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

지중해 여행 9일째(마드리드~세고비아.오후에 바로셀로나 비행기로 이동)

문수산 아래 2017. 3. 8. 11:14

지중해 여행 9일차 여행을 마드리드에서 버스로 1/20분이동 세고비아로 이동

 알카사르성.로마수로교등을 관광하고 마드리드로 귀환 점심 후 국내선 비행

 기로 바르세로나로 이동 합니다.

 

 

                        *아침을 먹고 마드리드에서 세고비아로 가는길 산에는 간밤에 눈이 우리눈을

                         즐겁게 하네요.한국의 울산에서는 올겨울 눈을 이렇게 본적이 없은것 같은데

 

*알카사르성

월트 디즈니의 만화 영화 〈백설 공주〉의 실제 모티브가 되었던 성으로 알카사르라는 말보다 ‘백설 공주의 성’으로 더욱 많이 알려진 곳이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요새가 있었던 자리에 12세기 알폰소 8세가 성을 건축한 뒤 수세기에 걸쳐 역대 왕들에 의해서 증개축이 거듭되었고, 1862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1474년 이사벨 여왕의 즉위식이 거행되었고, 1570년 스페인 전성기에 즉위했던 펠리페 2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성 내부에는 왕들이 사용했던 가구와 유물들, 갑옷과 무기, 회화와 각종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의 탑에 오르면 우아한 대성당과 함께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세고비아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다.

 

 

*알카사르성을 배경으로...

 

*성의 주인 백설공주는 아니지만 오늘의 주인은 누가있나!!!

 

*무어인들을 몰아내려는 스페인의 노력이 더욱 거세지면서, 요새이면서도 위압감을 주는 건축물을 마련해야 할 이중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알카사르의 형태는 보통 직4각형으로, 방어하기 쉽게 설계한 벽과 네 귀퉁이의 거대한 탑이 있다. 알카사르 안에는 널따란 중정(파티오)이 있고, 그 주위를 예배당·살롱·병원 등이 에워싸고 있는데, 경우에 따라 정원도 딸려 있었다. 세고비아(14세기)와 톨레도(14세기, 개축 16세기)에도 알카사르가 세워졌으나 가장 유명한 것은 세비야에 있는 것으로 이곳의 성벽은 1364년에 세워졌다.

 

*백설공주의 성 사진의 배경으로는 좋은 것 같아요.

 

*다른 방향에서...

 

*멋진 포즈로....

 

*아름다운 배경이네요,

 

*울산팀의 백설공주,

 

*좋아요,

 

*주위의 배경과 동화속의 백설공주 짱입니다,

 

*성이 꽤 무거울 텐되,

 

*우리와 일정을 같이한 버스,

 

*로마수로교 가는 길 세고비아의 시내모습,

 

*세고비아 거리의 풍경,

 

*로마수로교

 

 

 

 

수로교(aqueduct)

 

라틴어로 'aqua'는 '물'이라는 뜻이며 'ducere'는 '끌다'·'대다'라는 뜻이다.

좀더 제한된 의미로, 수로교는 계곡이나 골짜기를 가로질러 물을 대는 데 이용되는 구조물을 가리킨다. 현대 토목공사에서 'aqueduct'라는 말은 물을 수원지에서 주요 배급지까지 보내기 위해 거치게 되는 관·도랑·운하·터널·지지구조물 등의 체계를 의미한다.

비록 로마인들이 고대사회에서 가장 훌륭하게 수로를 건설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카나트 체계는 고대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 및 여러 중동 국가에서 수백 년 더 일찍 사용되었다.

이러한 수로관망은 평원에 관개를 하기 위해 산중턱에 터널을 만들어서 물을 끌어왔다. BC 691년경 니네베(중동지방의 옛 도시)에 맑은 물을 대기 위하여 아시리아인에 의해 건설된 석회석 수로교는 고대 로마인의 구조물과 유사한 형태이다. 골짜기를 가로질러 높이 10m, 길이 274m의 수로를 만드는 데에는 약 200만 개의 거대한 돌벽들이 이용되었다.

로마 제국의 수도(首都)에 만들어진 정교한 수로체계는 아직도 토목공사에서 대단한 위업으로 남아 있다.

