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1,800km)

서해랑길 18코스 (목포지방해양수산청 - 용해동주민센터)18km

문수산 아래 2022. 3. 6. 18:16

*언   제 = 03월 04일 금요일 맑음 종일 3~10도

*누구와 = 임무용,최현숙(부부)

*코   스 = 목포지방해양수산청~갓바위~삼학도공원~유달산~용해동주민센터 18km(6시간07분소요)

 

*어제 15코스 13km걷고 시간이 있어 18코스 시작점 수산청에서 1시간40분을 더걷고 마침표를 찍고 갓바위 주차장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아침을 일찍 해결하고 어제 이어걷기 삼학도공원 목포항쪽에서 출발 이어갑니다.

 어제가 우리부부 결혼38주년 기념일이라 저녁은 목포 맛집에서 간단한 회포를 풀었습니다.

 

코스개요

- 근대역사의 흔적을 따라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현재를 넘나드는 역사, 문화의 길
-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는 해넘이와 항구도시 목포의 모습을 감상하며 걷는 코스
- 바위와 수목이 어우러진 산길과 오랜 세월동안 전설과 사연을 둘러보며 걷는 길

* 서해랑길 17코스는 해남-영암대교를 지나는 코스로 해남-영암대교 개통 후 오픈될 예정입니다.

관광포인트

- 삿갓을 쓴 사람처럼 보이는 독특한 형상의 바위 '갓바위'(천연기념물 제500호)
- 바닷속 유물과 옛 어촌의 모습 등을 전시한 '해양유물전시관'
- 국제요트대회 및 해양문화행사를 개최하는 '목포요트마리나'
-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으로 쓰였던 목포진을 최대한 복원하여 조성한 '목포진 역사공원'
- 1898년 일본영사관의 설치로 만들어진 목포에서 가장 오랜된 건물을 전시관으로 운영 중인 '목포근대역사관'
- 유달산 서쪽 기슭에 위치해 다도해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낙조대'

여행자 정보

- 시점: 목포시 옥암동 목포지방해양수산청
교통편) 목포버스터미널에서 333번 버스 승차 '만남의폭포' 하차 도보이동
- 종점: 목포시 용해동 용해동주민센터
- 목포해상케이블카로 유달산과 목포 도심, 항구와 목포대교를 감상할 수 있음
- 평화광장에 있는 초대형 음악분수에서는 물과 빛, 음악의 하모니를 통한 아름다운 장관을 볼 수 있음

 

*18코스 출발점 목포해양수산청앞 서해랑길 안내판앞에서 신고합니다.

 혹시 주차는 수산청주차장에 하면됩니다 관리인 없읍니다.

*우리부부는 18코스 출발 인증샷하고 갑니다.

*18코스 18km무사 종주를 기원하면서 다시한번 마음을 다지고 종점을 향하여.....

*여기는 출발점 목포지방해양수산청 입구 입니다.

*수산청 건물을 왼쪽두고 포구를따라 내려갑니다.

*서해랑길18코스 시작점 패널입니다.

*수산청을 뒤로하고 바다쪽으로 진행합니다.

*포구에는 잠시 휴식중인 배위에 새한마리가.....

*포구따라 내려가 앞에 보이는 출렁다리를 오른쪽으로 건너 진행.

*출렁다리를 건너고 있어요.

*언제나 씩씩한 모습 좋아요.

*출렁다리에서 바라 본 출발점 방향의 모습.

*출렁다리 건너면 여기서부터는 "스토리가 있는 연인의 거리"를 진입합니다.

*목포앞 바다를 향하여 ......

*연인의 거리 조형물.

바다쪽에는 야간에 분수쇼를 할수있게 거대한 시설물이 보이네요.

*목포해상 춤추는 바다분수쇼장의 모습.

*뒤돌아 본 연인의 거리의 모습.

*목포 갓바위 입구 도착.

*갓바위 입구에서 바라 본 건너편의 모습.

*목포의 명물 갓바위의 한장면.

목포 갓바위

 

위치
전라남도 목포시 남농로 166-1 (용해동)

갓바위에는 중바위가 있고 삿갓바위가 있는데 보통 삿갓 바위를 보고 중바위 또는 삿갓바위라고들 한다. 바다 쪽에 있는 바위가 마치 스님 두 분이 삿갓을 쓰고 있는 것 같다 하여 갓바위라고 부르며 중바위는 훌륭한 도사스님이 기거 하였다 하여 중바위라 전해지고 있다. 갓바위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진리를 깨달은 경지높은 도사 스님이 영산강을 건너 나불도에 있는 닭섬으로 건너가려고 잠시 쉬던 자리에 쓰고 있던 삿갓과 지팡이를 놓은 것이 갓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월출산에서 도를 닦던 도사스님이 상좌스님을 데리고 목포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려고 축지법을 사용해서 영산강을 건너려다 상좌중이 잘못 따라와서 건너지 못하고 돌로 굳어졌다는 얘기도 전해 내려온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아주 먼 옛날 목포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아버지의 약값을 벌려고 집을 떠나 돈을 벌다가 아버지를 돌보지 않아 그만 돌아가시게 되었다. 이에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몇 날 며칠을 굶어가며 삿갓을 쓰고 하늘도 보지 않고 용서를 빌다가 돌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갓바위의 모습.

*갓바위의 모습을 감상 중.

*목포 갓바위의 중심 삿갓선 바위의 모습.

목포 갓바위

木浦─
시대문화재 지정성격유형면적소재지분야
현대
천연기념물 제500호
천연기념물
지명
큰 바위 높이 8m, 작은 바위 높이 6m
전라남도 목포시 용해동 산 86-24 인접해역
지리/자연지리

요약 전라남도 목포시 용해동 해안가에 있는 바위.

개설

2009년 4월 27일에 천연기념물 제500호로 지정되었다. 목포 갓바위는 서해와 영산강이 만나는 강의 하구에 위치해 있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풍화작용과 해식작용을 받아 만들어진 풍화혈(타포니, tafoni)이다. 갓바위 일대는 저녁노을이 비치는 바다와 입암산의 절벽에 반사되는 노을빛이 아름다워 일찍이 입암반조(笠岩返照)라 하였다.

