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남파랑길 63코스 (벌교읍 부용교~팔영농협 망주지소)24.9km
*일 자 : 2020년 12월29일 (화요일) 맑음.기온 0도~7도
*누구와 : 찰떡부부
*코 스 :벌교부용교~벌교 문학의 거리~대포마을~죽암방조제~팔영농협 망주지소(5시간45분소요)
*어제 벌교 생태공원 주차장에서 하루밤을 포근하게 보내고 오늘아침 새로운 도전을 준비한다.
그런데 어제 짝지가 25km 장거리 걷기로 왼발에 물집이 잡혀 오늘 일정을 같이 할수 있을까
걱정이다. 그래서 나 혼자 갔다 올테니 캠핑카에서 쉬고 있으라 해도 밴드 붙이고 같이 하겠다고
했어 걱정이 되지만 가는데 까지 가보자 출발을 한다.
오늘도 25km를 걸어야 하는데 걱정이 앞선다....
* 벌교 출발점 부용교입구에는 현재 공사구간이라 그런지 63코스 안내판이 보이지 않음.
이것은 고흥군 죽암마을 입구에 있는 안내판.
*현재 출발점 부용교입구 공사중 안내판 보이지 않음.
*출발점 출발 후 벌교천변으로 진행 소설 태백산맥 표지사진.
* 소설 태백산맥 (저자 조정래) 조형물.
*구름 사이로 아침 햇살이 얼굴을 보이고 있어요.
*건너 편에는 새로운 형태의 건물이 벌교꼬막 웰빙센터.
*벌교 빛을 즐기다. 야간의 벌교가 궁금 해지네요.
*곳곳에 태백산맥의 흔적을 볼거리로 만들어 놓았네요.
*벌교 꼬막이 벌교를 대표하죠.
*벌교 좋은 추억 좋은 인상 간직하고 가겠습니다.
*읍내 곳곳에도 태백산맥과 꼬막의 흔적을 곳곳에서 접할수 있네요.
*벌교의 아침이 천변에서 기지개를 펼치고 있어요 .그래도 아침의 벌교 장갑을 끼고도 손끝이 시리네요.
*벌교의 대표 석교 홍교의 모습.
보성 벌교 홍교(寶城 筏橋 虹橋)는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조선 시대의 아치교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홍교는 벌교천 위에 걸쳐진 돌로 만든 무지개 다리로 전체길이 27m, 높이는 약 3m, 폭 4.5m 내외이다.
이 다리는 조선 영조 5년(1729년)에 순천 선암사의 승려인 초안과 습성 두 선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다리를 놓아 사람이 편하게 다닐 수 있게 하는 월천공덕을 중요한 보시로 꼽고 있다.
이 홍교는 영조 13년(1737년)과, 다시 헌종 10년(1844년)에 고친 바 있다. 지금의 모습은 1981-1984년까지의 4년에 걸쳐 보수하여 원형을 찾은 것이다.
한국에 남아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대표적인 돌다리이다. 홍교가 놓이기 이전에는 뗏목다리를 놓아 건너 다녔다고 하는데 벌교하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개요[편집]
홍교란 다리 밑이 무지개같이 반원형이 되도록 쌓은 다리를 말하며, 아치교·홍예교·무지개다리라고도 한다. 이 다리는 현재 남아 있는 홍교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현재도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 자리에 뗏목을 이은 다리가 있어 벌교(筏橋)라는 지명이 생겨났으며, 조선 영조 5년(1729)에 선암사의 한 스님이 돌다리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후 영조 13년(1737) 다리를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로 만들어졌고, 1981∼1984년까지의 4년에 걸친 보수공사를 통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무지개 모양을 한 다리밑의 천장 한 가운데 마다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돌출되어 아래를 향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물과 용의 관계에서 오는 민간신앙의 표현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이 용의 코끝에 풍경을 매달아 은은한 방울소리가 울려퍼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다리가 놓여진 강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썰물 때에는 다리 밑바닥이 거의 드러나고, 밀물 때에는 대부분이 물속에 잠긴다.
원래 다리의 규모는 폭 4m, 길이 80m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이며, 이 다리를 위해 주민들이 60년 마다 회갑잔치를 해주고 있다고 한다. 화려하고 거대한 모습 속에서도 단아한 멋을 풍기며, 웅대함과 함께 뛰어난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진행길에서 좌측으로 홍교를 건너 좌측으로 진행.
*홍교를 건너 좌측으로 진행 민족 음악가 벌교출신 생가의 모습.
출생사망국적
1901. 6. 11, 전남 보성 |
1953. 2. 2, 부산 |
한국 |
요약 한국의 작곡가, 바이올린 연주가. 가곡 <고향>, <향수> 등의 작곡가이다. 고등학교 재학 중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독일 슈테르헨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을 가르쳤고,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했으며, 현악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활동을 했다.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보여 민요나 판소리를 채보했고 <진도아리랑>, <새야새야> 등을 편곡하기도 했다. 1933년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고향>이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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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작곡가. 호는 산남(山南). 부호 채중현의 아들로 순천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면서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나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에 입학해서도 바이올린을 계속 공부했으며 대학을 마치고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 슈테르헨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했다.
1933년 정지용의 시 〈고향>에 곡을 붙였는데 그의 동생인 소프라노 선엽의 독창회에서 처음 발표되어 도쿄(東京) 유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1937년 작곡발표회를 갖고 작곡집도 펴냈다. 현악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활동을 했고, 1938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창작곡발표 대음악제에서 〈환상곡 D단조〉를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로 발표했다.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육자배기〉·〈춘향가〉 등 민요나 판소리를 채보했고 〈진도아리랑〉·〈새야새야〉·〈뱃노래〉 등을 편곡하기도 했다.
8·15해방 직후 고려음악협회를 조직하여 협회장에 취임했고 문필가협회 부사장, 국립국악원 이사장,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으며, 고려합창협회를 조직하여 합창 지휘도 했다. 정지용의 월북으로 1950년대 이후 가곡 <고향>의 가사 사용이 금지되자, 박화목의 시 <망향>과 이은상의 시 <그리워>를 같은 곡에 붙여 불렀던 까닭에, 한 곡이 세 개의 가곡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1988년 월북문인 해금에 따라 정지용의 문학작품에 대한 규제도 풀리면서 <고향>도 채동선의 대표작으로 복원되었다.
해방 후 한때 경기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52년에는 서울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기도 했으나, 이듬해 부산 피난중 급성복막염으로 죽었다. 1983년 '채동선 기념사업회'가 그의 부인 이소란과 평론가 박용구 등의 주도로 조직되었고 1984년 '채동선 음악상'을 제정했다. 대표작으로 가곡 <고향>·〈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밖에 현악4중주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모음곡, 교성곡 〈한강〉, 진혼곡 〈조선〉·〈조국〉 등이 있다.
*채동선생가 좌측으로 부용산 충혼탑 오르는길.
*부용산 충혼탑 도착 벌교읍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월곡 영화골(벽화마을).
*월곡 영화골 커피공방.
*부용산에서 내려다 본 벌교읍 행정복지 타운.
*부용산에서 내려와 63구간 진행방향으로 진행.
*소설태백산맥 문학기행길 여기는 청년단이 있던 곳.
*태백산맥 문학공원.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작가 흉상.
출생
194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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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에서 『아리랑』까지
벌교는 행정 구역상 전남에 속하는, 주로 농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평범한 소읍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이 곳에서 보낸 한 소설가에 의해 벌교는 세습 봉건 지주와 일제의 수탈, 그리고 여순반란사건과 6·25 같은 고난에 찬 한국 현대사가 휩쓸고 지나간 땅으로 되살아난다. 『태백산맥』의 작중 인물 염상진이 자폭하자 그를 뒤쫓던 군경은 그의 떨어진 머리를 수습해 고향인 벌교로 갖고 와서 “악질 빵갱이 염상진 사살”이라는 현수막과 함께 벌교역 앞마당에 효수한다. 벌교는 조정래(趙廷來, 1943~ )의 대하 소설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로 떠오르면서 이념 갈등과 국토 분단, 그 상처의 연원을 표상하는 우리 시대의 지명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 『태백산맥』을 두고 김윤식은 “우리 문학이 여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해방 40년의 기간이 필요하였다.”고 쓴다.
