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걷기

남파랑길 9코스(진해 드림로드입구~마산항)16km

문수산 아래 2020. 3. 6. 01:04

*제 목 : 남파랑길 9코스(진해 드림로드입구~마산항)16km

*일 자 : 2020년 03월05일 (목요일) 맑음.기온 3도~12도

*누구와 : 찰떡부부

*코 스 :드림로드입구~마진터널~STX창원2공장~봉암교~임항선그린웨이~
          마산항 입구:4시간10분

 

*이번주도 바쁘게 이어간다.월요일 초등친구들과 영남알프스 둘레길8코스 걷

 기.화욜.수욜은 텃밭에 고구마 심을 비닐 멀칭작업을 하고 오늘은 울산에서

 승용차로 남파랑길9코스 진해드림로드입구에서~마산항까지 16km를 걷기

 위해 코로나19의 위험을 감수하고 마산 도심을 통과한다

 

 

 

 

*남파랑길 창원 9코스를 10시20분에 마산항으로 출발

 

*사진은 8코스 마치면서 찍은 사진으로 인증샷 

 

*인증샷하고 출발합니다

 

 

*마진터널을 향하여 오르막을 오르고 있어요

 

*마진터널 도착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현동에 위치한 창원시의 시도 터널.


[제원]
마진 터널은 왕복 2차선의 단선 터널이다. 마진 터널의 제원은 길이 372m, 총 폭 6.5m, 유효 폭 6m, 높이 4.5m이다.


[변천]
마진 터널은 1949년에 개통되었다. 이후 1980년 수해 때 터널 상반 일부가 무너져 한 때 통행이 불가했었다. 이후 1980년에 무너진 터널을 복구하여 재개통하였다.


[현황]
마진 터널은 1985년에 장복 터널이 개통되기 이전까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진해구를 잇는 도로의 역할을 하였다. 이후 장복 터널이 개통되면서 통행량이 줄었다. 2012년 도로 교량 및 터널 현황 조서에 따르면 마진 터널의 하루 통행량은 500대로 파악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마진터널의 모습

 

*조금은 위험 하지만 인도없는 터널로 통과합니다

 지금은 차량통행이 거의 없어요 끝까지 갈데까지 1대지나 갔네요.

 

*터널을 빠져나와 바라 본 모습

 

*여기도 우측에는 어린 편백나무가 잘라고 있네요.

 

*터널을 통과해 열심히 내려가요.

 

*오리나무에는 푸르름이 눈으로 확인이 될만큼 봄은 성큼...

 

*보현사입구도 지나고

 

*여기가 장복산길 403번길이네요.

 

*삼거리에서 횡단보도 건너 오른쪽으로 진행

 

*부지런한 분들은 벌써 다리 밑에는 봄 준비가 한창이네요.

 

*해파랑길 표시와 남파랑길 표시도 같은 문양이네요.

 

*큰도로에서 좌측으로 내려와 다시 좌측으로 진행

 

*좌측으로 조금 내려오면 우측으로 이정표

 

*양곡천을 따라 우측으로 계속진행

 

*생강나무꽃이 만발로 피어 있네요

 

 

*양곡천을 따라 진행

 

*안전한 인도 통로가 잘만들어져 있어요

 

*도로벽에는 겨울을 이겨낸 아이비가 봄을 기다리고 있네요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웅남주민운동장 방향으로 진행

 

*산성산 숲속나들이길 안내도

 

*도로벽의 아이비 배경으로...

 

*양덕 소공원의 모습

 

*양곡천의 모습

 

*양곡 고등학교

 

*창원진해의 가로등

 

*양곡천을 따라 진행

 

*양곡천의 모습

 

*양곡 초등학교 전경

 

*남파랑길 9코스

 

*양곡천 건너에는 양곡 천주교회

 

*웅남주민자치센터

 

*STX 2공장 여기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

 

*봉암교 방향으로 진행

 

*로터리의 모습

 

*창원특레시 이런 시도 있는가.

 

 

 

*봉암교를 건너가야 합니다

 

*봉암교를 건너고 있습니다다.

