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

2016년 여름휴가 해외여행(서유럽3개국)10일째

문수산 아래 2016. 9. 1. 20:01

*서유럽 여행 10일째 마지막날 파리 시내관광


*파리의 개선문


 

튈르리 공원에 있는 카루젤 개선문과 라데팡스에 있는 신개선문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8, 16, 17구의 경계에 있는 이 개선문은 높이가 50m, 폭이 약 45m로 1806년 오스텔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Napoléon I)의 명령으로 건축가 장 프랑수아 살그랑(Jean-François Chalgrin)의 설계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1812년 러시아 전쟁에서의 첫 번째 패배로 공사가 중단되고, 나폴레옹의 사후인 1836년에야 루이 필립(Louis-Philippe I)의 요구로 겨우 완성된다.

나폴레옹 1세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 개선문을 살아 있을 때는 통과하지 못하고, 죽은 후에 그의 유체가 개선문 아래를 지나 파리로 귀환해 앵발리드 돔 교회 아래에 매장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독일 점령에서 파리를 해방시킨 드골 장군이 이 문을 통해서 행진하기도 했다.

개선문의 벽에는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졌고, 아부키 전쟁, 터키에서의 승리, 오스텔리츠 전쟁 등 나폴레옹의 전쟁에서 영광스러운 장면들이 여러 개의 조각들로 장식되었다. 또한 개선문의 안쪽 벽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부대를 지휘했던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전쟁 중에 전사한 사람의 이름에는 줄이 그어져 있다. 개선문 아래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참전 용사들을 위한 무덤이 있는데, 매년 7월 14일 이곳에서 군사 행렬을 한다. 11월 11일에는 무명 용사의 묘비 앞에서 군사들을 기억하는 행사가 있다.

개선문이 있는 샤를드골 에투알 광장(La Place Charles de Gaulle Étoile)은 12개의 대로가 별 모양으로 둘러싸 있어서 별처럼 보인다고 해서 별이라는 뜻의 에투알 광장이라고 불린다. 그 대로 중 하나가 샹젤리제 거리이다. 개선문 옥상 전망대에 오르면 에투알 광장의 모습과 더불어 파리 시의 전경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파리 개선문을 배경으로


개선문은 1805년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1806년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명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었다. 루이 필립왕정 복고 시대, 1836년 완공되었다. 나폴레옹은 개선문이 완공되기 전에 이미 사망하고, 그가 이 문을 지나간 것은 1840년 파리로 이장할 때 였다. 고대 로마의 개선문 모범을 따온 것으로, 신고전주의 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개선문 아래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무명 용사의 무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나치 독일이 파리를 점령할 때 나치 독일 국기가 걸렸고, 히틀러가 전차로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파리의 상징적인 건축물의 하나로, 단순히 개선문이라고 말하면, 파리의 이 개선문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 세계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샹젤리제 거리를 시작, 12개의 거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 있어 그 모양이 지도 위에서 빛나는 "성 = étoile"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광장은 "별의 광장 (la place de l' Etoile, 에투알 광장)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에투알 광장의 개선문”의 정식 명칭은 'Arc de triomphe de l' Etoile 이다. 그러나, 현재 이 광장은 샤를 드골 광장(la place de Charles de Gaulle)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승리의 아치’(Arc de triomphe)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 듯이, 개선문 자체는 전승 기념비이다. 따라서 개선문은 파리 시내에도 카르제르 문, 셍 드니 문, 셍 마땅 문 등 다수 존재한다.

샹젤리제 거리와 이 개선문의 연장선에 라데팡스는 “라 그랑데 아치”(la Grande Arche 또는 l' Arche de la Défense)가 있는데, 이것은 전승 기념비가 아니므로 정식 이름에 “triomphe”가 있지 않다. 그러나 샹젤리제 도시 축에 있는 카르제르 개선문, 개선문에 이은 제 3번째의 문 (arc, arche)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프랑스의 슬로건인 “자유, 평등, 박애”(Liberté, Égalité , Fraternité)에서 딴 ‘박애의 큰 아치’(La Grande Arche de la Fraternité)의 정식 명칭을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건축 양식을 본 딴 신고전주의 건축의 대표작이다.