〈태백산맥〉과 〈아리랑〉의 작가 조정래
왼쪽이 〈태백산맥〉 1만6천5백 장, 오른쪽이 〈아리랑〉 2만 장의 원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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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는 1943년 전남 승주군 쌍암면 선암사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조종현은 대처승이었다. 1947년 선암사의 부주지인 아버지가 사답(寺畓)을 소작인들에게 나눠준 일로 주지와 충돌이 생기자 그의 가족은 선암사를 떠나 순천으로 이사한다. 소작인들의 가난과 고통을 헤아리고 그들을 배려한 아버지의 행동은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 뒤 우익 일색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그의 가족이 모략에 휘말리고 갖은 고초를 겪는 빌미가 된다. 이 때 그의 아버지는 우익 단체인 서북청년단 단원들에게 몰매를 맞고 피를 흘리며 끌려가고, 이튿날에는 어머니와 형제 넷이 재판소 앞마당에 끌려나가는 수모를 겪는다.
1949년 조정래는 순천 남국민학교에 입학한다. 이듬해인 1950년 초, 폐인이 되다시피 한 아버지가 풀려나자 그의 가족은 순천을 떠나 논산으로 이주한다. 어린 시절 조정래는 이렇게 승주 · 순천 · 논산 등지를 떠돌며 자라는데, 그 와중에 토박이 아이들의 텃세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독하고 고집스런 면모를 보여준다.
누가 먼저 코피를 쏟을 때까지, 누가 앙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그리고 또 한 놈과의 싸움이 끝나면 조금 더 센 놈과, 그놈에게 이기면 좀더 센 놈과 맞붙어야 하는, 그런 끝도 없는 싸움이었다.······ 물론 나는 늘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얼굴을 할퀴어 피가 흐르거나 코피가 터져 진 일은 있어도 울어서 진 일은 없었다.
조정래, 「암울한 계절의 파편들」, 『나』(청람, 1978)
수난은 좀처럼 끝나지 않아 1951년 1·4후퇴 무렵 그의 가족은 다시 한 번 시련을 맞는데, 느닷없이 집안에 들이닥친 외국 군인들에 의해 아버지와 아저씨가 폭행을 당하는 일이 생긴다. 조정래는 공포감에 휩싸인 채 그 장면을 고스란히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석구는 꼼짝 않고 쪼그리고 앉아 피 흘리고 있는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높아 보였고, 모든 사람 앞에 나섰으며, 모르는 것이 없었고, 그래서 엄하고도 어려운 존재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렇듯 힘없고, 약하고, 볼품없고, 허망하게 당하는 것을 벌써 두 번째 보는 것이었다. 석구는 그게 그렇게 분하고 서러울 수가 없었다.
조정래, 『태백산맥 8』(해냄, 1988)
『태백산맥』에도 묘사되어 있는 이 사건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어린 조정래는 한동안 야뇨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된 뒤 그의 가족은 피난 생활을 마감하고 아버지의 형제가 살고 있던 벌교로 간다. 작가는 이 벌교 시절을 뒷날 행복한 시절로 돌아보곤 한다. 아버지는 벌교상고의 교단에 서게 되는데, 딸린 식구가 많아서 집안 형편은 어려운 편이었다. 어린 조정래는 동네 사랑방에서 펼쳐지는 어른들의 이야기에 빠져 학교 숙제를 못 해 가서 야단을 맞거나 벌을 받기도 하지만 벌교는 그의 야뇨증을 낫게 해준 안식의 땅이었다.
1956년 아버지가 광주제일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기자 식구들도 광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1959년 아버지가 다시 서울 보성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조정래는 광주서중을 거쳐 보성고교에 진학한다. 농촌 사회 활동에 뜻이 있어 이과반에 적을 두고 있던 조정래는 3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국문과로 진학 목표를 바꾸고 입시 준비에 전념,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들어간다.
대학 시절 조정래는 교내 학술상 창작 부문상을 타는가 하면, 재학중 등단한 시인이 네댓씩이나 되는 동국대 국문과 주최 ‘문학의 밤’ 행사 때 1학년에 할당된 단 한 명으로 나서 시를 낭송하기도 한다. 같은 과 동기이자 뒷날 그의 아내가 되는 시인 김초혜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일찍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이건만 막상 등단하기까지 그는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격는다. 조정래는 1970년 『현대문학』에 오영수의 추천으로 「누명」 · 「선생님 기행(紀行)」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소설가로 문단의 말석에 이름을 올린 그는 『황토』(1974) · 『20년을 비가 내리는 땅』(1977) · 『한, 그 그늘의 자리』(1978) · 『유형의 땅』(1982) · 『어머니의 넋』(1988) 등 다섯 권의 창작집과, 장편 소설 『대장경』(1976), 연작 장편 『불놀이』(1983) 등을 펴낸다. 이 작품들은 1985년부터 집필에 들어가는 대하 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정래는 1999년에 이르러 ‘해냄’에서 그 동안 발표한 작품들을 정리해 모두 9권으로 된 『조정래 문학 전집』을 내놓는다. 제1권 『대장경』은 1981년에 출간된 장편 소설로 흔히 ‘팔만대장경’으로 알려져 있는 해인사 고려대장도감판 대장경의 조성 과정을 기둥 줄거리로 삼은 소설이다. 대장경을 둘 판당을 세운 대목수 근필, 개태사 주지인 승려 수기, 그리고 이름 없는 여러 민중이 나오는 소설 『대장경』은 부패한 권력에 대한 비판과 민중에 대한 신뢰, 예술적 완성을 향한 집념 등을 주제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제2권에 실린 『불놀이』는 「인간 연습」 · 「인간의 문」 · 「인간의 계단」 · 「인간의 탑」 등 네 편의 연작 중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여기서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두고 사람들이 처지에 따라 이를 어떻게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어떻게 맺힌 한을 풀어가는지 꼼꼼하게 재현함으로써 역사가 지닌 다양한 의미를 풀어 보여준다. 제3권에는 카투사들의 생활과 주한 미군의 부정적 행태를 다룬 「누명」과 미국적인 것에 환멸을 느끼는 한 소시민의 이야기인 「거부 반응」, 폭력적 인간과 사회 구조에 대한 비유적 보고서인 「선생님 기행」 등 단편 10편이 실려 있다. 작가는 2000년 『한겨레신문』에 대하 소설 「한강」을 연재했다.
조정래의 초기 작품은 어린 시절이나 역사 체험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를테면 칼갈이, 제책소나 염색 공장의 노동자, 구두닦이, 택시 운전사 등 도시 빈민 계층을 내세워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주변부적 삶의 실상을 담거나, 무기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간의 실존적 한계 상황을 그리거나, 예술가를 내세워 참다운 예도가 무엇인지를 더듬는다. 또 「청산댁」 · 「황토」 · 「유형의 땅」 · 『불놀이』와 같은 소설을 통해서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에서 억울하게 짓밟히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내세워 한국적 정서의 핵심으로 일컬어지는 ‘한’의 실체를 그리려고 애쓴다. 이 가운데 「청산댁」은 조정래의 초기 작품 세계를 대표할 만한 소설인데, 그는 여기서 거대한 시대적 격변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부서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 시대가 끝나고 다시 1980년 5월의 광주사태를 거쳐 암담한 시련의 역사가 펼쳐지는 동안 조정래는 갑오농민전쟁과 3·1운동, 광주민중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중 항쟁의 역사를 대하 소설로 풀어낼 계획을 세우고 『태백산맥』의 집필 준비에 열중한다. 이즈음 작가는 “광주에서 큰 사태가 발생했다. 견디다 못해 아내와 아들을 이끌고 그곳을 찾아가 하룻밤을 자고, 여러 곳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참담한 죄의식과 소설을 쓴다는 일과······ 많은 것을 생각했다.”고 쓰고 있다. 1983년 조정래는 이제까지 지켜온 “직접 체험을 소설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자신의 창작 원칙을 전면 철회하고, 어린 시절에 본 여순반란사건 등 자신의 체험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서 『태백산맥』에 버무려 넣는다.
