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여정지 바로셀로나에서 편안한 밤을 보내고 오늘은 바로셀로나에서
오전에 몬세라트로 이동 바위산에 위치한 몬세라트 수도원 방문 오후에 바로
셀로나에서 관광.
*10일차 일정을 위해 호텔을 나서면서 호텔라운지의 모습.
*바르셀로나를 출발해 1시간이동으로 몬세라트 수도원 도착.
*몬세라트 언덕에서....
*몬세라트
바르셀로나 시 북서쪽의 요브레가트 강 바로 서쪽에 있다.
로마인에게 몬스세라투스('톱니 모양의 산'), 카탈루냐인에게 몬트사그라트('신성한 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고 독특한 외형,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산타마리아데몬세라트수도원, 오래된 성모자(聖母子) 목조상(像)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 목조상은 누가가 조각하여 사도 베드로가 스페인으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지며, 무어인이 지배할 당시 동굴 속에 감춰져 있었다.
880년에 우연히 발견된 이래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고 있는데, 그들은 많은 기적이 성모 마리아의 중재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붉은색을 띤 사암과 역암(礫岩) 산봉우리들이 침식작용 때문에 들쭉날쭉하고 거친 모습으로 거대한 산기슭 위에 솟아 있다. 깊이 패인 협곡들 가운데 가장 넓은 말로 계곡의 가장자리 지점(고도 730m)에 수도원이 있다. 유적들은 선사시대에 사람이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산타마리아의 기독교 은둔자들이 몬세라트에 거주하고 있을 당시인 888년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리폴 수도원이 이들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받았다. 11세기에서 15세기초까지 번창하던 정규 수도분원은 1410년 대수도원으로 독립하여 지금까지 그 지위를 이어오고 있다.
현재의 바실리카 수도원은 각각 1560년과 1755년에 세운 것으로 반도전쟁 동안인 1812년 프랑스군에게 파괴당한 후 대대적으로 복구되었다.
*몬세라트 수도원의 전망대에서.
*몬세라트 수도원의 전경.
*전망대에서....
*전망대의 조형물을 배경으로...
*주위는 안개로 시야는 별로 ....
*가끔씩 구름사이로 절경을 볼수있어 다행이네요.
**전망대에서...
*이번에 처음으로 여행을 같이한 회사 후배부부.
*전망대 주변의 조형물.
*전망대의 모습.
*몬세라트 수도원 산타조지 조각상.
*몬세라트 수도원의 뒤쪽 바위산의 모습.
*웅장한 바위가 더욱 수도원을 살려주네요.
9세기에 처음 알려진 수도원은 이후 증개축되었지만 1811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상당한 부분이 파손되었고 수도사들도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후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야 다시 재건에 들어가고 수도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 들어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고, 지금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원으로 약 80여 명의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 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한 바실리카 대성당에서는 13세기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소년 성가대이자 세계 3대 소년 합창단으로 손꼽히는 ‘에스콜라니아’와 카탈루냐의 성인인 ‘검은 성모상’을 만날 수 있다. 대성당 정면의 파사드는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예수님과 12제자를 조각해 놓았는데 원래는 은으로 세공된 파사드였지만 1900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성당 내부는 카탈루냐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에스콜라니아의 공연이 없는 토요일에는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신부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개관 시간
11~3월 : 07:30~17:30 / 4~10월 : 07:30~20:00
성가대 공연 : 평일 13:00, 18:45 / 일요일 11:00, 18:45 / 토요일 공연 없음
홈페이지(www.escolania.cat)에서 공연 일정 미리 확인할 것
검은 성모상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성모상은 특이하게도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전해지는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이다. 성 루카에 의해 만들어지고 50년 성 베드로에 의해 몬세라트로 옮겨져 왔다고 한다. 아랍인들에게 강탈당하거나 파괴될 것을 우려해 동굴 안에 숨겨 두었는데, 880년 목동들에게 밝은 빛과 함께 천상의 음악이 들려 빛이 있는 쪽을 따라가니 동굴 안에 이 검은 성모상이 발견됐다. 목동들은 너무 놀라 이 사실을 가까운 곳에 거주하던 만레사 주교에게 알렸고 주교가 검은 성모상을 옮기려 하자 꼼짝도 하지 않자, 성모상이 있어야 할 곳은 이 자리인 것 같다며, 이곳에 작은 성당을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이 조사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따르면 12세기에 만들어진 조각상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몬세라트 수도원 바실리카 대성당 제단 뒤편 2층에 자리하고 있는 검은 성모상은 유리로 보호되고 있지만 오른손에 들고 있는 공은 오픈되어 있어 이곳을 만지고 기도하거나 소원을 비는 관광객들로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소년의 조각상
검은 성모상에 이르기 전 한 소년의 조각상이 있는데, 이 조각상에 얽힌 사연이 있다. 한 소년이 큰 병을 앓고 있었는데, 소원이 에스콜라니아 성가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소년의 사연을 알게 된 수도원에서는 단 하루지만 에스콜라니아 성가대원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고 소년은 그토록 원하던 성가대복을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안타깝게도 얼마 뒤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소년의 부모는 아들의 소원이 영원히 이루어지기 원하는 마음에 에스콜라니아 성가복을 입은 아들의 조각상을 만들어 수도원에 기증했다고 한다.
