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1,800km)

서해랑길6코스(녹진국민관광지~용장성)15.5km

문수산 아래 2022. 1. 15. 11:17

*언   제 = 01월 13일 목요일 눈보라 종일 -2도~2도

*누구와 = 임무용,최현숙(부부)

*코   스 = 녹진 국민관광지~강강술레터~둔전방조제~벽파정~선왕산~용장성 (4시간5분소요)

*오늘은 진도읍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아침에 숙소(6층)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진도읍이 밤새

 내린 눈으로 천지가 백색으로 변했다 어쩌지 눈길에 차량이동이 가능 할련지 걱정이다.

 시내에서 출발지 둔내면 습지공원까지 이동 눈으로 가능할련지 모르겠다.

 어제 5코스 끝내고 한시간더 6코스 걷기를 습지공원에서 끝내고 오늘 다시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아침은 출발지에서 먹기로 하고 숙소를 떠나 눈길에 조심조심 출발지 습지공원에 무사히 도착 떡국으로

 아점을 해결하고 10시30분에 도착지 용장성으로 출발합니다 심한 눈보라에 최악의 날씨로 오늘 고생좀

 하겠다 단단히 준비를 하고 우리 부부는 걷기를 시작합니다.

 

코스개요

- 아름다운 경관과 수많은 특산물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고장 진도로 오는 첫 번째 관문
- 명량대첩 승전보가 울렸던 현장이자 우리 민족의 얼이 서려있는 길
관광포인트
- 명량대첩 승전 광장의 랜드마크 '진도타워'
- 이순신장군과 함께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진도군민들의 호국정신을 담은 '명량대첩승전광장'
- 이순신장군과 명량대첩을 기념하고 참전 전사자를 기록한 '이충무공 전첩비'
- 바위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벽파정'

여행자 정보

- 시점: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녹진관광단지
교통편) 진도공용터미널에서 시외버스 승차 '녹진'정류장 하차
- 종점: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진도 용장성
- 매년 9월경 명량대첩축제를 진행함
 
 
 

*6코스 시작점 패널을 아무리 찾아 보아도 보이지가 않아 녹진국민관광지를 떠나 도로를 따라 진도타워 방향으로

 6코스 걷기를 이너갑니다. 잠시 후 도로 좌측에 진도 호국무공수훈자공적비를 바라보며 걷기를 계속합니다.

*진도타워 오름길에서 잠시 뒤 돌아 진도대교 부근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진도타워 오름길이 경사도가 심하여 오름길이 힘이 드네요.

위치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만금길 112-41

진도타워는 진도대교 근처에 있는 망금산 정상에 위치한다. 카페테리아와 레스토랑 등에서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진도타워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승전을 기념하고 진도군 관광의 랜드 마크로 군민들에게 자긍심을, 진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 할 것으로 기대된다.

*진도타워 명량대첩 승전 기념그림이 멋지게 그려져 있어요.

*이순신장군의 거북선 전장의 조형물.

*진도타워에서 내려다 본 진도대교의 모습 주변 풍경과 멎지게 보여 지네요.

*진도타원에서 이제 걷기는 망금산 강강술래터 방향으로 걷기를 진행합니다.

*진도타워 반대편으로 경시길을 한참 내려가 강강술래터 가는길.

*여기가 망금산 강강술래터 주변입니다.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명량대첩로 101

망금산은 13척의 배로 3백여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량해전지 (울돌목)에 연접하여 울돌목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해발 115m의 나지막한 산이다.명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은 적으로 하여금 우리 군사가 많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이 망금산에 토성을 쌓고 부근의 부녀자들을 모아 남장을 시켜 산봉우리를 원을 그리며 반복하여 돌게 하였다고 한다. 주로 추석날 밤, 곡식의 풍년을 기원하며 추던 부녀자들의 민속놀이를 의병술로 사용한 것이다.지금도 망금산 산봉에는 망터가 있고, 그 밑으로 강강술래터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또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술을 존경하는 마음이 담긴 강강술래에 관한 많은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망금산 반대편으로 내려오면 여기는 무궁화 동산을 멋지게 만들어 놓았네요 여름에 오면 아름다운

 우리나라꽃을 감상할수 있겠어요 아쉬움!!!!!

