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걷기

남파랑길3코스 (영도대교~감천사거리)14.5km

문수산 아래 2020. 8. 3. 23:39

* 남파랑길3코스는 갈맷길로 대체합니다.

 전코스가 부산 갈맷길코스와 중복 구간입니다.

                         *남파랑길3코스 안내판.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04에 위치한다.

 

 

*보수동 책방 골목의 안내판

 

 

 

 

8.15광복 직후 오늘날의 국제시장이 태평양전쟁으로 주택가가 철거되어 빈터로 놓여 있을 때 일본인이 남기고 간 책을 난전을 벌여 팔았는데, 그 장소가 개인소유가 되자, 보수동 앞길로 책장사들이 한 두 사람 자리를 옮겨 앉게 되면서부터 오늘의 골목이 형성되는 바탕이 되었다. 6.25전쟁으로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는 피난민이 가져온 귀중한 책을 생활을 위해 팔고, 피난 온 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의 필요로 사들이는 수요와 공급이 늘어나자 본격적인 가건물이 서게 되어 헌 책방 골목이 형성 되었다. 한때는 개인이 가진 헌 책들이 이 헌 책방 골목에 모여들어 진귀본이 나오면서 헌 책방의 가건물은 보다 더 늘어났다. 당시에는 약 70채가 되는 책방으로 중.고등학교 학생과 대학생들이 많이 찾아 들어 학생들이 요구하는 헌책이 사들여지고 팔려가곤 하였다. 60년대 초 출판문화가 거의 자리를 잡지 못했을 때는 학생과 지식인들이 자신의 헌책을 내다 팔고 다시 남들이 보던 헌책을 되 사오거나 헌 잡지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생겨난 보수동 헌 책방골목은 지금까지 전국에 몇 안 되는 유명한 책방골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헌 책인 경우 책의 상태나 흥정에 따라 값이 매겨진다.

 

 

*부평동 깡통시장 출입구의 모습.

[정의]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 2가에 있는 전통 시장.


[건립 경위]
일제 강점기 도시 발달에 따라 일상생활 용품을 공급하는 공설 시장으로 부평정 시장(富平町市場)이 1910년에 개설되었다. 1914년에 발포된 「시장 규칙」에 따른 최초의 공설 시장이었다. 공설 시장이란 20인 이상의 영업자가 한 곳에서 주로 곡물 및 식료품을 매매하는 장소를 말한다.


[변천]
8·15 광복 후 미군 전시 통제 물자가 들어오면서 국제 시장과 함께 ‘돗대기시장’ 혹은 ‘도떼기시장’[한꺼번에 흥정하여 매매한다는 의미로 추정]으로 불리게 되었다.

1947년에 부평정(富平町)이 부평동(富平洞)으로 개칭되면서 부평정 시장이 부평 시장이 되었다. 6·25 전쟁 이후에 군용 물자와 밀수입된 상품을 판매하면서 깡통 시장[미군 부대에서 나온 통조림 등 깡통 제품을 판매]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2005년 12월 5일에 전통 시장으로 인정되었다. 2008년 2월 28일에 국제 시장, 창선 상가, 만물의 거리와 함께 상권 활성화를 위한 ‘국제 마켓 타운’을 결성하였다.


[구성]
부평 시장의 대지 면적은 3만 597㎡, 매장 면적은 2만 9942㎡이며, 총 1,008개의 점포가 있다. 주 판매 상품은 잡화, 수입 용품이며, 편의 시설로 화장실[1동 4칸]이 있다. 각종 죽을 파는 죽집 골목과 외제 상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깡통 시장이 있다.


