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

지중해 여행 8일째(스페인:마드리드.톨레도 관광)

문수산 아래 2017. 3. 7. 22:38

*지중해 여행 8일차 일정을 마드리드에서 1시간30분을 달려 톨레도(스페인

 의 옛 수도)에서 파라도르전망대.산토 도메성당.프라도 미술관.톨레도 대성

 당돌아 보는 일정으로 시작합니다.

 마드리드에서 톨레도가는 길에는 간밤에 눈이 내려 차창으로 비치는 설경이

 절경이네요.

*톨레도 파라도르 전망대에서 바라본  시가지.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져 있는 톨레도는 타호 강에 둘러싸여 있는 관광 도시이자 스페인의 옛 수도로,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 예술에 있어서 마드리드와 함께 가장 중요한 도시이다. 기원전 2세기 로마의 식민 도시를 거쳐 8세기 서고트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그 후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으면서 톨레도는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 등 세 가지 종교의 유적지가 공존하는 특별한 도시가 되었다. 무어인들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톨레도의 칼’로 대변되는 철제 생산과 경공업이 크게 발달하여 황금시대를 맞이했지만, 15세기에 수도가 마드리드로 옮겨지자 톨레도는 침체기를 걷기 시작한다. 현대에 와서는 관광 도시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파라도르 전망대에서 바라본 톨레도시가지...

*저멀리 톨레도 대성당.산토도메 성당도 보이에요.

*최고의 전망대에서 최고의 여인이....

*톨레도 전망대에서...

*우리 부부의 모습.

*톨레도 전망대에서 시가지와 타호강의 경치를 담아 봐요.

*이번 여행의 동반자 후배 부부의 모습.

*나 혼자 .....

*

포르투갈과의 국경선 바로 동쪽을 흐르는 타호 강 남쪽 기슭 위 암반을 토대로 하고 있다. 벽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이름은 무어인들이 타호 강에 있는 로마의 6개 아치형 다리인 알칸타라(아랍어로 '다리'라는 뜻)를 따서 지었다. 트라야누스 황제를 추모하기 위해 105~106년에 건설된 길이 204m인 이 다리는 1214년 무어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1543년 이후 수차례 복구되었다.

이 다리는 '스페인에 있는 로마 유적 중 가장 고귀한 것 중의 하나'로 평가받아왔다. 이 도시는 1218년 한 기사단에게 주어졌는데 이들은 알폰소 9세로부터 이곳을 넘겨받자 이 시 이름을 자신들의 명칭으로 삼았다. 다리 이외에 주목할 만한 유적으로는 13세기의 산타마리아데알모코바르 교회와 수녀원(지금은 폐허) 소속의 산베니토 교회(1576)를 들 수 있다. 인구 2,037(1981


*파라도르 전망대를 내려 오면서 바라본 모습.

*톨레도 대성당 가는 길....

*톨레도 대성당.


 1225년 이슬람 세력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난도 3세의 명에 따라 원래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고딕 양식을 기반으로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493년 완성되었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면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많은 예술가들의 손길을 거쳐 현재의 엄청난 규모와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현재는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산이다. 본당 보물실에는 16세기 초 엔리케 아르페가 만든 성체 현시대(Custodia)가 보관되어 있는데, 5,000개의 금 · 은 · 보석으로 만들어져 무게가 무려 180kg, 높이가 3m가량 된다. 또한 본당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성가대석에는 그라나다가 함락되는 전쟁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해 놓은 조각이 있으며, 성물실에는 엘 그레코의 종교화와 고야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서 마치 작은 미술관에 온 것처럼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톨레도 대성당(Cathedral)


*톨레도 대성당의 문은 3군데로 중앙에 있는 문은 용서의 문,오른쪽은 심판의

 문,왼쪽은 지옥의 문.

 남쪽에 있는 사자의 문으로 들어가면 88개의 기둥으로 떠 받친 5개의 회랑이

 있으며 성당안에 22개의 예배당이 있습니다.

*톨레도 성당 성물실에 있는 성체 현시대는 금.은 보석으로 높이 3m,무게 18

 0kg으로 화려한 모습을 자랑 합니다.

 참고로 성체 현시대란 그리스도의 성체를 넣어서 현시하는 용기를 말합니다.

*성물실의 성체앞에서.

*지휘자석은 독수리모양의 황동악보대가 놓여 있습니다.

*성가대석 주위에 조각되어 있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온 인물들을 조각해 놓은 것이라네요.

