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함께 부산갈맷길 이야기

부산갈맷길 3-2코스(부산진시장~절영해안 산책로 입구)15.8km

문수산 아래 2021. 4. 2. 00:07

*제 목 : 갈맷길 3-2코스 부산진시장~절영해안 산책로 입구)

*누구와 : 동네 친구들과 5명(임무용,방동철,손영학,서태석,안진업)

*언 제 : 2021년 03월 25일(목요일),흐림,5도~15도,미세먼지 좋음

*코 스 : 부산진 시장~증산공원~초량성당~국제시장~영도대교~절영해안 산책로입구(6시간)

 

*친구들이 기다려지는 일주일에 한번씩 부산 갈맷길 걷기하는 날이 오늘이다.

 일주일 친구들 건강한 모습 반갑고 텃밭 가꾸기 정보교환도 하고 지난 일주일 각자 있었던일

 이야가 주고 받으면서 오늘도 멋진 친구들과 우정교환으로 갈맷길3-2코스 시작합니다.

 울산에서 한시간을 달려 부산진시장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오늘도 무사히 완주를 기원

 하면서 힘차게 출발합니다.

 

 

*유라리광장 만남의 광장에서....

*부산진시장을 출발 부동산과 치과 골목으로 진행.

*기독병원앞으로 진행.

*정공단 입구.

정공단’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을 지키며 군민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다 성과 운명을 같이한 부산첨사 정발(鄭撥)과 그를 따라 순절한 군민들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이다.

단의 중앙에는 ‘정공단(鄭公壇)’이라고 새긴 비를 세우고, 서쪽에는 정발의 막료였던 이정헌(李庭憲), 동쪽에는 정발의 첩인 애향(愛香), 남쪽에는 군민들을 모셨으며, 남쪽 층계 밑에는 충직한 노복이었던 용월(龍月)의 단이 마련되어 있다.

1766년 부산첨사 이광국이 이들이 순절한 장소인 부산진성의 옛터에 이 제단을 만들었다.

부산첨사 정발

정발은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겼으며 약관의 나이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통독하고 아울러 병법에도 통달하여 26세 때인 1579년 무과에 급제했다. 그는 선전관이 되었고 그 후에 해남현감으로 부임했으며, 3년의 재임기간 중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은 그의 어진 정사를 칭송했다.

그 뒤 거제현령을 지내고 돌아와 비변사의 낭료(郎僚)가 되었다. 그의 벼슬이 승진되어 위원군수(渭原郡守)로 제수되었다가 임기를 마친 후 훈련원 부정(副正)이 되고 다시 사복시각주1) 로 옮겼다.

이 무렵 일본이 침입해 올 기미가 보이자 조정에서는 그를 절충장군의 품계로 올려 부산진첨사로 삼았는데, 이 해가 바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이다. 일본의 침공 기미가 보이는데 그 관문이 되는 부산진첨사가 된다는 것은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부산진첨사로 부임한 정발은 밤낮으로 그의 힘이 닿는 데까지 성을 지킬 준비를 했다.

이에 앞서 조방장(助防將) 이정헌이 동래로 왔다가 정발의 초청을 받고 함께 부산진성의 방비를 의논했다.

1592년 4월 13일 저녁 일본군 제1진이 부산 앞바다에 쇄도해 왔다. 정발은 함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상황을 보았는데 이미 적의 배는 바다를 덮었고, 그가 가진 전선 3척으로는 대적할 도리가 없었다. 물러 나와 성 밖에 있는 민가를 모두 불사르고 백성을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사람을 보내서 구원을 청했다.

이튿날 새벽 일본군은 조선 측이 항복하지 않음을 알고 상륙하여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정발의 지휘 하에 최후의 한 사람까지 사수하다가 죽어 갔으며, 곳곳에 쌓인 시체들이 산더미를 이루었다.

정발도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성 안의 사람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었다. 성민이 모두 죽음으로 항전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보복으로 부상당한 자들까지 모두 사살했다. 때문에 부산진 전투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전한 자는 전화(戰禍)를 기적적으로 모면한 사람과 당시 공격에 참여한 일본인의 입을 통해서였다.

전쟁이 끝난 뒤 부산의 전황과 정발의 공적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정발에게 자헌대부 병조판서의 직위를 내렸다.