명칭 유래

한 쌍으로 이루어진 갓바위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에 병든 아버지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한 아들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양지바른 곳에 모시려다 실수로 관을 바다 속을 빠뜨리고 말았다. 불효를 저질러 하늘을 바라볼 수 없다며 갓을 쓰고 자리를 지키던 아들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훗날 이곳에 두 개의 바위가 솟아올라 큰 바위는 ‘아버지바위’, 작은 바위는 ‘아들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갓바위는 바위의 모양이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삿갓을 쓴 사람의 모양이라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삿갓바위로도 불린다. 다른 하나는 영산강을 건너던 부처님과 그 일행이 잠시 쉬던 자리에 삿갓을 놓고 간 것이 바위가 되어 중바위(스님바위)라 부른다고 한다.

자연환경

갓바위의 암석은 화산재가 쌓여 형성된 응회암으로, 화산재 입자를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입자가 크다. 주요 구성광물은 석영·사장석·미사장석·흑운모·견운모 등이며, 특히 석영과 장석이 우세하다. 갓바위 일대로는 해안가를 따라 펼쳐진 바위에 풍화작용에 의해 형성된 풍화혈이 늘어서 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습기와 염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영산강이 흐르고 있어 염분이 성장함에 따라 입자들이 암석에서 떨어져 나가는 염풍화작용을 받아 암석의 입상붕괴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갓바위 해안지형은 전형적인 침식지형으로 해식절벽, 해식대지, 풍화혈 등의 지형이 발달해 있다.

해식절벽은 수직적 경사를 보이고, 기저부는 파도에 침식되었으며 벌집모양의 풍화혈을 볼 수 있다. 풍화혈은 수분이 암석 내부에 스며드는 균열 부분에 잘 발달하는데, 풍화혈이 생기기 시작하면 햇빛에 가려진 부분이 주변보다 훨씬 습하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풍화되면서 풍화혈의 규모가 커진다. 여기에 갓바위가 동남쪽을 향하고 있어 햇볕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도 풍화혈이 커지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에 따라 목포 갓바위의 원형이 점차 변형되어 가고 있다.

현황

갓바위는 두 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기는 큰 것이 8m이고 작은 것이 6m 정도이다. 목포8경의 하나이며, 2008년 4월에 영산강변을 따라 해상보행교가 설치되어 있어 바다 위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물위에 떠 있는 보행교는 298m 구간에 설치되어 있으며, 밀물 때 약 1m 정도 올라왔다가 썰물 때에는 바닷물을 따라 내려간다.

주변에는 목포갓바위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입구에는 ‘갓바위’라 새겨진 조형물이 있다. 파도와 해류 등에 의해 바위가 침식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자연학습장으로 자연경관의 관광은 물론 교육적 활용도가 크다.

*갓바위를 뒤로하고 데크길을따라 진행 

*데크길 끝에서 도로와 합류 좌측으로 진행 서해랑길 처음으로 이정표 발견 무척 반갑네요 .남파랑길에는 

 자주 보았는데 현재 진행형인가 봅니다.

*여기서 바다를 배경으로 잠시 흔적을 남기고 갑니다.

*도로따라 진행 도로 건너편에 목포 문예역사관 건물이 보입니다.

*진행길 좌측으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건물이 대단하네요.

*몇년 전에도 목포시 여행을 하면서 여기를 구경했던 기억이 나네요 건너편에는 목포 자연사박물관 건물이 보이네요.

*목포항 개향 100주년 기념탑.

*진행길 좌측으로 목포문화예술회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네요.

*문화예술회관앞에서 구름다리를 건너 진행.

*구름다를 건너면 만나는 소설가 박화성상을 볼수 있네요.

소설가 박화성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초대 한국여성문인회 회장을 지낸 소설가 박화성(朴花城.1904-1988)씨의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16일 오후 6시 서울 남산에 있는 문학의집.서울(이사장 김후란)에서 열린다.

문학의집.서울은 매달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음악이 있는 문학마당'의 제45회행사로 '박화성 작가의 밤'을 마련했다. 이 행사는 그동안 시와 음악을 결합한 '시인의 밤' 형식으로 개최됐지만 이번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은 소설가 박화성씨를 추모하는 특별무대로 꾸미기로 했다.

이날 박씨가 작사한 '들국화'를 소프라노 홍찬순이 부른다. 이 노래는 무용가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의 동생 안성현이 작곡했다. 작곡가의 형이 월북했다는 이유로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다.

이날 행사에는 '문인 가족'을 형성하고 있는 박화성의 아들과 며느리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언론인이자 평론가인 장남 천승준씨와 소설가인 며느리 이규희씨, 소설가인 차남 천승세씨와 평론가인 3남 천승걸 서울대 교수 등이 어머니를 회상하는시간을 갖는다.

박씨가 생전에 남긴 미발표 시조 '장수산을 바라보며' '석담구곡에서' 등 두 편을 박희영 시인이 이날 낭송하고, 평론가 서정자씨는 고인의 문학세계는 소개한다.

일제시대에 니혼(日本)여자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박씨는 1925년 「조선문단」으로 등단한 우리나라 신문학기의 대표적 여류문인이다. 60여년간 「백화」「고개를넘으면」「사랑」「벼랑에 피는 꽃」「거리에는 바람이」 등 장.단편 소설 100여편을 남겼다. 

 

*진행길 우측으로 목포문화관 건물이 웅장합니다.

*잠시 후 옥공예 전시관 건물도 눈에 들어 오네요.

옥장

玉匠
유형분야
개념용어
예술·체육/공예

요약 옥 종류의 돌을 이용하여 공예품을 만들어 내는 일 또는 그 일을 하는 장인.

내용

중요무형문화재 제100호. 우리 나라에서 옥은 이미 신석기시대의 함경북도 청진 농포동 유적, 웅기 서포항 유적, 고남리 패총 등지에서 관옥(管玉)과 곡옥(曲玉), 자모곡(子母曲) 등이 발견되어 보고된 바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비취에 가까운 옥이 나타나는 등 옥은 이미 고대 우리 나라 전역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삼국시대의 유적지에서 수없이 많은 옥이 출토되었다.

우리 나라·중국·일본 등지에서 옥공예가 일찍부터 발달된 이유는 중국에서 돌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옥을 오덕(五德)에 비유하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옥에서 온화한 광택이 있는 것을 인(仁)으로 상징하였고, 또 투명하고 맑은 빛깔을 의(義)로 상징하였으며, 두드리면 소리가 아름다운 것은 지(智)를 상징하고, 깨져도 굽히지 않는 성질을 용(勇)에 비유하였으며, 예리하면서도 상처를 내지만 절대로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을 엄(嚴)이라고 하여 사람들은 이 다섯 가지를 오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 옥은 ≪본초강목 本草綱目≫에서 말했듯이, 두드리면 맑고 깨끗한 소리를 내는 것과 색깔이 깨끗하여 돼지기름 굳은 것 같은 것이 진짜이다. 옥으로는 옥피리·옥경(玉磬) 등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만들어 연극에 사용하였고, 의례구(儀禮具)로서는 대규(大圭)·규장(圭璋), 장신구로는 옥비녀·옥가락지·옥구슬·패옥·옥새 등 많은 종류가 있다.