[현황]
2012년 12월 현재 직영 점포가 146개소, 임차 점포가 8,862개소 있으며, 총 종사자 수는 2,130명이다. 상인 조직으로 부평시장상인회가 있다. 부평 시장은 깡통 시장, 도떼기시장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많은 수입품들이 전국적으로 공급된 곳이다. 현재 상권이 다소 위축되었으나 양주, 의류, 장식품, 액세서리, 패션, 잡화, 그리고 외제 전자 제품을 취급하고 있으며, 부평 시장 내 깡통 시장의 상인들을 위주로 구성된 월드 밸리는 백화점에 없는 다양한 품목을 갖추고 있다. 또한 부평 시장 일대의 장터 먹거리도 유명하다. 부평동 족발 골목의 냉채 족발, 비빔 당면 골목의 비빔 당면, 충무 김밥, 파전, 빈대떡, 유부 전골 등 음식점과 노점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외에도 부평동 한복 거리, 자갈치 시장, 용두산 공원, 남포동 BIFF 광장, 40계단 문화 관광 테마 거리, 보수동 책방 골목과 인접하여 유동 인구가 높아 상권이 활성화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깡통시장에서 비빔당면과 김밥.만두국으로 점심해결.

 

*국제시장도 통과.

 

개요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대청동, 창선동 일대에 걸쳐있는 상설시장. 해방 이후 모여든 귀환동포들의 노점이 모이면서 이루어진 시장으로 '도떼기 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6·25전쟁과 함께 밀려온 피난민들의 생계 터전이기도 했으며, 각종 군용물자가 유통되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전체 6 공구로 된 지금에 이르렀고, 2008년에는 인근 시장과 연합하여 국제 마켓 타운을 결성했다.


역사

시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948년에 단층 목조건물 12개동을 건립하여 '자유시장'이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하면서부터이다. 6·25전쟁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피난민이 모여들고, 미국의 구호품과 군용품이 유통되면서 국제시장은 인근 광복동·남포동의 도심상가와 더불어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 상업기능의 중추 역할을 했다.

국제시장

꽃분이네

속칭 '케네디 시장'이라고도 부르는 창선동1·2 가의 의류도매 및 덤핑 시장은 6·25전쟁 당시 구호물자로 들어온 옷가지들이 많이 거래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보세 의류품 등이 싼 값으로 팔리고 있다. 한편, 1950년 12월과 1953년 1월의 대규모 화재와 새로운 경제질서의 확립으로 규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부산권의 도·소매시장으로 그 세력이 축소되고 있다.

1968년 1월에 목조건물 3개동을 제외한 나머지 9개동이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되었고, 상가대지 0.007㎢(2,177평)가 불하되어 1,489칸의 점포가 개인에게 등기되었다. 1969년 1월 사단법인 국제시장번영회가 설립되었고, 1977년에 비로소 정식으로 시장개설허가를 받았다. 2002년 시장 현대화 사업을 실시하면서 이후 2005년까지 공구를 나누어 아케이드를 설치했으며, 2008년에는 인근 부평시장, 만물의 거리, 창선상가 등과 함께 국제 마켓 타운을 결성했다.


현황

2층 상가 형태로 건축되어 있으며 대지 면적은 7,197m2, 매장 면적은 9,497m2이고, 총 580개 점포가 들어서 있다. 주력 품목은 기계공구, 주방기구, 의류이며, 미로처럼 얽힌 골목에 각종 점포들이 들어서 있다. 도·소매 시장이며, 가방·문구·공예품을 판매하는 1공구, 주방기기·칠기·안경 등을 판매하고 있는 2공구, 침구류·양품을 판매하는 3공구, 포목점·주단점·양단점 등이 있는 4공구, 가전제품·기계·공구 등을 판매하는 5·6공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함께 근처에 구제시장 골목, 팥빙수 골목, 화장품 골목, 먹자골목, 소품골목, 깡통 시장 등이 들어서 있다. 2016년 기준 약 1,500명 정도가 국제시장과 인근 일대를 중심으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2014년 개봉한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이 천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6.25를 전후한 한국 근대사에서 부산과 국제시장이 차지하던 역할을 알지 못하던 세대에게 당대의 풍경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면서 부산지역 관광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자갈치시장의 현대식 건물.

