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갈맷길 걷기

부산 갈맷길3-2코스(신선대 전망대입구~동구도서관)10.9km

문수산 아래 2017. 1. 11. 20:35

*날  자 : 2017년 01월 10일(화요일). 맑음.3~7도

*누구와 : 두팀 부부(4명)

*코 스 :신선대 전망대입구~UN묘지~부산진시장~동구도서관(10.9km) 5시간


*그동안 년말이라 바쁜관계로 11월말에 이어서 오늘에야 갈맷길 걷기를 났습

 니다.회사의 공사관계로 2월15일까지 장기휴가로 평일인 화요일 울산에서

 출발11시에 신선대입구 도착 겨울날씨 준비를 하고 출발합니다.

 지금부터는 부산도심을 통과하는 구간이라 길찾기에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우리는 조용히 이길을 이어갑니다.



*11시 신선대전망데입구에서 출발합니다.

*갈맷길 시작점에서 인증샷

*우리 부부도 인증샷

*신선대 컨테이너부두의 모습

*신선로를 따라 내려가요.

*부산항 물류고등학교의 모습
부산광역시 남구 용당동에 있는 사립 특성화 고등학교.

교육 목표는 ‘창의적이고 도전 정신이 강한 미래 기술인 육성’이다. 교훈은 ‘창의·성실·책임’이다.

1977년 12월 16일에 동명문화학원[1977년 4월 11일 설립] 산하 동원공업고등학교로 설립 인가[30학급]를 받아, 1978년 3월 6일에 제1회 입학식[600명]과 함께 남구 용당동에서 개교하였다. 1979년 11월 24일에 야간부 설립 인가[학년별 6학급]를 받아, 2000년 8월 30일까지 유지하였다. 1985년 3월 1일에 동명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93년 6월 30일에 여학생 모집 인가를 받아 1994년 3월부터 남녀 공학으로 전환하였다. 1995년 9월 28일에 동명정보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2010년 8월 24일에는 항만 물류 분야 특성화 고등학교로 지정되어 부산항만물류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특성화 고등학교란 특정 분야 인재 및 전문 직업인 양성을 위한 특성화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고등학교를 말한다. 2012년 2월 9일에 제32회 졸업식을 거행하여 총 2만 459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같은 해 3월 1일에 제12대 김상조 교장이 취임하였다.

부산항만물류고등학교는 ‘내일의 조국 번영과 인류 복지 증진에 공헌·봉사하여 천부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유능한 후진을 기른다’는 건학 정신에 입각하여, 교과별 수업 개선을 통한 맞춤형 교실 수업 실시, 방과 후 수업 활성화로 기초 학력 신장,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 신장,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기준 달성 등을 통한 학력 신장과 기본 생활 습관의 생활화[인사 잘하기, 바른말 고운 말 사용하기 등], 몸과 마음이 건강한 학생 육성,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 함양, 나라 사랑 교육을 통한 올바른 국가관 형성 등을 통한 인성 교육에 노력하고 있다. 학교 중점 과제로 방과 후 학교 활성화로 즐거운 학교 만들기, 위클래스 활동을 통한 학교 부적응 학생의 학교 정착화 교실[fun-fun 교실] 만들기 등을 실시하고 있다.

1. 교가

보라 새로운 전통 여기 바다처럼 부풀다/ 부산의 한 벌 푸른 뜻 가다듬어/ 겨레의 자랑으로 기술을 익히니/ 아아 보람도 찬란한 빛나는 그 이름/ 부산항만물류고 부산항만물류고.

2. 교목: 향나무이다. 푸르른 기상과 인고의 미덕으로 은은한 기품을 내뿜는 고아하고 저력 있는 학생을 상징한다.

3. 교화: 장미이다. 환한 얼굴과 타오르는 열정으로 신새벽을 열어 나가는 건강하고 진취적인 학생을 상징한다.
2012년 3월 기준 총 26학급에 693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이 중 1학년은 항만 장비과 4학급에 113명[남 111, 여 2], 물류 자동화과 4학급에 113명[남 104, 여 9], 2학년은 항만 장비과 4학급에 116명[남], 물류 자동화과 4학급에 110명[남 107, 여 3], 3학년은 자동차 기계과 4학급에 99명[남], 전자 전기과 3학급에 74명[남 70, 여 4], 컴퓨터 건축 디자인과 3학급에 68명[남 62, 여 6]이 재학하고 있다. 교직원은 교장 1명, 교사 56명, 그리고 행정 담당 등 일반직 21명으로 총 78명이 근무하고 있다. 교지 총면적은 2만 1300㎡로, 실습실, 진로 상담실, 도서관, 강당, 시청각실, 항만 물류 전시관, 과학실, 미술실, 음악실, 컴퓨터실, 도서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동명대학교 정문통과



1978년 12월에 강석진(姜錫鎭)이 운영하는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東明文化學園)에서 동원공업전문대학(東元工業專門大學)으로 설립하였다.

이듬해 3월에 기계과·기계설계과·금속과·조선과·전기과·공업화학과의 6개 학과에 입학정원 640명으로 개교하였으며, 초대학장에는 배석현(裵錫鉉)이 취임하였다. 1981년 2월 제1회 졸업생 449명을 배출하였으며, 1985년에 동명전문대학으로 개편하였고, 1995년 12월 동명정보대학교을 설립 인가 받았으며, 1996년 3월 초대총장에 성기수 박사가 취임하였고, 제1회입학식이 거행되었다(3개학부 9개학과, 입학정원 840명).

