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1,800km)

서해랑길의 부산물 해남 대흥사 여행기

문수산 아래 2021. 11. 22. 20:41

*서해랑길 1박2일 일정을 마무리하고 여가시간을 이용해 두륜산 대흥사방문을 하기로 하고

 4코스 걷기를 오후2시에 마무리하고 울산에서 해남까지 달려와 나머지 시간을 알차게

 활용 할려고 친구들과 협의로 나머지 시간을 두륜산 대흥사 둘러 보기로 하고 서둘러 가랑비

 내리는 대흥사 주차장 도착 늦은 점심을 차안에서 라면으로 해결하고 비내리는 산사로 우리는

 들어간다.

 

*두륜산 대흥사 일주문 통과.

 

요약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둔사라고도 한다.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말기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1665년부터 1667년에 걸쳐 심수가 중창했으며,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가 썼다. 대웅전 앞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이란 편액이 있고, 동쪽 응진전 앞에는 대흥사응진전전3층석탑(보물 제320호)이 있다.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한다.

대흥사

대흥사 대웅보전,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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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말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13명의 대종사(大宗師)와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명찰로 임진왜란 뒤에야 비로소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갖추었다. 가람배치는 절터의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金塘川)을 중심으로 별원의 성격을 지닌 남원과 북원으로 되어 있다. 북원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원은 천불전과 서산대사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表忠寺) 일곽, 다도로 유명한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중건한 대광명전(大光明殿) 일곽으로 나뉜다.

대웅전은 1665년(현종 6)부터 1667년에 걸쳐 심수(心粹)가 중창했는데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집으로 내부는 단조로우며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李匡師)가 썼다. 대웅전 앞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이란 편액이 있으며 동쪽 응진전 앞에는 대흥사응진전전3층석탑(大興寺應眞殿前三層石塔:보물 제320호) 1기가 있다.

천불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은 1811년(순조 11)에 불탄 것을 1813년 중건한 것으로, 6년에 걸쳐 경주 옥돌로 만든 천불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이 봉안되어 있고, 천불전 좌우에는 학승들이 기거하는 용화당(龍華堂: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과 강사가 기거하는 건물이 있다. 1669년 건립된 표충사(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는 대흥사의 대표적 건물로 앞면 3칸의 맞배집이다. 서산대사·사명대사·처영(處英)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다.

주요 문화재

표충사 삼문(三門) 밖에는 2층 누각인 의중당(義重堂)이 있는데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집으로 봄·가을에 있던 표충사 제사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처리하던 곳이다. 의중당 동쪽에는 서산대사의 유품을 비롯하여 사중유물(寺中遺物) 총 24종을 보관하고 있는 보장각(寶藏閣)이 있다. 표충사 동쪽 300m쯤에 있는 대광명전(전남 유형문화재 제94호)은 조선 후기 초의가 건립한 앞면 3칸, 옆면 3칸의 맞배집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했다.

특히 초의가 직접 단청했다고 전하는 천장의 연꽃무늬와 운학(雲鶴)문양은 뛰어난 형상미와 색채감각으로 높이 평가된다. 대광명전 옆에는 고승들의 영정이 봉안된 앞면 9칸의 보련각과 요사채가 있다. 그밖에 사천왕을 봉안한 천왕문과 역대고승들의 부도·비석을 봉안한 비전(碑殿)이 있는데, 이 비전에는 서산대사부도(전남 유형문화재 제57호)를 비롯해 대흥사 대종사 13명과 대강사 13명의 부도 및 비가 있다.

세계문화유산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1천 년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께 등재된 다른 여섯 곳은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이다.

대흥사북미륵암마애불좌상

대흥사의 북미륵암 암벽에 조각된 고려시대 마애불좌상. 보물 제48호. 높이 420cm. 화강암의 북쪽 면에 불상을 새기고 목조전실을 건축해 조성한 마애석굴의 주존이다. 두광과 신광이 선각으로 표현된 불상은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대흥사

대흥사북미륵암마애불좌상(고려), 보물 제48호, 높이 420cm,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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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광과 신광 밖에 새긴 불꽃무늬[火焰紋]의 표현수법은 치졸하지만 그 안에 하강하는 4구의 비천상을 대칭으로 배치한 점은 특이하다. 얼굴은 4각형에 가깝고, 긴 귀에 양쪽 눈꼬리는 올라갔고 눈동자가 표현되어 있으며 입술은 두껍다.

통견의 법의가 두터운 편이지만 몸의 굴곡이 드러나 보이며, 왼쪽 어깨에는 가사끈이 보이고 평행선의 옷주름은 도식적으로 처리되었다. 밭은 목에 표현된 삼도도 형식적이다. 어깨가 넓고 건장하여 양감이 있는 상체에 비해 하체의 표현이 빈약하며, 수인과 발 등의 세부묘사도 부자연스럽다. 대좌에는 앙련의 연꽃무늬가 간결하게 새겨져 있다.