숙종 임금은 1681년 정발에게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증직하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 정발의 순절지에는 정공단을 세워 기일에 향사하고, 동래 충렬사에서는 동래부사 송상현과 다대진첨사 윤흥신과 함께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려 그의 넋을 추모하고 있다.각주2)

함께 죽은 첩 애향과 종 용월은 정공단에 합사되어 있으며, 열녀 애향은 부산 충렬사 의열각에도 모셔져 있다.

부산진성 전투

부산진성 전투는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이다. 부산진성은 현재의 수정초등학교 뒤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는 바로 바닷가였다.

일본은 158,700명의 육군을 제1군부터 제9군까지 9개의 부대로 편성하고, 113,000명은 후속 병력으로 대기시켰다. 그 중 고니시 유키나가를 주장으로 하는 제1군은 18,700명,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은 22,800명,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11,000명으로 편성했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경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 18,700명이 700여 척의 전함에 분승하여 부산에 이르러 절영도 앞바다에 정박했다. 이때 부산진첨사 정발은 전선 3척을 거느리고 나갔다가 일본 함대의 규모와 위세를 보고 놀랐으며 바로 부산진성으로 돌아와 부사맹(副使猛) 이정헌과 1,000명 정도의 병력을 소집하여 전투에 대비했다.

4월 14일 아침 일본군은 우암동에서 일시에 상륙하고 3개 방면에서 조총을 앞세우고 성을 공격했다. 성안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일심 단결하여 분투했으나 조총의 위력 앞에서 곧 무너지고 말았다.

정발은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내를 순시하며 맞서 싸웠다. 그러나 전투 중 총탄에 맞아 전사했고, 군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어 결국 성은 함락되었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그날 바로 동래읍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정발 장군 추모 제전

일제강점기에는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조선총독부가 정공단의 제단을 폐쇄하고 유물과 비품을 모두 몰수했다. 광복 후에 이곳에 새로 단을 쌓고, 옛 비석을 되찾아 세운 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매년 음력 4월 14일 정공단에서는 ‘정발 장군 추모제전’이 개최된다. 제관으로는 초헌관(동래구청장), 아헌관, 종헌관, 집례, 대축, 알자 등이 참여한다.

정공단은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정공단 내부의 모습.

*충장공 정발 전망비.

 이 비석은 영조 37년(1761년)에 경상좌수사 박재하가 정발(1553~1592) 장군의 공덕을 추모하려고 영가대에 세운

 것인데.일제강점기에 전차선로를 만들면서 영가대를 헐고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비의 앞면에는 (충장공 정발 전망비) 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임진왜란 당시 정발 장군의 행적과 비를

 세운 과정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당시에 부산진 전투에서 순국한 부산진 첨사 정발의 업적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만든 사람의 신분과 비석을 만든 의도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부산 지역과 부산진이 국방의 중요한 지역이였음을 알려 주는 좋은 자료이다.특히 구름

 사이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듯한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이수는 조각 기법이 뛰어나 조각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열녀 애향비.

*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10호( 정  공  단 )

*왕길지 기념관(부산진 교회).

부산진 교회의 건물로 전시관은 아니지만 건물 안에

왕길지 목사에 대한 사진과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왕길지 목사는 인도와 호주에서도 활동을 하였고

한국으로 와 부산에서 19년, 평양에서 28년 선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 예수교장로회 신학교와 숭실대학교에서 교수 직책도 맡으셨다고 합니다

 

 

*진행길에서 우측 골목으로 진행.

*부산진교회 옆으로 진행.