*이 곳은 성가대 석입니다.

 성가대석의 성모상은 13세기 프랑스에서 가져온 성모상으로 하얀색 옷을 입

 고있어 백모님상이라 불리온다.

 우리는 흔이 볼수 있는 미켈란젤로,다빈치등이 만든 그런 성모님의 얼굴이

 아니라 부처얼굴과 다소 비슷합니다.이는 르네상스 이전에 만든 성모상이

 아니라 르네상스 이후는 성모님은 유대인이였기 때문에 얼굴이 하얀색이 아

 닐수 있다는 작가의 판단에 따라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아기예수를 보고 있고 아기예수는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톨레도 대성당의 중안 예배당의 모습.

*톨레도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성서의 내용을 묘사 하였다고 합니다.

 길이 120m,너비60m,천정높이 33m 규모인 톨레도 성당은 완공때까지 무려

 187년이나 소요되었다고 합니다.오랜 연륜을 가지고 있는 큰 규모로 톨레도 여행의 정점이죠.

*성 크리스토포루스는 그리스도를 어깨에 업고 간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입니

 다.성 크리스토포루스는 시리아 출생으로 소아시아에서 선교를 하던 중 순교

 하였습니다.그는 사람들을 업어 강을 건너주는 일로 생계를 꾸려 가던 거인

 였는데 어느 날 조그만 아이를 업고 강을 건너는데 이상하게 여긴 그에게 아

 이는 "너는 지금 세계를 옮기고 있다. 너는 내가 찾던 왕.예수 그리스도다"라

 고 말했다고 합니다.

 중앙 제단 옆 한쪽 벽면을 다 차지할 만큼 커다란 이 그림은 선 크리스토포루

 스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그는 여행자와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신으로

 동,서방고회에서 가장 사랑받는 수호성인들 중 한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습니

 다.

*스페인의 카톨릭의 본산,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 대성당을 뒤로하고 우리는 떠나요.

*톨레도 시내를 구경할수 있는 꼬마열차.


*프라도 미술관                                     

  

미술관 구경을 시작하기 전, 간단히 프라도 미술관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프라도가 유럽 3대 미술관 중 하나라면서요?’가 프라도 미술관 가이드를 할 때 받았던 가장 흔한 질문이다. 몇 대 운운하는 것이 무슨 기준인지 몰라서 통쾌한 대답을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컬렉션의 양이나 미술관의 규모, 컬렉션의 역사, 뛰어난 접근성, 대중을 위한 교육 시스템 등을 볼 때 최고의 미술관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없다.

프라도 미술관의 기반이 된 컬렉션은 15세기 스페인 왕실에서 시작되었다. 왕들이 취향에 따라 수집한 작품들, 왕실 화가의 그림, 그 밖에도 왕실 소유의 건물에 걸려 있던 작품 등이 기반이 되어 1819년에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당시 왕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미술관 개관을 도왔다. 바로 이 점이 프라도가 유럽의 다른 대규모 미술관과 다른 점이다.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프라도는 미술에 대한 사랑과 미술 애호가들의 열정으로 태어난 곳이다.

프라도 미술관 건물은 크게 두 덩어리로 나눌 수 있는데, 19세기의 본관 건물과 몇 년 전에 개축을 한 헤로니모 건물이다. 19세기의 건물만으로는 작품 전시를 비롯해서 관람객을 위한 공간과 수장고, 연구실 등의 공간이 턱없이 부족해지자, 미술관 뒤편 산 헤로니모 성당 쪽으로 건물을 개축했는데, 새로 지은 공간의 가장 위층은 성당의 안뜰이었던 곳이다. 기존 건물은 여전히 전시 공간으로 쓰이고, 새 건물에는 각종 특별전을 하는 공간과 더불어 카페와 레스토랑, 일반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되거나 소규모 콘서트가 열리는 근사한 강당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도 여느 유럽의 건물들처럼 0층(우리나라식으로는 1층이다)부터 시작한다. 이 책에서는 현지식으로 0, 1, 2층이라고 부를 예정이다. 미술관 내부의 안내 표시나

 책자 등에도 유럽식으로 표시되어 있으므로 이 편이 편리할 것이다. 프라도처럼 규모가 큰 미술관에 와서 유명하다는 그림을 찾아다니다 보면 그 안에서 길을 잃기가 일쑤인데, 알고 보면 거대한 건물 안에 일정한 리듬으로 작품을 전시해 놓는다. 레게리듬에 몸을 맡기듯, 우리는 그 리듬을 찾아내 몸을 맡기면 된다. 이럴 때 유용한 것이 미술관에서 제작한 안내 팸플릿이다. 건물 안내도와 함께 색상별로 어느 구역에 어느 나라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지 표시를 해 놓았고, 대표 작품들도 명기되어 있다. 카페나 화장실, 서점과 기념품 가게도 팸플릿을 보면 훨씬 찾기 쉽다.




