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

북인도 여행 3일차

문수산 아래 2017. 5. 27. 01:19

*어제의 피로를 곤한 잠으로 풀어 버리고 인도 여행3일차 여행을 위해

 오늘도 활기찬 아침을 맞이해요.


*오늘의 일정:자이푸르에서 하와마할 관광 후 5시간 달려 파테푸르 시크리이 동 중식 아그라 이동 40분 (타지 마할 관광)



*하와마할(자이푸르 관광 명소이자 바람의 궁전,하와마할)

 5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와마할은 1799년 라찬드 우스타가 설계하고 스와

 이 프랍탑 싱 에 의해 건축되었습니다.밖으로의 출입이 제한적이였던 왕궁

 의 여인들이 도시의 생활을 엿보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으며,특이 바람이

 잘 통하는 격자형의 창문이 많아 바람의 궁전으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궁전의 1~2층은 정원으로 연결되어 있으며,953개의 작고 둥근 포대와 같은

 공간에는 작은 발코니가 있으며 아치형 지붕,격자형 창문이 나 있습니다.

*건물 건너편에서 바라 본 바람의 궁전 정면의 모습.

*바람의 궁전을 배경으로 기념샷.

*우리 부부의 인증샷.

*자이푸르에서 다음 여행지 파테푸르 시크리(버스로 5시간이동)중 거리의

 모습.도로에는 교통질서라고는 찾아볼수가 없다.경적소리가 귀를 따갑게

 하네요.

*폐차 직전의 차량과 소형차.특이한것은 트럭들의 왕래가 많아요.

*파테푸르시크리 도착,자이푸르에서 5시간을 달려 도착.낮12시가 되어 그런

 지 35도이상의 기온으로 더위로 고생 중.

*요약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 주 아그라 행정구에 있는 도시. 지도


1569년에 무굴 제국의 황제 악바르가 제국의 수도로 건설한 도시이다. 악바르가 3명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한 이슬람교 성인 치슈티를 기념하여 악바르는 수도를 건설하면서 치슈티의 아름다운 무덤이 있는 자미마스지드(대사원, 1571)도 함께 지었다. 자미마스지드의 남쪽 입구인 거대한 불란드 다르와자(승리의 문)는 인도에서 손꼽히는 훌륭한 건축물이다. 그밖에도 악바르의 왕비(조다 바이)가 살던 궁전과 개인 알현실, 그리고 여러 채의 주택 등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보여주는 무굴 제국 초기의 몇몇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물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1586년 델리로 무굴 제국의 수도가 옮겨졌다. 인구 25,459(1991).

파테푸르시크리(Fatehpur Sikri)
지도


*후마윤 황제의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한 악바르는 당시 13세의 어린 나이에

 사막에서 떠돌이로 보내다 보니 글을 배우지 못해 무식한 황제가 되었다.

 그래도 막바르는 영악했다.

*악바르는 혼인 정책 같은 것도 써서 라지푸르 욍족의 딸인 조다바이를 첫 부인으로 맺어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1576년에 뱅골까지 진출하여 1580년대에

 는 인도의 북남부 까지를 점령하여 종교를 초월하여 통합을 이루고 지배체제

 를 완성 하게 되었다.

*악바르는 인재를 발굴하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어 대표적인 예가 군대 총사

 령관을 맡긴 만싱1세엿다.만싱1세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 거대한

 무굴제국의 완성에 중요한 역활을 담당한다.악바르황제는 3명의 부인을 두

 었다.


*요약 무굴 제국 황제 악바르(1556~1605 재위)의 후원으로 발전한 인도의 건축양식.


이 양식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으로는 아그라에 세워진 성채(1565~74)와 장엄한 파테푸르시크리 시(1569~74)를 들 수 있다. 그밖에 델리에 있는 아라브사라이 정문(1560경)과 아지메르 성채(1564~73), 뛰어난 장식이 있는 라호르 성채(1586~1618), 현재는 크게 훼손된 알라하바드 성채(1583~84) 등도 훌륭한 보기가 된다.

악바르 시대의 건축은 풍부한 장식이 빚어내는 우아함과 단아함이 힘있게 표현된 특징을 지니며, 힌두 전통에서 유래한 많은 요소가 장식물에 스며 있다.

아그라에 있는 요새화한 궁전은 치석(治石)으로 마무리한 총길이 2.5㎞로서 육중하고 성벽이 깊은 인상을 준다. 델리 정문이라 불리는 이 궁전의 정문은 분홍색 사암에 백색 대리석을 상감한 매혹적인 장식으로 되어 있다. 무굴 제국의 수도 파테푸르시크리는 인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이슬람 건축 업적 중 하나이다. 건설된 지 몇 년 안 되어 폐허가 된 이 도시는 아그라 서쪽으로 42㎞ 떨어진 암벽 꼭대기에 건설되었고 궁전과 보다 작은 주택 및 종교건물, 행정건물로 구성된 거대한 복합 건물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디반에카스(개인 알현실)라 불리는 건물은 실내배치가 주목을 끄는데, 돌로 된 옥좌 단상을 받치는, 까치발에 둘러싸인 육중한 기둥 1개가 있으며 단상에서 네 방향으로 난간이 있는 발코니가 뻗어 있다. 조다바이 궁전과 총리 관저인 비르발의 벽감과 까치발 등에서는 힌두교의 종교건축과 비종교건축에서 차용한 요소를 볼 수 있다. 파테푸르시크리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자미 마스지드로, 이후 무굴 제국인들이 만든 예배용 사원의 원형이 되었다. '승리의 문'이라는 뜻을 지닌 육중한 문 불란드 다르와자는 가파른 계단 위에 버티고 있어 거대한 힘과 높이를 느끼게 한다.


