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제주 올레길 1코스(시흥 초등학교~광치기 해변)15.1km

문수산 아래 2020. 2. 17. 21:48

* 언 제 : 2019년 03월 01일 (금요일) . 맑음 . 기온 14~17도

*누구와: 부부

*코 스  : 시흥초등학교~알오름~종달리~성산갑문~광치기해변(15.4km)


*3.1절과 주말을 이용해 가고자 했던 제주도 올레길 걷기를 이번에 우리

 부부는 울산에서 부산공항 제주행 비행기를 이용 목요일 저녁에 제주공황

 도착 1코스 시작점부근의 이장님댁에 민박을 예약.

 저녁에 제주공항도착 서귀포행 버스를 이용해 숙소 시흫리도착 밤9시 숙소

 도착 내일을 위해 숙면.

 아침에 민박집에서 아침을 먹고 이장님이 1코스 시작점까지 차로 이동해 주

 셨어 09시 20분에 걷기를 시작합니다.




*시흥리의 아침풍경 어제 저녁늦게 숙소에 도착한 관계로 주변을 둘러볼 여

 유가 없었는데 아침에 숙소앞 돌담길의 시골길이 정감이 가네요.

 좌측 동백꽃이 있는집이 숙소 이장님댁 민박중입니다.

*대문앞에 어미개가 강아지를 치키고 있네요 . 우리의 올레길 1코스 시작을

 배웅 할려고 기다리고 있네요.

*시흥리의 조용한 아침풍경 가슴이 시원해 집니다.

*올레길 할망숙소 강병희 이장네 민박집

*이장님의 배려로 숙소에서 1구간 시작점 시흥 초등학교 출발점 도착

*대장정의 출발점 무사귀환을 마음으로 다지며 힘차게 출발이다.

*올레길 1코스 안내도

*출발점 시흥리 마을이야기....

*출발은 마을길이 이국적인 야자수와 돌담으로 이여진 길을 시작합니다.

*길을 배경으로 앞에는 말미오름이 보이네요.

*조용한 시골길의 풍경 막힘이 없어요.우리의 삶도 이렇게 펑 뚤렸으면...

*우리가 지나가야하는 오름의 풍경

*길가의 밭에는 이런무우가 있는데 왜 이런모습인지 몹시 궁금

*제주 올레길 안내소 안에는 안내책자 간단한 올레용품판매 하네요

*안내소 화장실 이용후 말미오름을 입구에 소망쉼터에는 전국의 수많은

 산악회의 리본이 올레길의 인기를 말해 주네요.

*입구에서 오름정상까지 제법 가파른 길을 올라오니 보상이라도 하는것

 처럼 시원한 바람과 조망권을 보여 주네요.정상의 주인이 두산봉이네요.

*두산봉에서 바라본 첫날의 제주 운무로 시야는 흐리지만 좋은모습 마음으로

 담아갑니다.

*간세(Ganse) 제주 조랑말을 표현한 제주올레 상징 "게으름뱅이"란 뜻의

 제주어 "간세다리"에서 이름을 따왔다

*말미오름은 말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혀진이름 또다른이름은 두산봉(126.5m)으로 불린다

*이런 푸르른 솔밭길 걸어 본 기억이 언제가 기억도 없네요.

*제주 올레길의 길잡이 "간세"방향을 알려주네요.

*제주도에도 옛날부터 매장문화가 만들어낸 현무암 돌담으로 묘지를 두른

 형태 제주 어디를 가나 볼수있는 모습이네요.

*간세의 안내를 받으며....

*말미오름을 내려와 우측 알오름으로 경사길을 올라간다.

*기지개 한번하고....

*알오름 정상정복(145.9m)

*깔끔한 정상석이 있으면 좋았을 것을...

*알오름 정상에서 내려다 본 주위의 시골풍경 어느 유럽의 아침풍경 같네요

*이런길을 지루함을 모르도록 정말 환상의 길입니다.

*알오름을 내려와 조용한 시골길을 걸어요.

*여기서 부터는 지명이 종달리 입니다.


*종달리의 유래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에 속하는 행정리이자 법정리.


