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

2016년 여름휴가 해외여행(서유럽3개국)9일째

문수산 아래 2016. 8. 31. 22:06

*서유럽여행 9일째 프랑스 파리시내 관광


*2016년 유럽컵 결승전이 열린 프랑스 파리 축구 경기장

*베르사이유 궁전

https://classconnection.s3.amazonaws.com/56/flashcards/1143056/jpg/versailles_aerial_view1331175093742.jpg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km 가량 떨어진 베르사유 시에 있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건설한 궁전.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태양왕 루이 14세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대 건축물이다. 건설에는 무려 25,000~36,000명의 인부가 매년 동원되었다. 궁전 건물의 면적보다 더 넓은 정원이 유명하며[4], 별궁으로 대 트리아농 궁과 소 트리아농 궁이 있다. 루이 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와 왕실 가족들이 거주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주된 배경이기도 하다.



*베르사유에 최초로 궁전이 들어선 것은 1624년으로 U자형의 날개건물 구조의 궁성으로 외벽은 회칠만 한 상태였으나 1634년 모서리쪽에 방을 증설하면서 현재의 정면부 파사드의 기초가 되는 붉은색 벽돌과 회색빛 뒤퉁이 벽인 우석과 일정 간격으로 늘어진 조각상으로 된 파사드로 바꿔졌다. 이 때는 루이 13세의 사냥용 별장으로 지어진 것이어서 큰 의미는 없었다.


루이 13세 사후 한동안 방치되다가 1651년 루이 14세가 한 번 방문한 이후 1661년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하면서 보 르 비콩트를 척도로 삼고, 푸케가 자신의 궁성을 설계한 예술가들인 루이 르 보와 샤를 르 브룅, 앙드레 르 노트르를 시용해 각각 건축, 실내 설비, 정원 정비 들을 맡기면서 1665년까지 베르사유 궁성의 확장공사를 시작해, 궁성 남쪽에 궁성의 파사드와 비슷한 건물 몇 채를 신축했고, 옛날 궁성의 손님맞이 뜰을 대리석 포장을 했다.

이후 1668년 르 보의 개축 계획을 실행해 1670년까지 양측면에 아파트먼트인 두 로이(Du Roi), 드 라 라헨느(De La Reine)라는 두 채의 날개건물을 증개축해 대리석 외피로 된 파사드로 바뀌었고, 정원쪽도 마찬가지로 양면에 새로 증축된 날개건물과 연결되는 두개의 날개건물을 증축했고, 양측면과 마찬가지로 대리석 외피로 된 파사드로 되었다. 이때 나중에 거울의 방이 들어설 부분이 발코니로 양쪽의 날개건물과 연결되었다.

이후 1677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를 왕궁으로 삼겠다는 결정을 했고, 죽은 루이 르 보를 대신해 쥘 아르두앵 망사르를 베르사유 궁전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해 베르사유 궁전의 다음 증축을 계획하게 했다. 그리고
1682년, 루이 14세파리에서 베르사유 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계속해서 대대적인 건설을 하여 1686년 후면측 발코니를 개축해 거울의 방을 완성했고, 동쪽 측면측에서 새로 aile du midi라는 새로운 날개건물을 신축, 다시 궁전 남쪽으로 대마구간(Grande écurie)와 작은 마구간(Petite écurie)가 완공, 궁전과 두 마구간 사이에 aile des ministres라는 l자형의 건물 두 체를 신축했다. 
 뒤이어 aile des ministres와 aile du midi 사이에 정사각형에 중정이 있는 Grand commun이 세워졌고, 다시 서쪽 측면에 북쪽 날개(Aile Du Nord)라는 새로운 날개건물이 신축되어 베르사유 궁전의 전체모습은 지금의 ㅠ형의 구조가 완성되면서 화려한 궁전으로 거듭났다. 또한 귀족들의 권력을 누르고
절대왕정을 확립하려는 루이 14세의 의도에 따라 대귀족들은 강제로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겼으며, 베르사유 시에는 귀족들의 저택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번영을 누리게 된다. 이후로 프랑스 앙시앵 레짐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1710년 북쪽 날개에 왕실 성당인 생루이 성당이 신축되면서 봉헌되었다.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증손자 루이 15세가 왕위에 올랐다. 루이 14세의 조카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가 섭정을 했기 때문에 오를레앙 가의 저택인 파리팔레 루아얄이 중심이 되고 루이 15세는 튈르리 궁에 거처했다. 1722년, 성인이 되자 루이 15세도 베르사유로 옮겨와서 다시 베르사유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고, 몇몇 방을 제외하고, 기존의 바로크 양식의 인테리어 대신 로코코 양식의 인테리어 리모델링 되었고, 1770년 다시 북쪽 날개 끝으로 왕식 극장이 신축되었다.