*몬세라트 수도원 건물의 외벽에 피사드에 있던 예수와 12사도.
*몬세라트 수도원의 검은 성모상.
*검은 성모상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성모상은 특이하게도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전해지는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이다. 성 루카에 의해 만들어지고 50년 성 베드로에 의해 몬세라트로 옮겨져 왔다고 한다. 아랍인들에게 강탈당하거나 파괴될 것을 우려해 동굴 안에 숨겨 두었는데, 880년 목동들에게 밝은 빛과 함께 천상의 음악이 들려 빛이 있는 쪽을 따라가니 동굴 안에 이 검은 성모상이 발견됐다. 목동들은 너무 놀라 이 사실을 가까운 곳에 거주하던 만레사 주교에게 알렸고 주교가 검은 성모상을 옮기려 하자 꼼짝도 하지 않자, 성모상이 있어야 할 곳은 이 자리인 것 같다며, 이곳에 작은 성당을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이 조사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따르면 12세기에 만들어진 조각상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몬세라트 수도원 바실리카 대성당 제단 뒤편 2층에 자리하고 있는 검은 성모상은 유리로 보호되고 있지만 오른손에 들고 있는 공은 오픈되어 있어 이곳을 만지고 기도하거나 소원을 비는 관광객들로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몬세라트 수도원(카탈루냐어: Monasterio de Montserrat, 스페인어: Monasterio de Montserrat)은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몬세라트에 있는 수도원이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방문할 만큼 유명하다.
*이상한 조각상이....
*수도원 등뒤의 안개낀 모습
*수도원을 뒤로하고.
*수도원 앞 광장에서.
*수도원을 배경으로...
*수도원과 바위산의 모습.
*수도원에서 바라본 앞 계곡의 모습.
*멋진 배경을 그림삼아....
*자세 좋아요....
*난간에서....
*떨어지면 큰 일난다.
*바위산의 모습 안개가 운치를 더해요.
*좋은 곳에서는 사진으로 추억을 남겨요.
*포즈 좋은데요.
*배경사진.
*배경사진
*배경사진.
*배경사진.
*배경사진.
*배경사진.
*배경사진.
*배경사진.
*배경사진.
*수도원 전망대의 모습.
*겨울에 이런 꽃이 아름답죠.
*몬세라트 수도원의 바위산 사진.
*기꺼이 한장의 사진속 모델이 되어 주셨네요.
*케이블카로 몬세라트 수도원을 내려 오면서 바라 본 모습.
*바위산의 모습.
*케이블카 안에서 내려다 본 모습.
*밑에서 올려다 본 몬세라트 수도원의 바위산 전경.
*산 정상에는 수도원이 까마득이 보이네요.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우리 일행의 한사람도.
*여자 분들의 합창.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닌것 같아요.
*바위산을 배경으로....
*좋은 곳에서 귀한 사람과...
*바위산을 향하여....
*점심을 먹기위해 바로셀로나 해안가에서.
*해안가의 주위 모습.
*해안가 야자수나무 앞에서.
*오늘의 점심.
*가계앞에 진열해 있는 해산물의 모습.
*식당 주위의 시가지 모습.
*항에는 요트가 많이 있네요.
*항을 배경으로...
*엄청난 요트가 정박해 있네요.
*항구를 뒤로하고...
*한장 더....
*가로수의 야자수 나무 아래.
*저도요.
*야자수를 배경으로.
*야자수 그들아래에서...
*여기도 저기도.
*요기도.
야자수 거리에서.
*마지막으로....
주소 : Provença 261-265. 08008 Barcelona
대중교통 : 지하철 디아고날(Diagonal) 역
개관 시간 : 11월 -2월 오전 9시-오후 6시 30분, 3월-10월 오전 9시-오후 8시
휴관일 : 1월 1 · 6일, 12월 25 · 26일
입장료 : 16.5 유로(학생 14.85유로, 7-12세 8.25 유로, 7세 미만 무료)
홈페이지 : www.lapedrera.com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Antoni Gaudí i Cornet)는 1852년에 바르셀로나 근교 도시 레우스(Reus)에서 태어났다. 건축가가 되고 난 뒤 처음에는 네오고딕풍의 건축을 지었으나 점차 자연의 요소를 추가해 나가면서 뾰족한 점과 직선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금도 아스토르가(Astorga) 같은 도시에 가면 가우디의 초기 건축물을 볼 수 있다. 자연의 모티프에서만 영감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근대의 새로운 기술이나 재료 등도 적극적으로 사용했는데, 카사 밀라가 그 대표적인 예다. 엘리베이터를 건물에 넣은 초기 바르셀로나 건물 중 하나이기도 하고, 지붕 아래의 공간을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의 다락으로 만든 최초의 바르셀로나 건물이라고 한다.