1998년 5월에 동명전문대학을 동명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00년 2월에는 동명정보대학교의 제1회 학사학위 수여식이 있었고 동명대학의 제20회 학위수여식(22개학과 2,328명, 누계 2만 6,803명)이 있었다.

2006년 2월 동명대학과 동명정보대학교를 폐교하고 통합대학교인 동명대학교를 설립하여 같은 해년 3월 동명대학교 입학식(학사과정 2,240명, 석사과정 63명, 박사과정 20명)을 거행하였다. 2008년 3월 중앙도서관이 개관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동명기념관이 개관하였다. 

2014년 현재 7개 단과대학·학부(공과대학, 경영대학, 보건복지교육대학, 건축·디자인대학, 디지털엔터테인먼트학부, 항만로지스틱스학부, 국제문화학부) 및 자율전공학부, 계약학과로 구성되어 있다. 부속기관으로는 중앙도서관, 동명문화연구원, 정보전산센터, 국제교류센터, 신문방송국, 동명생활관이 있다. 부설기관으로는 사회교육아카데미가 있고, 학교기업으로 라츠인터렉티브, 아시아파워엔진이 있다.

교훈은 ‘개발’, ‘응용’, ‘창조’, ‘봉사’로 되어 있으며, 교육목표는 ‘평생교육을 통해 창의적인 지식과 기술을 개발하고 응용하여 지역·국가·인류에 봉사하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인재를 육성한다’이다.


*부산항만물류고등학교 앞의 갈맷길 이정표

*유엔참전 기념의 거리탑

*평화공원 앞에서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있는 공원

 세계 유일의 재한 유엔 기념 공원은 2005년 APEC 정상 회의 때 주요 인사의 방문지에 포함된 곳이었다. 그러나 공원의 동남쪽 일대는 고철 처리업, 차동차 정비업, 화물차 주차장, 화물 운송업 등 소음, 분진, 토양 오염을 유발하는 혐오 산업 51개 업체가 난립하여, 도시 미관을 저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6·25 전쟁 참전 유엔군 전사자들이 잠들어 있는 UN 기념 공원과 연계하여 인근의 환경 불결지에 평화의 상징 공원을 조성하여 자유 수호의 뜻을 기리고, 주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2004년 6월 평화 공원 조성 계획을 수립하고, 2005년 4월에 착공하여 2005년에 개장하였다.
평화 공원의 총면적은 3만 2893㎡이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평화의 광장이 있으며 바닥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그 둘레를 둘러싸고 조경·수경 시설 등을 비롯하여 13종 1,600점의 소나무 등 수목 3만 3620주, 초화 3만 3140포기가 식재되어 있다. 또한 공원에는 생태 연못, 잔디 광장, 파고라, 조깅 코스, 주차장 등 주민의 휴식 및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677번지 일대에 있는 평화 공원은 UN 기념 공원 근처에 있는 근린공원으로 평화 공원이라는 이름도 UN 기념 공원과 연계하여 지어진 것이다. 공원은 24시간 이용이 가능하며, 주변의 부산 문화 회관, 부산광역시박물관, UN 기념 공원, UN 조각 공원 등과 연계되어 문화 공간의 벨트화를 이루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우리도.....

*평화공원안에 있는 갈맷길 3-2코스 인증샷 스템프

*우리도 인증샷

*한적한 평화공원의 모습

*평화공원과 유엔묘지사이의 생태하천

*동백꽃의 향연

*이다리를 통해 조각공원으로 진행

*조각작품 1초의 침묵

*동백꽃 앞에서.....

*한겨울에 꽃을보니 ......

*조각공원으로 진행

*유엔묘지 북문통과

*유엔묘지의 모습

 유엔 기념 공원(영어: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 UNMCK)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남구에 있는 1951년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유일한 유엔군 묘지로,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유엔군 장병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유엔묘지 정문앞의 건물