1789년, 루이 16세 때 일어난 프랑스 혁명으로 왕가가 민중의 압력에 밀려 거처를 파리로 옮겨오면서 베르사유는 방치되었고 이후 루이 18세나 샤를 10세를 비롯한 부르봉 왕조의 국왕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루이 나폴레옹 같은 황제들도 여기에 머물지 않아 궁전으로서의 기능이 정지했고, 오를레앙 왕가의 루이 필리프에 의해 박물관으로 개장되었다. 그러다가 보불전쟁이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나면서 빌헬름 1세가 이곳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 황제로 즉위한 흑역사(…)가 있다. 이후 1919년에 똑같은 거울의 방에서 1차 세계대전 종전 강화회의가 열려 베르사유 체제가 형성됐다.

현재는 박물관 겸 관광지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며 오디오 서비스가 지원되고 있다.
한국어 서비스는 성우 정재헌씨와 서혜정씨가 녹음했는데 그 연기 솜씨가 매우 절륜하다.(...)

*루이 14세가 이렇게 거대한 궁전을 건설한 목적은 다름아닌 절대왕정의 확립이었다. 실제로 베르사유 궁전이 세워지기 전인 1661년 9월 5일 재무장관이었던 니콜라 푸케를 체포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체포되기 전 푸케는 믈룅 근처에 자신의 궁정인 보 르 비콩트를 완공한 기념으로 왕을 비롯한 6천명을 초대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다가 걸국 그의 부를 횡령으로 여긴 루이 14세의 눈밖에 나 모든 재산이 몰수당하고, 그자신 또한 종신감금형을 선고받았다. 일단 베르사유는 푸케의 궁전이었던 보 르 비꽁뜨(Vaux le vicomte)를 척도로 삼았고, 설계자들 또한 보 르 비꽁뜨를 설계했던 사람들이었다.

베르사유의 건설은 일종의
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오래된 도시인 파리는 여러 세력의 입김이 닿고 있었으며 부르주아, 대귀족들의 영향력이 강했다. 하지만 베르사유는 완전한 신도시라 왕실 이외에는 어떤 지역 권력이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당대의
랜드마크였다고 볼 수 있다. 거대한 건축물로 왕의 부(富)를 과시하고 왕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귀족들을 베르사유에 집합시켜서 왕 앞에 줄서기를 하도록 강요했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업적을 널리 선전하기 위해서 민간인들의 베르사유 출입을 크게 통제하지 않았고[5][6], 심지어 당시에 이미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둘러보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가이드북(…)을 루이 14세가 친히 제작하여 민간인들이 베르사유를 구경하고[7] 왕의 권력과 위엄에 감복하도록 했다.

*입장을 기다리면서

*끝도 없이 늘어선 입장줄의 모습

*베르사유 궁전 입구의 루이14세의 동상

*베르사유 궁전 울타리

*입장후 광장에서

*웅장한 건물을 배경으로

*광장의 모습

*광장에서 정문 방향으로

*베르사유 궁전의 웅장한 건물들

*헤라클레스의 방(Salon d’Hercule) : 북쪽 날개에서 중앙까지 연결해 주는 곳에 있는 이 방은 궁전의 방 중에서 가장 크다. 벽난로 위에는 베로네즈(Véronèse)의 성경을 주제로 한 대형 회화가 있고, 천장에는 르 모안(François Le Moyne)이 1733년~1736년에 그린 헤라클레스를 예찬한 천장화가 장식되어 있다.

*궁전 뒤쪽에 조성된 정원의 모습

*풍요의 방(Salon de l’Abondance) : 천장은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표현하는 천장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르브룅(Lebrun)의 제자인 르네 앙투안 오아스(René-Antoine Houasse)의 작품이다. 그리고 루이 14세의 아들과 손자의 초상화가 있다. 이 방은 연회와 뷔페 파티를 위해 사용되었다.

*풍요의 방(Salon de l’Abondance

*디아나의 방(Salon de Diane) : 천장에 사냥과 달의 여신 디아나가 장식되어 있다. 루이 14세의 흉상이 있는 이 방은 주로 당구와 게임을 즐기던 방이다.

