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걷기

남파랑길 1코스 오륙도~부산역

문수산 아래 2020. 7. 20. 18:34

남파랑길 1코스 오륙도~부산역 (21.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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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걷기

2020. 2. 16.

*2016년 06월 04일 해파랑길을 끝내고 그동안 부산 갈맷길 완주.국제신문

영남알프스 둘레길 24코스 완주 주로 주말을 이용해 울산 부산 근교의 둘레

길을 걷고 2019년말에 회사를 정년퇴직하고 올해부터 홀가분 마음으로 부부

남파랑길을 오늘부터 기나긴 여정의 첫발을 6코스 창원1구간 송정공원~제

덕 사거리(14.1km)를 무사히 첫여정 성공.

부산구간(5개코스 106.5km)는 갈맷길 코스와 중복으로 갈맷길 걷기로 대체

합니다.

 

 

 

 

 

 

 

 

해남~부산 1463남파랑길걸어볼까

명품 걷기 여행길로 조성

해남 땅끝마을에서 시작, 부산 오륙도로 이어지는 남파랑길이 명품 걷기여행길로 조성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5일 우리나라 둘레를 잇는 걷기 여행길인 코리아둘레길의 하나로, 남해안 노선에 해당하는 남파랑길 조성 계획을 발표했다.

남파랑길은 길이 1463에 이르는 국내 최장거리 탐방로로, 지난 2016년에 개통한 부산 오륙도~강원 고성 간 770를 잇는 해파랑길에 이은 두 번째 코리아둘레길 노선이다. 한려해상과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남해안의 해안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해안길과 숲길, 마을길, 도심길 등이 어우러져 걷기 여행의 매력을 즐길 수 있도록 90개 구간으로 이뤄져 있다.

남파랑길이란 이름은 지난해 8월 대국민 공모를 거쳐 정한 것으로, 남해의 지역성 남쪽과 쪽빛 바다의 중의성을 담았다. 구간별 특징을 고려해 남도 순례길(장흥~강진~완도~해남) 남도 낭만길(여수~순천~보성~고흥)) 섬진강 꽃길(하동~광양) 한려길(고성~통영~거제~사천~남해) 한류길(부산~창원) 5가지로 나뉜다.

특히 17개 대표 구간을 추천, 남해안의 멋과 가치를 체험하고 걷기 여행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지역 대표 관광콘텐츠로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전남지역의 경우 해남 90코스(미황사 천왕문~땅끝탑 13.9) 완도 86·87 코스(남창정류소~해조류센터~청해포구 촬영장 간 44.8) 장흥 80코스(회진시외버스터미널~마량항 간 24.2) 강진 83코스(구목리교 서쪽~도암농협 간 17.6) 보성 63코스(부용교~팔영농협 망주지소 간 21.7) 고흥 66코스(영남면 간천버스정류장~남열마을 입구까지 11.2) 여수 55코스(여수 해양공원~소호요트장 간 15.3) 순천 61코스(와온삼거리~별량화포 간 15.6) 광양 48코스(하동송림~진월초교 간 13.9) 등이 17개 대표 구간에 포함됐다.

 

문체부는 남파랑길 구간 중 인문·지리·문학·역사·종교 등 주제별로 걷기 여행길을 발굴하고 이를 활용한 관광상품도 추진할 계획이다. 또 남파랑길의 특색을 살려 나만의 인생사진 명소 걷기’, ‘길 위에서 만나는 내 인생의 인물’, ‘남도 식도락 여행등 차별화한 관광 콘텐츠를 계속 발굴할 예정이다.

 

문체부는 남파랑길 안내 체계를 구축하고 주제별 걷기여행 등을 시범 운영한 뒤 오는 2020년 하반기 정식 개통한다는 방침이다.

 

문체부 관계자는 걷기여행의 매력을 높일 다양한 걷기여행 콘텐츠를 개발하고 특색 있는 주제길을 관광 상품화할 뿐 아니라 자치단체 간 협의체를 구성, 상호 협력을 유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숨겨진 보석'으로 불리는

남해안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해안선이 절경을 이룹니다.

'남파랑길'은 남쪽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푸른 바다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남파랑길2016년에 개통한 해파랑길(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강원도 고성 구간
770의 동해안 걷기 여행길)에 이은 코리아둘레길의 두 번째 노선으로서 부산광역시
오륙도에서 전라남도 해남군 땅끝까지 이어지는 1463의 국내 최장거리 탐방로이다.
한려해상과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남해안의 아름다운 해안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해안길과 숲길, 마을길, 도심길 등 다양한 유형의 길이 어우러져 걷기여행의
매력을 즐길 수 있도록 90개 구간(코스)으로 구성됐다.

 

 

 

 

코리아둘레길(남파랑길) 구간 종주 일정표

 

 

 

 

 

 

코스

시점

경유지

종점

거리

행정
구역

비고

01

오륙도 해맞이 공원

신선대

부산대교 입구

23.2

부산

한류길

영화와 한류의 도시

02

부산대교 입구

태종산

영도대교 입구

19.5

03

영도대교 입구

송도해수욕장

구평삼거리

17.1

04

구평삼거리

다대포항

신평동교차로

21

05

신평동 교차로

가덕대교

송정공원

18.7

06

송정공원

와성만

제덕사거리

14.1

07

제덕사거리

수치항

상리마을 입구

10.8

창원시

08

상리마을 입구

천자봉

드림로드 입구

15.3

09

진해드림로드 입구

봉암교

마산항

16

10

마산항 입구

밤밭고개

구서분교 삼거리

15.4

11

구서분교앞 사거리

진동만

호산마을 회관

18.6

12

진전면 호산마을 회관

호암산

배둔 시외버스터미널

13

13

배둔 시외버스 터미널

당동만

황리 사거리

20.8

고성군

한려길

한려해상의 해안경관이 아름다운길

14

황리 사거리

옹돌산

충무도서관

13.7

통영시

15

장문리 충무도서관

삼봉산

사등면사무소

17.1

16

사등면사무소

꽃밭등

고현버스터미널

12.9

거제시

17

고현버스터미널

 

장목 파출소

18.8

18

장목파출소

신봉산

김영삼대통령 기록전시관

14

19

김영삼대통령 생가

외포항

장승포 시외버스 정류장

16.3

20

장승포 시외버스터미널

능포항

어촌민속전시관

18.3

21

거제어촌민속전시관

망산

구조라유람선 터미널

14.4

22

구조라유람선 터미널

구조라

학동고개

13.4

23

학동리 학동고개

망산

명사해변

17

24

명사해변

은방마을

탑포마을

11.2

25

탑포마을

노자산

거제파출소

14.4

26

거제파출소

월암봉

청마기념관

13

27

방하리 청마기념관

시래산

신촌마을

9.8

28

신촌마을(거제대교)

남명산

남망산조각공원

13.8

통영시

29

남망산조각공원

충무해저터널

해변공원

17.5

30

해변공원

제석봉

원산리 바다휴게소

16

31

바다휴게소

 

부포사거리

16

32

부포사거리

무이산

임포항

16.6

고성군

33

임포항

솔섬

하이 면사무소

17.7

34

덕호리 하이면사무소

삼천포항

삼천포 대교

10

35

삼천포 대교

각산

대방교차로

15

사천시

36

대방교차로

창선대교

창선 파출소

17.2

37

창선 파출소

 

적량 버스터미널

14.3

남해군

38

적량 버스터미널

 

하나로 마트

12.4

39

지족리 하나로마트

물건항

물건마을 정류장

10.1

40

물건마을 버스정류장

독일마을

천하몽돌마을 입구

16

41

천하몽돌해변

상주해수욕장

원천항

15.5

42

원천항

월포

다랭이마을

15.6

43

다랭이마을

호두산

평산항

13.5

44

평산항

삼불산

서상여객터미널

12.7

45

서상여객터미널

 

중현지소

12.2

46

농협 중현지소

 

남해대교

17.4

47

남해대교

노량항

송림입구

27.5

하동군

섬진강꽃길

섬진강과 꽃경관이 아름다운길

48

하동송림 입구

섬진강

진월초등학교

13.9

49

진월초등학교

경남-전남

중동그린공원

15.3

광양시

50

중동그린공원

 