*파테푸르라는 말은 <승리의 도시>라는 의미로 파테푸르 시크리는 승리의 도

 시 가 되었고,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도 등재됨.

*첫번째 부인 조다바이는 힌두교,두번째 부인 마리엄은 기독교. 셉째 부인은

 이슬람교 신자로 홍인뿐만 아니라 부인들 까지도 이용하여 종교의 융화를

 꿰했는지 모른다. 그 증거로 3명의 부인에게 종교의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으

 며 자신은 1582년 디네일라히 라는 자신의 종교를 만든것을 보면 알수 있다.

 물론 그의 사후 그가 만들었던 디네일라히는 곧바로 소명.

*왕자를 보지 못한 악바르는 기도를 하기 위해 맨발로 아즈메르라는 이슬람

 성지로 갔는데 그의 시종이 여기에서 가까운 시크리에 사는 슬림지스키라는

 성자에게 물어보면 언제 쯤 왕자를 볼수 있는지 알수 있다.라고 하여 찾아가

 물으니 일년안에 큰 부인에게서 아들을 볼수 있다 라고 예언.일년 후 왕비 조

 다바이는 아들을 낳앗고 이름을 자항기르라고 지었다.


*기독교 신자 왕비가 거처하던 건물의 모습이라고 한다.

위 건물의 기둥에서 아크바르 대제의 관용적인 종교관을 
잘 볼 수 있으며 기둥의 맨 아래에는 십자가를 넣었고 가운데는 힌두교 문양에다 
맨 위는 이슬람 문양을 새겨 넣었다



*악바르 황제는 시크리의 성자 슬림지스키를 
지극히 신뢰하게 되고 그에게 소원을 물으니 시크리를 번성하게 해주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악바르 황제는 아그라에서 37km 떨어진 시크리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이것이 시크리성이 생긴 이유이다.



*악바르 황제는 유난히 붉은색을 좋아하여
 붉은 사암을 사용하여 이 시크리성을 건설하였고 14년간 이곳에서 무굴제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시크리는 제국의 수도가 들어 오기에는 부족한 땅이었다.


*우선 식수가 부족하여 많은 인원이 거주하기 
불편하였고 성자도 죽었기 때문에 다시 악바르는 아그라로 돌아간다.



*수도를 옮긴 후 폐허가 된 시크리성,
재미있는 건물 양식을 띤 기도소를 보면 종교의 자유를 주장한 
그의 뜻대로 건물에는 힌두교를 상징하는 연꽃무늬와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 
그리고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아치가 어우러져 있다.



*성 바깥쪽으로 부족했던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당시로서는 거대한 물탱크도 보이고, 7 번의 커다란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여 전리품을 보관하였다는 건물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의 우아함과 왕의 침실, 
궁녀들의 수영장, 궁녀들이 모여 화장을 했다는 방과 화장 후 왕의 부름에 따라 왕의 침실로 가는 비밀통로 등 
모두 대단한 건축물이다.


*보석의 집이라고도 불리는 
접견실 디와니카스 내부의 화려한 기둥이다.





*시크리성은 무굴제국의 3대 황제였던 악바르 대제가
 아들을 낳을 것을 예언해준 슬림지스키 성자의 신통력에 감탄하여 아그라에 있던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기 위하여 지었던 성이다.

불과 14년간의 수도 이전에 불과하였지만 
붉은 사암과 대리석을 이용한 건축물은 현대에 보아도 경이로울 뿐이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3 명의 왕비가 거처했다는 
궁궐이 나오는데 아들을 낳은 첫째 왕비 조다바이의 궁전은 넓고 화려하였다.
아름다움은 더욱 심화된다.


*시크리성은 아그라의 남서쪽 35km 지점에 위치하여 붉은 사암으로 만든 이

 슬람 양식의 성으로서 일부만 복원이 되어 있는데 이성은 아크바르 대제의

 후사와 관련이 깊은 성이다.


*고기를 먹지 않은 힌두교인이었던 
그녀를 위한 전용 요리실까지 갖춘 대단한 궁전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 둘째와 셋째 부인의 궁전은 초라했다.

비밀통로까지 두고 수많은 궁녀들을 상대했던 황제... 
그 틈바구니에서 둘째와 셋째는 별을 딸 수 있는 하늘이나 볼 수 있었을까?
 



