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알프스 둘레길(국제신문)

국제신문 영남알프스 둘레길2코스(작천정~신광사)13.5km.5시간06분

문수산 아래 2017. 11. 29. 13:10

*영남알프스 둘레길 2코스를 가다.

*날   자 : 2017년 11월 19일 일요일

*날   씨 : 맑음.-3~7도

*코   스 : 작천정~봉화산~언양 고인돌~화장산~김취려장군묘~신광사

             13.5km 5시간06분 소요.

*어제 토요일에 이어서 일요일인 오늘도 영남알프스 둘레길 2코스를 걷기

 위해 집에서 아들의 차량으로 출발지 언양 작천정으로 이동하고 2코스

 마치고 신광사앞에서 다시 아들의 차로 2코스를 마무리 합니다.


*11시06분 2코스 시작점 인내천 바위 입구에서 아들의 도움으로 집에서 이동

 인증샷까지 남기고 출발.

*봉화산까지 진행합니다.

*인내천 바위의 유래.

*출발점에는 돌탑흔적을 남기고 출발해요.

*출발 잠시 후 인내천 바위 도착.

*인내천 바위


 

기미독립운동의 모태 언양 작괘천 변‘인내천’바위

‘人乃天(인내천)’바위 명각 100주년에 즈음, ‘울산독립공원’ 추진운동 활발

 

 


언양 작괘천 변 봉화산 기슭 큰 바위에 ‘人乃天’이라 크게 명각되어 있다.

인내천 바위는 천도교라는 한 종단의 종교적 교의를 전하기 위한 새김이 아니라,

  민족의 수난기인 일제강점기에 민족독립을

염원하던 울산 언양인들이 당시 부당한 일제의 침탈과

무단정치를 벗어나 민족자결주의의 민족자주독립의 의지를 담아 약속하였던 새김이다.


▲ 김종환 21세기의병대 총사령 © UWNEWS




이규정 ‘울산독립공원’

추진위원장(11대,15대 국회의원)의 말씀을 옮겨보면,

 “인내천 바위는 울산 독립운동사의 요람이요,

 성지이다.

정확히 100년 전 이 땅 울산의 애국지사들이

망국의 길을 걷고 있던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구국의 결의를 다지던 곳이다.

바위의 인내천이란-

사람이 곧 한울이란 성인의 가르침을 명각했다.”고 전한다.

보국안민 척양척외의 기치를 내걸었던 동학 혁명의

좌절을 통분해하며 “1915년 민족정신의

결의를 다지며 바위에 새겼으며,

 4년 후에 일어날 3.1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던 성지이다”고 사자후를 토한다.

3.1독립만세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가 연합하는 거족적인 민족운동!

당시 민족운동을 주도적으로 준비하던 천도교 측에서 거국적 운동을 위하여

기독교 측과의 연대를 구하여 기독교계의 지도자 이승훈과

신민회 활동가 언론인 이종일의 합류, 보성학교 교장 최린의

중재로 불교계 만해 한용운 참여로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가 연합하는 거족적인 민족운동이 시작되었다.

세계의 어느 나라를 두고 보아도 종교가 한 목적으로 연합을 하는 경우는 잘 없다.

종교란 자신의 교리가 최고이며 절대 진리라는 믿음으로 존립의 의의를 가지기에

다른 종교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원천적 아집이 내재되어 있다. 그

래서 다른 종교 간의 화합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미3.1독립만세운동에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서로 힘과

뜻을 모아 일으킨 역사는 우리 민족이 종파를 뛰어넘어 민족의

자주독립을 얼마나 염원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인류역사상 초유의 일이 아닐 수 없다.

人乃天(인내천) 바위의 큰 글씨는 민족자주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울산언양인들의 지고한 바램의 새김

그 연장선상에서 언양 작괘천(酌掛川) 변 봉화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바위에

명각되어 있는 人乃天(인내천) 바위의 큰 글씨는 종교의 교의를 넘어 존중과

배려를 통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인내천 정신으로 민족자주독립을

이루고자는 울산언양인들의 지고한 바램이 새겨진 곳이다.

기미독립만세운동은 천도교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자 천도교인들은

 대대적인 민족저항운동을 준비한다. 손병희 3대교주의 유지를 받아 천도교 중앙학교

송진우 교장과 현상윤 선생님 그리고 보성학교 최린 교장이 거사를 준비한다.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는 테라우치 총독에 이어 육군대장 출신의 하세가와

총독이 부임하여 식민정치를 강화하였다.