광양터미널

17.6

51

광양터미널

 

율촌파출소

14.8

52

율촌파출소

 

소라초등학교

14.7

여수시

남도낭만길

갯벌생태와 문학이 있는길

53

소라초등학교

 

흥국사

12.6

54

흥국사 입구

 

여수해양공원

15.4

55

종화동 해양공원

 

소호요트장

15.3

56

여수소호요트장

 

원포 버스정류장

14.3

57

원포버스정류장

 

서촌마을

19.4

58

서촌마을

 

창무신성교회

15.6

59

창무신성교회 정류장

 

궁항

12

60

궁항 정류장

 

와온삼거리

13.7

61

와온삼거리 정류장

 

별량화포

15.6

순천시

62

학산리 별량화포

 

벌교읍 경계

13.8

63

부용교

 

망주지소

21.7

보성군

64

팔영농협 망주지소

 

독대마을회관

14.3

고흥군

65

독대마을회관

 

간천버스정류장

24.7

66

간천버스정류장

 

남열마을

11.2

67

남열마을 입구

 

해창만 오토캠핑장

16.4

68

오취리 해창만캠핑장

 

도화 버스터미널

23.1

69

도화 버스터미널

 

백석 버스정류장

15.7

70

백석버스정류장

 

녹동 버스정류장

13.3

71

녹동버스공용정류장

 

방조제 공원

21.8

72

고흥만 방조제공원

 

대전해수욕장

14.9

73

대전해수욕장

 

내로마을회관

17.9

74

내로마을회관

 

남양버스정류장

9.2

75

남양버스정류장

 

신기수문동 정류장

21

76

안뜰거북이 도농교류센터

 

조양버스정류장

16.7

보성군

77

조양버스정류장

 

솔밭

12.9

78

율포솔밭 입구

 

현동마을회관

18.9

장흥군

남도 문화길

남도 유적지와 문화가 있는길

79

현동마을회관

 

회진터미널

26.3

80

회진시외버스터미널

 

마량항

24.2

강진군

81

마량항

 

가우도 입구

 15.9

82

가우도 입구

 

구목리교

 17.1

83

구목리교

 

도암농협

 17.6

84

도암농협

 

사내방조제

 14.4

85

사내방조제 북쪽교차로

 

남창정류소

 18.1

해남군

86

남창정류소

 

해조류센터

 24.3

완도군

87

완도항 해조류센터

 

촬영장 입구

 20.5

88

청해포구

 

원동버스터미널

 15.6

89

원동버스터미널

 

미황사

13.8

90

미황사 입구

 

땅끝마을(서해안길시작)

13.9

해남군

.

 

 

 

 

 

 

 

 

 

                                   *남파랑길 시작점 부산 오륙도에서...

 

 

 

 

 

 

*오륙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2호이다. 부산만의 승두말에서 남동쪽으로 약 600m 지점에 있으며, 총면적은 0.019㎢이다. 승두말에서부터 우삭도(방패섬:높이 32m)·수리섬(32m)·송곳섬(37m)·굴섬(68m)·등대섬(밭섬:28m) 등 5개의 해식 이암(離岩)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간빙기 이전까지는 육지인 승두말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으나, 간빙기 이후 수직적인 파식작용으로 절리면(節理面)을 따라 해식동이 생기고, 이것이 더욱 확대되면서 해식 이암으로 분리되어 지금처럼 5개의 섬이 되었다. 동시에 구성암석의 굳기에 따라 차별침식이 수평적으로 진행되어 섬들이 모두 파식대를 쌓아 올린 듯하다.

오륙도라는 이름은 우삭도가 간조시에는 1개의 섬이었다가, 만조시에 바닷물에 의해 2개의 섬으로 분리되어 보이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며, 〈동래부지 東萊府誌〉에도 오륙도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불러온 것으로 여겨진다. 부산항의 관문으로 등대섬에 유인등대가 있고, 나머지 섬에는 무인등대가 설치되어 있다. 부산광역시의 상징이며, 경승지로 유명하다. 오륙도를 일주하는 관광유람선이 남구 민락동에서 운항되고 있으며, 휴일에는 낚시꾼과 관광객들이 많다.

 

 

 

                                            *오륙도 스카이워크 입구

                                              *스카이워크에서 오륙도를 배경으로....

*스카이워크

오륙도 스카이워크의 옛 지명은 “승두말”이다. 승두말은 말안장처럼 생겼다고 「승두마」라고 부르는 것이 승두말로 되었으며 해녀들과 지역주민들은 「잘록개」라고 불렀다. 바다를 연모하는 승두말이 오륙도 여섯섬을 차례대로 순산하고 나서 승두말의 불룩했던 부분이 잘록하게 들어가 선창나루와 어귀의 언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동해와 남해의 경계지점이기도 한 이곳 승두말에 2012년 9월 12일에 착공하여 2013년 10월 18일 개장하면서 “하늘위를 걷는다”는 의미를 담아 “오륙도 스카이워크”라 이름하였다.
스카이워크는 35M 해안절벽 위에 철제빔을 설치하고 그 위에 유리판 24개를 말발굽형으로 이어놓은 15M의 유리다리이다. 바닥유리는 12mm유리판 4장에 방탄필름을 붙혀 특수 제작한 두께 55.49mm의 고하중 방탄유리로 “안전하게 설계되었다.”
발 아래 투명유리를 통해 파도가 절벽을 때리는 모습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함을 느끼게 한다. 스카이워크 앞에 펼쳐진 바다는 시시때때로 아름답고 다채로운 색상을 연출하고 있어 사진촬영의 명소이며, 날씨가 좋은 날에는 대마도를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이다. 최근 부산 Korea Route내 관광지로 선정되었다.


                                           *스카이워크에서 오륙도를 배경으로....

 

                                                                 *우리 부부....

                                             *오륙도에서 신선대방향으로 .....

 

                                               *오륙도 초등학교를 바라보면서....

 

                                                    *백운포의 유래

 

                                                *백운포 내려가는 로터리 부근의 늘빛교회

 

                                                  *갈맷길 3~1코스 안내도

 

                                               *길건너에는 천주교 공동묘지가 있네요.

 

                                                 *백운포를 바라보면서....

 

                                                    *지금은 해군본부의 모습

 

                                                  *신선대 산책로를 한바퀴 돌아요.

 

                              *신선대 산책로에서 바라본 오륙도의 모습 여기서 보는 오륙도가 진짜.

 

                                                *초겨울에 개나리가 만발.

 

                                                           *신선대의 유래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황령산에서 뻗어나온 산등성이가 부산만에 몰입하여 이루어진 우암반도의 남단에 해당하며, 용당동 해변 좌안의 바닷가 절벽과 산정()을 총칭한다. 화산암질로 된 해안이 파도의 침식을 받아 발달된 해식절벽과 해식동굴로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면적은 412만 1707㎡에 이른다.

신선대 주변의 산세는 못을 둘러싼 용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이 일대를 용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서려 있는데, 신선대를 절단하여 도랑을 만들 때 사토에서 혈흔이 나왔다고 전하며, 가야진이라는 사람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하며, 신라 말기에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유람한 곳이라고도 한다.

또 신선대라는 명칭도 산봉우리에 있는 무제등이라는 큰 바위에서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옛날에는 이곳에 가까이 가면 신선들이 노는 풍악소리가 들려왔다고도 한다.

이 일대는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덮여 있다. 숲을 이루는 수종으로는 사스레피나무·봄보리수나무·섬쥐똥나무·송악·마삭덩굴 등의 상록활엽수와 상수리나무·떡갈나무·자귀나무·굴피나무 등의 낙엽활엽수가 함께 섞여 있다. 또 이 숲에는 멧비둘기·때까치·검은멧새·굴뚝새·황금새·바다쇠오리·갈매기 등 많은 새가 날아든다.

광복 후에는 모래사장의 질이 좋고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에 좁은데도 해수욕장으로 활용되었고 이에 따른 위락시설도 갖추어졌다. 근래에는 개발로 인하여 주변 경관이 다소 변모하고 일부 지역이 군사작전지역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기는 하지만, 정상에서 서면 오륙도()와 조도()가 바라다보이고, 맑은 날에는 수평선 멀리 쓰시마섬[]이 모습을 드러내는 등 전경이 뛰어나 부산 지역의 명승지로 손꼽힌다.

