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갈맷길 3-1코스 오륙도 유람선 선착장~부산진시장
*누구와 : 동네 친구들과 5명(임무용,방동철,손영학,서태석,안진업)
*언 제 : 2021년 03월 18일(목요일),흐림,5도~18도,미세먼지 좋음
*코 스 : 오륙도 선착장~신선대~UN기념공원~구 외국어대학~부산진 시장(5시간40분)
*친구들과 오전9시에 출발지 오륙도 유람선 선착장으로 부산~울산 고속도로와 광안대교 통해
오륙도 선착장 공영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10시에 힘차게 출발합니다.
오늘은 바람이 출발부터 심하게 불고 날씨도 약간 쌀쌀한 느낌은 느끼며 부산진 시장을 향하여
친구들과 오손도손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신나게 힘차게 걷기를 시작합니다.
오늘도 무사히 도착지에 도착할것은 마음으로 기원하며 출발합니다.
*친구들과 갈맷길3-1코스 오륙도 유람선 선착장을 출발 도로를 따라 신선대 방향으로 진행 중 멀어지는 오륙도의
모습 오늘은 바람이 심하게 불어 걷기에 조금은 지장을 주네요.
*오륙도에서 도로를 따라 진행.
*진행 중 건너편에는 오륙도 초등학교 앞을 통과 중.
*진행길 왼편으로 백운포가 보이네요 지금은 여기에 해군기지가 있어요.
[정의]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동쪽 해안 절경지의 바다에 흰 구름[白雲]이 피어오르는 모습에서 백운포(白雲浦)라 불렀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개항기에 용호동의 분개(盆浦) 마을 등지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하여 백운포까지 거주지가 확대되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은 처음에는 분개 마을 사패(四牌)[분개 마을을 4개로 나누며 네 번째라는 의미]로 불렸으나, 언젠가부터 포구[신선대와 용호 2동 승두말 사이의 포구]의 이름을 따서 백운포 마을이 되었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동래부 남촌면 분포리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동래부 용주면 용호리에 속하였으며, 1957년 부산시 부산진구 용호동으로, 1963년 부산직할시, 1973년 부산직할시 대연출장소, 1975년 부산직할시 남구 용호동, 1995년 부산이 광역시로 바뀌면서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백운포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백운포 마을의 북서쪽에는 용당동과 용호동의 경계에 있는 용마산이 있으며, 북동쪽에는 장산봉이 있다. 마을은 두 산지 사이의 남쪽 해안가에 위치한다. 백운포 남쪽 바다는 고기가 잘 잡히지 않으나 깊고 깨끗하며, 계절에 따라 고등어·전갱이·갈치·메가리[전갱이 새끼]·학꽁치 등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북쪽 산지의 골짜기로는 논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고, 바다는 험하여 어업은 성행하지 않았다. 앞바다는 기반암이 나출되어 있고, 주먹만한 둥근 자갈로 이루어진 자갈 해안으로 자갈돌이 울면 비바람이 많이 친다고도 하였다. 현재는 매립되며 사라져 과거의 형태를 찾을 수 없다.
[현황]
백운포가 매립되면서 논밭 둘레에 있던 차돌이 공사용으로 없어지면서 파도와 바람을 막기 어려워져 점차 논밭이 없어지고 인가도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는 바다와 접한 해안 경사지에 10여 곳의 횟집만이 남아 있다. 골짜기 해안가는 매립되어 백운포 체육공원이 조성되었고, 앞쪽 방파제는 낚시를 즐기는 시민들이 애용하고 있다. 용마산 남쪽 산자락에는 천주교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친구들과 일주일에 한번씩 이렇게 하루를 같이 할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앞에는 로타리와 늘빛교회 건물이 보이네요.
*로터리에 갈맷길 이정표 자세히 안내하고 있네요.
*로터리에서 11시방향 신선대 가는 길 오른쪽으로 천주교 묘원이 보이네요.
*신선대 공원 주차장에는 차들로 만차네요. 평일인되.....
*신선대 입구 갈맷길 안내도.
*신선대 입구에서 왼쪽으로 한바퀴 돌아 봅니다.
*진달래꽃이 참하게 피었어요.
*신선대 유원지 무제등 정상에서 주위를 감상 좋아요.