 

요약 제2차 세계대전 및 6·25전쟁 이후 일본 등 해외로부터 귀국한 동포와 월남한 이북동포들이 현재 위치에서 노점상을 형성해 장사를 해오다가 1969년 공유수면 매립과 법인설립인가를 얻어 부산어패류처리조합이라는 사단법인체로 발족했다. 1970년 개장해 연근해에서 어획되는 모든 어패류가 집결되는 한국어패류종합백화점으로 성장했다. 1985년 4월 화재로 시장 전체가 타버렸으나 1986년 1월 현대식 시설로 보수·개선해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산의 10대 명소 중 하나로 지정되어 국내 관광객뿐만 아니라 멀리 동남 아시아까지 알려져 부산 관광길에 꼭 한번씩 찾는 곳이다. 1층은 활어·전복(패류)·선어·잡어, 2층은 건어·식품·회센터, 3층은 조합사무실·중매인사무실·수산관계사무실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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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의 남항에 위치한 3층 건물로, 연근해 어패류를 위판할 수 있는 부산수산업협동조합 및 잠수기수산업협동조합도 함께 들어서 있어 입지적으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및 6·25전쟁 이후 일본 등 해외로부터 귀국한 동포와 월남한 이북동포들이 현재 위치에서 노점상을 형성하여 장사를 해오다가 1969년 공유수면 매립과 법인설립인가를 얻어 부산어패류처리조합이라는 사단법인체로 발족했다.

1970년 개장하여 연근해에서 어획되는 모든 어패류가 집결되는 한국어패류종합백화점으로 성장했다. 1985년 4월 화재로 시장 전체가 전소되었으나 1986년 1월 현대식 시설로 보수·개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산의 10대 명소 중의 하나로 지정되어 국내 관광객뿐만 아니라 멀리 동남 아시아까지 알려져 부산 관광길에 꼭 한번씩 찾는 곳이다.

연건평 7,256㎡(1층 2,668㎡, 2층 2,902㎡, 3층 1,686㎡), 건물전장 149.6m이다. 이 시장은 활어·전복·선어·잡어·동식당·서식당·식품·건어부의 총 8개 부서로 되어 있으며, 1층은 활어·전복(패류)·선어·잡어, 2층은 건어·식품·회센터, 3층은 조합사무실·중매인사무실·수산관계사무실로 이루어졌다.

1일총물동량은 활어 8t, 선어 10t, 전복 및 패류 3t, 잡어 4t 등 총 25t, 연간총물동량은 활어 2,880t, 선어 3,600t, 전복 및 패류 1,080t, 잡어 1,440t 등 총 9,000t, 연간매출액 약 170억 원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로도 각종 어패류를 공급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및 중구청에서 관리 감독하고 있으며, 앞으로 복지시설을 비롯한 각종 시설 보강과 유통구조 개선 등으로 발전이 더욱 기대되고 있다.

 

 

 

*남항대교를 내려와 도로 좌측으로 송도 해수욕장 방향으로 진행.

*송도 해수욕장의 스카이워크.

*거북섬 가는길의 송도 해수욕장 방향으로...

*거북섬 들어가는 출입구의 모습.

[정의]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에 있는 섬.


[명칭 유래]
거북섬[龜島]의 명칭은 섬의 모양이 거북과 닮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생하고 있어 송도(松島)라고도 불렸다.


[자연 환경]
거북섬은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의 송도 해수욕장 동쪽 앞바다에 위치한 바위섬으로, 북쪽으로 소나무로 뒤덮인 송림 공원과 마주하고 있다. 거북섬은 본래 바다로 둘러싸여 있던 소나무가 자생하는 낮고 작은 섬이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 거류민들에 의해 ‘수정(水亭)’이란 휴게소가 설치되기도 했으나 현재 옛 모습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거북섬 둘레에 남은 반석으로 옛날의 윤곽만을 추정할 수 있다.