 

 

 

 

                                           *무제등(170m)에서 바라본 신선대부두의 모습

 

                                                          *다른 방향으로....

 

                                                         *무제등 정상에서 이정표

                                                                *우리도.....

 

                                    *오늘의 일정을 신선대 산책로 한바퀴로 마무리 해요

                                               *11시 신선대전망데입구에서 출발합니다.

 

                                                      *갈맷길 시작점에서 인증샷

 

                                                       *우리 부부도 인증샷

 

                                                  *신선대 컨테이너부두의 모습

 

                                                    *신선로를 따라 내려가요.

 

*부산항 물류고등학교의 모습
부산광역시 남구 용당동에 있는 사립 특성화 고등학교.

교육 목표는 ‘창의적이고 도전 정신이 강한 미래 기술인 육성’이다. 교훈은 ‘창의·성실·책임’이다.

1977년 12월 16일에 동명문화학원[1977년 4월 11일 설립] 산하 동원공업고등학교로 설립 인가[30학급]를 받아, 1978년 3월 6일에 제1회 입학식[600명]과 함께 남구 용당동에서 개교하였다. 1979년 11월 24일에 야간부 설립 인가[학년별 6학급]를 받아, 2000년 8월 30일까지 유지하였다. 1985년 3월 1일에 동명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93년 6월 30일에 여학생 모집 인가를 받아 1994년 3월부터 남녀 공학으로 전환하였다. 1995년 9월 28일에 동명정보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2010년 8월 24일에는 항만 물류 분야 특성화 고등학교로 지정되어 부산항만물류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특성화 고등학교란 특정 분야 인재 및 전문 직업인 양성을 위한 특성화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고등학교를 말한다. 2012년 2월 9일에 제32회 졸업식을 거행하여 총 2만 459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같은 해 3월 1일에 제12대 김상조 교장이 취임하였다.

부산항만물류고등학교는 ‘내일의 조국 번영과 인류 복지 증진에 공헌·봉사하여 천부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유능한 후진을 기른다’는 건학 정신에 입각하여, 교과별 수업 개선을 통한 맞춤형 교실 수업 실시, 방과 후 수업 활성화로 기초 학력 신장,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 신장,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기준 달성 등을 통한 학력 신장과 기본 생활 습관의 생활화[인사 잘하기, 바른말 고운 말 사용하기 등], 몸과 마음이 건강한 학생 육성,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 함양, 나라 사랑 교육을 통한 올바른 국가관 형성 등을 통한 인성 교육에 노력하고 있다. 학교 중점 과제로 방과 후 학교 활성화로 즐거운 학교 만들기, 위클래스 활동을 통한 학교 부적응 학생의 학교 정착화 교실[fun-fun 교실] 만들기 등을 실시하고 있다.

1. 교가

보라 새로운 전통 여기 바다처럼 부풀다/ 부산의 한 벌 푸른 뜻 가다듬어/ 겨레의 자랑으로 기술을 익히니/ 아아 보람도 찬란한 빛나는 그 이름/ 부산항만물류고 부산항만물류고.

2. 교목: 향나무이다. 푸르른 기상과 인고의 미덕으로 은은한 기품을 내뿜는 고아하고 저력 있는 학생을 상징한다.

3. 교화: 장미이다. 환한 얼굴과 타오르는 열정으로 신새벽을 열어 나가는 건강하고 진취적인 학생을 상징한다.
2012년 3월 기준 총 26학급에 693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이 중 1학년은 항만 장비과 4학급에 113명[남 111, 여 2], 물류 자동화과 4학급에 113명[남 104, 여 9], 2학년은 항만 장비과 4학급에 116명[남], 물류 자동화과 4학급에 110명[남 107, 여 3], 3학년은 자동차 기계과 4학급에 99명[남], 전자 전기과 3학급에 74명[남 70, 여 4], 컴퓨터 건축 디자인과 3학급에 68명[남 62, 여 6]이 재학하고 있다. 교직원은 교장 1명, 교사 56명, 그리고 행정 담당 등 일반직 21명으로 총 78명이 근무하고 있다. 교지 총면적은 2만 1300㎡로, 실습실, 진로 상담실, 도서관, 강당, 시청각실, 항만 물류 전시관, 과학실, 미술실, 음악실, 컴퓨터실, 도서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동명대학교 정문통과

 

 

1978년 12월에 강석진(姜錫鎭)이 운영하는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東明文化學園)에서 동원공업전문대학(東元工業專門大學)으로 설립하였다.

이듬해 3월에 기계과·기계설계과·금속과·조선과·전기과·공업화학과의 6개 학과에 입학정원 640명으로 개교하였으며, 초대학장에는 배석현(裵錫鉉)이 취임하였다. 1981년 2월 제1회 졸업생 449명을 배출하였으며, 1985년에 동명전문대학으로 개편하였고, 1995년 12월 동명정보대학교을 설립 인가 받았으며, 1996년 3월 초대총장에 성기수 박사가 취임하였고, 제1회입학식이 거행되었다(3개학부 9개학과, 입학정원 840명).

1998년 5월에 동명전문대학을 동명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00년 2월에는 동명정보대학교의 제1회 학사학위 수여식이 있었고 동명대학의 제20회 학위수여식(22개학과 2,328명, 누계 2만 6,803명)이 있었다.

2006년 2월 동명대학과 동명정보대학교를 폐교하고 통합대학교인 동명대학교를 설립하여 같은 해년 3월 동명대학교 입학식(학사과정 2,240명, 석사과정 63명, 박사과정 20명)을 거행하였다. 2008년 3월 중앙도서관이 개관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동명기념관이 개관하였다.

2014년 현재 7개 단과대학·학부(공과대학, 경영대학, 보건복지교육대학, 건축·디자인대학, 디지털엔터테인먼트학부, 항만로지스틱스학부, 국제문화학부) 및 자율전공학부, 계약학과로 구성되어 있다. 부속기관으로는 중앙도서관, 동명문화연구원, 정보전산센터, 국제교류센터, 신문방송국, 동명생활관이 있다. 부설기관으로는 사회교육아카데미가 있고, 학교기업으로 라츠인터렉티브, 아시아파워엔진이 있다.

교훈은 ‘개발’, ‘응용’, ‘창조’, ‘봉사’로 되어 있으며, 교육목표는 ‘평생교육을 통해 창의적인 지식과 기술을 개발하고 응용하여 지역·국가·인류에 봉사하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인재를 육성한다’이다.

 

 

                                               *부산항만물류고등학교 앞의 갈맷길 이정표

 

                                                    *유엔참전 기념의 거리탑

 

                                                         *평화공원 앞에서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있는 공원

세계 유일의 재한 유엔 기념 공원은 2005년 APEC 정상 회의 때 주요 인사의 방문지에 포함된 곳이었다. 그러나 공원의 동남쪽 일대는 고철 처리업, 차동차 정비업, 화물차 주차장, 화물 운송업 등 소음, 분진, 토양 오염을 유발하는 혐오 산업 51개 업체가 난립하여, 도시 미관을 저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6·25 전쟁 참전 유엔군 전사자들이 잠들어 있는 UN 기념 공원과 연계하여 인근의 환경 불결지에 평화의 상징 공원을 조성하여 자유 수호의 뜻을 기리고, 주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2004년 6월 평화 공원 조성 계획을 수립하고, 2005년 4월에 착공하여 2005년에 개장하였다.
평화 공원의 총면적은 3만 2893㎡이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평화의 광장이 있으며 바닥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그 둘레를 둘러싸고 조경·수경 시설 등을 비롯하여 13종 1,600점의 소나무 등 수목 3만 3620주, 초화 3만 3140포기가 식재되어 있다. 또한 공원에는 생태 연못, 잔디 광장, 파고라, 조깅 코스, 주차장 등 주민의 휴식 및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677번지 일대에 있는 평화 공원은 UN 기념 공원 근처에 있는 근린공원으로 평화 공원이라는 이름도 UN 기념 공원과 연계하여 지어진 것이다. 공원은 24시간 이용이 가능하며, 주변의 부산 문화 회관, 부산광역시박물관, UN 기념 공원, UN 조각 공원 등과 연계되어 문화 공간의 벨트화를 이루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우리도.....