  • 1951년 1월 18일: 유엔군 사령부에서 묘지 조성
  • 1952년 4월: 묘지가 완공되어 개성, 인천, 대전, 대구, 밀양, 마산 등에 가매장되어 있던 한국전쟁 유엔군 전몰장병 유해 안장 시작
  • 1955년 11월 7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토지유엔에 영구히 기증하고 묘지를 성지로 지정할 것을 결의
  • 1955년 12월 15일: 묘지를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유엔총회에서 결의문 제 977(X) 호로 채택, 토지에 대한 불가침권 부여
  • 1959년 11월 6일: 유엔과 대한민국간에 “유엔 기념 묘지 설치 및 관리 유지를 위한 대한민국과 유엔간의 협정”을 체결하여 유엔 기념 묘지로 출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에서 관리
  • 1974년 2월 16일: UNCURK 해체로 11 개국으로 구성된 ‘유엔 기념 공원 국제관리위원회’(Commission for the UNMCK)에 관리권한 위임
  • 1975년 3월 30일: 공식명칭을 ‘재한 유엔 기념 묘지’(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 UNMCK)에서 ‘재한 유엔 기념 공원’으로 변경
  • 1975년 12월 26일: 문화재청에서 종전 '재한유엔(UN)기념공원'에서 '부산 재한 유엔 기념 공원'으로 등록문화재 명칭을 변경 고시 [1]
  • 2007년 10월 24일: 문화재청에서 근대문화재로 등록(등록문화재 제359호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1950년 6월 28일 제2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이라는 이름으로 유엔군을 파병할 것을 결의하였다. 지원현황은 전투병력과 장비 등을 지원한 전투지원 16개국과 병원선, 의료진, 의약품 등을 지원한 의료지원 5개국 물자지원과 물자지원 의사를 표명한 44개국 등을 포함하여 총 63개국이 대한민국을 방어하기 위해 참전하였다.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기간동안, 참전 21개국 중 17개국 (의료지원국 중 노르웨이 포함)에서 40,896 명의 유엔군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951년 ~ 1954년 사이에 21 개국 유엔군 전사자 약 11,000 여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었으나, 벨기에,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스, 룩셈부르크, 필리핀, 태국 등 7 개국 용사의 유해 전부와 그 외 국가의 일부 유해가 그들의 조국으로 이장되어 , 2012년 현재 유엔군부대에 파견 중에 전사한 한국군 중 36 명을 포함하여 11 개국의 2,300 구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3]

    영국군 885명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 전사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것은, 숨진 곳에 묻는 영국 풍습에 따른 것이다.[4]

    단, 안장자 모두가 전사자는 아니다. 미군의 경우 한국전 참전자 본인이 원한 경우 사후 이곳에 안장하였다. 또한 다른 나라도 전쟁이 끝난 직후 병력을 철수한 게 아니라 몇 년 더 한국에 머물렀는데 이 머무르는 도중에 사고를 당해 죽은 경우도 이곳에 안장한 경우도 있다.

    1951년 대구 유엔군 묘지에서 전사자 등록 중인 미군. 왼쪽부터 십자가, 무명용사용 삼각형 표식, 전사자와 함께 묻는 양식표지인 작은 병
    국명파병자수전사자수봉안 유해수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8,407346281
    캐나다 캐나다27,000516378
    프랑스 프랑스3,76027044
    네덜란드 네덜란드5,320124117
    뉴질랜드 뉴질랜드5,3504134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9003711
    터키 터키14,9361,005462
    영국 영국56,0001,177885
    미국 미국1,600,00036,49236
    노르웨이 노르웨이62331
    벨기에 벨기에3,590106-
    콜롬비아 콜롬비아5,100213-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3,518122-
    그리스 그리스4,440186-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892-
    필리핀 필리핀7,500120-
    타이 타이6,326136-
    이탈리아 이탈리아185--
    덴마크 덴마크630--
    인도 인도346--
    스웨덴 스웨덴380--
    유엔 유엔 총계1,754,40040,896-
    비전투요원--11
    무명용사--4
    대한민국 대한민국--36
    총계--2,300


    꽃 하나 피지 않고 한포기 푹도 없는/ 거칠은 황토 언덕에/ 이미 고토에 돌아갈 수 없는 몸들이 누워/ 수정 십자가 떼 바람에 통곡하는 수영앞바다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93(대연동)에 있으며, 평화공원, 부산문화회관, 부산박물관 등과 이웃하고 있다.

    유엔 기념 공원 추모명비 앞에 기대선 미군

    총 면적은 176,486 제곱미터, 기념묘지 면적은 14.39 ha이며, 대한민국 정부가 1978년에 건립한 12 미터 높이의 유엔군 위령탑이 있다.

    참전국 및 유엔기가 게양되어 있고, 안장국의 기념비가 있다.

    대부분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고, 영연방, 호주, 캐나다, 프랑스, 영국 등의 위령탑 및 기념비가 있다.


    유엔군 위령탑, 제 2 기념관, 무명용사의 길,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 등이 있다.

    추모명비는 추모공원의 중반부에 해당하며, 전반부에서 묘역을 지나 공원으로 진입하는 주동선에 있고, 기본계획 임채운, 실시설계는 조민석이 했다. 방문객은 정돈된 잔디를 가로지르는 좁고 긴 진입축을 통하여 숙연한 마음자세를 가다듬으며 접근하도록 되어 있다. 반사 연못까지 올라온 방문객은 원형 마루판으로 돌아서 높은 곳으로 올라서면 주변을 살펴볼 수 있다. 모든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벽은 반사 연못 안에 핀 연꽃과 전사자의 철모를 형상화한 조각이 현재의 푸른 하늘과 전쟁의 참혹함, 그들의 희생정신이 평화를 가져왔음을 상징한다. 반사 연못 안에 있는 기둥 위에 꺼지지 않는 불꽃은 그들의 명예와 희생, 사라지지않고 영원히 기억될 것임을 상징한다. 제단 뒤에 5 미터 높이의 침묵의 벽이 전체 시설물의 배경 역할을 하여 내부 공간이 망자들의 공간임을 강조한다.

    대지 2,874.0 제곱미터에 추모명비 조형물 820.60 제곱미터, 보행로 부분 209.56 제곱미터, 조경 부분 1,843.86 제곱미터로 되어 있다.[5]


    추모관, 기념관, 정문이 있다. 추모관과 정문은 김중업이 설계했다.