*프라도 미술관(스페인어: Museo del Prado)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세계적인 미술관 중 하나이다. 15세기 이후 스페인 왕실에서 수집한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림과 조각을 위한 전용 박물관으로 설립되었으며 5,000개 이상의 그림과 2,000개 이상의 판화, 1,000개 이상의 주화와 메달 그리고 2천 개 이상의 장식물과 예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조각상은 700개 이상이 있다.

*스페인이 낳은 고야 조각상.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 예술가에게 변혁은 곧 숙명이다


근대 미술로 이끄는 안내자

〈화실에서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791~1792, 42×28cm, 스페인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작품을 통해 불멸의 삶을 살던 거장들의 영향력도 영원하지는 못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했고, 미술계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거장들의 후광에 힘입어 이탈리아는 유럽의 모든 화가들에게 여전히 성지로 자리매김 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독일에서는 루벤스라는 걸출한 화가가 바로크 미술을 열었고, 프랑스에서는 푸생이라는 매우 사색적인 화가가 고전주의 회화의 한 획을 그었다. 유럽의 미술이 르네상스라는 출발점에서 바로크라는 종착지로 이어지면서 드디어 새로운 전환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벨라스케스가 죽은 뒤 스페인은 유럽 미술계에서 거의 유명무실한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몇몇 화가들이 벨라스케스가 일구어낸 서유럽 르네상스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그러나 변혁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나는 아이러니한 변종과 같은 것이다. '미술사의 전환'을 이끌어갈 주인공이 변방 스페인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변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고야다. 후대 미술사가들은 스페인 동북부 시골 출신의 이 화가가 '근대 미술'로의 전환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고야가 그러한 변화를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고야와 같이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는 화가의 작품들, 그 중에서도 특히 화가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자화상은 작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에게 커다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시대의 변곡점의 중심에 서 있는 화가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고야의 자화상은 약 스무 점 남짓 전해오는데, 그 중 몇몇 작품은 화가의 삶을 여러 각도로 비추는 프리즘 같은 구실을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프리즘을 발광시키는 작품이 바로 〈화실에서의 자화상〉이다. 밝은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을 배경으로 서 있는 화가는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젤이 화면 밖으로 노출되어 있지 않아 화가가 무엇을 그리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화가는 그림 밖 세상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 속 화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면 관람자가 화가의 모델이 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고야는 자신을 그렸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림 속 화가는 스페인 전통 의상을 멋드러지게 입고 있는데, 이는 그림 밖에 있는 수많은 모델들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귀 먹은 화가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15, 46×35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고야의 자화상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1815년에 제작된 〈귀 먹은 화가의 자화상〉이다. 1792년경 겨울, 고야는 세비야를 여행하던 중 이름 모를 중병을 앓고 그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게 된다. 이후 고야는 죽을 때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을 귀머거리로 살게 된다.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적막에서 오는 공포가 작품 속 화가의 표정에 잔뜩 묻어나 있다. 그래서인지 〈귀 먹은 화가의 자화상〉에는 화가의 오른쪽 귀가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적막함의 공포가 화가의 귀를 더욱 쫑긋하게 만든 것이다.

소심한 계몽주의자

〈자화상 : 광상곡 1〉, 판화, 1797~1798, 크기 및 소장처 불명

고야는 청력을 잃으면서 특이하고 병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뒤틀리고 난해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판화집 〈광상곡 _변덕〉 시리즈다. 에칭 형식으로 구현된 80여 점의 동판화에는 고야의 모습도 들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광상곡: 자화상 1〉이다. 작품 속 화가의 표정은 매우 불만에 가득 차 있는데, 이는 당시 부패한 성직자와 무자비한 전제군주와 그 사이에서 기생하는 귀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무언의 항의로 해석된다. 당시 프랑스 계몽주의에 깊이 경도돼 있던 고야는 이 판화집에 수록한 어둡고 기괴한 작품들을 통해서 부조리한 사회를 꼬집었다.