이 건축을 주문한 사람은 페레 밀라(Pere Milà)라는 사업가였는데, 자신의 가족이 거주할 공간, 세를 줄 공간 등을 만들기를 원했다. 당시 이곳은 바르셀로나 구시가지와 그라시아 지구를 연결해 주는 곳이면서 가장 부유한 계층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건축주의 이름 때문에 이 집을 카사 밀라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건물의 외부 모습이 커다란 바위산에서 돌을 캐내는 채석장 같다고 하여 ‘라 페드레라’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이곳 역시 카사 바트요처럼 외벽이 구불구불하며 환기를 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탑들이 옥상에 솟아 있다. 관광객에게 개방된 옥상에 올라가면 병사들의 얼굴 같은 모습을 한 굴뚝들을 볼 수 있다. 더불어 바르셀로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훗날 가우디는 이 병사 얼굴의 모티프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도 이용했다.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 가오디의 건물모습.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활동한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 건축가. 현대 건축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건축가로 카탈루냐 문예부흥에 공헌했다. 나무가 서 있는 것 같은 평형구조를 설계했고, 이 방식을 다양한 건축물에 적용했다. 바르셀로나의 성가족 교회는 가우디가 1883년 건설을 위탁 받아 평생을 이 건축에 매달렸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성가족 교회 이외 대표작으로 구엘 공원, 콜로냐 구엘 교회, 카사 바틀로 등이 유명하다.
자유분방한 형태, 풍부한 색채와 질감, 유기적 통일성이 특징인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가우디는 거의 평생을 바르셀로나와 그 근처에서 일했으며 '성가족(聖家族) 교회'(Sagrada Familia)를 짓는 데 일생을 바쳤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비천한 집안의 구리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연로한 아버지와 조카딸과 함께 살았다.
일찍부터 건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건축을 공부하려고 1869~70년에 스페인의 가장 근대적인 도시이자 카탈루냐 지방에서 정치와 지식의 중심지였던 바르셀로나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군복무와 다른 활동 때문에 8년 뒤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가우디의 건축양식은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학교의 설계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란한 빅토리아 양식을 썼다. 그러나, 곧 기하학적인 모양의 덩어리들을 희한하게 병렬시키는 구성방식을 만들어냈고 그 표면에 무늬를 새긴 벽돌이나 돌, 화려한 자기 타일 및 꽃이나 파충류 모양을 세공한 금속을 붙여 생동감을 주었다. 다른 형식을 띤 세부(細部)를 빼면 이 양식의 전반적인 효과는 이슬람 양식과 그리스도교 양식을 혼합한 스페인 특유의 무어 양식(또는 무데하르 양식)이었다.
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은 카사 비센스(1878~80)와 엘 카프리초(1883~85), 그리고 1880년대말에 지은 구엘 저택과 구엘 궁전이 있으며 엘 카프리초를 빼고는 모두 바르셀로나에 있다.
2번째 시기에서 가우디는 역사상 유명한 양식들의 역학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고딕 양식으로는 아스토르가의 주교 궁전(1887~93)과 레온의 카사데로스보티네스(1892~94)를 지었고, 바로크 양식으로 바르셀로나의 카사 칼베트(1898~1904)를 지었다. 그러나, 1902년부터는 이런 전통양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건물들은 몇 가지의 뚜렷한 자연적·종교적 상징물을 제외하고 본질적으로 구조와 재료를 표현했다. 바르셀로나의 벨 에스과르드 별장과 구엘 공원,콜로냐 구엘 교회는 내부 기둥이 외부 부축벽 없이도 지탱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구조는 평형구조(equilibrated)로 일컬어지는데, 가우디는 이것을 나무가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구조의 기본 요소는 사선으로 미는 힘에 견디도록 설계된 비스듬히 서 있는 기둥과 미는 힘을 거의 받지 않도록 얇은 판과 타일로 이루어진 볼트 등이다.
그는 자신의 평형구조를 바르셀로나에 있는 두 고층 아파트 건물에 적용했다.
카사 바틀로는 기존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특히 정면에 새로이 고안한 평형구조 요소들을 덧붙였다. 카사 밀라에서는 몇 층의 구조에서 마치 연꽃의 잎맥처럼 철근을 이용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자주 그랬듯이, 그는 이 두 건물의 형상과 표면에 산이 많고 해안에 자리잡은 카탈루냐의 특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괴짜였지만 훌륭한 건축가였던 가우디는 카탈루냐 문예부흥에 크게 공헌했다.
미술과 공예 부흥운동인 카탈루냐 문예부흥은 열렬한 반(反)카스티야주의인 '카탈루냐주의'로 일어난 정치부흥운동과 결합되었다. 이 두 운동의 목적은 카스티야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고 마드리드가 중심이 된 스페인 정부 밑에서 오랫동안 압박받던 카탈루냐의 생활방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교회는 카탈루냐 르네상스를 종교적으로 상징한다.
이것은 가우디가 전 생애를 바친 계획으로 1883년에 이 교회 건설을 위탁받았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신앙이 깊어졌으며 1910년 뒤에는 실제로 다른 모든 일을 포기하고 그곳에 은둔하며 일에만 매달렸다. 75세 때 그는 저녁기도를 하러 가다가 전차에 치어 죽었다.