『태백산맥』
『태백산맥』은 1983년 『현대문학』 9월호에 처음 연재를 해서 6년 만인 1989년에 마무리된 대하 소설이다. 『태백산맥』의 집필 과정은 그야말로 고투였다. 작가는 뒷날 그 어려움에 대해 “5공의 짙은 어둠과 서릿발 같은 상황 속에서 역사 바로잡기를 하겠다고 나서고 보니 얼굴 없는 전화는 거의 매일 밤 걸려오지, 입 다문 사람들을 상대로 취재는 어렵지, 소설을 쓰고 사무실을 나가면 어김없이 형사의 문안은 받아야지, 나를 방송에 출연시킨 스태프진 모두가 한직으로 몰렸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여기저기서 충고성 경고는 날아들지, 소설을 쓰는 일의 힘겨움을 압도하는 그런 일들 때문에 피가 바작바작 타들 지경이었다.”고 술회한다. 밤이면 오곤 하는 협박 전화로 순간순간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도 작가는 소설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태백산맥』은 1990년 9월 대검찰청에 의해 이적 표현물로 분류된 이래 10년이 넘도록 분류에서 해제되지 않는다. 1994년 봄에는 한 극우 반공 단체가 작가를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소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작가를 곤경에 빠뜨린 것은 당시의 격동을 겪은 사람들이 아직도 증언하기를 꺼린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간신히 하는 한마디는 ‘다 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늙은 그들은 거의가 얼굴에 표정이 없었고, 헛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초점 없이 흐리게 마련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보장 없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인위적인 망각’을 연습하다 보니 정말 그렇게 멍한 망각증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비감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조정래, 「‘태백산맥’ 창작 보고서」, 『작가세계』(1995 가을)
1989년 11월, 이런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원고지 1만6천5백 장 분량의 『태백산맥』이 전 10권의 소설로 완간된다. 『태백산맥』이 나오기 이전의 조정래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평범한 작가 이상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태백산맥』은 완간되자마자 신문사 문학 담당 기자와 문학 평론가들에 의해 ‘1980년대 최고의 작품’, ‘1980년대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힌다. 이와 아울러 조정래는 단숨에 우리 시대의 작가 정신을 담보한 인물로 떠오른다.
좌익 운동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파헤치는 한편, 분단과 6·25의 비극성 그리고 우리 민족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모순을 비판적 시각으로 다룬 〈태백산맥〉
집필 기간 6년, 총 10권의 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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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의 시간은 해방과 분단, 6·25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격동기를 통과하며, 그것이 펼쳐지는 무대는 남도의 벌교를 기점으로 해서 지리산 일대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작가는 ‘여순반란사건’으로 알려진 좌익 반란 사건을 그리면서 군경의 토벌 작전에 밀려 지리산 빨치산으로 쫓기는 그들의 행적을 추적한다. 이야기는 6·25와 겹치며 확장되는데, 작가는 여기서 이런 일련의 사건을 통해 분단 현실과 그 상황 전개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꼼꼼하게 짚어낸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설로서 『태백산맥』이 뛰어난 점은 이념이나 분단 문제를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들의 구체적 경험 속에 녹여낸 것에 있다. 다시 말해 작가는 역사를 하나의 전체로 조망하며 개별적 인물들의 생동하는 삶 속에서 그 세부를 묘사함으로써, 크고 작은 낱낱의 사건과 삽화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이를 하나의 거대한 사회 · 역사적 흐름 속에 녹여내어 대규모 문제작 『태백산맥』을 동시대인 앞에 내놓는다.
『태백산맥』에 나오는 개별적 인물들은 이야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그 하나하나가 모두 역사 상황성의 의미를 구현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염상진이다. 그는 노비 집안 출신으로 분단 상황과 전쟁에 이르게 된 우리 민족사에 대한 확고하고 명료한 역사 의식을 갖고 좌익 운동에 뛰어든 공산주의자다. 염상진 주위로 몰려든 농민 출신 빨치산들은 그를 무결점의 완전한 인간으로 떠받들며, 그는 민중주의 또는 착취가 없는 평등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염상진과 대비되는 인물로는 지주 집안의 아들이며 진보주의자인 김범우가 있다. 염상진이 식민지 현실 속에서 중첩된 계급적 · 민족적 모순을 뛰어넘기 위해 좌익 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라면, 김범우는 중간자적인 지식인의 자리에서 역사의 격동에 휘말린 민족이 나아갈 길을 더듬으며 고뇌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김범우의 중도적 태도는 좌 · 우익 모두로부터 배척당하고, 그는 극단적인 두 세력 사이에 낀 힘없는 이상주의자로 낙인 찍힌다.
〈태백산맥〉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소화가 살던 집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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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은 여순반란사건과 빨치산 활동 등으로 이어지는 좌익 운동의 실상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깊이 파헤치고, 분단과 6·25의 비극성 그리고 우리 민족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모순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다룬 작품이다. 이처럼 『태백산맥』은 오랫동안 금기시된 채 가려져온 역사적 사실을 복원해 문제 의식과 곁들여 제시하는 데 일정한 성과를 보였다는 점에서 우리 소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된다.
정호웅이 말하고 있듯이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궁극의 세상, 절대 평등의 인내천 세상을 지향하는 열망을 이끄는 것은 개개인의 이기적 욕망의 제어와 자기 희생의 정신”각주1) 이다. 여기에는 『태백산맥』의 주제가 스며 있다. 염상진이나 지리산 골짜기에서 숨을 거두는 빨치산들은 말할 나위 없고,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서민영이나 민족주의자인 김범우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을 이끄는 것은 바로 그 “이기적 욕망의 제어와 자기 희생의 정신”이다. 조정래의 한 걸음 앞선 역사 의식이 배어든 『태백산맥』은 젊은이들의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유례없는 판매 부수를 기록하게 된다.
『아리랑』
조정래는 『태백산맥』을 끝내고 다시 1년쯤의 취재와 자료 정리 기간을 거쳐 1990년 12월 『아리랑』의 집필에 착수해 1995년 7월에 탈고한다. 『태백산맥』이 분단의 고통과 비극의 뿌리를 파헤치며 분단 극복의 가능성을 찾아보려 한 소설이라면, 『아리랑』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체제 속에서 왜곡된 민족 의식을 바로 세우려는 작가의 집념이 낳은 소설이다. 『태백산맥』이 벌교를 중심으로 그 주변인 지리산 일대와 해방부터 6·25까지라는 제한된 시공간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데 반해, 『아리랑』은 구한말인 1890년대부터 1945년까지의 한결 넓은 시간대를 아우른다.
이야기의 발원지는 식민지 시대에 조선에서 수탈한 곡물을 일본으로 실어내던 항구 군산이지만, 이 군산항을 기점으로 핵심 작중 인물의 궤적을 따라 『아리랑』의 소설 공간은 한반도를 넘어 만주 · 러시아 · 하와이 · 동남 아시아 등으로 드넓게 펼쳐진다. 작가는 여기서 우리 민중이 일제에 의해 어떻게 수탈과 억압을 당하고, 또 그것에 맞서는지를 추적하며, 토착 자본이 어떤 경로를 거쳐 무너지고, 아울러 기회주의적인 지배층은 어떻게 일제와 야합하는지를 보여준다.
일제의 폭압과 수탈에 맞서 싸운 우리 민중의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그린 또 하나의 대하 소설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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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은 제1부 「아, 한반도」, 제2부 「민족혼」, 제3부 「어둠의 산하」, 제4부 「동트는 광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부는 37장 · 35장 · 48장 · 54장으로 되어 있다. 대하 역사 소설의 골격에 맞게 이 소설에서는 여러 작중 인물이 2대 또는 3대에 걸쳐 등장한다. 친일파로 백종두와 백남일, 장덕풍과 장칠문 부자가 나오고, 여기에 맞서 송수익―송중원, 송가원―송준혁, 공허 스님―전동걸, 지삼출―지만복, 김판술―김건오, 손판석―손일남 등이 역시 대를 이어 투쟁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리랑』에서 작가가 창조한 인물들은 역사적 실존 인물들과도 만난다. 이를테면 송수익이 실존 인물인 의병장 전해산에 이어 신채호와 이회영 등을 차례대로 만나는 것이 그 대표적인 보기다.
『아리랑』은 『태백산맥』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격동하는 역사를 그리되 이를 “개별적인 인물들의 생동하는 삶”으로 드러내며 풍부한 사실감을 더한다. 정호웅은 “작중 인물들은 삶을 위한 투쟁, 자신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시대적 현실로 진입하게 되고, 그들의 행위에는 이제 민족적 또는 역사적 의미가 실린다. 다시 이것은 자기 몫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과 투쟁, 세태와 풍속, 전통적 생활 양식을 보여주는 세부 묘사를 통해 생생한 현실감을 얻는다.”각주2) 고 말한다.
조정래는 『아리랑』에서 일제 강점기의 민족사를 단순히 수난과 굴욕의 세월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저항과 투쟁의 시기로 그림으로써 소설 속에 민족주의 정신을 선명하게 새겨 넣는다. 여기서 작가는 나라를 잃고 고향 땅을 떠나 만주 · 연해주 · 하와이 · 일본 · 중앙 아시아 · 동남 아시아 등지로 흩어져 고단하게 떠돌며 사는 우리 민족 구성원 하나하나의 곡절과 애환을 어루더듬고, 그들이 어떻게 민족적 수난과 치욕을 안겨준 일제에 저항하는지를 보여준다.