[현황]
거북섬의 면적은 3,129㎡이다. 1970~80년대에는 다이빙대와 보트, 송도 주위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오르내렸던 케이블카, 송도와 거북섬을 연결한 구름[흔들]다리가 있어 신혼부부들의 여행지로 각광을 받았다. 현재는 부산광역시 서구청의 송도 지역 관광지 종합 개발 계획으로 주변 환경 정비가 이루어졌다. 구름다리는 2002년 4월 철거되고 70m의 연륙교로 바뀌었으며, 한때 거북 바위 위에 난립했던 음식점들도 철거되었다. 섬 주위의 갯벌은 조개를 채취할 수 있게 만들어졌으며, 거북섬 위의 콘크리트 구조물도 모두 정비되어 송림 공원과 함께 해안 친수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거북섬에서 바라본 송도의 횟집촌.

*거북섬의 각종 조형물(거북섬의 전설)

부산 서구 송도해수욕장 인근 거북섬이 청춘 남녀의 애절한 사랑이 이뤄지는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서구는 송도지구 복합해양휴양지 조성사업의 하나로 거북섬 테마공간에 이 섬의 전설을 스토리텔링화한 젊은 어부와 인용(人龍)의 브론즈 동상을 건립했다고 18일 밝혔다.
거북섬의 전설은 이렇다. 옛날 송도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젊은 어부가 바다괴물에게 큰 상처를 입은 용왕의 딸을 구하려다가 바다에 빠져 죽자 이를 가엽게 여긴 용왕이 어부를 거북바위로 만들어 영생을 주고, 어부와 결혼하기 위해 인간이 되려다 반인반용(半人半龍)이 된 자신의 딸과 거북섬에서 영원히 함께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용왕은 또 두 사람의 못다 한 사랑을 안타깝게 여겨 이 곳을 찾는 청춘남녀에게는 사랑을 이루게 해주고, 사람들에게는 장수와 재복을 나누어주고 있다고 한다. 거북섬의 유래로, 송도 볼레길 해안에는 용굴도 실재한다고 구는 전했다.

*송도 거북섬의 스카이워크에서.

*스카이워크에서 송도 해수욕장을 배경으로...

*바다에는 등대인가????

*해녀분이 열심히 물질을 하고 있네요.

*주위를 배경으로.

*거북섬에도 스토리텔링에 걸맞게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제작된 어부과 인용의 브론즈 동상이 송도 앞 바다를 배경으로 세워져 색다른 볼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브론즈 동상에도 이런 전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 손에는 여의주를 든 아리따운 인용(높이 1.7~1.8m)과 헌헌장부로 표현된 젊은 어부(높이 1.9~2m)가 금세 눈물을 떨굴 듯 절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향해 손을 내뻗고 있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가슴까지 저리게 한다.
특히 인용의 동상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인 이탈리아 북부 도시 베로나에 있는 줄리엣 동상에서 착안했는데, 오른쪽 가슴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줄리엣 동상 앞은 관광객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송도 해수욕장 중앙에 거북이 형태의 다이빙대가 설치.

*여기가 송도 구름산책로.

*송도 해수욕장

 

 

송도해수욕장의 유래
송도(松島)는 옛날 이곳에 송림이 많이 우거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송도해수욕장은 부산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이 송도유원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수정(水亭)이라는 휴게소를 설치하고 개발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해수욕장이다.
1920년대에는 송도와 시내를 잇는 부산 최초의 신작로의 송도로 가는 윗길(지금의 천마로)이 생겼고,1939년에는 남항일대가 매립되어 송도로 가는 아랫길(지금의 충무로)이 생겼으며,도심과 가까워 많은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1964년에는 거북섬에서 해수욕장 위를 가로지르는 케이블카와 송림공원에서 거북섬으로 건너가는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송도의 명물로 등장하였으며,연인들과 신혼부부들이 즐겨찾는 전국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그러나,1980년대에 들어 해안주변 개발의 가속화로 모래유실이 계속되고, 케이블카가 태풍 셀마의 영향으로 파손-철거되는 등 태풍과 해일의 피해가 반복되어 해수욕장의 기능이 점차 쇠퇴해져 갔다. 이에,송도해수욕장의 옛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2000년부터 5년간 전국 최초의 송도연안정비산업을 시행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재단장
하였으며,2007년에는 전국 최초의 해상조각 작품인 고래조형등대를 설치하였고, 고 현인선생을 추모하는 현인광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매년 8월에는 신인가수 발굴을 위한 전국 최대-최고의 가요제인 [현인가요제]를 비롯한 송도바다축제,10월에는 우리나라 대표
수산업 축제인 [부산고등어축제],정월대보름날에는 고유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한 해 구민의