미완성된 성가족교회(계획되었던 탑 4개 중 하나만 세워진 트랜셉트만이 그가 죽기 전에 완성되었다)의 설계도와 모형에는 고딕 양식 성당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나선기둥, 쌍곡면의 볼트와 측벽, 쌍곡포물면 지붕 등이 복잡하게 상징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경이로운 성당 구조는 1960년대의 많은 엔지니어들과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떠한 콘크리트 골조물보다 가우디의 것이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도 초현실주의자와 추상표현주의 화가, 조각가들로부터 거의 무비판적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으나 그의 영향은 그 지역에만 국한되었고 평형구조를 따르는 몇 사람에 의해서만 표현되었다. 그는 국제주의 양식이 성행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거의 모든 전문가와 비전문가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그에게 다가온 디자인의 난관들을 헤쳐나갔던 무한하고 끈질긴 상상력 때문이었다.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비천한 집안의 구리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연로한 아버지와 조카딸과 함께 살았다.
일찍부터 건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건축을 공부하려고 1869~70년에 스페인의 가장 근대적인 도시이자 카탈루냐 지방에서 정치와 지식의 중심지였던 바르셀로나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군복무와 다른 활동 때문에 8년 뒤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가우디의 건축양식은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학교의 설계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란한 빅토리아 양식을 썼다. 그러나, 곧 기하학적인 모양의 덩어리들을 희한하게 병렬시키는 구성방식을 만들어냈고 그 표면에 무늬를 새긴 벽돌이나 돌, 화려한 자기 타일 및 꽃이나 파충류 모양을 세공한 금속을 붙여 생동감을 주었다. 다른 형식을 띤 세부(細部)를 빼면 이 양식의 전반적인 효과는 이슬람 양식과 그리스도교 양식을 혼합한 스페인 특유의 무어 양식(또는 무데하르 양식)이었다.
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은 카사 비센스(1878~80)와 엘 카프리초(1883~85), 그리고 1880년대말에 지은 구엘 저택과 구엘 궁전이 있으며 엘 카프리초를 빼고는 모두 바르셀로나에 있다.
2번째 시기에서 가우디는 역사상 유명한 양식들의 역학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고딕 양식으로는 아스토르가의 주교 궁전(1887~93)과 레온의 카사데로스보티네스(1892~94)를 지었고, 바로크 양식으로 바르셀로나의 카사 칼베트(1898~1904)를 지었다. 그러나, 1902년부터는 이런 전통양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건물들은 몇 가지의 뚜렷한 자연적·종교적 상징물을 제외하고 본질적으로 구조와 재료를 표현했다. 바르셀로나의 벨 에스과르드 별장과 구엘 공원,콜로냐 구엘 교회는 내부 기둥이 외부 부축벽 없이도 지탱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구조는 평형구조(equilibrated)로 일컬어지는데, 가우디는 이것을 나무가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구조의 기본 요소는 사선으로 미는 힘에 견디도록 설계된 비스듬히 서 있는 기둥과 미는 힘을 거의 받지 않도록 얇은 판과 타일로 이루어진 볼트 등이다.
그는 자신의 평형구조를 바르셀로나에 있는 두 고층 아파트 건물에 적용했다.
카사 바틀로는 기존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특히 정면에 새로이 고안한 평형구조 요소들을 덧붙였다. 카사 밀라에서는 몇 층의 구조에서 마치 연꽃의 잎맥처럼 철근을 이용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자주 그랬듯이, 그는 이 두 건물의 형상과 표면에 산이 많고 해안에 자리잡은 카탈루냐의 특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괴짜였지만 훌륭한 건축가였던 가우디는 카탈루냐 문예부흥에 크게 공헌했다.
미술과 공예 부흥운동인 카탈루냐 문예부흥은 열렬한 반(反)카스티야주의인 '카탈루냐주의'로 일어난 정치부흥운동과 결합되었다. 이 두 운동의 목적은 카스티야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고 마드리드가 중심이 된 스페인 정부 밑에서 오랫동안 압박받던 카탈루냐의 생활방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교회는 카탈루냐 르네상스를 종교적으로 상징한다.
이것은 가우디가 전 생애를 바친 계획으로 1883년에 이 교회 건설을 위탁받았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신앙이 깊어졌으며 1910년 뒤에는 실제로 다른 모든 일을 포기하고 그곳에 은둔하며 일에만 매달렸다. 75세 때 그는 저녁기도를 하러 가다가 전차에 치어 죽었다.
미완성된 성가족교회(계획되었던 탑 4개 중 하나만 세워진 트랜셉트만이 그가 죽기 전에 완성되었다)의 설계도와 모형에는 고딕 양식 성당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나선기둥, 쌍곡면의 볼트와 측벽, 쌍곡포물면 지붕 등이 복잡하게 상징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경이로운 성당 구조는 1960년대의 많은 엔지니어들과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떠한 콘크리트 골조물보다 가우디의 것이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도 초현실주의자와 추상표현주의 화가, 조각가들로부터 거의 무비판적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으나 그의 영향은 그 지역에만 국한되었고 평형구조를 따르는 몇 사람에 의해서만 표현되었다. 그는 국제주의 양식이 성행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거의 모든 전문가와 비전문가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그에게 다가온 디자인의 난관들을 헤쳐나갔던 무한하고 끈질긴 상상력 때문이었다.