당시의 거불군을 대표하는 작품이며 고려시대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불상으로 중요하게 평가된다. 상호와 각부의 조각수법을 보아 11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

보물 제320호. 높이 430cm. 응진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부는 4매의 돌로 짠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석을 붙여서 4매의 긴 돌로 하층기단을 형성했는데, 중석의 각 면에는 2개의 탱주와 4개의 우주를 모각했다.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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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석은 1장의 돌로 경사진 윗면 중앙에 호형과 각형의 상층기단 굄을 나타냈다. 상층기단 중석도 4매로 이루어졌으며 각 면에 탱주와 우주를 1개씩 모각했다. 그 위의 갑석은 판석으로 밑에는 부연이 있고, 위에는 각형 2단의 굄이 있다. 탑신부 각 층의 옥신과 옥개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각 층마다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4단 받침의 옥개석 위에는 2단의 각형 옥신 굄이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보통이고 2층 옥신은 높이가 줄어든 데 비해 폭은 그다지 줄지 않았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仰華)·보륜 등으로 되어 있다. 복발은 일반적인 편구형(扁球形)이고 앙화는 8각형의 꽃송이를 세우고 작은 화형을 배치해 횡대를 돌린 특이한 형식이다. 기단의 탱주와 옥개석 받침의 수가 줄어드는 등 부분적으로 간략화되었으나 기단 갑석의 몰딩 수법이나 옥개석 윗면의 2단 탑신받침 등은 전형적인 신라석탑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규모가 작지만 결구(結構) 수법이 단정하고, 조각수법이 세련되고 정교해 신라 하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흥사 북미륵암석탑과 함께 신라 하대에 석탑양식이 우리나라의 서남단지방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1967년 1월 해체·수리 때 상층기단 내부의 자연 판석 위에서 동조여래좌상(銅造如來坐像) 1구가 발견되었다.

*대흥사 주차장에서 바라 본 주위의 가을풍경.

*입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우리는 걸어서 도로를 따라 대흥사로 진입 합니다.

 명승지 66호로 지전한 대흥사는 입장료 1인당 4,000원에 주차료3,000원 7,000원을 내고 들어 갑니다.

 입장료가 조금은 비싼느낌이 비싸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이 많이 온다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볼것도

 많다는 것인가???

*두륜산 대흥사 관련 안내글.

*두륜산 도립공원 등산 안내도.

화재 지정성격유형면적소재지분야

두륜산도립공원
산, 도립공원
지명
두륜산 가련봉 700m, 도립공원 면적 33.39㎢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지리/자연지리

요약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ㆍ삼산면ㆍ북일면에 걸쳐 있는 산.

개설

두륜산의 높이는 700m이고, 소백산맥의 남단에서 남해를 굽어보며 우뚝 솟아 있다. 이 산은 주봉인 가련봉(迦蓮峰, 700m)을 비롯하여, 두륜봉(頭輪峰, 630m)ㆍ고계봉(高髻峰, 638m)ㆍ노승봉(능허대 685m)ㆍ도솔봉(兜率峰, 672m)ㆍ혈망봉(穴望峰, 379m)ㆍ향로봉(香爐峰, 469m)ㆍ연화봉(蓮花峰, 613m) 등 8개의 봉우리로 능선을 이룬다. 1979년 12월 두륜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명칭 유래

원래 두륜산은 대둔사(大芚寺)의 이름을 따서 대둔산이라 칭하다가 대둔사가 대흥사(大興寺)로 바뀌자 대흥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대둔산의 명칭은 산이란 뜻의 ‘듬’에 크다는 뜻의 관형어 ‘한’이 붙어 한듬→대듬→대둔으로 변한 것으로 풀이된다. 때문에 과거 대둔사는 한듬절로 불리기도 했다.

두륜의 뜻은 산 모양이 둥글게 사방으로 둘러서 솟은 ‘둥근머리산’, 또는 날카로운 산정을 이루지 못하고 둥글넓적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또한 대둔사지에 의하면, 두륜산은 중국 곤륜산의 ‘륜’과 백두산의 ‘두’자를 딴 이름이라고도 한다.

자연환경

두륜산의 동쪽 사면은 경사가 급하고 서쪽 사면은 비교적 완만한 산세를 이룬다. 연봉은 거의 안부(鞍部: 산마루가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부분)를 이루지 않은 채 중국 방향의 산계를 이루고 있고, 이를 해남산맥(海南山脈)ㆍ두륜산맥 또는 남령산지(南嶺山地)라 부른다.

수계는 분리된 협곡에 흐르는 소규모의 세류(細流: 가늘게 흐르는 시냇물)를 이루지만, 장춘동계곡(長春洞溪谷)은 비교적 수량이 많으며, 우기에는 호우성 비로 인하여 급류를 이룬다. 또한 수계가 두륜산을 중심으로 방사상의 하계모양을 보인다. 보통 남동쪽 해안으로 흐르는 하천에 비하여 서쪽 해안으로 흐르는 하천의 규모가 더 큰 편이다.