*비너스의 방(Salon de Venus) : 천장에는 미의 세 여신에 둘러싸인 비너스의 모습이 있으며, 정면에는 로마식 복장을 한 루이 14세가 있다.

*풍요의 방(Salon de l’Abondance) : 천장은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표현하는 천장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르브룅(Lebrun)의 제자인 르네 앙투안 오아스(René-Antoine Houasse)의 작품이다. 그리고 루이 14세의 아들과 손자의 초상화가 있다. 이 방은 연회와 뷔페 파티를 위해 사용되었다.

*

파리의 수많은 정원을 설계한 조경가인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가 루이 14세의 명을 받고 1668년에 완성했다. 그 후에 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가 약간 수정을 했고, 조각과 분수대와 꽃병들은 르 브룅(Charles Le Brun)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루이 14세가 특히 심혈을 기울인 이 정원은 프랑스식 정원의 최고 걸작이라고 일컬어진다. 815ha의 넓은 부지에 라톤과 아폴론이라는 2개의 샘, 그랑 카날과 프티 카날이라는 십자형 대운하가 있고, 숲으로 조성된 4곳의 십자가로에는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연못이 있다.

4~10월에는 매주 주말에 분수를 이용한 ‘음악과 물의 쇼(Les Grandes Eaux Musicales)’가 열리는데, 분수의 작동 방식은 300년 전과 똑같다. 여러 곳의 큰 저수지에서 30km나 되는 배관을 통해 보내져 온 물의 압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7~9월 여름에는 불꽃놀이와 조명이 어우러진 ‘밤 축제(Les Fête de Nuit)’도 열린다.

*정원 옆의 조그만 호수도 있네요

*거울의 방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진 방으로 전체길이 73m, 나비 10.4m, 높이 13m로 정원을 향하여 17개의 창문이 있으며, 반대편 벽에는 17개의 거울이 배열되어 있으며 궁전 중앙 본관의 2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전쟁의 방 남쪽으로 평화의 방이 자리잡고 있으며 왕족의 결혼식, 외국사신의 접견 등을 행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장이 되었고 실제로 앞서 언급한 대로 이곳에서 보불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국왕인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압도적인 거대함 보다는 거울 중심의 화려한 장식이 볼거리임으로 꼭 밝은 날씨에 찾아가도록 하자.
이 거울의 방을 본따서 만든 건물들이 꽤 많다. 파리 중심에 있는 오페라 가르니에 건물이나 스페인 마드리드 왕궁 역시 이 거울의 방을 모방해 만든 방이 있다. 하지만 역시 모방작들은 원작을 따라가지 못하는지 비교해보면 베르사유궁의 거울의 방이 제일 화려하고 웅장하다

*아폴론의 방(Salon d’Apollon) : 아폴론은 그리스의 신이면서 태양의 신, 치유와 예언, 쾌락을 위한 음악과 시를 창조하는 신이다. 그래서 특히나 화려한데 루이 14세가 은제 왕좌에 앉아 접견을 했다 해서 ‘옥좌의 방’이라고도 불린다.

*원형거울의 모습

*각종 조각상들이 .....

*어떻해 이런 현상이 ....

*오목 거울의 움직임

*여기도 사람들이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c/Marie_Antoinette_amusement_at_Versailles.JPG/1024px-Marie_Antoinette_amusement_at_Versailles.JPG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을

 베르사유 궁전 지역 내부에 위치한 작은 시골 촌락 형식의 별궁으로 이러한 촌락이 베르사유 궁전에 세워진 이유는 18세기에 귀족들 사이에 유행한 시골 생활을 체험에서 비롯되었고 당시 왕비였던 마리 앙투안네트 또한 이러한 유행에 심취되어 이러한 촌락을 베르사유 궁전 내에서 1783년 조성했던 것이다. 촌락은 커다란 호수를 기점으로 총 10여채의 농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궁전보다 소박하지만 아기자기하고 예쁜 왕비의 집을 비롯하여 시골의 전형적인 물레방아와 그밖에 다양한 농가 시설, 단층집, 마리 앙투아네트 농장이라 불리는 소규모의 밭 등을 볼 수 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곳에서 재미삼아 낚시, 소젖 짜기, 농작물 재배와 같은 시골 농사일을 경험 했다. 현재는 유적의 보호를 위하여 건물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으며 밖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


*그랑 트리아농(Grand Trianon)