*파리 개선문에서

*부부의 흔적도 개선문에 남겨요

*샹젤리제 거리를 양팔로 ...


 

에투알 광장과 콩코르드 광장을 연결하는 폭 124m, 길이 1.9km의 넓은 대로이다.

도로 양쪽에는 가로수가 아름답게 늘어져 있어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쾌적함을 느낄 수 있는 번화가다

거리를 따라서 유명 카페와 레스토랑, 부티크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의 조르주 V 거리와 프랑수아 1세 거리에는 유명 브랜드점이 많아 일대 쇼핑가를 이루고  있는 거리에서 콩코르드 광장을 향해 서면 광장의 오벨리스크와 카루젤 개선문을 볼 수 있다.


 

파리 개선문(아르끄 드 뜨리옹쁘, Arc de Triomphe)


① 개선문의 전망대 바로 아래에 나폴레옹이 승리로 이끈 전투들이 30개의 방패에 새겨져 있다.
② ①번 바로 아래 샹젤리제 거리에서 바라보는 쪽에는 프랑스 군대가 출정하는 모습을, 뒷면에는 귀향을 조각해 놓았다.
③ ②번 아래쪽 왼편 네모난 곳에는 나폴레옹이 1790년 터키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묘사해 두었다.
④ ③번 바로 아래에는 1810년 비엔나 조약을 기념하기 위한 조각으로 승리한 나폴레옹을 묘사해 두었다.
⑤ 오른쪽 네모난 곳에는 마르소 장군의 장례식을 묘사해 놓았다.
⑥ ⑤번 아래에는 1792년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어나는 시민들의 모습을 조각해 두었다.

파리 개선문의 조각


파리 개선문(아르끄 드 뜨리옹쁘, Arc de Triomphe)


파리 개선문(아르끄 드 뜨리옹쁘, Arc de Triomphe)


파리 개선문(아르끄 드 뜨리옹쁘, Arc de Triomphe)


*마지막날 에펠탑 기념촬영을 위해 전망좋은 곳에서 기념촬영

*에펠탑을 배경으로

*에펠탑의 전면부

*파리의 상징 에펠탑을 배경으로

*노트르담 대성당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프랑스어: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카테드랄 노트르담 드 파리[*])은 프랑스 파리의 시테 섬의 동쪽 반쪽에 있는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이 대성당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 건물로서 파리 대주교좌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흔히 프랑스 고딕 건축의 정수로 이야기된다. 이 대성당은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인 비올레르뒤크에 의해 파괴된 상태에서 보호되어 복구되었다. “노트르담”은 “우리의 귀부인”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성모 마리아를 의미함).

노트르담 대성당은 최초의 고딕 성당 가운데 하나이며, 고딕 전 시대에 걸쳐 건설하였다. 대성당의 조각들과 스테인드글라스자연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는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부족한 세속적인 외관을 더해준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세계에서 최초로 벽날개를 사용한 건물이기도 하다. 이 대성당은 원래 성가대석과 중랑(中廊) 주변에는 벽날개가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공사가 시작되고 (고딕 양식에서 유행한) 꽤 얇은 벽들이 점점 높아지면서 커다란 균열이 벽이 밖으로 밀릴 때 생겼다. 그래서 성당의 건축가들은 바깥벽 주변에 지지벽을 만들었고, 그 뒤에 비슷한 방법으로 추가되었다.