이 일대는 식물분포구계로 볼 때 한일난대아구계(韓日暖帶亞區系)에 속해서 난대성 상록활엽수림이 발달하여 있다. 주요 삼림으로는 장춘동계곡 주변의 동백나무ㆍ후박나무를 비롯하여 북가시나무ㆍ식나무ㆍ굴참나무ㆍ곰솔ㆍ상수리나무ㆍ보리수나무 등 총 11과 837종의 식물이 분포하며 유자ㆍ차ㆍ동백 등 난대식물이 유명하다.

특히 삼산면 구림리의 왕벚나무 두 그루는 한라산의 왕벚나무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고유종으로 인정되어 천연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밖에도 노송나무가 채종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동물상은 수달·청설모 등 9과 31종, 조류는 박새ㆍ붉은머리오목눈이 등 29종, 곤충류는 138종이 조사ㆍ보고되고 있다.

형성 및 변천

두륜산 일대는 최신기의 심성암에 해당하는 미문상화강암이 넓게 분포한다. 이는 비교적 세립질의 기질에 장석의 반정을 갖는 회백색∼담갈색의 특징을 보인다.

현황

두륜산 일대의 산수미와 사찰, 남해를 조망할 수 있는 지리적인 조건 등으로 하여 도립공원(면적 33.39㎢)으로 지정되었다. 산중에는 신라진흥왕이 어머니 소지부인(昭只夫人)을 위하여 546년(진흥왕 7)에 창건하였다는 명찰 대흥사가 있다. 절에는 각종 문헌ㆍ보물ㆍ유품 등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불전(千佛殿)ㆍ표충사(表忠祠)ㆍ대광명전(大光明殿)ㆍ침계루(枕溪樓)ㆍ북미륵암(北彌勒庵) 등이 있다.

보물로는 탑산사동종(塔山寺銅鐘, 보물 제88호)ㆍ응진전전삼층석탑(應眞殿前三層石塔, 보물 제320호)ㆍ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 제301호)ㆍ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보물 제48호)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명승으로는 능허대(凌虛臺)ㆍ백운대(白雲臺)ㆍ구름다리ㆍ극락대ㆍ학사대(學射臺)ㆍ대장대(大藏臺)ㆍ금강굴ㆍ흔들바위ㆍ여의주봉 등이 있어 관광 자원이 되고 있다.

대흥사의 대웅전에서 700m 가량 정상 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조선후기 대표적 선승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나라의 다성(茶聖)으로 추앙 받는 초의선사가 그의 ‘다선일여(茶禪一如)’ 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茶苑)인 일지암이 나온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유명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다산정약용, 추사김정희와 같은 석학, 예인들과 교류하며 쇠퇴해 가는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했던 곳으로, 일지암은 한국차의 성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이곳에는 옛 정취가 그래도 살아 숨 쉬는 차나무가 심어져 있고 선다를 음미했던 다정(茶亭)이 있으며, 집 뒤의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나무대롱에 연결된 돌물확(수조)에 담겨져 흐른다. 이 다천(茶泉)과 돌물확, 차를 끓이던 다조(돌부엌), 위아래의 연못과 좌선석(坐禪石) 등은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일지암’ 편액이 붙어 있는 정자는 1980년한국다인회 회원들이 다도의 중흥조 초의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기념하기 위해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아직은 가을이 조금은 이른가 싶다.

 군데군데 가을색을 보여주고 있지만 아쉬움이 살짝 오네요.

*주차장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도로로 갈수도 있고 다리건너 바로 우측으로 오솔길을 따라 갈수도 있어요.

 우리는 내려올때 오솔길로 올려고 곧바로 도로를 따라 걷기를 에어갑니다.

*방동철 친구가 가을을 맞이 하네요.

*여기에 가을의 절정을 보여 주네요 .

 단풍의 시기는 나무에 따라 틀리고 음지와 양지.물가와 내륙 여러가지 조건으로 조금의 차이로 우리에게

 보여 주기를 하고 있지요.

 

[식물] 단풍나뭇과에 속한 낙엽 활엽 교목. 잎은 손바닥 모양으로 길게 갈라져 있으며 가을이면 빨갛게 물든다. 산지에 자라며 관상용으로 가꾸기도 한다. 경기, 경북, 전남, 제주 등지에 분포한다. 학명은 Acer palmatum이다.

*현재의 이모습 넘 보기 좋아요 언제나 건강한 모습으로 서해랑길 1,800km 완주의 그날까지  오손도손 사이좋게

 강화도 도착 그날까지 같이 하자 친구들 화이팅 !!!!

*도로를 따라 대흥사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 오전에 서해랑길 4코스 걷기를 하고 왔지만 여유가 있어 좋아요.

 오늘도 이길에서 많은 우리의 이야기 이어갑니다.

*60대중반의 우리 오늘 가을입구에서 소년으로 돌아가 봅니다 .

*방동철친구 가을을 만끽하고 갑니다.

*나도 한장의 가을 현장에서 인증샷 하고 갑니다.