송수익은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만주에 와서 군왕 신봉자들과 단호하게 결별했었다. 그 표시로 상투를 잘라버렸던 것이다. 상투가 무슨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왕권 재건을 독립 투쟁의 목표로 삼고 있는 복벽주의자들이 하나같이 상투를 신주 단지 모시듯 했기 때문이었다. 왕권의 부정은 곧 공화제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다시 불어닥친 바람이 공산주의였다. 그러나 자신은 공산주의보다는 민족 자결주의에 더 관심을 써왔던 것이다.
조정래, 『아리랑 6』(해냄, 1994)
『아리랑』에는 친일파와 항일파, 기회주의자 그리고 갖가지 이념의 분파주의자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송수익은 의병장으로 일제에 맞서 싸우는 중심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는 온건 노선을 택한 다른 군왕 신봉자들과는 달리 일제에 맞서는 방법은 오로지 무장 투쟁밖에 없다는 신념을 갖고 이를 관철하는 인물이다. 이윽고 그는 만주로 무대를 옮겨 처음에는 대종교 신자로, 나중에는 무정부주의자로 독립군을 지휘하다가 관동군에 잡혀 옥사한다. 다른 한편에 사회주의자 정도규가 있는데, 그는 이론에 해박하고 적극적인 활동가이지만 사회주의 세력의 확대보다는 궁핍과 압박에 시달리는 동포 노동자와 농민의 구제에 더 역점을 둔다.
『아리랑』은 하와이 이민, 동학 운동, 의병 투쟁, 병탄, 토지 조사 사업, 3·1운동, 조선공산당의 결성과 와해, 만주사변, 태평양전쟁, 해방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대하 소설이다. 작가 조정래는 일제의 폭압과 수탈 정책에 맞서 싸운 저항의 역사를 중심으로 소설을 풀어나감으로써 민족 정체성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소설 속에 새긴다. 그러나 『아리랑』은 밝은 분위기로 끝나지 않는다. 해방 전야, 일본군이 철수한 만주의 조선인 부락에 중국 사람들이 몰려와 조선 사람들을 쳐죽이는 유혈극이 벌어진다. 이렇게 작가는 한민족 앞에 놓인 비극적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다.
처절한 비명 속에 피가 튀는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쉽사리 끝나지 않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도 중국 사람들에게 덤벼들고 또 덤벼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 사람의 연장을 뺏어 싸우기도 했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광막한 벌판 저쪽으로 기를 쓰며 도망가고 있었다. 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남자들이 거의 다 쓰러져갈 즈음 여자들과 아이들의 모습은 끝없이 광야 저쪽에 점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조정래, 『아리랑 12』(해냄, 1995)
조정래는 『아리랑』을 쓰는 동안 수시로 찾아온 위궤양과, 집필 막바지에는 오른쪽 어깨와 손가락의 통증에 시달린다. 게다가 협박 전화가 자꾸 와서 신경이 곤두서고, 극우 반공 단체에 의해 국가 보안법을 어긴 혐의로 검찰에 고소되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도 작가는 『아리랑』의 무대가 되는 중국 · 동남 아시아 · 러시아 · 하와이 · 미국 등지를 답사하고 현지의 지형과 풍물을 스케치북에 그리거나 사진에 담는 등 집필 준비에 만전을 기한다. 해방 50주년을 맞이한 1995년 7월 25일, 마침내 조정래는 집필을 시작한 지 4년 8개월 만에 원고지 2만 장 분량의 대하 소설 『아리랑』을 아퀴짓는다.
*월곡 영화골 입구.
*웰컴투 월곡 영화골로 오세요.
*주차장의 화장실 마져도 특색이 있어요.
*소설 태백산맥 소개.
태백산맥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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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저자국가언어주제출판사발행일페이지ISBN
표지 |
|
조정래 | |
대한민국 | |
한국어 | |
해방 이후의 이념 대립과 민중의 한 | |
해냄 | |
1986년 | |
342쪽(1권) | |
9788973377947 |
《태백산맥》(太白山脈)은 소설가이자 동국대학교 연구교수인 조정래가 쓴 대하소설이다. 1983년 9월부터 월간지 현대문학에 연재되기 시작해 1986년 제1부 3권, 1987년 제2부 2권, 1988년 제3부 2권, 1989년 제4부 3권이 한길사에서 출간되었고 이후 해냄에서 다시 한번 발간되었다. 원고지 15700매 분량이다.
목차
한국판 이슬람 무장세력들을 미화하는 소설소설[편집]
평가[편집]
벌교읍 태백산맥 문학관, 2015년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때까지 치열했던 이념 대립과 민중들의 한(恨)을 묘사하여, 출판 당시 우파진영으로부터는 좌파에 치우친 작품, 이적물이라고 매도를 당했으나,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지식인들의 대화에서는 모두 표준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대다수 주인공들의 대사에서는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고,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을 그림 그리듯이 세밀하게 표현하여 지역 고유의 특색을 잘 드러내었다.
등장인물[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태백산맥의 등장인물 목록입니다.
김범우 집안[편집]
- 김범우: 민족의 일치를 강조하는 중도 지식인이다. 격동이 심했던 한국현대사에 휘말려, 미군 통역, 순천중학교 교사, 남로당 서울시당 공작원 등 다양한 경험을 겪는 인물로, 극단을 피하는 중도노선 때문에 극좌파인 염상진과 극우파인 선우진으로부터 모두 공격받는다. 일제 강점기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버마에 갔으며 탈출하여, 일본과 전쟁중이었던 미국의 정부수집기관인 OSS에서 조선으로의 침투를 목적으로 훈련받았다. 이후 인민군과 함께 돌아다니다 미군에게 포로로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가, 반공포로(한국전쟁때에 강제로 인민군이 된 포로를 말함. 서울에서 인민군에게 납치되어 억지로 군복무를 해야했던 고 김수영 시인이 실례이다.)로 석방된다. 이때 김범우는 신체장애인이 된다. 영화에서는 안성기가 김범우 역을 맡았다.
- 김사용: 김범우, 김범준의 아버지이자 지주이다. 소설 속에서 김사용은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다른 지주들과는 달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여 사람들에게 이념과 상관없이 존경받는 인물로 나온다. 실제로 공산주의자인 염상진도 김사용을 계급과 서열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존경할만한 분이라는 뜻에서 어르신이라고 부르며 존경한다. 김사용은 일제 강점기에 막대한 재산을 큰아들 김범준이 가담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을 위해서 아낌없이 썼으며, 큰아들의 고생을 생각해서 검소하게 살았다. 다른 집에서는 아들이 출세하는 게 자랑거리이지만, 김사용에게는 큰아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동족을 위해 헌신하는 게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덕분에 인민재판에서 살아남지만, 사람보다 사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극좌파인 염상진을 보면서 깊은 상처를 받고 1950년 후반기 자연사하는데 장례식날 통신을 담당하는 선요원들의 도움으로 연락을 받은 염상진과 김범준은 먼 발치에서 추모한다.
- 김범준: 김범우의 형이자 김사용의 큰 아들이다. 중국 체류시 부친의 말은 없어도 헌신적인 지지를 받으며 사회주의 성격의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귀국후에는 인민군 군관으로 복무한다. 중국 공산당이 항일투쟁을 벌인 사례를 논거로 공산주의자라면 민족을 우선해야 한다고 믿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이다. 동상 후유증으로 다리에 불편을 겪다가 1953년 휴전 협정 체결 직후 일어난 군경의 빨치산 사냥으로 죽었다.
염상진 집안[편집]
- 염상진: 남로당 보성군당 군당위원장이자 좌파이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적색농민운동을 주도했을 정도로,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 열정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하며 1953년 휴전 협정 후 일어난 대규모 빨치산 토벌로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되자, 대원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결함으로써 사상의 기백을 지킨다. 영화에서는 배우 김명곤이 염상진 역을 맡아 냉철한 캐릭터를 드러냈다.
- 염상구: 염상진의 동생. 아버지의 노골적인 편애때문에, 형을 미워하여 극우성향을 띤 건달패이다. 그래도 형이 죽은후 목이 내걸려 경찰의 민중들에 대한 말 없는 협박에 이용되자, 건달조직의 동생들을 이끌고 시위해서 시체를 거둔다. 영화에서는 연극배우인 김갑수가 염상구 역을 맡아 불량한 캐릭터를 싸늘하고 삐딱한 말투로 묘사하였다.
