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걷기

남파랑길 34코스(하이면사무소~삼천포대교 사거리) 10.2km

문수산 아래 2020. 9. 19. 21:22

*제 목 : 남파랑길 34코스 (하이면 사무소~삼천포대교 사거리))10.2km

*일 자 : 2020년 09월18일 (금요일) 흐림.기온 22도~27도

*누구와 : 찰떡부부

*코 스 : 하이면사무소~남일대 해수욕장~진널전망대~삼천포항~삼천포대교 사거리(10.2km:시간)

 

*이번주 일정을 17~18예정이 였는데 18일 비예보로 18~19일 일정으로 남파랑길34~35코스

 걷기를 위해 울산에서 출발 그런데 비가 조금씩 내린다.

 두시간여를 달려 삼천포대교 공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택시로 출발지 하이면 사무소도착

 10시50분 34코스 출발 합니다. 오늘은 거리가 10.2km로 부담없은 거리라 가볍게 출발합니다

 하이면사무소에서 남일대 해수욕장입구 정류소까지 위험한 도로로 걸어야 하므로 조심이 필요합니다.

 

*하이면사무소 입구 34코스 시작점 패널.

*10시50분 34코스 시작점 하이면사무소 앞에서 출발합니다.

*하이면 복지회관앞을 지나가요.

*하이면사무소에서 도로를2.5km 정도 인도가 없은 길을 걸어가요 .

*도로로 걷는 우측으로 펼쳐진 농촌마을의 풍경과 황금벌판.

*하이면사무소를 출발해 남일대 해수욕장입구에서 좌측으로 진행.

 34코스 안내판이 남일대 해수욕장 버스정류소옆에 있습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고 지나쳤네요.

*남일대 해수욕장 주차장입니다.

*남일대 해수욕장입구의 빨간공중전화 부스.

*빨강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 한통하고 가요.

*남일대 해수욕장의 전경.

위치

경상남도 사천시 남일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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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코끼리가 물을 먹고 있는 듯한 절묘한 코끼리바위는 사천시의 관광 명물이며, 이곳의 남일대 해수욕장은 맑고 깨끗한 바닷물, 부드러운 모래, 울창한 숲으로 어우러진 진널전망대와 낚시터가 주변에 있어 관광객이 상시 붐비고 있는 곳이다. 해수욕장 개장 기간 중에는 여름 해변축제인 해변가요제와 바다영화제가 열리고 있다. 인근 주변 명소로는 동양 최대의 다리인 창선. 삼천포대교와 한려해상국립공원을 둘러볼 수 있는 유람선 관광이 있다.

*최치원의 범해.

책소개

 

당나라 조기 유학의 시초 최치원을 만나러 가다

 

통일신라말기 당나라 조기 유학생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최치원의 생애와 사상을 소설로 재구성했다. ‘황소의 난’ 때 <토황소격문>으로 문명을 떨친 당대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의 당시 상황도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책에는 최치원을 비롯해서, 헌강왕. 진성여왕. 김가기. 최승우. 진훤. 선종과 당나라의 고병장군. 고운. 배찬. 두순학. 황소. 왕선지 등 역사상 흥미로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세계의 중심국가였던 당과 신라를 오가면서 구세계의 몰락을 목도하고 새로운 세상의 태동기를 예감한 최치원은, 시무십조(時務十條)를 조정에 올리나 그 실현을 보지 못하고 산야를 떠돌다 신화처럼 사라지고 만다.

대사상가이지 대정치가이기도 한 그는 또한 우리 문화의 기본을 풍류로 파악한 최초의 한류선도자이기도 하다. 뮤지컬 <최치원>의 원작소설이다.

[출처] 최치원의 범해|작성자 newmunhak

 

*남일대 해수욕장의 사랑의 열쇄.

*남일대 해수욕장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 본 남일대 해수욕장의 전경.

*남일대 해수욕장 전망대에서 바라 본 코끼리 바위의 모습.

*길이 앞에 보이는 출렁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현재는 출입 금지라 도로로 따라 가야 합니다.

*전망대에서 코끼리 바위를 배경으로 인증샷.

*남일대 해수욕장에서 인증샷.

 

*코끼리 바위와 멀리 삼천포화력 발전소의 모습.

*해안 산책로에서 바라 본 해안가의 바위.

*지금걷고 있는 해안 산책로가 진널해안산책로 이네요.

*진널 전망대 도착.

*전망대에서 바라 본 삼천포 시가지의 모습.

*진널 전망대 공원이 너무나 깨끗하게 관리가 되고있어 보기가 넘 좋아요.

