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갈맷길 걷기

갈맷길 7-1코스(성지곡 수원지~동문)9.4km | | 부산 갈맷길 걷기

문수산 아래 2020. 2. 16. 20:25

*날  자 : 2019년 01월 13일(일요일).맗음.-3~6도

*누구와 :부부

*코 스 :성지곡 수원지~만덕고개~산성고개~금정산성 동문(9.3km)=3시간20분


*한겨울의 쌀쌀한 날씨로 모두가 움직이기를 싫어하지만 우리부부는 오늘도

 배냥을 메고 산으로 향한다.

 갈맷길 7-1코스를 걷기 위해 노포동에 주차 후 성지곡 어린이 대공원까지

 택시로 이동한다.



*추운 날씨인데도 사람들이 나들이 중이네요.

*어린이 회관을 지나고...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

*조금 오르니 편백숲이 우리를 반기네요.

*성지곡의 아름다운 이야기

*이정표

*걷기에는 이보다 좋을수가 없어요.

*능선에 도착

*금용산 철 이야기....

*계단의 길이가 .....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솔밭길을 ....

*금정산 방향으로...

*여기는 사시사철 사람들로 붐비는 소나무 군락지.

*이것도 뭔 산성이 아닐까??

*신어귀 전망대에서 바라 본 해운대 방향.

*신어귀 전망대에서

*신어귀 정상의 모습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어요.

*내려 가면서 바라 본 계단의 모습.

*방향 이정표 남문으로...

*만덕 고개와 빼빼영감

*만덕고개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서 빼빼 영감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만덕고개와 빼빼 영감」은 비상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삿자리[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장사로 신분을 감춘 빼빼 영감이 만덕고개에서 장꾼을 위협하고 재물을 빼앗는 도적 무리를 물리쳤다는 이인담(異人談)이다. 현재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과 동래구 온천2동 사이를 이어주는 만덕고개에는 ‘만덕고개 도로 개통비’가 서 있다.


[채록/수집 상황]
1993년 부산광역시 동래구청에서 간행한 『동래 향토지』에 「만덕고개와 빼빼 영감」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채록 시기와 채록자는 분명하지 않다.


[내용]
동래 남문 밖에 동래와 구포장을 오가며 삿자리 장사를 하는 홀아비가 있었다. 그 삿자리 장수는 어찌나 여위고 피골이 상접하였던지 사람들이 빼빼 영감이라고 불렀다. 이 영감이 하루는 구포장을 보고 동래로 돌아오는 길에 만덕고개에 있는 주막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이때 10여 명의 도적 무리가 뛰어들어 장꾼들을 묶어 놓고 물건을 팔고 얻은 돈과 가진 것을 모두 내어 놓으라고 위협했다. 그러자 빼빼 영감이 용감히 앞으로 나서서 “여기 있는 장꾼들은 이 험한 고개를 다니면서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도둑질을 하고 산다고 하지만 사람을 보고 물건을 털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라고 애걸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도적들은 “묶인 녀석이 무슨 잔소리냐?”라고 하며 빼빼 영감에게 달려들어 뭇매를 때리고 발길로 찼다.

빼빼 영감은 주저하듯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더니 벌떡 일어서며 “이놈들! 이 끈을 풀지 못하겠느냐?” 하고 외쳤다. 그때, 그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으며, 몸에 묶인 밧줄은 이미 모두 끊어진 뒤였다. 빼빼 영감은 비호같이 날쌘 몸놀림으로 도적들을 단번에 제압했다. 이 비범한 완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도적들은 모두 도망쳐 달아났다. 도적들을 물리친 빼빼 영감은 묶여 있는 장꾼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빼빼 영감은 주모에게 술과 안주를 있는 대로 가져오라고 청하더니, “여러분 이 술은 제가 모두 사겠습니다. 그러니 마음껏 잡수시기 바랍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마을에 내려가거든 오늘 일어난 이야기만은 절대 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사흘 후, 한 장꾼이 빼빼 영감의 집을 찾아갔더니 그 집은 텅텅 비어 있었다. 이 소문이 밖으로 새어 나오자 나라에서는 빼빼 영감이 비상한 힘을 가진 장사인 것을 알고 찾았으나 그 행적을 알 길이 없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만덕고개와 빼빼 영감」의 주요 모티프는 ‘이인(異人)’이다. 비범한 능력을 지녔으나 숨어사는 존재인 이인 설화는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만덕고개와 빼빼 영감」에서는 빼빼 영감이 외모와는 다르게 매우 힘이 센 이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빼빼 영감 역시 이인 설화 유형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있으며, 능력이 발각되자 사라져 버린다. 한편 「만덕고개와 빼빼 영감」 이야기는 동래와 구포 사이에 있는 험한 고개인 만덕고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부산 지역 주민이 만덕고개와 얼마나 친숙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산성마을 가는 길

*갈맷길 7-1코스 안내도

*안내도 앞에서 인증샷

*산성마을의 음식점촌

*금정산성 남문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 남쪽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문.