*무제등 정상에서 바라 본 오륙도 방향.
*정상에서 바라 본 신선대 부두와 부산항 대교의 모습.
*무제등 정상에서 잠시의 휴식을 갖고 친구들의 우정을 다시 확인.
*부산항과 영도쪽 볼거리 구경 중 오랜만에 왔어 그런지 새로운 모습도 보게 되네요.
*저도 일행중에 포함 한컷하고 갑니다.
*휴식의 끝 출발을 하면서.
*누군가가 동백꽃 하트를 선사하네요.
*나도 꽃이다 개나리도 만개를 했네요.
*신선대 전망대 오름길.
*신선대 전망대에서 바라 본 부산항과 부산항대교의 모습 시원하네요.
*신선대 컨테이너 부두의 모습.
*신선대 전망대에서 바라 본 오륙도의 선명한 모습.
*신선대 전망대에서 친구들의 한장면 .
*갈맷길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부산의 모습을 많이 보고 갑니다.
*부산항의 분주한 모습 .
*세계로 향하는 우리의 생산품을 신선대 컨테이너 부두에서 선적을 기다리는 모습.
*신선대 인근에는 브로틴 기념비도 있다.
1797년 10월,월리엄 브로우턴 함장과 승무원들은 영국 해군 소속 프로비던스호의 부속선을 타고 이 곳 용당포에
상륙하여 주민들과 접촉을 가졌던 최초의 영국인 들이였다.
이 기념비는 월리엄 브로우턴 합장의 부산 방문 200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부산항을 정밀하게 측량 관측했던 지점에
건립 되었다.
*신선대 산책로를 한바퀴 돌아 다시 주차장 도착 벌써 양지바른쪽 벗나무는 꽃망울을 하나,둘 보이네요.
*신선대 공원 주차장 입구에 무제등 공원 입간판.
*신선대에서 다시 도로를 진행.
*끈질긴 생명력 인도의 보도블록 틈새로 피어난 노랑 민들레꽃 이쁘게도 피었네요.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자동차 검사소 지나 로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
*동명대학교 앞을 통과.
*동명대학교 정문의 모습.
*이제 걷고 걸어 평화공원 시계탑앞 도착.
*평화공원 내부의 모습.
*평화공원 안에 갈맷길3~1중간 인증대 인증을 하고 갑니다.
*사람도 인증합니다.
*평화공원 광장의 조각탑.
*평화공원 광장의 소나무 조경.
정의]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있는 공원.
[건립 경위]
세계 유일의 재한 유엔 기념 공원은 2005년 APEC 정상 회의 때 주요 인사의 방문지에 포함된 곳이었다. 그러나 공원의 동남쪽 일대는 고철 처리업, 자동차 정비업, 화물차 주차장, 화물 운송업 등 소음, 분진, 토양 오염을 유발하는 혐오 산업 51개 업체가 난립하여, 도시 미관을 저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6·25 전쟁 참전 유엔군 전사자들이 잠들어 있는 UN 기념 공원과 연계하여 인근의 환경 불결지에 평화의 상징 공원을 조성하여 자유 수호의 뜻을 기리고, 주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2004년 6월 평화 공원 조성 계획을 수립하고, 2005년 4월에 착공하여 2005년에 개장하였다.
[구성]
평화 공원의 총면적은 3만 2893㎡이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평화의 광장이 있으며 바닥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그 둘레를 둘러싸고 조경·수경 시설 등을 비롯하여 13종 1,600점의 소나무 등 수목 3만 3620주, 초화 3만 3140포기가 식재되어 있다. 또한 공원에는 생태 연못, 잔디 광장, 파고라, 조깅 코스, 주차장 등 주민의 휴식 및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현황]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677번지 일대에 있는 평화 공원은 UN 기념 공원 근처에 있는 근린공원으로 평화 공원이라는 이름도 UN 기념 공원과 연계하여 지어진 것이다. 공원은 24시간 이용이 가능하며, 주변의 부산 문화 회관, 부산광역시박물관, UN 기념 공원, UN 조각 공원 등과 연계되어 문화 공간의 벨트화를 이루고 있다.
*평화공원을 둘러보고 조각공원 가는 길.
