며 가행중인 26개의 광산에서 고령토와 납석이 생산된다(2013).

편리한 교통, 풍부한 용수, 노동력 등 공업입지에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농업 중심의 경제기반을 다져온 밀양시에는 섬유·도자기 공업 등 몇 개의 전통공업만이 발달했다. 1937년 조선모직이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서면서 한국 모직공업의 발상지가 되었으며, 2013년 기준 총 169개의 기업체에 약 6,229명의 근로자가 근무하고 있다. 산업 및 농공단지로는 하남농공단지·초동특별농공단지·부북특별농공단지·상남특별농공단지 등 11개 단지가 있으며, 총 208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2013).

이 지역은 부산과 대구의 중간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수륙교통이 편리하여 일찍이 인근지방과 교역이 활발했으며, 특히 삼랑진은 지방산물의 집산지로 영남지방 최대의 상업·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철도·육상 교통의 발달로 지금은 소규모의 일용품 거래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밀양시장이 상설시장으로 거래의 중심지이며, 삼랑진장과 하남수산장 등 5일 정기시장 6개소가 있다.

경부선과 경부국도가 시의 중앙을 남북으로 달리고, 삼랑진에서 경전선이 분기한다. 그밖에 국도와 지방도가 부산·대구·마산 등의 대도시와 시내 각 지역을 연결해주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도로총길이 470.40km, 도로포장률 78%이다(2012).


유물·유적·관광

밀양 영남루

밀양 영남루, 보물 제147호, 한국 3대 누각 중의 하나이다

시내에는 국가지정문화재(국보 1점, 보물 7점, 사적 1, 중요무형문화재 1점, 천연기념물 2점, 중요민속자료 1점),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39점, 무형문화재 3점, 기념물 13), 문화재자료 43점이 있다.

삼한시대부터 농경문화를 꽃피웠으며,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많은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선사시대 유물·유적으로는 하남읍의 남전리지석묘군(경상남도 기념물 제48호), 삼랑진읍·초동면·상동면·산외면 등의 고인돌군, 무안면의 석기와 토기, 부북면의 고분군, 활성동 고분 등이 있다. 삼국시대 것으로 알려진 추화산성은 둘레가 약 715m의 석성으로 성내에는 우물 2곳·성황사·봉수대 등의 터가 남아 있다.

표충사

표충사 대광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불교 문화재로는 천황산표충사(경상남도 기념물 제17호)가 있으며, 경내에는 표충사청동함은향완·표충사3층석탑(보물 제467호)·표충사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표충사대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과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중요민속자료 제29호)이 보존되어 전해진다. 그밖에 무안면 무안리의 표충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소태리5층석탑(보물 제312호)이 있으며, 삼랑진읍에 만어사3층석탑(보물 제466호)·밀양숭진리3층석탑(보물 제468호), 활성동에 영원사지보감국사부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호)·영원사지보감국사묘응탑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호), 내일동에 무봉사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3호), 교동에 백운사범종(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 등이 있다.

유교 문화재로는 교동에 밀양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4호)와 칠탄서원(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2호)·예림서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표충서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을 비롯해 점필재문집책판과 이존록(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5호)·성호선생문집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7호)·어연당부산포진해유문서(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8호)·소눌선생문집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6호) 등이 전해오고 있다.

건축물로는 내일동에 영남루(보물 제147호)·천진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아랑각(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호)과 교동에 월연정(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3호)이 있다. 그밖에 어연당(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0호)·선화십칠년왕녀태실(경상남도 기념물 제29호)·밀양단장면허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 등이 있다.

이 지역은 삼한시대부터 영남지방의 행정·교통의 중심지였으며,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유물·유적이 많아 영남지방의 관광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주요 관광자원으로는 한국 3대 누각의 하나인 영남루와, 단군과 한국 8대 국조의 위패를 모신 천진궁, 표충사를 비롯해 아랑각·밀양향교·무봉사 등의 명승고적과 가지산도립공원·층층폭포·시례호박소·수산제수문·추화산·밀양강 등 훼손되지 않은 자연관광자원이 많다. 특히 산내면 남명리에는 여름에 얼음이 어는 얼음골(천연기념물 제224호)이 있어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교육과 문화

전통 교육기관으로 밀양향교·예림서원·칠탄서원·표충서원·삼강서원 등이 있었다.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화산의숙(華山義塾)은 1890년 부북면 퇴로리에 세워진 석음재서당을 개명한 것으로, 1920년 사립정진학교(지금의 부북초등학교 정진분교)로 개편되었다.

밀양시립박물관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밀양시립박물관

1900년 내일동에 사립개창학교(지금의 밀양초등학교)가 개교했으며, 그 뒤 각 읍·면에 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다. 1924년 내이동에 밀양공립농잠학교가 설립되어 지금의 밀양산업대학교로 발전했다. 2013년 기준 유치원 29개소, 초등학교 22개교, 중학교 13개교, 고등학교 8개교와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가 있다.