*해안가에는 보세구역이 설치되어 있어요.

*여기서 부터는 삼천포 음식특화거리 입구.

*빨강등대 이쁘요.

*삼천포아가씨 노래비.

 

*해안가의 조형물.

*노산공원에 설치된 삼천포시인 박재삼의 시비.

*시인 박재삼

출생사망

1933년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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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춘향이 마음』

『춘향이 마음』

1950년대에 한국 문학은 폐허 위에서 언어를 잃어버린 채 암중 모색의 시간에 빠져든다. 우리 나름의 문학에 신경을 쓰지 못한 이 혼돈의 연대가 저물 무렵, 한국 시단은 박재삼(朴在森, 1933~1997)이 빚어낸 토속적 미학의 언어와 만나게 된다. 박재삼은 1960년대에 접어들어 김소월 · 서정주로 이어지는 토속적 미학과 음률을 되살려 절창의 서정시를 뽑아낸다. 그의 서정시는 자연 교감의 삶과 정한(情恨)의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토속적 미학과 음률을 되살린 서정시를 선보인 박재삼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광호는 박재삼의 시를 언급하며 외래어와 관념어를 남발하던 당시의 유행적 경향이 “박재삼 시의 생기 있는 어조와 구어(口語)에 대한 친화력”을 돋보이게 했다고 짚어낸다. 그는 덧붙여 “박재삼의 시는 한국 현대시가 참된 형상력을 얻기 위해서는 한국의 내재된 언어 감각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과 재래적인 정서가 결코 일방적으로 배제됨으로써 극복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반성을 가능케 했다.”각주1) 고 말한다. 박재삼이 줄기차게 읊조린 서정시의 정서적 근원은 여러 평론가가 입을 모아 말하듯이 ‘한의 정서’다. 이런 한의 정서는 여요(麗謠)와 시조 및 가사에서 흘러나와 김소월 · 서정주가 이어온 한국 전통시에서 하나의 맥락을 이루고 있는 여성주의적 화자의 정서에 젖줄을 대고 있다. 박재삼의 시는 외래어와 설익은 관념어에 의해 오탁된 모국어의 순결성을 눈부시게 되살려낸 것으로 평가된다.

박재삼 시의 중추를 이루는 ‘한’은 시인의 생활 환경과 교육 과정에서 비롯된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시인이 유년기를 보낸 삼천포 시절에 그의 집안은 아주 가난해서 어머니는 생선을 팔러 다녔고, 아버지는 지게 품팔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지내는데, 이는 타고난 낙천성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워낙 쪼들리며 살아 책을 사볼 수가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는 책을 빌려다가 공책에 베껴 외우는 것으로 갈음한다. 어린 시절 내내 시골의 자연 속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자란 것이 그의 시를 한의 응어리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뒷날 그가 의식적으로 시작 활동을 하면서 이런 면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박재삼은 1933년 4월 10일 일본 도쿄에서 막노동을 하던 아버지 박찬홍(朴贊洪)과 어머니 김어지(金於之)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난다. 3년 뒤 귀국한 그의 가족은 어머니의 고향인 경남 삼천포에 자리를 잡는다. 삼천포에서 살 때 그의 아버지는 막일을 나가고 어머니는 두부나 생선을 떼어다가 파는 도붓장수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박재삼의 육필 시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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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박재삼은 가난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제때 못 하고 삼천포여자중학교의 사환으로 들어간다. 그는 이 때 마침 삼천포여중의 교사로 있던 시조 시인 김상옥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그를 시의 세계로 이끄는 운명적 계기가 된다.

박재삼은 이듬해 삼천포중학교 병설 야간부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2년 뒤 주간 중학교로 옮긴 그는 제1회 영남 예술제(개천 예술제) ‘한글시 백일장’에서 시조 「촉석루」로 차상을 받는다. 이 때부터 그는 같은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한 이형기와 교유하게 된다. 4년제 중학 과정을 마치고 1951년 삼천포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한 그는 1953년 같은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다. 같은 해 그의 시조 「강(江)물에서」가 모윤숙의 추천으로 『문예』 11월호에 발표된다. 박재삼은 곧 김상옥이 다리를 놓아줘 잡지 창간을 준비하고 있던 ‘현대문학사’에 취직한다. 그는 현대문학사에 다니게 되면서 시를 쓰는 일에 더욱 열의를 쏟는다. 그의 시는 날로 기량과 빛을 더해 1955년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섭리」 · 「정적」 등이 실린다. 이로써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 박재삼은 1956년 「춘향이 마음」을 발표하고, 1957년 ‘현대 문학 신인상’을 받기에 이른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을 보것네. // 저것 봐, 저것 봐, / 네보담도 내보담도 /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 소리죽은 가을강(江)을 처음 보것네.