[명칭유래]
‘종달(終達)’은 맨 끝에 있는 땅, 제주목의 동쪽 끝 마을, 또는 종처럼 생긴 지미봉(地尾峰)[165.3m] 인근에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원래 종달은 종다릿개[終達浦]라는 포구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주민들은 종다리 또는 종달이라 부른다.


[형성 및 변천]
약 800여 년 전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19세기 중반까지 정의현 좌면에 속하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제주군 좌면에, 그 후 북제주군 구좌면과 구좌읍에 속하였다. 2006년 7월 제주특별자치도 출범과 함께 북제주군이 없어지면서 제주시에 편입되었다.


[자연환경]
종달리는 한라산 동쪽 끝 해안가에 위치한다. 해발 고도 250m에 이르는 남쪽에서부터 북쪽 해안까지 길게 뻗어 있다. 남에서 북으로 동거문오름[340m], 손자봉(孫子峯)[255.8m], 용눈이오름[247.8m], 은월봉[197.6m]이 연이어 있으며, 해안가에는 바로 남쪽에 마을을 끼고 지미봉이 솟아 있다. 북쪽에는 넓은 모래 해안이 펼쳐진다.


[현황]
종달리는 제주시 구좌읍의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반농반어 마을이다. 2007년 현재 면적은 16.99㎢이며 총 499세대에 1,36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최근에는 어업 인구가 점차 감소함에 따라 농업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주요 소득원은 당근과 감자이며 마늘도 많이 재배한다. 동남쪽 해안에는 천혜의 모래밭이 형성되어 있어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소금을 생산하였으나 지금은 논으로 이용된다. 간조 때 넓은 백사장이 드러나는 동쪽 해안은 조개잡이 체험어장으로 지정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종달리에 흔적을 남기고 갑니다.

*나도 종달리의 노거수앞에서 안녕을 기원하며.....

*종달리를 지나면서 언덕위에 이쁜커피집이 있어 잠시 쉼을 하고 갑니다

*나머지 구간의 걷기를 위해 힘보충을 하고 갑니다.

*커피집의 이쁜 소품들.

*올레길의 묘미 여유로운 여행 걷기 좋아요.

*종달리를 뒤로하고 가다 만나는 쉼터

*여기도 살짝 흔적을 남겨요.

*바다 언덕위에 이쁜 주택들이 우리의 눈길을 반겨주네요.

*용화지 연못 = 어떤 목적의 연못일까.....

*조금전에 건너편에서 바라 본 전원주택단지

*해맞이 해안도로에서 바라 본 종달리 해변의 모습.

*종달리 해안도로 해녀상

*오징어가 제주의 특산물인가 종달리 해안도로변에는 오징어가....

*이리 가면 호국영웅 강승우로

*올레길1코스 중간지점(목화 휴계소)에서 스탬프 찍는곳

 간세 등에 잠시 휴식중

*물빠진 해변의 모습. 저멀리 지나온길이 한눈에 들어 오네요.

*가야할 해변의 풍경.

*호국 영웅"강승우 육군 중위

 [정의]
6.25전쟁 때 활약한 서귀포 출신의 군인.


[가계]
본관은 신천이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강치원이고, 어머니는 부남근, 부인은 김춘일이며, 아들 강응봉을 두었다.


[활동 사항]
강승우(康承宇)는 1938년 성산포서공립심상소학교[현 동남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44년에 졸업을 하였으나 집안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야학을 열어 지역주민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농민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48년 4·3사건이 일어나자 야학활동과 농민회 활동을 중단하였고, 이 때 동리의 김춘일과 혼인을 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강승우는 동네 청년들과 함께 9월 1일 육군 제5훈련소에 자원입대하였다. 훈련소에서 기초훈련을 이수하고 9월에 전선에 투입되었고, 10월에는 아들인 강응봉이 태어났다.

그 후 강승우는 1951년 6월에 육군간부후보생으로 지원, 선발되어 6월 24일 부산 동래의 육군보병학교 갑종간부 제7기생으로 입교하여 20주간의 교육훈련을 마치고 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

임관후 9사단 제30연대 제1대대 제1중대 제1소대 소대장으로 임명받은 강승우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 소재의 395고지[백마고지]에서 중공군 2개 사단과 대치하여 전투를 치르던 중 아군이 전멸할 위기에 처하자 안영권·오규봉 일병과 함께 수류탄과 박격포탄을 안고 적 중화기 진지에 몸을 날려 폭파시키고 1952년 10월12일 전사하였다.