전통축제로는 매년 5월 개최되는 밀양아랑제가 있다. 여기서는 밀양문화원이 주관하는 아랑선발대회를 비롯해 백중놀이·용호놀이·게줄당기기 등의 시연이 펼쳐져 지방문화의 계승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밀양백중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용호놀이(경상남도 무형문화제 제2호)·감내게줄당기기(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7호)·밀양법흥상원놀이(경상남도 시도무형문화재 제16호)·길놀이·공상타작놀이 등이 있으며, 양반춤·범부춤·학바위춤 등 다양한 춤이 함께 어우러진다. 그밖에 타구놀이·돈치기·공기받기·연날리기 등이 행해진다.

설화로는 인물·지명·기암에 얽힌 것이 많은데 변계량·김종직·임유정·박곤 등에 관한 설화와 <아랑전설>·<조개바위전설>·<벼락바위전설>·<삼강문유래전설>·<만어산전설>·<치마바위전설>·<우릉바위전설> 등이 전해진다. 구전되는 민요는 다른 지방에 비해 그 종류가 다양하고 양도 많으며, 가사가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밀양아리랑>을 비롯하여 <고사리타령>·<시집살이노래>·<떡타령>·<모심기노래>·<바느질타령>·<베틀노래> 등 노동요가 많이 불리고 있다. 그밖에 문화시설로는 시립도서관·밀양박물관·공설운동장·측후소 등이 있다.

2013년 기준 의료시설로는 종합병원 1개소, 병원 6개소, 요양병원 5개소, 의원 49개소, 치과의원 23개소, 한방병원 1개소, 한의원 23개소가 있다. 사회복지시설은 아동복지시설 3개소, 노인복지시설 14개소, 장애인복지시설 1개소가 있다.


연혁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 일찍부터 인간의 거주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밀양은 삼한시대에 미리미동국(彌離彌東國)이 있던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신라 때에는 추화군(推火郡:밀벌 또는 미리벌의 한자 표기)이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밀성군(密城郡)으로 고치고 밀진현(密津縣)·상약현(尙藥縣)·오악현(烏嶽縣:또는 烏兵縣)·형산현(荊山縣)·소산현(蘇山縣)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고려시대에 들어 995년(성종 14)에 밀주(密州)로 개칭했다. 고려초에 오악현·형산현·소산현은 청도군으로 이관되었다. 1018년(현종 9)에 밀성군(密城郡)이 되어 창령군·청도군과 현풍현·계성현(桂城縣)·영산현(靈山縣)·풍각현(豊角縣)을 속군현으로 포함했다.

1275년(충렬왕 1)에 군민의 모반 사건으로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어 계림부(鷄林府:경주)에 병합되었다. 후에 현으로, 1285년에는 군으로 승격되었으나 곧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5년(태종 15)에 밀양도호부가 되었다. 1518~22년에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별호는 응천(凝川)·밀산(密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대구부 밀양군, 1896년에 경상남도 밀양군이 되었다. 1918년에 군의 중심지인 부내면이 밀양면으로 개칭되고, 1931년에 밀양읍으로, 1989년에 밀양시로 승격되어 밀양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대대적인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밀양군과 중심도시기능을 담당했던 밀양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밀양시가 되었다(→ 밀양군).



*밀양시의 충혼탑.

*추화산성 가는 길 .

*추화산성 봉수대의 모습.

둘레 1,430m. 경상남도 기념물 제94호. 추화산의 8부 능선 위에 축조된 테뫼성(산정상을 둘러쌓은 성)이다.

이곳은 밀양 영남루(嶺南樓)의 북쪽 3km 지점으로 성 아래의 동북쪽에는 밀양에서 경북 청도 쪽으로 통하는 국도의 교차지점이 있고, 이 지점의 서쪽에 맞붙어서 밀양시내로 흐르는 남천강(南川江)과 경부선철도가 남북으로 뻗어 있다. 결국 추화산성은 밀양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셈이어서 성의 위치로서는 최적지라고 할 수 있다.

밀양은 양산·언양·김해·영산·청도에 둘러싸인 내륙지방으로서 청도·대구를 잇는 통로에 위치하여, 왜와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전투, 고려시대에는 삼별초의 난과 관련하여 이 산성이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많았다고 생각된다.

『동국여지승람』「건치연혁(建治沿革)」조에 보이는 밀양의 고명(古名)이 추화군(推火郡)이었다는 사실은 추화산의 이름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성의 구조는 동·서·남에 문지(門址)를 두었으며, 북쪽의 계곡을 이룬 평지에는 우물·연못·부속건물을 배치하였다. 성벽은 석축 부분이 많고 토석혼축(土石混築) 부분은 적은 편이며, 축조수법은 경사면에 기단부는 내탁하고 상부는 협축하는 순서를 취하였다.

토석혼축 부분은 기둥을 세우지 않고 양측에 석축을 쌓고 그 속에 흙을 채워 다져넣는 공법을 사용하였다. 출토된 유물은 와편과 토기편이 대부분이며, 자기편은 분청사기가 가장 많았고 건물지에서는 백자편도 수습되었다.