*이러나 저러나 별것인나 60중반의 우리가 있는시간 열심히 즐기자 시간이 얼마나 우리를 기다려 줄지 아무도 모른다

 주어진 오늘을 열심히 즐기면서 살아보자.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여관 유선장 여관 앞뜰의 이열매가 무엇인지 이쁘요.

 

이 숲길에서도 풍광이 가장 빼어나다고 꼽히는 곳이 유선관(遊仙館) 일대다. 매표소에서 숲길을 따라 1.2km쯤 올라가면 나오는 피안교(彼岸橋) 직전, 숲길과 계곡 사이 자리 잡은 오래된 한옥. 한국 영화계 거장 임권택 감독이 ‘장군의 아들’ ‘서편제’ ‘천년학’을 촬영한 곳이며,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소개해 더 유명해졌다. ‘100년 여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으로 알려진 이곳이 최근 한옥 호텔로 거듭났다.

유선관 입구. 김대균 건축가는 대흥사 숲길 쪽으로 나 있던 문을 막고 부속관 쪽으로 입구를 틀어 동선을 두륜산 산세와 숲길, 계곡에 따라 맞췄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임권택, 서편제 그리고 노랑이

유선관은 올해로 84년 됐다. 유선관 개·보수를 맡은 건축가 김대균 착착스튜디오 소장은 “수리 과정에서 상량문(上樑文·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을 적은 문서)이 발견됐는데, 여기에 유선관 건축 연도가 1937년으로 나온다”고 했다.

원래는 대흥사를 찾는 수도승이나 신도들이 머무는 객사(客舍)였다가,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여관 영업을 시작했다. ‘1960년대 광주 유곽 출신의 한 기생이 사들여 유선여관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현재 유선관 운영을 맡은 한동인 공동 대표는 “지금은 저 아래에 있는 매표소가 과거에는 피안교 앞에 있었고, 피안교 밑으로 식당이며 숙소, 상점 수십 채가 모여 있었다”고 했다. 과거에는 유선관 일대가 사하촌(寺下村)이었다는 얘기다. “1990년대 초 대흥사가 관광위락시설 단지를 재정비하면서 사하촌에 있던 상업시설들을 주차장 밖으로 철거했습니다. 유선관은 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일하게 살아남았죠.”

유선관 진입로에 놓인 옛 피안교 입석. 1972년 태풍 베티로 유실됐다가 최근 폭우 복구공사 도중 계곡에서 발견됐다. '彼岸橋' 글씨는 김종필 전 총리가 썼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임권택 감독이 이곳을 처음 찾은 건 1970년대 초. 그는 ‘서편제’와 ‘장군의 아들’, 100번째 작품인 ‘천년학’ 등을 유선관에서 찍었다. 천년학 촬영 중 칠순을 맞은 임 감독은 유선관에서 생일상을 받기도 했다. 임 감독은 본지 통화에서 “대흥사 구경도 하고 로케이션 헌팅도 하러 갔다가 유선장(유선관)에 머물게 됐다”고 말했다. “장작불 때는 구들이 있는 온돌방에서 자고 일어났을 때의 따뜻함이 좋아서 계속 찾게 됐지요. 전라도 쪽으로 갈 일이 있으면 꼭 들렀어요. 이렇게 유선장 얘기를 하고 있으니 그립고 보고 싶네요.”

유선관이 대중에게 알려진 건 유홍준 전 청장이 1993년 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서다. “1981년쯤 대흥사로 답사 갔다가 처음 유선여관을 찾았다”는 그가 이곳 단골이 된 데는 ‘노랑이’가 한몫했다. 책에 “유선여관을 내가 자주 찾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집의 누런 개 ‘노랑이’ 때문”이라고 쓴 그는 “어미 노랑이는 참으로 영리하였다. 자기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고는 이른 새벽 등산을 가거나, 대흥사, 일지암 어디로 가든 꼭 앞장서서 안내하고 그 손님이 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아야 집으로 돌아간다”고 덧붙였다. 영물이던 노랑이는 지금 사라지고 없다.

유선관 현판 글씨는 호남 중진 서예가 금초 정광주씨가 썼다. 현판은 고산윤선도유적지에서 벼락 맞고 쓰러진 500살 은행나무로 만들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씨간장 같은 공간으로

한동인·배시정 공동 대표가 유선관과 인연을 맺게 된 건 지난해다. 배 대표는 한국 전통 문화를 현대 생활 양식에 맞춰 해석해 다시 만들어내는 디자인기업 ‘비애이(BAE)’의 대표. 그의 어머니는 드라마 ‘궁’의 의상을 비롯해 평생 한복을 지어온 배영진씨다. “지인 소개로 해남에 내려와 유선관을 봤어요. 이런 훌륭한 한옥이 있다는 데 놀랐고, 멋지게 되살리고 싶었죠.”

해남에서 나고 자란 한 대표는 “유선관 앞 계곡은 초등학교 때 소풍 오던 추억의 장소”라고 했다. “홍콩의 어마어마한 재벌이 해남에 오고 싶다는 거예요. 이분을 어떤 숙소로 모실까 찾아봤는데, 모실 만한 데가 없었어요. 유선관을 어떤 분이 오더라도 편하게 지낼 시설로 만들자 결심했죠.”