[묘소]
강승우의 유해는 가족의 요청으로 고향인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충혼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강승우는 안영권·오규봉 일병과 함께 1953년 7월 1일 금성 을지무공훈장과 일계급특진을 추서받았고, 1953년 5월3일 미국 은성훈장도 추서받았다. 그리고 1995년 4월에는 전쟁기념사업회의 ‘100인의 호국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10월과 2013년 10월에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1년, 2014년 10월에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6·25 전쟁 영웅'으로 선정되었다.

1973년 10월 12일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 대공원에 백마고지 삼용사 동상이 건립되었고, 1990년 5월 3일에는 철원읍 백마고지 남쪽에 백마고지 전적비가 세워졌다. 1991년 6월 15일에는 제주시 일도2동 탐라 자유회관 경내에 강승우 중위의 동상이 건립되었고, 서울특별시 용산구 전쟁기념관에도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2001년에는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동남초등학교에 강승우 중위의 흉상이 건립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길가에는 유채꽃이 만발 그냥갈수가 있나 한컷하고 가요.

*성산.오조 지질트레일.화산,바다와 만나 사랑을 해양문화를 품다.

*성산입구에 도착

*내일 우도 갈려면 아침에 다시 여기로 와야겠조

 여기는 우도 선착장

*앞에는 성산 일출봉이 .....

*저멀리 희미하게 가파도가 보이네요.

*포토죤에서 인증샷

*언덕에서 성산 일출봉을 배경으로 인증샷.

*성산 일출봉 올라가기...


명칭 유래

산 모양이 성과 흡사하기 때문에 산명을 성산봉이라 하고, 이 산에서 일출을 바라보는 것이 제주 일경(一景)이라서, 예부터 일출봉이라 하였다.


자연환경

제주도의 생성 초기에 해당하는 신생대(新生代) 제4기초에 형성된 성산리층(城山里層)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층은 회색·황갈색·담회색 또는 암회색을 띠는 중립(中粒) 내지 조립질응회암(粗粒質凝灰岩)으로 되어 있다. 고결도(固結度)는 낮은 편이나 침식에 대한 저항력이 강해 기암절벽을 이룬다.

성산 일출봉은 해안에 있는 도두봉·송악산·용머리 등과 같이 수중에서 분출되어 형성된 분화구가 융기하여 지표면 위로 솟아올라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원지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해중(海中)에서 융기하면서 풍화 및 침식작용을 받았다는 사실은 측면에 발달된 층리(層理)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성산 일출봉의 육상식물은 제주분홍풀과 같은 신종식물을 포함하여 73과 179속 220종으로 조사되었다.


형성 및 변천

성산 일출봉은 약 5천 년 전 해수면이 현재와 같아졌을 때 얕은 수심의 해저에서 섯치형(Surtseyan) 수성화산활동(hydrovolcanism)에 의해 형성된 화산이다. 일출봉은 높이 180 m, 분화구 직경이 약 600m, 지층의 경사각은 최대 45°, 분화구 바닥은 해발고도 90m로서 전형적인 응회구의 지형을 지니고 있다.

성산 일출봉은 현무암질 마그마가 얕은 바다 밑으로 분출하며 형성되었다. 화산재와 화산력은 화구 주변에 쌓아며 뚜렷한 층리를 만들었고, 그에 따라 안식각(30°)을 넘는 가파른 경사면을 가진 응회구가 만들어졌다. 가파르기 때문에 크고작은 사태가 일어났고 지층이 변형되고 빗물과 유수에 의한 침식이 일어나 일출봉의 가장자리를 따라 퇴적층이 쌓이게 되었다.

산 전체가 그대로 정상으로 큰 분화구를 형성하고 분화구 주위에는 99개의 기암이 절경을 이룬다. 2.64㎢의 분화구 속에는 넓은 초지가 형성되어 예로부터 성산리 주민들의 연료 및 초가 지붕을 이는 띠의 채초지(採草地)로 이용되어 왔다. 방목지로도 쓰여 매년 화입(火入)을 하였기 때문에 나무는 거의 없고 억새·띠 등의 식물군락을 이루고 있다.