화합,안녕 및 건강을 기원하는 [송도달집축제]를 개최하는 등 문화관광축제도 다채롭게 열리고 있다.앞으로, [송도지구 복합해양휴양지조성사업]을 성공리에 추친하여연안유휴지에 해양여가 휴양기능을 도입함으로써 가까운 시일내 세계적인 사계절 해양관광명소로 발돋움 할 것이다.

옮긴글

 

*송도 해수욕장에도 동백나무에서 봄을 전하고 있네요.

*주변에는 여러가지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네요.

*주변에 숲도 조성중이고요.

*송도 해변에 현인선생님의 흉상이 있네요.

 

현인
기본 정보본명출생사망국적직업장르활동 시기배우자가족종교

현동주
1919년 12월 14일(1919-12-14)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부산부 어영정
(現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
2002년 4월 13일 (82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대한민국
가수
영화배우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하사
트로트
1947년 ~ 2002년
김미정(재혼), 조창길(前), 박정혜(前)
아버지 현명근, 어머니 오봉식의 슬하 2남 1녀 중 장남
자녀는 슬하 1남 3녀
장로교

현인(玄仁, 본명 : 현동주, 한국 한자: 玄東柱, 예명은 현인(玄仁), 창씨명은 고토 진(後藤 仁), 1919년 12월 14일 ~ 2002년 4월 13일)은 대한민국가수이다.

 

일생[편집]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부산부에서 출생하였고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성장한 그는 1933년 배구 선수로 첫 데뷔하였으며 1942년 테너 성악가로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1943년 바리톤 성악가 데뷔하였으며 1년 후 1944년 플루트 연주자 데뷔하였고 이듬해 1945년 기타 연주자 데뷔하였으며 1년 후 1946년 트럼펫 연주자로 데뷔하였고 1947년 《신라의 달밤》이라는 곡으로 정식 대중가수 데뷔하였으며 1949년 영화 《푸른 언덕》에 주연하여 영화배우 데뷔하였다.

2002년 4월 13일에 향년 84세로 별세한 그의 유해는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삼성공원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소속[편집]

생애[편집]

현인은 1919년 12월 14일부산에서 아버지 현명근과 어머니 오봉식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 회사의 사원 주택이 있던 영도와 할머니의 댁이 있던 동래를 오가며 성장하였다. 이후 석유 회사를 다니던 아버지가 일본 마이니치 신문의 도쿄 지사의 기자가 되어 일본으로 떠나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러시아의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랴핀의 독창회를 보고 처음으로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1931년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현인은 1933년도에 학교의 배구 대표 선수였을 만큼 운동도 잘 하였고, 방과후에는 밴드부에서 일본의 대중가요나 미국의 포크송을 트럼펫으로 즐겨 불렀다. 학창 시절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던 현인은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1938년일본 육사에 진학하기 위해 도쿄로 갔지만 방향을 바꿔 도쿄 음악학교 성악과에 진학하여 음악 공부를 시작하였다. 일본 유일의 관립 학교인 도쿄 음악학교는 당시 음악 엘리트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음악 학교 진학을 불쾌하게 여긴 아버지가 학비 지원을 끊자 현인은 막노동을 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다. 1년 뒤 NHK 합창단의 모집 광고를 본 현인은 오디션에 응시하여 단원이 되었다. 유학 시절 왕족 출신의 마리코와 연애하기도 하였으나 곧 귀국하여 소학교 교사였던 조창길과 첫 결혼을 하였다.