*디완 이 카스(Diwani Khas)
왕궁에서 가장 볼거리가 많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정자 형태의 건물 네 개를 얹혔다. 2층임에도 불구하고 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기둥을 세우고 사방으로 들보 형태의 통로를 만들었다. 특히 기둥의 장식이 인상 깊다. 저 장식이 무슨 모양일까 잘 이해가 안갔었는데, 나중에 힌두교의 뱀 모양이라고 설명을 들으니 수긍이 갔다.



*악바르대제가 살았던 처소 앞에는 불교 냄새가 나는 인공연못이 있고


*악바르 황제는 유난히 붉은 색을 좋아하여 붉은 사암을 사용하여 시크리성

 을 건설하였고 14년간 이 곳에서 부굴제국을 통치하였다.그러나 시키리는

 제국의 수도가 들어 오기에는 부족한 땅이였다.

*연못 정원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의 모습.

*35도의 태양을 밭으며 힘겨운 여정..

*한낮의 푸른색이 시원함을 느끼게 하네요.

*우선 식수가 부족하여 많은 인원이 거주하기 힘들고 성자도 죽었기 때문에

 다시 악바르는 아그라로 이주.

*수도를 옮긴 후 폐허가 된 시크리성,재미있는 건물 양식을 띤 기도소를 보며

 종교의 자유를 주장한 그의 뜻대로 건물에는 힌두교를 상징하는 연꽃무늬와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이슬람교를 상징하는 아치가 어우려져 있다.

*우리는 부부애를 과시 합니다.

*점심을 먹기 위해 호텔에서 잠시...

*호텔 수영장에서...

*다른 포즈도 한번....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지라도 영원히 사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 아름다운 사랑을 아름다운 건축물로 표현한 곳이 인도에 있습니다. 바로 아그라의 타지마할!

인도의 수도 델리의 남쪽에 자리한 아그라의 자무나 강가에 서면 순백색 대리석의 조화가 아름답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한 타지마할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어느 시인은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말도 남겼지요.

타지마할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으로 인도 최대의 이슬람 제국이었던 무굴 왕조의 5대 술탄 샤 자한이 왕비 뭄타즈 마할을 위해 만든 무덤입니다. 자한은 본래 남다른 예술적 재능을 타고났어요. 특히 건축을 사랑했지요. 타지마할을 비롯해 델리 성, 자마 마스지드라고 불리는 이슬람 사원 등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샤 자한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은 아름다운 왕비 뭄타즈 마할이었어요. 그는 잠시도 왕비 곁을 떠나지 않았어요. 전국 순회 여행과 심지어 정복 전쟁에까지 그녀와 함께 다녔습니다.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은 열네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녀가 그만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샤 자한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지요.

“나도 당신을 따라가겠소!”

정말 샤 자한은 뭄타즈를 따라 죽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는 여러 자식들의 아버지이고, 한 나라의 술탄이기에 차마 그렇게 할 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샤 자한은 사랑했던 왕비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온갖 예술적 정열과 국력을 쏟아 22년 동안 그녀의 무덤 궁전을 지었고, 그것이 바로 타지마할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무덤을 22년에 걸쳐 만들어 놓고 술탄 샤 자한의 슬픔은 좀 달래졌을까요? 그건 아니었어요. 샤 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되고 나서 타지마할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아그라 성을 다시 지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매일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내내 슬픔에 잠겨 있었어요. 그의 슬픈 사랑은 죽어서 왕비 곁에 나란히 묻히고서야 끝이 났지요.

자, 이런 아름다고 슬픈 사랑 이야기가 담긴 타지마할을 좀 더 가까이에서 살펴봐요.

타지마할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페르시아 건축물의 느낌이 나는 이슬람 양식이에요. 하지만 인도 고유의 아름다움이 더해져서 독특함을 풍깁니다. 타지마할의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남북으로 기다란 분수 정원이 순례객들을 반깁니다. 정원을 지나면 하얀색의 대리석 벽돌로 정교하게 쌓아 올린 가운데의 돔과 네 개의 돔, 역시 네 개의 원형 첨탑(미나레트)이 네 방향으로 솟아 있는 것이 보이지요.

건물 입구의 둥근 모양은 이슬람의 모스크 양식으로,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형형색색의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답니다. 하얀색 대리석은 인도의 마캄 지방, 흑색 대리석은 남인도, 녹색 대리석은 남아프리카와 러시아에서 각각 가져와서 사용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세계가 한곳에 모인 것이나 다름없지요. 특히 정문과 내부 벽면은 대리석 바탕에 연꽃, 재스민, 장미 꽃 문양에 옥과 루비, 진주, 산호 등의 보석을 박아 화려하고도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높이가 75미터나 되는 타지마할의 내부에는 입구 1층 한가운데에 뭄타즈 마할의 무덤이, 그리고 그 옆에 샤 자한의 무덤이 나란히 남북으로 놓여 있어요. 얼굴을 서쪽 메카 방향으로 향하게 해서 전통적인 이슬람 묘지 구조를 갖추고서 말이에요.