부산진교회는 1891년 호주 선교부에 의해 좌천동에 설립되었다.당시 호주 선교사들은 1905년 교회 바로 옆에 일신여학교를 세워 여성교육에도 앞장섰는데, 1919년 3·1운동 때 부산진교회의 교인이자 이 학교의 선생들의 주도하에 여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부산 지역의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부산진교회 아래에는 1952년 호주 선교사들에 의해 문을 연 일신기독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부산진교회는 1891년 내한한 호주 여선교사 멘지스(Belle Manzies)에 의해 세워졌다. 멘지스는 부산진교회와 일신여학교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1924년까지 30여년을 전도와 교육 사업에 헌신하여 후배 선교사들로부터 ‘호주 선교부의 어머니’라 불릴 만큼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1900년 10월 엥겔(George O. Engel) 선교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그는 남자교인들을 모아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또한 수요기도회를 시작하여 평신도들에게 인도를 맡겼다. 초읍교회와 지곡교회를 개척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1919년 3월 11일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부산진교회의 교인이었던 주경애·박시연 선생의 지휘에 따라 태극기를 들고 기숙사를 나와 좌천동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만세 시위는 약 2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두 선생과 학생들이 검거되었다. 결국 주경애·박시연 선생은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았고, 11명의 학생이 6개월 징역형에 처해졌다. 이에 맞서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그 후 10일간 동맹휴학으로 맞서 일제에 저항하였다. 이 같은 일신여학교의 항거는 그 후 경남지역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현재 부산진교회 바로 앞에는 호주 선교부에서 1905년 건축한 일신여학교 건물이 남아 있는데, 지난 2003년 부산시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 또 교회 아래에는 호주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일신기독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진교회는 일신여학교·일신기독병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지역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부산 일신여학교 건물이 보이네요.

 


[정의]
개항기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건립된 부산 최초의 근대적 여성 교육 기관인 부산진일신여학교의 교사.


[개설]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에 파견된 호주 장로교 선교회 여자 전도부에 의해, 선교 활동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교육 사업의 하나로 설립되었다. 호주 장로교 선교회의 멘지스(Menzies)[민지사]와 페리(Perry)는 1891년(고종 28)에 부산에 파견되어, 1895년(고종 32) 10월 부산진에 마오리고아원과 교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신여학교를 설립하였다. 교명은 ‘날마다 새롭게[Daily New]’라는 뜻이며, 초대 교장으로는 멘지스가 취임하였다. 개교 당시 수업 연한 3년의 소학과 과정으로 출발한 일신여학교는 1909년(순종 3) 8월에 사립 학교의 인가를 받고, 더불어 3년 과정의 고등과도 병설하였다. 이 고등과는 후에 동래학원으로 이어져 현재의 동래여자중학교와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1915년 8월에는 학칙 개정에 의해 수업 연한 3학년이었던 소학교와 고등과를 4학년으로 증설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3월 11일과 4월 8일에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는 부산 지역 3·1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1925년에는 고등과 교사를 동래구 복천동에 신축 이전하고 동래일신여학교라고 교명을 바꾸었다. 1940년에는 오태환, 김명은 등 동래 지역의 유지들이 재단법인 구산학원[현 동래학원]을 만들어 경영권을 인수하고, 교명을 동래고등여학교로 변경하였다.


[위치]
부산진일신여학교(釜山鎭日新女學校)는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17번길 17[좌천동]에 위치한다.


[변천]
부산진일신여학교는 1905년(고종 42) 4월 15일에 일신여학교 교사로 동구 좌천동에 건립되었다. 1925년에 일신여학교가 동래구 복천동으로 이전한 후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 경남 교역자 연수원으로 사용되었다.


[형태]
서양식 2층 벽돌 건물로서 조적조(組積造)[돌, 벽돌, 콘크리트 블록 등으로 쌓아 올려서 벽을 만드는 건축 구조]이다. 특별한 양식은 없고, 외부에 벽돌 기둥이 2층까지 이어져 있으며, 외부에서 바로 2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1층 벽재는 석재이고, 2층은 벽돌이다.


[현황]
부산진일신여학교는 최근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부산 경남 교역자 연수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 건물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 유지재단이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2003년 5월 2일에 부산진일신여학교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된 바 있다.


[의의와 평가]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 기관으로, 독립지사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한 부산 지역 여성 인재의 산실이다. 부산진일신여학교의 교실로 쓰인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는 근대 초기 건축물의 형식을 알 수 있게 하는 문화재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일신여학교 만세운동 1919년.

*일신여학교 지나 안용복 도일선 전시관앞 통과.

*안용복기념 부산포 개항 문화관 구경은 나중에.....

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석포길 500

 

울릉읍과 북면을 가르는 경계선 표지판을 지나 내수전 옛길 끝에 도착하면 안용복 기념관이 있다. 안용복은 조선시대 사람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인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그는 1693년 강제 피랍, 1696년 자발적 행보로 두 차례 일본에 다녀왔다. 이 두 번의 일본행으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이고, 두 섬의 영유권과 조업권이 조선에 있음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안용복기념관은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3년 10월에 개관했다. 안용복 관련 전시물은 기념관 2층에 마련된 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안용복 기념관 앞에서 증산공원으로 가기위해 계단과 에스컬레이트을 이용 오르고 있다.