1790년경 프랑스 혁명의 급진적인 시기에 노트르담 대성당은 반기독교 사상에 의해 모독을 당했으며, 많은 성상이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 19세기에의 다방면에 걸친 복원 작업이 완료되어 대성당은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

1160년 파리의 성당이 ‘유럽 임금들의 본당’이 되자 성당의 규모가 제 역할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 모리스 드 쉴리는 파리 교구장에 착좌하자마자 원래의 성당을 무너뜨렸다. 전해지는 바로는 파리의 새로운 영광스러운 대성당의 모습을 상상한 드 쉴리가 그것을 원래 성당의 바깥 흙에 스케치하였다고 한다. 건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교구장은 몇 채의 집들을 무너뜨렸고, 성당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운송하기 위해 새 도로를 만들었다.

공사는 국왕 루이 7세 시대인 1163년에 시작되었고, 대성당의 주춧돌을 드 쉴리가 올릴지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올릴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드 쉴리 주교는 대성당을 건설하는 데에 자신의 삶과 재산 대부분을 바쳤다.

독특한 탑 두 개와 서쪽 정면을 건설하는 일은 약 1200년에 시작되었는데, 일반적인 건설 과정과는 달리 중랑(中廊)이 완성되기 전이었다. 건설 과정에서 많은 건축가가 일했으며, 이는 서쪽 정면과 두 탑의 각각 다른 높이와 다른 양식에서 발견된다. 1210년에서 1220년 사이, 4등 건축가는 장미창이 있는 층과 탑 뒤의 거대한 현관의 건설 과정을 감독하였다. 두 탑은 1245년경에 완성되었으며, 대성당은 1345년경에 완성되었다.

  • 1160년 모리스 드 쉴리(파리 교구장)가 원래의 대성당을 부수도록 명령하다.
  • 1163년 노트르담 드 파리 대성당의 초석이 얹혀지다 - 공사가 시작되다.
  • 1182년 후진(後陣)과 성가대석을 완공하다.
  • 1196년 중랑(中廊)을 완공하다. 드 쉴리 교구장이 선종하다.
  • 1200년 서쪽 정면의 작업이 시작되다.
  • 1225년 서쪽 정면을 완공하다.
  • 1250년 서쪽의 두 탑과 북쪽의 장미창을 완공하다.
  • 1250년 - 1345년 나머지 부분을 완공하다.
  • 오랜 시간에 걸쳐 대성당 안에 여러 개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지만, 처음에 설치된 오르간은 건물에 적합하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최초의 오르간은 당시 유명한 오르간 설치 전문가였던 프랑수아앙리 클리코에 의해 1700년대에 완성되었다. 클리코가 만든 페달 구획 안의 파이프 기구는 오늘날까지 오르간에서 소리를 낸다. 오르간은 19세기에 아리스티드 카베이에콜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다시 만들어지고, 크기도 커졌다.

    노트르담의 오르간 연주자는 카바이에콜이 만든 가장 큰 오르간이 있는 생쉴피스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프랑스에서 가장 명성있는 오르간 연주자의 위치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오프간은 역사적으로 900종류로 분류되는 7800개의 파이프를 가지고 있다. 오르간은 109개의 오르간 스톱, 5개의 56건의 손건반과 한 개의 32건의 발건반을 갖고 있다. 1992년 12월, 3개의 LAN을 통해 오르간을 완전히 전산화하는 작업이 끝났다.

     

    대오르간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1900년부터 1937년까지 오르간 연주자였던 루이 비에른이다. 카바이에콜 오르간은 그의 연주의 음색에 따라, 1902년과 1932년에 조정되었다. 여기에 피에르 코슈로는 변경사항을 더 추가했는데(그 중 많은 것은 루이 비에른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오르간의 기계장치를 전기 작동방식으로 바꾸었다(원래의 카바이에콜의 오르간의 연주대는 영미식의 새로운 연주대로 교체되었으며, 원래 연주대는 남쪽 탑의 연단으로의 입구로 옮겨졌음). 또한 1965년에서 1972년 사이에 오르간 스톱들을 발건반 부분에 추가하고, 믹스처 스톱들을 다시 배열하고, 마지막으로 3개의 수평 리드 스톱(en chamade)을 추가하였다. 코슈로가 1984년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후, 장피에르 레구아이, 올리비에 라트리, 이브 데베르네이(1990년 사망), 그리고 필리프 르페브르 이렇게 4명의 오르간 연주자가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에 임명되었다. 이것은 18세기에 노트르담 대성당이 4명의 오르간 연주자를 두었던 관습의 부활로, 각각의 연주자는 1년에 3개월을 연주하도록 되어 있다. 1989년에 악기의 복구가 진행되어, 1992년에 완료되었다.