옥은 삼국시대부터 보석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았으며 왕이나 성골(聖骨)들만이 가지는 전용물이기도 하였다. 즉 ≪삼국사기≫ 잡지조(雜志條)에 따르면, 진골(眞骨) 대등(大等) 이하의 계급은 옥의 사용을 금하였던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옥장을 옥인(玉人)이라고 하였고 옥의 사용이 귀족 사이에 보편화되었음을 여러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옥광산(玉鑛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서경(西京)의 반룡산(盤龍山)에서 옥을 얻어 그것을 옥인(玉人)에게 주어 제기를 만들게 하였다.

또 ≪고려사≫김인존(金仁存) 열전에 따르면, 연회에 사용했던 그릇이 모두 백옥(白玉)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세종 때 청옥광산(靑玉鑛山)이 발견되었고, 중종 때에는 옥장인 박천석(朴千石)·양억만(梁億萬) 등이 몰래 옥을 캐어 옥기(玉器)를 만들어 팔았으므로, 이들을 잡아 처벌한 예도 보인다.

옥 중에서도 질이 순백색으로 광택이 있고 백색의 색조가 지반이 응결된 것 같은 모양을 한 옥을 백옥(白玉) 또는 양지옥(羊脂玉)이라 하는데, 이 양지옥은 중국의 양주(楊州)에서 나는 것이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답다.

황옥(黃玉)은 주로 군주들의 옥새나 여의주 같은 것을 만드는 옥으로, 색조가 담황색(淡黃色)에서부터 황색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벽옥(碧玉)은 투명하기는 하나 층을 이루고 있어 상품은 못 되며, 빛깔이 진한 묵록색(墨綠色)이거나 또는 묵색에 가까운 색을 띠고 있지만 역시 녹색이 좀 있다.

또 어떤 벽옥은 검은 반점을 띠고 있기도 하다. 묵옥(墨玉)은 흑옥이라고도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검으나 흑회색을 띠며 청옥과 혼합된 것도 있다. 그러나 완전히 검은 흑옥은 상당히 귀하다.

당옥(糖玉)은 색채가 당리(糖梨), 즉 사탕수수 껍질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청옥(靑玉)과 비슷하지만 원석(原石)이 작아서 큰 작품을 만들 수 없다. 마지막으로 청옥은 옥 재료 중에 가장 많은데 백색에 하늘색이 있는 것으로 옥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 청옥에는 매우 복잡한 빛깔이 층층이 포함되어 있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옥의 가공법은 다음과 같다. ① 재단작업 : 원석을 구하여 철사톱으로 재단하는데, 이때 해옥사(解玉沙)라는 모래알을 물에 담가 자를 때 모래를 넣으면, 모래에 의하여 옥이 잘라진다.

다음 활비비를 사용하여 작은 구멍을 내고 구멍 속을 통해 명주실이나 철사를 넣어 먹물금을 따라 잘라 나간다. 명주실을 사용할 때는 손물레 두 개를 준비하여 구멍에 꿰어 구멍을 통과시킨 실의 양 끝을 연결하여 한쪽을 돌리고 한쪽 실을 풀면서 물모래를 투입하면 옥의 투공이 잘라진다.

② 톱작업 : 옥가공의 기초작업으로 강한 쇠톱을 사용하되, 양쪽에서 끌어당기면서 옥을 썬다. 만들고자 하는 기본형의 크기로 재단한다. 이때 물로 모래를 넣어 가면서 사용한다. 또 다른 방법은 활톱으로 목기형의 겉모습을 재단하는데 활톱의 활은 세 겹으로 석 줄을 꼬아 활과 같은 대나무에 팽팽하게 줄을 걸어서 사용한다.

③ 물레작업 : 물레는 일명 ‘가리틀’ 또는 ‘수등’이라고 한다. 물레는 옥을 세공하는 기계라고 할 수 있는데, 두 발을 이용하여 발판을 밟아 절단 및 연마하는 시설이다. 이것을 ‘갈기’ 또는 ‘연마기’라고 부른다. 이 물레는 구멍을 이용하여 잘라내거나 투공을 내고 또는 연마하여 옥을 조각하는 데 사용한다.

④ 연마작업 : 연마도구는 물레에 부착하여 사용한다. 연마를 할 때는 물을 계속 흘리면서 모래와 함께 옥을 연마하면서 원하는 조각을 이루고, 연마재료는 물을 따라 모래 단지로 흘러들어 물을 걸러 내면 모래는 계속 사용하는 방법으로 한다.

이 밖에도 옥을 가공하는 데 사용되는 공구는 충사·마연두·정·연마두봉·타봉부·등글머리·정자·알사못·댓길창·송곳·끄톱·평구·혼구·절구박협공·조핵정자·결구정자·천수·만자·완사·관점·참사·칙사·구사·삼각대 등이 있어 옥조각을 하는 데 사용된다. 옥조각은 세공이기 때문에 많은 공구가 필요한데 요즘은 기계가 발달되어 대부분 기계를 이용한다.

국가무형문화재 100호로 목포의 장주원(張周元)옥장이 있으며, 경기도무형문화재 제18호였던 故 김용철(金容哲)은 앞에 서술한 재래식 옥 제작방법으로 옥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현재 옥장으로는 춘천·해남·서울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20여명에 이른다.

*목포의 여러 건물을 지나 걷기길은 언덕위로 직진 진행합니다.

*걷기길은 다시 도로와 합류 다시 도로따라 우측으로 진행.

*앞에는 예술훼딩컨벤션 건물이 보이네요 대형건물인데 코로나로 힘들게 보내고 있겠네요.

*교차로에서 건널목을 건너 자유시장쪽으로 진행.

*교차로를 건너 우측에 도로를 두고 계속직진.

*진행길 도로 건너편에는 대형건물 영문교회가 보입니다.

*출발 5.3km지점 통과중 조금 후 우측 횡단보도건너 진행.

*도로건너 우측으로 진행 삼학도 표지석.

삼학도

三鶴島

요약 전라남도 목포시 동쪽 앞바다 300m에 있던 섬.