*증산공원 팔각정에서 바라 본 부산항 방면.

*컨테이너 부두의 모습.

*증산공원에서 바라 본 성북동 방면의 벗꽃 잔치.

*증산공원의 팔각정 모습.

정의]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좌천동 일대에 있는 공원.

[건립 경위]

도심 속 근린공원으로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증산 공원(甑山公園)은 1982년에 개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구성]

증산 공원의 면적은 약 2만 ㎡이다. 공원은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운동장과 농구장, 족구장, 베드민턴장, 게이트볼장 및 간단한 체육 시설을 갖추고 있고 중앙 광장이 있다. 화장실과 주차장이 있으며, 공원 일대에는 조선 초기에 축성된 부산진성이 있다. 산책로 정비가 잘되어 있어서 최근 증산 둘레 길이 조성되었다.

[현황]

증산 공원부산광역시 동구 성북로 36번길 46번에 있다. 증산이라는 지명은 산의 모양이 시루와 가마솥처럼 생긴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부산’이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공원은 24시간 사용이 가능하며, 주변에는 자성대 공원, 만리산 체육공원, 전포 돌산 공원, 부산 중앙 부두 등이 있다.

*증산공원에서 벗꽃을 배경으로 촌놈들의 부산나들이.....

*만개한 벗꽃나무의 모습.

*증산공원을 뒤로하고 성북시장쪽으로 방향을.

*중구 도서관을 지나고.....

*중구 도서관앞에서 바라 본 중구 시가지의 모습 이쪽 방향은 구 시가지 방향.

*이쪽은 개발로 모습이 상이 하네요.

*중구 도서관에서 내려와 성북시장으로 진입.

*여기는 성북전통시장 1960 웹툰이바구길 입니다.

*부산의 대표적인 도로 산복도로를 걸어면서 좌측으로 펼쳐지는 부산의 모습을 보고 걷고 있어요.

*벌써 한낮에는 이마에 땀방울이 맺이네요.

*부산의 명물 산동네 계단의 모습.

*계단에서 추억을 담아 갑니다.

*계단을 올라 좌측으로 도로를 따라 진행.

*다시 산복도로로 연결.

*벌써 꽃이 질려고 해요....

*도심의 다보사 절이 도시로 하산 했어요.

 

유치환 우체통 전망대

부산광역시 동구 망양로580번길 2 (초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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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우체통 전망대

부산 동구 초량동 산복도로에 있는 전망대로 청마 유치환 시인의 예술과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이곳에 우체통을 설치하였다. 경남여고 교장을 2차례 지내고 동구에서 생을 마감한 청마 유치

100.daum.net

 

부산 동구 초량동 산복도로에 있는 전망대로 청마 유치환 시인의 예술과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이곳에 우체통을 설치하였다. 경남여고 교장을 2차례 지내고 동구에서 생을 마감한 청마 유치환을 기리며 부산항을 한눈에 전망할 수 있는 명소이다. 전망대는 1층과 2층, 옥상으로 나뉜다. 1층은 계단식 야외공연장, 사방이 통유리로 설계된 2층은 89.54㎡ 규모로 미술전시용으로 사용된다.

* 개관일 : 2013년 05월 15일
* 규모 : 부지면적 180㎡ / 건축연면적 132.77㎡

*부산의 중심가 모습.

*진행방향 우측으로 친환경 스카이위이 전망대.

*상호가 이바구 캄프 많이 이용 바랍니다.

*초량전통시장 입성.

*초량성당지나 점심을 부산돼지국밥으로 해결중 점심은 서태석 친구가 기만이 셨습니다.

*다시 밥묵고 나머지 구간 출발합니다.

*부산역앞 텍샤스 거리를 벗어나고 있어요.

*차이나타운도 지나고....

*길 거너에는 부산 선거관리위원회 건물이 어마어마 합니다.

*우리 어릴적 세대의 추억입니다.

 지게지고 산에 나무하러 가던 생각이 아련히 나네요.

*시골에는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러다 먹었죠 옛 생각이 ......

*펑튀기 장수의 모습 ,

*부산의 명물 40계단의 모습 기념비.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에 조성된 계단.


