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 : 캠핑카 2번째 여행지인제 1박2일 인제 여초 서예관 여행
*일 자 : 2020년 01월 09~10일.맑음 -3~6도
*누구와 : 부부(최현숙.임무용)
*코 스 : 자작나무숲~산촌민속박물과~박인환문학관~백담사
*네번째 여행지 인제 백담사 여행
*백담사 건너가는 다리위에서 상류쪽의 모습
*하류쪽의 모습
*햇쌀에 반짝이는 모습
*백담사 일주문에서 ㅂ바라 본 다리의 모습
*백담사 일주문
*백담사 전경
요약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647년(진덕여왕 1)에 자장 창건한 한계사로부터 기원되어 여러 차례 화재 피해를 거치면서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등으로 개칭되어 새로 지어졌다. 1455년(세조 1)에 중건하면서 백담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용운이 머물면서 〈님의 침묵〉, 〈불교유신론〉을 집필하면서 만해사상의 산실이 되었다. 6·25전쟁 때 불탄 것을 1957년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대통령 내외가 이 절에 은거한 것을 계기로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보전·칠성각·선원·요사채 등이 있고, 자장의 유물로 전하는 아미타상과 소종, 인조의 하사품인 옥탑, 설담당 부도, 연포당 부도 등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이 절의 기원은 647년(진덕여왕 1)에 자장(慈藏)이 창건한 한계사(寒溪寺)이다. 690년(신문왕 10)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했다. 785년(원성왕 1) 다시 불탄 것을 790년에 종연(宗演)·광학(廣學)·각조(覺照)·영희(靈熙)·법찰(法察)·설흡(雪洽) 등이 절터에서 30리 아래로 옮겨 운흥사(雲興寺)라고 했다.
984년(성종 3)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987년에 동훈(洞薰)·준희(俊熙) 등이 운흥사지의 북쪽 60리 되는 곳에 옮겨짓고 심원사(深源寺)라고 개칭했다. 1432년(세종 14)에 또다시 불이 나자 의준(儀俊)·해섬(海暹)·취웅(翠雄)·신열(愼悅) 등이 옮겨 짓고 선구사(旋龜寺)라 개칭했다. 1443년 화재로 소실되자 1447년 옛 터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절을 짓고 영취사(靈鷲寺)라고 했다. 1455년(세조 1)에 다시 화재로 불타버리자 재익(載益)·재화(載和)·신열 등이 옛 터의 상류 20리 되는 곳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명했다. 1775년(영조 51)에 다시 불이 나자 최붕(最鵬)이 태현(太賢)·태수(太守)와 함께 중건하고, 심원사(尋源寺)라고 개칭했으나 1783년(정조 7)에 다시 백담사로 환원했다. 1915년에 일어난 화재로 거의 모든 당우가 타버린 것을 당시 주지였던 인공(印空)이 중건에 착수해 1921년에는 응향각 등 사무실 30여 칸을 새로이 짓고, 종과 북을 주조해 낙성법회를 열었다. 근대에 한용운이 머물면서 〈님의 침묵〉, 〈불교유신론 佛敎維新論〉을 집필하는 등 만해사상의 산실이 되었다. 6·25전쟁 때 불탄 것을 1957년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前)대통령 내외가 대(對) 국민사과성명 발표 후 이 절에 은거했다가 1990년 12월 30일에 연희동 사저로 돌아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보전·칠성각·선원(禪院)·요사채 등이 있고, 남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관음전이 있다. 그밖에 자장의 유물로 전하는 아미타상과 소종(小鐘), 인조(仁祖)의 하사품인 옥탑(玉塔), 설담당(雪潭堂) 부도, 연포당(蓮浦堂) 부도 등이 있다.
*백담사
위치 | 강원도 인제군 북면 백담로 746 (북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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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는 내설악에 있는 대표적인 절로 가야동 계곡과 구곡담을 흘러온 맑은 물이 합쳐지는 백담계곡 위에 있어 내설악을 오르는 길잡이가 되고있다. 신라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세웠는데 처음은 한계사라 불렸으나 그 후,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가 백개 있어 백담사라 이름 붙였다. 십여차례 소실되었다가 6. 25동란 이후 1957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는 등 역사적 곡절이 많은 절이다. 자장율사의 유물소동일좌와 인조 때 설정대사에게 하양한 칠층소형옥탑 등이 있으며, 암자로는 영시암, 오세암, 봉정암이 있다. 그 밖에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머리를 깍고 수도한 곳으로 유명하다. 만해 스님은 민족와 국민을 위해 그곳에서 민족의 얼을 되살리는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집필을 하였다면, 전두환 전대통령 부부는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참회를 하였다 한다. 백담사 앞 계곡 한쪽으로는 무수한 돌탑이 있는데, 백담사를 다년간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쌓은 것이다.
