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2023년 04월 26일 수요일 흐림 7~15도
*누구와 = 임무용,최현숙(부부)
*코 스 = 유곡2교차로~정곡리마을~월곡리회관버스정류장~심훈기념관~복운리나눔숲 14.3km(소요시간 4시간00분)
*이번주는 화요일 집안일이 있어 수요일 새벽에 울산을 출발 서해랑길 82코스 출발점 유곡2교차로
목적지 설정 출발합니다.
이제 한낮에는 따가운 햇살로 이마에는 연신 땀방울이 떨어진다 여른은 싫다 차라리 추운건
참을수 있는데 더위에는 자신이 없다.
서해랑길도 후반기로 달려 이제 끝이 보인다 조금만 참고 나머지지 구간 최대한 더위를 피해보자.
코스개요
-바다를 메운 땅 위에 오손도손 모여있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코스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웅장함을 자랑을 자랑하는 서해대교로 이어지는 코스
관광포인트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직접 설계한 집으로 문학관이 있는 '당진필경사'
-서해안 시대의 관문으로 ,우리나라의 국력 신장을 상징할 수 있는 랜드마크'서해대교'
여행자 정보
-시점 = 당진시 송산면 유곡리 유곡2리교차로
교통편) 당진버스터미널에서 일반 310,320번 버스 승차'유곡리'정류장에서 하차 후 도보이동
-종점 =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 복운리나눔숲
*새벽 울산에서 5시간을 달려 출발지 유곡2교차로 82코스 안내판앞에서 인증샷.
*우리 부부는 오늘도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합니다.
*반갑다 친구야 언제나 그 자리에 .......
*81코스 끝지점 유곡 교차로를 건너 직진 82코스 이어집니다.
*도로따라 직진 좌.우로 신축 아파트 단지가 많이 보입니다.
*진행길 좌측으로 이마트 편의점앞 통과.
*가자마트 앞으로 약간의 오르막길 진행.
*경사도가 있는 오르막길 진행 .
*오르막길 정점에서 우측으로 cu편의점앞 통과.
*도로진행 잠시 후 명륜철강 1공장 입간판앞에서 좌측으로 진행.
*도로에서 좌측으로 아늑한 숲길이 기다리고 있네요.
*진행길 좌측으로 철재 펜스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숲으로 아늑한 걷기길을 제공하고 있네요.
*좌측으로 (장산씨엠 주)간판앞으로 진행.
*삼현테크(주) 공장앞 진행 .
*포장로따라 진행 잠시 후 산거리에서 직진진행.*농로길 입구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걷기.
*농로길 입구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걷기.
*조금진행 다시 만나는 삼거리에서 우측 농로길 진행.
*농로길진행 좌.우로 벌서 부지런한 농부들의 논 물가두기가 시작되엇네요.
*농로길 진행 끝에서 좌측으로 꺽어 진행.
*농로길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 다시 한참을 걷거걸어 갑니다.
*농로길 끝에는 하천 둑방길 도착 좌측으로 둑방길 진행.
*둑방길에서 신축 다리를 건너 직진길 진행.
*공사중인 다리를 건너 직진 좌측으로 꺽어 만나는 농로길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
*진행길 우측으로 두릅이 먹음직 스럽게 유혹을 하네요 그래도 우리는 갈길만 갑니다
주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진행길 끝에는 다시 포장도로와 만나고 우리는 좌측으로 한적한 도로따라 진행.
*한적한 시골길 포장로 중앙선은 없지만 그래도 가끔씩 차량통행이 잇어 조심 합시다.
*포장로따라 한참을 걸어 송악읍 마중길 이정표앞 도착 우리는 계속 도로따라 진행.
*도로가 민가를 지나 도로다라 진행 다시 만나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
*진행길 좌측으로 더낣은 들판을 바라 보면서 4월말의 한적한 시골길 진행 너무 조용합니다.
우리 부부는 현재 아름다운 걷기를 계속합니다.
*다시 만나는 갈림길에서 좌측 월곡리 방향으로 진행 합니다.
*마을길 포장로따라 진행 앞에 보이는 솔밭사이로 진행.
*솔밭길 사이로 진행 약간의 오르막길 끝에서 좌측으로 진행.
*능선에서 좌측으로 포장로 진행 우측으로 폐축사도 보이고.....
*능선길에서 내려오면 금실좋은 장승의 모습이 보기 좋아요.