루이 14세의 별궁이었던 그랑 트리아농은 1687년 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의 설계로 만들어졌다. 기둥식 회랑을 배치한 이탈리아 양식의 단층 건물로, 장밋빛 대리석이 엄청나게 사용되어서 대리석의 트리아농이라고도 불린다. 루이 14세는 애첩인 망테팡(Madame de Montespan)과 지내기 위해서 이 별궁을 지었으며, 궁전의 격식에서 벗어나 가족과의 사적인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랑 트리아농은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

조경에 관심이 많았던 루이 15세가 1749년부터 식물원을 만들었는데 프티 트리아농은 1762년부터 1768년에 식물원의 중앙에 만든 저택으로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Madame de Pompadour)을 위해서 자크 앙주 가브리엘(Jacques - Ange Gabriel)의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궁전이 완공된 당시에는 퐁파두르 부인은 이미 사망한 후였다. 그 후에는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에게 주어지고, 그녀는 정원을 영국식으로 만든 후 농촌 마을을 모방해 꾸며놓은 왕비의 마을을 만들었다. 이곳은 프랑스 혁명 동안에는 술집이 되기도 했다. 궁전 내부는 2층의 8개의 방이 공개되는데, 루이 15세 시절의 장식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왕비의 마을(Hameau de la Reine)

18세기에는 왕족이나 귀족들 사이에 자신의 마을을 소유하고, 취미 삼아 농사일을 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런 목적으로 1783년에 12채의 농가로 이루어진 왕비의 마을을 만들었다. 초가지붕으로 된 예쁜 농가가 옹기종기 모인 동화 속 마을 같은 곳으로, 왕비가 직접 소젖을 짜기도 하고 낚시를 하기도 했으며, 왕가 사람들은 이곳에서 목가적인 분위기를 만끽하며 편안한 생활을 즐겼다. 현재는 ‘왕비의 집’, ‘물레방아 집’, ‘말보루 탑의 집’ 등의 10채가 남아 있으며, 근처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애인과 밀회하던 장소라고 전해지는 ‘사랑의 신전’이 있다.

*왕비의 마을(Hameau de la Reine)





*관람 후 광장에서

*관람 후 시간을 기다리면서...

*여유로운 광장의 시간

*광장에서

*광장에서

*광장에서

*광장에서

*루이 14세의 조각상

*파리 세느강의 아름다운 다리모습

*파리의 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인 알렉상드르 3세교는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19세기 건축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다리는 근처의 샹젤리제나 그랑 팔레, 앵발리드 등과 잘 어울리며, 야경이 특히나 아름다워서 센 강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다. 107m의 다리 전체가 하나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난간은 아르누보 양식의 가로등과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고, 다리 양끝에 있는 20m 높이의 기둥에는 금빛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다리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 맞춰 1897년 만들어졌는데, 1892년 프랑스-러시아의 공조를 성사시킨 러시아의 알렉상드르 3세의 이름이 붙여졌다.

*아름다운 가로수길

*고풍 스러운 건물과 가로수의 조화 어울리네요

*콩코드 광장

 동쪽은 튀르리 정원으로 이어지고,북쪽은 마들렌 성당과 마주하고 있다.

 광장의 한 가운데에는 이집트로부터 기증밭은'오벨리스크'가 우뚝 서있고

 두개의 청동분수대와 프랑스 8개도시를 상징하는 조각상들이 군데군데 있다

 프랑스혁명 기념일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화합을 다지는 축제의 장 역활도

 '톡톡'단결'화합'을 뜻하는'콩코드 광장(Place de le Concorde) 은 건축가

 가브리엘이 루이15세에게 바치기 위해 20년의 걸쳐 만들었다고하며,광장

 한 가운데 루이15세 기마상이 있었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 파괴되었다고 한

 다.지금은 그 자리에'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다.

 청동과 금색의 조화가 아름다운 분수대가'눈길'바티칸의 '성 삐에뜨로광장'

 분수를 모방 했다고 한다.

 이 광장은 프랑스 혁명광장으로 알려졌으며,혁명당시 성난 군중에 의해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를 포함한 수천명의 왕족과 귀족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역사적인 비극의 현장으로 유명하다.1794년 말경 공포정치가 끝나고

 명칭이'콩코드 광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도로 가로등의 파리의 길 안내판(파란색 바탕에 초록색 테두리)을 눈여겨 보

 세요.콩코드 광장은 난간으로 둘러쌓인 도장으로 만들어진 팔각형으로 설계

 돼 있고,프랑스의 대표적인 도시들을 상징하는 8개의 동상이 광장을 장식하

 고 있다.