그런데 1층에 있는 이 무덤들은 진짜 무덤이 아니에요. 순례객들을 위한 상징물일 뿐이지요. 그럼 진짜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요? 진짜 무덤은 지하층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모습으로 놓여 있습니다. 타지마할이 세워지던 당시에는 왕족의 묘실에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풍속이 있었어요. 그래서 순례자들에게 참배의 기회를 주려고 똑같은 형태의 가짜 무덤을 만들어 놓은 것이래요.

연인들이 영원한 사랑을 위해 기도하는 곳 타지마할, 천하의 황제라도 사랑이 없다면 사람은 행복할 수 없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 줍니다.

       

 

*무굴 제국 황제인 샤 자한이 아내인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 영묘는 뭄타즈 마할('선택받은 궁전'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이 타지 마할로 바뀌었다고 한다.
1632년경에 착공되었고 매일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는 모스크·성벽·통로 등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는데 총 22년의 세월과 4,000만 루피의 비용이 들었다.
타지 마할의 중앙에는 정4각형 정원이, 남쪽에는 사암 출입구와 부속 건물이, 북쪽에는 영묘가 있다. 영묘의 동서 양쪽에는 모스크와 이와 완전 대칭을 이루는 '자와브'가 있다. 영묘의 내부는 8각형 방을 중심으로 황제 부부의 기념비가 있고 지하 납골당에는 진짜 석관이 있다. 무굴 제국의 건축 관행은 나중에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로서 타지 마할을 구상하고 설계했다.

*타지마할로 들어가는 입구

붉은색의 사암으로 건설되었는데 흰 대리석 등이 표면을 장식하고 있다. 중앙 부분은 이슬람 양식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타지마할 (Taj Mahal)

무굴 제국 황제인 샤 자한이 아내인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 영묘는 뭄타즈 마할('선택받은 궁전'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이 전와되어 타지 마할이라고 한다.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은 1612년에 황제와 결혼한 뒤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는 반려자로 지냈으나 1631년 부란푸르라는 도시에서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타지 마할은 인도,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 등지에서 온 건축가들의 공동 설계에 따라 1632년경에 착공되었다. 매일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는 모스크·성벽·통로 등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다. 타지 마할 전체가 완공되기까지는 22년의 세월과 4,000만 루피의 비용이 들었다.

이 복합 건물은 너비 580m, 길이 350m인 직4각형으로, 남북으로 늘어서 있다. 이 중앙에는 한 변이 305m인 정4각형 정원이 있고, 그 북쪽과 남쪽에 그보다 약간 작은 2개의 직4각형 구역이 있다. 남쪽 구역은 타지 마할로 들어가는 사암 출입구와 거기에 딸린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 구역은 야무나 강가까지 뻗어 있고 거기에 영묘가 있다. 영묘의 동서 양쪽에는 완전 대칭을 이루는 2개의 건물이 붙어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모스크이며 동쪽의 것은 미학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운 이른바 '자와브'이다. 모퉁이에 8각형 탑이 솟아 있는 높은 벽이 북쪽 구역과 중정을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 울타리 밖에는 마구간과 경비병 숙소가 있다.

무굴 제국의 건축 관행은 나중에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로서 타지 마할을 구상하고 설계했다. 이 복합체의 북쪽 끝에는 영묘·모스크·자와브 등의 가장 중요한 건물들이 모두 모여 있다. 붉은 시크리 사암으로 지은 모스크와 자와브에는 대리석을 두른 돔과 아키트레이브(평방)가 있으며 일부 표면이 단단한 돌(pietra dura)로 장식되어 있어, 순수한 하얀색 마크라나 대리석으로 지은 영묘와는 색깔과 감촉에서 대조를 이룬다(→ 피에트라두라).

영묘는 높이 7m의 대리석 대좌 위에 지어졌으며 사방이 똑같은 모습으로, 모서리는 정교하게 깎여 있고 각 면마다 높이 33m로 우뚝 솟은 거대한 아치가 있다. 높은 원통형 벽(drum)으로 떠받친 양파 모양의 2중 돔이 이 건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영묘의 각 아치 위에 있는 난간과 각 모서리 위에 있는 장식 뾰족탑 및 돔을 덮은 원통형 정자는 영묘의 스카이라인에 율동감을 준다. 대좌의 각 모서리에는 3층 미나레트가 서 있는데, 대좌와의 대리석 접합부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영묘의 대리석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영묘의 내부는 8각형 방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얕은 부조 무늬와 아름다운 돌로 장식된 이 묘실에는 황제 부부의 기념비가 있다.

이 대리석 무덤은 아름다운 돌로 장식되어 있으며, 여기저기에 보석을 박은 투각한 대리석 막이 둘러처져 있다. 정원과 같은 높이에 있는 지하 납골당에는 진짜 석관이 있다. 타지 마할은 무굴 제국 최고의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의 하나로 여겨진다.

*타지마할

남녀 간의 깊은 애정은 때로 기적을 만들기도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되는 인도의 타지마할도 ‘세기적인 사랑’이 탄생시킨 걸작이다.