500여 년에 걸쳐(BC 312~AD 226) 11개의 송수로가 약 92㎞ 정도 떨어진 곳에서 로마로 물을 대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이중 일부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로마 송수로체계의 일부분(전체 418㎞ 가운데 48㎞)이 실제로 석조 아치 형태로 골짜기를 가로질러 건설되었다. 그외 나머지 부분은 지하도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암석과 테라코타로 건설되었지만, 목재·가죽·납·청동으로 건설되기도 했다.

물은 단지 중력의 힘에 의해 도시로 송수되었고, 일반적으로 저수되는 물은 없었으며, 초과된 물은 하수구로 흘러나갔다. 로마의 수로교는 로마 제국 도처에 건설되었고, 그들이 건설한 아치는 그리스·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북아메리카·소아시아 등지에서 아직도 볼 수 있다. 4, 5세기에 중앙정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수로관망의 질 또한 저하되었다. 그뒤 중세 서유럽에서의 수로교가 사용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다시 우물과 지방하천에서 물을 얻었다.

간단한 수로관망이 사원 주위에서 나타났고, 14세기경에 인구가 4만 명으로 그당시로 보면 비교적 많이 운집한 브뤼헤에서는 체인에 물통을 단 바퀴를 이용해서 퍼올린 물을 지하도관으로 공공장소에 공급하는 커다란 수조를 개발했다.

르네상스 이후 공공수로관망에서의 주된 발전은 펌프와 파이프 자재의 혁신으로부터 왔다. 16세기말 런던에서는 5개의 수차 펌프를 런던 대교 아래에 고정시키고 여기에 수로교를 연결하여 도시 내에 물을 공급했으며, 파리에도 매분 454ℓ의 물을 송수할 수 있는 비슷한 설비가 퐁뇌프(Pont-Neuf)에 있었다.

그러나 두 도시 모두 17세기에는 훨씬 더 먼 거리에서 물을 송수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한 개인회사가 목재로 건설된 200개 이상의 교량을 이용하여, 채드웰 강에서 런던까지 61㎞의 거리에 수로교를 건설했다. 프랑스에서도 산등성이 너머의 마를리에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펌프와 수로교를 연결해, 센 강보다 약 183m 높은 곳에 만들어놓은 수로교를 통해 물을 공급했다.

18, 19세기의 주요한 대변혁 중의 하나가 증기기관을 이용한 펌프의 등장과 가압관망의 개선이었다.

압력을 이용해 물을 양수하는 장점은 관망이 등고선을 따라서 시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전의 자유흐름 체계는 변화하는 지형에 관계 없이 어느 정도의 하향 기울기를 유지해야 했던 반면, 가압관망은 더 좋은 파이프 재료가 필요했다. 1885년 미국에서는 금속재로 이음새가 연결되고 아스팔트로 표면처리해서 보호된 목재 파이프가 특허를 얻었다. 이 목재 파이프는 1㎠당 12㎏의 압력까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목재는 주철로 대체되었다가 다시 강철로 대체되었다.

20세기초에는 거대한 사이펀 관(높은 곳에 있는 물을 사이펀 압력으로 끌어내리는 도관)의 재료로 철근 콘크리트가 주로 쓰였다(→ 펌프).

현대의 수로교는 로마인에 의해 건설된 아치의 위풍은 없어졌지만 길이와 수송할 수 있는 물의 양적 차원에서는 옛날의 수로교를 크게 능가한다. 수백㎞의 수로관망체계는 늘어나는 도시지역과 작물관개단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뉴욕 시의 급수공급은 193㎞ 정도 떨어진 수원지에서 매일 68억ℓ의 물을 공급할 수 있는 3개의 수로관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긴 수로관망은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데, 1960년 이래로 공사가 진행중인 중요 사업으로는 캘리포니아 주 북부에서부터 966㎞ 정도 떨어진 멕시코 국경까지 물을 관개하는 것이다. 이 공사가 완성되면 매년 52억ℓ의 물을 공급할 수 있다.