    1548년 위그노들이 그러니까 개신교 신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대성당의 성상들을 우상숭배라고 여겨 대성당의 외관을 파괴했다. 루이 14세 때와 루이 15세 때에 전 유럽에 걸쳐 대성당들을 현대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을 개축하였다. 무덤과 스테인드 글라스는 제거되었는데, 다행히도 북쪽과 남쪽의 장미창은 파괴되지 않았다.

    1793년 프랑스 혁명 때에 노트르담은 이성숭배에 봉헌된 뒤, 최고존재숭배에 봉헌되었다. 이 시기 동안 대성당의 많은 보물들은 파괴되거나 강탈당했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유다 왕들의 조각상들이 (봉건질서를 상징하는 프랑스의 왕들로 오인되어) 머리가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많은 머리들이 1977년에 인근을 발굴하면서 발견되었고, 지금은 클뤼니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시대에 제대에 위치해 있던 성모 마리아상은 자유의 여신상으로 교체되었다. 중요한 종들은 간신히 용해되는 것에서 피할 수 있었다. 성당의 내부는 말 먹이나 음식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 사용되었다.

    복원 계획은 건축가인 장바티스트앙투안 라쉬와 외젠 비올레르뒤크의 감독으로 1845년에 시작되었다. 플레슈(flèche, 첨탑의 일종)를 건립하고 시메르 갤러리(alerie des Chimères)의 키메라들을 추가하는 것을 포함하여 25년간 계속되었다. 비올레르뒤크는 자신의 작품에 언제나 서명을 했는데, 고딕 볼트(궁륭)를 닮은 날개 구조를 가진 박쥐를 같이 그려 넣었다.

    1871년 파리 코뮌 시기에 노트르담 대성당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파리 코뮌민중들에 의해 자치가 실시된 사회주의 자치정부였기 때문이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독일이 창문을 폭격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1939년 9월 11일에 창문을 분리시켰다. 전쟁이 끝나자 이 창문들은 다시 복원되었다.

    1991년 유지 및 복원 계획이 시작되었는데, 애초에는 10년간 지속될 예정이었으나 2008년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데, 낡은 조각상들을 청소하고 복원하는 것이 대단히 섬세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노트르담에는 5개의 이 있다. 가장 큰 종인 엠마뉘엘(Emmanuel)은 남쪽 탑에 있는데, 무게가 13톤이 넘으며 하루의 시각을 알리기 위해서나, 여러 행사나 전례를 알리기 위해 울린다. 북쪽 탑에는 바퀴 위에 부가적으로 4개의 종이 붙어 있는데, 이 종들은 흔들리면서 종이 울린다. 이 종들은 전례나 축제 때에 울린다. 이 종들은 이전에는 수동으로 작동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전기 모터로 작동한다. 이 종들에는 작은 건반악기의 연주와 조음하기 위한 외부 해머들이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의 주요 사건

    이 대성당은 유명한 도미니코회 신학자 장 바티스트 앙리 라코르데르가 1840년에 연 사순절 설교로 유명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요한 유명인이나 국가에 고용된 학자들이 설교를 한다. 하지만 청중들의 상당수는 외국인들이며, 이들만으로 관습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노트르담에 얽힌 이야기[편집]