그러나 이 판화집이 종교재판에 회부될 것을 걱정한 고야는, 시장에 내놓은 지 열흘도 안 되어 모두 회수하고 만다. 사회 풍자를 통한 계도적 효과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한편, 고야의 그로테스크한 판화 작품은 18세기 이후 여러 미술 사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고흐, 마네, 모네, 세잔과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서부터 들라크루아와 같은 낭만주의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고야에게 큰 영향을 받았음을 토로했다. 그의 판화집이 당시의 사회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미술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프랑스 작가이자 평론가인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1901~1976)는 『고야에 관해 논함』이란 책에서 "고야는 현대 회화의 전체적인 경향을 예견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성이 잠들자 악마가 태어나다〉, 판화, 1799, 크기 및 소장처 불명

누드와 종교재판소, 그리고 통렬한 항의

고야는 결국 〈옷 벗은 마하〉[마하(Maha):집시에 가까운 자유분방한 여성–역주]라는 누드화 한 점으로 종교재판소에 서는 불운을 겪게 된다. 이 그림은 당시 최고 권력가 중 한 사람인 마누엘 데 고도이(Manuel Faria, 1767~1851)의 주문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에서는 공식적으로 누드가 금지되었다. 고도이가 귀족들 간의 싸움에서 실권하면서 그가 지닌 모든 재산이 국가에 압류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 누드화의 실체가 드러났다. 〈옷 벗은 마하〉는 고도이가 함께 소장하고 있던 벨라스케스의 누드화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라는 작품과 함께 국가에 귀속되고 만다.

예술과 외설이라는 케케묵은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던 이 작품으로 고야는 당시 궁정화가로서의 직위마저 박탈당한다. 그 뒤 고야는 이 작품 속 누드 모델에게 그대로 옷을 입힌 작품 〈옷 입은 마하〉를 내놓아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을 받는다. 작품 속 모델은 옷을 입고 있지만 여전히 선정적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옷 입은 마하〉를 보면서 〈옷 벗은 마하〉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경직된 스페인 사회에 대한 고야 특유의 통렬하고 냉소적인 항의 표시가 아닐 수 없다.

〈옷 벗은 마하〉, 캔버스에 유채, 1800, 95×190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옷 입은 마하〉, 캔버스에 유채, 1805, 97×190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벨라스케스를 향한 오마주

고야는 1746년 스페인 북부 아라곤(Aragon) 지방의 푸엔데토도스(Fuendetodo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한 도금사였고 어머니는 하급 귀족의 딸이었다. 어린 시절 가톨릭 수도원에서 초등 교육을 받기도 했던 고야는, 그의 재능을 알아본 화가 호세 루잔(Jose Luzan, 1710~1785)의 눈에 띄면서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한다.

1763년에 고야는 마드리드로 가서 왕립 아카데미(Real Academia de Bellas Artes de San Fernando, 1744년 페르난도 5세가 설립했다–역주)의 국비 장학생 선발전에 참가하지만 아쉽게도 떨어지고 만다. 그 뒤 당시 유명한 화가 프란시스코 바이에우(Francisco Bayeu, 1734~1795, 나중에 그는 고야의 처남이 되었다)의 화실에 들어가서 국비 장학생 선발에 다시 도전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1774년 바이에우의 소개로 왕실 테피스트리 공장에서 일하게 된 고야는, 다양한 테피스트리 패턴을 디자인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낸다. 태피스트리란 왕실 벽을 덮는 커다란 직물로, 여기에 다양한 그림을 새겨 넣는 것이 그의 주된 일이었다. 고야의 재능이 왕실 곳곳에 퍼지면서 1786년부터 카를로스 3세(Charles III, 1716~1788)의 전속 화가가 되었고, 〈옷 벗은 마하〉가 종교재판에 회부되기 전까지 오랜 기간 궁정화가로 활약하게 된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캔버스에 유채, 1800, 280×336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고야는 궁정화가로 있으면서 수많은 왕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중 특히 유명한 것이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다. 이 작품은 흔히 벨라스케스의 걸작 〈시녀들〉과 비교되곤 하는데, 왕실을 배경으로 한 두 작품 모두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만 벨라스케스에 비해 고야는 매우 희미하게 묘사돼 있다. 이 작품을 두고 존경하는 벨라스케스에 대한 오마주라고 평하기도 한다.