[위치]
금정산성 남문(金井山城南門)은 금정산성의 남쪽 능선 해발 510m의 높은 곳에서 완만하게 낮아진 자리에 위치한다.


[변천]
금정산성 남문은 1703년(숙종 29)에 부산 금정산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1806년(순조 6) 동래 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래읍성(東萊邑城)의 배후 성지로서 금정산성의 경영을 요청하여, 1807년(순조 7) 가을부터 1808년(순조 8) 초봄까지 금정산성 남문을 쌓아 완성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금정산성 남문이 허물어져 육축(陸築)[성문을 축조하기 위하여 무사석 등 큰 돌로 축조한 성벽] 일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2009년에는 금정산성 남문의 상부 주변에 성가퀴[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복원되었다.


[형태]
금정산성 남문의 규모는 육축 부분이 41.53㎡ 정도이고, 문루가 18.63㎡이다. 성문의 형식은 앞면과 뒷면 모두 평거식(平据式)의 문으로 되어 있다. 나무로 된 성문의 폭은 290㎝, 높이는 280㎝이고, 육축의 폭은 480㎝이다. 아치형 문의 높이는 5m, 너비는 2m, 두께는 4m이다. 두 짝의 나무문에는 철엽(鐵葉)을 달았다. 금정산성 남문은 금정산성 동문(金井山城東門)이나 금정산성 서문(金井山城西門)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정면의 어간을 좌우 협간보다 두 배 정도 넓게 잡았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문루로서 양성 바름[지붕마루의 수직면에 회사 반죽 또는 회반죽을 바른 것]으로 되어 있다.


[현황]
현재 금정산성 남문은 완전히 복원되어 웅장한 옛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금정산성 남문은 동래 온천장 방면에서 금정산성으로 출입하는 주 통로이며, 성문 바깥쪽으로 굴곡이 져 있어 적대(敵臺)와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금정산성 남문은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인 금정산성 4성문 중의 하나로서 일제 강점기에 방치되어 훼손되었으나, 현재 복원되어 조선 시대 산성의 문루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금정산성 남문의 설명

*금정산성 설명


 

임진왜란정유재란 때문에 금정산성이 설치되었다. 한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성답게 행정구역도 부산 금정구와 북구, 동래구를 비롯해 경남 양산시와도 경계를 이룬다. 때문에 산성을 오르는 코스는 매우 다양하다. 산성을 순회하는 코스 역시 무궁무진하게 짤 수 있다.[1] 1701년~1703년(숙종 29년)에 건설이 완료되었다. 벽 공사는 1707년에 끝났으며, 17 킬로미터 길이에 1.5~3 미터 높이이다. 성 내부의 넓이는 8.2 제곱킬로미터이다. 1807년까지 유지비용 때문에 사용되지 않았다. 서문이 그 해에 지어졌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성곽이 유실되었으나 복원작업을 통해 거의 복원하였다. 금정산성 남문 주위의 지역은 휴식 공간으로 인기가 있다. 금정산성 서문은 가기 힘들기 때문에 거의 찾지 않는다.

안내문[편집]

조선시대에 돌로 쌓은 석성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숙종 29년(1703)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쌓은 곳이다. 전체길이는 약 17km이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박태항에게 책임지어 쌓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에 앞서 현종 8년(1667)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중요한 곳에 있어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한 성임을 알 수 있으며, 성의 크기나 성벽을 쌓은 양식으로 볼 때 처음 성을 쌓은 시기는 보다 앞선 시기까지도 올려 볼 수 있다.

숙종 33년(1707)에는 성이 너무 넓다 해서 성의 중간에 남북을 구분하는 성을 쌓았고 영조 50년(1774)에는 성이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일단 폐지하였다. 순조 6년(1806)에 성을 다시 고쳤으며, 성벽은 화강암을 자연석 그대로 이용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동문·서문·남문을 복원하였으며, 1989년에 북문을 복원하였다.

현재 4㎞의 성벽이 남아 있으나, 조선 후기에 도성과 주변의 대규모 방어시설을 충실히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복원[편집]

일제 강점기에 많은 성곽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1972년부터 복원 작업이 시작되어 동문, 남문, 서문이 1974년 완공되었다. 부산시가 진행하는 복원 계획은 완료되었다. 1996년부터 2010년까지 다단계로 진행되었다.

  • 1단계(1996~2000): 서쪽 구역 복원
  • 2단계(2000~2005): 동문~북문 사이의 벽 및 3,4 전망대 복원
  • 3단계(2006~2010): 서문과 동문의 남쪽 및 1,2 전망대 복원


*아름다운길 걷고 싶은 길 갈맷길







*금정산성의 모습

*남문에서 동문 내려가는 길

*등산로

*동래산성 마을길 굴다리

 오늘의 코스가 동문까지 가야 하지만 7-2코스 시작을 여기서 할려고

 오늘은 여기서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