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클론은 1996년 강원래(1969년),구준엽(1969년)을 멤버로 하여 데뷔하였다.
인기절정의 순간에서 맞은 강원래의 갑작스런 사고는 춤으로 일관하는 음악계에 일조한
클론(CLON)이라는 그룹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광활한 중국 시장을 제패하고 동남아 시장을 휩쓸며
국내 댄스음악의 전파자가 될 호기의 상황은 물거품이 되었고 김창환은 최대의 수입원을 날려버렸다.
과연 사고는 전설을 만들고 전설은 영웅을 만들 것인가...
어린 시절부터 춤과 미술에만 관심 있었던 구준엽은 경기고 시절 만난
강원래와 와와라는 팀을 결성한다. 이들은 이태원 등지를 돌아다니며 내노라 하는
강자들을 물리치고 일대를 장악했으며 모 나이트클럽에서 열렸던 댄스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며 당시 심사위원 이였던 이수만으로부터 함께 일해볼 것을 제의 받는다.
기획사에서는 그들의 기대주 현진영과 이들을 묶어 현진영과 와와라는
팀을 구성했으며 이로부터 이들은 백 댄싱팀이 되어 TV에 출연하며 경험을 쌓았다. 이후
구준엽과 강원래는 군대를 가고 이들 뒤로 김성재와 이현도를 비롯한 새 팀이 짜여진다.
휴가를 나온 구준엽은 소속사의 소개로 4살 어린 이탁을 소개받는다.
제대 후 탁2준2란 이름으로 '예감했던 이별'이란 곡을 발표하지만 스타일이 달랐던
두 사람은 팀이라는 끈끈한 공동체 의식 없이 직장 동료와 같은 사이를 유지한다.
그런 와중에 활동 8개월만에 이탁은 향정신성 의약품 관련 위반으로 걸려 들어가고
그는 홍대 앞에 쿨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차리고 다른 길로 나선다. 한편 제대 후 라인 음향에서
가수들의 춤 지도를 하던 강원래는 구준엽을 불러 회사의 재킷 디자인 자리를 알아봐 준다.
그리고는 우리가 아는 바 대로이다. 그들은 한 팀이 되었으며 김창환의 의성어
'꿍따리샤바라'는 1996년 여름 한반도를 강타했다. 음반은 80만장을 넘었으며
그들은 여름의 사나이가 되었다. '꿍따리샤바라'는 몰락하던 김창환의 회심의 역작이
되었으며, 클론이라는 이름은 대번에 여름과 댄스계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1집의 아류작인 2집 '도시탈출'의 실패 뒤에 나온 3집의 '돌아와'는 그 전의 앨범들과
더불어 대만을 흥분시켰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나이트를 중심으로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또한 앨범의 'Funky tonight', '사랑과 영혼'이 연이어 터졌다. 이은 4집의 '초련'은
드디어 중국 본토를 열광으로 몰아넣을 시동을 걸었고 MTV 한국 부문상을 수상했다.
그해의 나이트 클럽은 형광장갑으로 도배되었으며
1집에 이어 그들은 다시 한번 거짓말같이 최정상에 섰다.
2000년 11월 9일, 춤으로 가요계를 제패했던 클론의 강원래는 오토바이를 타고
언제 회복될지 모르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하반신 마비를 몰고 온 이 사고는 격렬한 춤을
이용한 음악을 하던 그에겐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다. 이로써 김창환에 의해 완성된 복제인간으로서의
삶은 마감이다. 구준엽은 솔로의 소문이 무성하고 이들이 하나가 된 모습은 언제 다른 모습으로
팬들 앞에 나설지는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또한 진정한 뮤지션으로서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바램이 있다. 그것은 강원래가 부인 송이씨와 사이에 2세가 어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구준엽과의 아름다운 인연도 세상이 다하는 그날까지 두사람 사이의 우정이 변치 않기를 기원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南-共和國, 영어: Republic of South Africa, RSA,
아프리칸스어: Suid-Afrika)은 아프리카대륙의 최남단에 자리한 공화국으로,
줄여서 남아공이라고도 부른다. 북쪽은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와 접해 있으며,
북동쪽은 모잠비크, 스와질란드와 접해 있다. 1966년에 독립한 내륙국인 레소토가
영토 안에 있으며, 행정 수도는 프리토리아이다. 2010년 FIFA 월드컵의 개최국이다.