    정문은 1966년 11월 30일 만들어졌다. 지붕을 받치는 8개의 기둥의 끝을 순간과 영원을 상징하는 사발형태(주두)로 디자인하여 전몰장병들을 위한 부드럽고 엄숙한 기립을 표현했다. 지붕의 네 모서리 끝 추녀는 머나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지붕아래 네 개의 물받이는 전몰장병의 눈믈을, 유리로 마무리된 지붕 천창은 유엔군의 영혼의 빛을 나타낸다.[4]

    이국 땅에서 평하를 위하여 싸우다 간 여러 나라들의 천사들에게 두 손 모아 경건히 바친 작품이다./ <중략> / 이 소품은 한것 부푼 선에 부드러움을 불어 넣어, 어린 시절의 아스라한 향수를 기억하면서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으려는 벅찬 작업의 소산이다. 유엔 관계 건축 가운데서는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라는 우탄트 총장의 찬사를 들은 작가로서는 큰 기쁨인 동시에 작가 개인에게도 소중한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 김중업,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 열화당, 1984년


    한국전쟁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4년 8월 21일 유엔이 추모관을 건립했다. 이건물을 지탱하는 여섯 개의 노출된 들보와 추상성, 영원성을 강조하는 기하학적인 삼각 형태그 주요 특징으로 추모관 양쪽 스테인드글라스에는 각각 평화의 사도, 승화, 전쟁의 참상, 사랑과 평화 등의 의미를 가지며, 내부에는 전투지원 참전 16개국을 뜻하는 16의 선이 중앙 정면 바닥에서 부터 유엔 상징을 통과하여 하늘로 승화한 뜻으로 천장을 가로지르는 형태에서, 전쟁의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과 의지를 담은 추모공간으로 엄숙함을 부각시키고 있다.[4]

    기념관은 1968년 건축되었다.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사진 자료 및 기념물이 전시되고 있다.

    1974년부터 대한민국을 포함한 호주,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남아공, 터키, 영국, 미국 등 전사자가 안장된 11 개국으로 구성된 국제관리위원회(재한 유엔 기념 공원 관리처)가 유엔 기념 공원 관리를 맡고 있다.

    매년 봄, 가을에 실무대표들로 구성된 실무회의(Sub-Committee Meeting of the Commission for the UNMCK)가 열리며, 10월 24일 유엔의 날을 전후하여 각국의 주한 대사들로 이루어진 정기총회(Regular Meeting of the Commission for the UNMCK)가 열린다. 재한 유엔 기념 공원 국제관리위원회(Commission for the UNMCK) 의장국과 의장은 위원국별 알파벳 순서로 매년 임명되며, 기간은 당해년도 11월 1일부터 익년 10월 31일까지이다. 


    *잘정리된 유엔묘지 입구의 모습

    *유엔기념공원 정문앞에서...

    유엔기념공원 정문통과 우측계단으로 진행

    *부산문회관을 통과 대공원장과 중강당사이로 통과 주차장에서 우측으로 진행


     

    부산 문화회관(釜山文化會館, Busan Cultural Center)은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76번길 1(대연4동)에 위치한 시립 종합 공연장이다. 1988년 9월 3일에 대극장이 우선 개관되었으며, 이어 소극장, 회의장과 중극장 등이 차례로 개관되어 대규모 복합 문화 공연장이 되었다. 1997년에는 공연장 부지에 인근의 부산 시립박물관과 UN공원의 부지가 합쳐져 부산 문화공원이 조성되었다.

    대극장

    문화회관 극장들 중 가장 먼저 개관했다. 1403석 규모이며, 오케스트라 피트와 승강무대 등을 갖추어 콘서트와 연극, 오페라, 발레 등의 무대 공연을 모두 소화하는 다목적 공연장이다.

    중극장
    부산문화회관 중극장

    1993년 4월 15일에 개관했으며, 767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다. 무대가 관객석 방향으로 돌출된 반원형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연극과 전통음악, 실내 관현악단 등의 공연이 개최되고 있다.

    소극장
    부산문화회관 소극장

    1991년 11월 11일에 개관한 212석의 소규모 공연장으로, 중극장과 비슷한 돌출형 무대가 설계되어 있다. 소규모 실내악 공연이나 독주회, 판소리 등의 전통 공연이 열리고 있다.

    1988년 9월 3일 개관한 대전시실과 1993년 4월 15일 개관한 중전시실로 나뉘며, 부산과 경남 지역의 미술가와 조각가, 학생들의 작품이 주로 전시되고 있다.

    1991년 11월 11일에 개관한 회의장으로, 소극장 건물 2층에 위치하고 있다. 213석 규모로, 회의석 133석과 방청석 80석이 마련되어 있다. 통역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여러 국제 회의의 개최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야외 무대로 사용할 수 있는 원형 공간과 전시실 사이의 야외 공간에서도 종종 공연이 열리고, 각종 음악 서적과 음반 등을 이용할 수 있는 자료실과 연회장, 어린이 놀이방 등이 부속 시설로 설치되어 있다.

    부산광역시 소속인 부산 시립 교향악단과 부산 시립 청소년 교향악단, 부산 시립 국악 관현악단, 부산 시립 합창단, 부산 시립 소년소녀 합창단, 부산 시립 무용단, 부산 시립 극단이 상주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갈맷길 이정표

    *가계앞의 잘생긴 아저씨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 우측으로 진행 후 첫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

    *이계단을 통하여 이동

    *계단에서...