 

 

 

*세고비아의 로마수로교 앞에서,

 

 

 

*대단한 문화유산 앞에서,

 

*상상을 초월할 대단한 유산이 여기에 있네요,

 

*좋은 곳에서 좋은사람과 함께해 좋아요,

 

 

 

 

 

  
가르다리(Pont du Gard)

프랑스 남부에 있는 거대한 수로교

 고대 로마 사람들이 가르 강물을 오늘날의 님 시로 끌어 오기 위해 BC 19년경에 세운 다리로 뛰어난 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아우구스투스의 사위이자 부관이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전체는 3층 아치로 이루어져 있고 높이는 47m이다. 1층은 폭 15.5~24.5m 가량의 6개의 커다란 아치들이 강을 가로질러 놓여 있으며, 2층은 같은 크기로 11개의 아치가 있고, 수로가 있는 3층은 폭 4.6m의 작은 아치 35개로 구성되어 있다. 로마의 유명한 여러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모르타르를 쓰지 않고 건설된 것이 특징이다. 이 다리는 5세기에 심하게 부서졌으나 1743년 복원되었고, 그뒤 고속도로용의 또

다른 다리가 기단부분과 나란히 덧붙여 건설되었다.

 

 

*수로교 밑에서,

 

만든 시대에 놀라고 규모에 놀라고......

 

*수로교 뒤쪽의 모습.

 

*수로교에서 바라 본 세고비아 시가지의 모습.

 

*수로교 상부에서 바라 본 모습

 

*수로교 상부에서.

 

*수로교 상부에서 바라 본 모습

 

*수로교를 뒤로하고,,,,

 

*이번을 같이한 유지인씨와 함께.

 

*이번 여행을 처음부터 한팀원으로 같이 하면서 기념사진으로 남길수 있게

 이렇게 해주신 점 감사합니다.

 

*우리도 기념으로....

 

 

 

 (兪知仁, 본명은 이윤희(李允熙), 1956년 1월 27일 ~ )은 대한민국배우이다.

그녀는 대한민국 여자 석사 배우 1호라 일컬어지는 선배 영화 배우 윤정희에 이어 대한민국 여자 석사 배우 2호라 불리고 있다.

 

학력[편집]

생애[편집]

그녀의 부친육사 10기보병학교 출신으로 1967년 대한민국 육군 대령 예편하였으며 한국 전쟁(3년간 참전)과 베트남 전쟁(1년간 참전)에 참전한 공적이 있다. 그녀는 여고 3학년이던 1973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이어 같은 해 1973년 TBC 동양방송 공채 탤런트 14기로 입사하였으며 1974년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지인은 대학생 대상 잡지에 표지모델로 실린 사진이 눈에 띄어 연방영화사와 주간한국이 공동으로 모집한 신인배우 모집에서 무려 23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1974년 영화 ′그대의 찬손'으로 영화배우 데뷔하였다. 1956년 경상남도 사천에서 출생한 유지인은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는데, 영화배우 데뷔할 당시(1974년) 그녀의 아버지는 육군 대령 예편 7년차의 시기였다. 《그대의 찬손》이라는 영화 작품은 인기작가였던 강신재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었는데, 유지인이라는 예명도 유치원 보모였던 주인공 ‘지인’의 이름에서 비롯됐고 흥행에도 비교적 성공한다. 1975년 TBC 드라마 님이 성공하고 《쥬단학화장품》(現 《한국화장품》)의 전속 모델이 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이후 1977년까지 매년1~3편의 영화에 지속적으로 출연하였고 1977년 TBC 드라마 《서울야곡》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1977년 같은 해 TBC 드라마 《청실홍실》의 주연인 장미희·정윤희와 함께 신트로이카를 구축하며 브라운관과 영화계를 이끄는 대스타로 성장하며 최고의 인기를 얻는 스타가 된다. 1978년 영화 《마지막 겨울》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흥행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1979년 흥행 1위를 기록한 《내가 버린 남자》를 비롯해 《26×365=0》, 《청춘의 덫》, 《불행한 여자의 행복》, 《가시를 삼킨 장미》 등의 영화들을 히트시켰으며 그 해 《심봤다》로 여자 트로이카 배우들 중 처음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1979년을 완전히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1980년에 제작된 이두용 감독의《피막》으로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3대 국제 영화제 중 베니스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하며 한국영화 세계화의 초석이 된다. 당시 중앙대 연극영화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그녀는 예비역 육군 대령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당시 닮고 싶은 여성상 1위기도 했고 몇년 동안 연예인 소득 1위를 고수 했다. 1950년대생 여자 배우 최초로 석사 학위를 취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TBC 전속 탤런트인 장미희, 정윤희와 함께 여자 배우 트로이카를 이루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86년에는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군의관 대위 출신의 치과 의사와 결혼하면서 동시에 연예 분야 은퇴, 이후 16년만인 2002년 이혼과 동시에 전격 복귀하며 현재 KAC 한국예술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연작[편집]