현재 남아프리카 백인들은 보어인들의 후손이다. 보어인이란 네덜란드에서 이주한 이민들로써,]
이들은 흑인들을 착취하여 금과 다이아몬드를 채굴했다. 물론 채굴활동을 통한 이익은 백인들만
가졌을 뿐, 흑인들에게는 돌아가지 않았으며, 오히려 같은 일을 하고도 백인에 비해 4-10배나
차이나는 낮은 임금을 받았다.심지어는 전기, 수도, 교통, 공공의료등의 공공혜택도 흑인들은 받지
못했기 때문에, 1990년대까지도 흑인들의 50%가 수돗물, 전기, 공공의료를 이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백인들은 교육을 악용한다.
우선 학교에서는 흑인들에게 백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노예노동만 가르칠 뿐, 학문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흑인들은 읽고 쓰는 법조차도 모르는 무식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백인교사들은
흑인의 종교와 문화는 미신이고, 야만적이라고 가르쳐서, 흑인들이 자신들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게 했다.
지금도 일부 흑인들은 문맹이라는 고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고 한다. 이러한 인종차별은 아시아계에도
적용되어 모한다스 간디도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일할때 인도 노동자들을 위한 인권운동을
실천한 바 있다. 당시 남아공의 인도인들은 직업선택, 교통기관이용에서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종교적인 이야기는 지면 관계상 생략하기로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4천 480만 주민은 다양한 배경, 문화, 언어, 신앙을 가지고 있다.
2001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통계청(Statistics South Africa)의 인구 조사에서는
다섯 가지 인종 구분 가운데서 선택할 수 있게 하였는데, 마지막 구분인 ‘특기하지 않음 또는
기타’는 답한 수가 무시할 만큼 적어 생략되고 나머지 구분에 대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아프리카인 (Black African) 79.0% , 백인 (White) 9.6%
- 유색인 (Coloured) 8.9% , 인도인 또는 아시아인 (Indian or Asian) 2.5%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구 대부분이 자신이 아프리카 흑인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문화상으로나 언어상으로나 균일한 집단이 아니다. 주요 민족은 줄루족, 코사족,
바소토족(남 소토), 바페디족(북 소토), 벤다족, 츠와나족, 총가족, 스와지족, 은데벨레족 등이다.
줄루족, 코사족, 바페디족, 벤다족 등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만 있다. 다른 집단들은 거주지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이웃에 걸쳐 있다. 바소토족은 레소토의 주요 민족이다.
츠와나족은 보츠와나의 다수 민족, 스와지족은 스와질란드의 다수 민족이다.
은데벨레족은 짐바브웨의 마테벨렐랜드에도 거주하는데, 거기서의 민족 명칭은 ‘마테벨레’이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 샤카의 탄압을 피해 그곳에 정착한 줄루족의 후예로 줄루어를 사용한다.
총가족은 모잠비크 남부에도 거주하는데, 거기서는 샹간족으로 알려져 있다.
백인은 대부분 네덜란드인, 독일인, 프랑스의 위그노, 영국인 등 식민 이주자들의 후손이다.
언어상으로는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집단과 영어를 사용하는 집단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민해 온 소수 집단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백인 인구는 낮은 출산율과
국외 이민으로 줄어들고 있다. 유색인(Coloured)이란 명칭은 동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에서 들여온
노예, 당시 희망봉 주변에 살던 원주민인 코이산족, 원주민인 아프리카 흑인, 네덜란드인/아프리카너인과
영국인을 비롯한 백인, 자바인, 말레이인, 인도인, 마다가스카르인, 그 외 포르투갈인과 버마인을 비롯한
여러 유럽·아시아인 등 다양한 집단이 혼혈된 후손을 이르는데,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 아프리칸스어를 쓴다. 코이산족이라 불리는 이들은 피부색이 옅고 키가 작다는 데서 함께 취급된
두 가지 집단을 이른다. 이들은 유럽인들이 ‘호텐토트’라 부른 농경인 코이코이족과 수렵 채집인 부시먼이다.
또 더 최근에 들어온 유색인 집단도 있는데, 옛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와 나미비아에서 들어온 유색인과
인도와 버마에서 인도와 버마의 독립 이후 희망봉을 찾아온 영국인-인도인, 영국인-버마인 혼혈인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시아인은 대부분 인도계이다. 많은 수가 19세기에 당시 나탈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던 동부 해안의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온 계약 노동자이다. 약 10만 명이 되는 화교도 존재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한국 전쟁 때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대한민국(남한)을 지원하였으며,
이후에도 친서방과 반공을 대외정책의 기조로 삼았으므로, 대한민국(남한)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따른 국제적 여론으로 정식 외교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다가,
인종차별정책이 폐지된 후 1992년 12월 1일 뒤늦게 수교하게 되었다. 수교 후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어,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1995년 방한하여 큰 환영을 받았으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나라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북한과는 1998년 수교하였다. - 워키백과에서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