*평화공원 조각품 전시장을 한바퀴 둘러 봅니다.
*우리 아마추어는 작품을 이해 하기가 어렵네요.
*부부상 인가.
*유엔참전 순국 기념공원으로 진행.
*유엔기념공원.
부산광역시 남구에 있는 해방 이후 에 조성된 한국전쟁 관련 공원. 기념공원. 등록문화재.
목차접기
개설
부산 유엔기념공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초에 유엔군 전사자의 공동묘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처음 조성될 때는 그 명칭이 유엔기념묘지(UNMCK: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였다가, 2001년에 유엔기념공원으로 변경되었다. 유엔기념공원의 관리주체는 유엔군사령부에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으로 바뀌었다가, 1974년 2월 16일 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CUNMCK: Commission for the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로 변경되었다.
역사적 변천
1950년 10월 중공군이 참전하여 전쟁의 양상이 장기화되면서, 유엔군의 사상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1951년 1월 18일 유엔군사령부는 유엔군 묘지를 조성하기로 하고 대상지를 오늘날의 부산시 남구 대연동으로 결정했다. 당시 대연동은 행정적으로 경상남도 동래군 당곡리에 속했다. 이에 유엔군사령부는 4월 5일 묘지를 완공하고 개성, 인천, 대구, 대전, 밀양, 마산 등지에 가매장된 전사자 유해를 이장하기 시작했다.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미군은 미 제8군의 전투정보 지휘소인 CIC방첩대에 소속된 1개 대대를 투입하여 시신수습부대를 결성했다. 그리고 시신 수습을 위해 따로 인력을 배치할 수 없었던 다른 참전국의 전사자도 미군의 시신수습부대가 수습을 담당했다. 다만 영국군의 경우는 1951년 8월 경 5명 규모의 ‘시신처리팀(Recovery Team)’을 가동했다. 한국군의 경우 시신 수습을 위해 영현부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이들은 시신 수거에서 안장까지의 절차를 전담했는데, 이를 위해 일선 지역의 수색과 후송 업무, 일선과 후방의 연락 업무, 유엔묘지의 등록 업무 등의 역할을 분담하여 처리했다.
개성 등지에서 유엔기념공원으로 이장된 유해와 일선에서 수습된 시신은 신원을 확인한 뒤, 확인된 시신은 유엔기념공원에 임시로 안장 후 배를 통해 본국으로 송환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시신은 일본 요코하마로 보내 정밀 확인을 거친 다음 유엔기념공원으로 다시 수송해오는 과정을 거쳤다.
1950년대 중반까지 미군은 1개 중대 병력을 유엔기념공원에 상주시키면서 시신의 안장과 송환을 진행했으며, 미군 외에 영국, 터키, 호주, 한국의 연락 장교가 이를 도왔다.
1950년대를 통해 후송, 신원 확인, 본국 송환이라는 분주한 과정이 집행되었다. 이에 1950년대 말에 이르면 본국으로 송환되는 유해의 송환 업무가 거의 마무리 되었다. 미군 전사자가 모두 송환된 1950년대 말에 이르러, 한 때 1만 여기에 이르던 묘지의 안장자 수는 2천여 기로 줄어들게 되었다.
내용
1955년 8월 19일 룩셈부르크를 제외한 한국전쟁에 참전한 15개국은 부산의 유엔군 묘지를 항구적인 유엔 묘지로 만들기 위해, 유엔총회에 ‘한국에 유엔기념기지를 설립 유지하는 문제’에 동의할 것을 제안하는 서한을 유엔사무총장 함마슐드(Dag Hammarskjold)에게 전달했다. 여기에는 유엔 묘지를 성역화 할 것과 이를 위한 유엔의 예산지원이 포함된 결의안이 첨부되었다. 9월 30일 유엔총회는 한국에 유엔묘지를 설치하자는 제안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유엔총회의 결의가 있은 지 두 달 후인 11월 15일 한국 국회는 “국제연합군 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영구히 기념하고 그 무훈을 선양하기 위하여, 국제연합군 묘지를 성지로 설정할 것을 국제연합 총회에 건의하도록 정부에 건의한다.”는 건의문을 채택했다.