성산 일출봉은 본래 제주도와 떨어져 있었으나 사주(沙柱: 해안퇴적지형의 한 가지로서, 주로 해안의 돌출부로부터 바다를 향해서 발달하는 것으로 하천에 의해 운반된 사력들이 퇴적 된 것)가 발달함에 따라 점차 연결되었다. 또한 일출봉은 제주도의 360여 개의 기생화산 가운데서 3면이 바닷물에 의한 침식작용을 받아 암석만 남은 돌산으로, 화산지질 및 지층구조를 단면으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산이다. 그리하여 지리학 및 지질학계의 중요한 연구 대상 지역이 되고 있다.


현황

높이 182m의 성산 일출봉은 제주도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는 관계로 예로부터 영주십경(瀛州十景)의 하나로 여겨졌다. 1976년에 제주도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가 2000년 5.02㎢의 성산 일출봉 천연보호구역이 천연기념물 제420호로 지정되었다. 일출봉의 응회구는 지형을 잘 간직함과 동시에 해안절벽을 따라 다양한 내부구조를 훌륭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2007년성산 일출봉 응회구의 1.688㎢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료 관광지로 지정되었고, 부근의 해안경관과 더불어 관광지로 유명해 졌다. 일출봉의 전반적인 모습과 우도 관광은 성산포에서 관광유람선을 이용하면 가능하다. 일출봉에 가기 위해서는 제주시에서 동회선 일주도로를 타고 동남리 입구에서 성산리로 가면 된다.


 

*성산 일출봉 올라 가는길.

*등경돌 바위

 제주도의 동쪽을 지키던 장군바위 중에서 다른곳으로 파견되어 나가는 형상

 의 바위이다.

 입을 벌려 크게 외치는 대장군 바위를 바라보고 명령을 받는 형상이다.

 이바위는 말을 타지 않고도 하루에 천리를 달리며 활을 쏘지 않고도 요술로

 적장의 투구를 벗길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전설이 있다.

 옛날에는 출정한 남정의 아낙들이 무운을 빌고 먼 길을 걸어야 하는 장사꾼

 들이 횡재를 빌던 바위이다.

 형상이 등경과 같이 생겨서 등경돌 바위라고도 부르며 별장바위라 고도 부른

 다

*초관바위를 배경으로.....

*초관 바위

 제주도의 동쪽을 지키던 장군바위 중에서 세 번째로 지위가 높은 장군바위이

 다.재물을 불리는데 재주가 뛰어났고 병사에서 진급을 거듭하여 장군이 된

 바위라고 전한다.그래서 이 바위 밑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승진이 빠르다고

 믿었다.

 선조30년(1597년)에 수산진을 천혜의 요새인 이 곳 일출봉 정상으로 옮겨

 많은 군사가 주둔 하였다.그때에 수많은 군사들이 빠른 진급을 기원하며 이

 바위를 어루만졌기 때문에 바위의 절반이 깍여 나갔는데 바위가 없어질 것

 을 염려하여 군법으로 바위를 만지지 못하게 하였다.그래서 금마석이라 하여

 일명 초관바위라 부른다.

*일출봉 오름길에서 뒤돌아 본 성산읍의 전경.

*성산 일출봉의 분화구 모습

*일출봉에서 바라 본 성산읍의 전경

*일출봉 정상의 모습.

*성산 일출봉 하산 중 뒤돌아 본 모습

*일출봉 하사 후 일출봉을 배경으로...

*일출봉 구경 후 광치기 해변 가면서 일출봉

*마지막으로 일출봉을 배경으로...

*여기 해변이 무슨 일이 있었나

*제주 4.3사건의 현장.


 요약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역사적 배경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고,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서북청년회(이하 ‘서청’)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경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김익렬 중령은 경찰·서청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귀순작전을 추진해 4월 말 무장대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제9연대장은 교체되었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파견하여 5·10 선거를 추진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결국 5·10 선거 후 강도 높은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 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 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결과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이후 4·3평화공원 등이 조성되었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2011. 1. 26 현재), 희생자로 1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됐다.