 

*봉암교의 모습

 

*봉암교에서 바라 본 마산항의 모습

 

*문신 미술관 방향으로 진행

 

*횡단보도를 건너 마산만을 끼고 마산항 방향으로 진행

 

*좌측의 마산만을 끼고 진행

 

*마산자유무역지역 2공구

 

 

 개설

1973년 완공된 우리나라 동남해안의 대표적인 국가산업단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전용공단으로 외국의 선진기술 및 자본의 도입과 수출, 고용창출 등으로 국가 및 지역경제 발전을 선도하기 위하여 1970년에 착공하면서 설치되었다. 총면적 953,576㎡의 규모로서 가장 큰 제1공구(56.1%)와 제2공구, 제3공구로 조성되어 있으며 지식경제부 마산자유무역지역관리원에서 직접 관리하는 국가산업단지이다.

1970년부터 생산 및 수출 중심의 수출자유지역으로 운영되면서 마산수출자유지역으로 불리어왔으나, 2000년 7월 13일부터는 「자유무역지역의지정등에관한법률」에 따라 생산은 물론 무역·물류·유통·정보처리·서비스업 등의 새로운 기능이 추가된 자유무역지역으로 확대·개편되어 운영되면서 명칭도 마산자유무역지역으로 변경되었다.


형성 및 변천

1970년 1월 1일 「수출자유지역설립법」이 공포되면서 그 해 3월 16일에 마산수출자유지역 제1공구(659,752㎡)가 지정되었고, 1972년에 들어서 제2공구(264,535㎡)가 지정 건설되었다. 1973년에 입주기업체가 115개 유치되는 등 1970~74년의 기반 조성기는 성공적으로 그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다. 한편 1975~1980년의 성장·정비기 동안에는 입주업체 수의 증가와 함께 입주업체의 평균 수출규모가 739만달러로 크게 늘어났고 외화가득률도 53.0%로 높아져 수출자유지역의 질적 고도화가 달성되었다.

1980년 이후에는 수출의 안정적인 증가와 함께 노동집약형 업종이 기술집약형 업종으로 대체됨으로써 수출자유지역이 점차 성숙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민주화로 인한 노사분규의 여파로 1989년에는 수출이 전년보다 5.8%나 감소하는 등 침체의 시기도 겪게 되었다. 한편 1994년 이후에는 대표적인 업종 구조가 전기·전자업종중심으로 변화하면서 산업단지의 고도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2000년 「자유무역지역의지정등에관한법률」이 공포되면서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 마산자유무역지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같은 해 12월 15일 마산자유무역지역의 제3공구(160,566㎡)가 마지막으로 준공되었다.

현재 마산자유무역지역은 2014년까지 5∼6층 규모의 아파트형 공장 건설, 1공구와 3공구의 낡은 공장에 대한 재개발, 주차빌딩 조성, 도로 건설 등 확장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사업이 완료되는 2014년에는 고용창출 3만 명 및 수출 100억 달러, 외국인투자 대기업 유치 20개 사 등의 목표달성을 통해 지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황

현재 마산자유무역지역에는 외국인 단독투자, 합작투자, 내국인업체 등 98개 업체가 입주해 있으며 총생산의 98%를 수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마산자유무역지역은 외국인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외국인전용 공단이기 때문에 좋은 외국인 투자환경을 제공하고 있으며 국내에서 외국인 투자기업들이 제일 많이 밀집해 있는 산업단지이다.

2011년 5월말 기준으로 외국인 투자기업은 55개 사로 전체 98개 업체 중 56.1%를 차지하며, 이는 일본 39개, EU 6개, 미국 7개, 기타지역 3개 등으로 분포하고 있다. 98개 입주업체의 업종별 분포를 보면, 전자전기 28개와 정밀기기 27개 업체가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밖에 금속 8개, 섬유봉제 3개, 기계제품 13개, 비금속 5개, 기타 14개 등이 있다.