 

                                            *평화공원안에 있는 갈맷길 3-2코스 인증샷 스템프

 

                                                            *우리도 인증샷

 

                                                       *한적한 평화공원의 모습

 

                                              *평화공원과 유엔묘지사이의 생태하천

 

                                                           *동백꽃의 향연

 

                                               *이다리를 통해 조각공원으로 진행

 

                                                            *조각작품 1초의 침묵

 

                                                         *동백꽃 앞에서.....

 

                                                         *한겨울에 꽃을보니 ......

 

                                                           *조각공원으로 진행

 

                                                        *유엔묘지 북문통과

 

                                                              *유엔묘지의 모습

유엔 기념 공원(영어: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 UNMCK)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남구에 있는 1951년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유일한 유엔군 묘지로,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유엔군 장병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유엔묘지 정문앞의 건물

  • 1951년 1월 18일: 유엔군 사령부에서 묘지 조성
  • 1952년 4월: 묘지가 완공되어 개성, 인천, 대전, 대구, 밀양, 마산 등에 가매장되어 있던 한국전쟁 유엔군 전몰장병 유해 안장 시작
  • 1955년 11월 7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토지유엔에 영구히 기증하고 묘지를 성지로 지정할 것을 결의
  • 1955년 12월 15일: 묘지를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유엔총회에서 결의문 제 977(X) 호로 채택, 토지에 대한 불가침권 부여
  • 1959년 11월 6일: 유엔과 대한민국간에 “유엔 기념 묘지 설치 및 관리 유지를 위한 대한민국과 유엔간의 협정”을 체결하여 유엔 기념 묘지로 출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에서 관리
  • 1974년 2월 16일: UNCURK 해체로 11 개국으로 구성된 ‘유엔 기념 공원 국제관리위원회’(Commission for the UNMCK)에 관리권한 위임
  • 1975년 3월 30일: 공식명칭을 ‘재한 유엔 기념 묘지’(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 UNMCK)에서 ‘재한 유엔 기념 공원’으로 변경
  • 1975년 12월 26일: 문화재청에서 종전 '재한유엔(UN)기념공원'에서 '부산 재한 유엔 기념 공원'으로 등록문화재 명칭을 변경 고시 [1]
  • 2007년 10월 24일: 문화재청에서 근대문화재로 등록(등록문화재 제359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1950년 6월 28일 제2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이라는 이름으로 유엔군을 파병할 것을 결의하였다. 지원현황은 전투병력과 장비 등을 지원한 전투지원 16개국과 병원선, 의료진, 의약품 등을 지원한 의료지원 5개국 물자지원과 물자지원 의사를 표명한 44개국 등을 포함하여 총 63개국이 대한민국을 방어하기 위해 참전하였다.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기간동안, 참전 21개국 중 17개국 (의료지원국 중 노르웨이 포함)에서 40,896 명의 유엔군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951년 ~ 1954년 사이에 21 개국 유엔군 전사자 약 11,000 여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었으나, 벨기에,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스, 룩셈부르크, 필리핀, 태국 등 7 개국 용사의 유해 전부와 그 외 국가의 일부 유해가 그들의 조국으로 이장되어 , 2012년 현재 유엔군부대에 파견 중에 전사한 한국군 중 36 명을 포함하여 11 개국의 2,300 구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3]

영국군 885명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 전사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것은, 숨진 곳에 묻는 영국 풍습에 따른 것이다.[4]

단, 안장자 모두가 전사자는 아니다. 미군의 경우 한국전 참전자 본인이 원한 경우 사후 이곳에 안장하였다. 또한 다른 나라도 전쟁이 끝난 직후 병력을 철수한 게 아니라 몇 년 더 한국에 머물렀는데 이 머무르는 도중에 사고를 당해 죽은 경우도 이곳에 안장한 경우도 있다.

 

1951년 대구 유엔군 묘지에서 전사자 등록 중인 미군. 왼쪽부터 십자가, 무명용사용 삼각형 표식, 전사자와 함께 묻는 양식표지인 작은 병

국명파병자수전사자수봉안 유해수

오스트레일리아 8,407 346 281
캐나다 27,000 516 378
프랑스 3,760 270 44
네덜란드 5,320 124 117
뉴질랜드 5,350 41 34
남아프리카 공화국 900 37 11
터키 14,936 1,005 462
영국 56,000 1,177 885
미국 1,600,000 36,492 36
노르웨이 623 3 1
벨기에 3,590 106 -
콜롬비아 5,100 213 -
에티오피아 3,518 122 -
그리스 4,440 186 -
룩셈부르크 89 2 -
필리핀 7,500 120 -
타이 6,326 136 -
이탈리아 185 - -
덴마크 630 - -
인도 346 - -
스웨덴 380 - -
유엔 총계 1,754,400 40,896 -
비전투요원 - - 11
무명용사 - - 4
대한민국 - - 36
총계 - - 2,300

 

꽃 하나 피지 않고 한포기 푹도 없는/ 거칠은 황토 언덕에/ 이미 고토에 돌아갈 수 없는 몸들이 누워/ 수정 십자가 떼 바람에 통곡하는 수영앞바다
 

김광균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93(대연동)에 있으며, 평화공원, 부산문화회관, 부산박물관 등과 이웃하고 있다.

 

유엔 기념 공원 추모명비 앞에 기대선 미군

총 면적은 176,486 제곱미터, 기념묘지 면적은 14.39 ha이며, 대한민국 정부가 1978년에 건립한 12 미터 높이의 유엔군 위령탑이 있다.

참전국 및 유엔기가 게양되어 있고, 안장국의 기념비가 있다.

대부분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고, 영연방, 호주, 캐나다, 프랑스, 영국 등의 위령탑 및 기념비가 있다.

 

유엔군 위령탑, 제 2 기념관, 무명용사의 길,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 등이 있다.

추모명비는 추모공원의 중반부에 해당하며, 전반부에서 묘역을 지나 공원으로 진입하는 주동선에 있고, 기본계획 임채운, 실시설계는 조민석이 했다. 방문객은 정돈된 잔디를 가로지르는 좁고 긴 진입축을 통하여 숙연한 마음자세를 가다듬으며 접근하도록 되어 있다. 반사 연못까지 올라온 방문객은 원형 마루판으로 돌아서 높은 곳으로 올라서면 주변을 살펴볼 수 있다. 모든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벽은 반사 연못 안에 핀 연꽃과 전사자의 철모를 형상화한 조각이 현재의 푸른 하늘과 전쟁의 참혹함, 그들의 희생정신이 평화를 가져왔음을 상징한다. 반사 연못 안에 있는 기둥 위에 꺼지지 않는 불꽃은 그들의 명예와 희생, 사라지지않고 영원히 기억될 것임을 상징한다. 제단 뒤에 5 미터 높이의 침묵의 벽이 전체 시설물의 배경 역할을 하여 내부 공간이 망자들의 공간임을 강조한다.

대지 2,874.0 제곱미터에 추모명비 조형물 820.60 제곱미터, 보행로 부분 209.56 제곱미터, 조경 부분 1,843.86 제곱미터로 되어 있다.[5]

 

추모관, 기념관, 정문이 있다. 추모관과 정문은 김중업이 설계했다.