의의와 평가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요약 1947~1954년 제주도에서 벌어진 남로당과 토벌대의 무력 충돌 및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학살당한 사건. 해방 이후 사회주의 세력과 우파 세력의 갈등으로 인해 야기되었다. 1947년 3월 1일 기념일 시위에서 벌어진 좌우 세력간의 우발적 충돌이 확대된 후, 1948년 4월 3일 무장 봉기한 남로당과 시위대의 진압 과정 및 한국전쟁 이후의 토벌 작전을 통해 3만 여 명의 도민이 학살당했다. 이 사건은 종결 이후 금기시 되다가, 1990년대에야 역사적으로 재조명되어 2000~2007년 진상 조사와 피해자 파악이 실시되었다.

개요

4 ・ 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 여에 걸쳐 2만5000~3만 여명의 제주도 주민들의 희생당한 사건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6 ・ 25 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으로 꼽힌다.

2000년 제정된 '제주4 ・ 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4 ・ 3사건의 시기를 경찰의 발포 사건이 있었던 1947년 3월 1일부터 한라산 금족지역이 해제되는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 간으로 잡고 있다.

이 시기 동안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당시 도민 인구의 11% 가량에 해당하는 2만5000~3만 여 명의 주민이 희생당했다. 가옥 4만 여채가 소실되었고, 중산간 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

4 ・ 3사건은 군사정권 동안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되며 금기시되다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특별법 제정,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등을 통해 진상규명과 정부의 공식 사과, 희생자 보상 등이 이뤄졌다.

4 ・ 3 사건 과정

1947년 3 ・ 1절 발포사건과 3 ・ 10 총파업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는 제주도에 일본군 6만 명을 주둔시키고 비행장과 격납고를 만드는 등 섬 전체를 요새화하는데 진력했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20여 만명에 불과했는데, 이들은 비행장 건설, 동굴 파기 등에 동원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 주민 6만 명이 귀환했다. 급격한 인구변동과 함께 제주도는 극심한 실업난과 흉년, 생필품 부족을 겪었고 콜레라가 발병하며 수백명이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에 더해 미군정이 일제에 부역한 이들을 군정경찰로 중용해 치안을 맡기면서 갈등과 미군정에 대한 불신이 커진 상태였다.

1947년 3월 1일 3 ・ 1절 기념식에 이은 가두시위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였는데, 해당 경관이 아이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본 시위군중들은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주민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 주민이었다.

3 ・ 1발포사건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은 3 ・ 1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에 나선다.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 ・ 1사건에 항의하는 민 ・ 관 총파업이 벌어졌다.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노동자, 각급학교 교사 등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6개 기관 ・ 단체가 동참하는 대규모 파업이었다.

미군정은 총파업에 강경대응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 사람들로 교체됐고, 전남•북과 경기도 응원 경찰과 서청단원을 제주도에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경찰은 한달만에 500여명을 체포했고, 1년 동안 2500명을 구금했다. 1948년 3월에는 검거된 청년 세 명이 일선 지서에서 고문과 구타에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져 민심이 들끓었다.

1948년 4 ・ 3 무장봉기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 세력들은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 단정 반대, 통일 정부 수립 촉구 등을 내건 무장 투쟁을 결정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의 지서와 서북청년회, 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단체를 공격하며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 사건으로 4월 3일 하루 동안에 △경찰 : 사망 4명, 부상-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 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 : 사망 2명, 생포 1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미군정청은 무장봉기가 발생하자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 사태 진압을 명령했다. 당시 제9연대장 김익렬 중장은 무장대 측 김달삼과 협상을 통해 평화적 사태 해결과 합의했으나 우익청년 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하며 평화협상은 깨졌다. 미군정청은 제9연대장을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는 김익렬에서 강경진압 방침을 내세우는 박진경으로 교체했다. 박진경은 부임 초기부터 강경한 토벌 작전을 벌이던 중 소속 대원에게 사살된다.