한편,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수가 모두 열세 명이었는데, 서양에서 13을 불길한 숫자로 여기기 때문에 화가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모습을 추가했다고 하는 재미있는 속설도 전해진다.



*프라도 미술관 주위에서.

*프라도 미술관 뒤쪽의 건물 성당인가.

*프라도 미술관 전경.

*마드리드의 대표시장으로 가는 길 시내의 모습.

*산 미구엘 시장

마요르 광장 동쪽에 자리한 시장으로, 마드리드 시민들의 식재료를 공급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처음엔 전통 시장에 가까웠으나 화재로 인해 폐쇄되었다가 지역 주민들을 위해 농산물과 식재료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시장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최근 리모델링을 통해 철골을 세우고 통유리로 둘러싸면서, 개방형이던 시장이 실내 시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흔히 생각하는 재래시장과는 달리 굉장히 깔끔한 분위기로, 간단하게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바르와 다양한 먹거리가 진열된 상점들이 발길을 잡고 있다. 과일, 채소, 생선, 하몬, 꽃, 견과류 등의 식재료와 식품을 파는 상점들은 바둑판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쇼핑하는 동선도 어렵지 않다. 부담 없이 와인 한잔이나 타파스를 먹기에도 좋은 곳이다.

산 미구엘 시장(Mercado de San Miguel)


산 미구엘 시장(Mercado de San Miguel)


산 미구엘 시장(Mercado de San Miguel)

*산 미구엘 시장 입구.

*시장 내부에는 많은 관광객과 현지인으로 엄청 붐비네요.

*정말 시간이 있으면 먹어 보고 싶어요.

*아귀가 대환영을 하고 있어요.

*마요르 광장


 중세에는 시장으로 사용되던 장소였는데, 펠리페 3세 때인 1619년 주요 행사가 열리는 광장으로 건설된 후에는 왕의 취임식, 종교 의식, 투우 경기, 교수형 등이 치러지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3번의 화재로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19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축되었다. 커다란 4층 건물이 반듯한 직사각형을 이루며 광장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데, 9개의 아치 문이 광장으로 통하고 있어서 어느 방향에서든 광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광장 가운데에서 기품 있게 말을 타고 있는 기마상은 바로 펠리페 3세이다. 광장 주위를 둘러싼 건물의 1층에는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 가게, 관광 안내소 등이 자리하고 있다. 9개의 아치문 중 하나인 광장 남서쪽의 쿠치예로스 문의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메손과 바르가 늘어서 있는 카바 데 산 미구엘(Cava de San Miguel) 거리와 만나게 된다. 마요르 광장에서는 매주 일요일 오래된 우표를 판매하는 우표 벼룩시장이 열리고, 12월에는 크리스마스 시장도 열린다.

마요르 광장(Plaza Mayor)


마요르 광장(Plaza Mayor)



마요르 광장

마요르 광장(스페인어: Plaza Mayor de Madrid)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광장이다. 푸에르타 델 솔빌라 광장에서 몇 블록 떨어진 거리에 있다. 129m × 94m의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광장에 접해있는 237개의 발코니를 가진 3층 건물에 둘러싸여있다.



*광장은 4층짜리 건물로 에워싸져있는데,
펠리페 3세(동상의 주인공)의 명령으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1619년에 완성되었다니 여기도 꽤나 오래된 곳이다.

투우, 종교재판 등 마드리드의 중앙 광장 역할을 해왔다고 하는 곳.
광장의 개념이 새로웠고, 스페인에는 이러한 광장이 곳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광장이 뒤에 보이는 기마상 펠리페3세가 조성.

*현지인 들의 한가한 나들이 모습.

*보이는 골목으로 나가면 비야 광장이.

*뒤로 시청사와 비야 광장의 돔형 건물.

*이고풍스런 건물이 마드리드 시청사라네요.

*뒤에 보이는 건물

벽돌을 사용하여 지은... 고풍스러운

 "합스부르크" 시대의 건축물인 "비야 광장" 이 나오는 데....

*저녁을 먹고 호텔 라운지빠에서 유럽 맥주로 여행의 피로를....

*호텔 라운지에 전시된 클래식카 앞에서.

*우리 부부도 마지막 기분을 술이 기분을 업 시키네요.

*이집도 ....

*오늘 묵은 이호텔이 유럽에서 제일 큰 호텔이라네요.

*지중해 여행 8일차 마드리드에서 무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