정문은 1966년 11월 30일 만들어졌다. 지붕을 받치는 8개의 기둥의 끝을 순간과 영원을 상징하는 사발형태(주두)로 디자인하여 전몰장병들을 위한 부드럽고 엄숙한 기립을 표현했다. 지붕의 네 모서리 끝 추녀는 머나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지붕아래 네 개의 물받이는 전몰장병의 눈믈을, 유리로 마무리된 지붕 천창은 유엔군의 영혼의 빛을 나타낸다.[4]

이국 땅에서 평하를 위하여 싸우다 간 여러 나라들의 천사들에게 두 손 모아 경건히 바친 작품이다./ <중략> / 이 소품은 한것 부푼 선에 부드러움을 불어 넣어, 어린 시절의 아스라한 향수를 기억하면서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으려는 벅찬 작업의 소산이다. 유엔 관계 건축 가운데서는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라는 우탄트 총장의 찬사를 들은 작가로서는 큰 기쁨인 동시에 작가 개인에게도 소중한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 김중업,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 열화당, 1984년

한국전쟁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4년 8월 21일 유엔이 추모관을 건립했다. 이건물을 지탱하는 여섯 개의 노출된 들보와 추상성, 영원성을 강조하는 기하학적인 삼각 형태그 주요 특징으로 추모관 양쪽 스테인드글라스에는 각각 평화의 사도, 승화, 전쟁의 참상, 사랑과 평화 등의 의미를 가지며, 내부에는 전투지원 참전 16개국을 뜻하는 16의 선이 중앙 정면 바닥에서 부터 유엔 상징을 통과하여 하늘로 승화한 뜻으로 천장을 가로지르는 형태에서, 전쟁의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과 의지를 담은 추모공간으로 엄숙함을 부각시키고 있다.[4]

기념관은 1968년 건축되었다.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사진 자료 및 기념물이 전시되고 있다.

1974년부터 대한민국을 포함한 호주,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남아공, 터키, 영국, 미국 등 전사자가 안장된 11 개국으로 구성된 국제관리위원회(재한 유엔 기념 공원 관리처)가 유엔 기념 공원 관리를 맡고 있다.

매년 봄, 가을에 실무대표들로 구성된 실무회의(Sub-Committee Meeting of the Commission for the UNMCK)가 열리며, 10월 24일 유엔의 날을 전후하여 각국의 주한 대사들로 이루어진 정기총회(Regular Meeting of the Commission for the UNMCK)가 열린다. 재한 유엔 기념 공원 국제관리위원회(Commission for the UNMCK) 의장국과 의장은 위원국별 알파벳 순서로 매년 임명되며, 기간은 당해년도 11월 1일부터 익년 10월 31일까지이다.

 

 

                                                   *잘정리된 유엔묘지 입구의 모습

 

                                               *유엔기념공원 정문앞에서...

 

                                           *유엔기념공원 정문통과 우측계단으로 진행

 

                        *부산문회관을 통과 대공원장과 중강당사이로 통과 주차장에서 우측으로 진행

 

 

부산 문화회관(釜山文化會館, Busan Cultural Center)은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76번길 1(대연4동)에 위치한 시립 종합 공연장이다. 1988년 9월 3일에 대극장이 우선 개관되었으며, 이어 소극장, 회의장과 중극장 등이 차례로 개관되어 대규모 복합 문화 공연장이 되었다. 1997년에는 공연장 부지에 인근의 부산 시립박물관과 UN공원의 부지가 합쳐져 부산 문화공원이 조성되었다.

대극장

문화회관 극장들 중 가장 먼저 개관했다. 1403석 규모이며, 오케스트라 피트와 승강무대 등을 갖추어 콘서트와 연극, 오페라, 발레 등의 무대 공연을 모두 소화하는 다목적 공연장이다.

중극장

 

부산문화회관 중극장

1993년 4월 15일에 개관했으며, 767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다. 무대가 관객석 방향으로 돌출된 반원형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연극과 전통음악, 실내 관현악단 등의 공연이 개최되고 있다.

소극장

 

부산문화회관 소극장

1991년 11월 11일에 개관한 212석의 소규모 공연장으로, 중극장과 비슷한 돌출형 무대가 설계되어 있다. 소규모 실내악 공연이나 독주회, 판소리 등의 전통 공연이 열리고 있다.

1988년 9월 3일 개관한 대전시실과 1993년 4월 15일 개관한 중전시실로 나뉘며, 부산과 경남 지역의 미술가와 조각가, 학생들의 작품이 주로 전시되고 있다.

1991년 11월 11일에 개관한 회의장으로, 소극장 건물 2층에 위치하고 있다. 213석 규모로, 회의석 133석과 방청석 80석이 마련되어 있다. 통역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여러 국제 회의의 개최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야외 무대로 사용할 수 있는 원형 공간과 전시실 사이의 야외 공간에서도 종종 공연이 열리고, 각종 음악 서적과 음반 등을 이용할 수 있는 자료실과 연회장, 어린이 놀이방 등이 부속 시설로 설치되어 있다.

부산광역시 소속인 부산 시립 교향악단과 부산 시립 청소년 교향악단, 부산 시립 국악 관현악단, 부산 시립 합창단, 부산 시립 소년소녀 합창단, 부산 시립 무용단, 부산 시립 극단이 상주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여기서 부산갈맷길과 갈라진다. 갈맷길은 왼쪽방향으로 가고 남파랑길은 오른쪽방향으로 간다. 결국 문현4동주민센터에서 만나게 된다.

▲먼 발치에서 유엔참전기념탑을 바라보며 부산공업고등학교 방향으로 골목길을 지나야한다.

▲부산공업고등학교. 정문앞을 지나 우룡산공원 방향으로 산비탈 골목길을 지나야한다.

▲부산진시장. 우룡산공원, 지게골 골목길을 지나 문현4동주민센터에서 갈맷길과 합류하여 자성대공원, 부산진시장 방향으로 간다. 자성대공원은 부산갈맷길 종주때 답사했기 때문에 지나치기로 한다. 부산진시장에서 진시장지하차도를 건너 데레사여고, 정공단 방향으로 향한다.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전통 시장.


[건립 경위]
조선 시대 부산 지역 진성 서문 밖에서 매달 4일과 9일 열렸던 부산장에서 유래되었다. 관련 기록으로 조선 시대 1770년(영조 46)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부산 진성 서문 밖에 있는 미국과 건어물 집산지로 4일장과 9일장을 열었다’고 나와 있다. 1913년 9월에 약 132㎡와 약 198㎡ 규모의 두 동의 함석지붕 상가를 지어 상설 시장이 되었다.


[변천]
1930년 10월에 대지 면적 약 6,612㎡, 건물 면적 약 661㎡ 규모의 시장을 건립해 부산진시장번영회를 발족하였다. 1958년 2월에 연면적 약 1만 3,223㎡ 목조 건물을 지어 운영하였다. 1964년 1월 17일에 부산진 시장 민영화 방침이 결정되었다. 1969년 7월 22일에 부산직할시 동구 초량동 1161번지의 시유지에 약 4,298㎡의 시장 가건물을 건립하여 이전하였다. 1968년 3월 29일에 부산진 시장 건립 공사를 착공하여, 1970년 8월 28일에 연면적 약 2만 9,090㎡의 지하 2층·지상 4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완공하였다. 1970년 10월 8일에 신축 상가 건물로 입주하였다.

1978년 3월에 옥상 주차장[동시 주차 200대]을 개발하고, 북편 승강기 1기를 설치하였다. 1988년 5월에 동편 승강기 1기를 설치하였다. 1993년 4월에 부산진 시장 주차 빌딩[동시 주차 700대]을 완공하였다. 1997년 8월 1일에 냉·난방 및 환기 설비 시설을 완공하였다. 2002년에 외벽과 내부 리모델링, 2003년에 에스컬레이터 교체 및 설치 공사, 2004년에 냉·난방 및 환기 시설 보수 공사, 엘리베이터 2기 설치 등을 통해 시설 현대화를 진행하였다. 2005년에 전국 재래시장 박람회에서 최우수 시장상인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


[구성]
부산진 시장은 지하 2층·지상 4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대지 면적은 7,499㎡이며, 1,500개의 점포가 입점해 있다. 주 취급 품목은 한복, 포목, 각종 원단, 양복, 의류, 신발, 직물류 등의 혼수 용품이다. 고객 편의 시설로는 주차장과 화장실[10동 60칸]이 있다.