*농로길을 가로질러 앞에 보이는 독립가옥 앞에서 좌측으로 진행.
*독립가옥 앞화단에 철죽꽃이 만발 잠시 꽃구경하고 갑니다.
*다시 만나는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 진행.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 길가의 민가에는 각종 꽃들이 많아 피었네요.
*월곡리 버스정류장앞 통과.
*월곡리 버스 정류장안에 요런 시계가 지금도 잘돌아 가고 있어요.
*한때는 누군가의 가정을 이끌어을 텐되 지금은 해물탕집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있네요.
*진행길 우측으로 자동차 정비소앞 통과 중.
*넓은 공터앞에서 우측으로 건물앞으로 진행.
*진행길 좌측으로 아주 오래된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 보호를 받고 있네요.
수령이 500년 지금도 아주 건강해 보이네요.
*보호수 은행나무를 지나 만나는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
*울창한 숲으로 진입 하고 잇어요.
*진행길은 다시 도로와 합류 건너 곧바로 우측으로 민가 앞으로 진행.
*도로에서 우측 내림길따라 진행.
*진행길은 계속 직진길따라 진행.
*진행길 우측으로 큰 건물이 보입니다 송악냉동 건물이네요.
*시골길에서 다시 도로와 합류 좌측으로 진행.
*도로 진행 잠시 후 우측 부곡1리 방향으로 진행.
*부곡2리 마을회관앞 통과.
*부곡2리 마을을 지나 농로길 진행 아스팔트 포장로 따라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
*잠시 후 다시 도로와 합류 여기가 방축골 입구 버스 정류장앞에서 우측으로 도로따라 진행.
*방축골 마을 버스 정류장앞 통과 우측으로.....
*도로따라 한참을 진행.
*잠시 후 도로 좌측에 시인 심훈 생가터 도착.
*넓은 공터를 생가터 주변에 여유로운 공간을 만들어 놓았네요.
심훈
실천적 문학인
1901년 |
1936년 |
1935년 『동아일보』는 창간 15주년 기념으로 장편 소설을 현상 공모하는데, 50여 편의 응모작 가운데 심훈(沈熏, 1901~1936)의 「상록수」가 당선된다. 「상록수」는 1935년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독자들의 열렬한 기대와 환호 속에 연재되어 한동안 ‘상록수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미 1920년대부터 실천과 문학의 양면에서 꾸준히 역량을 다져온 작가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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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은 1901년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 흑석리(지금의 서울 흑석동)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다. 본명이 대섭(大燮)인 그는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보에 다니던 중, 1917년 중매로 왕족인 후작 이해승의 누이 이해영과 결혼한다. 1919년 3·1운동 때 잡혀 들어갔다가 집행 유예로 나오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퇴학 처분을 당한다. 곧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심훈은 임시 정부를 이끌던 이동녕과 이시영, 그리고 무정부주의자 신채호와 공산주의 운동의 원로 여운형 같은 지사들 곁에서 3년 동안 머문다.
1923년 귀국한 심훈은 송영 · 김두수 · 이호 · 최승일 등과 함께 ‘염군사’를 꾸려 연극부에 가담한 뒤, 신극 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만들어 활동한다. 1924년 그는 사회주의 성향의 인물들을 기자로 천거하는 언론계의 혁신화 바람을 타고 홍명희 · 박헌영 · 임원근 · 허정숙 등과 함께 ‘동아일보사’에 들어간다. 기자로 있는 동안 그는 『동아일보』에 「미인(美人)의 한(恨)」 후반부를 번안해 싣기도 한다. 그는 각 신문사 사회부 기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철필구락부’에 들어가서 급료 인상 파업을 일으키는데, 얼마 뒤 이 파업은 다른 부서에도 번져 같이 입사한 박헌영 · 임원근 · 허정숙은 물론 안석주 · 김동환 등이 일제히 사표를 내는 사태로 이어진다.
심훈과 달리 그의 형 심우섭은 한때 중앙방송국 국장을 지내고 1910년대 이후에는 오랫동안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기자로 있던 친일파다. 이광수의 단편 「재생」의 모델이기도 한 심우섭은 심천풍이라는 필명으로 『매일신보』에 「형제」와 「산중화」 등 신파 소설을 발표한 적도 있다. 워낙 성품이 강직하던 심훈은 아무리 살붙이라고 할지언정 형의 빗나간 행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무 아는 것도 없이······ 말만 함부로 다니며 하다가 신문 경영에도 대실패를 하고 울화병이 든 것이다. 그리고 주색에 몸은 약하여 가지고 온갖 번민을 하며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는 것이라 아무리 친제형간이라도 동정하는 마음이 생길 수는 없다. 형님의 일은 만사가 다 그 수법이니 누가 환영을 하랴.