1939년에 고토 진(後藤 仁)으로 창씨 개명하였는데, 훗날 그의 예명이 된 현인은 고토라는 성만 현으로 바꾼 것이다. 1942년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성보악극단의 음악 교사로 일하였다. 1943년에 동료들과 악극단을 구성해 톈진으로 가서 클럽 신태양의 무대에 올랐으며, 베이징, 항저우 등지로 일본군 위문 공연을 다녔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한 뒤에 베이징 비밀 형무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고,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가족들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후 홀로서기를 시작한 현인은 벌이가 좋은 미군 위문 공연에 뛰어들어 탱고를 전문으로 하는 고향경음악단을 조직하였다. 1947년 29세에 최초의 나이트클럽인 뉴스맨스 클럽 무대에서 활동하며 밤무대에서 이름을 알렸다. 그해 박시춘이 작사하고 유호가 작사한 '신라의 달밤'을 발매하여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이 인기 덕에 현인은 1949년 해방 후 최초의 음악 영화인 '푸른 언덕'에 주인공으로 선정되고, 영화 주제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무렵 현인은 세계를 풍미하던 '베사메 무쵸'나 '꿈속의 사랑'과 같은 곡을 번안해 노래하여 트로트 일변도의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1952년에디트 피아프이브 몽탕의 히트곡 '장미 빛 인생' 등을 불러 한국에 샹송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현인은 이후 '고향 만리', '굳세어라 금순아' 등을 잇달아 히트시켜 1950년대에 가장 빛나는 대중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다. 현인의 노래는 고단했던 한국 현대사를 반영하고, 우울한 시대에 서민의 아픔을 달래 주었다. 1950년대 초 현인은 부산에서 활발한 공연 활동을 벌였다. 1950년 4월 1일 동아 극장에서 은방울악극단의 '은방울쇼'에 당대 스타들과 함께 연예 활동을 하였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군부대 위문 공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한편, 1951년 3월 30일 부민관에서 '손목인과 그 악단'의 공연에 특별 출연하였으며 1951년 4월 24일 동아 극장에서 '현인과 그 악단'을 만들어 '멍기의 노래'로 무대에 올랐다. 1952년 6월 1일에 신청년극단의 가극 '성웅 이순신'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간 현인은 박시춘의 은방울쇼단에 합류하면서 다시 큰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1957년에 두 번째로 결혼한 아내 박정혜와 이혼하였고, 1959년에는 봉봉쇼단이 재정난으로 6개월 만에 파산하였다.

결국 현인은 1974년 56세에 뉴욕 시티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세 번째로 결혼하고 사업을 시작했으나 부진을 면치 못하고 1981년에 다시 귀국하였다. 1981년 중반부터 1998년까지 10여년 동안《가요무대》를 비롯한 여러 방송에 출연하였으나 1999년에 지병인 당뇨가 악화되어 활동을 중단하였는데 결국 당뇨 합병증으로 인해 2002년 4월 13일에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해방 이래 앨범을 발표하여 데뷔한 가수는 현인이 처음이었기 대문에 '대한민국 제1호 가수'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학력

주요 작품

  • 〈고향만리〉 1947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 〈굳세어라 금순아〉 1950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 〈꿈 속의 사랑〉 손석우 작사 편곡 영장 작곡
  • 〈나폴리 맘보〉 고명기 작사 박시춘 작곡
  • 〈럭키서울〉 1948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 〈베사메무초〉 1948 현동주 번안
  • 〈꿈이여 다시한번〉 1948 조남사 작사 이인권 작.편곡 영화 주제가
  • 〈불국사의 밤〉 이은상 작사 홍난파 작곡
  • 〈비 내리는 고모령〉 1948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 〈신라의 달밤〉 1945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 〈서울야곡〉 1949 유호 작사 현동주 작곡
  • 〈인도의 향불〉 1950 손로원 작사 전오승 작곡
  • 〈전우야 잘자라〉 1950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 〈체리핑크 맘보〉 현동주 번안
  • 〈아리랑 맘보〉 1958 나화랑 작사 편곡 현인 작곡 전영주 노래
  • 〈전우여 잘자라〉 1950년대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 〈장미빛 인생〉 1940년대 현인 번안 박춘석 편곡

 

*송도 100주년 기념공원의 타임캡슬 기념탑.