    • 1905년에 프랑스에서 제정된 정교분리법에 따라 프랑스 왕국이 세운 다른 성당들과 같이 노트르담도 정부에 귀속되었으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성당으로 사용하는 것은 승인되었다.
    • 파리에서 시작하는 고속도로에서 거리를 나타내는 참고점인 프랑스의 도로원표(Point zéro)가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있는 광장에 있다.
    • 19세기 초에 대성당은 황폐한 상태였으며, 도시계획가들은 노트르담의 철거까지 고려했다. 프랑스의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는 이 대성당의 찬미자로 대성당의 전통을 일깨우기 위해 파리의 노트르담(노트르담의 꼽추)를 썼는데, 이 소설은 대성당의 운명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호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는 운동이 이어졌고, 결국 1845년에 복원이 되었다.
    • 대성당의 맨 위에는 13개의 변색된 조각상들이 있다. 그들 중 12개는 열두 사도를 나타낸 것으로 바깥을 향하고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건축가 자신의 조각상으로 안쪽을 향하고 있으며 그의 팔을 뻗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 기념촬영 하기좋은 소공원에서...

    *자세를 잡고...

    *장미꽃을 배경으로

    *다정한 한때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루브르가 최초로 박물관이 된 것은 1793년으로, 파리 생활에 싫증을 느낀 루이 14세가 베르사유에 화려한 궁전을 지어 거처를 옮긴 뒤 초기에는 왕실에서 수집한 각종 미술품을 보관 · 전시하는 소극적 의미의 미술 전시관이었으나 나폴레옹이 집권한 이후 수없이 많은 원정 전쟁을 통해 예술품을 매입, 선물, 약탈하면서 대규모 박물관으로 변모하였다. 루브르 미술관의 전시 작품은 크게 인류의 4대 문명의 시원을 나타내는 고고학 유물과 그리스도교 전례 이후의 서양 문명, 중세 예술, 르네상스 예술, 근대 미술 및 극동 지역 미술품으로 나누어진다.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원래는 바이킹의 침입으로부터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요새였다. 이후 16세기 때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으로 새롭게 개조되었고, 이어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 등 많은 왕족들이 4세기에 걸쳐 루브르 궁전을 확장하고 개조했다. 하지만 루이 15세(Louis XV)가 베르사유로 궁전을 옮기고 나서 루브르는 주인 없는 궁전으로 방치되다가 나폴레옹 1세가 다시 루브르 궁전에 관심을 갖고 미술관으로서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고, 나폴레옹 3세가 1852년에 북쪽 갤러리를 완성하면서 오늘날 루브르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 후 1981년에는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루브르(Grand Louvre) 계획으로 전시관이 확장되고 1989년 박물관 앞에 건축가 I.M. 페이(Ieoh Ming Pei)의 설계로 유리 피라미드를 세우면서 대변신을 하게 되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의 225개 전시실에는 그리스, 이집트, 유럽의 유물, 왕실 보물, 조각, 회화 등 40만 점의 예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루브르 박물관(Le musée du Louvre)은 프랑스 파리의 중심가인 리볼리 가에 있는 국립 박물관이다. 소장품의 수와 질 면에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대영박물관와 함께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박물관이다. 지금의 건물은 루브르 궁전을 개조한 것으로, 파리의 세느 강변에 포함하여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루브르 박물관 앞의 유리 피라미드 조형물은 근대에 건설된 것으로 한때 어울리지 않다는 평이 많았으나 현재는 루브르를 대표하는 조형물이 되었다. 프랑스어로 뮈제 뒤 루브르, 그랑 루브르, 또는 단순히 루브르 라고도 불린다.

    루브르 박물관은 루브르 궁전 내부에 위치해 있다. 루브르 궁전은 12세기 후반 필립 2세의 명으로 착공되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궁이 아닌 요새였다. 아직도 당시의 요새 잔재들을 볼 수 있다. 이 요새가 루브르 궁이 되기까지 수차례에 걸친 건물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다. 1672년 루이 14세베르사유 궁전에 거주하기로 결정하고 루브르를 왕실의 수집품을 전시하기 위한 장소로 쓰도록 했다.