성안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특징으로 미루어 신라 말 또는 통일신라 초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전기까지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은 초기에는 추화군의 치소(治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으며, 읍성이 현재의 밀양시내에 축조되면서부터 산성으로 기능이 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추화산성터 일부의 모습.



경상남도 밀양시 해발 243m의 주화산 산마루에 있는 돌로 쌓은 성으로, 밀양읍성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2km지점에 있다. 추화산성은 신라가 가야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터로 추정된다.

성의 둘레는 1430m이고, 성의 구조는 동, 서, 남에 문터가 있고 북쪽 계곡의 평지에는 우물, 연못 부속건물들이 있었던 것 같다. 추화산 서·북부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는데 적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군사적 고지이면서, 주변의 주민과 군사들에게 적의 침입을 알리는 기능을 하였던 곳이었다.

성안에서 기와 조각, 토기 조각, 분청자기·백자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추화산성은 처음에는 읍성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으나, 읍성이 현재의 밀양시내에 쌓아지면서 산성으로서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코스 월연정으로....

*밀양강가의 언덕에 월연정이 보이네요.

*월연정.



 

월연정은 조선 중종 때 월영(月影) 이태(李迨, 1483∼1536)가 월영사(月影寺)가 있었던 절터에 지은 별장입니다.


그는 중종 5년(1510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중종 14년(1519년)에 함경도 도사(都事)로 재직하던 중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으로 낙향했습니다. 중종 20년(1525년)에 이곳에 정자를 세우면서 정당(正堂)을 '쌍경당'으로, 대(臺)를 '월연대'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 후 이들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는데, 영조 33년(1757년)에 6대손인 월암(月庵) 이지복(李之復)이 복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종 3년(1866년)에 11대손 수당(睡堂) 이종상(鐘庠)과 이종증(李鐘增)이 월연대를 중건하였습니다.



*담양 소쇄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통 정원의 하나인 '월연정(月淵亭)'은 조선조 중종 때 한림학사를 역임했던 월연 이태 선생이 지은 별장​이라고 합니다.

*언덕위의 월영정.

*용평터널앞에서 바라 본 밀양강의 모습.

*용평터널.

 용평터널은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 당시 사용되었던 철도 터널로 1940년

 경부선 복선화로 선로가 이설되면서 일반도로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길이는 130m 주변 경관이아름다워 산책도로로 인기가 높으며 영화 똥개의

 촬영지로 밀양 데이트 코스로 안성맞춤입니다.

*터널 앞에서 밀양강을 배경으로....

*강건너에는 활성 유원지가 조성.

*밀양교위에서 바라 본 밀양강의 모습.

*밀양강 다리를 건너 금시당으로 진행 중....

*금시당 가는 길.


*밀양시 황성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사묘재실인 금시당백곡재는 1996년3월

 11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28호로 지정,여주이씨 종중에서 소유, ㄱ4ㅘㄴ

 리.

*금시당.

금시당은 조선 명종 때 승지를 지낸 금시당(是堂) 이광진(李光軫, 1513~1566년)이 은퇴한 후 학문을 닦고 수양하기 위해 명종 21년(1566년)에 지은 건물입니다. '금시당(是堂)'이란 이름은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에서 "覺今是 而昨非(지금이 옳고 지난 삶이 그릇됨을 깨달았네)"라는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영조 20년(1744년)에 그의 후손인 백곡(栢谷) 이지운(李之運, 1681~1763)이 복원한 것을 1867년에 해체하고 중수한 것입니다.
 


*백곡재는 금시당 옆에 같은 크기로 있는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영조 때 재야 선비인 백곡 이지운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철종 11년(1860년)에 지은 재사(齋舍)입니다.


*금시당에서 바라 본 밀양강의 모습.

*금시당을 지나 산허리로 난 아리랑 둘레길을 따라 밀양철교까지 갑니다.

*구단방우.

 구단방우는 굿을 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으로 옛날부터 무당들이

 이곳에 왔어 굿을 하며 치성을 드리던 곳이다.용두산은 정상인 일자봉을 기

 점으로 동쪽에는 호두산이 뻗어 있고 서쪽에는 용이 길게 엎더려 있는 형국

 으로 이른바 용과 호랑이가 서로 꼬리를 마주하고 있어 예부터 명산으로 알

 려져 있다.

*용두보.

 일명 송화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근대수리시설의 효시이다.

 일본인 송하 정차량이 1904년~7년까지 거액의 사비를 들여 삼남들판에 농업

 용수를공급하기 위해 건설한 수로이다.용두보는 별도의 동력없이 수차를 이

 용하여 물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당시의 최신 토목 기술이 집약된 시설이다.


*오늘은 카메라의 밧데리 방전으로 여기까지.....

*밀양 아리랑 둘레길은 조금은 소박한 둘레길.조용한 둘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