1948년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실시됐다. 제주도당 무장대는 선거사무소를 공격하거나 선거 관계 공무원을 납치 ・ 살해하고, 선거인 명부를 탈취하는 등 5 ・ 10 단독선거에 적극적인 거부 투쟁을 벌였다. 주민들도 선거 반대에 동조해 입산, 선거를 거부했다. 결국 남한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의 2개 선거구만이 투표소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됐다. 미군정은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김달삼은 1948년 8월 21일부터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해 4 ・ 3봉기의 정당성과 성과를 정리한 연설을 했다. 무장대 지도부가 북한 정권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경찰과 서청단원의 강경진압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계엄령 선포 ・ 북촌 학살사건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0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타 지역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키며 본격적인 진압 작전에 나섰다.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14연대가 파견명령에 반발해 봉기했다. 이들이 정부 진압군과 맞서는 과정에서 민간인 수천명이 학살 피해를 당하는 여순사건이 벌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해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도, 전남사건을 완전히 발근색원해야 미국의 원조가 적극화할 것"이라며 "(제주 4 ・ 3사건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고 밝혔다.

일명 '초토화 작전'으로 불리는 이 작전에 따라 9연대에 의해 중간산마을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시행됐다. 토벌대는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로 소개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마을을 불태웠다. 소개령을 전달하지도 않고 방화와 학살을 저지른 곳도 많았다. 해변 마을로 소개해온 사람이라 할 지라도 가족 중 한 명만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 해 총살했다.

12월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역시 강경 진압을 계속했다. 특히 반공주의자인 서청단원이 많이 편성된 2연대 3대대는 400여 명의 주민들을 집단 총살한 '북촌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어귀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사망한데 대한 보복으로 북촌마을 주민들을 북촌 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 시켜 집단 총살한 것이다.

한편 무장대의 보복 습격도 끊이지 않았다. 무장대는 1948년 11월 무차별 토벌작전이 벌어진 이후 일부 마을을 지목해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군, 경 토벌대의 진압작전과 무장대의 보복 살상으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1949년 4월 1일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1948년 한 해 동안 1만 500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그중 80%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의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 정책을 발표했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다. 하산한 주민들의 상당수는 임시수용소에 갇혀있다 석방되었으나 1650여 명의 귀순자들은 형식적인 군법회의를 거쳐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됐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치러졌고, 같은해 6월 7일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사살됐다.

한국전쟁 발발

1950년 6 ・ 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에는 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당시 후퇴하던 국군과 경찰은 좌익 사상가 및 활동가와 좌익에 가담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북한군에 합류할 수 있는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여 살해했다. 이를 예비검속이라고 불렀는데,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됐던 4 ・ 3 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됐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도 아직 대부분 그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제주 내에서도 예비 검속에 따라 1120명이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 암매장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제주도에 육군 제5훈련소를 설치하고 신병 양성에 나섰다. 이때 제주도 일반인들과 중, 고등학생 등 청년들 3000명이 해병 3,4기로 지원 입대했다. 이중에는 최초의 전투여군 소녀 학도병 14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서울 탈환에 성공했다.

1952년 제주도 경찰국은 '100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해 한라산 기슭 곳곳에서 무장대 토벌전을 벌였다. 1954년 9월 21일 제주도 경찰국은 한라산 금족 지역을 해제, 전면 개방을 선언했다. 이로써 1947년 3 ・ 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 ・ 3 무장봉기로 촉발됐던 제주 4 ・ 3 사건은 7년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금족 지역 해제 이후 소개됐던 중산간 마을에 대한 복구 및 이주 ・ 정착사업이 벌어졌다. 상당수는 원래 살던 곳을 찾아 돌아갔으나, 절반에 가까운 이들은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희생된 곳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이때문에 4 ・ 3 사건 때 집중적인 피해를 입은 마을 중 일부는 이전처럼 복원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제주 화북구의 곤을마을이 대표적이다.

4 ・ 3사건 이후

'빨갱이' 낙인과 진상규명 운동

1960년 4 ・ 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자 국회에서 4 ・ 3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제주 출신 국회의원들의 발의로 양민학살 진상규명 조사단이 꾸려지고 학살 피해 접수가 잠시 이뤄졌다. 그러나 이듬해 5 ・ 16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진상규명은 중단됐고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이들이나 유가족이 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권 시절 4 ・ 3사건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되어 금기시됐다. 전두환 정부때 4차 교과서는 4 ・ 3사건을 '제주도 폭동사건'으로 지칭하며 "공산 무장 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 작전 중의 하나라고 서술했다.