*망금산을 내려와 도로와 합류 여기서 우측으로 도로따라 진행.

*이지역이 진도갯벌습지보호지역을 국토해양부에서 지정을 했다는 안내판.

*현재 우리는 서해랑길 6코스를 걷고 있어요.

*저기 보이는 진도타워에서 우리는 걷기를 여기 왔어요.

*해안길을 따라 걷기를 계속합니다.

*진행길 주변에는 진도의 명물 전복을 많이 했어 그런지 종폐를 키우는 곳이 많이 보이네요.

 오늘은 5코스이어 6코스 여기까지 첫날의 걷기를 마치고 진도택시를 호출 출발지 해남 송정마을

 까지 45,000원 택시비 차량회수하여 다시 진도읍내에서 하루밤을 해결합니다.

*진도읍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눈길을 조심스럽게 달려 출발지 둔내면 습지공원 도착 여기서

 아점을 해결하고 오늘의 목적지 6코스 종점 용장성까지 걷기를 시작합니다.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백색으로 변하였네요.

*진도갯벌 습지보호구역 생태지도 안내판.

*둔내면 습지보호지역 데크길 출발지 입구.

*오늘의 걷기 인증샷 힘차게 출발합니다.

*습지공원 전망대의 모습.

*습지보호지역 부근의 데크길 전경 특별히 볼거리이는 별로 없어 지나다 들리지 시간할애하고 오지는 않을것 같은 볼거리....

*데크길에 우리 두사람의 발자욱을 남기고 갑니다.

*지나 온 습지보호지역 데크길의 모습 이것이 볼거리 전부.

*한시간 전에 이길에는 눈으로 차량통행에 지장을 줄 정도로 도로에 눈이 많았는데 이렇게

 깨끗하게 눈이 녹았네요 .

*도로를 따라진행 또다시 하늘에서 햐얀 눈이 쏟아지네요 울산에서는 눈구경 하기가 어려운데 진도에서

 오랜만에 눈다운 눈을 구경하네요 집사람 신났어요.

*눈과 함께 심한 바람으로 걷기에 조금은 힘드네요 그래도 기온이 영상이라 추위는 없어요.

*정말 많이 눈이 내려 동심의 세계로 빠져봅니다.

*도로에서 우리는 해안가 둔전 방조제위로 눈보라를 맞으면서 걷기를 이어갑니다 방조제 거리가 2km이상

 되는것 같아요 한참을 이어 가네요.

*둔전 방조제 끝에서 뒤돌아 본 모습 이길을 걸어 왔어요.

*방조제 끝에는 둔전배수갑문이 있고 다시 도로와 연결 좌측으로 도로따라 진행.

*오르막길 도로에는 아직 눈으로 통행에 지장을 주고 있네요.

*배추밭에도 밤새 햐얀 눈이 내려 꼬깔모자를 쓰고 변신을 했네요.

*열심히 추억 담기에 열중하는 집사람 .

*걷기길은 갯바위 수산을 지나 도로로 계속진행 삼거리 표식이 없어 조금 아쉬움.

*갯바위 수산 간판 조금지나 전봇대에 서해랑길6코스 패널이 우리를 안내하네요.

*진행길 우측으로 소나무에 햐얀 솜털이 뭉개뭉게 메달려 있어요 정말 보기 좋아요.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 하네요 터널 통과 중 도로에는 차량통행이 전혀 없어 걷기에는 좋아요.

*터널을 빠져 나오니 길은 빙판으로 조심조심 .......

*계속 도로를따라 진행 해안가 도착 진행길 좌측으로 갈대가 황금색으로 나름 운치가 있네요.

*현재 걷고있는 이길이 진도 일주도로(120km)를 걷고 있어요.

*진행길 삼거리에서 우리는 직진으로 진행 .

*진행길 우측으로 여기도 태양광 집열판이 끝없이 펼쳐저 있네요 수익이 괞찮은지 곳곳에 대규모 단지가 만들어

 지고 있네요.