[현황]
2012년 현재 직영 점포 1,500개가 운영 중이며, 종사자 수는 2,000명이다. 상인 조직으로 부산진시장번영회가 있다. 부산진 시장은 1970년대에는 부산 지역의 의류 도매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활발히 수행하였다. 최근 부산 지역의 견직업 침체와 유통 업체 확산 등으로 상권이 침체되었다. 상권 활성화를 위해 부산진시장번영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상품의 고급화, 다양화 및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 기반을 마련하고, 전통 시장 최초로 고객 참여 패션쇼 개최, 고객을 직접 찾아가는 마케팅 활동 등으로 고객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는 등 자체적인 노력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철길 굴다리통과 후 진행

 

                                                              *정공단 통과

 

 

정공단(鄭公壇)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1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제단이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의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산진성을 지키며 군민과 함께 왜적과 장렬히 싸우다 성과 운명을 같이한 부산첨사 정발과 그를 따라 순절한 군민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제단이다.

단의 중앙에는 ‘정공단’이라 새긴 비를 세우고, 서쪽에는 정발의 막료였던 이정헌, 동쪽에는 정발의 첩인 열녀 애향, 남쪽에는 군민들을 모셨으며, 남쪽 층계 밑에는 충직한 노복이었던 용월의 단을 마련해 두었다.

조선 영조 42년(1766) 당시 부산첨사로 있던 이광국이 단을 설치하여, 성이 함락되었던 음력 4월 14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일제시대에 와서는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제단을 폐쇄하고 유물과 비품을 모두 몰수하였으나, 광복 후 새로이 단을 쌓고, 옛 비석을 되찾아 세운 후 다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부산포개항가도 안내도

 

                                         *잠시 후 좌측으로 골목길 진행 부산진 교회를 우측에두고 진행

 

                                                              *부산진 일신여학교

개항기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건립된 부산 최초의 근대적 여성 교육 기관인 부산진일신여학교의 교사.


[개설]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에 파견된 호주 장로교 선교회 여자 전도부에 의해, 선교 활동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교육 사업의 하나로 설립되었다. 호주 장로교 선교회의 멘지스(Menzies)[민지사]와 페리(Perry)는 1891년(고종 28)에 부산에 파견되어, 1895년(고종 32) 10월 부산진에 마오리고아원과 교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신여학교를 설립하였다. 교명은 ‘날마다 새롭게[Daily New]’라는 뜻이며, 초대 교장으로는 멘지스가 취임하였다. 개교 당시 수업 연한 3년의 소학과 과정으로 출발한 일신여학교는 1909년(순종 3) 8월에 사립 학교의 인가를 받고, 더불어 3년 과정의 고등과도 병설하였다. 이 고등과는 후에 동래학원으로 이어져 현재의 동래여자중학교와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1915년 8월에는 학칙 개정에 의해 수업 연한 3학년이었던 소학교와 고등과를 4학년으로 증설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3월 11일과 4월 8일에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는 부산 지역 3·1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1925년에는 고등과 교사를 동래구 복천동에 신축 이전하고 동래일신여학교라고 교명을 바꾸었다. 1940년에는 오태환, 김명은 등 동래 지역의 유지들이 재단법인 구산학원[현 동래학원]을 만들어 경영권을 인수하고, 교명을 동래고등여학교로 변경하였다.


[위치]
부산진일신여학교(釜山鎭日新女學校)는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17번길 17[좌천동]에 위치한다.


[변천]
부산진일신여학교는 1905년(고종 42) 4월 15일에 일신여학교 교사로 동구 좌천동에 건립되었다. 1925년에 일신여학교가 동래구 복천동으로 이전한 후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 경남 교역자 연수원으로 사용되었다.


[형태]
서양식 2층 벽돌 건물로서 조적조(組積造)[돌, 벽돌, 콘크리트 블록 등으로 쌓아 올려서 벽을 만드는 건축 구조]이다. 특별한 양식은 없고, 외부에 벽돌 기둥이 2층까지 이어져 있으며, 외부에서 바로 2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1층 벽재는 석재이고, 2층은 벽돌이다.


[현황]
부산진일신여학교는 최근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부산 경남 교역자 연수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 건물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 유지재단이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2003년 5월 2일에 부산진일신여학교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된 바 있다.


[의의와 평가]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 기관으로, 독립지사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한 부산 지역 여성 인재의 산실이다. 부산진일신여학교의 교실로 쓰인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는 근대 초기 건축물의 형식을 알 수 있게 하는 문화재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기미독립선언서 해설

 

                                                          *기미독립선언서

 

역사적 배경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강제 병합된 뒤, 국내외에서 비밀리에 전개되고 있었던 항일 구국운동은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W)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자,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전개할 기회가 왔다라고 생각하여 이를 추구하려는 노력들이 나타났다.

 

내용

1918년말부터 독립운동의 3대 원칙, 즉 대중화·일원화·비폭력 등을 주장해 온,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崔麟) 등의 천도교 측 중진들은 독립운동의 실천 방법으로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국권반환 요구서 등을 작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거족적인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기독교·불교·유림(儒林) 등 각 종교 단체를 망라하는 동시에 저명 인사들을 민족 대표로 내세우기로 합의하였다.

그래서 1919년 2월 상순, 대한제국의 고관을 지낸 김윤식(金允植)에게 독립선언서의 서명자가 되어 줄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독립청원서를 내는 것은 찬성하지만, 선언서 발표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하여 거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 밖에 박영효(朴泳孝)을 비롯한 저명한 인사들의 완강한 거부에, 한때 운동이 포기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배일 감정이 절정에 다다르게 되면서 다시금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들은 다시 종교 단체와 교섭을 벌였는데, 먼저 기독교 측의 이승훈(李昇薰)을 만나 천도교와 함께 독립운동에 합류할 것이라는 승낙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불교 측과의 교섭은 최린이 담당하여 한용운(韓龍雲)에게 승낙을 얻어냄으로써 불교 측과의 제휴도 이루어졌다. 한용운은 또 유림측의 참가를 교섭했으나 실패하여 유림측의 합류는 포기하고 말았다.

이때 독립운동의 실천 방법을 두고 논란이 일어났다. 천도교 측이 내세웠던 청원서와 선언서를 동시에 발표하자는 의견에 대해 일부에서는 청원서만을 내고 선언서는 발표하지 말자는 의견 대립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최린은 “청원서나 건의서를 내는 것은 일본 정부에게 독립을 시켜달라고 청원한다든지 건의해보는 것이므로 민족 자결의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국내적으로 전민족을 분기시키고, 국외적으로 전세계에 향하여 독립해야 하는 이유와 독립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결의를 표명하는 중대한 선언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되었다.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 최린은 최남선(崔南善)을 추천하였다. 최남선은 독립운동가로서 전국에 이미 알려졌고, 서구적 교양과 재래의 학문을 모두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장력도 뛰어난 사람이므로, 최린은 “전민족의 의사를 표시할 독립선언서와 같은 중대한 글을 지을 사람은 그 밖에 없다”고 하였다.

또한 최남선 자기 자신이 “일생을 학자로 마칠 생각이라 독립운동의 표면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선언서는 작성하겠다.”고 함으로써 선언서의 작성 문제는 일단 그에게로 낙착되었다.

뒷날 한용운이 독립운동에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 선언서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맡겠다고 나섰으나, 이미 선언서의 초고가 완성되어 손질이 끝난 뒤였다. 지금 전하는 독립선언서 끝에 있는 공약 3장(公約三章)은 후에 한용운이 추가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하여 작성된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 15인, 기독교측 16인, 불교측 2인 등 33인이 민족 대표로 서명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원고는 오세창(吳世昌)을 통해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 인쇄소 사장 이종일(李鍾一)에게 전달되었다. 이종일은 공장 감독 김홍규(金弘奎)와 함께 2만 1,000매를 인쇄하여 경운동(慶雲洞) 자기 집으로 운반하였다.

선언서는 28일부터 전국 각지로 전달·배포되면서 거족적인 3·1운동의 전개에 있어 결정적인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1,762자로 된 독립선언서에는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내용과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 독립의 전개 방법을 제시하고 있어, 오늘날 전해오는 국내외 각국의 독립선언과 비교해보아도 아무 손색이 없는 명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부산포개항문화관 과 안용복 도일선 전시관 통과

 

안용복 도일선(渡日船)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과 혼인하고자 허황옥이 거친 바다를 헤치고 김해 남쪽 해안에 닿았을 때 16세였다.

인도 아유타국 공주였던 허황옥은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그 어려운 길을 마다치 않았다. 당시 허황옥은 해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파사석탑(婆裟石塔)을 배에 싣고 왔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야기다.