[건립 경위]
1902년~1908년에 현재의 부산경남세관본부 부근의 북항이 매축되고, 1908년 중앙동에 부산역 광장인 새마당이 생긴 후 1909~1912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해안가와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5가로 통하는 언덕 윗길과 매립지를 잇기 위해 복병산 일부를 깎고 주택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위치]
40계단은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39-5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40계단은 현재의 위치에서 25여 m 떨어진 자리에 다시 만들어 진 것이다. 1993년 40계단 기념비가 만들어졌고, 2004년 40계단 일대를 정비해 40계단 문화 관광 테마 거리로 조성되었다. 40계단 위쪽 길을 따라 100m 쯤 가면 동광동주민센터가 있고, 동광동주민센터 건물 5층과 6층에 40계단 문화관이 있다. 5층 전시실에는 40계단과 6·25 전쟁을 주제로 하는 부산광역시 중구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다.


[형태]
인근의 주거지가 확대되면서 40계단은 그 폭이 약 1m로 축소되어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6·25 전쟁 시기에 40계단 주변에 피난민들이 몰려 판자촌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피난민들이 모여든 40계단은 피난민들의 생계를 위한 구호물자를 내다 파는 장터로, 또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는 장소로 유명하게 되었다. 2004년 6월 40계단 문화 관광 테마 거리가 조성되어 1950~1960년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현황]
40계단과 그 주변은 2004년 6월 부산광역시 종합 평가 최우수 거리로 선정되었으며, 2006년도 건설교통부 선정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40계단 문화 축제’ 등의 개최로 40계단의 역사성과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40계단 문화관에서 40계단과 그 주변을 관리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40계단에서 인증샷.

*40계단을 지나 백산기념관 앞으로 진행.

 

* 백산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곳, 백산기념관 * 용두산 공원에서 중앙로 방향 계단을 내려오면 백산기념관이 있다. 백산기념관은 백산 안희제 선생의 항일 독립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백산선생께서는 이 기념관이 있는 자리에 백산상회를 설립 운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다. 선생께서는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여 대한민국임시 정부와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에 활동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독립운동가의 상호 연계 구축에도 심혈을 기울여 백산무역주식회사를 국내 항일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현재 기념관은 1995년 8월 15일 개관하여 부산·경남지역 독립운동의 교육장이 되고 있으며, 전시장에는 선생의 유품과 당시 구국운동 자료 등 8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 백산 선생에 대하여 * 백산 안희제 선생은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민족교육, 민족기업육성, 항일언론등 다방면에 걸쳐 국권회복을 위해 국내·외에서 활동한 민족독립운동가였다. 자는 태약, 호는 백산, 본관은 강진이다. 백산 선생은 어려서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러일전쟁(1904)과 일제의 을사늑약(1905) 강제체결 이후 백산선생은 계몽주의로 전환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신문학을 통한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백산기념관을 지나 용두산공원 올라 가는 계단.

*용두산공원 부산타워와 팔각정의 모습.

용두산이라는 이름은 일본인들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용을 닮았다 하여 불렀던 이름으로 추정한다. 콘삐라 신사와 벤사이텐 신사가 있어 일본인들의 성역으로 조성되었지만 해방 후 신사는 헐리고 용두산은 피란민들의 판자촌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4년 용두산 대화재로 인해 모든 것은 잿더미가 되었고 용두산은 공원으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 공원으로 불렸던 공원은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용두산 공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은 부산을 상징하는 부산타워와 아름다운 꽃시계, 노천카페가 있어 부산 시민은 물론 부산을 찾은 이들의 쉼터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용두산공원의 시민의 종.

시민의 종 시민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종

실제로 부산 시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종이다. 1월 1일과 광복절, 3・1절에는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타종식이 거행된다. 종각의 규모는 높이 11.3m, 부지 321㎡, 건평 60.84㎡이다.

 

 

*팔각정 여유롭게 차 한잔할 수 있는 곳

부산 타워 바로 옆에 보이는 운치 있는 건물이다. 1층에는 스낵 바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커피와 디저트를 먹으며 쉬어갈 수 있는 투썸플레이스가 있다.

*용두산공원의 명물 꽃시계.

꽃시계 용두산 공원의 백미

전국에 설치된 총 18개의 꽃시계 중 유일하게 초침이 있는 시계로 기념사진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365일 늘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되어 있으니 꽃들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해 보자.

*용두산공원을 내려와 국제시장 가는길에.....