*송도 해수욕장에서 암남공원 방향으로 진행.

*송도 해수욕장에서 암남공원까지의 해안길을 볼레길이라 했네요.

*저기에 암남공원 주차장이 보이네요.

*송도앞 바다에는 부산항입항을 기다리는 대형선박이 많이 보이네요.

*송도 볼레길의 해안선.

*볼레길의 파수꾼 색깔있는 바위.

*볼레길의 끝자락 주차장이 있네요,

 

*주차장에서 우측계단을 통해 암남공원으로 진행 상부 도로에서 ...

*암남공원입구 해안선 쪽으로 공사중이라 갈수가 없어 공원중앙길로 진행.

*암남공원 케이블카 공사가 한창이네요.

*우리 집사람은 열심이 길을 갑니다.

*여정:인간의 삶은 긴 여정이다.거대한 가방속에 여행자의 파생물인 자켓,우산 안식처인 의자,자연을 상징하는 코끼리를 표현하여 여정을 상징화 하였다

김 근 배(2003)

*은은한 선.

성질과 기본형이 다른 두 종류의 철재는 각각 고유의 성질을 유지하면서 서

로를 감싸주고 지탱해 주고 있다.어느 한 부분이라도 빠지면 전체 형태가 일

그러지는 구조적 관계설정이 흥미롭다.(데이빗 에디슨)

*천국의 열쇠.

작가는 세상에 대한 진실의 소리를 양감이 풍부하고 친숙하게 표현하고 있

다.이 작품은 인간의 복지와 권리신장을 위해 헌신한 노력을 바치는 인류라

는 이미지와 리투아니아 전통에기반을 두고서 몇개의 부분들이 서로 절합형

태를 보여주고 있다(알그리다스 보사스 2002)

*암남공원에서 바라본 앞바다.

도심속에서 만나는 원시림, 부산 암남공원 *
넓이는 56만 2500㎡이다. 자연공원으로 동편에 남항, 서편에 감천항, 앞쪽에 동물검역소와 인접하여 있다. 남쪽에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연결된다. 부산 서구 암남동에 위치한 암남공원은 부산의 번화가인 남포동에서 불과 4㎞에 불과하다. 옛날엔 혈청소 입구로 불리던 이 길은 해안절경이 빼어난데다 송도해안과 부산 남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1972년 12월 30일 건설부고시로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군사보호구역 내에 묶여 한동한 출입이 통제되다가 1996년 4월 5일 개방되었다. 이후 총사업비 34억원을 투자하여 전망대·구름다리·산책로·광장·야외공연무대 등의 시설과 주차장을 조성하였다. 해양성 수목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기암절벽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어 푸른 바다와 함께 절경을 이룬다. 이곳에서 빗살무늬토기·패총 등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입구에서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 산길은 소나무가 울창하여 삼림욕을 즐길 수 있으며, 구름다리를 타고 오르는 정상에는 전망 좋은 정자가 서 있다. 군데군데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바닷가 쪽으로는 바다낚시를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앞으로는 자연학습장도 조성하여 문화와 생태학습 공간으로도 활용할 계획이다. 송도해수욕장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으며, 인근에 두도공원과 송림공원이 있다.

* 암남공원의 생태 환경 볼거리 *
약 1억 년 전 형성된 퇴적암과 원시림, 101종의 야생화와 374종의 식물 등 도심 속에서 보기드문 자연생태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낚시터, 전망대, 산책로 등을 갖춘 원시 자연공원이다. 입구에서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 산길은 소나무가 울창하여 삼림욕을 즐길 수 있으며, 구름다리를 타고 오르는 정상에는 전망좋은 정자가 서 있다. 군데군데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바닷가 쪽으로는 바다낚시를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갈맷길 두도 전망대 인증도장 잉크가 없어 사람으로 인증샷해요.