 광장 한 가운데는 이집트의 룩소 신전에서 잘라 왔다는 23m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다.원래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서 유래한 것으로 태양신앙

 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이다.

*광장에는 관람차도 보이네요

*콩코드 광장의 모습

*구름과 광장의 모습 아름답네요

*파리 시내의 모습

*시내의 모습

*점심은 달팽이 요리로 ...

*우리는 별로 .....

*몽 마르뜨 언덕(Montmartre)

  로마시대에는 Mars(전쟁의 신)과 Mercury(상업의 신) 두 신의 신전이 있

 던 언덕으로 MONS MARTIS (MOUNT OF MERCURY) or MONS MERCUR

 II (MOUNT OF MERCURY) 로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St,Denis가 처음으로 프랑스에 카톨릭을 전파 하시다 로마군에 잡혀

 몽마르뜨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처형장에서 처형을 당하기 위해 오른다.

 성격 급한 로마군이 중간에 성인의 목을 친다.이때 St,Denis 성인은 잘린 자

 신의 목을 잡고 6km를 더 오르고 돌아가신다.

 루이14세는 17세기부터  이 언덕을 St,Denis를 추모하며,순교자 언덕,Mont

 martre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언덕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두 채의 카톨릭성당이 있

 다.하나는 반석,돌이라는 뜻의 St,Pierre De Montmartre와 La Basilique du

 Sacre Coeur de Montmartre(Sacred Heart Cathedral,성심성당,사크레 꾀

 르 대성당) 이다.

 그리고 화가들의 마을,이 세장소는 파리 관광객이 Montmartre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라고 한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배경으로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배경으로

*사크레쾨르 대성당(프랑스어: Basilique du Sacré-Cœur)은 프랑스 파리몽마르트르 언덕 위에 있는 대성당이다.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침체된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킬 목적으로 모금한 돈으로 만들어졌다. 1876년에 기공되어 1910년에 완성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항복 후에 헌당식을 했다. 성당 앞에 잔 다르크의 동상이 있고 비잔틴 양식으로 하얀 이 우아한 자태로 솟아 있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신전의 분수대를 배경으로

*몽마르뜨 언덕에서 파리 시내를...

*다른 방향의 파리시내

*몽마르뜨 언덕에서 바라본 파리 시내의 풍경

*파리시내 구경

*파리를 배경으로

*파리를 배경으로

*언덕을 오르다 보면 계단 위 가장 먼저 보이는 하얀색 성당 파리를 아름답게

 만든 나폴레옹3세, 그렇지만,프- 러시아 전쟁에서 져 항복하면서 프-러시

 아군대가 파리를 지나 가려 할때 몽마르뜨 시민이 주축으로 파리시민들은

 항쟁을 한다.이때,제3공화정 군대가 나서 항쟁하는 파리시민 2만명을 진압

 한다.전쟁에 지고 침체된 시기,프랑스 국민,성도 40만이 헌금으로 이 성당을

 만든다.

 전쟁에 패배한 아픔을 잊기 위해 만들어진 성당 아직 미사를 드리고 있고,프

 랑스에서 중요한 성지라고 한다.언덕위에 하얀 성당을 오르려면 220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순례객들은 220계단을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오르는 성스러

 운 성당이라고 한다.

*파리시내를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공간이 나온다.

 해발130M의 높지 않은 언덕이지만 오를 때 경사는 쉬어 가게 만든다.

 힘들게 오른 만큼 아름다운 전경을 볼수 있엇다.

 몽마르뜨 언덕은 유럽관광객,특이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란다

 이유가 충분하다.정소마다 갖는 기운이 있는 듯 하다.

 화려하지않아도,시원한 시야와 초록을 볼수 있는 자연이 있고 세월이 만들

 어준 예술가들의 흔적은 지금도 사람들을,예술가들을 모이게 하는것 같다

 언덕과 아래로 작은 강이 흘러 사람들이 처음 모여 살기 시작하고 이민자들

 예술가들 조금은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몽마르뜨의 자유롭고 따뜻한 분위기

 가 만들어지고 예술을 사랑하고 동경하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꿈꾸는 사람들

 이 모이고 찾아 지금도 특별한 공간을 지킨다.