유선관 중정. 바닥에 깔려 있는 보도블록을 걷어내고 마사토와 자갈을 깔았다. 굴뚝 아래 일본풍 조경도 제거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들은 유선관 개·보수를 김대균 소장에게 맡겼다. ‘양구백자박물관’ ‘소록도 작은 미술관’ ‘베네딕토 수녀원 대구분관’ ‘천주교서울대교구 역사관’ ‘이상의 집 리노베이션(개·보수)’ 등의 프로젝트를 해온 김 소장은 “유선관 리노베이션을 맡으면서 씨간장을 떠올렸다”고 했다.

“옛 모습 그대로 지키기만 한다면 박제밖에 되질 않지요.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결합하며 생명을 지속하고 가치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씨간장이 새 간장을 더해 생명을 이어가듯, 유선관이 지닌 핵심 구조는 유지하되 현대인이 불편함이 없어 계속 이용하는 공간이 되어야겠다 싶었지요.”

*도로를 따라 걷기를 하면서 가끔씩 화려한 가을색을 보여 주네요 .

*조금은 아쉬움 일주일후에는 이계곡의 가을색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아쉬움 쪼끔!!!!!!!

*걷기를 하면서 우리는 두륜산 대흥사 일주문 도착 여기가 마지막 주차장입니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우람한 소나무가 우리를 반기고 우측으로 대흥사 부도전이 담장 넘어로 보여 지네요.

 

*대흥사 부도전.

 

 대흥사 부도전(大興寺 浮屠殿)

 

 

 

부도(浮屠)는 큰 스님의 사리(舍利)나 유골(遺骨)을 모신 탑이며 그분의 행적(行跡)을 살필 수 있어 당시의 사회상(社會相)이나 역사적 사실까지도 알아낼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보통사람들은 한문에 밝지 않아 알아보기 힘들고 재미없어 지나치거나 겉 모습만 훑어 보기 십상이다.

 

이곳 대흥사 부도전(大興寺 浮屠殿)에는 호국의병대사인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그의 문도들 중 초의ㆍ호암ㆍ상월 등 13분의 대종사(大宗師)와 만화ㆍ원호ㆍ연예ㆍ광열 등 13분의 대강사를 위시하여 그 외 고승들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대흥사 입구 일주문을(一住門)을 막 지나면 오른편을 부도 54기와 탑비 27기가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대흥사 부도전에 많은 부도가 자리잡은 것은 그 만큼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후기(朝鮮時代 後期) 고승들을 숭상(崇尙)하는 세력과 절 분위기가 일치한 때문이다.

 

이곳은 1974년 12월 26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석조물) 제57호로 지정된 서산대사 부도가 위치하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서산대사 부도(浮屠)는 총고(總高) 260cm로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는데 서산대사 비 보다 앞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입적(入寂)한 후인 1631년(宣祖)에 세워진 이 부도는 청허당 서산대사비(西山大師碑)의 뒷편에서 약 5m 떨어져 있는데 팔각당식(八角堂式) 부도의 계통을 이은 재미있는 작품이다.

 

상륜부(相輪部) 받침에는 용의 머리(龍頭)를 새기었고 옥개석팔각(屋蓋石八角)의 귀꽃 위치에는 용(龍) 여섯마리, 쥐 한마리를 부각(浮刻) 하였다. 그리고 지반(地盤)위의 하대석 받침은 가늘고 긴 안상(眼象)과 복연(伏蓮)의 연화(蓮花)를 새기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 조각수법은 장흥보림사(長興寶林寺)의 서부도(西浮屠)(보물 156호 고려시대)와 같은 계통의 작품이다.

 

이 부도는 표현양식(表現樣式)이 매우 사실적이며 조각기법에 있어 이곳 부도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대흥사 부도전은 40여년전 영국 왕립 고고학회 회원 1백 20여명이 찾아와 역사적 가치와 예술성에 탄복했을 정도의 뛰어남을 자랑하지만 부도와 탑비의 연대별 배치나 성격별 분류가 없어 아쉽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곳의 탑비(塔碑)들은 대부분 부도의 주인공에 해당되며 그 외에 이곳에 시주했거나 다산 정약용등 도움을 준 사람들의 비(碑)가 주를 이룬 곳이다. 이곳 탑비 중에서 대흥사 창건연유(創建緣由)와 내력을 소상하게 기록한 대흥사 사적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조각의 정교함과 크기로 이름나 있다.

 

이곳의 탑비(塔碑)들은 대부분 부도의 주인공에 해당되며 그 외에 이곳에 시주했거나 다산 정약용등 도움을 준 사람들의 비(碑)가 주를 이룬 곳이다. 이곳 탑비 중에서 대흥사 창건연유(創建緣由)와 내력을 소상하게 기록한 대흥사 사적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조각의 정교함과 크기로 이름나 있다.

*부도전을 뒤로하고 연륜을 보여주는 고목들 사이로 걷기를 계속합니다.