지금은 연륙되어 목포시 영해동에 속한다. 본래 3개의 섬이었으나, 1968~73년에 연륙공사와 간척공사를 실시하여 육지화되었다. 3마리의 학이 내려앉아 섬을 이루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과거에는 목포진의 시지로 이곳에서 목포진에 땔나무를 제공했다. 섬의 최고지점은 73m이었다. 지금은 해운항만청, 해양경찰대, 법무부 출입국 관리사무소 등의 정부기관과 한국냉동·호남제분 등의 공장이 들어서 있으며, 섬 북단의 갓바위 일대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 많은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또한 바닷가에는 인위적으로 모래를 옮겨 백사장을 만들어 해수욕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호남선의 지선이 목포역에서 삼학도 해운항만청까지 연결된다.

삼학도

*삼학도옆 포구따라 진행 다리건너 바로 우측으로 진행.

*삼학도 포구따라 진행.

삼학도

위치
전라남도 목포시 삼학로92번길 일원

* 목포의 역사와 전설이 있는 섬, 삼학도 * 지금은 매립되어 육지가 되었으나 삼학도는 유달산과 함께 목포 사람들의 꿈이었고 미래였다. 망망대해로 낭군을 떠나보낸 아낙들의 외로움이 녹아있고, 고깃배를 기다리는 상인들의 희망이 달려있으며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건너는 망자들의 한이 녹아있는 곳이다. 이렇듯 삼학도는 목포사람들의 희로애락과 함께 산 시민의 서러움이 엉켜있는 곳이다. 1872년 ‘무안목포진’에 표시된 삼학가 처음으로 지도에 그려졌다. 이유는 군사요충지 목포진은 세종 1439년 설치되었고, 성이 완성된 것은 1502년. 목포진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땔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삼학도는 땔나무를 제공했던 중요한 장소였다. 이러한 중요한 삼학도가 1895년 일본인에게 불법으로 판매된 사건이 있었다. 일본인 삽곡용랑은 옛 목포 관리 ‘김득추’를 이용해서 삼학도를 매입했다. 개항 2년전 (개항: 1897년 )인데, 개항 후 밝혀져 처벌하고 환수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결국 1910년 국권침탈이 되면서 삼학도와 고하도는 일본인 땅이 되고 말았는데 이 사건은 ‘삼학도 토지암매사건’으로 일본인이 목포 토지를 침탈한 대표적인 예이다. * 세 마리 학의 섬, 삼학도의 전설과 유래 * 삼학도에는 섬의 내력을 밝히는 수십 개의 이야기가 구전되어 오는데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 유달산에 한 젊은 장수가 무술을 연마하고 있었는데, 그 늠름한 기개에 반해 마을의 세 처녀가 수시로 드나들어서 공부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젊은 무사는 세 처녀를 불러 "나 역시 그대들을 사랑하나, 공부에 방해가 되니 공부가 끝날 때까지 이 곳을 떠나 다른 섬에서 기다려 주오"하고 청했다. 그 말대로 가서 기다리던 세 처녀는 무사를 기다리다 그리움에 사무쳐 식음을 전폐하다가 죽었으나 세 마리 학으로 환생해서 유달산 주위를 돌며 구슬피 울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모르는 무사는 세마리 학을 향해 활시위를 당겨 쏘았다. 화살들이 명중하여 학들은 모두 유달산 앞바다에 떨어져 죽게 된다. 그 후 학이 떨어진 자리에 세 개의 섬이 솟으니 사람들은 그 섬을 세 마리 학의 섬이란 뜻의 '삼학도'라 불렀다.

*삼학도 포구를 지나 난영공원으로 진행.

*진행길 우측으로 공사가 한창 중앙 통로로 진행.

*난영공원 포토죤에서 한컷.

이난영

李蘭影
시대출생사망유형직업성별분야
근대
1916년 6월 6일
1965년 4월 11일
인물
가수
예술·체육/대중음악

요약 일제강점기 「시드는 청춘」, 「목포는 항구다」, 「다방의 푸른 꿈」 등을 부른 가수.

내용

이난영

1916-1965. 대중가요 가수. 대표곡 '목포의 눈물'.

ⓒ 동아일보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명 이옥례(李玉禮). 전라남도 목포 출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빠 이봉룡(李鳳龍)과 함께 불우하게 자랐다. 16세 무렵 태양극단의 순회공연 중 막간무대에서 노래를 인정받아 순회극단을 따라 나섰다.

단체가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할 때 오케레코드사 사장 이철(李哲)에게 발탁되어, 1933년에 염석정 작곡의 「향수」를 취입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앞서 태평레코드에서 발매된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 꿈」이 이난영의 데뷔곡이다.

1935년 가사모집에서 입선된 문일석(文一石)의 작품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인기를 얻으면서 가요계의 새별로 등장하였다. 1936년 20세가 되던 해에 가요작곡가 김해송(金海松)과 혼인하였다.

뒤이어 이봉룡 작곡의「목포는 항구다」, 김해송 작곡의「다방의 푸른 꿈」등으로 당대 최고의 유명 가수가 되었다. 광복 후에도 무대가수로 활약하였는데, 6·25동란 때 김해송이 납북된 이후 K.P.K악단을 손수 운영하였다.

자식들도 미국에서 김씨스터스·김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연예활동을 하였고, 1963년 한때 자식들을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하여 별세하였다.

*난영공원을 가로질러 다시 도로와 합류 우측으로 진행.

*잠시 후 우측으로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요.

*기념관을 지나 바로 우측으로 진행.

*평화아치교에서 바라 본 중소삼각교와 그림자의 모습.

*평화아치교 아래의 그림자 너무 아름답네요.

*중소삼각교를 건너고있는 나의 반쪽.

*중소삼각교에서 바라 본 물에비친 마리나교의 모습.

*지나 온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의 모습.

*물에 비친 그림자 정말 아름다와요.

*좋은 그림자보고 갑니다.

*목포항을 왼쪽에 끼고 둘레길따라 진행.

*건너편에는 목포요트마리나가 보입니다.

*마리나에는 요것이 있어야죠.

*저멀리 건너편에는 유달산이 미세먼지로 흐릿하게 보이네요.

*첫번째 만나는 다리를 건너 직진합니다.

*다리건너 직진 우측으로 대규모 공사현장을 지납니다.

*진행길 좌측으로 한국섬 진흥원 건물을 지납니다.

*진흥원앞에서 좌측으로 진행 항구를 좌측에 끼고 진행합니다.

*항구길을 걷고 있어요.

*진행길 끝에서 좌측으로 진행 여기까지 7.9km지점도착.

*항구를 왼쪽에끼고 좌측으로 진행.

*목포항의 모습.

목포항

木浦港

요약 전라남도 목포시에 있는 항구.