1955년 무렵 유엔기념공원을 법률적 근거를 가진, 항구적인 시설로 만들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956년 8월 23일에는 유엔 측이 협정의 초안을 제시하면서 한국과 유엔 간에 교섭이 개시되었다.
유엔기념공원은 묘지로 조성된 지 9년만인 1959년에 유엔과 한국정부 사이의 국제 협정을 법적 근거로 하여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이 때 유엔기구로서 유엔기념공원의 관리 업무를 맡게 된 것은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이었다.
이 해 1959년 8월 9일 외무부장관 조정환은 유엔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내어, 부산시 근처 ‘당곡리’에 소재하는 묘지의 대지를 무상으로 기증하기로 한국 정부가 결의하였음을 통지했다.
1959년 11월 6일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조정환과 유엔사무총장 함마슐드가 정식 서명함으로써 ‘재한 국제연합기념묘지의 설치 및 유지에 관한 대한민국과 국제연합간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12월 1일 국회의 비준 동의를 거쳐, 12월 11일 한국이 국회 비준을 유엔 측에 통보함으로써 이 협정은 발효되었다.
이 협정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유엔기념공원이 조성된 토지를 ‘영원히 무상으로’ 유엔에 기증한다는 것이며, 해당 토지에 대해 유엔이 가지는 권리는 ‘완전한 소유권’이라는 점이다. 이 협정을 근거로 1960년 3월 31일부터 유엔기념공원은 유엔 산하의 시설이 되었다.
1973년 11월 21일 유엔총회 의장이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해체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로써 유엔기념공원을 관리할 주체도 1974년 2월 16일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에서 재한유엔기념공원국제관리위원회(이하 국제관리위원회)로 변경되었다. 국제관리위원회는 유엔기념공원에 안장자를 가진 나라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는데, 참전국 가운데 전사자를 안장하고 있는 호주,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남아공화국, 터키, 영국과 카투사를 안장하고 있는 한국이 포함되었다.
유엔기념공원의 관리 주체가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에서 국제관리위원회로 변경된 것은 이 시설이 이제 유엔과 무관한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1951년 묘지가 조성될 당시부터 1974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이 해체될 때까지 유엔군사령부와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유엔묘지 관련기록은 현재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유엔기념공원은 2006년 부산에서 개최된 APEC을 계기로 대대적으로 시설을 개보수하고, 전몰장병 추모명비를 비롯한 새로운 시설을 추가하였으며, 녹지 시설을 재단장하는 등 전반적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2007년에는 근대문화재로 등록되었다.
특징
현재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안장자 수는 영국 885명, 터키 462명, 캐나다 378명, 호주 281명, 네덜란드 117명, 프랑스 44명, 미국 36명, 대한민국 36명, 뉴질랜드 34명, 남아공 11명 등 총 2,300명이다. 따라서 전사자를 안장한 나라는 영국, 터키, 캐나다, 호주, 네덜란드, 프랑스, 뉴질랜드, 남아공, 노르웨이 등 9개국과 한국을 합쳐 10개국이다.
먼저 한국인으로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36기는 모두 카투사(KATUSA)들이다. 카투사는 미군의 병력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이승만과 맥아더 사이에 이루어진 구두 협정으로 창설되었다. 카투사가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것은 이들이 미군에 배속되어 활동했기 때문이다.
미국인 안장자 36기는 모두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사망한 이들로, 대부분 퇴역한 뒤 주한 미군이나 국제기구 등에서 군속으로 활동한 퇴역군인이다.
*유엔기념공원에서 친구들의 단체 기념샷.
*멋지게 꾸며진 내부의 모습.
*유엔묘역.
*유엔참전 각국의 전사자 묘역.
*참전용사 4만명이 이국땅에서 우리를 위해 목숨바처 지켜준 이나라 우리가 영원히 평화의 땅으로 가꾸어 가야죠.
*경건한 마음으로 둘러봅니다.
*유엔공원의 조경이 너무 아름답게 잘가꾸어 있어 볼만 하네요.
*유엔공원 정문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보이는 곳.
*친구들도 각자 흩어져 이곳 저곳 구경하고 갑니다.
*유엔공원을 나와 우측육교위로 부산 문화원 방향으로 진행.
*부산 문화원 건물 좌측으로 진행.