*잠시 후 길은 삼거리 도착 우리의 걷기 길은 좌측 벽파방향으로 진행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

*들판에는 눈으로 눈을 즐겁게 해주네요.

*진행길 우측 도로 아래에는 벽파마을이 용기종기 모여 있네요.

*우르막 도로끝에서 걷기 길은 우측 산으로 진행 .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에서 바라 본 울돌목과 벽파정의 모습 이순신장군의 정신을 다시한번 새겨봅니다.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소재지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682-4
진도

벽파진은 이순신 장군이 1597년 8월 29일 수군 진영을 장도(獐島)에서 이곳으로 옮긴 이후 명량해전 직전까지 16일 동안 머물면서 작전을 구상했던 곳이다.

이곳에 있는 벽파진 전첩비(碧波津戰捷碑)1) 는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일본전함을 물리친 명량해전 승리를 기념하고 진도출신 참전 순절자를 기리기 위해 1956년 11월 29일 진도군민들이 뜻을 모아 건립했다.

진도대교에서 동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벽파진 바위 언덕에 서 있는 전첩비는 높이 3.8미터, 폭 1.2미터, 두께 0.58미터의 규모이며, 머릿돌은 높이 1.2미터, 폭 1.2미터, 길이 2.1미터이다.

벽파진 전첩비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벽파진 전첩비에서 내려다본 벽파항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벽파진 전첩비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전첩비는 언덕 위에 솟은 자연 그대로의 바위산 꼭대기를 거북모양으로 깎은 후 받침돌로 삼아 그 위에 화강석으로 비를 세웠다. 전첩비 정면 바로 앞에는 감포도가 보이고 그 뒤로 해남 어란포 마을이 보인다.

벽파진 전첩비는 2001년 10월 30일 향토유형유산 제5호로 지정되었다. 노산 이은상이 글을 짓고 소전 손재형이 글씨를 쓴 전첩비의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벽파진 전첩비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이더니라. 옥(獄)에서 풀려나와 삼도 수군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郡守)로 임명되었던 진도 땅 벽파진에 이르니 때는 공이 53세 되던 정유년 8월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陸戰)을 명령했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臣)에게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매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여기 이 바다 목을 지키셨나니.

예서 머무신 16일 동안 사흘은 비 내리고 나흘은 바람 불고 맏아들 회와 함께 배 위에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9월 초7일 적선(賊船) 13척이 들어옴으로 물리쳤으며 초9일에도 적선 2척이 감포도(甘浦島)까지 들어와 우리를 엿살피다가 쫓겨 갔는데 공이 다시 생각한 바 있어 15일에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자 바로 그다음 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적은 배로서 330척의 적선을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길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그날 진도 백성들은 모두들 달려 나와 군사들에게 옷과 식량을 나누었으며 이천구, 김수생(金水生), 김성진(金聲振), 하수평(河水萍), 박헌(朴軒), 박희령(朴希齡), 박후령(朴厚齡)과 그의 아들 인복(麟福) 또 양응지(梁應地)와 그 조카 계원(啓源) 그리고 조탁(曺鐸), 조응량(曺應亮)과 그 아들 명신(命新) 등 많은 의사(義士)들은 목숨까지 바치어 천추에 호국신이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진도민의 자랑이로다.

이 고장 민속 강강술래 구슬픈 춤과 노래는 의병전술(疑兵戰術)을 일러주는 양 가슴마다 눈물 어리고 녹진 명량 두 언덕 철쇄(鐵鎖) 걸었던 깊은 자욱엔 옛 어른들의 전설이 고였거니와 이제 다시 이곳 동포들이 은공과 정기를 영세(永世)에 드높이고자 벽파진두에 한 덩이 돌을 세움에 있어 나는 삼가 꿇어 엎드려 대강 그때 사적을 적고 이어 노래를 붙이노니 열두 척 남은 배를 거두어 거느리고 벽파진 찾아들어 바닷목을 지키실 제 그 심정 아는 이 없어 눈물 혼자 지우시다.

삼백 척 적의 배들 산같이 깔렸더니 울돌목 센 물결에 거품같이 다 꺼지고 북소리 울리는 속에 저 님 우뚝 서 계시다. 거룩한 님의 은공 어디다 비기오리. 피 흘린 의사혼백(義士魂魄) 어느 적에 사라지리. 이 바다 지나는 이들 이마 숙이옵소서.