1919년 1월 말 손병희는 “고국민대회(告國民大會)”란 포고문으로 명성황후의 시해와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음을 미국을 비롯한 열강과 12개국에 알렸다.

2월 8일 동경유학생 백관수, 최팔용, 이광수 등의 2.8독립선언이 자극제가 되어

고종임금의 인산일인 3월 3일을 즈음하여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감안하여 3월 1일 정오를 거사일로 정한다.

민족대표 33인(천도교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인사동 태화관에서 낭송하고 일경에 의에 체포되자,

민중들은 파고다 공원에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언양의 독립만세운동은

고종황제의 인산(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상경한,

천도교 울산교구장 김교경이 서울 파고다공원의 3.1만세운동을 직접 지켜보고,

울산교구의 천도교인들에게 독립신문과 국민회보의 기사를 편지와 함께 보내면서,

울산언양의 독립만세운동 준비를 당부한다.

고종황제의 독살에 대한 글을 보고 울산교구의 천도교인들은 심한 충격을 받아,

즉시 교인들을 소집하여 의논하여, 휘문의숙 출신 이규장을 서울에 보내어

김교경 교구장의 지시를 받아오게 하였다.

최해규, 곽해진, 이규천, 유철순, 이무종, 이규로, 이규장 등 7인은 비밀회의를 개최하고 거사를 준비한다. 유림에서는 이무종 외에 이규인 등이 가세했다.

휘문의숙 동문인 이규장, 이무종 두 사람이 총참획을 맡아 조직과 연락 선언문 등사와

태극기 제작을 담당하였고, 휘문의숙 동문이 황선윤을 불러 동참하게 하였다.

3월 29일, 언양 장날인 4월 2일을 거사일로 잡고

길천리 이무종의 사랑방을 본부로 하였다.

이무종은 상남면 면사무소에 밤중에 잠입하여 등사기를 훔쳐와

 황선운과 등사하고 새벽에 다시 면사무소에 갖다 놓는 대범함을 보였다.

이무종에 사랑방에 모인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최해선, 이규경 등은

이규인의 빈집에서 밤을 새워가며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 2일 언양 장날은 상쾌한 봄바람이 불고 청명한 날씨였다.

이른 아침 거사의 주동인물 이무종,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최해선, 이규경,

이종능 등 7명은 장터로 향했다. 김만출이 청년들에게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등이

태극기를 비밀리에 나누어 주었다.

정병한이 체포되어 주재소로 연행되어 가자 김성진노인의 대한독립만세를

기점으로장판은 군중들의 태극기와 만세소리가 물결쳤다.

일경의 발포로 17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나 대한독립만세소리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산 좋고 물 맑은 간월산 동편 아래 작괘천이 역사를 머금고 도도히 흐른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유월 중순 초여름 작괘천의 수려한 풍광이 내려다보이는

봉화산 기슭의 바위에 4년 후 기미년 언양독립만세운동의 저력이 되는 인내천이 명각되었다.

인내천 바위의 글은 시인이요 명필이었던

춘사 김영걸님이 쓰고 각자는 함석헌님이 하였다.

인내천 바위의 명각은 당시 천도교 초대교구장 최해규 선생과 2대 교구장 김교경이다.

이들은 기미년의 언양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훗날 언양의

거리마을에 양정학원을 설립하였다.

종교의 교의를 뛰어넘어, 울산에서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만세운동

 이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기약한 인내천 바위의 명각은우리 고장의 자랑이요.

자긍심이다.

인내천 바위 명각 100주년을 맞이하여 인내천 바위를 잘 보존하고

그 정신을 더욱 고양하기 위하여 인내천 바위 일원을 ‘울산독립공원’으로

성역화하기 위한 시민들의 뜻이 한데 모여 추진위가 만들어지고

그 정신이 확산되어 울산에도 전국에서 세번째로 독립공원이 설립되기를 기원한다.

 /21세기의병대 총사령 김종환





 


*대머리 바위에서 바라본 작천정 주변의 모습.

*어제 앞에 보이는 백암산을 넘어왔조.

*저멀리 신불산.간월산.영남알프스의 산능선이 보이네요.

*산죽터널을 통과.

*묵은 산길이 한적하니 좋아요.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언양시가지의 모습.

*봉화산 정상의 모습

*여기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며....

*봉화산(350m) 정상

*정상 정복을 기념으로....