*방동철 친구 좋아요 추억의 그림속으로 다시 한장.

*바다도 좋지만 저는 사계절이 변하는 이 자연의 모습 바다와 다른점 그래서 산을 좋아하는것 아닌가 합니다.

*더디어 대흥사 도착 해탈문을 넘어 경내로 들어 갑니다.

*대흥사의 변천사를 간직하고 이제 수명을 다한 고목의 모습 .

 

*해탈문을 지나 앞에 펼쳐지는 이풍경 그래 이것이 보고싶어 여기에 왔다 두륜산의 암봉은 구름에 보이지 않지만

 안개 사이로 두륜산의 최고봉 두륜봉과 주위를 살짝 보여 주네요 .

 

온 나라가 죽음의 땅이 된 임진왜란. 당시 73세의 노구로 1,500명의 승군을 이끌었던 서산대사는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의 운명을 이겨낸 인물이었다. 그는 묘향산의 암자에서 입적을 앞두고 제자였던 사명대사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는 유언을 남긴다. 서산대사가 입적한 후 천년 동안 어떠한 병화도 미치지 않은 터전이요, 만년이 지나간다 해도 끝내 허물어지지 않을 불패의 땅이라고 일컬어진 두륜산 대흥사(大興寺)에 모셔진 것이다. 그 후 조그마한 사찰이었던 대흥사는 크게 부흥하여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한 대찰이 되었다.

대흥사가 위치한 두륜산은 ‘만년불패지지(萬年不敗之地)’라며 서산대사가 극찬한 곳이다. 한반도 서남단, 해남의 땅끝 가까이에 우뚝 솟은 두륜산은 능선이 마치 부처가 누워 있는 와불(臥佛)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러한 능선의 모습 때문인지 혹은 주위를 겹겹이 두르고 있는 산세에 위요된 아늑하고 안온한 절의 입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흥사는 어떠한 외세의 침입이나 굶주림, 돌림병도 없었다. 서산대사는 대흥사를 두고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며, 종통이 돌아갈 곳(三災不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歸之處)”이라 평했다.

*두륜봉의 모습이 완전히 보여주는 이순간 안지업.손영학친구가 기회를 가져 갑니다.

*동철아 우리도 이순간 놓치면 안되지 두륜봉을 잡아보자.

*좋아요 나는 사진에 모습을 보기 힘든데 오늘은 조금 몸을 맡겨 봅니다.

*그래 이사진이 조금은 마음에 드는데.......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비전서에 국가적인 큰 변란이 있을 때 안전하게 삶을 도모할 수 있는 땅이라는 ‘십승지지(十勝之地)’, 그중 하나가 바로 두륜산 대흥사다. 두륜산은 산속에 대흥사(대둔사)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둔산 또는 대흥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둔산의 ‘대둔’은 큰 산을 뜻한다. 본래 크다는 뜻의 ‘한’에 산을 의미하는 ‘듬’을 합쳐 ‘한듬’으로 부르다가 한자 이름인 ‘대둔’으로 고쳤다. 그래서 대둔사는 ‘한듬절’로 불렸다고 한다.

두륜산은 해발 703m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바다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기저부의 높이가 해면에 가깝기 때문에 산 자체는 비교적 높아 보인다. 주봉인 두륜봉을 중심으로 가련봉, 고계봉, 노승봉, 도솔봉, 혈망봉, 연화봉 등의 봉우리가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다.

소백산맥의 남단인 해남반도에 솟아 있는 두륜산의 정상에 올라서면 멀리 완도와 진도 등 다도해의 여러 섬들이 아름답고 시원하게 펼쳐진다. 두륜산의 동쪽사면은 경사가 급하고 서쪽사면은 비교적 완만한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난대성 상록 활엽수와 온대성 낙엽 활엽수가 주종인 식생이 잘 보존되어 있어 경관이 뛰어나고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져 절경을 이룬다. 봄에는 신록과 만개한 꽃이 아름답고, 여름에는 우거진 녹음이, 가을에는 붉은 단풍이, 겨울에는 동백이 아름답다. 특히 약 2km에 이르는 고목의 동백나무 숲과 붉은 동백꽃, 가을에 두륜봉과 가련봉 사이의 넓은 지역에 펼쳐지는 억새밭은 장관을 연출한다. 아울러 곳곳에 위치한 능허대, 백운대, 구름다리, 극락대, 학사대, 대장대, 금강굴, 흔들바위, 여의주봉 등도 수려한 조망으로 큰 가치가 있는 경승지들이다.