*우리 부부도 인증샷.

*두도 전망대.

[정의]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에 있는 섬.


[명칭 유래]
두도(頭島)는 머리섬 또는 대가리섬으로도 불렸다고 전해지는데,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자연 환경]
두도는 암남 반도(岩南半島)의 남동쪽에 있는 바위섬으로 바닷새들의 배설과 둥지로 인해 회색빛으로 변하고 있다. 갈매기 등 바닷새가 많아 ‘갈매기의 천국’이라 불린다. 섬 주위로는 해식애[파랑의 침식으로 형성된 절벽]가 발달해 있고 비교적 규모가 큰 해식동[파랑의 침식으로 형성된 동굴]이 약 15개 있으며, 소규모의 만입지에는 자갈 해안이 발달해 있다. 섬의 정상부에는 동백나무와 해송, 후박나무 등이 자란다.

두도에는 후기 백악기[약 8,000만 년 전] 유천층군과 다대포층(多大浦層)이 분포되어 있으며, 이 층의 쇄설성 퇴적암으로부터 공룡알, 공룡알 둥지, 조각류 공룡 배아[embryo] 화석, 육식 공룡과 초식 공룡의 싸움터 유적, 새 화석, 겉씨식물, 양치식물 잎 등 동식물 화석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또한 조유석 해식 동굴, 해식애, 해안 단구, 파식 대지, 풍화혈 구조, 해안 자갈과 모래 등 지형 자연사 유적이 즐비하여 국가적 보물로 평가되고 있다. 두도 바로 북쪽으로는 천마산[234m]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가 바다와 맞닿아 있다.


[현황]
고도 59m의 두도는 부산광역시 서구에 속한 섬으로, 암남 반도의 암남 공원에서 서남쪽으로 500m 떨어져 있다. 대부분이 바위로 되어 있으며 넓이는 1만 9080㎡이다. 부산지방해운항만청에서 관리하고 있는 무인 등대(無人燈臺)가 설치되어 항해하는 선박의 길잡이가 되고 있으며, 1972년 12월 20일 건설부 고시 제555호로 도시 자연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 공원은 다양한 초본류와 후박나무, 팽나무, 동백나무, 삐죽이, 해송 등 활엽수가 자생하고 있고, 환경 조건이 육상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형성하는데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두도는 육지와 가까워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섬이다. 두도에서 많이 잡히는 물고기로는 노래미, 뽈락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북쪽으로는 기암절벽의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최상의 도심 공원인 암남 공원이 있고, 암남 공원을 지나면 송도 해수욕장이 보인다. 서북쪽으로는 감천항이 인접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국제 수산물도매시장이 보이네요,

*두도 전망대에서 막걸리 한병과 떡.과일로 점심을 패스.

*두도 전망대 전경.

*조형물 앞에서(숨 쉬는돌)

*잠깐의 휴식.

*

*갈맷길 안내도.

*암남공원 후문을 향하여...

*감천항이 보이네요.

*이제 암남공원 후문이 가까이...

*암남공원 후문을 벗어나면서 전봇대 상부의 모습.

*후문을 나오면 우측으로 진행 앞에는 한양프라자 건물이 있네요.

*조금진행하면 우측으로 진행 언덕으로 올라요.

*산길을 걸어면서 바라본 부두가의 냉동창고들의 모습.

*서구 묘목장을 지나가요.

*아래로 감천동이 보이네요.

도로를 따라 계속진행 흥일수산도 지나고,

*좌측으로 이런 형태의 펜스가 있네요.

*사하구 소방소도 지나구요.

*건너편에는 우리마트입간판이 있는 대형 건물이 보이네요 좌측으로 계속.

*좌측으로 공원이 보이네요.

*앞에는 사하구국민체육센터 건물이 보이네요 좌측으로 진행.

*앞에 보이는 성보냉동창고를 앞에두고 지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