*봉화산(부로산) 봉수대 자리


 

언양 부로산 봉수대(彦陽 夫老山 烽燧臺)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에 있는 봉수대이다. 1998년 10월 19일 울산광역시의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개요[편집]

봉수는 과거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시대의 군사통신제도이다. 조망이 양호한 산정에서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국경과 해안의 안위를 중앙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봉수제가 성립된 것은 1149년(고려 의종 3)으로, 1급에서 4급의 봉수 거화수(炬火數)를 규정하고, 봉수군의 생활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조선 세종대에 이르러 그 체제가 정비되었다. 5거 거화수 등 관계 규식 마련, 각 도 연변의 연대(烟臺) 축조, 봉수선로 획정 등을 통해 그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각 봉수에는 오장(伍長)과 봉수군(烽燧軍)이 교대로 근무하면서, 평상시에는 한 홰[烽], 적이 나타나면 두 홰,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홰, 적이 국경을 넘어오면 네 홰, 적과 접전하면 다섯 홰의 봉수를 올리도록 하였다. 1894년(고종 31)에 전보통신이 보급되면서 폐지가 결정되었고, 다음해 각처 봉대와 봉수군을 폐지함으로써 모든 봉수제는 폐지되었다.

봉수는 성격에 따라 경봉수(京烽燧)․내지봉수(內地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로 구분된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였던 중앙봉수로서 서울 목멱산(木覓山)에 위치하여 목멱산봉수 또는 남산봉수라고 불렀다. 연변봉수는 해륙 변경(海陸邊境)의 제1선에 설치하여 연대라 하였으며, 내지봉수는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로서 수적으로 다수였다.

삼남면 교동리 봉화산(해발391m) 정상에 위치한 부로산봉수는 남쪽의 양산 위천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의 소산봉수(두서면 서하리)로 신호를 전하는 역할을 한 내지봉수이다. 대응 봉수노선의 거리는 남쪽 위천봉수와는 15.36km, 북동쪽 소산봉수와는 9.3km이다. 현재 울산지역의 봉수 중 가장 높은 곳에 입지하고 있으며, 언양읍성과도 인접하고 있다.

『헌산지(獻山誌)』의 기록에서 부로산봉수의 비치물목이 확인된다. 거화(擧火)시설과 거화를 위한 재료, 무기류 등이 나타나 있어, 시설현황 및 운영체계를 알 수 있다. 또한 봉수군의 생활에 필요한 기와집 4칸이 존재하였는데 각종 물자를 보관하고 봉수군이 거주하던 건물로 추정이 된다.


*한참 내리막길을 내려가요.

*다시 돌탑이 있는 곳 도착.

*다시 내려가요.

*낙옆이 길위에 쌓여 더욱 운치를 더하네요.

*오래된 고사목이 ....

*산에서 내려와 경동 청구아파트 앞으로 진행.

*앞에 보이는 경동교를 건너가요.

*경동 청구아파트 주차장을 통과 우측의 경동교를 건너좌측 횡단보도 건너

 우측으로 진행 다시 우측으로 진입.

*도로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울주 청년회의소 건물앞을 통과 우측 도로로

 진행.

*도로를 진행하다 오영수 문학관 입구에서 직진하면 우측에 언양지석묘 도착

 지석묘 구경 후 다시 오영수 문학관으로 진행.

 언양지석묘(彦陽支石墓)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 있는 지석묘이다.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의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


 

언양 지석묘는 규모로 보아 영남지역 일대에서 가장 큰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지석묘의 상석은 길이 8.5m, 너비 5.3m의 덮개돌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지석은 6매로 정도이고, 크기는 된 받침돌의 크기는 2.8m〜3.1m 정도로 거대한 편이다. 서부리 주민들은 이 지석묘를 ‘용바우’라고 부르며, 민속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지하의 돌방 형태나 출토 유물은 알 수 없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덮개돌이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이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언양 지역의 정치·사회·문화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는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는 세계적으로 유수한 지석묘 집중지역으로 알려져 있다.[1]

우리 나라의 지석묘는,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것을 탁자식(卓子式) 또는 북방식이라 하고,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것을 바둑판식(碁盤式) 또는 남방식이라 하는데, 바둑판식에서 받침돌이 없는 것을 때로 개석식(蓋石式) 또는 무지석식(無支石式)이라 하여 구분한다. 울산지역에서는 개석식과 바둑판식이 주로 나타난다.[1]

언양 지석표는 규모로 보아 영남일대에서 가장 큰, 바둑판식 고인돌이며, 길이 8.5m, 나비 5.3m의 덮개돌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6매로 된 받침돌의 크기는 2.8m~3.1m 정도로 거대한 편이다.[1]

서부리 주민들은 이 지석묘를 "용바우"라고 부르며, 민속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지하의 돌방 형태나 출토 유물은 알 수 없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덮개돌이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1]

이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언양 지역의 정치·사회·문화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지석묘 구경후 오영수 문학관으로 진행.