주소 : Passeig de Gràcia, 43, 08007 Barcelona
대중교통 : 지하철 파세지 데 그라시아(Passeig de Gràcia) 역
개관 시간 : 오전 9시-오후 8시
휴관일 : 없음(특별 행사가 있는 날 제외)
입장료 : 20.35유로(학생, 65세 이상 16.3유로, 7살 미만 무료)
홈페이지 : www.casabatllo.es
바르셀로나를 찾는 이들이 빼놓지 않고 반드시 들르는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 1852-1926)의 명소 중 하나가 이곳이다. 반듯하고 널찍한 그라시아 산책로에 있는 이 건물은 제아무리 건축이나 도시의 모양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눈길을 확 끄는 매력을 뿜어낸다. 처음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는 이곳이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건물 밖에서만 구경했는데, 지금처럼 윤이 나도록 반들반들하고 조명도 아름다운 상태가 아니었다. ‘가우디의 건물이라면 이곳 말고도 여러 군데가 있으니까’ 하면서 스스로 위로했던 생각이 난다. 게다가 바르셀로나에는 가볼 데가 많아서 그 아쉬움을 금방 잊었다.
바르셀로나에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카사 바트요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었고, 그렇게 해서 들어간 이곳은 간들거리는 봄바람처럼 섬세해서 넋을 놓고 감상했던 기억이 난다. 이곳의 입장료는 만만한 가격이 아닌데, 그래도 꼭 들어가 볼 것을 권한다. 구불구불하고 알록달록한 건물 외관도 멋지지만 한창 무르익은 52살 때의 가우디의 솜씨는 실내에서도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입장료에 오디오 가이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어 서비스는 없어서 좀 아쉽다.
그라시아 산책로에 있는 카사 바트요는 원래 1870년대에 지어진 밋밋한 건물이었는데, 조세프 바트요(Josep Batlló)와 그의 부인이 1900년에 이 건물을 구입하여 가우디에게 재건축을 맡겼다. 어떤 곳에도 없는 새로운 건물을 원했던 야심에 찬 사업가 부부는 원래의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어 올리기를 바랐으나 가우디는 그럴 필요 없이 리모델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건축주를 설득했다고 한다. 1904년부터 작업을 시작한 건축가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리모델링을 해서 결국 꼭대기에 한 층이 추가되었고, 지하실도 생겼다. 실외는 물론 실내 벽까지도 새로 만들면서 모든 공간에서 직선을 없앴다.
1906년에 리모델링이 완성되었는데, 카사 바트요가 포함된 구역에 당대의 유명한 모데르니스모 건축가들의 작품이 여럿 있었고 이들의 경쟁 구도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마다 좋아하고 지지하는 건축가가 다들 제각각이었기 때문에 이 구역을 ‘만사나 데 라 디스코르디아(Manzana de la Discordia, 불화의 만사나)’라고도 불렀다. ‘만사나’는 스페인어로 사과라는 뜻도 있는데,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계기가 된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사과각주1) 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일종의 언어유희로 이렇게 이름이 붙었다.
불화의 만사나에서 가우디의 카사 바트요 외에 돋보이는 모데르니스모 건축물은 조세프 푸이그 이 카다팔치(Josep Puig i Cadafalch)의 카사 아마트예르(Casa Amatller), 루이스 도메넥 이 몬타네르(Lluís Domènech i Montaner)의 카사 예오 모레라(Casa Lleó Morera)가 있다.
가우디는 새로 지은 건물에 카탈루냐 수호성인의 전설을 재현했다. 카탈루냐어로 조르디(Jordi)라고 불리는 이 성인은 용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해 주었고 공주와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말을 타고 창을 든 조르디가 용을 공격했을 때 나온 피가 장미로 변했다고 하며, 그래서 카탈루냐에는 성 조르디를 기리는 축일인 4월 23일에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장미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물론 같은 날이 책의 날이기도 하기 때문에 책을 선물하기도 한다.
카사 바트요의 지붕은 용의 등이다. 등뼈와 비늘이 보인다. 굴뚝은 조르디가 용을 찌른 창이다.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작은 발코니들의 쇠창살은 용이 먹어 치운 먹이(동물 또는 사람)의 해골이다. 물결치는 듯 구불거리는 외벽은 용이 살던 연못의 물 표면이다.
가우디를 비롯한 모데르니스모 건축가들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모티프를 수공예적인 작업을 통해 만드는 것 외에도 채광과 통풍에 집중했다. 1층과 2층의 외벽은 창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해서 자연광을 최대한 많이 받아들인다. 창은 빛뿐만 아니라 공기를 통하게 하는 통로도 되는데, 외부의 창은 물론이고, 파티오 쪽으로 난 창이나 복도에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만들어서 최대한 통풍이 잘 되도록 했다. 건물 외벽도 그렇지만 실내 역시 직선이 없다. 자연의 모티프, 특히 물의 형태를 보고 만든 천장, 둥글게 굽이치는 벽, 계단, 난로 등 모두 부드럽게 흘러가는 곡선이다. 실내의 가구도 건물의 형태에 맞도록 만들어졌다.