*성당을 배경으로

*성당을 배경으로

*성당의 계단 220계단

*몽마르뜨 언덕에서 바라본 파리의 모습

*물랭 루주 (프랑스어: Moulin Rouge; 빨간 풍차)는 1889년에 만들어진 파리 몽마르트르에 있는 카바레이다. ‘빨간 풍차’라는 뜻의 이름은 건물 옥상에 있는 빨간 풍차 장식 때문에 붙여졌다. 물랭 루주는 프랑스 근대 유흥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지금까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세느강 유람선 선착장 도착

 1층은 실내,2층은 실외 좌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름에는 햇볕이 따가워 햇볕을 가리는 뭐가 있어야 할것 같아요.

 바토무슈(BATEAUX MOUCHES) 유람선은 출발을 합니다.


*유람선 선착장의 여러 종류의 유람선

*알렉상드로 3세교를 지나갑니다.

*콩코드 광장도 보이네요.

*루브르 박물관도 보이네요

*어떤 건물인지 궁금해요....

*유람선의 종류도 다양하네요 이쁜 유람선이네요

*오르쉐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은 프랑스 파리 센 강 좌안에 자리한 미술관이다. 소장품 중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을 비롯한 19세기 인상파 작품이 유명하다.

 원래 오르세 미술관의 건물은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개최를 맞이해 오를레앙 철도가 건설한 철도역이자 호텔이었다. 1939년에 철도역 영업을 중단한 이후, 용도를 두고 다양한 논의가 오갔다. 철거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1970년대부터 프랑스 정부가 보존·활용책을 검토하기 시작해, 19세기를 중심으로 하는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1986년에 개관한 오르세 미술관은, 지금은 파리의 명소로 정착했다. 인상파 미술을 전시하던 국립 주드폼 미술관의 수장품은 모두 오르세 미술관으로 이관되어 있다.

오르세 미술관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원칙상 1848년부터 1914년까지의 작품을 전시하도록 되어있고, 1848년 이전의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 1914년 이후의 작품은 퐁피두 센터가 담당하도록 분할되어 있다. 오르세 미술관의 전시품 중에서도 인상주의후기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 등이 유명하지만, 같은 시대의 주류파였던 아카데미슴 회화도 다수 수장하고 있다. 회화나 조각 뿐만 아니라, 사진, 그래픽 아트, 가구, 공예품 등 19세기의 시각적 예술을 폭넓게 포괄하고 있다. 

 

*에펠탑을 통과

*노틀담 성당 건물도 보이고...

*어떤 건물인지???

*에펠탑을 배경으로 선상에서...


*에펠탑은 1889년, 대혁명 100주년 기념 만국 박람회를 위해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3개의 층으로 되어 있는 이 탑의 높이는 317미터로서 탑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파리의 전경은 매우 아름답다. 이 철탑에는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789개의 계단이 만들어졌다.
당시 에펠탑을 매우 싫어했던 모파상은 에펠탑 위에 있는 식당에서의 식사 초대에만 응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매년 1억 5천만 이상의 관광객이 에펠탑에 오르고 있으며 전세계가 파리와 에펠탑의 이미지를 혼동할 정도가 되었다.
레스토랑, 기념품 상점, 영화관 뿐만 아니라 리셉션, 세미나를 개최할 수 있는 귀스타브 에펠 홀도 있다.


원래 이 탑은 프랑스대혁명(1789년) 백주년을 기념하고 다른 유럽에 비해 산업명이 비교적 늦게 일어난 프랑스가 전세계에 자국의 산업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 기획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옛 경관을 바꾸는데 대해 대단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 탑이 지어질 때도 마찬가지로 많은 파리인들이 건설에 반대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고층건물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검은 철로 이루어진 에펠탑은 파리 어디에서고 하루에 한두 번씩은 눈에 들어와야 할텐데 그것이 매우 거슬렸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낮에 보는 에펠탑은 웅장함은 주지만 왠지 삭막하고 칙칙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이 탑의 건설을 두고 19세기의 가장 격렬한 논쟁들이 오갔다고 하며 파리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에 냉담하게 방관할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미적 가치와 대상들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파리의 아름다운 하늘에 한 점 티끌이 되지나 않을까 염려했다고들 한다. 에펠탑의 건설은 점차 구시대와 현대의 싸움, 추함과 아름다움의 싸움으로 번져나갔다