단기 사천 이백 팔십 구년 팔월 이십구일 진도군민 세움

일본수군 여러 부대는 지상군 좌군(左軍)과 함께 남원읍성 전투에 참가한 다음 전주까지 북상했다. 그러나 전주를 방어하던 명나라군이 퇴각하자 일본수군은 경상남도 하동으로 내려와 배를 탔고, 이후 함대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군 총대장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함대는 1597년 8월 하동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한 다음 9월 초순 서쪽 해안을 향해 출발했다.

몇 척 되지 않는 조선수군함대를 토끼몰이 하듯 쫓아온 일본수군함대는 9월 7일 오후 벽파진에 정박해 있는 조선수군함대를 공격해 왔다. 조선수군의 반격을 받고 퇴각했던 일본수군함대 10여 척은 이날 밤 늦게 다시 공격해 왔다가 피해를 입고 도주했다. 이들 일본함선 10여 척은 일본수군이 남원과 전주 등지를 점령하기 위해 북상했다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 수륙병진을 위해 남해안 서남단 해역으로 내려온 병력의 일부이다.

 

 

*벽파진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있었던 나루터.

내용

고려 때에는 대진(大津)이라고 불리었다. 진도군에 속하는 여러 섬들 중에서 본도인 진도(珍島)의 동부 해안가에 위치하여 진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진도는 국방상 중요지역의 하나였는데, 특히 일본과 중국을 경계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는 이순신(李舜臣)과 관련이 깊은 수군영(水軍營)이 배치되어 있었던 곳이며, 순천에서 시작된 봉수(烽燧)가 지나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벽파진은 수진장(守津將)이 한 사람 배치되어 관할하고 있었으며, 해남현(海南縣)의 삼기원(三歧院)으로 통하는 대로의 길목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지였다.

현재도 교통의 요지로서의 기능은 지속되어 목포∼완도간, 목포∼제주간을 연결하는 여객선의 기착지로서 진도와 목포ㆍ제주ㆍ완도 등지를 연결시켜주고 있다. 이순신의 전첩비가 위치하고 있어 국방상 중요 지역이었고 일본과의 7년 전쟁 동안 격전지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벽파진은 백제 때에 인진도군(因珍島郡)에 속하였는데, 신라 경덕왕 때진도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무안군(務安郡)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나주(羅州)의 관할하에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해진군(海珍郡)에 속하였다. 그 뒤 해진군에서 분리되어 전라남도 진도군 고이면(古二面)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고이면에서 고군면에 속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벽파정 부근의 모습.

*벽파정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751에 있는 정자이다. 2012년 2월 29일 진도군의 향토문화유산(유형유산) 제8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있는 벽파정은 고려 희종(熙宗) 3년(1207)에 주로 중국을 왕래하는 국제적 사절을 위로하기 위하여 창건한 정자이다. 이후 조선 세종 11년(1465) 朴厚生 군수가 중건하였다. 현재 벽파정은 없어지고 옛 터 인근에는 '목포해양경찰서 벽파선박출입항대행신고서'건물이 있다.

벽파정은 고려 조선조에 걸쳐 문학누정으로 알려지며 많은 시인묵객들이 거쳐 갔다. 또한 국제사절 뿐만 아니라 발령으로 진도로 들어오고 떠나는 관료들, 유배자들의 작품도 많이 남아 있다. 고려조의 평장사 고조기, 예부상서 채보문, 우관의대부 김신윤, 한림원 학사 김극기와 조선조에 대사헌 김진상, 예조참판 이의철, 병조좌랑 홍 적, 공조판서 임응준, 이조참판 이경의, 신 규. 신백주 등의 작품이 전한다. 또 정언 이주, 대사헌 김정, 전라도관찰사 송인수, 유배에서 풀려나 영의정에 오른 노수신, 우의정 조태채, 정언 조희직 등의 유배인들의 시도 전해지고 있다.

*주차장에 설치돤 진도 관광안내판.

*이곳 벽파진 관광 안내도.