    1692년 루브르 건물에 왕립 아카데미가 들어서고 1699년에는 첫 번째 살롱전이 개최되었다. 아카데미는 루브르에 100년동안 남아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당시, 국민회의는 루브르가 박물관으로서 국가의 걸작을 전시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박물관으로서의 루브르는 1793년 8월 10일 537점의 회화를 전시하며 첫 문을 열었는데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몰락한 귀족과 교회에서 징발된 수집품들이었다. 박물관 건물 내부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박물관이 1796년에서 1801년까지 문을 닫았다. 나폴레옹이 통치하던 시기에 소장품의 규모가 크게 늘었고 이름도 뮈제 나폴레옹으로 바뀌었다가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대패하자 나폴레옹 군대에 빼앗겨 루브르로 보내졌던 많은 작품들이 고국으로 돌려보내졌다. (사실 당시 박물관장이 지하실에 빼돌려 돌아가지 못한 작품도 여럿 된다고 한다.) 루이 18세샤를 10세 재위기간에 다시 한번, 더 큰 규모로 소장품이 늘었고, 제2제국(나폴레옹 3세 통치 기간) 중에 20,000여 점의 수집품이 들어왔다. 소장품은 제3공화국 때부터도 기증과 선물로 계속해서 규모가 커지고 있으며 2008년 기준으로는 8개의 전시관에 나뉘어 있다. 이집트 고대유물관, 근동 유물관, 그리스에트루리아, 로마 유물관, 이슬람 미술관, 조각 전시관, 장식품 전시관, 회화관 그리고 판화와 소묘관 등이다.

    *루브르 박물관 입구의 유리 미라미드

    *피라미드 앞에서

    *루브르 박물관 광장의 분수대에서.

    *박물관 전경

    *루브르 박물관의 전경

    *분수대를 배경으로

    *자세를 어때요

    *많은 사람들로 엄청 붐벼요

    *박물관 광장에서 바라본 파리의 개선문

    *개선문을 등지고...

    *루브르 박물관의 야경


    또한 영국의 대영 박물관, 바티칸시티의 바티칸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미술 작품을 약 3만 5천 점을 전시한 프랑스 국립 박물관이기도
    합니다.

    *각종 조각상




    * 밀로의 비너스(Vénus de Milo)

    약 2m 높이로 1820년에 밀로스 섬에서 출토되어 〈밀로의 비너스〉라고 불린다. 두 팔도 없이 비스듬하게 몸을 비틀고 서서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 여신의 모습인데, 왼쪽 다리가 약간 더 긴 형태로 기원전 130~100년 때 유행하던 스타일이고 가장 완벽한 인체 비율을 구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전 양식과 헬레니즘 양식이 적절히 조화된 이 조각은 정교한 세부 묘사와 부드러운 표정 묘사가 특징으로, 고대 그리스 조각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파이톤을 물리치는 아폴로》 - 외젠느 들라크르와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La Victoire de Samothrace)

    기원전 190년경에 제작된 이 여신상은 몸의 각도를 3/4 정도 튼 형태로 옷의 모양에서 역동성이 느껴지며, 머리 부분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극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배에 막 내려앉아 날개를 접고 있는 이 여신상은 에게 해의 작은 섬 사모트라케에서 발굴되어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이란 이름이 붙었다. 나중에 손이 발견되어 승리의 여신의 바로 옆에 전시되었다.

    *승리의 여신상

    *여섯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성 모자

     치마부에(Cimabue)의 초기 작품으로 예전에 성당을 장식했던 패널화인데

     윗부분이 뽀족한 5각형으로 되어 있다.액자는 그리스도,천사들,예언가들과

     성인들을 나타내는 총 26개의 메달로 장식되어 있다.13세기 후반에 그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황금색 바탕에 정형화된 인물의 표정에서는 비잔틴성화

     의 특징이 보인다.그러나 셈세한 옷의 주름과 입체감 표정 등에는 비잔틴 회

     화가 주는 어두운 느낌보다는 르네상스의 밝은 모습이 시작되고 있다.

    *박물관 안에는 엄청 많은 인파로...