1961년 구자운 · 박성룡 · 박희진 · 성찬경 등과 ‘60년대 사화집’에 참여한 박재삼은 이듬해인 1962년 신구문화사에서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을 펴낸다. 위의 시는 『춘향이 마음』에 수록된 시인의 절창 가운데 하나인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다. 3연 12행의 자유시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시는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토속적 민속주의의 정서에 녹여 매우 유려하게 보여준다. 해 저무는 가을날 산등성이에 앉아 듣는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는 까닭 모를 찬연한 슬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만, 더 깊은 곳에는 우리네 순결 무구한 심성의 저 근원 속에 깃들여 있는 한의 정서가 자리잡고 있다. ‘가을 햇볕’과 ‘불빛’은 ‘울음’과 ‘서러움’을 마냥 칙칙한 것만은 아닌 따뜻함과 밝음을 머금은 정서로 만드는 데 이바지한다.

「울음이 타는 가을강」에 빼어난 이미지로 제시된 ‘울음’과 ‘서러움’은 박재삼이 노래한 바 있는 ‘춘향’과 ‘남평 문씨(南平文氏) 부인’ 같은 우리 겨레의 여성적 화자의 삶이 내재화한 보편적 한과 슬픔을 연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박재삼의 ‘슬픔’은 가난과 짓밟힘을 삶의 숙명적 조건으로 받아들인 조선 시대의 서민이 겪던 애환의 세계와도 일맥 상통한다.

자연 교감의 삶과 정한의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박재삼의 서정시들이 실린 〈춘향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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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에 박재삼은 이미 결혼을 해서 슬하에 딸과 아들까지 둔 가장의 몸이었다. 그는 이 무렵 오랫동안 다니던 현대문학사를 그만두고 『문학춘추』와 『바둑』 등의 잡지사에 적을 두고 있다가 『대한일보』 기자 생활을 하며 가족을 부양한다. 1967년 그는 남정현의 「분지」 필화 사건 공판을 보고 나오던 길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여섯 달 가량 입원한다. 겨우 30대 중반의 나이에 고혈압으로 쓰러진 것이다. 다행히 병상에서 일어난 시인은 1970년 두 번째 시집 『햇빛 속에서』를 내놓는다.

먼 나라로 갈까나 / 가서는 허기(虛飢)져 / 콧노래나 부를까나. // 이왕 억울한 판에는 / 아무래도 우리 나라보다 / 더 서러운 일을 / 뼈에 차도록 / 당하고 살까나. // 고향의 뒷골목 / 돌담 사이 풀잎모양 / 할 수 없이 솟아서는 / 남의 손에 뽑힐 듯이 뽑힐 듯이 / 나는 살까나.

이 「소곡(小曲)」에서 보는 대로 박재삼의 시 세계는 여전히 ‘서러움’에 물들어 있다. 그 서러움은 “당하고”만 살던 억울함의 누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물림하는 가난, 거듭된 피침으로 강요당한 수난, 크고 작은 이별이 겹치며 우리네 삶은 수심을 떨쳐낼 겨를이 없는 것이다. 박재삼 시의 한의 미학은 바로 밖에서 강요하는 슬픔과 설움의 능동적 수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이에 저항하거나 복수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에 순응하며 살려는 서민 의식의 깊은 곳에 자리잡은 애상성을 길어올려 노래하는 것이다. “남의 손에 뽑힐 듯이 뽑힐 듯이” 살아보려는 태도는 지나치게 피동적이고 나아가 피학적이기까지 하다. 박재삼의 시에서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이 원한과 복수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런 한을 속으로 삭이며 울음으로 풀어내는 것이 박재삼 시의 방식이다.

박재삼 시의 역정에서 『춘향이 마음』이나 『햇빛 속에서』가 주로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과 생활 형편에 바탕을 둔 한의 정서를 형상화한 것이라면, 제2기에 나온 『천년의 바람』이나 『어린 것들 옆에서』는 구어체로 풀어낸 애달픈 한의 심정을 주변의 나무와 풀잎과 바다와 바람 같은 자연을 통해 투사하고 있다.