    *달동네의 골목길

    *관해암의 옥상에 설치된 관음 보살상

    *옥상의 부처상

    *옥상에서 바라본 시가지의 모습

    *지장사의 모습

    *우암동 주민체력단련장 통과

    *장고개를 올라가요.

     우암동쪽에서 문현동쪽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장고개 즉 <장을 보러 갈 때 넘

     는 고개>라 블렀다.옛날 이 고갯길은 우암동,감만동,용호동 사람들이 부산장

     (현재 자성대의 서쪽 아래 부산진 시장 일대의 장터)에 장보로 갈때 머리에

     장바구니와 보따리를 이고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넘던 고개였다.

    *다리밑을 통과

    *시내의 고층빌딩 숲을 통과

    *육교를 건너 좌측으로 진행

    *조선통신사 역사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조선통신사를 알리기 위한 전시관.


    [건립 경위]
    조선통신사 역사관은 부산광역시가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널리 알리고 부산의 대표적인 역사 문화 관광 공간으로 개발하기 위해 자성대 공원 내 영가대(永嘉臺) 옆에 건립하였다. 공사는 2008년에 시작하여, 2010년 3월 20일 준공하고, 4월 21일 정식으로 개관하였다.


    [구성]
    조선통신사 역사관은 2층 건물 안팎에 상설 전시실, 3D 영상 홍보관, 행사 마당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1층에는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이해를 목적으로 제작된 영상을 보여주는 ‘3D 영상 홍보관’, ‘통신사의 정의 및 역할’, ‘삼사 임명식’ 등을 해설한 패널 등이 설치된 ‘전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에는 조선통신사가 오갔던 행로를 알 수 있는 지도와 모형, 통신사 일행이 타고 같던 배의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고, 일본 에도성[江戶城]에 들어가는 통신사 행렬을 재현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이밖에 2층에서 영가대로 이어지는 사이의 야외 공간에는 기념 촬영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현황]
    조선통신사 역사관은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각종 자료와 모형을 갖추어 놓고, 조선통신사의 개념, 파견 경위와 목적, 여행 경로, 조선통신사를 통해 이루어졌던 한국·일본 문화 교류 등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콘텐츠와 멀티미디어 자료를 전시·운영하고 있다. 현재 조선통신사 역사관은 부산문화재단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월요일은 휴관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역사관 내부의 모습

    *전시물

    *전시물

    *부산진지성 문화재 안내도


     

    시대 조선
    문화재 지정 부산광역시 시도기념물 제7호
    건립시기1593년(선조 26)
    성격 성곽
    유형 유적
    면적 지정면적 2만 4198㎡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분야 예술·체육/건축

    요약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

     


    부산진지성 서문 및 성곽 우주석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 지정면적 2만4198㎡. 일명 ‘자성대(子城臺)’·‘고니시성(小西城)’·‘마루야마성(丸山城)’·‘만공대(萬公臺)’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침범한 왜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부산진(釜山鎭)의 지성(支城)으로 쌓은 것으로서, 1593년(선조 26) 일본인 모리(毛利輝元) 부자에 의하여 일본식 성으로 축성되었다.

    1597년 고니시(小西行長)가 주둔한 적이 있기 때문에 고니시성이라고도 부르며, 부산진성을 모성(母城)으로 하고 그 자식의 성이라는 뜻과 산정(山頂)에 자성(子城)을 만들고 장대(將臺)로 하였다는 데서 자성대라고도 부른다. 이 밖에도 명나라의 장군 만세덕(萬世德)이 진주(進駐)한 적이 있고 그 뒤 만공단(萬公壇)이 있었다는 데서 만공대라고도 부른다.

    원래는 이 왜성이 축조되기에 앞서 그 자리에 우리 나라의 성이 있었다고 한다. 즉,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부산포(釜山浦)에는 내성(內城)·외성(外城)이 있었는데 내성인 본성은 지금 정공단(鄭公壇)이 있는 지역 일대를 중심으로 뒷산인 증산(甑山)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자성대는 그 외성이었던 것을 왜군이 현재와 같이 개수하였다.

    왜군을 몰아낸 뒤에 만세덕 휘하의 군대가 일시 주둔하였으며, 그 뒤에는 자성대를 중심으로 성을 쌓고 사대문을 축조하고 관아(官衙)를 정비하여 부산진 첨사영(僉使營)으로 사용하였다.

    사대문 가운데 동문을 진동문(鎭東門), 서문을 금루관(金壘關), 남문을 종남문(鍾南門), 북문을 구장루(龜藏樓)라 하였고, 성 안팎에는 공진관(拱辰館, 客舍)·검소루(劒嘯樓, 東軒)·제남루(濟南樓, 閉門樓)를 비롯하여 청상루(淸霜樓, 軍器所)·관청 외에 15채가 있었다.

    또 성밖에는 진남루 외에 4채가 있었다. 특히 서문의 양측 성곽에 끼여 있었던 우주석(隅柱石)에는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되는 남쪽 국경이라.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현재 왜성임을 한눈에 알 수 있지만 남아 있는 성지(城址)는 최고 10m, 최저 1.5m의 성벽뿐이다. 1974년에 동문·서문·장대를 신축하였으며 동문은 건춘문(建春門), 서문은 금루관, 자성대 위의 장대는 진남대(鎭南臺)라 하고, 1975년에는 동문 주위에 성곽을 신축하였다.