- 염무칠, 호산댁: 염상진과 염상구의 부모이다. 염무칠은 전혀 가진 것이 없었지만, 젊은 사람이 열심히 살려고 하는 모습에 감탄한 숯 도매상과 선암사 주지 스님의 배려로 숯 장사를 시작하였다. 곰 같은 염서방이라고 불릴 만큼 억척스럽게 일한 덕분에 큰아들 염상진을 사범학교에 진학시키지만, 사회주의 농민운동에 가담한 큰 아들의 진로선택에 충격 받아서 죽었다. 작은 아들 염상구도 형만 예뻐하는 아버지의 편애에 대한 상처가 커서 건달패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염서방을 두 아들이 잡아먹었다고 수군거린다. 호산댁도 자식들때문에 고생하기는 마찬가지. 모성애가 지극한 호산댁은 서로 미워하는 두 아들을 보면서 마음 아파한다. 염무칠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보편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인다면, 호산댁은 자녀가 잘났던, 못났던 차별 없이 사랑하는 모성애를 보인다.
- 죽산댁: 염상진의 아내이다. 여성가장인 그녀는 자신이 없으면,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는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래서 "군당위원장님의 부인께서 여성민주동맹(여맹)에 가입하지 않으시다니요."라며 설득하려는 이지숙에게 "부부가 공산주의 운동에 같이 미치면 집구석은 누가 돌보겄소?"라며 물리치고 여성민주동맹(여맹)에 가입하지 않는다. 고집이 센 이지숙은 꼭 설득하고 싶어하지만, "그분의 뜻이 그렇다면 강요하면 안 됩니다."라는 안창민의 설득으로 더 이상 여맹 가입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연극배우 정경순이 죽산댁 역을 맡았다.
- 광조, 덕순: 염상진의 자녀들이다. 광조는 자신의 사상을 헌신적으로 실천하는 아버지를 존경하여, 커서 어른이 되면 아버지 같은 사내 대장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덕순은 일하느라 바쁜 어머니를 대신하여 동생을 잘 돌보는 속깊은 누나이다. 그래서 죽산댁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는데도 삐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는 덕순과 광조를 보면서 속으로 미안해한다. 빨치산 활동을 하느라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의 무책임한 모습을 보고 자란 덕순은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동생 광조를 보면 불안하기 그지 없다.
김범우의 친구[편집]
- 손승호: 김범우의 사범학교 친구. 사회과학 출판사 편집자로 근무하면서 친일미청산을 고발하는 책을 만들었는데, 이때문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탄압당한다. 광복이후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갖고 있다. 한때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인간을 우선시하는 사상을 찾아서 사회주의를 떠났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불의한 모습에 분개하여 빨치산 운동에 참여한다. 이후 빨치산에서 투쟁을 하다, 고향에 잠입하기 위해 떠나던 중 경찰에게 발각되어 총에 맞아 죽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인도와 셰익스피어는 바꿀 수 없다."라는 말을 "인도의 민중들을 셰익스피어보다 못한 존재라고 여기는 영국인들의 인종차별 의식이 담긴 말"이라고 해석하는 손승호의 말속에는 개신교 신학자이자 '밀림의 성자'인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주장한 생명에 대한 존중과 보편경외가 잘 담겨 있다.
- 전명환 원장: 자그마한 개인병원인 자애병원의 원장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거나 치료받은 환자가 고마운 마음을 담아 선물하는 농작물, 도자기(영리한 강양이 재치를 발휘하여 꽃병으로 요긴하게 쓴다.)로 치료비를 대신하는 대신, 부유한 환자에게는 제대로 치료비를 받는다. 그러니까 전명환 원장은 자신의 의술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데 쓰는 참 지식인이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다. 부상입은 안창민을 도왔기 때문에 강제로 공산주의자 전향단체인 보도연맹원이 되어야 했고, 이 때문에 대부분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는 민중들이었던 보도연맹원들이 반공주의자들인 대한민국 국군과 헌병, 반공 극우단체에게 학살당한 국가폭력인 보도연맹 학살때 간호사 강 양이 이승만 정권의 국가폭력으로 살해당하자, 사람보다 이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비판하면서 바라보게 된다. 영화에서는 연극배우 이호재가 전명환 원장역을 맡았다.
교원[편집]
- 선우진: 북한이 공산화되어가자, 월남한 영어교사이다. 이승만 정권이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학살한 국가폭력을 당연하게 여길 만큼 광신적 반공주의자인 선우진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간다. 하지만 그가 공산주의를 미워하는 진짜 이유는 공산주의 운동이나 사회주의적 사고가 법에 어긋나서가 아니라,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재산을 몰수당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으므로, 김범우는 당신이 지식인이면 욕심을 버리던지, 내색하지 말라고 말하며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에 따라 선우진을 멀리한다. 후에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린치로 인해 교직을 은퇴하고, 방첩대에 들어간 뒤 탐욕스럽고 출세지향적인 인간으로 변해갔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인원의 공백을 틈타 신문기자로 전직한다.
안창민 집안[편집]
- 안창민: 몰락한 소지주의 아들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염상진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외모는 유약하지만 속마음은 다부진 외유내강의 인물. 관념적 사회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참조)을 제일 싫어할만큼 사회주의의 현실적 해석과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는 진보적 지식인이다. 그래서 안창민은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소작인 아저씨들에게 "아저씨들은 우리 집의 농사를 도와주시는 분들이지 머슴이 아닙니다. 그러니 엄마를 마님이 아니라 아줌마라고 불러주세요."고 말했으며(소작인 방서방이 안창민의 엄마 신씨 부인을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일시적으로 율어를 해방하였다가 후퇴하게 되자 지주들에게 고용된 소작인 감독자를 뜻하는 마름들을 불러 "만약 당신들이 지주의 편을 들어 소작인들이 손해를 보게 되면 돌아와서 처벌할 것"이라고 말하여 소작인들이 지주들에게 보복당하지 않게 한다. 요약해서 말하면 안창민은 사회주의사상을 공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진짜 진보 또는 좌파 지식인이다.
- 신씨: 안창민의 어머니. 남편 안서규의 주색때문에 몰락한 소지주이다. 소작인들에게 낮은 소작료를 받으며 농사에 필요한 비용도 자신이 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신씨는 토지개혁이 시행되자 자신의 토지를 무소유를 실천한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모두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넘겼다. 그래서 훗날 안창민과 이지숙의 위장전향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소작인들의 부인들은 자신들도 아저씨가 빨치산 운동을 위해 입산한데다가, 여성들의 직장생활이 활발한 지금[1]과는 달리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기 힘들던, 말 그대로 여자가 할 일은 집에서 애나 보고 밥이나 짓는 것으로 여겨지던 가부장적인 시대라 어렵게 살면서도 변호사 선임비용으로 땅 한 마지기씩 내놓는다. 덕분에 둘은 사형을 당할 위기를 면하고 무기징역을 언도받는다.
하대치 집안[편집]
- 하대치: 염상진의 동조·계승자. 소작인으로 일할 때 염상진의 영향을 받아서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광복이후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운동을 좋아하여 건강한 체력을 갖고 있고, 머리도 비상하여 염상진이 아낀다. 염상진이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남은 대원들과 함께 훗날을 기약한다.
- 들몰댁: 하대치의 아내. 배움은 없어도 속이 깊다. 그래서 하대치는 아내에게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시아버지 하판석 영감이 하대치에게 숙청당한 지주들과 부자들의 아들들에게 테러를 당해서 죽자, 무당 소화의 배려로 식모가 된다. 효심이 깊은 들몰댁이 급사한 시아버지가 좋은 곳에 갈 수 있도록 굿을 부탁하러 왔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좌파라는 사실에 동질감을 느낀 소화가 직업이 있는 자신을 대신하여 집안살림을 돌보는 식모로 고용한 것이다. 그날 이후 들몰댁은 정하섭과 힘겨운 사랑을 하는 소화를 옆에서 지켜주는 든든한 사람이 된다.
- 길남, 종남: 들몰댁의 두 아들이다. 길남이 형이고, 종남이 동생이다. 길남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젓하게 동생 종남을 돌보는데, 이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혼자서 집안살림을 꾸리느라 몸과 정신이 고단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대치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핍박받아 하루종일 벽을 멍하게 쳐다본다.
서민영 선생과 주변인물[편집]
- 서민영: 기독교 사회주의와 무교회주의를 실천하는 진보 기독교인이다. 전라남도 고흥군 태생. 그의 증조부께서는 실학자이셨으므로, 농업기술을 어떻게 개량할 것인지를 고민하셨다.정약용 선생이 1801년 천주교 박해로 강진군에 왔을때에도 토론을 했으며,이러한 전통은 서민영이 농업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장로교 선교사가 세운 개신교 학교인 매산중학교와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공부했다.(3권)영어를 가르쳤고 1941년 치안유지법으로 구속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래서 신체장애인이 되었지만,과수원에서 노동을 할 만큼 정신은 매우 건강하다. 자신의 토지를 함께 일하는 농장으로 만들어 다같이 일하고 다같이 먹음으로써, 나누어 먹으라는 예수의 사상을 실천한다.김교신 선생의 기독교 사상, 문학, 철학, 신학에 걸친 진지한 독서, 과수원에서의 노동 등 진보 기독교인으로서의 생각과 실천의 범위가 넒다. 성 바울의 삶이나 수도원 운동에서도 발견되는, 노동하는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황순직 목사가 스스로 목사라고 소개하는 말 속에 담긴 권위주의를 속으로 싫어하는 내용(4권)은 무교회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잘 드러낸다.