*영남알프스(화장산 복숭아꽃 설화) 해설판.

*오영수 문학관 전경.

 오영수 문학관(吳永壽 文學觀)대한민국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 위치한 문학관이다. 2014년 1월 21일에 처음 문을 열었으며, 난계 오영수의 문학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어졌다.[1]


 

난계 오영수가 잠들어 있는 화장산 기슭 입구에 있으며, 지상 2층에 1개동, 총 연면적 538 제곱미터로 되어 있다. 오영수의 육필원고와 미술작품 등 188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문학관의 2층에는 문화사랑방이라고 불리는 작은도서관이 있다.[2] 쉬는 날은 매주 월요일[3], 1월 1일, 설, 추석연휴이다.

최근에 문학관 입구의 폴사인이 신식으로 교체되었다.


 [활동 사항]
오영수(吳永壽)[1909~1979]는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면 동부리 313번지에서 태어났다. 맥랑생(麥浪生)이란 필명을 사용하였다. 어릴 적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920년 4월 언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3월에 졸업하였다. 이후 가계를 돕기 위해 향리의 우체국에서 잠시 일하였다. 근대 문인들이 대부분 그러하였듯이, 이 무렵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에 동시(童詩)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2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 나니와[浪速]중학 속성과를 수료하였고, 1935년 일본대학 전문부를 중퇴하였다. 1937년에는 동경국민예술원에 입학하여 2년 만에 졸업하였다. 이후 만주에서 방랑하다가, 1943년경 귀국한 뒤 아내의 직장을 따라 동래군 일광면 좌천리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의 백씨(伯氏)인 김범부를 만났으며, 이를 계기로 김동리와 문학적 교분을 쌓았다.

오영수는 1945년 12월부터 경남공립여자중학교[현 경남여자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일하면서 동료 교사인 박영한(朴榮漢), 김수돈(金洙敦)과 함께 교우지 『학교 소식』에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27년 『동아 일보』에 ‘언양 소년단 오영수’로 투고한 동시 「병아리」 이후, 1949년 「남이와 엿장수」로 등단하기 전까지 발표한 시는 20편을 훌쩍 넘는다. 1946년 6월에는 광복 초기 좌파가 주도한 지역 문단에 맞서 조선청년문학협회 경남지부가 결성될 때 준비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1948년 맥랑생이라는 필명으로 『문예 신문』 신춘문예에 시 「호마(胡馬)」가 3등으로 당선되면서 문단에 공식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1949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남이와 엿장수」를 『신천지』 9월호에 게재하였고, 1950년 『서울 신문』 신춘문예에 「머루」로 입선하여 소설가로 이름을 드러낸 후에는 단편 소설 창작에 주력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동부 전선에서 종군하였고, 1951년 부산중학교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54년 서울로 근거지를 옮겼다.

1955년에 조연현(趙演鉉)과 함께 문예지 『현대 문학』 창간을 주도하면서 편집장이 되어 오랫동안 매체 발행인이자 편집인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1966년 현대문학사를 퇴사한 뒤 1970년 한국문인협회 소설 분과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77년에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하여 창작에 전념하였다. 1979년 『문학 사상』 1월호에 발표한 「특질고」로 필화를 겪으면서 절필 선언을 하였으며, 이어서 한국문인협회에서 제명되었다.