*바로셀로나에 있는 가우디의 작품 까사 바트요 건물의 모습.
가우디의 작품들은 형태, 질감, 다색장식을 매우 다양하게 사용하며 이 요소들을 자유스럽고 표현적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가우디 건축의 복잡한 기하학은 그 건축 구조와 훌륭하게 일치되어, 외벽면을 포함한 전체가 마치 자연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 자연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전체적인 통일성에 대한 감각은 가우디의 생애를 말해준다. 그의 사생활이 바로 직업이었으며 건축예술에 관한 침착한 그의 비평은 삶의 예술에 관한 격언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을 송두리째 건축에 바쳤으며 그에게 건축은 모든 예술의 총체였다.
*거리의 모습
*그라시아 거리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로, 바다를 연상시키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컬러는 단연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카사 바트요는 바르셀로나의 사업가였던 바트요가 의뢰해 설계한 것으로 1905년부터 약 3년간 지어졌다. 카사 바트요의 외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해골 모양의 테라스와 뼈를 형상화한 기둥이다. 그래서 ‘인체의 집’이라는 의미로 카사 델스 오소스(Casa dels ossos)라고도 한다. 가우디의 특징인 곡선 구조는 실내에서도 확실히 드러나며, 반투명한 유리를 통해서 푸른빛이 비쳐 마치 물속처럼 보이는 효과를 표현한 엘리베이터도 카사 바트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이다. 현재는 글로벌 캔디 브랜드 추파춥스 회사의 소유이며, 가우디 탄생 150년 기념으로 2002년부터 바르셀로나 시와 함께 일반인에게 오픈하기 시작했다. 2005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구엘 공원
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엘공원은 가우디의 상상력과 창의적인 세계, 자연과 인간을 배려한 마음이 가득 담긴 곳이다. 이곳은 본래 가우디의 경제적 후원자인 구엘이 영국의 전원 도시를 모델로 대규모 주택단지를 짓기 위해 가우디에게 의뢰하여 설계된 곳이다. 구엘과 가우디는 이곳에 고급 주택 60호 이상을 지어 부유층에게 분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돌도 많고 경사진 비탈길이어서 작업을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결국 지형적 한계와 자금난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14년이라는 긴 공사 기간에도 불구하고 단지 몇 개의 건물과 커다란 광장, 예술작품 같은 벤치 정도만 남긴 채 야심찬 프로젝트는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구엘 사후 1922년 바르셀로나 시가 이 땅을 사들여 다음해 시영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 가우디와 구엘의 이상 주택이라는 본래의 계획에는 실패했지만 이곳은 가우디의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고 시민과 관광객들은 예술작품 같은 공원이 주는 무한한 감동을 선물 받게 되었다. '하마터면 이 아름다운 곳을 모두와 함께 나누지 못할 뻔했다니' 주택 건설의 실패가 너무도 감사하게 느껴진다.
구엘공원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과 철저히 계획한 인공미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대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다양한 색과 곡선의 아름다운 건물들, 화려하고 신비한 모자이크 장식의 타일, 땅을 고르는 것도 반대한 만큼 자연스럽게 터진 길과 인공 석굴 등 어느 것 하나 가우디답지 않은 것이 없다. 마치 은밀한 언덕 위에 만들어진 초현실 영화의 세트장처럼 멋지고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야자수 같은 나무와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타일벤치가 장관을 이루는 광장은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하나 타일을 붙여 만든 벤치는 같은 패턴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계획성 있게 색의 조화를 고려해 만들어졌다. 아이들은 비둘기가 있는 광장 중앙을 뛰어다니고 벤치의 모양을 따라 걷는 등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 곁에서 즐거운 시간을 만끽한다. 어떤 아이들은 벤치에 장식된 타일 문양을 그려보며 가우디의 작품을 감상한다.
놀라운 것은 이 광장을 거대한 돌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소 그리스, 로마 신전에 관심을 가졌던 구엘의 요청으로 가우디는 신전 모양의 건물을 지었는데 86개의 견고한 도리아식 기둥들이 광장을 받치는 디자인으로 설계한 것이다. 천장에도 깨진 타일 조각과 버려진 술병 등을 재활용하여 장식한 섬세함이 돋보인다.
정문 쪽을 바라보면 금방이라도 단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과자집 같은 건물 두 채가 보인다. 본래에는 수위실과 관리실 등 사무를 보는 공간으로 쓰려고 했다는데 지금은 기념품 숍으로 운영되고 있다. 뾰족한 지붕과 갈색과 흰색의 멋있는 색의 조화가 눈을 즐겁게 해준다. 또한 구엘공원의 마스코트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하수의 수호신 퓨톤을 지나칠 수 없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것 같은 퓨톤분수 앞에는 사진 촬영을 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가우디의 예술 혼이 곳곳을 휘감고 있는 이곳에서 방문객들은 자연을 사랑하고 인간을 배려한 천재 작가의 열정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동문으로 들어가면 돌기둥이 마치 조각타일을 붙인 술잔 모양의 돌기둥이
세워진 곳이 나오고 이돌은 구엘공원을 만들때 나온 돌이라네요.