병상에 누워 있는 형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쓴 1920년 1월 21일치 심훈의 일기에는 그의 이런 심경이 잘 나타난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 또한 그에게 고민을 안긴다. 열여섯 살 때 부모의 의사에 따라 결혼한 아내와 처음에는 그럭저럭 지내지만 중국에서 3년 동안 있다가 온 뒤에도 도무지 애정이 일지 않아 1924년 이혼을 하기에 이른다. 1930년 그는 무용가 최승희가 후계자로 점찍어 둔 열일곱 살짜리 미모의 무용가 지망생 안정옥과 동거하다가 곧 재혼을 한다. 바라던 대로 자유 연애에 의한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에서 나온 뒤 심훈은 『조선일보』를 거쳐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으로 재직하면서 1925년 『동아일보』에 시나리오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띤1) 독특한 장편 「탈춤」을 연재함으로써 본격적인 문단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연극과 영화에도 매력을 느껴 조일재의 연극 「장한몽」에 이수일 역으로 얼굴을 비치는가 하면, 1926년에는 자신이 쓴 「먼동이 틀 때」를 각색, 감독하는 등 영화와 인연을 맺는다. 같은 해 그는 ‘염군사’와 ‘파스큘라’가 손을 잡고 만든 ‘카프’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지만 곧 조직에서 탈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 공부에 매달린다. 일본 교토에서 영화 수업을 받으며 영화 「춘희」의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등 현장 경험을 쌓은 그는 6개월 만에 귀국한다. 1927년 10월 그는 ‘계림영화사’의 후원으로 영화 「먼동이 틀 때」를 다시 만들어 단성사에서 상영하고, 잡지에 다수의 영화론과 수필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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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심훈은 『조선일보』에 중국으로 망명한 두 청년의 지하 운동과 사랑을 그린 장편 소설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의 연재를 시도하지만 두 작품 모두 검열에 걸려 싣지 못한다. 1932년에는 시집 『그날이 오면』을 펴내려고 하지만 역시 검열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검열에 걸려 일제 때는 간행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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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한창 진행되던 프로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의 논쟁을 지켜보던 심훈은 「1932년의 문단 전망」이라는 글을 통해 좌우 진영 모두를 비판한다. 민족주의 진영에 대해서는 “가난한 집 사당의 말라빠진 위패만도 못한” 위인들이라고 욕을 퍼붓고, 카프 진영에 대해서는 내부의 주도권 싸움과 “새로운 동지를 포섭해 들일 아량”의 부족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농민 노동자의 옹호자 같은 구문(口吻)으로 일을 삼으나 그 자신이 결코 프롤레타리아는 아니외다.······ 염천에 용광로 앞에서 부삽을 쥔 노동자의 땀에 젖은 수기가 보고 싶습니다. 젊은 소작인이 흙벽에다가 연필을 찍찍 갈겨 쓴 단 몇 줄의 생활 기록이 읽고 싶습니다.『심훈 전집 1』(탐구당, 1966)
1933년 그는 『조선중앙일보』에 초기작 「탈춤」과 비슷한 소재의 장편 「영원의 미소」를 발표한다.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동료로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된 남녀가 계급 모순에서 오는 절망과 슬픔을 겪다가 함께 농촌으로 떠나면서 미소를 짓게 된다는 내용이다. 1934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자신의 결혼 체험을 바탕으로 봉건 잔재의 한 가지인 조혼 때문에 억압받는 남녀를 그린 장편 소설 「직녀성」을 연재한다. 같은 해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를 발표한 그는 1935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충남 당진으로 내려간다. 거기에서 조카와 함께 참여한 농촌 계몽 운동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바로 「상록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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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은 「상록수」 당선으로 받은 상금으로 당진에 ‘상록학원’을 세우는 등 실천하는 문학인으로 살기 위해 애쓴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마라톤 금메달을 따자 그는 즉흥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쓴다. 그런데 이 시가 그에게는 마지막 글이 되고 만다. 1936년 9월 16일, 장질부사에 걸려 죽은 그의 장례식에서 여운형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 시가 낭송된다.2)
「상록수」
「상록수」는 러시아에서 비롯된 ‘브나로드 운동’에 자극을 받아 펼쳐진 1930년대의 농촌 계몽 운동을 배경으로 삼은 소설이다.