대흥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로 많은 창건설화를 가지고 있다. 426년(구이신왕 7)에 정관존자(淨觀尊者), 514년에는 아도화상, 895년에는 도선(道詵)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둔사지(大屯寺誌)》를 집대성한 혜장(惠藏, 1772~1811)은 이 모두가 신빙성이 없으며 다만 신라 말에 창건된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대흥사는 일정한 규모를 갖춘 사찰다운 사찰이 되지 못한 상태였다. 1607년(선조 40) 이곳에 자신의 의발을 전한 서산대사의 전공으로 배불정책을 시행한 조선의 억불 분위기 속에서도 탄압을 피해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대찰로 발전한 것이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대흥사는 북원과 남원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남원에는 극락전, 대장전, 지장전 등 12개소, 북원에는 대웅보전, 나한전, 시왕전 등 24개소의 당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규모를 보면 북원보다 남원이 훨씬 넓기 때문에 이 기록은 어딘가에 잘못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대흥사는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을 중심으로 절집들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으며 지금도 남원, 북원이라 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북원, 천불전과 서산대사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 일곽의 남원, 그리고 초의선사가 중건한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 등 세 곳의 경역으로 나눌 수 있다.

대웅보전

대흥사의 주전인 대웅보전의 모습과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로 쓰인 편액이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대흥사 부도

대흥사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산대사를 비롯해 많은 스님들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

*다시 두륜봉에 구름이 들어 오네요 지금이 찬스다 한컷 합니다.

 

대흥사에는 귀중한 문화재가 많다. 신라시대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보물 제320호 응진전전삼층석탑과 국보 제308호로 지정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또한 여러 점의 탱화와 서산대사의 유물, 그리고 역대 명필(원교 이광사, 추사 김정희 등)의 편액 등이 남아 있다. 특히 서산대사뿐만 아니라 수많은 스님들의 부도와 탑, 한국 다도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는 초의선사와 관련된 시설과 흔적도 보존되어 있다.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선승으로 알려져 있는데 ‘다선일여(茶禪一如)’, 즉 다도와 참선은 하나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대흥사는 한국 다도의 본산으로 일컬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휴정

서산대사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이 되어 승병을 모아 한양을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대흥사의 대웅전에서 700m 정도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다도를 위해 조성된 다원인 일지암이 위치하고 있다. 전라남도 무안에서 출생한 초의는 16세에 승려가 되었는데 수행과 더불어 차를 직접 재배하고 만들었으며, 차를 끓이고 마시는 예절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일지암에서 40년 동안 수행을 한 초의는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유학(儒學)과 시문을 배우고, 해동 제일의 명필 추사 김정희와도 친교를 나누었던 폭넓은 지식인이었다. 초의는 차에 관한 저술로 《다신전(茶神傳)》을 집필했다. 《다신전》에는 찻잎 따기, 차 만들기, 차의 식별법, 차의 보관, 물 끓이는 법, 차 타는 법, 차 마시는 법, 차의 향기, 차의 색 등 20여 가지로 나누어 제다(製茶)와 다도(茶道)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초의는 《동다송(東茶頌)》 제29송에서 다도의 정신을 이렇게 읊고 있다.

비록 물의 체(體)와 차의 신(神)이 온전하다 해도
오히려 중정(中正)을 잃을까 두려우니
중정을 잃지 않는다면
건(健)과 영(靈)을 함께 얻으리라

이처럼 남도의 차 문화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두륜산 대흥사 일원은 빼어난 자연 경관과 문화적 의미 등이 인정되어 1975년에 명승 제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98년에 사적 및 명승 제9호로 다시 지정되어 명승에서 삭제되었다가 2009년에 또다시 명승 제66호로 재분류된 자연유산이다. 명승으로 지정된 후 명승에서 삭제되고 또다시 명승이 된 ‘두륜산 대흥사 일원’은 곡절이 많은 명승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명승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친구야 앞으로 많은시간 이렇게 즐겁게 살자 .

*동철아 변함없은 이 모습 오래도록 같이하자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자.

*대흥사 경내는 가을의 중심에 있는 느낌이네요 보여지는 모두가 마음의 편온을 얻어 갑니다.

*대흥사 천불전앞에서 .....

해남대흥사천불전

海南大興寺千佛殿
시대문화재 지정건립시기성격유형면적소재지분야
조선후기
보물 제1807호
1813년 중건
불전
유적
정면 3칸, 측면 3칸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길 400, 대흥사
예술·체육/건축

요약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전.

개설

보물 제1807호. 대흥사는 전라남도 해남 두륜산(대둔산)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넓은 산간분지에 계류를 끼고 자리하고 있다. 정연한 가람배치와 달리 여러 불전들을 지형 조건에 맞추어 배치하여 자유로움과 조화를 느낄 수 있다.

『대둔사지(大芚寺誌)』(1823)에 기록된 바와 같이 대흥사는 절을 가로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어 당우(堂宇)들을 배치하였다. 북원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백설당, 청운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가허루, 봉향각, 동국선원, 종무소 등이 또 다른 군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남원의 오른편에는 표충사와 부속건물, 성보박물관이 있고 그 뒤편에는 대광명전이 또 다른 별원(別院)을 형성하고 있다.