 에펠탑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886년 5월 1일 "샹 드 마르스 위에 철로 된 3백미터 높이의 탑을 짓기 위해 후보작들을 현상공모한다"는 내용을 담은 법령이 공포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 기계 문명을 반영하는 가장 상징적인 물질이 바로 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하필 3백 미터의 거대한 탑인가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당시까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어떠한 건물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월등히 높은 기념물을 지음으로써 다른 나라 사람들의 기를 죽여보겠다는 것이다. 당시까지 가장 높은 건물은 미국 워싱턴에 있었는데 높이가 1백70여미터였다고 한다.
여하튼 이 현상공모에 응시한 사람은 자그만치 700여명이나 된다고 하니 그 열기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대부분이 너무 공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떨어지고 세 응모작만이 본선에 올랐다고 하며 그중 에펠이라는 사람이 제안한 것이 최종적으로 뽑힌 것이라 한다.

 

  사실 에펠탑이 세워지기 전만 해도 사람들은 이 탑이 과연 정상적으로 완공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의 기술로 이처럼 높은 탑이 세워진다는데에 대해 의심을 가졌던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처럼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에펠탑이 지금의 위용을 발휘하게 된 것은 7백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현상공모에 당선된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이라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스타브 에펠은 1832년 디종에서 태어나 1923년 파리에서 숨을 거둔 프랑스가 자랑하는 건축기술자로서 특히 철구조물에 있어 탁월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는 에펠탑의 건설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무마시키고 설득하기 위해 프랑스인들을 향해 "에펠탑이 있음으로 해서 프랑스는 3백 미터 높이의 깃대에 국기를 휘날릴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에펠탑은 미국의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건설된 1931년까지 근 40여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각광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에펠탑은 데뷔작도 아니며 그렇다고 유일한 대표작도 아니다. 그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882년부터 84년 사이에 가라비(Garabit) 고가교를 만든 후부터라고 하며 1886년에는 유명한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건설에 참여해 철근 구조물 부분을 제작하였다고 하니 정말 재능있는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는 한때 에펠탑 위에 거처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89년 프랑스 최고의 영예로 간주되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였으며, 에펠탑 밑에는 흉상을, 꼭대기층에는 밀랍인형을 세워놓고 있다.

 =공사와 첫선
드디어 1887년 1월 28일 파리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펠탑 건설을 위한 첫 곡괭이질이 시작되었다. 공사는 모두 25개월 동안 진행되었으며 3백 여명의 곡예사같은 노동자들이 달려들어 일했다고 한다.
차곡차곡 공사가 진행된 에펠탑은 박람회가 열리고 완벽한 모습으로 첫선을 보이게 되자 세계인의 주목과 사랑을 한몸에 받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행사의 일환으로 이 탑에 오를수 있는 첫 번째 행운은 1889년 6월 10일 에두아르(Edouard) 7세와 그의 가족들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에펠탑의 건설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화가 났을까. 심지어는 에펠탑을 혐오한 나머지 매일 식사를 에펠탑에서 한 모파상과 같은 예술가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이유는 그곳이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반면 에펠탑은 점차 파리인들과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화가들은 에펠탑을 그림의 소재로 삼기 시작했으며 에펠탑을 배경으로 하는 각종 음악과 문학작품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에펠탑은 슬픈 운명을 타고 났던 것이 사실이다. 수명이 고작 20년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에펠탑을 건설한 회사가 그 장소를 빌려쓰는 조건이 20년이었다. 그에 따라 1910년 에펠탑은 해체의 위기에 봉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도 역시 에펠탑 건설을 매랼히 반대했긋이 에펠을 살리자는 사람들 또한 적극적인 해체반대운동을 폈다고 한다.아닌게 아니라 20년이면 그 사이에 태어난 사람도 꽤 많았을 것이고 그들에게는 오히려 에펠탑이 없는 하늘을 본다는 것이 이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때마침 기술이 진보하여 무선통신이 탄생하여 에펠탑을 구제하는데 일조했다. 에펠탑 정상에 무선 안테나가 설치되고 이로 인하여 대서양을 넘나드는 전파들을 쏘아댈 수 있었으니 에펠탑을 함부로 헐어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이후 에펠탑은 새로운 통신기술이 발명될 때마다 각종 첨단 장비로 무장하게 되었다.
1918년에는 라디오 방송을 위한 장치가 설치되었고 1957년에는 텔레비젼 안테나가 설치되었으며 현재는 기상관측 장비와 항공운항 장비까지 가세되어 있다. 특히 1985년부터 는 야간에 조명을 비추어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게 되었다.
에펠탑은 그 요염한 몸매와 분위기로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우선 에펠탑은 센느강변 샹드 마르스 위 그러니까 사관학교 바로 맞은편에 세워진 철탑이다. 센느강 건너편으로는 왕족과 귀족들의 사랑행각으로 유명했던 샤이요궁(현재는 트로카데로)이 있다.
파리의 다른 장소들을 실제로 둘러본 관광객이라면 가끔은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작고 보잘것없음에 실망을 하게된다. 그러나 에펠탑 근처는 파리에서 가장 넓다란 공간을 이루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함과 광활함을 느끼게 한다. 에펠탑이 주는 매력중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여유로운 넓이의 주변공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에펠탑이 솟아있는 샹드 마르스는 과거에는 연병장으로 쓰인 곳으로 현재는 푸른 잔디밭으로 되어있어 관광객들이 앉아쉬거나 배낭여행족들이 잠을 자는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또한 혁명축제 등 국가적으로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프랑스 정부가 주관하는 각종 기념식과 쇼가 벌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풀밭에 누워 에펠탑을 올려다보는 맛이란 바다에 뜬 배위에 누워 하늘을 보는 것만큼이나 탁트인 기분을 준다.