2010년 투자 총액은 215백만 달러로 이 중 외자액이 138백만 달러로 총 투자액의 64%에 달하며, 이는 1970년대 초 95%에 달했던 외자비중이 지속적으로 감소되어 왔음을 나타낸다. 아울러 수출액은 37억 7,400만 달러를 기록하였으며, 총 고용인원도 8,085명으로 이 중 남자와 여자의 고용은 동일한 비중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입주기업체의 생산 및 수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물류, 금융, 보험, 통관, 수출입도매 등 지원기업체 및 4개의 지원행정기관도 입지해 마산자유무역지역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교통편은 대구-마산 간 구마고속도로에서 8㎞, 부산-광주 간 남해고속도로에서 4㎞ 떨어져 있으며, 공항은 약 35㎞ 떨어진 김해국제공항이 입지해 있다. 항만 시설은 자유무역지역 내에 2만 톤급 선박 2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마산항 제3부두를 갖고 있으며, 대표적인 수출항인 부산항과도 약 60㎞ 떨어져 있다.

 

 

 

*좌측의 바닷가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자전거 안전수칙

 

*남파랑길 창원 9코스 안내도

 

*마산 해양경찰청 건물

 

*마산항을 향하여

 

*횡단보도를 건너 좌측으로 진행

 

*마산 자유무역지구 1공구

 

*산업통상 자원부 마산자유무역 지역 관리원 건물

 

*만국기

 

*마산항의 모습

 

*용마고등학교 실내 체육관

 

 

 

*김주열 열사흉상

 

 

 

 

출생 1943. 10. 7, 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사망 1960. 3. 15, 경남 마산시
국적 한국

요약 1960년 3월 15일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데모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는 이 시위에 참가한 후 행방불명되었다가 4월 11일, 왼쪽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사체 검안 결과 사인은 "미제 최루탄(길이 17㎝, 폭 3㎝)이 안부에 박힌 것" 때문으로 밝혀졌다.
그의 시신은 1960년 4월 13일 밤 마산을 출발하여 이튿날 아침 고향인 전북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의 마을 선산에 묻혔다. 그는 죽기 하루 전인 3월 14일 마산상업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성격은 차분했으며, 책임감이 강하고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제2차 마산시위와 이승만정권을 붕괴시킨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김주열

마산 부정선거 반대운동 시위에 참여했던 고등학생

ⓒ 떠돌이/wikipedia | Public Domain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학생들로 이루어진 평화적 시위대가 이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인 '마산데모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희생자가 속출하자, 격분한 시위대는 남성파출소·북마산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 등을 습격했다. 이 과정에서 80여 명의 사상자(7명 사망)가 발생했으며, 주모자로 구속된 26명은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17세였던 그는 이 시위에 참가한 후 행방불명 되었는데, 4월 11일 그의 시체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한 낚시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에 마산의 모든 시민이 규탄·궐기하여 연 3일에 걸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의 시체를 검시할 때 참가한 한 외과의사는, "사인은 미제 최루탄(길이 17㎝, 폭 3㎝)이 안부에 박힌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의 시신은 1960년 4월 13일 밤 11시 마산을 출발하여 14일 아침 고향인 전북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 도착하여 마을 선산에 묻혔다.

그는 죽기 하루 전인 3월 14일 마산상업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성격은 차분했으며, 책임감이 강하고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제2차 마산시위와 이승만정권을 붕괴시킨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마산부정선거반대시위

 

 

 

*합포동 행정 복지센터

 

 

*문신 미술관 1.3km

 

*지하도로 이용 표시가 조금 잘띄는 곳에 있었으면...