1897년 10월 개항되었으며, 항내수면적 51㎢인 무역항이다. 내항·북항으로 나뉘어 있으며 기능별로 전문화되어 내항은 크게 여객전용항과 삼학도의 화물전용항으로, 북항은 수산물전용항으로 개발중에 있다.

목포항

남동쪽에 있는 영암반도의 돌출부와 남서쪽의 고하도가 자연방파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유달산이 바람을 막아 항구로서 유리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1996년 현재 주요항만시설은 안벽 2,280m, 잔교 11기, 물량장 2,274m, 94척의 접안시설이 있으며, 하역능력 476만 2,000t이다. 입항화물은 총 417만 7,000t으로 연안화물이 68%, 수출입화물이 32%를 차지하며, 주요입항품목은 원유·시멘트·유류·양곡 등이다.

출항화물은 총 28만 5,000t으로 연안화물이 73%, 수출입화물이 27%를 차지하며, 주요출항품목은 육류·감귤류·모래·철재 등이다. 도서지방 주민들의 수송 편의를 위해 연안여객종합 터미널이 설치되어 있다. 정기여객선의 노선으로는 목포-제주 간을 포함하여 42개 항로가 있다.

특히 대불공업단지의 관문역할을 하게 될 공단부두와 연계하여 고하도와 가지도 일대에 신외항을 2011년 까지 건설할 계획이다. 신외항이 건설되면 3,000~2만t급 화물선의 접안이 가능하며, 5,000t급 2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철강부두, 3만t급 컨테이너 부두, 5만t급 액체부두 등의 시설을 갖추게 된다. 중국과의 교류확대로 서해안시대가 개막됨에 따라 발전이 더욱 기대된다.

*목포항을 왼쪽에 끼고 걷기진행 잠시 후 목포종합수산시장앞 통과중.

*선구의 거리도 지나고.

*출발8.7km지점 통과 여기서 우측으로 횡단보도 건너진행.

*건널목 건너 앞에 보이는 보리밥 골목으로 진입.

*골목길 통과.

*계단앞에서 좌측으로 진행.

*언덕위에는 목포근대역사문화공간 건물이 보이네요.

*언덕을 내려서면 중앙성결교회 건물앞으로 진행.

*교회앞을 지나 앞으로 직진합니다.

*진행길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

*이국적인 거리를 지나고 있어요.

*진행길 우측으로 목포근대역사관 건물앞 통과.

*여기는 120년된 적산가옥 지금은 카페 운영중.

*도로끝에서 목포역 방향으로 우측진행.

*앞에 보이는 목포근대역사관방향 좌측으로 진행.

*입구에 국도1.2호선 기점 기념탑.

*목포근대역사관앞 평화의 소녀상.

*골목길따라 유달산 방향으로 진행.

*출발9.7km지점 도착.

*유달산 입구 도착.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

*유달산정기 표지석.

*뒤돌아 본 노적봉의 모습.

유달산 노적봉

露積峰
소재지지역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로 180
목포

 이순신 장군의 전술과 강강술래의 전설이 담긴 곳 * 노적봉은 목포시 유달산에 있는 거석 봉우리를 말한다.이 봉우리는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적을 물리치기 위해 이용한 것으로 유명하며, 이순신 장군의 지형을 이용한 고도의 심리전이 돋보인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이엉을 엮어 바위를 덮었는데, 마치 그것이 군량미를 덮어놓은 노적처럼 꾸며서, 군량미가 대량으로 비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또한, 주민들에게 군복을 입혀서 노적봉주위를 계속 돌게 해서 마치 많은 대군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게 했으며 영산강에 백토가루를 뿌려 바다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쌀뜨물로 보이게 하여 왜적들에게 아군의 군세를 위장하여 왜장이 군사를 돌려 후퇴하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 노적봉을 돌던 전술은 훗날 문화예술로 승화되어, 강강술래로 발전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노적봉 안내비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바라본 노적봉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시민의 종각에서 바라본 노적봉

*유달산에서 바라 본 목포시 전경.

목포시

木浦市
위치인구면적행정구역사이트
전라남도 서부
224,973 (2020)
50.60㎢
23개동
http://www.mokpo.go.kr/

요약 전라남도 무안반도 남단에 있는 시. 개항 이후 항구도시로 발전해 왔으며 서해안고속도로의 종점으로 수륙교통의 요지이다. 지방 도시 중 면적이 가장 작지만, 전라남도 지자체 중 인구수로는 3위를 차지한다. 2005년부터 목포시와 무안군 경계 일대에 남악신도시건설이 조성되고 있으며, 전라남도의 주요 공공기관이 이전해왔다. 면적 50.60㎢, 인구 224,973(2020).

대한민국 전라남도 남서부 무안반도 남단에 있는 시. 수륙교통의 요지이며, 1980년대말부터 대불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광주·광양·목포를 잇는 서해안개발의 항만·거점 도시로 자리잡았다. 행정구역은 용당1동·용당2동·연동·산정동·대성동·목원동·동명동·삼학동·만호동·유달동·죽교동·이로동·북항동·용해동·연산동·원산동·상동·하당동·신흥동·삼향동·옥암동·부흥동·부주동 등 23개동이 있다(행정동 기준, 법정동 기중 64개동). 시청소재지는 목포시 양을로이다. 면적 50.60㎢, 인구 224,973(2020).

목포시

ⓒ 장길산/wikipedia | Public Domain

연혁

백제 때에 물아혜군이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무안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는 944년(혜종 1)에 물량군으로, 991년(성종 10)에 다시 무안군으로 고쳤다. 1018년(현종 9)에 나주의 속군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자 1391년(공양왕 3)에 성산극포권농방어사를 설치했다. 조선시대에는 1397년(태조 6) 전라도 4진 중의 하나인 목포진이 설치되었으며 첨절제사가 파견되어 방어임무를 맡았다.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 때 무안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6년에 전라남도 무안군이 되었다. 1897년 목포진을 개항함으로써 목포는 전라남도 최대의 항구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06년 월경지 정리도 이루어져 함평군의 비입지 2개면, 나주군의 비입지 삼향면, 영광군의 비입지 3개면이 편입되어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10년 무안부를 목포부로 개칭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목포부의 부내면과 거류지 등 시가지를 목포부로, 주변지역을 무안군으로 분리하고, 식지면 등 6개면을 3개면으로 통합해 함평군에 이관했다. 1949년 시제 실시에 따라 목포시로 개칭했다.