 

에펠탑은 한 마디로 크고 웅장하다. 만드는 데 소요된 철근부속이 1만 2천 여개, 커다란 리벳이 250여만 개나 되는 육중한 위 용을 자랑한다. 건설 직후의 높이는 300.5미터였으나 지금은 방송용 안테나를 포함하여 320.755미 터에 달한다. 이 높이는 여름과 겨울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탑은 전체 세 부분으로 나누 어져 있는데 땅에서 2층까지의 높이가 57.63미터, 3층까지의 높이가 115.73미터 그리고 4층까지의 높이가 276.13미터이다. 총 1652계단이 있으며 전체 무게는 1만10톤이다.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67km 까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하며 4년 마다 한 번씩 행해지는 도색작업에는 자그마치 50톤 의 페인트가 소요된다고 한다.

 



*3층 전망대에서 시가지를 배경으로

*3층 전망대에서 바라본 파리 시가지의 모습

*전망대에서 바라본 시가지

*앵발리드 돔성당(나폴레옹의 묘지가 돔성당의 지하에 있다)

 1670년 루이 14세는 당시 그레넬평야라고 부르던 곳 부근에 앵발리드를 설

 립했다.4,000명 가까운 노병들의 생활 근거지가 될 앵발리드는 당시 현역에

 복무 중인 병사들의 급료 5년치를 징수한 기금으로 이루어졌다.리베랄 브뤼

 앙 (Libert Bruant)의 설계로,이 복합건물의 공사는 1676년 시작되어 1676년

 완공되었다.에스플라나드는 로베르 드코드(Robert De Cotte)가 레이아웃한

 것이였다.쥘 아르두앵 망사르(Jules Hardouin Mansart)가 설계한 돔

 공사는 1706년 시작되었는데,1708년 그가 죽었기 때문에 드코트에 의해 완

 성되 되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를 습격할때 군중들이 사용한 무기의 대다수는 그

 날 아침 앵발리드로부터 탈취한 것이였다.경비병의 저항이 있었지만,군중들

 은 다수의 힘으로 그들을 제압하고 지하에 있던 무기고로 들어가 약 28,000

 정의 무기를 탈취했다.그러나 앵발리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40년

 나폴레옹의 유해가 돌아와 그곳에 안장된 것이다.당시 프랑스 국왕이 었던

 루이 릴리프(Louis Philippe)는 영국정부와 7년간에 걸친 협상 끝에 세이트

 헬레나로부터 황제의 유해를 이장하는 허가를 받았다.황제의 사후 19년이 지

 난 1840년 10월 8일 관이 발굴되어 2분간 개봉된 뒤 프리깃함 라벨풀호에 선

 적되었다.당시 임석했던 사람들은 유해가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르아브르에 도착한 뒤 유해는 센강을 거쳐 파리의 쿠르베부아에 상륙했

 다.1840년 12원15일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겨울의 폭설에도 불구하고 영구차

 는 개선문을 통해 샹젤리제,콩코르드광장,에스플라나드를 거처 생제롬교회

 에 도착하여 비스콘티가 설계한 묘당이 완공될때까지 임시 안치되었다.

 1861년 4월 2일 나폴레옹 1세는 그 교회의 돔 아래에 있는 지하 묘지에 최종

 적으로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