    자성대에는 임진왜란에 참가한 명장(明將)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 세운 천장군기념비(千將軍記念碑)가 남아 있고, 동쪽 산중턱에는 최영장군비각(崔營將軍碑閣)이 보존되어 있다. 


    *매축지 마을 유래

    *3-2코스 갈맷길 완주 스템프 찍는 곳(여기는 부산진시장 건너편)

    *육교를 건너 부산진시장 좌측으로 진행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전통 시장.


    [건립 경위]
    조선 시대 부산 지역 진성 서문 밖에서 매달 4일과 9일 열렸던 부산장에서 유래되었다. 관련 기록으로 조선 시대 1770년(영조 46)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부산 진성 서문 밖에 있는 미국과 건어물 집산지로 4일장과 9일장을 열었다’고 나와 있다. 1913년 9월에 약 132㎡와 약 198㎡ 규모의 두 동의 함석지붕 상가를 지어 상설 시장이 되었다.


    [변천]
    1930년 10월에 대지 면적 약 6,612㎡, 건물 면적 약 661㎡ 규모의 시장을 건립해 부산진시장번영회를 발족하였다. 1958년 2월에 연면적 약 1만 3,223㎡ 목조 건물을 지어 운영하였다. 1964년 1월 17일에 부산진 시장 민영화 방침이 결정되었다. 1969년 7월 22일에 부산직할시 동구 초량동 1161번지의 시유지에 약 4,298㎡의 시장 가건물을 건립하여 이전하였다. 1968년 3월 29일에 부산진 시장 건립 공사를 착공하여, 1970년 8월 28일에 연면적 약 2만 9,090㎡의 지하 2층·지상 4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완공하였다. 1970년 10월 8일에 신축 상가 건물로 입주하였다.

    1978년 3월에 옥상 주차장[동시 주차 200대]을 개발하고, 북편 승강기 1기를 설치하였다. 1988년 5월에 동편 승강기 1기를 설치하였다. 1993년 4월에 부산진 시장 주차 빌딩[동시 주차 700대]을 완공하였다. 1997년 8월 1일에 냉·난방 및 환기 설비 시설을 완공하였다. 2002년에 외벽과 내부 리모델링, 2003년에 에스컬레이터 교체 및 설치 공사, 2004년에 냉·난방 및 환기 시설 보수 공사, 엘리베이터 2기 설치 등을 통해 시설 현대화를 진행하였다. 2005년에 전국 재래시장 박람회에서 최우수 시장상인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


    [구성]
    부산진 시장은 지하 2층·지상 4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대지 면적은 7,499㎡이며, 1,500개의 점포가 입점해 있다. 주 취급 품목은 한복, 포목, 각종 원단, 양복, 의류, 신발, 직물류 등의 혼수 용품이다. 고객 편의 시설로는 주차장과 화장실[10동 60칸]이 있다.


    [현황]
    2012년 현재 직영 점포 1,500개가 운영 중이며, 종사자 수는 2,000명이다. 상인 조직으로 부산진시장번영회가 있다. 부산진 시장은 1970년대에는 부산 지역의 의류 도매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활발히 수행하였다. 최근 부산 지역의 견직업 침체와 유통 업체 확산 등으로 상권이 침체되었다. 상권 활성화를 위해 부산진시장번영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상품의 고급화, 다양화 및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 기반을 마련하고, 전통 시장 최초로 고객 참여 패션쇼 개최, 고객을 직접 찾아가는 마케팅 활동 등으로 고객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는 등 자체적인 노력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철길 굴다리통과 후 진행

    *정공단 통과


     

    정공단(鄭公壇)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1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제단이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의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산진성을 지키며 군민과 함께 왜적과 장렬히 싸우다 성과 운명을 같이한 부산첨사 정발과 그를 따라 순절한 군민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제단이다.

    단의 중앙에는 ‘정공단’이라 새긴 비를 세우고, 서쪽에는 정발의 막료였던 이정헌, 동쪽에는 정발의 첩인 열녀 애향, 남쪽에는 군민들을 모셨으며, 남쪽 층계 밑에는 충직한 노복이었던 용월의 단을 마련해 두었다.

    조선 영조 42년(1766) 당시 부산첨사로 있던 이광국이 단을 설치하여, 성이 함락되었던 음력 4월 14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일제시대에 와서는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제단을 폐쇄하고 유물과 비품을 모두 몰수하였으나, 광복 후 새로이 단을 쌓고, 옛 비석을 되찾아 세운 후 다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부산포개항가도 안내도

    *잠시 후 좌측으로 골목길 진행 부산진 교회를 우측에두고 진행

    *부산진 일신여학교

     개항기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건립된 부산 최초의 근대적 여성 교육 기관인 부산진일신여학교의 교사.