2005년 전라남도청이 남악신도시로 이전하면서 본격적으로 신도시 개발이 시작되었다. 2006년 용당1동·산정2동을 용당1동으로, 북교동·무안동·남양동을 목원동으로 유달동·충무동을 유달동으로 통합하여 기존의 행정동 26개를 22개로 통분합하였다. 2012년 1월 남악신도시의 옥암지구 옥암동에서 분리된 부주동이 신설되었다.

인구

1949년 시로 개편될 당시만 해도 호남지방 제일의 상업 중심지로 그 세력권에 신안군·무안군·해남군·진도군과 제주도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지역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광주광역시로 많이 빼앗기고 항구로서의 기능도 크게 약해졌다. 그러나 더딘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지리적으로 다도해를 끼고 있고 수륙교통이 편리하여 인구가 계속 증가해왔다. 인구추세를 보면 1970년 17만 7,801명, 1980년 22만 1,856명, 1990년 25만 3,423명으로 계속 증가했으나 2000년 이후 감소추세로 돌아섰다.

2000년 24만 5,831명, 2005년 24만 2,988명, 2010년 24만 7,442명, 2015년 23만 8,382명을 기록했다. 2020년 기준 인구는 22만 4,973명이며 가구수는 10만 3,356가구, 가구당 인구는 2.18명이다. 행정동별로는 본래 행정·상업 중심지인 용당동·산정동·동명동·이로동 등의 상주인구율이 높았으나, 2012년 남악신도시에 신설된 부주동에 인구유입이 활발하여 2만 3,596명으로 시내 행정동 중 인구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면 만호동에는 시 전체 인구의 1%인 3,023명 만이 거주하고 있다(2020).

목포의 연혁

백제 때에 물아혜군이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무안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는 944년(혜종 1)에 물량군으로, 991년(성종 10)에 다시 무안군으로 고쳤다. 1018년(현종 9)에 나주의 속군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자 1391년(공양왕 3)에 성산극포권농방어사를 설치했다. 조선시대에는 1397년(태조 6) 전라도 4진 중의 하나인 목포진이 설치되었으며 첨절제사가 파견되어 방어임무를 맡았다.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 때 무안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나주부 무안군, 1896년에 전라남도 무안군이 되었고 도서지역은 신설된 지도군에 이관되었다. 1897년 목포진을 개항함으로써 목포는 전라남도 최대의 항구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 감리서가 설치되고 무안군이 부로 승격했다.

1903년 목포감리서가 따로 설치되면서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906년 다시 부로 승격되어 감리를 폐지하고 부윤이 겸하게 했다. 이 시기에 월경지 정리도 이루어져 함평군의 비입지인 다경면·해제면, 나주군의 비입지인 삼향면, 영광군의 비입지인 망운면·진하산면·다경포가 편입되어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10년 무안부를 목포부로 개칭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목포부의 부내면과 거류지 등 시가지를 목포부로, 주변지역을 무안군으로 분리하고, 식지면 등 6개면을 3개면으로 통합해 함평군에 이관했다. 1949년 시제 실시에 따라 목포시로 개칭했다.

2006년 용당1동·산정2동을 용당1동으로, 북교동·무안동·남양동을 목원동으로 유달동·충무동을 유달동으로 통합하여 기존의 행정동 26개를 22개로 통분합하였다.

목포의 자연환경

노령산맥에서 뻗어나온 지적산(189m)·부주산(141m)·대박산(156m)·양을산(156m)·입암산(121m)·유달산(228m) 등이 저평한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이들 산지 사이로 바다를 메워 만든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시가지와 공단이 들어서 있다. 유달산은 영산강·삼학도와 함께 지역을 대표하는 자연경관을 이룬다. 삼학도는 1968년 육지와 연결되면서 부두로 조성되었고, 영산강 하구는 1981년 영산강유역개발계획의 하나로 영암군 삼호반도와의 사이에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영산호로 바뀌었다. 한편 고하도·눌도·달리도 등 천연의 방파제 구실을 해주는 섬들로 근해의 물결이 잔잔하고 수심이 깊어 천혜의 항만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영산강

영산강의 하구

ⓒ jjw257/wikipedia | CC BY 3.0

기후는 겨울에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많이 받아 같은 위도상의 동해안지방보다 기온이 낮고, 눈 내리는 날이 잦지만 적설량은 많지 않다. 연평균기온 13.6℃ 내외, 1월평균기온 1.3℃ 내외, 8월평균기온 26.2℃ 내외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112㎜ 정도이다. 연중 쾌청일수는 65일 정도로 맑은 날이 적은 지역 중 하나이다. 식생은 난온대삼림대에 속하여 온대활엽수와 난대성 상록활엽수가 혼합되어 있다.

목포의 인구

1949년 시로 개편될 당시만 해도 호남지방 제일의 상업 중심지로 그 세력권에 신안군·무안군·해남군·진도군과 제주도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지역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광주광역시로 많이 빼앗기고 항구로서의 기능도 크게 약해졌다. 그러나 더딘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지리적으로 다도해를 끼고 있고 수륙교통이 편리하여 인구가 계속 증가해왔다.

인구추세를 보면 1965년 15만 7,382명, 1970년 17만 7,801명, 1975년 19만 2,927명, 1980년 22만 1,856명, 1985년 23만 6,078명, 1990년 25만 3,423명으로 계속 증가했으나, 1995년 23만 9,571명으로 감소세를 보였다. 2006년 현재 인구는 24만 2,755명으로 1995년 대비 1.3% 증가했다. 인구이동은 전입이 4만 9,777명, 전출이 5만 2,338명이고 전입·전출 모두 도내이동이 많다.

행정동별로는 행정·상업 중심지인 용당동·산정동·동명동·이로동 등의 상주인구율이 높은 반면, 연동·충무동·북교동·대반동·죽동 등의 도서와 시 외곽지역의 인구는 점차 감소하여 인구의 도심집중현상이 나타난다.

시가지는 현재 시역의 약 2/3를 차지하는 해안매립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목포시의 경제사정이 좋았던 일제강점기 때 시가지가 무질서하게 팽창되어 업무·주거·상업 등 도시기능이 제대로 분리되지 못했으므로 도시공간이 좁고, 교통·주택·상하수도 시설 등 도시기반시설이 부족한 형편이다. 하당·매립 지구의 택지개발은 1999년에 완료되었으며 옥암 지구는 2003년에 착공하였다.