*가우디가 전원주택단지로 제일먼저 지어진 전원주택 한때는 가우디가
기거했던 곳이라네요.
*현재도 사람이 살고 있다네요.
*언덕에서 바라 본 바로셀로나 시가지의 모습.
*시가지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건물이죠.작품이라 해야 하나.
*작품 앞에서.
*한장 더....
*우리도 한장 찍어줘요.
*나투라 광장 가는길에서.
*아래 보이는 건물이 과거에 가우디가 살았던 집이라 하네요.
지금은 가우디가 사용했던 물건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중.
*바로 오른쪽 건물은 기념품 가계로 사용중.
*구엘공원을 바라 보면서.
*다양한한 색상의 모자이크 장식의 타일로 공원의 의자와 벤치를 리듬감 있
게 만들어 놓았네요.
*구엘공원에는 넓은 광장이 있는데 이 곳 이름이 나투라광장 입니다.
이광장을 아래에서 동기둥으로 바치고 있습니다.
*조각작품 같으데요.
*물동이를 이고 있는여인.
*나투라 광장을 떠바치고 있는 기둥이 86개로 고대 건축물의 기둥과 비숫하네요.
*도마뱀 분수대 앞에서.
*현재는 기념품 샾으로 사용중인 건물.
*기둥을 등지고...
*비들기의 다정한 모습.
*구엘공원을 올려다 본 모습.
주소 : Carrer de Mallorca 401, Barcelona
대중교통 : 지하철 마요르카(Mallorca), 사르데냐(Sardenya) 역
개관 시간 : 10월-3월 오전 9시-오후 6시, 4월-9월 오전 9시-오후 8시
휴관일 : 1월 1 · 6일, 12월 25일 오후 · 26일
입장료 : 13.5유로(학생, 18세 미만 11.5유로, 10세 이하 무료)
홈페이지 : www.sagradafamilia.cat
아마도 가우디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건축물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즉 성가족 성당일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이미지에는 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모습이 포함되기 마련인데, 그 규모가 워낙 크고 계획도 현대 건축물답지 않게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1-2년이면 건물을 ‘뚝딱’ 짓고 삼십 년 된 아파트는 당연히 헐어 버려야 마땅한 퇴물 취급을 하는 우리의 풍토와는 너무 다르다. 그래서 더욱 인상적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유럽의 성당 중에는 짓는 데 몇 백 년이 걸린 곳이 허다한데, 역사 속의 사건이 아니고 현재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1883년, 한 독실한 가톨릭 단체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신자들의 모금으로 가우디에게 성당 건축을 맡겼다. 한 해 전에 다른 건축가가 처음 설계를 시작했던 것을 이어받았는데, 이 작업은 가우디가 192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 이후에는 다른 건축가들이 넘겨받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의뢰 받은 다른 일과 함께 진행해 오다가 1914년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만 매달렸으며, 심지어 성당 옆에 숙소를 만들고 그곳에서 일하며 살기까지 했다. 가우디는 본인이 살아 있을 때 성당 건축이 마무리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성당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 않다. 난 늙을 테지만 내 뒤를 다른 사람들이 이어갈 것이다. 작품의 정신은 항상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작품과 함께 살아가는 세대의 것이다.”
1926년, 그는 전차에 치여 심각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고, 3일 후에 사망했다. 그가 눈을 감은 병원은 루이스 도메넥 이 몬타네르라는 또 다른 모데르니스모 건축가가 설계한 산타 크레우 이 산트 파우 병원(Hospital de la Santa Creu i Sant Pau)이었다. 이곳은 가우디가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있다. 그의 유해는 성당 안에 묻혔으며 병원에서 성당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그의 이름이 붙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 도착하면 누구나 높이 솟은 탑에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직육면체도 원통형도 아니고, 꼭짓점이 뾰족하지도 않은, 타원형을 아주 길게 늘여 놓은 것 같은 탑이다. 예수의 열두 사도들에게 봉헌되는 열두 개, 복음서 저자들을 위한 네 개,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씩 해서 모두 열여덟 개의 탑이 지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건물의 동쪽, 그러니까 연못이 있는 공원 쪽에 가까운 곳이 가장 먼저 지어 올리기 시작한 ‘예수 탄생’ 파사드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오는 수태고지 장면, 예수 탄생 장면, 동방박사와 목동이 경배하러 오는 장면 등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 파사드 위의 탑 네 개 중 우리가 보기에 가장 왼쪽에 있는 탑이 성 베르나베(사도행전의 바르나바)에게 봉헌된 탑인데, 가우디가 살아 있을 때 유일하게 완성된 탑이라고 하며 높이는 100미터에 이른다.
성당의 서쪽은 ‘예수 수난’ 파사드다. 예수의 수난 장면을 재현해 낸 사람은 조세프 마리아 수비락스(Josep Maria Subirachs)라는 바르셀로나 출신의 조각가로, 1987년부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작업을 맡았다. 예수의 수난, 고통, 죽음, 희생이라는 주제를 다룬 조각은 서쪽 하늘에서 해가 질 때 점점 어두워지는 풍경과 드라마틱하게 어울린다.