졸업 뒤 고향 청석골로 내려온 여주인공 영신은 교회 건물을 빌려 한글 강습소를 연다. 그러나 이를 마땅치 않게 여긴 일제 당국은 건물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영신의 활동을 방해한다. 영신은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힘겹게 조금씩 모은 돈으로 손수 나서 새 건물을 짓는다. 건물 낙성식을 하던 도중 영신은 과로로 인한 맹장염으로 졸도해 병원에 업혀 간다.
한편, 영신과 사랑하는 사이인 동혁은 한곡리에서 농우회를 조직하고 회관을 짓는 등 농촌에 머물며 경작 사업에 힘쓴다. 그러나 고리 대금업자와 농촌 진흥 회장과 마찰이 일면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 사이 요양과 신학 공부를 위해 일본에 건너간 영신은 못내 아쉬움이 남아 있던 청석골로 돌아와 야학을 열지만 다시 앓아 눕는다. 동혁이 감옥에서 나온 것은 이미 영신이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다. 동혁은 무덤 앞에서 죽는 날까지 영신이 못다 한 일에 모든 것을 바치리라 다짐하고 한곡리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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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말부터 우리 문단에서는 프로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 가릴 것 없이 농촌을 무대로 한 소설이 하나의 흐름을 이루게 된다. 이 가운데 심훈의 「상록수」가 이광수의 「흙」과 더불어 유난히 독자들의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무엇보다 전원을 배경으로 한 남녀 사이의 사랑 얘기를 바탕에 깔고 있는 까닭이다. 특히 이광수의 「흙」에서 보이는 남녀 관계가 지식인의 향락에 치우친 느낌을 주는 반면, 「상록수」에서는 농촌 운동을 위해 멀리 떨어져 있거나 사랑을 유보하는 남녀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작가 심훈은 이렇게 설정한 남녀 관계 속에서 오히려 둘 사이의 사랑을 애틋하게 드러냄으로써 짙은 감동을 준다. 그러나 어떤 좌절과 절망이라도 꿋꿋하게 이겨내는 ‘상록수’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농촌의 어두운 면보다는 전원의 밝고 싱싱한 면을 너무 부각시켜 작가의 현실 감각마저 의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울러 소설에 묘사된 영신과 동혁의 농촌 운동이, 검열 당국을 의식한 탓인지, 말 그대로 농민의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는 좀 다른 소극적 양상에 그치고 있다는 점도 아쉽다. 이런 한계는 「상록수」를, 심훈이 한때 계급 문학 진영을 향해 외치던 “염천에 용광로 앞에서 부삽을 쥔 노동자의 땀에 젖”거나 “젊은 소작인이 흙벽에다가 연필을 찍찍 갈겨 쓴 단 몇 줄의 생활 기록”과는 거리가 먼, 지식인 계몽 소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잘 보존되어 있는 심훈 생가터 .
*생가터 주변의 부속 건물들 .
*생가터 주변의 모습.
*그 날이 오면 '심훈" 시비.
*심훈 기념관 우리는 시간상 통과합니다.
*심훈 생가터를 뒤로하고 도로를 따라 진행 부곡1리 경로당앞 통과.
*진행길 좌측으로 소공원에 정자도 우리는 갈길이 바빠 패스.
*도로에서 좌측 마을길로 진행 나중에 도로와 다시 만남.
*진행길에 신설도로 공사장 통과.
*다시 도로와 합류 도로따라 진행 잠시 후 좌측으로 내려 갑니다.
*도로에서 이탈 시골길따라 진행.
*부곡2교를 건너고......
*더디어 송악읍 시내 도로와 합류 좌측으로 진행.
*사거리 교차로 통과 직진.
*잠시 후 대로변 좌측에 82코스 종점이 보입니다.
*82코스 완보 수고 했습니다.
*우리는 너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먼길을.......
*당진시를 떠나 시골길과 도로를 걷고 걸어 종점 송악읍에 도착 이렇게 한코스를 줄입니다.
소요시간=4시간.
*출발.도착 차량 주행거리 =울산~당진유곡2리 교차로=369km
*누적 주행거리 =25,146km
*1차 통행료 = 20,000원
*누적 통행료 = 1,195,000원
*82코스 거리 =1,308.1+ 14.3km = 1.343.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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