*국제시장과 깡통시장을 통과 자갈치시장 가는 골목길.

*자갈치시장 입구 조형물.

*부산의 명물 자갈치시장 앞의 맛있는 식당가.

*옛날 돛단배의 조형물.

*자갈치 시장의 웅장한 건물.

정의]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4가에 있는 어패류 종합 시장.


[건립 경위]
부산어업협동조합[현 부산광역시 수산업협동조합]이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지역에 건물을 짓고 위탁 판매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시장이 형성되었다. 남항에서 출어하는 영세 어선들의 어획물들이 부산 어협 위탁 판매장 주변에서 거래되면서 전통 재래시장을 이루었다. 부산 지역 보수천 하구의 자갈이 많은 장소에 시장이 서서 자갈치 시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1922년 부산어업협동조합 위탁 판매장이 개장하고 시장을 이루었다. 1970년에 자갈치 시장이 개설된 후, 1972년 2월에 시장으로 등록되었다.


[변천]
1985년 전기 누전으로 인한 대형 화재 발생으로 인해, 1986년 1월에 건물을 신축하여 재개장을 하였다. 2003년에 자갈치 시장 현대화 사업 추진 계획이 수립되고, 2006년 8월 30일에 자갈치 시장 현대화 사업 공사가 완료되었다. 준공된 자갈치 시장 건물에서 2006년 12월에 부산어패류처리조합이 입점하여 운영을 개시하였고, 2007년 11월에 일반 상가가 영업을 개시하였다.


[구성]
자갈치 시장은 지하 2층·지상 7층의 상가 건물로 이루어졌으며, 대지 면적은 4,841㎡, 건물 연면적은 2만 5910㎡이다. 1층은 수산물 시장으로 각종 어패류를 취급하는 상점이 입점해 있고, 2층은 회 센터, 3층은 노래방과 전시실, 4층은 다도해 한식당 및 골프 클럽, 5층은 씨푸드 뷔페, 6층은 컨벤션 센터, 7층은 게스트 하우스 및 하늘 공원이 있다. 고객 편의 시설은 주차장[129대], 화장실 외에도 3층에 쉼터, 5층과 6층에는 테라스가 있고, 7층에는 하늘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자갈치 앞바다와 하늘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가 4대 운영 중이며, 에스컬레이터가 1층~3층에 4대, 3층~6층에 6대 설치되어 있다.


[현황]
2012년 12월 현재 약 280개소의 점포가 입점해 있고, 총 상인 수는 480명으로 점포소유 상인이 280명, 종업원이 200명이다. 2007년부터 현대식 자갈치 시장에서 상점들이 영업을 하게 되어 고객들의 편의와 만족도가 한층 높아졌다. 매년 10월이면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라는 슬로건으로 부산 자갈치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먹거리, 살거리, 볼거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2년 10월 11일부터 10월 14일까지 제21회 부산 자갈치 축제가 개최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자갈치 시장을 지나 영도대교 방향으로 진행.

*해안가 광장에 이쁜 모형 등대가 빨강색이 눈에 들어 오네요.

*해안가에서 올려다 본 영도다리의 모습.

*6.25때 여기가 피난민들의 만남의 광장이 였다네요.

*여기서 기념으로 한컷하고가요.

*여기가 유라리 광장 어떤 뜻이 있을까...

유라리광장을 소개할께요

유라시아(유럽과 아시아)대륙의 국도7호선시점과 종점인 이곳을 유럽의

유라시아의 라(아).그리고 .사람. 마을이 모여 즐겨노는 소리를 뜻하는

리(이)의 조합으로 유럽과 아시아인이 함께 어울려 찾고 즐기는 장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합니다

그리고 부산관광공사에 해설신청을 예약하면 무료로 "영도대교"와 한국 최초의

"수리조선소 길" 일명"깡깡이 길"등 근현대사의 상세한 해설을 들을 수 있어요

 

 

*유라리 광장에서.....

*영도다리 상판 인도로 걸어가요.

내용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6호. 너비 25.3m, 길이 214.7m이다. 1931년에 착공되어 1934년 3월에 준공, 개통되었다.