*백담사 만해 한용운 흉상
요약 일제강점기 불교계에 혁신적인 사상을 전하고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던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 본관은 청주, 자는 정옥,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이며 유년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으나,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한 뒤 수년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고 한다. 1918년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하고 계몽적 성격의 글을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1925년에는 한국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 <님의 침묵>을 펴내어 민족의 현실과 이상을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이후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에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개요
한국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인 〈님의 침묵〉을 펴냈고,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 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을 펼쳤으며,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하는 등 일제강점기의 혁명적인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본관은 청주(淸州). 속명은 유천(裕天). 자는 정옥(貞玉). 용운은 법명이며 득도할 때의 계명은 봉완(奉玩), 법호는 만해(萬海 : 또는 卍海).
생애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어릴 때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세 때인 1896(또는 1897)년 고향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주에서도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백담사에서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 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했으며, 1908년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저지했다.
1913년 박한영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했고 1917년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 어느날 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진리를 깨우쳤다고 한다. 1918년 불교잡지 〈유심 惟心〉을 창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인 1922~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으며,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1936년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에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불교사상과 불교혁신운동
흔히 불교사회주의로 요약되는 그의 불교사상은 불교계에서 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우리 민족 현실 전반에 대한 혁명적 사상의 기반을 이루었다.
〈조선불교유신론〉은 그의 불교혁신론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책이며, 당시 한국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가운데 불교사상이 진보주의·평등주의·구세주의의 입장에 서야 함을 역설했다. (〈조선불교유신론〉)그는 불교가 미래의 인류문명에 적합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에서는 낙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염불당 등의 기존의 허례적인 의식들을 타파하고 산중에 있는 절이 도시로 나올 것, 승려들도 사취(詐取)와 동냥질을 그만두고 스스로 생산활동에 참여할 것, 승려의 취처(聚妻)를 허락할 것 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원운영의 혁신을 주장하는 내용에서 불교의 대중화·민중화라는 기본사상이 도출되어 나온다. 그는 불교의 민중화를 위해 불교 교리와 제도, 불교 재산을 민중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청년불교를 제창하고 그 부흥을 위해 노력했고 〈불교대전〉 등 불교경전의 번역작업에 착수했으며,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정선강의 채근담 精選講義菜根譚〉을 펴내고 〈유심〉·〈불교〉 등의 잡지 간행에 힘쓰는 등 불교의 민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불교의 민중화와 그의 불교활동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 불교의 자주화운동이다.
1910년 원종(圓宗) 종무원 이회광이 불교확장이란 미명하에 일본에 가서 조선의 원종이 일본 조동종과 완전히 연합·동맹할 것 등을 협약하고 오자, 그 이듬해에 박한영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해 이회광을 종문난적(宗門亂賊)으로 규정하면서 원종에 대응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불교자주화운동이다. 이 활동을 통해 그전까지는 다소 불분명했던 그의 반제국주의적 사상이 뚜렷해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후 그의 불교자주화운동은 1931년 결성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이면단체였던 만당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긴급한 사명으로서 정교분립(政敎分立)과 불교통일의 촉진, 불교의 사회적 진출을 강조했는데, 그중 정교분립을 주장한 것은 종교를 하수인으로 삼으려는 일제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불교사상의 측면에서 역사를 끊임없는 변전의 운동으로 파악하는 중관론(中觀論)에 기초해 소승적인 소극주의나 현세부정적인 불교를 비판하고, 중생의 삶에서 곧 정토를 구하는 대승적인 입장을 취했다.
1933년 〈유마힐소설경강의 維摩詰所說經講義〉를 저술했으며, 강렬한 현실비판 등 현세에서의 실천을 강조한 그의 혁명사상도 이러한 불교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만해 한용운 기념관
출생 |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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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4년 6월 29일 |
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년 |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韓應俊)과 온양 방씨(溫陽方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萬海)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쳤다. 유년시절에는 부친으로부터 의인(義人) 및 걸사(乞士)의 기개와 언행을 전해 듣고 나라와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리하여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성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집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으로 나왔다.