역사적 변천

『대둔사지(大芚寺誌)』에 의하면 천불전은 조선시대인 1811년(순조 11)에 화재로 불탔으나 2년 뒤인 1813년에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와 제성(濟醒)대사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천불전에는 1817년에 조성된 천불상(千佛像)이 봉안되어 있다. 이 천불상은 경주에서 조성되어 해남 대흥사로 옮기기 위해 1817년 11월, 2척의 배에 실렸으나 1척이 풍랑으로 표류해 일본까지 갔다가 돌아와 1818년 8월 15일 천불전에 추가로 봉안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경위는 전라남도 화순 쌍봉사(雙峰寺)의 화원승(畵員僧)으로 대흥사 천불전의 천불 조성을 담당했던 풍계현정(楓溪賢正)이 기록한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1821년)에 기록되어 있어, 천불전의 중건과 천불 조성 및 봉안의 역사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다.

내용

큰 대문채와 같은 단층 5칸 맞배집인 가허루(駕虛樓) 중앙의 문간(門間)을 거쳐 천불전 안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서향하여 자리한 천불전이 마주보이고 왼쪽에는 봉향각, 오른쪽에는 옛 강원이던 용화당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북원(北院)에 비하면 마당은 크지 않지만 공간의 규모에 맞게 당우들의 형식이 갖추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인 천불전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의 원형기둥 위를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이 위에 다시 평방(平枋)을 얹었다. 공포의 짜임은 외3출목(外三出目)·내4출목(內四出目)으로 살미첨차[山彌檐遮]의 끝은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앙서는 연꽃봉오리로 조각하였다. 어간(御間) 정면 기둥머리에는 용두조각이 끼워져 있다.

가구(架構)는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宗樑]를 걸었다. 좌우 측면의 어간 기둥의 대들보에 용머리로 장식된 충량(衝樑)을 걸었다. 천장은 우물천장과 빗천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물천정의 반자 중에는 범어(梵語)가 쓰여진 것도 있다.

정면에는 3칸 모두 빗꽃살과 소슬빗꽃살창문을 달고, 왼쪽 측면에는 외짝문을 달았으며, 이외의 나머지 면은 모두 벽체로 마무리하였다. 벽체는 인방재로 상하를 나누어 상부에는 내외부 모두 각기 다른 벽화가 그려져 있고 하부는 세로로 세운 판재로 마감하였다.

내부 불단에는 삼존상 뒤로 1,000여 개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정면의 계단 좌우로는 당간지주가 각기 자리하고 있다.

특징

대흥사 천불전은 평면 비례와 공포 배치, 상부가구 등에서 천불을 봉안하기 위한 합리적인 계획수법에 의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불전의 건축형식과 세부적 수법은 인근의 미황사 대웅전(1754년), 불갑사 대웅전(1764년), 불회사 대웅전(1808년) 등과 유사하다. 조선 중기 이후 성행한 전형적인 다포계 건물로서 짜임새가 매우 화려하면서도 우아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의의와 평가

대흥사 천불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천불전 건물을 대표할 수 있는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큰 건물이다. 또한 천불전의 중건과 내부에 봉안된 천불 조성의 역사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두륜산 두륜봉의 모습 

두륜산(頭輪山)은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이다. 가련봉(703m), 두륜봉(630m), 고계봉(638m), 노승봉(능허대 685m), 도솔봉(672m), 혈망봉(379m), 향로봉(469m), 연화봉(613m)의 8개 봉우리가 능선을 이루고 있다.[1] 대흥산·대둔산이라고도 부른다.[2][3]

난대성 상록활엽수와 온대성 낙엽 활엽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식물분포 학상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4] 1979년 12월 26일 도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다.

정상 부근의 북미륵암에 보물 301호 대흥사 북미륵암삼층석탑이 세워져있는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5]

*대흥사 성보박물관.

*초의선사 흔적을 찾아서.

 

법명은 의순(意恂)이지만 법호인 초의(草衣)가 더 잘 알려졌기에 보통 초의선사라고 부른다. 전라남도 무안군 출생. 16세에 남평 운흥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후일 강진에 유배 왔던 다산 정약용에게 배우기도 했으며 추사 김정희와도 친교가 깊었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 갔을 때도 위로차 찾아갔었다고 한다.

한국의 다도인을 거론할 때 가장 많이 꼽히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며 1828년 지리산 칠불암에 머물면서 지은 서(茶書)인 다신전과 동다송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내용은 찻잎 따기, 차 만들기, 차의 식별법, 차의 보관, 물을 끓이는 법, 차를 끓이는 법, 차를 마시는 법, 차의 향기, 차의 색 등 20여 가지 목차로 상세하게 다룬 책이다. 그 외 저서로 '초의집(草衣集)' 등이 있다.

대흥사의 13대 종사이다. 그래서 대흥사에 관련 유물이 많이 남아있다.

*대흥사를 둘러보고 우리는 다시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의 갈길을 갑니다.

 

*대흥사를 뒤로하고 우리는 내려 올때는 도로를 버리고 좌측 오솔길로 단풍구경을 하면서 주차장으로 진행.

*그래도 여기는 단풍이 조금 아쉬움을 달래 주네요 

*이제 가면 언제 또 올수 있을까.....

*단풍색의 다양함 요런 노랑색 보기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