한국인의 역사 경험과 생활 형편에 바탕을 둔 한의 정서를 형상화한 두 번째 시집 〈햇빛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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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 별까지의 / 거리 말인가 /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 사랑하는 사람과 / 나의 거리도 / 자로 재지 못할 바엔 /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 이것들이 다시 / 냉수 사발 안에 떠서 / 어른어른 비쳐오는 /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 시방 갈증 때문에 / 마실 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위의 시 「아득하면 되리라」에서 보듯이, 이 무렵의 작품에서는 막연하고 추상적이던 시점의 주체가 ‘나’로 복권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한의 정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동양적 달관과 허무주의적 체념이 정서의 바탕을 이루고 있어 시 세계의 변화는 느끼기 어렵다. 민족 정서에 뿌리를 내린 채 시의 가지를 펼친 미당 서정주가 고대의 설화와 샤머니즘을 향해 나간 것에 반해, 설화적 · 원형적 심상의 공간에서 출발한 박재삼은 현실적 · 구체적 공간으로 돌아와 ‘일상의 체험’을 품어 안는다. 「아득하면 되리라」에서도 화자와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아득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해와 달과 별’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노라면 그것이 응어리가 되어 독한 원한이나 복수심으로 맺힐 만도 한데, 시적 화자는 그저 담담할 따름이다. 그 ‘아득한 거리’를 어쩔 수 없어 ‘냉수 한 사발’ 마시는 것으로 체념하고 제가 감당해야 할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문에 바둑 관전기를 쓰거나 출판사 등에서 일을 거들며 생계를 이어가던 시인은 1972년께부터 직장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 홀가분하게 지내며 시 쓰는 일에 열중한다. 새로 얻은 여유와 집중 속에서 그는 거의 한 해에 시집 한 권씩을 내는 결실을 일군다.

제3시집 『천년의 바람』(1975), 제4시집 『어린 것들 옆에서』(1976), 제5시집 『뜨거운 달』(1979), 제6시집 『비 듣는 가을 나무』(1981), 제7시집 『추억에서』(1983), 제8시집 『대관령 근처』(1985), 제9시조집 『내 사랑은』(1985), 제10시집 『찬란한 미지수』(1986), 제11시집 『사랑이여』(1987), 제12시집 『가을바다』(1987), 제13시집 『해와 달의 궤적』(1990), 제14시집 『꽃은 푸른 빛을 피하고』(1991), 제15시집 『허무에 갇혀』(1993), 제16시집 『다시 그리움으로』(1996) 등이 그가 이 시기에 거둔 열매들이다. 시인이 죽은 지 한 해 만인 1998년에는 민음사에서 『박재삼 시 전집』이 간행된다. 그는 시에 매달려 사는 동안 문교부 주관 문예상(1967), 제10회 한국 문학 작가상(1983), 인촌상(1991) 등을 받는다.

구어체 속에 애달픈 한의 심정을 자연을 통해 투사하고 있는 〈천년의 바람〉과 〈어린 것들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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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에 갑작스런 고혈압으로 한 번 쓰러진 박재삼은 1980년께 다시 고혈압과 위궤양이 겹쳐 한동안 입원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 때도 병상에서 기적적으로 소생해 불편한 몸이지만 크게 구애받지 않고 바깥 활동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로서는 지병조차 죽을 때까지 함께 가야 할 벗으로 여겨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가난했지만 타고난 낙천성과 무욕한 마음 때문에 구김살이라곤 없었고, 후배들에게 늘 소탈한 모습을 보이던 시인으로 남는다.

박재삼은 1995년 백일장 심사 도중에 신부전증으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한의 미학’을 유려하게 제련해 내놓던 시인은 2년 여에 걸친 힘들고 괴로운 투병 생활 끝에 1997년 6월 8일 숨을 거둔다.

1990년 미국 뉴욕의 허드슨 강변에서

왼쪽부터 작가 김호운 · 박재삼 · 이관순

*노산공원의 이순신 동상.

*노산공원을 가로질러 가요.

*삼천포 아리랑 시비(최승량)

*노산공원의 박재삼 문학관.

*노산공원에서 바라 본 삼천포 시가지의 모습.

*이제 34코스 끝지점 삼천포대교가 보이네요.

*오늘의 종착점 대방교차로 도착.

*34코스시작 10시50분 출발~대방교차로 도착15시30분 (4시간40분소요).

*오늘도 수고 했어요.

 

*남파랑길 누적거리 : 528.8km + 10.2km = 540km

*거 리 : 울산~ 삼천포대교 = 편도170km 누적6,251km+170km = 6,421km

*경 비 : 통행료= 통행료 9.300원 + 캠핑장35,000원 +택시8,000원 = 52,300원

*누적 지출경비 : 1,130,500원 + 52,300원 =1,182,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