    *박물관안에서

    *성(聖)안나와 성모자(聖母子)와 어린 양


     이작품은 레오나르도의 몇 점 안되는 완성 작품의 하나이다.
    구석구석까지 여유있는 레오나르도의 필치가 느껴진다.
    1501년부터 1519년까지 단속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성 안나와 성 모자의 그림은 거의 대부분의 이탈리아 화가들이 그린 주제로서
    그의 표현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마사지오 형과 같이 성 안나가 성모의 뒤쪽에 앉아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오소리의 그림과 같이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이 그림은 전자의 예이지만 제작 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성 안나의 신앙은 15세기에 이루어져 마리아의 어머니로서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았다
    .

    *레오나르드 다빈치=암굴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화가였을 뿐 아니라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섭렵한 학자이자 각종 발견과 발명에 몰두한 기이한 천재였다. 덕분에 그가 완성한 회화 작품은 스무 점을 채 넘기지 않는다.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암굴의 성모〉는 그림 왼쪽에 그려진 세례자 요한의 십자 막대기와 오른쪽 날개 달린 천사의 손가락 정도만 제외하면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과 거의 흡사하다. 레오나르도가 왜 거의 같은 작품을 두 점이나 남겼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다.


    원래 이 그림은 밀라노의 ‘무염시태 형제회’가 산프란체스코그란데 성당의 예배당 제단화로 주문한 것으로 1483년에 계약된 것이었다. 그들은 같은 해 12월 8일, 성모 마리아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까지 레오나르도에게 완성을 요구했지만, 날짜를 지키기는커녕 그림을 그리다 말고 밀라노를 훌쩍 떠나버리는 바람에 소송을 걸기까지 했다. 지루한 법정 투쟁 끝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06년, 2년 안에 그림을 완성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세례자 요한은 기독교 종교화에서 보통 낙타 털옷을 입고 있거나 나무 십자 막대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는 어린 양을 안고 있기도 한다. 루브르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희미하게나마 털옷 차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에 그치지만, 내셔널 갤러리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해두려는 듯 나무 십자 막대기까지 들고 있다. 아기 예수는 손가락 두 개를 세우고 있는데, 이는 ‘축복’의 표현이다.

    다 빈치는 이탈리아 남부 지역을 여행하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던 기암괴석을 이 그림에 삽입하여 배경으로 삼았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각종 식물과 물은 식물학자로서, 그리고 하천을 연구하던 그가 자주 스케치하던 것들이었다. 마리아의 머리를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구도는 그림 전체를 안정적으로 보이게 하는데, 라파엘로가 특히 그의 이 삼각구도를 많이 차용했다. 다 빈치는 밝고 어두운 부분의 대비를 강하게 하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법)를 잘 구사하여 그림 속 인물들의 입체감을 강하게 표현했고, 윤곽선을 적당히 흐리게 하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으로 얼굴과 몸의 선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냈다 

    *모나리자(Mona Lisa)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작품 중 하나이다. 그림 속의 주인공은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인 조콘다의 아내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의 애칭 ‘리자’와 당시 상류층 부인들에게 붙였던 존칭 ‘모나’가 작품의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비스럽고 자연스러운 미소가 압권인 이 작품은 다음 세대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유명세만큼이나 작품의 주인공에 대한 여러 설이 많다.

    *가나의 결혼식

     높이 6미터를 훌쩍 넘고 넓이는 약 10미터에 이르는 이 대형 작품은 색채 감각이 출중한 베네치아 출신 화가의 그림답게 산뜻하고 생생한 색의 향연 그 자체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예수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기적을 행하여 술통을 다시 가득 채운 일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한가운데에 옅은 후광을 두르고 있는 예수와 그 곁에 앉아 술이 떨어진 것을 염려하는 마리아의 모습으로나마 이 그림이 종교화임을 간신히 알 수 있을 뿐, 화려한 옷을 골라 입고 모여든 귀족들의 허영의 끝을 보는 것 같다.