칭기즈칸의 후손인 무굴족 지도자 바부르(Bābur, 1482~1530)는 1526년 힌두스탄의 통치자를 자처하며 인도에 이슬람제국인 무굴왕조를 세웠다. 무굴제국은 전성기에 서쪽의 카불에서 동쪽의 벵골만까지, 북쪽의 카슈미르에서 남쪽의 뭄바이까지 뻗어 있었다.

무굴제국 최초의 황제 바부르를 기념하는 그림으로 바부르가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를 공격하는 장면이다. 바부르 역시 냉혹한 정복자였고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황제였다.


무굴족은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Akbar, 1542~1605)는 농민 3만 명을 폭동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도끼로 난도질해 죽였고 심지어 폭도 2000명의 해골로 피라미드를 쌓아 반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무굴제국의 통치자들은 잔인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면서도 이와는 정반대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바부르는 문학을 좋아했고 정원 가꾸는 데 열심이었다. 악바르는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문답과 철학적 담론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손자인 샤 자한(Shāh Jahān, 1592~1666)은 건축에 매혹되었다.

‘세계의 왕’이란 칭호를 얻은 샤 자한은 서쪽의 칸다하르에서 동쪽의 아삼, 북쪽의 파미르고원에서 남쪽의 데칸고원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다. 인도 지배자 중 이토록 거대한 제국을 통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샤 자한은 어느 날 시장에서 자질구레한 장신구를 팔고 있던 열아홉 살의 처녀 바누 베감을 보고 한눈에 반해 황비로 맞아들였다. 그녀를 끔찍이 사랑한 황제는 그녀에게 ‘궁전의 꽃’이라는 의미의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타지마할은 ‘마할의 왕관’이란 뜻이다. 뭄타즈 마할은 샤 자한의 두 번째 부인이며 황제의 하렘에는 5000명의 후궁이 있었지만 샤 자한이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은 뭄타즈 마할이 유일하다.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

전성기 대제국의 풍부한 물자도 절대 권력도 5000명에 이르는 후궁들도 두 사람의 사랑을 막지 못했지만 그 사랑을 평생 이어주지도 못했다. 타지마할이라는 기념비적 건축물만이 남아 젊은 나이에 막을 내려야 했던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준다.


뭄타즈 마할은 샤 자한의 부인이면서 가장 믿음직한 동료였다. 그들은 무굴제국 곳곳을 함께 여행했는데 전쟁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신의 질투였을까, 이 세상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던 뭄타즈 마할은 임신한 몸으로 남편과 함께 출정한 데칸고원의 전쟁터 근처 천막에서 아이를 낳다가 서른아홉이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17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두 사람 사이엔 14명의 자식이 있었다) 급작스러운 아내의 죽음에 황제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샤 자한은 하루아침에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아내를 그리워한 황제는 2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고 사후세계에서의 재회를 기약했다. 샤 자한은 뭄타즈 마할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를 지어주겠다고 한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2년간에 걸쳐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타지마할이다.

타지마할

포르투갈의 만리케 전도사는 타지마할과 관련해 이런 글을 남겼다. “제국의 황제는 건축가들을 불러서 죽은 아내를 기리는 거대하고 장엄한 무덤을 짓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황제는 건축가들에게 300만 루피를 지불하며 더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세기 인도의 저명한 시인인 타고르는 타지마할을 영원의 얼굴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라고 했다.



*타지마할

야무나강을 지나는 여행객 너머로 타지마할이 동화 속의 세계처럼 펼쳐져 있다. 어쩌면 무굴제국의 왕과 왕비는 그 세계에서 지금도 함께하고 있을지 모른다. 당시 한 사관(史官)은 타지마할을 이렇게 기록했다. “웅장한 건축이 이루어졌다. 이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시대의 눈이 아홉 개 천국의 지붕 아래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으며, 이것과 비슷한 집은 시대의 귀가 모든 시대를 통틀어 일찍이 들었던 적이 없었다.”


*석양 무렵 붉은색 옷으로 갈아입은 타지마할

400킬로미터 바깥에서 코끼리가 끄는 수레에 실려 운반된 타지마할의 우윳빛 대리석은 태양의 각도 등에 따라 갖가지 오묘한 색을 발산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다. 중앙의 긴 못은 이슬람의 코란에 등장하는 풍요로운 천국의 연못을 상징한다. 샤 자한은 타지마할 공사 중에 야무나강의 물줄기를 바꿔 타지마할을 거쳐 흐르게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고자 한 샤 자한의 의지 덕분에 이 공사는 국가적 대공사가 되었다. 막대한 예산과 노동력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의 기술자들이 아그라로 모여들었다. 건축가로는 페르시아 출신의 우스타드 이샤와 이란 출신의 이사칸이 초빙되었고 각 분야별로 보르도 · 베네치아 등지의 기술자들이 참가했다. 이 공사에 동원된 건축가와 인부는 2만 명가량이었고 코끼리도 1000마리가 동원되었다.

건축에는 페르시아 · 중앙아시아 · 우즈베크 · 이탈리아 · 프랑스 · 라자스탄에서 수입된 대리석 · 청금석 · 홍옥석 · 공작석 · 터키석 등의 석재를 사용했고 외벽은 루비 · 사파이어 · 옥과 같은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500킬로그램 이상의 금이 사용되었다.