- 장 목사: 서민영 선생의 친구이자 개신교 목사이다. 순천교회 목사이다. 성직자의 지성과 양심으로써 광복이후 개신교 교회들이 지나친 늘어나는 현상 같은 개신교의 문제들을 염려한다.
- 이근술: 이승만 정권의 국가폭력들중 하나인 보도연맹 학살당시 생명을 존중하는 신념에 따라 학살에 가담하지 않은 경찰이다. 양심때문에 해직된 이근술은 복직할 수 있는데도, 어린이들에게 뻥튀기를 만들어주는 장사를 하면서 소박하게 살아간다. 서민영 선생과 함께 인도주의의 실천을 위해, 교육에서 소외된 빨치산의 자녀들을 모아 가르치는 일을 한다.
- 권병제 : 경찰서장. 일제강점기에 집안어른들의 권유로 경찰이 되었는데, 동생들을 돌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일부 경찰들의 횡포 때문에 경찰을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일하는 공무원으로서 신뢰하지 않는 보성군민들을 보면서 고민한다. 보성군의 실정을 잘 알고, 생각이 깊어서 심재모 사령관과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일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국가범죄인 보도연맹 학살에 가담하지 않아 해직된 이근술을 복직시키려고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자기 반성으로 복직을 거부하는 이근술의 신념을 존중한다.
- 이근술 : 경찰. 염상진과 김범준의 심문을 받을 때에 진술한 이야기에 따르면,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라면서 보도연맹 학살에 가담하지 않아 남인태 경찰서장에게 철수명령을 받지 못했다. 보도연맹 학살에 이근술이 가담하지 않은 덕분에 살아남은 지역주민의 도움을 받아 피해있다가 발각되었는데, 염상진과 김범준은 이근술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해서 석방했다. 뻥튀기 장사로 일함으로써 생활비를 벌다가, 서민영 선생님의 권유로 야학 선생님이 되었다.
- 이지숙: 전라남도 담양군 지주의 딸이자 공산주의자이다. 공산주의자였던 오빠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며, 한국전쟁중에는 여맹위원장으로 활동한다. 자신의 신념 때문에 학교에서 해직당하자, 서민영 선생이 운영하는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사회주의 의식을 고취시킨다. 자신은 종교가 없지만, 노동에 대한 보상이 없는 것은 죄라고 믿는 기독교 지식인 서민영 선생을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다.
- 황순직 : 1949년 북한에서 내려온 개신교 목사이자, 기독교 근본주의자이다. 미군정과의 결탁, 반공주의, 다른 종교와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배척, 민중들에 대한 무지 등의 개신교의 문제점들을 보여주는 인물로 진보 기독교인인 서민영과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 월주 스님: 불교 승려. 선암사 주지스님이다. 종교는 다르지만 손수 키운 차를 선물할 정도로 서민영 선생을 존경한다. 성서를 한글로 번역함으로써 정보의 민주화를 실천한 기독교계의 전통을 마음이 닫힌 불교계의 문제를 개혁할 수 있는 대안으로 여길 만큼 생각이 깨인 성직자이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면, 종교간의 대화를 실천하는 진보 불교 승려이다.
소화 집안[편집]
- 소화: 어머니때부터 무(巫)에 종사해온 무당이다. 정하섭을 매우 사랑하여 그를 위해 헌신한다. 소화는 배움이 없어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지주들을 위해 봉사하는 역할인 무당으로서의 삶을 거부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다. 그래서 소작인들이 생존권 투쟁을 벌이다 잡혀가자, 소작인들의 생존권을 침해하다 의분(義憤)을 느낀 소작인들에게 응징당한 정현동의 망령을 빙자하여 소작인들의 가족들이 땅을 받게 함으로써 민중을 위해 봉사한다.
- 월화: 소화의 어머니이자 미혼모이다. 그런데 정참봉과의 사랑으로 낳은 딸 소화도 자신처럼 미혼모가 된다. 하지만 소화는 딸에게 내림굿을 한 어머니와는 달리, 아들 민승이를 빨치산을 돕다가 구속되어 교도소에 갇히기 전부터 안면이 있던 무당에게 맡기되 결코 굿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라는 약조를 받아낸다.
정하섭 집안[편집]
- 정하섭: 양조장 정현동 사장의 큰아들이다. 아버지의 물질숭배에 대한 반발로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된다.
- 정현동: 정하섭의 아버지이자 물질숭배자이다. 토지개혁을 피해 논을 염전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생존권을 지키려는 소작인들이 휘두른 낫에 맞아죽는다. 이 사건으로 소작인들이 재판을 받게 되자, 서민영 선생은 다른 소작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변호사를 고용하지만, 지주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재판관들에 의해 사형, 장기간의 징역이라는 중형을 언도받는다.
- 낙안댁: 정하섭의 어머니. 남편 몰래 아들을 돕고 있다. 물론 아들을 돕는 것은 공산주의에 찬성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사랑하는 모성애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정사장은 공산주의 운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재판까지 받는다.
그외 인물[편집]
- 조원제: 빨치산 소년전사. 18세. 저명한 진보 경제학자인 고 박현채 선생을 모델로 하였다.[2]부친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아들처럼 사회주의자인 조원제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조직원이었으며, 비밀당원이다. 그는 1953년 9월 현재 신분을 위장하고 고위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다. 조원제는 서중학교 세포책이었으며 후퇴하다가 염상진을 만난다. 정보과 분트에서 후방부대장 연락병을 거쳐 입당을 하면서 문화부중대장으로 자리를 옮김. 부대 개편시 1대대 지도원 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연대 부정치위원이 된다. 사회주의 이론에 뛰어나고 말재주가 뛰어나다. 원리원칙을 중시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어 여러 동지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
- 이태식: 머슴 출신으로 구빨치산.“항시 웃음기 도는 부드러운 인상과 달리 ‘강철’이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싸움에 강인했고, 통솔력이 뛰어났다. ‘강철부대’로 불리는 그의 부대는 백아산 지구의 최강부대이기도 했다.” 조원제를 특히 아꼈다. 1952년 전투에서 유격대장으로 크게 활약하여 도당 최고의 영웅 칭호까지 받지만 1952년 겨울 토벌대와 싸우다 죽는다.
- 이해룡: 빨치산. 보성의 친일 지주 이상원의 셋째 아들로 김범우보다 순천중학교 1년 선배. 보성전문 법학부에 다니다 학병에 끌려가게 되자 염상진을 따라 자취를 감추었다. 두 형은 광주에서 공무원과 은행원으로 그를 극력으로 반대한다. 염상진의 하부조직인 보성책이었다. 전쟁 중 인민군이 퇴각하면서는 유치 지구 연대장이 됨. 1953년 9월 휴전 협정 후 대규모 토벌 공세 때 김범준과 함께 기관총에 맞아 죽었다. 상급 지휘관으로서의 무게와 여유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왼쪽 볼에 길게 흉터가 나 있다.
- 강동기: 염상진 휘하의 빨치산. 빨치산인 강동식의 사촌 동생이다. 20대 후반으로 정현동의 소작인이었다. 토지개혁때문에 땅을 빼돌리려는 정현동의 농토를 산 서운상을 가해하고 바로 입산하였고 1952년 경찰초소 습격 때 총에 맞아 죽었다.
- 천첨바구: 빨치산의 유격 대장으로 하대치, 강동기와 함께 염상진의 주요 인물이었지만 1952년 토벌군의 대공세 속에서 어떤 대원이 총을 맞고 쓰러지자 그를 구하려다가 자신도 총을 맞는다. 이때 김혜자가 달려와 천점바구를 부축해 달아나려 하지만 역시 총에 맞아 천점바구와 손을 잡은채 죽는다.
- 김동혁: 빨치산 유격대로 소조장인 강경애 소조의 대원. 강경애를 사모한다. 1952년 정찰을 나갔다가 토벌대의 매복에 걸려 죽었다.
- 솥뚜껑: 빨치산. 머슴 출신. 전쟁 전부터 야산 투쟁을 하였다. 손승호 소대의 소대장이었고, 나중에 중대장이 된다. 자발적인 혁명의 열정과 과욕이 없는 겸손을 지니고 있는 인물로 문학가인 손승호와 천자문을 공부하며 깊은 동지애를 나눈다. 1952년 동료를 구하고 수류탄에 맞아 죽는다.