*여시서 부터는 6코스와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과 함께 걷기를 합니다.

*벽파진의 모습.

*주차장에서 올려다 본 벽파정의 모습.

*걷기는 벽파정에서 내려와 오른쪽 방조제길로 연결 끝에서 도로와 합류 좌측 도로따라 진행.

*해안길 끝에서 다시 도로따라 진행.

*도로에는 이렇게 눈이 쌓여 걷기에 어려움을 주네요 그래도 우리 부부는 전진합니다.

*오랜만에 눈 구경 원없이 하고 갑니다 몇년만에 이런 모습을 보는지......

*이제 해안길에서 오른쪽 시멘트 구조물앞에서 우측으로 진행 합니다.

*해안에서 우측으로 진행 이런 길을 따라 진행 오른쪽으로 폐양식장이.....

*걷기 길은 고개를 넘어 새로운 마을로 연결 됩니다.

*길은 연동마을 골목길로 통과 합니다.

*처마끝의 고드름 이런모습 본적이 있나요 어떻에 이런 모습이 나올수 있는지 아마 바람이 불어 휘어졌나 궁금!!!!!

*현재 이길은 고군연동길 73-103 .

*연동마을길에서 도로와 합류 우리는 오른쪽으로 방향전환.

*이길이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 같이 가요.

*여기 전봇대에서 걷기는 좌측으로 진행.

*걷기 길은 눈내린 농로길로 진행 좋아요.

*배추밭끝 전봇대에서 좌측으로 진행.

*좌측길 진행중 삼거리에서 다시 우측으로 진행.

*걷기길은 다시 농로길따라 한참을 갑니다.

*다시 만나는 삼거리에서 우측 산길로 진행.

*우리는 연동마을을 지나 농로길따라 여기까지 여기서 부터는 용장성까지 3.12km남았네요 .

*이길은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과 서해랑길6코스 용장설까지 같이 갑니다. 아름다운 동행길....

*이길의 동행자 길잡이가 나란히 길을 안내하고 있네요.

*정말 이렇게 푸짐한 눈길 걷기는 몇년만인지 기억이 없네요 .

*표고버섯 단지의 눈모자가 아름답게 보이네요.

*다시 눈보라가 몰아 치네요 그래도 기온이 영상이라 추위는 별로 없어어 다행.

*이제 오늘의 목적지 용장성 1.86km 남았어요.

*오늘 정말 좋은 추억 만들어 갑니다.

*더디어 선황산임도길 정상에 도착 여기서 부터는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코스 입니다.

*성황당 산성터이야기.

*이길은 누구도 가지않은 새로운길 우리가 유일하게 발자욱을 남기고 갑니다 내리막길의 경사가 심하여

 조금은 눈길에 힘이 들어가네요.

*그래도 조심조심 여기까지 무사히 선황산 임도길 탈출.

*고생 많았습니다 미끄러운 하산길 다리가 뻐근하네요.

*오늘의 종점 용장성 도착 입구의 용장제의 모습.

*삼별초의 선봉장 배중손장군 동상.

요약 1270년 몽골을 방문하고 돌아온 원종이 환도를 결심하고 강화도 안의 모든 기구를 개경으로 옮길 것을 명하자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 군인들은 이에 불복했다. 이에 원종이 삼별초를 폐지하려 하자 배중손은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추대해 임금으로 앉히고 개경 정부와 대립하면서 몽골에 항전했다. 그 뒤 삼별초군은 해상으로 수송되는 세공을 빼앗아 재정문제를 해결하면서, 전라도·경상도 주민들과 개경 관노 등의 호응에 힘입어 관군을 잇달아 격파했다. 이에 개경 정부는 몽골과 연합군을 구성, 삼별초 공격에 나섰다. 배중손은 여·몽연합군을 여러 차례 무찔렀으나 1271년 몽골의 홍다구의 총공세를 맞아 패배했다. 이로써 삼별초는 함락되었고 그 역시 이때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삼별초(三別抄)의 대몽항전(對蒙抗戰)을 이끌었다. 삼별초의 대몽항전 이전 경력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최씨 무인집권 이후 실력자로 등장한 임연(林衍) 부자 계열의 무신으로 대몽항전을 계속할 것을 강경히 주장했던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골과의 강화가 성립된 뒤 개경환도(開京還都) 문제를 둘러싸고 원종을 중심으로 출륙(出陸)을 희망했던 문신 일파와, 이를 반대하고 강도(江都:강화도)를 근거지로 삼아 계속적인 대몽항전을 도모하려 했던 임연을 중심으로 한 무신 일파가 대립했다.