이 모든 경비는 샤 자한이 현금으로 지불했다. 전체 비용은 400~500만 루피로 추측되는데 당시 최고 기술을 가진 석공의 한 달 임금은 9~20루피였다. 놀라운 것은 타지마할 공사 중에 세금을 한 푼도 올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타지마할은 ‘개인적인 공사’였기 때문에 타지마할 건설 명분으로 세금을 올리지 않은 것이다. 그가 타지마할을 건설하면서 지출한 비용 규모는 국가 전체 예산의 5분의 1이었다.

*타지마할은 궁전도 아니고 50미터짜리 미나레트(minaret, 모스크의 일부를 이루는 첨탑) 네 개가 있지만 모스크도 아니다. 미나레트는 원근법적 효과를 고려해 바깥쪽으로 약간씩 휘게 건축했고 지진이 일어나더라도 가운데의 영묘 쪽으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닐 파킨은 영묘(靈廟, mausoleum)인 타지마할이 인도 · 이슬람 건축의 가장 완벽한 전형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첫째, 타지마할은 샤 자한 가즈(80~82센티미터)를 기준 단위로 삼아 측량함으로써 엄밀한 기하학을 구현할 수 있었다. 둘째, 대칭구도를 일관적으로 관철시켜 중앙 축을 중심으로 한 좌우동형 속에서 각 부분들을 통합했다. 셋째, 자재 · 형태 · 색채에서 아주 세밀한 장식에 이르기까지 질서를 부여했다. 즉, 누구나 감탄을 금치 않는, 좌우대칭의 균형미와 세련미가 넘치는 빼어난 예술적 건축물을 구현한 것이다.

*특히 타지마할 장식은 모자이크의 일종인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또는 콤메소 디 피에트레 두레’ 기법을 사용해 아름다움을 더한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의 건축물에서도 볼 수 있는 피에트라 두라 기법은 대리석에 꽃 등의 문양을 판 후 그 홈에 각각 다른 색의 돌이나 준보석을 박아 넣은 것을 말한다. 여러 나라에서 수입된 색색의 돌들이 순백의 대리석과 어우러져 오묘한 빛을 발하며 시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이 기법으로 주로 꽃을 표현했는데 이는 이슬람에서 동물이나 신상의 조각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붉은색 사암과 대리석으로 건축한 30미터 높이의 출입문을 지나면 중앙을 중심으로 좌우측의 정원 · 연못 · 나무 등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 대칭구조와 건물에 적용한 기하학적 계산의 완벽함은 지금의 건축학자들이 보아도 감탄할 만하다. 이 모든 것은 아주 계획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무굴제국에서는 건축물을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않는 게 관행이었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로서 타지마할을 구상하고 설계했다.


백색 대리석으로 마감한 본당 건물은 지면에서 6~7미터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기단의 크기는 한 변의 길이가 96미터인 정사각형이다. 영묘 건물 자체의 크기는 56.7미터의 정사각형이고 바닥 면에서 돔의 정점까지는 57미터에 달한다.

이중의 돔(양파껍질처럼 안쪽 덮개 위에 바깥 덮개가 있는 돔)은 페르시아 양식 그대로이다. 흰 대리석으로 만든 것으로 생각하지만 벽돌에 흰 대리석을 씌운 것이다. 벽돌은 당시 널리 사용하던 표준 크기인 19×12.5×3센티미터의 것을 사용했다. 벽돌을 주로 긴 쪽으로 쌓았지만 석회 모르타르를 두텁게 바른 다음 짧은 쪽으로 쌓기도 했다.

둥근 천장은 모르타르를 두텁게 바르고 동심원의 고리들을 만들어 쌓았다. 이 건축기법을 통해 내부에 강화벽을 세우지 않고도 반구형의 내부 돔과 공 모양의 외부 돔을 지지할 수 있었다. 외부 돔 위에는 9미터 높이의 작은 청동 뾰족탑을 얹었고 돔 전체에는 금박을 입혔다. 돔은 이스탄불 출신의 이스마일 에펜디(Ismail Effendi) 작품으로 추정한다.

영묘 정면은 기하학적 형태들이 차분하게 통일된 모습을 보여준다. 반대로 ‘피에트라 두라’ 기법으로 대리석 안에 반질반질한 장식용 돌들을 연결부 없이 집어넣은 ‘플로렌스 모자이크’와 반석에 새겨진 보주들은 페르시아의 모티프임에도 불구하고 인도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타지마할 건축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단을 쌓을 토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타지마할의 건설 부지가 강둑의 부드러운 모래 지반이기 때문에 웅장한 건물을 지탱할 토대를 다지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에 건축기술자들은 나무로 통을 만들고 그 안에 고무와 쇠를 채우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건축법은 20세기에 이루어진 조사에서 밝혀졌다.