그러나 오영수는 한국 소설사에서 단편 소설의 미학을 개척한 대표적인 소설가로 꼽힌다. 30여 년을 훌쩍 넘는 문학적 이력에 걸맞게 150편에 이르는 단편 소설을 창작하였다. 대체로 자연 예찬과 소박한 향촌의 향수, 한국적인 정서와 인간의 본원적 심성에 대한 탐구, 인정과 긍정의 미학, 휴머니즘의 옹호 등을 오영수 소설 세계의 특징으로 지적한다. 광복기 부산 문학 사회를 이끌며 단편 소설의 새로운 미학을 개척한 오영수는 말년의 뜻하지 않은 필화 사건이 빌미가 되었는지 건강이 악화되어 향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갯마을』[중앙문화사, 1953], 『머루』[문화당, 1954], 『명암』[백수사, 1958], 『수련』[정음사, 1965], 『오영수 전집』 1-5[현대서적, 1968], 『오영수 대표작 선집』 1-7[동림출판사, 1974], 『황혼』[창작과비평사, 1977], 『잃어버린 도원』[율성사, 1978] 등이 있다.


[묘소]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면 송대리 내곡 마을 화장산 선영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55년 제1회 한국문학가협회상, 1959년 제7회 아세아 자유 문학상, 197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문화 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9년 10월 오영수 문학비 건립[울산광역시 남구문화원 정문], 1993년 오영수 문학상 제정[울산매일신문사], 1996년 작가 오영수 문학비와 작품비 건립[언양초등학교 정문], 2008년 오영수 갯마을 문학비 건립[기장군 일광 해수욕장], 2011년 오영수 문학관 건립 추진[울산광역시 울주군] 등의 기념행사가 열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영수 문학관이 생기면서 화장산 진입로를 찾지 못해 십자가의 길로 진행.

 오영수 문학관 진입로 진입 후 좌측산으로 진입해야 합니다.

*여기서 부터 언양성당에서 십자가의 길이라는 테마코스를 조성했네요.

 종교와 상관없이 눈길이 가는 부분도 있네요.

십자가의길

 성당에서 주차장뒤로 나있는 산길로 올라가서 왼편으로 20m 정도가면 오씨묘가 있고 오씨묘에서 산쪽으로 200m 정도 올라가면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고 십자가의길 끝 즉 14처 끝이 성모동굴이다.
성모동굴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14처를 지나서 가게 되므로 성모동굴과 십자가의길은 다른성당의 성모동굴과는 달리 조성되어 있다.순례계획을 세울 때  아래 사진을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 합니다
 
 













*여기가 성모의 동굴이네요.

*언양성당 성모동굴 유래.

*성모동굴의 모습


 

언양성당의 뒷산에 위치한 성모동굴과 십자가의 길에 대한 구상은 지금으로부터 약 73년전인 1927년 경에 시작 되었다. 1926년 11월에 언양성당 부지를 매입 하였고 그 다음해인 1927년 정보드맹 신부님이 지금 성당이 위치한 이곳에 성당을 짓고 바로 뒷산에는 성모동굴을 만들어 성모님을 모시자는 의견을 제시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27년 이후 많은 신부님이 부임을 하고 역대회장이 사목운영을 하였으나 성모동굴 조성사업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언양성당이 순례성당으로 지정되어 많은 순례객들이 이곳을 방문하게되자 그 때 까지 관리 해오던 죽림굴과 각 공소에 대한 보수관리 계획과 홍보계획을 세웠다 순례책자와 안내 포스터를 제작하여 부산교구,대구교구 마산교구의 각 성당에 송부를 하여 순례객을 맞이 하였으며 각 공소와 성지 관리보수 사업도 시작하게 되었고 2001년 언양성당이 순례성당으로 다시 지정이 되어 서정웅 지도 신부님의 노력으로 각 공소 보수사업, 죽림굴 환경 미화 사업, 성모동굴 조성사업 등에 전 교우들이 참가하여 과감하게 실천에 옮겨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성모동굴의 조성사업에 울주군수 및 관계자분들의 도움으로 식수가 이루어졌고 많은 교우들이 근로 봉사를 하였다. 특히 신영세자인 백 안드레아 씨가 성모동굴 조성사업에 적극적이고 희생적인 봉사를 하여 나무 십자가 14개가 세워졌다. 지금 현재에도 계속 성모동굴 조성 사업은 진행 중이며 성지순례교우들과 피정온 다른 성당교우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성모동굴을 뒤로하고,

*화장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언양시가지의 모습.

*양지바른 언덕에 진달래가 다소곳이 피어 있네요.

*돌탑도 제법 모양을 갗추었네요.

*화장산 정상에는 공동묘지가....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굴암사 가는방향에서 바라본 언양시가지.

*화장산 굴암사의 모습.

 

*굴암사 전경.

*굴암사 전경.

*굴암사에서 바라본 언얀시가지...

*다른방향의 시가지...

*굴암사 구경후 다시 도화정으로 여기서 좌측길로 진행.