    [개설]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에 파견된 호주 장로교 선교회 여자 전도부에 의해, 선교 활동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교육 사업의 하나로 설립되었다. 호주 장로교 선교회의 멘지스(Menzies)[민지사]와 페리(Perry)는 1891년(고종 28)에 부산에 파견되어, 1895년(고종 32) 10월 부산진에 마오리고아원과 교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신여학교를 설립하였다. 교명은 ‘날마다 새롭게[Daily New]’라는 뜻이며, 초대 교장으로는 멘지스가 취임하였다. 개교 당시 수업 연한 3년의 소학과 과정으로 출발한 일신여학교는 1909년(순종 3) 8월에 사립 학교의 인가를 받고, 더불어 3년 과정의 고등과도 병설하였다. 이 고등과는 후에 동래학원으로 이어져 현재의 동래여자중학교와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1915년 8월에는 학칙 개정에 의해 수업 연한 3학년이었던 소학교와 고등과를 4학년으로 증설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3월 11일과 4월 8일에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는 부산 지역 3·1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1925년에는 고등과 교사를 동래구 복천동에 신축 이전하고 동래일신여학교라고 교명을 바꾸었다. 1940년에는 오태환, 김명은 등 동래 지역의 유지들이 재단법인 구산학원[현 동래학원]을 만들어 경영권을 인수하고, 교명을 동래고등여학교로 변경하였다.


    [위치]
    부산진일신여학교(釜山鎭日新女學校)는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17번길 17[좌천동]에 위치한다.


    [변천]
    부산진일신여학교는 1905년(고종 42) 4월 15일에 일신여학교 교사로 동구 좌천동에 건립되었다. 1925년에 일신여학교가 동래구 복천동으로 이전한 후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 경남 교역자 연수원으로 사용되었다.


    [형태]
    서양식 2층 벽돌 건물로서 조적조(組積造)[돌, 벽돌, 콘크리트 블록 등으로 쌓아 올려서 벽을 만드는 건축 구조]이다. 특별한 양식은 없고, 외부에 벽돌 기둥이 2층까지 이어져 있으며, 외부에서 바로 2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1층 벽재는 석재이고, 2층은 벽돌이다.


    [현황]
    부산진일신여학교는 최근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부산 경남 교역자 연수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 건물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 유지재단이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2003년 5월 2일에 부산진일신여학교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된 바 있다.


    [의의와 평가]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 기관으로, 독립지사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한 부산 지역 여성 인재의 산실이다. 부산진일신여학교의 교실로 쓰인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는 근대 초기 건축물의 형식을 알 수 있게 하는 문화재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기미독립선언서 해설

    *기미독립선언서


    역사적 배경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강제 병합된 뒤, 국내외에서 비밀리에 전개되고 있었던 항일 구국운동은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W)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자,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전개할 기회가 왔다라고 생각하여 이를 추구하려는 노력들이 나타났다.


    내용

    1918년말부터 독립운동의 3대 원칙, 즉 대중화·일원화·비폭력 등을 주장해 온,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崔麟) 등의 천도교 측 중진들은 독립운동의 실천 방법으로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국권반환 요구서 등을 작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거족적인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기독교·불교·유림(儒林) 등 각 종교 단체를 망라하는 동시에 저명 인사들을 민족 대표로 내세우기로 합의하였다.

    그래서 1919년 2월 상순, 대한제국의 고관을 지낸 김윤식(金允植)에게 독립선언서의 서명자가 되어 줄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독립청원서를 내는 것은 찬성하지만, 선언서 발표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하여 거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 밖에 박영효(朴泳孝)을 비롯한 저명한 인사들의 완강한 거부에, 한때 운동이 포기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배일 감정이 절정에 다다르게 되면서 다시금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들은 다시 종교 단체와 교섭을 벌였는데, 먼저 기독교 측의 이승훈(李昇薰)을 만나 천도교와 함께 독립운동에 합류할 것이라는 승낙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불교 측과의 교섭은 최린이 담당하여 한용운(韓龍雲)에게 승낙을 얻어냄으로써 불교 측과의 제휴도 이루어졌다. 한용운은 또 유림측의 참가를 교섭했으나 실패하여 유림측의 합류는 포기하고 말았다.

    이때 독립운동의 실천 방법을 두고 논란이 일어났다. 천도교 측이 내세웠던 청원서와 선언서를 동시에 발표하자는 의견에 대해 일부에서는 청원서만을 내고 선언서는 발표하지 말자는 의견 대립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최린은 “청원서나 건의서를 내는 것은 일본 정부에게 독립을 시켜달라고 청원한다든지 건의해보는 것이므로 민족 자결의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국내적으로 전민족을 분기시키고, 국외적으로 전세계에 향하여 독립해야 하는 이유와 독립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결의를 표명하는 중대한 선언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되었다.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 최린은 최남선(崔南善)을 추천하였다. 최남선은 독립운동가로서 전국에 이미 알려졌고, 서구적 교양과 재래의 학문을 모두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장력도 뛰어난 사람이므로, 최린은 “전민족의 의사를 표시할 독립선언서와 같은 중대한 글을 지을 사람은 그 밖에 없다”고 하였다.

    또한 최남선 자기 자신이 “일생을 학자로 마칠 생각이라 독립운동의 표면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선언서는 작성하겠다.”고 함으로써 선언서의 작성 문제는 일단 그에게로 낙착되었다.