타지마할은 토목공학적으로도 수작이다. 경계벽은 평방피트(약 0.093평방미터)당 9톤의 무게를 지탱하는 데 반해 돔 자체의 무게는 1만 3000톤 이상이다. 대리석으로 마감한 구조물을 벽돌과 나무 · 받침대에 박은 쇠테로 보강한 아치가 지탱하고 우물을 이용하여 타지마할을 야무나(Yamuna)강의 범람으로부터 보호한다.

중심부의 기다란 연못에 비쳐 보이는 타지마할의 모습은 그 신비스러움을 더하는데 그 때문인지 몰라도 타지마할 입구에서 묘까지 250미터의 거리가 한층 멀게 느껴진다. ‘백색의 진주’, ‘꿈의 궁전’으로 불리는 타지마할은 낮에는 흰색으로 보이지만 아침에는 자줏빛, 황혼녘에는 황금빛으로 변하며 시시각각 보랏빛과 푸른빛 등 그 색채가 수없이 변한다. 달빛에 반사되어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영국 작가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1865~1936)은 타지마할을 방문한 뒤 다음과 같이 적었다. “순수한 모든 것, 성스러운 모든 것, 그리고 불행한 모든 것의 결정이다. 이 건물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석양 무렵 붉은색 옷으로 갈아입은 타지마할

400킬로미터 바깥에서 코끼리가 끄는 수레에 실려 운반된 타지마할의 우윳빛 대리석은 태양의 각도 등에 따라 갖가지 오묘한 색을 발산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다. 중앙의 긴 못은 이슬람의 코란에 등장하는 풍요로운 천국의 연못을 상징한다. 샤 자한은 타지마할 공사 중에 야무나강의 물줄기를 바꿔 타지마할을 거쳐 흐르게 했다.


네 개의 작은 정자와 연결된 중앙홀로 들어가면 보석을 넣어 정교하게 가공한 덩굴 장식 뒤로 유골이 없는 가묘가 있다. 이 가묘는 지하에 있는 진짜 무덤의 도굴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조명이 없으므로 빛이 투과되도록 정교하게 새겨진 병풍석이 공간을 신비스럽게 만드는데 빛의 흐름을 따라가면 가묘 주위에 박혀 있는 43개의 준보석이 영롱하게 반짝거려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뭄타즈 마할의 유해는 한 층 아래의 지하묘에 안장되어 있으며 샤 자한의 유해도 함께 있다. 원래 샤 자한은 야무나강 건너편에 타지마할 같은 자신의 묘를 검정 대리석으로 건설해 견고한 황금다리로 타지마할과 연결할 계획이었지만 그의 거창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안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정문의 모습.


*타지마할을 가까이서 본 모습

대리석으로 된 벽을 장식하기 위해 샤 자한은 아프가니스탄 · 티베트 · 중국 · 펀자브 · 페르시아 · 예멘 · 유럽 · 아라비아해 등으로부터 산호 · 옥수 · 얼룩마노 · 벽옥 · 수정 · 청금석 · 터키석 등을 사들였다. 그 외에도 많은 상인들에게 다이아몬드 · 자철광 · 홍옥수 등을 구입 해오도록 했다.




영묘 안에 있는 석관

타지마할은 정원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좌우가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도록 설계되었는데 석관이 유일하게 대칭을 깨고 있다. 샤 자한은 원래 강 건너편의 타지마할과 마주 볼 수 있는 곳에 검은 대리석으로 된 똑같은 건물을 지을 생각이었으나 그의 사후 수많은 가족을 살해하고 황제가 된 아들 아우랑제브가 그 계획을 취소했다. 대신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영묘 중앙에 있는 어머니 석관 왼쪽에 안치했다. 중앙에는 어머니의 석관이, 그 왼쪽에는 아버지의 석관이 위치하고 있다. 이들의 석관을 천국을 찬미하는 코란의 경구가 장식하고 있지만 실제 시신은 지하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

            

샤 자한은 국민들의 세금을 올리지 않고 자신이 가진 권력과 재산을 이용해 타지마할을 건설했지만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ēb, 1618~1707)는 샤 자한의 무차별한 재산 낭비가 왕국을 위험에 빠

뜨렸다는 이유로 왕위를 찬탈했다. 샤 자한은 생애 마지막 8년을 아그라성에서 보냈다. 그래도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의 소원 하나는 들어주었다. 하얗게 빛나는 위대한 사랑의 증거를 아그라성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아그라성은 악바르가 건설한 성으로 높이 20미터, 폭 2.5킬로미터의 대형 요새였으나 샤 자한이 황제가 된 후 평화정책을 견지해 타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궁전으로 바꾼 것이다. 근래 외벽 문양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었다. “세계가 멸망하고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뭄타즈 마할과 샤 자한이 부활할 것이다.”              