 

*지하도 나오면 교보생명 입간판 방향으로

 

*3.15의거 기념탑

 

 

 

시기 1960년

요약 1960년 3월 15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와 정경유착에 대한 항의에서 시작, 경찰의 발포로 해산되었으나, 4월 11일 김주열 군의 시신 발견에 따라 2차 시위로 이어졌다. 3·15 의거를 시작으로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 단위로 확산되었으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국립 3·15 민주묘지에 있는 ‘정의의 상’ 조형물

국립 3·15 민주묘지는 3·15 의거 당시 부정선거에 항거하다 희생된 마산 시민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 kimhs5400/wikipedia | CC BY-SA


개요

1960년 3월 15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학생 및 시민들이 벌인 규탄 시위.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이 공권력을 동원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한 데에 항의하며 촉발되었다. 3월 15일 벌어진 시위는 그날 밤 경찰의 발포로 일단락 되었으나 이날 최루탄에 피격되어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2차 시위로 이어졌다. 이 시위의 영향으로 4·19 혁명이 이루어져 이승만의 하야 선언을 이끌어내었고, 장기 집권을 노렸던 자유당 정권은 종말을 맞았다. 3·15 의거는 한국 현대사 최초의 민주 투쟁으로 기록되었다.


배경

1950년대 말 한국 사회는 한국 전쟁이 남긴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구호물자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곡물 가격이 하락하여 농촌 경제는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이농 현상이 발생하면서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으나 실업률은 23.4%에 다달았다. 사회 전반적으로 정경 유착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6년 3선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집권 연장을 위해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 전후로 부정 선거를 광범위하게 실행했다.

당시 이승만 후보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미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선거일 한달 전인 2월 15일 심장마비로 서거하자, 대통령은 이승만 단일 후보로 당선이 확실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유당 정권에서는 부통령에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부정 선거를 획책했다. 정치깡패와 반공청년단 등을 동원하여 야당 입후보자의 등록서류강탈, 사진기자들에 대한 구타, 청중의 강제동원, 야당 입후보자의 선거연설 방해, 모의투표 실시, 야당 운동원에 대한 살상 감행, 유령 유권자의 조작 등 엄청난 부정선거 운동을 자행했다.

부정 선거를 단속해야 할 경찰 주요 간부는 여권에 충성하는 인물들로 교체되었으며 교육공무원과 교사를 동원, 학부모에게 자유당에 투표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특히 마산 지역에서는 3·15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비리에 대해 시민의 각성을 초래한 사건이 발생했다. 1958년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된 허윤수 의원이 차기 국회의원 공천과 동양주정 경영권을 약속받고 1960년 1월 5일 민주당을 탈당, 1월 11일 자유당에 입당했다. 허윤수는 3월 4일 동양주정을 인수, 경쟁사였던 무학주정에 매각했다. 정경 유착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 이 사건으로 마산 시민들 사이에 공작 정치를 자행하는 자유당 정권과 동양주정을 팔아 넘긴 허윤수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다.


전개

3인조, 5인조 투표, 사전투표 등 선거를 앞두고 자행된 부정선거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3월 15일 10시 30분 민주당 마산시당에서는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이번 정부통령 선거는 부정선거로 무효임을 가두 방송을 통해 시민에게 알렸다. 오후 2시 30분부터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 30여 명으로 시작한 시위는 시민들이 합세하여 6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6시 30분 무렵에는 시위 군중이 수천명으로 증가했다. 시위 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8시가 넘어도 시위가 멈추지 않고, 때마침 정전으로 시가지가 어둠에 잠기자 시위대에게 최루탄에 이어 실탄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2명이 사망하고 2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이날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이날의 시위는 11시 30분 경에 해산했으나 자유당 정권은 시위에 공산당이 개입했음을 주장하며 체포한 시민과 학생들을 고문했다. 4월 11일 11시, 시위때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 군의 시신이 눈에 최투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격분한 학생 및 시민들은 오후 5시에 재궐기하여 자유당정권을 규탄했다. 7시에는 3만여 명이 도립마산병원앞에 모여 마산시청, 마산경찰서, 창원군청으로 몰려가 시위를 계속했고, 8시 30분에는 마산경찰서장 차량을 불태우기도 했다. 이날 경찰이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2명이 사망했다.