재질이 한국산이 아니며 조각 방법도 독특한 이 석탑은 현재 6개 석재만 남았다.

뱃사람 입장에서 안전 항해를 비는 상징물로 이만한 것을 찾기 어려웠을 터.

이 석탑이 뱃사람의 성화에도 이 정도 마멸에 그쳤으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랄밖에.

   
 

허황옥 일행은 어떻게 항해했을까.

태양과 달을 나침반 삼아 해류와 조류 그리고 바람을 다스렸으리라.

악전고투 끝에 인간의 의지로 항로를 만들었으니 그게 역사다.

1947년 노르웨이 학자 하이엔달은 남미 페루의 잉카인들이 500년께 폴리네시아로 이동했을 것이란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려고 뗏목배 콘티키호로 8000㎞를 101일 만에 항해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도 그렇게 이어졌을 것이다. 1983년 8월 역사학자 윤명철 씨는 뗏목배 해모수호를 타고 거제도를 출발해 42시간 만에 대마도에 닿았다.

반도국가인 우리나라는 오랜 바다 경영의 역사를 자랑한다.

신라 무장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해 서해를 장악하고 당나라와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했다면 발해는 동해를 건너 일본과 교역하며 환동해무역권을 형성했다.

고려는 중국과 왕성한 해상 교류 활동을 벌였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밑바탕에 우리 고유 배인 한선(韓船)이 있다. 우리나라 지형 조건에 맞춰진 한선은 중국이나 일본 배보다 성능이 우수했다. 한선의 가장 큰 특징은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 구조라는 점이다.

독도 지킴이 안용복 장군의 도일선(渡日船)이 완성됐다는 소식이다.

안 장군은 조선 숙종 때 일본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약받았다.

이 배는 일본 시마네 현 오키 섬 무라카미 가문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됐다.

당시 기록대로 길이 9m, 너비 3.6m, 깊이 1.3m 크기인 이 배는 한선의 전통을 이었다. 미국의 라이샤워 교수는 "9세기 신라인들은 동양 3국 중 가장 조선술이 뛰어났고 항해술이 발달해 서해와 동중국해 그리고 대한해협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했다. 안 장군의 국토 사랑 정신과 함께 잠자고 있는 해양활동의 DNA를 일깨워야 할 때다.

 

 

                             *안용복 도일선 전시관앞에서 엘러베이트를 타고 증산공원으로 진행

 

                                                      *증산공원의 팔각정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과 좌천동 일대에 있는 공원.


[건립 경위]
도심 속 근린공원으로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증산 공원(甑山公園)은 1982년에 개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구성]
증산 공원의 면적은 약 2만 ㎡이다. 공원은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운동장과 농구장, 족구장, 베드민턴장, 게이트볼장 및 간단한 체육 시설을 갖추고 있고 중앙 광장이 있다. 화장실과 주차장이 있으며, 공원 일대에는 조선 초기에 축성된 부산진성이 있다. 산책로 정비가 잘되어 있어서 최근 증산 둘레 길이 조성되었다.


[현황]
증산 공원은 부산광역시 동구 성북로 36번길 46번에 있다. 증산이라는 지명은 산의 모양이 시루와 가마솥처럼 생긴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부산’이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공원은 24시간 사용이 가능하며, 주변에는 자성대 공원, 만리산 체육공원, 전포 돌산 공원, 부산 중앙 부두 등이 있다.

 

 

                                           *증산공원에서 바라본 시가지의 모습

                                                                *동부 도서관

 

 

                                      *동구도서관에서 출발하면서 바라본 범1동의 모습

 

                                           *도서관을 내려오면서 바라본 벽화그림.

 

                                             *내려올때 그림작업을 하고 있어 옮겨봤습니다.

 

                                                   *성북전통시장 골목을 통과해요.

 

                                        *성북시장 관통 후 좌측도로를 따라 성북고개로 향하여...

 

                                                              *계단을 통과해요

 

                                                  *오래된 계단을 배경으로.

 

                                                      *좁은 골목길을 통과

 

                                                          *시내에 위치한 다보사

 

                                             *산복도로변에 위치한 유치환선생의 빨간우체통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시기에 활동했던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교육자.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와 애수, 강인한 의지가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대표작으로 <깃발>·<행복>·<생명의 서>·<일월>·<바위>등이 있다. 해방 직후에는 '생명파 시인'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특별시 문화상, 자유문학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부산시 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아버지 준수(焌秀)의 8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극작가 치진(致眞)은 그의 형이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豊山中學]에 입학했다. 이때 형이 펴낸 동인지 <토성>에 시를 발표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한의원을 경영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1926년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이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학년 때 중퇴했으며, 사진관을 경영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된 뒤 교육계에 종사했다. 1937년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주재했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펴냈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옌서우 현[煙首縣]에 가서 농장관리인으로 일하다가 8·15해방 직전에 귀국하여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일원으로 참여했다. 해방 직후 생명에의 열애를 노래한 점에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불렸다. 1954년 경상남도 안의중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어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경주고등학교·경주여자중학교·대구여자고등학교·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7년 교통사고로 죽었으며 묘지는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에 있고,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 공원, 통영 남망공원 등에 시비가 세워졌다.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 35년 동안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펴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특히 대표시 <깃발>(조선문단, 1936. 1)은 연민과 애수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상징이다. 또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절망의 애수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시세계는 첫 시집 <청마시초>(1939)와 제2시집 <생명의 서>(1947)에 잘 나타나 있다.

<청마시초>에 나타난 허무는 정신편력과 더불어 다양하게 변모하는데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의 죽음의 의미는 2가지로 나뉜다. 첫째, 일제 말기의 극한상황과 결부되어 자학적 분노와 생명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이는 결국 종교적 자아로 승화되고, 둘째, 인간의 숙명인 죽음이 역설적으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수로 나타난다. 이는 제6시집 <보병과 더불어>(1951)에 실린 종군시(從軍詩)들에 이어져 전장에서 애수에 젖기도 한다.

한편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실린 시는 만주에서 쓴 것이 대부분이며, 여기에 실린 <생명의 서>와 <일월>에서는 허무와 고독을 극복한 강인하고 웅건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후에 대표시 <바위>로 이어져 순수한 본질적 자아로 복귀하려는 의지로 나타났다. 그는 후기에 와서 허무에 회의를 느껴 이를 극복한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이루지 못했다. 시인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은 문학은 무엇보다 첫째 그것을 읽어 줄 독자가 없을 것"이라 했듯이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집으로는 <울릉도>(1947)·<예루살렘의 닭>(1953)·<청마시집>(1954)·<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류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다.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8년 자유문학상, 196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부산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산복도로 전망대에서.

 

                                                       *시원한 부산시가지의 모습

 

                                                                   *잘정돈된 산책로.

 

                                         *아련한 옛생각을 하게하는 마중물이 있어야 작동을 하죠.

 

                                                            *초량성당의 모습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는 천주교 부산교구 소속 성당.

[설립 목적]

6·25 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부산에 모여 들어 신자 수가 증가함에 따라 동구 지역의 신자들을 사목하고, 지역 주민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초량성당을 설립하였다.

[변천]

1951년 미국인 메리놀 외방선교회 선교사인 카놀 요셉(Josep-W. Connors)[한국명 권약슬(權若瑟)] 신부가 초량에 정착한 후, 대구교구에 본당 설립을 신청하였다. 대구교구에서는 카놀 신부의 요청을 수락하고 1951년 5월 1일자로 본당 설립을 인가하며 초대 본당 주임 신부로 카놀 요셉 신부를 임명하였다. 요셉 카놀 신부는 적산 가옥 두 채를 구입하여 초량공교회로 사용하였다.