처음에는 돛이나 굴뚝이 높은 큰 배가 다리에 걸리지 않고 그 밑으로 운항할 수 있도록 도개식(跳開式)으로 설계된 것이었으나, 다리를 들었다 내리는 기계가 낡고 또 이 다리에 붙어서 영도로 들어가는 수도관이 놓이게 됨으로써 1966년 9월 이후 약 47년 동안 들어올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2011년 4~11월 구 영도대교를 철거한 후 길이 214.7m, 너비 25.3m로 확장하고(왕복 6차로), 도개 기능도 복원하여 2013년 11월 27일에 영도대교가 개통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31일 준공되었다. 도개 기능을 다시 갖춘 영도대교는 매일 낮 2시에 상판을 들어올리는 도개 행사를 한다.

당시만 해도 이 교량이 영도와 부산 내륙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량이었으나, 증가되는 교통량과 물동량을 소화하는 데 한계에 도달하자 1980년부산대교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현재는 새로 건설된 부산대교와 함께 영도와 부산 도심을 연결하는 교통로 및 산업도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부산시민의 정과 6·25전쟁 중 피난민의 애수가 담겨 있는, 영도의 발전에 공로가 큰 유서 깊은 교량이다.

*영도대교 위에서 바라 본 유라리광장의 모습.

*영도대교에서 자갈치시장의 모습.

*영도대교를 건너면 현인가수의 노래비가 오른쪽에 있어요.

  현인은 건국 이후 처음으로 음반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해 대한민국 가수 제1호라는 별명을 얻었고,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등 천 여 곡이 넘는 노래들을 남겼다.
1942년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성악과 플루트를 배웠고, 졸업 뒤 일본의 징용을 피해 상하이로 건너가 음악활동을 시작했으나 광복 직후 귀국하였다.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가 유행가를 부를 수 없다던 생각을 꺾고, <신라의 달밤>을 음반으로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하여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이어 <비 내리는 고모령>을 통해 일제시대 국민들의 아픈 실향의 기억을 되살리며 일약 국민가수로 떠올랐다. 또한 샹송, 칸초네, 탱고, 맘보 등의 서구의 새로운 음악을 국내에 들여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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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현동주이다. 1938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우에노[上野]음악학교에서 성악과 플루트를 배웠다. 우에노음악학교 졸업 뒤 일본의 징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샹송과 칸초네를 부르며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직후 귀국하여 '고향 경음단'이라는 7인조 악단을 만들어 UN군 위문공연에 참여했고, 팝송을 레퍼토리로 하여 극장무대에서 활동했다.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가 유행가를 부를 수 없다며 자존심을 지키던 그는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신라의 달밤〉을 음반으로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하여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서양의 음악인 성악에 바탕을 둔 그의 창법은 신민요나 트로트 등과 달리 시원한 맛을 내며 해방 이후 가요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이어서 곧바로 내놓은 〈비 내리는 고모령〉은 일제시대 국민들의 아픈 실향의 기억을 되살린 노래로, 그는 일약 ‘국민가수’로 떠올랐다.

1947년 한 해 동안 그는 박시춘, 유호와 손잡고 무려 5곡을 히트시키면서 ‘현인시대’를 열었다. 1946년 2월 귀국선을 타다 중국 군인들에게 체포돼 4개월 동안 베이징 형무소에 있을 때 서울을 생각하며 그가 만들었던 탱고 멜로디는 유호의 가사로 〈서울 야곡〉으로 탄생했고, 그가 즐겨 부르던 중국노래는 〈꿈속의 사랑〉이란 노래로 만들어졌다. 1951년 흥남 부두에서의 이별을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전쟁 통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버티고 있던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의지를 심어주었으며, 월남 가족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그는 1952년 〈전우야 잘 자거라〉로 군인들의 사기를 높였고, 1953년에는 가사에 외국어를 처음 넣은 〈럭키서울〉로 서울 수복의 감격을 노래로 담았다. 그는 또 서구의 새로운 음악을 국내에 소개하는 전령사이기도 했다. 샹송, 칸초네, 탱고, 맘보 등이 그를 통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번안가요 제1호인 〈베사메무쵸〉나 〈고엽〉 등의 번안곡도 그의 입을 거치면서 히트곡이 되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던 그는 1947년 여름 무명가수가 천신만고 끝에 인기가수가 된다는 내용의 국내 첫 음악영화 〈푸른 언덕〉(감독 유동일)의 주인공 역을 맡았고, 1965년엔 악극 〈춘향전〉에서 이도령역으로 열연했다. 1974년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스라이트’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했지만 한국과 무대를 결코 잊을 수가 없어 결국 7년 만인 1981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1991년 〈노래하는 나그네〉·〈길〉 등 신곡을 발표하며 건재를 과시했으며, 1998년까지도 배삼룡·은방울자매·남진·김세레나 문주란 등과 악극 ‘그 때 그 쑈를 아십니까’를 비롯해 KBS ‘가요무대’ 등에 출연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였으나 2003년 지병인 당뇨로 활동을 중단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처음으로 음반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고 하여 '대한민국 가수 제1호'라는 별명이 붙었던 그가 남긴 노래는 1,000여 곡이 넘는다. 혀 짧은 소리에 턱을 떨며 부르는 독특한 창법의 그의 노래는 고난과 슬픔을 노래하되, 건강함과 감미로움으로 현실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9년 화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00년 8월 경주 불국사 앞에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영도대교를 건너 현인노래비에서 우측 해안으로 진행 해안에서 바라 본 영도대교 하부의 모습.