*영남알프스(소나무 와 대나무의 혼이 깃든 송대마을 이야기) 해설.

*조림지 조성의 기념으로...

*여기서 간의 화장실 방향 임도로 진행.

*조용한 시골풍경과 추수가 끝난 언양들판의 모습.

*임도진행하다 정자가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다 다시우측 오솔길로 내

 려 가요.

*김취려장군묘 가는길의 억새밭에서....

*김취려장군의 묘.


 

본관은 언양(彦陽). 아버지는 예부시랑(禮部侍郞)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을 지낸 김부(金富)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음서로 정위(正衛)가 되어 동궁위(東宮衛)에 배속되었다가, 이후 장군이 되어 동북계를 지켰고, 대장군에 발탁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몽골이 금나라를 정벌했고, 금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거란이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다.

그런데 거란 또한 몽골의 공격을 받아 1216년(고종 3)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오는 상황이었다. 이때 김취려는 대장군으로 후군병마사가 되어 조양진(朝陽鎭)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또, 연주(延州)에서는 거란 군사가 강성해 모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장군 기존정(奇存靖)과 함께 앞장서 적군의 포위를 돌파하였다.

이에 힘입은 군사들이 적군을 무찔러 목베고 사로잡은 군사들이 2천 4백명이나 되었고, 거란은 드디어 청새진(淸塞鎭)을 넘어서 퇴거하였다. 이 전투에서 맏아들이 전사하였다.

1217년 거란군 5천여 명이 다시 남으로 내려오자, 금교역(金郊驛: 지금의 황해도 서흥)에서 5군을 재편성해 상장군 오응부(吳應夫)를 중군병마사, 상장군 최원세(崔元世)를 전군병마사, 차상장군(借上將軍) 공천원(貢天源)을 좌군병마사 등으로 삼았다. 그러나 5군이 출발을 지체하는 동안 동주(東州: 지금의 강원도 철원)가 함락되었다.

이에 당시의 집정자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상장군으로 전군병마사에 임명되어, 거란군을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 방면으로 패주시켰다. 그 해 다시 거란이 여진족과 연합해 침입하자, 예주(豫州: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에서 교전했으나 병으로 돌아왔다.

1218년 병마사가 되어 서북면원수 조충(趙沖)과 함께 거란적을 강동성(江東城)으로 쫓아냈다. 이 때 동진국(東眞國)을 쳐서 신하로 따를 것을 맹세하게 하였다. 또한 거란을 토멸하겠다는 명분으로 동북면 지방으로 들어와 공동작전을 제의한 몽골군 및 동진국과 힘을 합쳐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1219년 의주별장 한순(韓恂)과 낭장 다지(多智) 등의 반란을 이극서(李克偦)·이적유(李迪儒)와 함께 평정해 북방을 편안하게 하였다. 1221년 추밀원사 병부상서 판삼사사(樞密院使兵部尙書判三司事)를 거쳐, 참지정사 판호부사(參知政事判戶部事)가 되었다.

1228년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判兵部事)가 되었으며, 그 뒤 시중에 제수되었다.

사람됨이 정직·검약했으며, 군사통제에 엄격하고 공정해 사졸들이 조금도 범함이 없었고, 존경하였다. 많은 공을 세웠으나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 칭찬의 소리가 높았다.

또한, 정승이 되어서는 안색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려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했으니, 진실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장군의 위엄앞에서....

*주위는 산불로 황량합니다.

*안내도.

*영남알프스(거란족을 물리친 김취려장군) 안내문.

*김취려장군의 비각.

*각종 비문.

*산아래에는 아파트 공사로 마을이 없었졌네요.

*아파트 공사장을 가로질러 국도를 따라 아파트공사 끝지점 굴다리 통과 후

 산밑도로를 따라가다 조측에 시멘트 구조물이 있는 곳에서 산으로 진입.

*산불로 길은 없어지고 정상을 향하여 오릅니다.

*뒤돌아 본 모습.

*지나온 아파트 공사현장의 모습.

못안못의 모습.

*지내리의 고인돌 배밭가운데 ......

*오늘의 목적지 신광사앞 도착 해는 넘어가고 날씨는 쌀쌀하고 여기서 아들

 의 호출로 차를 기다립니다.

 영남알프스 둘레길 2코스를 무사이 종료합니다.

 13.5km . 점심(중국집 짬뽕)시간 포함 5시간06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