특히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가족이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로 반공법•국가보안법과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아야 했다. 1978년 작가 현기영은 4 ・ 3사건을 다룬 소설 '순이삼촌'을 냈으나,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대학가와 시민사회에서 4 ・ 3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이어져왔다. 1989년 5월 제주 4 ・ 3연구소가 설립되어 피해자 및 유족 채록집 '이제사 말햄수다'를 출간했다. 1993년 제주도 의회에서 '4 ・ 3 특별위원회'를 구성, 피해 신고를 받았다.

4 ・ 3특별법과 공식 사과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4 ・ 3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국회는 1999년 12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제주4 ・ 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 ・ 3특별법)'을 통과시켰다.

특별법 제정 이후 '제주 4 ・ 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4 ・ 3위원회)'가 구성되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과 확정 △희생자와 유족 신고접수 및 결정 △4 ・ 3평화공원 조성과 4 ・ 3평화기념관 건립 △희생자 유족의 의료지원금 지원과 후유장애인에 대한 생활지원금 지급 등의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2003년 10월 15일 4 ・ 3위원회가 발간한 '제주 4 ・ 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정부 공식 보고서로 확정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30일 제주도를 방문해 보고서를 토대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4 ・ 3 사건이 발생한 지 55년 만이었다.

2005년 1월 27일에는 제주도가 '평화의 섬'으로 공식 지정되었다. 2014년 3월에는 '4 ・ 3희생자 추념일'이 법정 기념일로 신규 지정됐다. 같은해 4월 3일 열린 추념식에는 여야 정당대표를 비롯해 희생자 유족과 시민1만 여명이 참석했다.

제주4 ・ 3사건 진상보고서

제주4 ・ 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사건 발생 55년 만에 정부 차원에서 조사된 종합보고서로 공공기관과 개인으로부터 자료를 수집해 보고서에 반영했다. 보고서는 총 615쪽에 이르고, 사건의 원인이나 배경・전개과정・피해 등을 종합적으로 다뤘다. 과거 사건을 두고 특별법에 의해 보고서가 작성된 것은 4 ・ 3진상보고서가 최초다.

진상보고서는 4 ・ 3사건을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집단 살상의 책임은 당시 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군에게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출간 이후 보수단체가 소송과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등 적지 않은 논란을 겪었다. 보수단체들은 4 ・ 3진상보고서는 가짜라고 주정하고, 희생자 결정 무효 등을 주장하며 6건의 행정소송과 현법소원 등을 제기했다. 사법부는 이에 모두 각하 혹은 기각 결정을 내렸다.

4 ・ 3 위원회

'제주 4 ・ 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는 제주도에 실무위원회를 꾸리고 본격적인 진상조사와 희생자 선정 작업이 진행했다. 희생자 신고는 2000년 6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4차례에 걸쳐 실시됐다.

4 ・ 3사건의 희생자는 2만5000~3만여 명으로 추정되나 4 ・ 3위원회가 17년 동안 결정한 희생자는 1만 4233명에 그쳤다. 행방불명자가 많은데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동안에는 희생자 결정을 위한 4 ・ 3 위원회가 단 1차례만 열렸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한해 동안 4 ・ 3 희생자와 유족 결정을 위한 추가 신고를 받기로 했다.



*우리는 알것을 알고 가야죠

*우리도 아픔을 같이 하며 이사건은 가슴깊이 간직하고 갑니다.

*오래 기억 하겠습니다.

*자동차와 말의 조화 묘하네요.

*여기는 1코스 종료.2코스 시작점 도착 (7시간40분 소요)

 올레길1코스 걷기를 하면서 오랜만에 부부간의 대화 . 정말 여유로운 걷기를

 한것 같아요.이런 여유로운 시간을 갔고 걷기를 한것이 이번이 처음이였던

 것 같다.7시간의 여유 마음것 주위를 감상하고 눈에 담고 가슴에 담고 머리

 에 저장을 하고 양발걸음은 발자욱을 제주에 남기고 환상의 걷기여행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