이런 결단으로 선생은 나라를 구하려고 집을 나왔다가, 우선 ‘인생은 무엇인가’를 풀기 위해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갔다. 백담사에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배웠지만, 문명세계를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세계일주를 단행하였다. 세계일주를 시베리아에서 중단한 선생은 설악산 백담사로 돌아왔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불교사상을 탐구한 선생은 일본으로 들어오는 문명세계를 확인하기 위하여 1908년에는 일본유학을 단행하였다. 6개월의 짧은 유학 생활에서 선생은 불교 근대화라는 새로운 세계를 확인하였다.
『조선불교유신론』을 간행하여 불교의 혁신을 주장하다
1910년 선생은 한국불교가 새로운 문명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개혁방안을 제시한 기념비적 책인『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다. 이 책은 1913년에 발간되었는데 그때부터 선생은 불교의 혁신운동을 일으킨 주역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910년 10월 친일승려 이회광(李晦光)은 한국의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합병을 발표하였다. 선생은 이를 정치적 상황에 편승한 친일매불(親日賣佛) 행위로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이회광 일파를 민족불교 파괴자로 규정하는 한편, 박한영(朴漢永), 진진응(陳震應), 김종래(金鍾來) 등과 함께 격문을 돌려 1911년 2월 송광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원종에 대응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케 하였고, 그 이후 임제종 종무원은 범어사에 두면서 임제종 중앙포교당을 서울에 설립하였다. 이때 선생은 관장 직무대리로 임제종운동을 진두지휘하였다.
1914년에는 고려대장경의 핵심적인 내용을 축약한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이후 교양서인 『정선강의 채근담』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계몽 잡지인 『유심(惟心)』을 발간하였다. 이와 같은 행보는 선생이 추구하던 불교의 대중화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행보이었다. 즉 암울했던 식민지 무단통치 아래서 민족의 입과 귀의 역할을 하면서 독립의 희망을 키워갔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다
1919년 선생은 천도교 ・ 기독교 ・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 ・ 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측 인사들과의 접촉을 위해 동분서주 하였다. 그 결과 서울 임제종포교당에서 같이 활동하였던 백용성(해인사 출신) 선사를 민족대표로 서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남 거창까지 내려가 유림의 거두인 곽종석을 만나 유림측도 운동에 동참을 유도하였다.
선생은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즉 선생은 2월 28일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의 사장인 이종일로부터 3천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를 불교계 대표적인 단체(30본사연합회)가 서울에 세운 학교인 중앙학림(동국대 전신) 학생인 신상완(申尙玩) ・ 김법린(金法麟) ・ 백성욱(白性郁) ・ 정병헌(鄭秉憲) ・ 오택언(吳澤彦) 등에게 건네주면서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에 시내 일원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운동 및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권유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이종일이 가져온 선언서를 돌려보는 것으로 낭독을 대신하고, 선생에게 간단한 식사(式辭)를 부탁하였다. 이에 선생은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하였다.
태화관에서 민족대표의 행동강령을 제시하다
선생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이후 피체될 경우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제시하였다.
첫째,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셋째,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민족대표들은 모두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선생은 옥중에서도 의인(義人)답게 태연한 모습을 보였으나 일부 민족대표들은 불안과 절망에 빠져 부끄러운 행보를 보인 사람도 있었다. 선생은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강한 경책을 하면서 민족지사로서의 자존심을 갖도록 요구하였다.
나아가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조선독립의 서)』이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의연하게 강조하였다. 이 논설은 비밀리에 유출되어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25호(1919.11.4)에 수록되었는데,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가슴을 뛰게 한 기념적인 선언서이었다.
민립대학건립운동 등 지속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다
1921년 12월 21일 석방된 뒤에도 선생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민족운동을 계속하여 갔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물산장려를 통한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다.
나아가 1924년에는 조선불교청년회 총재로 추대되었다. 선생은 정교(政敎)의 분립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한국 불교를 옭아매는 사찰령의 폐지를 강조하였다. 또한 불교인들의 자주적 불교활동을 각성케 하고, 대중불교 노선으로 불교 발전에 매진하자는 이론을 정립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선생의 청년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면이 있어, 『유심』 ・ 『조선일보』 ・ 『대중공론』등의 언론매체를 통하여 “지금 조선에 학문과 지식을 겸비하고 심리적 수양이 이뤄져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로운 젊은이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고 전제하고, 전로(前路)에 목표를 설정하여 매진할 수 있는 젊은이를 길러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선생은 당시의 조선청년을 ‘시대적 행운아’라고 지칭하였는데, 이는 “조선 청년의 주위를 싸고 도는 모든 환경이 역경이기 때문에 조선청년은 후세 자손들에게 행복한 유산을 물려주기 위하여 피와 땀을 흘려 현실을 개척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코 회피하거나 좌절해서는 안될 것”임을 일깨워주는 역설적인 표현이었다.