*부산 문화원 광장의 조형물 .
*문화원 뒤쪽으로 나오면서 활짝핀 홍매화 정열적입니다.
*갈맷길과 남파랑길이 같은 코스로 진행되고 있어요.
*문현 교차로 방향으로 진행 우리는 도심을 통과 중.
*도로의 이정표 문현 교차로 방향으로 진행.
*성지 고등학교 앞에서 좌측 오르막길로 진행.
*아파트 공사로 진행길이 불편합니다.
*이날은 날씨가 무지 더워 오르막 오름에 땀좀 흘렸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가야 합니다 갈맷길 따라....
*고개 오르막 끝에는 문현동 재개발로 주위가 억망이고 빈집이 많아요.
*벗꽃이 만발.
*부산항과 부산항 대교의 모습.
*고개에서 우암동으로 내려 오면서 대한 불교 조계종 지장사 앞을 통과.
*우리는 많은것을 얻고 보고 갑니다.
*앞에는 우암동 주민체력단련장 건물앞 통과.
*도로를 따라 문현4동 방향으로 진행.
*골목길을 따라 고개길을 내려갑니다.
*문현4동 주민복합센터앞으로 진행.
*경사도가 심한 내리막길 내려가요.
*문현4동 곱창골목으로 진행 냄새가 죽입니다.
문현4동에는 일제시대에 형성된 재래시장과 가축시장이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시장에 장보러 온 사람들을 주 고객으로 하는 음식점들이 생겨 났다.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인근 도살장에서 나오는 고기 및 부산물을 재료로 하는 음식은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그 음식중 하나가 바로 곱창이다.독특한 맛과 푸짐한 양에 대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곱창을 전문으로 하는
가계들이 현재도 성업 중이다 보니 자연히"곱창골목"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문현4동 곱창골목을 너와 복작한 도심을 통과.
*주위에는 온통 고층 아파트들로 정신이 없어요.
*조용한 울산 변두리 시골에서 왔어 그런지 정신이 없다.
*여기가 강인지 바다인지 궁금합니다.
*부산진시장 육교에서 바라 본 서면방면의 도로.
*조선 통신사 역사관 앞 도착.
*조선통신사 역사관 건물의 정문 앞에서.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조선통신사를 알리기 위한 전시관.
[건립 경위]
조선통신사 역사관은 부산광역시가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널리 알리고 부산의 대표적인 역사 문화 관광 공간으로 개발하기 위해 자성대 공원 내 영가대(永嘉臺) 옆에 건립하였다. 공사는 2008년에 시작하여, 2010년 3월 20일 준공하고, 4월 21일 정식으로 개관하였다.
[구성]
조선통신사 역사관은 2층 건물 안팎에 상설 전시실, 3D 영상 홍보관, 행사 마당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1층에는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이해를 목적으로 제작된 영상을 보여주는 ‘3D 영상 홍보관’, ‘통신사의 정의 및 역할’, ‘삼사 임명식’ 등을 해설한 패널 등이 설치된 ‘전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에는 조선통신사가 오갔던 행로를 알 수 있는 지도와 모형, 통신사 일행이 타고 같던 배의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고, 일본 에도성[江戶城]에 들어가는 통신사 행렬을 재현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이밖에 2층에서 영가대로 이어지는 사이의 야외 공간에는 기념 촬영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현황]
조선통신사 역사관은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각종 자료와 모형을 갖추어 놓고, 조선통신사의 개념, 파견 경위와 목적, 여행 경로, 조선통신사를 통해 이루어졌던 한국·일본 문화 교류 등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콘텐츠와 멀티미디어 자료를 전시·운영하고 있다. 현재 조선통신사 역사관은 부산문화재단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월요일은 휴관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조선통신사 역사관을 뒤로하고 도로따라 진행.
*남문도매시장 앞으로 진행.
*오늘의 종착점 도착 일번지 커피집 바로앞에 3-1코스 종점 인증대 위치하고 있어요.
*오늘도 친구들과 갈먓길3-1코스 무사히 완주를 하고 인증대에서 수첩에 도장을 찍고
일번지 커피집에서 시원한 관일주스 한잔씩 하고 마무리 합니다.
오늘 봄날씨 답지 않게 더위로 조금은 고생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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