1956년 11월 천주교 부산교구에서는 처음으로 임마꿀라타 꾸리아[쁘레시디움의 상급 기관]를 창단하여 동구 지역 외교인 선교에 앞장섰다. 1957년 5월 30일 초량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62년 2월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설립하여 부산 지역 노동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성당 건립 필요에 따라 성당 신축 기성회를 조직하여 모금을 하고 전 신자들의 노력으로 성당 건립이 완공되었다. 이에 1962년 8월 30일 신축 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1964년 1월 본당의 소식지인 『겨자씨』를 발간하여 현 천주교 부산교구의 주보인 『가톨릭 부산』의 모태가 되었다. 초량성당에서 1962년 7월에 수정성당이, 1967년 10월에는 구봉성당이, 1969년에는 화교성당과 영주성당이 분리해 나갔다. 1985년 12월 부산 지역 본당에서는 처음으로 ‘지속적인 성체조배회’를 발족하여 다른 본당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신자들의 성체 신심 함양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미사는 일요일에는 오전 6시 30분, 10시 30분, 오후 7시 30분 세 차례 있다. 평일에는 월요일 오전 6시 30분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에는 오후 7시 30분, 수요일에는 오전 10시에 있다. 토요일에는 초등부를 위한 오후 4시, 중고등부와 특전 미사를 겸해 오후 7시에 있다. 본당 지역의 인구 감소로 세례식은 연 1회 거행하며 10여 명의 신자가 세례를 받는다.

[현황]

1990년대 들어서면서 지역의 낙후와 인구의 감소, 그리고 신자들의 노령화로 인해 본당의 복음화 사업이 어렵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갖고, 그들에 맞는 사목 계획을 잡고 있다. 2013년 현재 평신도사도직협의회를 중심으로 사도히, 반석회, 빈첸시오회, 연도회 등의 단체들이 있다. 교역자로는 주임 신부 1명, 수녀 2명, 사무장 1명 등이 있다. 교우 수는 3,151명이며, 수호성인은 예수 성심이다. 성당은 대지 1,060㎡ 정도이며, 주요 건물로는 성당을 비롯하여 사제관, 수녀원 등 건평이 2,034㎡ 정도이다.

[의의와 평가]

초량성당은 설립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동구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훌륭히 완수하면서, 다방면에 걸쳐 천주교 부산교구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특히 천주교 부산교구 최초로 꾸리아, 가톨릭노동청년회, 지속적인 성체조배회 등을 발족하여 신자들의 신심과 사회 교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부산의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약간의 차이나 색깔이 나네요.

중국과의 외교 창구, 상해문.상해거리 *
동구 초량동 부산역 앞 큰길인 중앙로 맞은편 화교학교를 중심으로 중국영사관(1884년 8월 설치)이 있던 자리를 구한말에는 청관이라 했다. 중앙동의 용두산 주위는 왜관이 있었고, 초량동에는 중국조계지가 설치되어 왜관에 대칭되는 말로 청관이라 한 것이다. 당시 주위에는 중국(청국) 사람들의 점포를 겸한 주택이 형성되었다. 그 점포가 있는 거리를 청관거리라 했다. 그때의 청관거리는 초량 앞바다가 매축되기 이전이어서 청관거리 동쪽인 오늘날의 부산역 자리는 푸른 소나무가 우거지고 흰모래가 펼쳐진 백사청송(白沙靑松)의 바닷가였다. 그 당시는 초량에서 영주동으로 가려면 청관거리를 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청관거리 점포에는 비단, 포목, 양복지, 거울, 꽃신 등 중국의 상해 등지에서 수입해온 상품이 많았다. 소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창고에 쌓아두고 지방상인에게 도매도 크게 했다. "비단장사 왕서방 마음이 좋아 띵 호와"의 노래 그대로 영남 지방의 혼수감은 이 청관에서 많이 나왔다. 그러나 1900년대 이후 일본세력이 초량까지 밀려오자 청관거리도 그 빛을 잃어갔다.

광복과 한국전쟁이 일어나 미군이 진주하고 중앙동의 텍사스촌이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되자, 어느새 초량의 청관거리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청관거리란 이름을 잃어가면서 텍사스거리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갔다. 그때 여인들은 그 뒤 국제결혼을 하여 이곳을 떠난 사람도 많다.

주둔 미군이 줄어들자,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외국선원과 미국군함의 병사들이 찾아들었다.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상품을 판매하는 관광상품거래의 명소로 바뀌어 갔다. 1990년대에 들어 공산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자 러시아의 선원과 보따리 장수들이 이곳을 찾아 상가는 성업을 이루었다. 이 거리는 청국인에서 미국인, 외국선원, 그리고 이제는 러시아인들, 여러 외국인들을 거쳐 장사로, 환락가 이제는 관광상품의 명소로 역사의 장을 바꾸어가고 있다.

* 상해의 문 건립 배경 *
최근 부산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중국 상해와의 유대를 기념하고 1884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화교의 집단거주지인 이 지역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최근 상해의 거리로 명명하고 이전의 문화적 풍류를 되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새천년을 맞아 부산시와 상해시가 공동으로 "상해의 문"을 건립하였다.

 

                                                          ▲초량 택사스 거리

                                                                     *부산역 도착

 

시대성격유형면적소재지분야

현대
철도역
지명
면적 6만 1880㎡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3동 1187-1
경제·산업/교통

요약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는 기차역.

목차접기

  1. 변천
  2. 구성
  3. 현황

변천

임시정거장으로 초량역과 부산역 사이 선로의 연장선상에서 1908년 4월 1일에 보통역으로 업무가 시작되었다. 1908년 3월 공사비 97만 4천원을 들여서 부산역 본관과 부대설비 공사에 착수하여 1910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정거장 구내 면적은 8만 8,340㎡로 본관은 총 건평 1,183㎡이며, 건축면적 358평, 연면적 689평(2,238㎡), 건물 최고 높이가 22m로 벽돌조의 2층 건물이었다.

붉은 벽돌에 흰색 화강석을 섞어 전체의 구성은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한 철충 양식으로 공사는 하야가와 하지매가 수행하였다. 그 후 1943년 12월 10일부산부두역으로 개칭하였으며 1945년 6월 10일부산역으로 개칭함에 동시에 화물구와 구내구(構內區)로 분리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일 화물구와 구내구의 2개구를 통합하였다.

1953년 11월 27일부산역 대화재로 역사가 전소하여 중앙동에 임시가건물을 역사로 사용하다가 1965년 11월 1일부산진역과 통합하여 부산진역에서 영업을 하였다. 그 후 1968년 지금의 위치에 역사를 신축하여 1969년 6월 10일 역사를 준공하여 역무를 이전하였으며, 현재의 부산역사는 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에 맞추어 증·개축되었다.

구성

1910년에 준공한 부산역은 1층에 각 대합실과 매표실, 전신실, 역원실, 화물취급실, 식당, 욕실, 화장실을 두었고, 2층 이상은 호텔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승강장 상옥의 철골조는 한국철도의 효시이다.

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에 맞추어 증·개축되어 대지면적은 21만 1,536㎡, 건축면적 3만 8,946㎡, 연면적 6만 1,880㎡로 지상 5층, 지하 1층에 철골 및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건축되었으며, 중앙집중식 냉난방 및 공조시설과 에스컬레이터 14대, 엘리베이터 12대가 설치되어 있다. 1만 6,457㎡의 선상주차장에는 승용차 기준으로 총 245대가 동시에 주차할 수 있으며, 역 광장 주차장에는 25면의 승용차를 주차할 수 있다.

일반열차와 KTX 열차를 이용할 수 있는 5개 승강장이 운영되고 있으며, 3층 맞이방에는 매표창구 및 현금자동발매기, 종합관광안내소, 유아방, 트레인 솦, 종합식당가, 편의점, 패스트 푸드점, 제과점 등 편의시설이 분포하고 있다. 1층 맞이방에는 각종 편의시설로 코레일 멤버십 회원을 위한 아늑한 휴식처 KTX 라운지, 빠른 배송을 하는 KTX 특송, 미용실, 편의점, 의류매장, 패스트푸드점, 서점 등이 입지하고 있다.

현황

부산진역 다음에 입지한 경부선의 종착역으로 2018년 현재 수서발 부산행 KTX 열차 1일 운행회수는 상·하행선 각각 40회이다. 『철도통계연보』를 보면 2016년 현재 KTX의 경우 부산역 하행은 연간 승차 인원이 9,860명, 하차 인원이 9,288,700명으로 총 9,298,560명이다. 부산역 상행은 연간 승차 인원이 9,376,925명, 하차 인원이 9,658명으로 총 9,386,583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