목포의 산업과 교통

지방산물의 집산지이자 연안어획기지로 성장해온 목포는 총취업인구 중 3차산업 종사자 75.3%, 2차산업 종사자 12.4%, 1차산업 종사자 12.3%로서 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해 있다. 총경지면적 11.83㎢ 가운데 논이 3.39㎢, 밭이 8.44㎢이며, 경지율은 24.7%이다(2006). 농업가구는 전체가구의 1.4%에 불과하며, 주요농산물은 쌀 외에 무·배추·고추·딸기·포도 등이 생산된다.

수산업은 1897년 개항 이후 인근 다도해의 어업기지로 발달했으며, 조기·병어·민어·새우·갈치 등이 어획된다. 연안의 간석지에서는 꼬막·굴·대합 등의 양식업과 제염업도 행해지고 있다. 풍부한 노동력과 편리한 교통을 바탕으로 어업도구·도자기·양조업 등의 전통산업이 발달해 있으며, 1972년 석현동공업단지와 1990년 산정동농공단지 등이 조성되면서 공업이 점차 활기를 띠어 2006년 현재 총 138개의 기업이 입지해 있다. 특히 1981년 영산강 하구둑의 건설은 부족했던 공업용수를 공급해줌으로써 이 지역의 공업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1996년에 완성된 대불공업단지는 단지 내에 공단, 기술정보 센터, 주거, 유통 센터 등을 설치하고, 기계장치제조업·조립금속·석유화학·제철·제강·비금속공업 등 중화학공업을 유치하고 있다. 목포시는 일제강점기에거점도시의 하나로 성장하면서 호남지방에서 생산되는 쌀·누에고치·면화 등을 일본으로 반출하고 또 일본에서 가공된 물품을 들여오는 무역항으로 알려져왔으나 해방 후 그 기능은 침체되었다.

2006년 현재 중앙·동부 등 상설시장 5개와 농업협동조합과 수산업협동조합이 각각 1개소가 있으며, 목포어시장은 조기·갈치·멸치 등의 수산물 거래가 많기로 이름 나 있다. 일찍부터 도시화되고 지역의 경제기반이 주로 상업이었기 때문에 음식점·술집·숙박업 등의 서비스 업소가 많다.

호남선의 종점으로, 시의 중앙을 호남선이 가로지른다. 국도로 서울·부산 등지와 연결되고 영산강 하구둑의 건설로 해남·영암 등과도 연결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연안항로의 기항지로서 동목포-제주 간, 목포-홍동 간 정기여객선이 운행되고 있다. 목포항은 급유·급수 시설, 수산물 냉동·가공 시설, 선박수리시설 등 항만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도로총길이 247.62km, 도로포장률 91%이다(2006).

목포대교

*목포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설치된 오포대.

 정오를 알리던 포, 오포대 *
오포대는 유달산(儒達山) 입구 이순신 동상 남쪽에 있는데, 1909년 설치되었다. 이는 시민들에게 정오를 알리기 위한 포대였다. 당시의 오포대는 현재 유달산공원의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포는 주변에 모형으로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조선식 선입포로서 조선 헌종 10년(1667년)에 제작되었고, 높이 5자, 구경 3자 5푼, 기부 8치, 주량 733근, 1회 발사시 화약 소비량 30량이었다고 한다. 1913년 8월 신식 대포로 일본 오오사까 포병공장에서 구입, 대체했고, 그 전에 있는 구식 대포는 일본의 신사(神社) 경내로 옮겼다고 한다.

* “오포 텄다. 점심 먹자.” 오포대의 향취 *
당시 오포대 담당직원이 정오에 맞춰 현재의 이충무공 동상 뒤에 있는 오포대에 올라가서 포탄 없이 포구에 화약과 신문지를 넣고 쏘아 굉음과 함께 목포 상공에 휴지가 흩어지면, 시민들은 "오포 텄다. 점심 먹자"라는 신호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 말기 일본이 전쟁수행을 위한 공출로 신·구 오포를 걷어가 버렸다고 한다. 1988년 12월 다시 이를 복원, 당시 오포대에 전시하고 지방문화재로 지정·보존하고 있다.

[문화재 정보]
지정종목 :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 전남문화재자료
지정연도 : 1987년 1월 15일
시대 : 조선

*유달산 표지석.

유달산

儒達山영달산(鍮達山), 노적봉(露積峰), 호남의 개골산(皆骨山)
성격유형면적소재지분야
지명
면적 1.4㎢, 높이 228m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 , 전라남도 목포시 대반동, 전라남도 목포시 온금동, 전라남도 목포시 북교동
지리/자연지리

요약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대반동·온금동·북교동에 걸쳐 있는 산.

개설

유달산은 동경 126°22′30″, 북위 34°47′30″에 위치한다. 높이는 228m로, 높지 않으나 산세가 험하고 층층기암과 절벽이 많아 호남의 개골(皆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명칭 유래

유달산은 예부터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이라 불렸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봉우리가 마치 쇠가 녹아내리는 듯한 색으로 변한다 하여 유달산(鍮達山)이라 하였다. 이후 구한말 대학자인 무정정만조가 유배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유달산에서 시회를 열자 자극을 받은 지방 선비들이 유달정(儒達亭) 건립을 논의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산 이름도 유달산(儒達山)이 되었다.

자연환경

노령 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 끝에 자리한 산이다. 일등봉의 높이가 230m이며, 표고 50m이하가 29.8%로 가장 많으며 200m 이상은 0.4%에 불과하다. 유달산 전체가 화강암이며 경사가 급하지만 일주도로를 따라 일부 완만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유달산의 대표 수종은 소나무(곰솔)이고 왕자귀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등이 있다. 식생 구성으로 볼 때 인공 조림 수종을 제외하면 토양 조건은 척박한 편이다.

형성 및 변천

유달산은 지질학상의 판구조이론으로 볼 때 압축구조장의 안쪽에 위치하며 고생대 말부터 중기의 사이에 있었던 큰 규모의 습곡 운동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뒤로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침식이 되어 지금은 노년기 지형으로 발달하였다.

목포시와 다도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므로 산정에 두 개의 봉수대를 설치해 멀리 바다에서 들어오는 외적을 경계하였다. 달성각(達成閣)에서 약 100m 내려오면 정오를 알리던 오포대(午砲臺)와 노적봉(露積峯)이 있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군량을 쌓아둔 것처럼 가장하여 적을 속인 곳이라는 전설이 전하여진다. 남쪽 기슭의 해안을 광복 전에 일본 사람들이 매축하여 신시가지를 만들었는데, 현재의 만호동과 무안동이 이 지역에 해당한다.