가우디는 고딕 양식의 라틴 십자가형 플랜(한쪽이 나머지 셋보다 긴 십자가 모양의 도면)에서 시작하여 기하학적인 형태와 자연의 모티프를 사용해서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성당을 설계했다. 가우디가 1926년에 사망한 뒤, 1930년에 ‘예수 탄생’ 파사드와 종탑이 완성되었다. 스페인 내전 중에 가우디의 작업실에 화재가 일어나 설계도와 각종 사진, 자료 등이 불탔으나 그의 아이디어는 계속 이어졌고, 내전이 끝난 1939년 이후에는 속도는 느리지만 공사가 재개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사에 사용된 기술도 현대의 기술로 바뀌었다. 시멘트도 활용하지만 가우디 특유의 모자이크(트렌카디스(trencadÍs) 기법이라고 한다. 색유리나 도자기 등을 깨뜨린 후 붙이는 방식으로, 곡면에 모자이크를 제작하기가 좋다) 제작 방식은 계속 이어진다. 2010년에는 성당의 내부가 완성되어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가 집전하는 봉헌 미사가 거행되었다. 성당 내부의 기둥은 마치 키가 큰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가우디가 사망한 지 백 년 되는 해인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1990년대에 이곳을 처음 봤을 때는 과연 그때가 오기는 하는 것일까 싶었는데 십 년 조금 넘게 기다리면 완성된 성당을 볼 수 있다니 묘한 기분이 든다.
*가우디의 설계작 성가족 대성당 현재도 공사중.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큰 감명을 받고 돌아온 바르셀로나의 한 출판업자가 바르셀로나만의 대성당을 짓자는 운동을 벌여 시민 모금이 시작되었다. 1882년 가우디의 스승이었던 비야르(F. de P. Villar)가 좋은 뜻에 동참하여 무보수로 성당 건설을 시작했지만 무조건 싸게 지으려고만 하는 교구에 질려 1년 만에 포기하고 자신의 제자였던 가우디를 후임자로 추천하였다. 젊은 건축가에게 맡기면 공사비를 아낄 수 있을 것이라는 교구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가우디가 공사를 맡았을 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는데, 그는 비야르가 설계한 초기의 디자인을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면서 그때부터 죽는 날까지 43년간 이 공사에 남은 인생을 모두 바쳤다. 그는 공사 현장에서 직접 인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설계도를 그려 나갔고, 마지막 10년 동안은 아예 작업실을 현장으로 옮겨 인부들과 함께 숙식하면서까지 성당 건축에 몰입했다. 그러나 1926년 불의의 사고로 그는 결국 성당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해는 자신이 지은 이 성당의 지하 납골묘에 안장되었다. 원래 이 납골묘에는 성인이나 왕족의 유해만 안치될 수 있는데, 로마 교황청에서 그의 신앙심과 업적을 높이 사서 허가해 준 것이다.
그의 사후, 스페인 내전 과정에서 설계 도면이 불에 타 사라져 공사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한 후배 건축가들의 기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성당의 건축은 계속되었다. 오로지 기부금과 입장료 수입만으로 공사 비용을 충당하고 있어 착공된 지 130년이 넘은 현재도 진행 중이며 언제 완공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는 총 3개의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 가 있는데, 각각 ‘예수 탄생’, ‘예수 수난’, ‘예수 영광’을 주제로 설계되었고, 이 중 ‘예수 탄생’의 파사드는 가우디가 생전에 직접 완성시킨 것이다. ‘예수 수난’ 파사드는 1976년에 완공되었고, 마지막 남은 ‘예수 영광’ 파사드는 아직 착공도 하지 않은 상태이다. 3개의 파사드 위에는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12개의 종탑이 세워지고, 중앙에는 예수를 상징하는 거대한 탑이 세워질 계획인데, 현재까지는 8개의 종탑만 완공되었다. 내부는 마치 숲 속에 와 있는 것처럼 나무와 꽃들을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기존의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아름답게 빛난다. 내부가 다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미사를 여는 데는 지장이 없는 수준이 되어 가고 있다.
종탑은 걸어서 오르거나 유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수 있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르셀로나 풍경도 인상적이다. 날이 좋으면 먼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예수 수난’ 파사드 화장실 방향에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 과정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 있으니 시간 여유가 있다면 놓치지 말자. 주말이나 성수기에는 하루 종일 줄이 줄지 않을 만큼 많은 관광객들이 찾기 때문에 가능하면 오전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예수 수난 파사드의 모습.
*예수수난 파사드의 조각품들.
*성당내부의 모습.
*자영채광을 위해 스테이드글라스를 이용한 자연채광의 아름다움.
*조명이 필요없은 현대식 공법의 가우디 작품.
*성당내부의 천정모습.
*성당내부의 기도할수있는 곳.
*이건물이 134년째 공사중이라는 것이 실감이..
*성당내부의 아름다움 말이 필요 없어요.
*아직도 미완성의 성가족 대성당.
*위 그림은 아기예수를 경배하는 목동들의 모습.
*저녁을 먹기위해 해안가에서 바라 본 항구의 야경 대형 크루즈선이 입항.
*항구의 야경을 배경으로.
*항구의 야경 10일차 스페인 바로셀로나 여행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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