- 도라지: 김범우와 친구 정호병이 미국에 있을 적에 돌봐준 하와이의 미군 수용기지 군무원이자 한국계 미국인이다. 하와이 이민 1세대인 부모님이 인종차별로 고통받는 것을 목격한 유년시절의 기억에 따라 미국을 비판적으로 읽는다. 물론 그의 반미주의는 서부개척이라는 구실로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말살한 미국 근대사에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를 읽어낸 지성에 근거한다. 일이 끝나면 에드거 스노우 기자가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한 모택동 등을 취재하여 쓴 《중국의 붉은 별》을 읽고 같이 토론하기도 하고, 한국 이야기를 실은 신문이나 기사를 구해주고, 시간이 되면 바닷가에 가서 스트레스를 털어버릴 수 있도록 배려할만큼 김범우에게 잘해주었다. 도라지라는 이름은 부모님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민요 '백도라지'를 부르던 모습을 떠올리며 지은 이름이다.
- OSS 교관: 김범우와 정호병이 제2차 세계대전 때에 한국에 침투하여 일본군과 싸우고자 군사훈련을 받았던 OSS의 교관. 유대계 미국인. 유대인인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한국사람인 정호병과 김범우를 "하늘이 준 시련입니다."라면서 위로한다. 벌교의 지형을 이용한 침투작전을 보고한 정호병과 김범우의 똑똑함을 칭찬한다.
- 최익승: 부정부패로 얼룩진 국회의원. 선거철이 되면 뇌물을 뿌려 표를 얻고자 한다. 하지만 민중들의 존경을 받는 서민영 선생과 전명환 자애병원 원장이 깨끗한 정치를 선언한 안창배 후보를 지지한데다가, 최익승의 부정선거에 의분(義憤)을 느낀 민중들에게 외면받으면서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한다.
- 양효석: 한국군 장교. 벌교 번화가에 있는 포목상 광주상회의 아들로 순천 매산중학교 졸업. 통학열차를 주름잡는 주먹이었다. 빨갱이 원수를 갚고, 신분 상승을 꾀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장교가 된다. 한국전쟁당시 한국군의 전쟁범죄들중 하나인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 가담하였으며 벌교 토벌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기도 함. 송경희를 좋아하지만 번번이 무시당한다. 벌교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동생 송성일에 대한 징집 영장을 미끼로 송경희를 꺾으려 하지만 부대 이동으로 무산된다. 최전방에 투입되어 전투 중 부상을 입는다. 전투 수훈으로 소령 특진. 군인정신에 투철한 인물이다.
- 현오봉: 현준배의 아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전쟁 중 소위로 임관.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전쟁의 잔인성을 목격하면서 부하들의 잘못을 참아주지 않는 잔인한 소대장이 됨. 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의 대공세로 전사한다. 한때 사회주의 사상에 솔깃해서 학생 지하운동에 발을 넣은 적이 있었지만 아버지 현준배의 매질로 끝장냈다. 무개성한 생김, 모난 데 없이 무덤덤한 편. 그러나 한번 화를 내면 황소기운을 발휘하는 용감한 남자이다.
- 송경희: 광복이후 좌파 문학계의 계급 투쟁문학에 반발,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시인지망자. 전형적인 부르주아인 송경희는 부친이 염상진에게 살해당한 것만 억울해할 뿐 왜 계급투쟁이 일어나는지 생각하지 못한다.
- 심재모: 한국군 장교이다. 일제강점기 말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귀국한 뒤 한국군에 자원입대하였다. 벌교에 계엄군 사령관으로 내려와 근무하면서 염상진의 숙적이 되었다. 사령관 시절. 가난한 사람들은 강자가 약자들을 희생시켜서 생존하는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에 생긴다는 서민영 선생의 조언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심각한 부정부패, 구타만연 등 당시 한국군 내부의 악습들로 인해 고뇌한다.
- 강경애: 여자 빨치산. 이태식 연대에 소속되어 있다. 1952년 현재 22세. 소학교 졸업. 1952년 돌격대로 나서다가 토벌대에게 죽었다. 구빨치산이었던 오빠의 영향을 받아 남편을 버리고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자상하고 정이 많으면서도 용맹성을 겸비하고 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고운 눈매를 지니고 있다.
- 이현상: 50대. 지리산 유격사령부 사령관. 한국 전쟁 중 남반부 유격대 총사령관이 되고 각 도당 유격대는 그 지휘 아래 들어감. 1953년 휴전 후 대규모 토벌 공세때 죽었다.
해방일보 관계자들[편집]
- 이학송 : 해방일보 기자.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사실보다 이념이 우선인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정직한 보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언론인으로서의 양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글솜씨가 뛰어나서 해방일보 내에서 기자로 인정받는다. 백색테러로 부인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귀여운 두 아이들조차 실종된다.
- 김미선 : 고등학생 시절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열렬한 사회주의자. 남로당 당원. 아는 것이 많고 든든한 이학송을 믿고 의지한다. 검거된 이후 사실보다 이념이 우선인 반공주의적 문학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한다.가족으로는 백색테러로 죽은 아저씨, 어머니, 두 아이가 있다.
- 박영감: 해방일보에서 인쇄를 담당한 할아버지. 한국전쟁이라는 혼란하고 위험한 시기에도 해방일보 발행을 위해 이학송, 김미선과 함께 중국까지 다녀오는 수고를 했다.
수상[편집]
- 신문사 문학 담당 기자와 문학평론가 39인이 뽑은 ‘80년대 최고의 작품’(《문예중앙》, 1988년 여름호)
- 성옥문화상
- 문학평론가 48인이 뽑은 ‘80년대 최고의 문제작’ 1위(〈80년대 대표 소설선〉, 1989년 현암사)
- 80년대 금단을 깬 대표 소설 (《한겨레 신문》, 1989년 12월 28일)
- 동국문학상
- 출판인 34인이 뽑은 이 한권의 책 1위 (《경향신문》, 1990년 8월 11일)
- 현역 작가와 평론가 50인이 뽑은 한국의 최고 소설 (《시사저널》, 1990년 11월 22일)
- 유주현 문학상 (수상 거부)
- 전국 대학생 1650명이 뽑은 가장 감명 깊은 책 1위, 대학생 필독 도서 1위(《중앙일보》, 1991년 11월 26일)
- 한국의 지성 49인이 뽑은 미래를 위한 오늘의 고전 60선에 선정 (《출판저널》, 1990년 2월 20일)
- 독자 500명이 뽑은 가장 기억에 남은 작품 1위 (《조선일보》, 1992년 8월 25일)
- 전국 애장가 720명이 뽑은 가장 아끼는 책 1위 (《한겨레 신문》, 1994년 10월 5일)
- 서울대학교 신입생 218명이 뽑은 가장 감명 깊에 읽은 책 1위, 가장 읽고 싶은 책 1위 (《한겨레 신문》, 1995년 3월 15일)
- 우리 사회에 가장 영향력이 큰 책 2위 (《시사저널》, 1995년 10월 26일)
- 미혼 직장 여성 502명이 뽑은 친구에게 가장 권하고 싶은 책 1위,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1위 (《동아일보》, 《조선일보》, 1996년 1월 18일)
- 전국 20세 이상 독자 1200명이 뽑은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 1위 (《동아일보》, 1996년 4월 29일)
- 우리 사회에 가장 영향력이 큰 책 1위 (《시사저널》, 1996년 10월 24일)
- 각 대학 수석 합격자 40명이 뽑은 후배들에게 가장 권하고 싶은 소설 1위 (《중앙일보》, 1997년 2월 25일)
- 전국 국문과 대학생 150명이 뽑은 가장 좋은 소설 1위 (《조선일보》, 1997년 5월 15일)
- 서울대학생 1000명이 뽑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소설 1위 (《조선일보》, 1997년 7월 23일)
- 서울 6개 대학 도서관의 문학 작품 대출 1위 (《동아일보》, 1997년 12월 28일)
- 20 ~ 30대 사무직 남녀 600명이 뽑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책 한국출판 연구소 조사 남자 2위, 여자 2위 (《동아일보》, 1998년 4월 21일)
- 문인 100명이 뽑은 지난 100년 동안의 소설 중에서 ‘21세기에 남을 10대 작품’ 에 선정 (《한국일보》, 1999년 1월 5일)
- 각 분야 지식인 100명이 선정한 ‘21세기에도 빛날 20세기 책들’ 36종에 선정 (《출판저널》, 1999년 신년 특집 증면호)
각색[편집]
- 영화: 임권택 감독에 의해 김갑수, 안성기 등이 출연한 영화로 만들어졌다
- 만화: 진짜 사나이의 작가 박산하에 의해 만화로도 만들어졌으나[3] 만화판 태백산맥은 소설과는 달리 전라도 사투리 대사가 전혀 없는 등 원작의 매력을 전혀 살려내지 못해서 독자들에게 외면받았다.