TV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연극[편집]

방송[편집]

광고[편집]

수상[편집]

 

 

*세고비아 대성당

 

 

‘모든 성당 중의 여왕’, ‘대성당의 귀부인’이라 불리는 대성당이다. 원래 있던 대성당이 코무네로스의 반란으로 파괴된 후, 카를로스 1세의 명령으로 1525년에 재건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1768년에야 축성하였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완성된 성당은 드레스를 활짝 펼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유럽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대성당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성당 내부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제단 장식은 놓치지 말도록 하자. 박물관 안에는 순금으로 만든 보물들과 유모의 실수로 떨어져 죽게 된 엔리케 2세의 아들 페드로의 묘도 있다.

 

*세고비아 대성당은 후아나의 아들인 카롤로스 1세가 완공하였다는 성모의

 대성당.

 

 

*스페인 세고비아에 있는 대성당이다.

에스파냐 후기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며, 세련된 모양 때문에

'대성당 중의 귀부인'이라고 불린다.  건물 규모는 가로 50m, 세로 105m이다.

 

 

*우리는 성당 외부만 보고 갑니다.

 성당 앞의 광장 이름이 여기도 마요르광장이라네요 마드리드에도 같은 이름

 의 광장이 이었는데...

 

*세고비아 시청사가 보이네요.

 

*세고비아 시내의 모습.

 

 

*아무 곳에서나 기념 사진을 남겨요.

 

*세고비아에서 마드리드로 돌아가는 산악 풍경 아직도 눈이 보이네요.

 

*간밤에 제법 많은 눈이 내렸네요.세고비아의 고지가 1,000m가 넘어서 그런

 지 겨울에는 눈이 온다네요.

 

*유명한 레알 마드리드 축구팀의 홈구장 모습.

 마드리드에 위치한 축구 전용 구장인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Estadio Santiago Bernabéu)를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1947년 12월 개장한 이 경기장 은 개장 당시 7만 5천 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구장이었다. 여러 차례 리모델 링 과정을 거친 지금은 8만 1천 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약칭 엘 베르나베 우(El Bernabéu), 혹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Santiago Bernabéu)로 부르기도 하는 이 구장은 UEFA가 5성급 경기장으로 선정한 바 있다.

 

*레알 마드리드 축구팀

 1902년 마드리드 풋볼 클럽으로 창단한 이래 1905년 스페인의 FA컵인 코파 델레 이 우승을 시작으로 1930년부터 우승팀의 명성을 이어왔다. 이후 2015년까지 프 리메라 리가에서 32회 우승하며 역대 최다 우승 팀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이외에 코파 델레이 19회 우승, 스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9회 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11회 우승, UEFA 슈퍼 컵 3회 우승 등의 화려한 전적을 보유하고 있다. 프리메라 리가를 비롯하여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역대 최다 우승으로 기록되어 있다. 2016년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2년 연속 최고의 클럽의 자리에 올랐다.

 

 

*스포츠 메니아의 영광 레알 마드리드 전용구장 앞에서.

 

*저도요!!!!

 

*9일차 일정을 마무리 하고 호텔에서 마드리드 통닭으로 한잔해요.

 마드리드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바로셀로나 도착 호텔 피로를....

 

*모두가 먹는데 정신이 없네요.

 

*진지하게.....

 

*이제 배가 부른가 여유가 보이네요 .

 

*9일차 일정을 마무리해요.이제 지중해 여행도 일정이 몇일 남지 않았네요

 나머지 여행도 즐거운 여행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