    베로네제(Paolo Veronese, 1528~1588)는 현재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걸린 〈레위 가의 향연〉도 이런 방식으로 그렸다. 예수가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을 소재로 했는데도 비장함은커녕 선남선녀들이 여흥하는 모습만 가득한 걸 두고 종교 재판관이 그의 불경함을 꾸짖자, 베로네제는 “시인이나 미치광이들이 그런 것처럼, 화가도 그럴 자유가 있다.”라고 대꾸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목이 날아가는 불운을 피하고자 그 작품의 제목은 ‘최후의 만찬’에서 ‘레위 가의 향연’으로 바뀌었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원래 베네치아에 있는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수도원 식당에 그려졌다. 당시 수도사들은 밥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다가 저쪽 벽 너머에서 벌어지는 떠들썩한 잔치를 실제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을 것이다. 그림의 배경은 16세기 베네치아의 풍경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을 부활시킨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건축물로 구성되었다. 등장인물들도 죄다 당대 각국의 실세들을 모델로 했다. 특히 중앙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네 명의 악사들은 티치아노, 틴토레토, 바사노와 베로네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다. 가장 오른쪽 첼로 혹은 콘트라베이스는 티치아노, 바이올린은 틴토레토, 관악기 연주자는 바사노, 그리고 가장 왼쪽에서 기타와 비슷한 악기를 활로 연주하고 있는 사람이 베로네제이다.

    *그림의 방에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은 방대한 스케일로 이미 시선을 끈다. 그는 무려 204명이나 되는 인물들의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엄청난 스케치를 반복했고, 주연급 인물들의 경우에는 밀랍 인형까지 만들어 그것을 모델 삼아 작업했다.

    그림은 황제의 대관식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본으로 하지만, 참석하지도 않은 나폴레옹의 어머니를 정중앙에 배치하거나, 나폴레옹의 키를 훨씬 크게 그리는 등의 조작도 감행했다. 교황이 황제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줌으로써 세속의 왕권도 결국 교회에 복종해야 함을 천명하는 것이 일반적인 의례였으나, 나폴레옹은 손으로 왕관을 받아 스스로 쓸 정도의 당찬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비드는 그런 나폴레옹의 심중을 파악하고 대관식 장면을 황제가 아내인 조제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워 주는 장면으로 바꾸었고, 교황 피우스 7세를 그저 자리에 앉아 무력하게 축복이나 내리는 존재로 그렸다. 물론 실제 대관식 행사에서는 황후의 관을 씌워 주지 않았다.

    화려한 의상과 고혹적인 빛은 분명 루벤스의 〈생드니에서 거행된 마리 드 메디시스의 대관식〉을 연상시키지만, 다비드는 신고전주의의 대가답게 인물의 움직임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대신 차분하고 장엄한 톤으로 유지시켰다. 그의 작품 다수는 루브르 박물관의 쉴리관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그림을 배경으로




    *나폴레옹의 기마상 그림앞에서

    *메두사의 땟목(La Radeau de la Méduse)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의 작품으로 삶, 죽음, 희망을 묘사했다. 세네갈 해안에서 범선 메두사가 난파되어 150명이 하나의 뗏목을 타야 했고, 바다에서 12일간 버티다 15명만 구출되었던 실제 사건을 묘사했다. 피라미드 구도로 그려진 이 그림 속에는 영웅이 없고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인간의 비극을 그렸다. 이 그림으로 낭만주의 미술이 탄생되었다.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é)

    들라크루아 작품. 공화국을 세우려는 민중들이 일으킨 1830년 7월 혁명을 묘사한 그림인데, 여신의 뒤를 따라 죽은 동지들의 시체를 넘으면서 삼색기를 들고 진격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담았다. 삼각형의 구도로 그려진 그림으로 자유의 여신의 오른편에 총을 들고 있는 인물이 들라크루아 자신이다.

    *지하에서 바라본 유리 미라미드의 모습

    *서유럽 여행 여기서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