- 뮤지컬: 연출가 위성신에 의해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기타[편집]
검찰은 지난 9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씨 등이 "태백산맥은 이적표현물"이라며 조정래 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 사건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던 중 11년 만인 2005년에 무혐의로 종결되었다.[4]
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와 출판사 해냄을 국가보안법 및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발한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명지대 교수)와 한국전쟁참전 총연맹 총재인 임부택 예비역 육군소장, 호국민족연맹 총재 박일, 대한민국 무공훈장자회 중앙회장 이만흥, 대한파월유공전우회 회장 황문길, 6.25참전 철도동지회 회장 안경모, 전국철도노우회 회장 류기남, 건국청년운동 협의회 총본부 회장 김인식, 실향민애국운동 협의회 회장 문봉제 등 8개 단체 9명의 대표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 소설 태백산맥의 허구성을 밝히는 우익의 입장을 대변하는 모임을 결성하면서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가 책 서문에서 `증언을 토대로 확인작업을 거친 작품'이라고 밝힌 만큼 이 부분에 대해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책의 내용이 좌편향적임을 규명하는 작업을 벌여나가겠다 이 작업이 끝나면 우익도 정당한 자기 몫의 목소리를 내 사회와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작업에 나설 것"이라고 1994년 4월 11일 말했다. 모임에는 "소설 `태백산맥'에 묘사된 일부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 「소설 태백산맥-그 현장을 찾아서」라는 책을 쓴 김종오(48.서양화가)가 참석, 자신이 조사한 내용에 대해 증언했다. 또 자신의 뜻에 따라 北送된 빨치산 이인모를 체포한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원이었던 안모씨도 앞으로 이 모임에 참석,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해 증언하고 "조정래의 소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하겠다"고 했다.[5]
*태백산맥 문학의 거리에서...
*몇십년 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태백산맥의 내용이 가물가물 하게 생각이 나네요.
*태백산맥 문학길 벌교 금융조합.
*소설 태백산맥 문학의 거리에서.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안내도.
*문학거리 표지석.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거리 너무 주위가 깨끗합니다.
*문학의 거리를 구경하고 여기서 좌측 골목길로 진행.
*벌교역의 모습.
*오늘이 벌교5이장 장날이네요 역시 꼬막의 고장 꼬막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네요.
그런데 올해는 꼬막이 흉작이라 엄청 가격이 비싸 집에 갈때 가져갈까 했는데.....
*벌교읍을 한바퀴 돌아 부용교 남쪽에 도달 여기까지 출발 3km지점 여기서 우측으로 진행 천변을 따라 진행.
*벌교 천변을 따라 진행 벌교 배수펌버장 통과.
*궁도장 지나 우측으로 벌교 숲공원지나 다리 건너 좌측으로 진행.
*더리 건너 좌측 천변으로 다시 내려감.
*둑길 아래에 폐가가....
*벌교읍내를 벗어나 방조제 둑길을 지금부터 한없이 걷거 또 걸어요.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 사이로 사람들이 즐길수 있게 데크 설치를 많이 했네요.
*갈대밭과 잘 어울리는 벌교대교의 모습.
*둑방길 진행 운치를 느낄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네요.
*펼쳐진 갈대밭 사이로 데크길 산책로를 이쁘게 만들어 놓았네요.
*63코스 시작점에서 5.3km진행 지점.
*잠시 갈대밭 포토죤에서 환한 미소로 인증샷.
*여름의 녹색 갈대밭 보다 저는 지금의 황금색 갈대밭이 더 아름답게 보이네요.
*나무데크 위에는 밤에 서리로 많이 미끄러워 조심 스럽게 진행 중.
*건너편의 중도방조제에서 이쪽까지 데크길을 만들어 가로질러 다닐수 있게 했네요.
*뒤돌아 본 벌교 시내쪽의 모습.
*시작점에서 7.2km지점 통과(1시간50분소요).
*방조제길을 현재까지 4km 진행 중.
*벌교대교 아래를 통과중 이다리가 영암까지 고속도로 아닌가요.
*여기 대교 아래에서 30분간 커피 타임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짝궁이 어제 발에 잡힌 물집으로 이런 자갈길을 계속 걸어니 무척 힘들어 하네요.
*더디어 방조제 길이 끝나고 갑문 앞에서 우측으로 길을 안내 하네요.
*우측 방향전환 후 앞에서 좌측으로 진행.
*좌측길 진행 후 바로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 바랍니다 방향 표시가 없어요.
*농로길 끝에서 좌측으로 진행.
*다시 좌측길로 비닐하우스 앞으로 진행.
*직진 태양광앞으로 진행.
*진행길 한적한 시골길 정감이 가는 길이네요.
*진행길에 간간히 비닐하우스가 보이네요 자세히 보니 딸기가 한창 익어가고 있네요.
*다시 도로와 합류 지점에서 도로건너 직진으로 진행.
*제두마을 도착 회관앞 통과.
*제두마을 통과 다시 좌측 농로길로 진행.
*농로길 끝에서 우측으로 진행.
*다시 해안가 진입 대포마을 가는 길.
*대포마을 입구에서 좌측으로 진행.
*대포마을 해안가 진행 바닷가에는 해신당이라 하는가?
*대포마을 통과 중.
*여기도 벌교갯벌 도립공원 이네요.
*진행길 우측으로 방향 전환.
*갯마을 가든(펜션)앞으로 진행.
*농로길 진행.
*건너편에도 대포마을이 보이네요 부자 마을인가 봅니다 바다와 농토가 많이 보이네요.
*농로길 끝에서 도로와 합류 좌측으로 진행.
*종점이 이제 6.2km남았어요.
*잠시 도로로 진행.
*잠시 후 도로에서 좌측으로 진행.
*다시 도로와 합류 죽림마을 입구 삼거리 도착.
*앞에 보이는 우측으로 죽림마을로 진행 입구에 63코스 안내판 있음.
*짝궁 대단합니다 발에 물집으로 걱정 했는데 여기까지 노고를 치하 합니다.
*이제 저도 서서히 피로감이 느껴지네요 이틀에 50km를 걷고 있으니 저도 나이가 느껴집니다.
*죽림마을을 통과 노인정 앞에서 좌측 골목으로 진행.
*다시 도로와 합류 죽림마을 화관앞 통과.
*죽림마을에서 작은 고개넘어 옹암마을 표지석 통과.
*다시 해안가 진행 옹암마을 경로당 통과.
*옹암쉼터에서 잠시 휴식 후 진행.
*웅암 교차로에서 좌측으로 진행 .
*이제 종점 4.3km지점 통과 중.
*죽암 배수갑문 쪽으로 진행.
*죽암배수 갑문통과 중.
*죽암배수 갑문끝에서 우측으로 진행.
죽암배수 갑문지나 우측으로 대강천을 끼고 둑방길 진행.
*둑방길 진행.
*들판 한복판에 동산이.....
*둑방길 진행 중 화담정수장 앞에서 좌측으로 진행.
*농로길 진행 마지막 피치를 올립니다.
*대밭입구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
*농로길 진행 .
농로길 진행 건물 옆으로 통과.
*이제 마을이 보입니다.
*여기가 어디고 63코스 종점 이다.
*여기가 63코스 종점 망동마을 팔영농협 망주지점 도착.
*대단합니다 이틀에 50km를 같이 해준 짝궁에게 힘껏 안아 주고 고생 했다고 물집 잡힌 발로 여기까지
가끔은 이것 미친짓 아닌가 왜 고생을 ....
그래도 아는 사람은 우리를 이해 할겁니다(5시간45분 소요)
거리가 24.9km가 아니고 21.7km 이정표 거리가 맞는것 같네요.
* 오늘은 종점에서 택시로 벌교읍 주차해둔 곳에서 꼬막정식으로 저녁을 먹고 출발합니다.
벌교 꼬막을 맛보고 가야죠 그런데 인당2만원 식당을 잘못 갔는지는 몰라도 별로로.....
*남파랑길 누적거리 : 935.2km + 24.9km = 960.1km
*거 리 : 벌교~울산= 편도227km 누적11,564km+227km = 11,791km
*경 비 : 통행료= 통행료 10,600원 +택시 17,700원 + 저녁 40,000원 + 도너스 4,000원= 72,300원
*누적 지출경비 : 2,003,100원 + 72,300원 =2,075,4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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