*해안가를 따라 깡깡이 예술마을로 진행.

*길 바닥에 깡깡이 예술마을을 표시하고 있네요.

역사[편집]

  • 깡깡이예술마을로 부산 영도구 대평동은 본래 바람이 이는 것처럼 기운차게 일어나는 뜻인 풍발포(風發浦) 혹은 거센 풍랑을 피하는 어선들이 머물던 장소라는 대풍포(大風浦)로 불리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해방 후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뜻을 담아 풍(風)을 평(平)으로 바꾸어 대평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하였고 19세기 후반에는 '다나카 키요시(田中 淸)에 의해 국내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인 '다나카조선철공소'가 설립되었다. 이후 매축공사가 진행되며 다양한 선박부품 가게들이 대평동에 집중적으로 들어서게 되어 1970~1980년대 산업화시기 원양어업 붐에 편승, 수리조선업의 메카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이때 대평동은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닐 정도”였다고 회자될 만큼 경기가 좋았다고 한다.
  • 호황을 누리던 대평동은 1980년대에 들어 조선업의 부진과 함께 쇠락하였다. 결국 대평동은 1998년 인구 감소와 함께 남항동으로 편입되었다.

관광[편집]

2015년 부산 예술상상마을 공모에 대평동이 대상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부산시에서는 수리조선마을인 대평동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깡깡이’라는 이름을 중심으로 문화예술마을로 재생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남포동과 인접하여있고, 도보로 영도대교를 건너 여행할 수 있을 정도로 접근성이 괜찮은 편이다.

마을 곳곳에는 페인팅아트, 키네틱아트, 라이트프로젝트 등 예술가들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고 대부분의 건물이 여전히 옛 대평동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독특한 경관을 보여준다.

기념품으로는 깡깡이 예술마을 캐릭터 패치, 핀배지, 컵, 마그넷, 도서 등을 판매하고 있다.

  • 마을안내센터
    • 무료선박체험: 정박되어있는 선박의 내에 안전모를 착용하고 입장하여 설치된 조형물을 체험할 수 있다.
    • 깡깡이 마을투어: 마을 해설사와 동행하여 가이드와 함께 마을을 한바퀴 돌아볼 수 있다.
    • 깡깡이 해상투어(유람선): 유람선을 탑승하여 남항을 돌아볼 수 있다.
  • 생활문화센터
    • 마을 다방: 마을주민이 직접 운영하는 다방으로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다. 요금을 내고 홀 대여도 가능하다.
    • 마을 박물관: 100여 년에 거친 대평동 수리조선업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 마을공작소: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적산가옥으로 추정되며 시계 등 키트조립체험이 가능하다.

*영도대교 건너 해안가에서 바라 본 건너편의 롯데 백화점 건물.

*아파트 벽면을 장식한 걸게그림.

*부산항 국제 선용품 유통센터 건물을 통과 중.

*남항대교 하부 방파제길로 진행 중.

*아직도 여유있는 친구들의 체력 대단합니다.

*부산외항에는 많은 대형 산박들이 보이네요.

*이길 끝에는 절영해안 산책로 입구 오늘의 종점.

*남항대교의 하부모습.

*오늘의 종점 도착.

*갈맷길 안내판 부산시.

*갈맷길 3-3코스 안내판.

 3-2코스를 6시간에 종점도착 오늘도 친구들과 즐거운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