야무나강 서쪽 언덕에 있는 아그라성

16세기 중반 무굴제국의 제3대 황제인 악바르가 제국의 수도로 삼으며 건설했다. 성에는 이슬람 사원과 궁전 등이 있는데 궁전의 대부분은 타지마할을 세운 샤 자한이 건설했다. 벽면은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어‘붉은 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198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무굴제국이 최고 전성기를 구가할 때 건설된 타지마할은 끊임없이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은으로 만든 출입문은 녹여지고 대신 구리 문이 세워졌으며 수많은 귀금속들이 약탈되었다.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인들은 돔의 금박을 떼어내고 구리로 대체했다. 인도 독립 후 지속적인 복원사업으로 타지마할은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았지만 아그라에 산재한 200여 개의 주물 공장에서 뿜어내는 독가스 때문에 흰 대리석 기념비는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 특히 타지마할 주변 자연환경의 변화가 타지마할을 심각하게 기울게 만들어 자칫하면 붕괴될 수도 있다.*


*타지마할의 정원 잘 가꾸어져 있네요.인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타지마할 .

*타지마할 정문을 배경으로 ....

*인도하면 잔세계인의 마음속에있는 아름다운 사랑이 깃들어 있는 사랑의

 상징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의 요람 타지마할.


*아그라성 입구의 모습.

*아그라 성은 인도 아그라에 위치한 성으로 타지마할과는 야무나 강을 사이에 두고 북서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마주보고 있다. 붉은 사암의 성채와 내부의 하얀 대리석 건물이 어우러져 웅장함과 정교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건축물이다.


유력한 설에 따르면 16세기말 무굴 제국악바르 대제가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기면서 건축하기 시작해서 그의 손자인 샤 자한타지마할을 건축하면서 더욱 발전시킨 것이라고 한다.

아그라 성은 타지마할을 축조하면서 너무 많은 재정을 낭비한 샤 자한이 말년에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도 유명한데 샤 자한은 야무나 강 너머의 타지마할이 가장 잘 보이는 무삼만 버즈(Muasamman Burj)에 갇혀 있다가 끝내 거기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그라(Agra)인도 야무나 강변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있다. 1526년부터 1658년까지 무굴 제국의 수도로 발달했는데, 당시 건설된 타지마할, 아그라 성 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제항기르 궁전

 1605년 무굴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아들 제항기르(Jehangirs)의 거처로 마련한 곳으로 추정된다. 힌두 양식과 아프가니스탄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외관을 지녔으며, 궁전 내부 또한 규모와 구조에 가히 놀랄 만하다. 회랑 사이마다 작은 문이 많이 있는데, 아름답고 섬세한 격자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궁전 안에 비밀통로가 많이 있다는 것. 마치 미로같이 통로가 짜여 있어 자칫 길을 잃기 쉽다.

*고성이 세월의 흥적을 느끼게 하네요.

*ㄷ형의 디완-이암의 회랑 가운데로 정원이 가꾸어져 있네요.

*정원을 배경으로...

*부부의 인증샷.

*제항기르 궁전을 뒤로하고...

*아그라성은 야무나강가의 타지마할을 조망할수 있는 3대명소에서 줌으로 당

 겨 봅니다.

*아그라성에서 야무나강가를 배경으로...

*둘이서...

*실내에서 공간을 이용해 바깥세상으로 탈출....

*[문명 이야기 여행]

엄격한 신분의 벽 - 카스트 제도

인도에는 엄격한 신분 제도인 카스트가 있었어요. 사제인 브라만, 전사인 크샤트리아, 상인이나 농민인 바이샤, 노예인 수드라의 4개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고, 여기에 인간보다 낮게 여겨져서 분류에 속하지도 못하는 최하층 불가촉천민인 하리잔이 있어요.

인도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카스트 내에서만 결혼을 해야 했고, 카스트에 따라서 할 수 있는 직업도 정해져 있었어요. 자기보다 낮은 카스트와 함께 있으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해서 같이 있는 것도 꺼렸답니다. 카스트 제도는 처음에 인도를 정복한 아리아인들이 원주민들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제도였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낮은 카스트로 태어난 것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라는 힌두교 의식이 퍼져 나가면서 점차 신분 제도로 정착하게 된 것이지요.

지금 인도는 공식적으로 카스트 제도가 폐지되었어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도 많이 늘었고요. 하지만 카스트는 여전히 일상 속에서 많은 차별을 낳고 있어요. 심지어 힌두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해도 카스트에 따른 차별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해요. 그러니까 인도에서 상대방에게 카스트를 물어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 참! 외국인은 카스트가 없기 때문에 인도에서는 제일 낮은 신분이에요.

*제항기르의 목욕탕이 정원에 전시.

*아그라성을 뒤로하고 다음코스 타지마할의 일몰구경가요.

*거리의 풍경.

*타지마할의 일몰감상의 최적지 호텔옥상에서 맥주와 음료수로 석양을 감상

 해요.

*아그라에서의 석양.

*옥상에서 바라 본 아그라시내의 전경.

*오늘의 하루를 정리하는 석양이 서서히 ....

*그렇게 아름다운 일몰은 아니것 같은데...

*옥상에서 바라 본 조금전에 구경한 타지마할의 모습.

*이건물 옥상에서 아그라의 일몰감상 우리는 보금자리로 떠나요.


*북인도 여행3일차 일정 마무리합니다.

 35도이상의 더운날씨로 힘든여정이 계속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