4월 12일에는 마산고등학교, 마산상업고등학교, 마산공업고등학교, 마산창신고등학교, 마산여자고등학교,마산성지여자고등학교, 마산제일여자고등학교, 마산간호고등학교(지금의 마산대) 3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민1만여 명과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마산 시내 곳곳에서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다음날에는 해인대학(지금의 경남대학교) 학생 2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영향과 의의

3·15 부정 선거에 대해 항거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자유당 정권과 경찰의 가혹한 탄압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전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에서 부정선거를 무효로 돌리고 구속한 마산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학생 시위가 진행되었는데, 거리 행진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던 학생들이 정치깡패에게 피습당하자 4월 19일 전국적으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단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선언을 이끌어내었다. 자유·민주·정의를 기본 정신으로 하고 있는 3·15의거는 한국 현대사에 있어 최초의 민주·민족운동으로 기록되었다.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성역로 75에 3·15의거의 정신을 기리는 국립3·15민주묘지가 조성되어 4·19혁명 사망자, 부상자, 공로자를 안장하고 있다.

 

 

 

*북마산 가구거리

 

*임항선 그린웨이

 

*임항선 그린웨이의 모습

 

 

 

위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반월동5길 38 (월포동)

 

임항선 그린웨이는 경상남도 마산에 위치한 '임항선' 폐 철길을 활용하여 2015년에 공원으로 만든 것이다. 임항선은 경전선 마산역에서, 북마산역, 신마산역, 마산항역을 잇는 노선으로 1905년에 개통하여 2011년 2월 폐지되었다. 이에 창원시에서는 구 마산세관에서 석전사거리 개나리아파트까지의 4.6km 폐 철길 구간을 공원으로 재탄생 시켰다. 길이 잘 정비가 되어 있어 걷기 좋고 곳곳에 시화와 벽화 그리고 철도 역무원 조형물이 있다.

 

 

 

*가고파 꼬부랑 벽화마을 과 문신미술관의 설명

 

 

 

위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성호서7길 15-8 (추산동) 일대

 

가고파 꼬부랑길 벽화마을은 마산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으로 경남은행이 새롭게 단장하여 2013년 12월에 완공하였다. 창동에서 부림시장을 지나 성호동 산동네에 조성된 가고파 꼬부랑길 벽화마을은 한걸음 한걸음 걸을때마다 달라지는 다양한 벽화들을 볼 수 있으며, 이색 포토존도 볼거리 중에 하나이다.

 

 

 

*몽고정 설명문

 

*임항선의 일부 보존 철로

 

*몽고정의 모습

 

 

 

위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 118
문화재 지정 [몽고정]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2호(1983.12.20 지정)

 

고려 말 충렬왕 7년(1281) 원나라 세조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두었으나, 일본 정벌이 2차에 걸쳐 실패로 돌아간 그 해 10월에 연해방비를 위해 이곳 환주산(環珠山)(현, 자산동 무학초등학교 뒤쪽 마산시립박물관 일대)에 둔진(屯鎭)을 설치하였다. 이 몽고정은 이곳의 둔진군(屯鎭軍)이 용수(用水)를 쓰기 위해 만들었던 우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고정 맷돌’이라고 불리는 직격 1.4m 가량의 원방형(圓方形)의 돌이 몽고정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를 차륜(車輪)이라는 설도 있으나 맷돌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물 곁의 석비에 몽고정(蒙古井)이라 써서 세워둔 것은 1932년 마산 고적보존회(일본인 고적단체)가 멸시적 감정에서 명명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고려정이라 불렸을 것이다.

* 규모 - 1개소
* 재료 - 화강암
* 시대 - 고려시대

 

 

 

*3.15의거 기념탑

 

*임항선 그린웨이

 

*남파랑길 창원9코스 진해드림로드 입구에서 마산항까지 4시간10분 소요 도

 착. 오늘은 쌀쌀한 날씨와 심한 바람으로 오전에는 힘든시간을 보내고 무사

 히 종착지 도착

 

 

                   *남파랑길 누적거리 : 155.7km

                   *거 리 : 울산~진해드림로드입구 = 왕복194km 누적544km+194km = 738km

                   *경 비 : 통행료= 11.000원. 택시=14.000원

                   *누적 지출경비 : 69.800원+25.000원 = 94.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