특히 1927년 2월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의 창설이 추진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신간회가 창립되자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되어 민족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5월에는 김법린(金法麟), 최범술(崔凡述), 김상호(金尙昊) 등 20여명의 청년 불교도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항일운동단체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만당은 경상남도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하여 국내 사찰과 동경에까지 지부를 설치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만당의 궁극적인 목적은 민족의 자주독립이었는데, 1938년말 일경에게 발각되어 서울, 사천, 진주, 양산 등지에서 6차례의 검거로 말미암아 와해되고 말았다.
한편 선생은 불교의 대중화와 민중계몽을 위하여 신문의 발행을 구상하였다. 그래서 당시 운영난에 빠진 『시대일보』를 인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교계의 유일한 잡지인 『불교』지의 발행인으로 1931년에 취임하여 불교 대중화, 식민지불교의 극복, 민족의식 고취 등에 힘을 썼다.
근대적이고 저항적인 민족시인으로 활동하다
한국문학사에서 선생은 근대적 시인이요, 3 ・ 1운동 세대가 낳은 최대의 민족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은 88편의 시를 모아 1926년 『님의 침묵』이라는 첫 시집을 발간하였고, 시조와 한시를 포함하여 모두 300여 편에 달하는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밖에 소설로는 『죽음』, 『흑풍(黑風)』(1935, 『조선일보』 연재), 『후회』(1936, 『조선중앙일보』연재하다가 중단), 『철혈미인(鐵血美人)』(1937, 『불교』1 ・ 2집에 연재), 『박명(薄命)』(1938, 『조선일보』 연재) 등이 있다.
문학에서 시나 소설의 대상을 자의적으로 규정할 수 없지만, 선생의 시에 있어서 ‘님’은 연구자에 따라 조국, 민족, 불타, 중생 등 다양한 형태로 해석되고 있다. 선생의 문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문학과 삶의 행적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요컨대 선생의 시와 소설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당대의 한계로 인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는 자신의 심중을 은유적 수법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이해된다.
선생은 『독자에게』라는 시에서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암시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또 소설 『흑풍』이 『조선일보』에 연재될 때 작자의 말에서, “변변치 못한 글을 드리는 것은 미안하오나 이 기회에 여러분과 친하게 되는 것은 한없이 즐거운 일입니다. 많은 결점과 단처를 다 둘러보시고 글 속에 숨은 나의 마음씨까지 읽어주신다면 그 이상의 다행히 없겠습니다”라고 마음속의 뜻을 독자가 헤아려 주기를 원했다.
일송 김동삼 선생 장례식을 심우장에서 치루다
1933년 55세 되던 해 백양사 승려인 벽산(碧山) 스님이 기증한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자신의 집을 짓고 입적할 때까지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집을 지을 때 선생을 돕던 인사들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고 하여 끝내 동북 방향으로 집을 틀어 버리고 말았는데 여기에서 선생의 민족적 자존심을 엿볼 수 있다.
교우관계에 있어서 좋고 싫음이 분명하여 뜻을 함께한 동지들에 대해서는 매우 깊은 의리를 보여 주었다.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던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이 1937년 3월 옥중 순국하자, 유해를 심우장으로 모시고 와 5일장을 치루기도 하였다.
하지만 변절한 친일인사에 대해서는 설령 친분이 깊거나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더라도 단호히 절교하고 일체 상대하지 않았다. 3 ・ 1운동 당시 동지였던 최린(崔麟)이 변절한 뒤 심우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으나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그후 혼자 방문한 최린이 선생이 부재중이자 딸에게 돈을 쥐어주고 돌아갔다. 이 사실을 안 선생은 부인과 딸에게 호통을 치고, 바로 명륜동 최린의 집으로 달려가 그 돈을 집어 던지고 되돌아 왔다고 한다.
최후의 발악적인 일제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선생은 민족적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그리하여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승려이자 저항시인이요 독립투사인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하였다. 장례는 전통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였으며,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나한전
*범종류
*설악산과 백담사
*목을 축이고....
*백담사를 떠나면서
*백단사의 돌탑군들
*설악산을 뒤로하고
*돌탑을 배경으로
*백담사 전경
*백담사를 떠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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