    뒷날 한용운이 독립운동에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 선언서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맡겠다고 나섰으나, 이미 선언서의 초고가 완성되어 손질이 끝난 뒤였다. 지금 전하는 독립선언서 끝에 있는 공약 3장(公約三章)은 후에 한용운이 추가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하여 작성된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 15인, 기독교측 16인, 불교측 2인 등 33인이 민족 대표로 서명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원고는 오세창(吳世昌)을 통해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 인쇄소 사장 이종일(李鍾一)에게 전달되었다. 이종일은 공장 감독 김홍규(金弘奎)와 함께 2만 1,000매를 인쇄하여 경운동(慶雲洞) 자기 집으로 운반하였다.

    선언서는 28일부터 전국 각지로 전달·배포되면서 거족적인 3·1운동의 전개에 있어 결정적인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1,762자로 된 독립선언서에는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내용과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 독립의 전개 방법을 제시하고 있어, 오늘날 전해오는 국내외 각국의 독립선언과 비교해보아도 아무 손색이 없는 명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부산포개항문화관 과 안용복 도일선 전시관 통과


     안용복 도일선(渡日船)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과 혼인하고자 허황옥이 거친 바다를 헤치고 김해 남쪽 해안에 닿았을 때 16세였다.
      인도 아유타국 공주였던 허황옥은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그 어려운 길을 마다치 않았다.  당시 허황옥은 해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파사석탑(婆裟石塔)을 배에 싣고 왔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야기다.
     재질이 한국산이 아니며 조각 방법도 독특한 이 석탑은 현재 6개 석재만 남았다.
     뱃사람 입장에서 안전 항해를 비는 상징물로 이만한 것을 찾기 어려웠을 터.
     이 석탑이 뱃사람의 성화에도 이 정도 마멸에 그쳤으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랄밖에.

       
     허황옥 일행은 어떻게 항해했을까.
     태양과 달을 나침반 삼아 해류와 조류 그리고 바람을 다스렸으리라.
     악전고투 끝에 인간의 의지로 항로를 만들었으니 그게 역사다.
     1947년 노르웨이 학자 하이엔달은 남미 페루의 잉카인들이 500년께 폴리네시아로 이동했을 것이란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려고 뗏목배 콘티키호로 8000㎞를 101일 만에 항해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도 그렇게 이어졌을 것이다.  1983년 8월 역사학자 윤명철 씨는 뗏목배 해모수호를 타고 거제도를 출발해 42시간 만에 대마도에 닿았다.

     반도국가인 우리나라는 오랜 바다 경영의 역사를 자랑한다.
     신라 무장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해 서해를 장악하고 당나라와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했다면 발해는 동해를 건너 일본과 교역하며 환동해무역권을 형성했다.
     고려는 중국과 왕성한 해상 교류 활동을 벌였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밑바탕에 우리 고유 배인 한선(韓船)이 있다. 우리나라 지형 조건에 맞춰진 한선은 중국이나 일본 배보다 성능이 우수했다. 한선의 가장 큰 특징은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 구조라는 점이다.
     독도 지킴이 안용복 장군의 도일선(渡日船)이 완성됐다는 소식이다.
     안 장군은 조선 숙종 때 일본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약받았다.
     이 배는 일본 시마네 현 오키 섬 무라카미 가문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됐다.
     당시 기록대로 길이 9m, 너비 3.6m, 깊이 1.3m 크기인 이 배는 한선의 전통을 이었다.   미국의 라이샤워 교수는 "9세기 신라인들은 동양 3국 중 가장 조선술이 뛰어났고 항해술이 발달해 서해와 동중국해 그리고 대한해협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했다. 안 장군의 국토 사랑 정신과 함께 잠자고 있는 해양활동의 DNA를 일깨워야 할 때다.



    *안용복 도일선 전시관앞에서 엘러베이트를 타고 증산공원으로 진행

    *증산공원의 팔각정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과 좌천동 일대에 있는 공원.


    [건립 경위]
    도심 속 근린공원으로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증산 공원(甑山公園)은 1982년에 개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구성]
    증산 공원의 면적은 약 2만 ㎡이다. 공원은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운동장과 농구장, 족구장, 베드민턴장, 게이트볼장 및 간단한 체육 시설을 갖추고 있고 중앙 광장이 있다. 화장실과 주차장이 있으며, 공원 일대에는 조선 초기에 축성된 부산진성이 있다. 산책로 정비가 잘되어 있어서 최근 증산 둘레 길이 조성되었다.


    [현황]
    증산 공원은 부산광역시 동구 성북로 36번길 46번에 있다. 증산이라는 지명은 산의 모양이 시루와 가마솥처럼 생긴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부산’이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공원은 24시간 사용이 가능하며, 주변에는 자성대 공원, 만리산 체육공원, 전포 돌산 공원, 부산 중앙 부두 등이 있다.

    *증산공원에서 바라본 시가지의 모습


    *오늘의 종착지 동구도서관 여기서 마무리 해요.


    *3-2:구간 누계거리:54.8km+10.9km=65.7km

    *3-2:구간 누계시간:22시간00분+5시간00분=27시간

    *3-2:구간 집에서 이동거리누계:59km

           236.1km+59km=295.1km

    *3-2*구간 경비누계 : 부산진시장 호떡4,000원:택시료11,000원

             저녁 달맞이 고개 대구탕 : 44,000원

            종합:403,000원+59,000원=462,000원.....잔금:13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