현황

유달산은 목포 시민의 공원일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명소로 알려져 있어 전국에서 모여드는 관광객이 많다. 1982년부터 유달산 공원화가 추진되어 유달공원, 난공원, 달성공원, 조각공원 등이 있다. 서쪽 사면은 비교적 경사가 급하여 도시화가 덜 진행되었고, 해안에는 유달산해수욕장이 있다.

이 산에는 대학루(待鶴樓)·달성각·유선각(儒仙閣)·관운각(觀雲閣)·소요정(逍遙亭) 등의 정자가 있다. 달성각은 1958년 광복 13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하였고, 유선각은 1932년 10월 목포 개항 35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하였는데, 처음에는 목조로 건립하였으나 현재는 콘크리트건물로 개축되었다. 그리고 230평의 어린이 놀이터와 4·19기념탑·충혼탑(忠魂塔) 등이 있으며, 산 중턱에는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유달사(儒達寺)·관음사(觀音寺)·수도사(修道寺) 등의 사찰이 산 중봉에 있으며, 활터도 있다. 산의 정상인 일등암(一等巖)에 오르면 다도해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그 경관은 장관을 이룬다. 다도해관광권의 중심이며 산 주변에 2.7㎞의 유달산 일주도로가 있다.

목포역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고, 시내버스는 1번, 101번, 108번, 105번, 2번을 이용하여 목포역에서 하차하면 된다.

*유달산 전망대.

*화장실 앞에서 좌측아래로 진행 유달산 둘레길따라 진행 여기서 부터 유달산 벗어날때까지 안내 리본.스티커

 전혀 없읍니다 참고로 유달산 둘레길따라 진행.

*유달산 둘레길 길은 좋아요.

*좌측으로 목포 시가지가 가끔씩 모습을 보여주네요.

*오른쪽 산위에 목포의 명물 케이블카 승강장이 보이네요.

*옛 제2수원지

*수원지 이야기.

*아리랑고개 도착 여기서 계속 직진진행.

*유달산 둘레길따라 진행.

*저멀리 유달산 케이블카가 신나게 달리고 있네요.

 

*유달산 채석흔적터.

*유달산 낙조대 도착 유달산을 배경으로 한컷.

*유달산 낙조대의 모습.

*낙조대 이야기.

*여기는 군왕지지의 터 나숭대 골짝 이야기.

*유달산 둘레길따라 진행 조금 후 만나는 삼거리에서 우측위로 진행 단풍 둘레길 방향으로 진행.

*명품 유달산둘레길 안내도.

*봉후샘 쉼터 도착.

*봉후마을의 유래 대단한 곳이네요.

*유달산 둘레길 이야기.

*뒤돌아 본 봉후샘 쉼터의 모습.

*위치 좋은곳에 요런 돌탑 잘보고 갑니다.

*목포대교가 시야에 들어 오네요.

*둘레길 한적하게 진행합니다.

*어민동산 도착.

*유달산 왕 자귀나무 자생지. 걷기길은 계속직진.

*목포대교가 가깝게 보이네요.

목포대교

위치
전라남도 목포시 고하대로597번길 73 (죽교동)

2012년에 완공된 목포대교는 총연장 4.129m 너비 35~50m의 왕복 4차선 도로로 목포 북항과 고하도를 잇는 해상교량으로 비상하는 학의 날재처럼 아름다운 모습과 일몰이 함께 어우러져 장관을 자아내고 있다. 목포대교는 목포시에 있는 국도 제1호선의 자동차 전용도로 교량으로, 죽교동과 유달동은 육지측에 있으며 고하도,허사도를 연결하며 목포 신외항과 서해안 고속도로를 연결하는 목포의 관문으로 주탑과 케이블의 모양은 목포의 시조인 학 두마리가 목포 앞바다를 날아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환 것이다.

*유달산 둘레길 끝지점 도로와 합류 우측으로 도로 건너 다시 횡단보도 건너 우측으로 진행.

*계속직진 진행 우측 언덕위에 케이블카 승강장 위치.

*호텔 건물앞에서 좌측으로 진행.

*앞에 보이는 모텔건물 앞으로 진행 북항 방향으로 진행.

*도로따라 진행.

*종점4.4km지점에서 우측 횡단보도 건너진행.

*지금부터 한참을 직진진행.

*진행길 건너편에는 전남중앙병원 건물이 보입니다.

*여기서 계속 직진진행.

*신정농공단지 안내판앞에서 우측 건널목 건너 다시 좌측 횡단보도건너 우측으로 진행.

*주유소앞으로 진행.

*계속직진진행.

*여기서 좌측 골목길로 진행.

*좌측으로 진입 명태골 코다리찜 식당앞으로 진행.

*아파트 우측길로 진행.

*좌측의 현대 아파트102동 앞에서 우측 산으로 진행.

*등산로따라 진행.

*1차 능선도착 산불감시초소 도착.

*다시한번 능선도착 여기서 반대로 내려가요.

*능선도착 앞에 의자앞에서 좌측으로 진행.

*걷기좋은길 걷고 있어요.

*잠시 후 좌측으로 급회전.

*운동시설 오른쪽으로 진행.

*산에서 내려와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 다시 좌측 밭사이로 진행.

*진행길 끝에는 다시 도로와 합류 아파트 뒤길로 직진.

*18코스 종점 700m지점.

*아파트 뒷길로 진행.

*도로 끝까지 진행.

*도로 끝에서 우측으로 진행.

*도로 건너편으로 모양이 같은 건물이 줄지어 있어요.

*계속직진 진행.

*진행길 끝에는 용해동주민센터도착 오늘이 사전투표 때문에 주민센터앞에는 몹시 복잡하네요.

 출발6시간07분많에 목적지 도착.

 거리는 있어도 무난한 코스로 유달산 구간이 조금은 오르내림이 있고 안내 리본과 스티커가 전혀 없어 

 조금은 불안 그러나 유달산 둘레길따라 끝까지 진행 바랍니다.

 

*출발.도착 차량 주행거리 = 난영공원~울산 =390km(목포시내운행 포함)

                                     

*누적 주행거리 =5,284km

 

*2차 통행료 = 목포~울산 = 15.600원

*누적 통행료 = 232.900원

*기타경비 = 1)차량회수 1일차 금호2교차로~당포마을=20.000원

                                난영공원~수산청 = 6,100원

           2)차량회수 2일차 용해동주민센터~난영공원 =6,600원원

           3)고속도로휴계소 호두과자.간식=5,000원

           4)첫날저녁 굴비정식 = 65,000원

           5)둘째날 점심냉면 =33,000원

           6)기타 간식 = 17,000원

*누적합산=624,130+152,700=776,830원

*18코스 거리 =18 km    .누적거리 = 265.4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