1270년 몽골을 방문하고 돌아온 원종이 환도를 포고하고 강도 안의 모든 기구를 개경으로 옮길 것을 명하자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 군인들은 환도에 불복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원종이 장군 김지저(金之氐)를 강도에 보내 삼별초를 폐지하고 병적을 몰수하자, 삼별초의 영수인 그는 야별초(夜別抄)의 지휘관 노영희(盧永禧)와 함께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추대해 임금으로 앉히는 한편 관부를 설치, 관리를 임명하고 개경 정부와 대립하면서 몽골에 대한 항전을 시작했다. 육지와의 교통을 차단하고 강화도에 있던 몽골인을 베어 항전의 결의를 다진 그는 도내(島內)의 문무관 중에 동요가 일어나자 심입해도(深入海島)의 전통적인 대몽항쟁 전략에 따라 1,000여 척의 함선을 징발해 공사재물(公私財物)과 백성을 싣고 강화도를 떠나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면서 남으로 내려가 진도에 근거를 정하고 섬 안에 성곽을 쌓고 궁전을 지어 장기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뒤 삼별초군은 해상으로 수송되는 세공(稅貢)을 빼앗아 재정문제를 해결하면서, 전라도·경상도 주민들과 개경 관노 등의 호응에 힘입어 남해연안과 나주·전주에까지 출병, 관군을 격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그가 이끄는 삼별초군을 정벌하기 위해 개경에서는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전라도토적사(全羅道討賊使)에 임명해 군대를 보냈으나 패배를 거듭했다. 이에 개경정부는 몽골과 연합군을 구성, 삼별초 공격에 나섰다. 그는 몽골의 아해(阿海)와 고려의 상장군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을 여러 차례 무찔렀다.

그러나 1271년 대군을 이끌고 연합군에 합세한 몽골의 홍다구(洪茶丘)의 총공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끝내 패배했다. 이로써 삼별초의 진도 근거지는 마침내 함락되었으며, 그 역시 이때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진도 함락 뒤에도 김통정(金通精)을 중심으로 한 나머지 삼별초 군인들은 제주도로 들어가 최후의 항쟁을 계속했으나 결국 이들도 1273년에 이르러 평정되고 말았다.

*충혼탑

삼별초

개경 환도와 삼별초의 항쟁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개경 환도는 순조롭게 실현될 듯이 보였다. 몽골에서 돌아온 원종은 곧바로 신하들에게 환도 문제를 논의하게 했다. 마침내 개경환도 문제가 재추회의를 통과하였다. 그런데 재추회의의 환도 결정에 불만을 품은 삼별초 무리들이 무기창고를 열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당시 환도 결정에 반기를 든 삼별초는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을 총칭하는 군대로서 원래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이었다. 삼별초의 효시는 최이가 도둑을 막기 위해서 만든 야별초였다. 그런데 점차 인원이 늘어나면서 야별초는 좌·우별초로 다시 확대 개편되었다. 이후 몽골군한테 잡혀갔다가 돌아온 자들로 신의군이 조직되면서 이른바 삼별초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삼별초는 최씨 집정하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뒤 김준·임연 등이 집정했을 때에도 사병조직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삼별초는 권신들의 사병노릇을 했지만 녹봉은 국가로부터 지급받았다. 따라서 사병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삼별초는 국가의 정규군과 같은 성격의 군사조직체이기도 했다.

권신들의 사병노릇을 하던 삼별초는 몽골 침입 이후 근거지를 강화도로 옮기며 외적을 막는 군사조직체로 변신하였다. 무신정권의 일개 사병조직인 삼별초가 대몽 항쟁의 일선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무신정권의 몰락은 이들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만들었고 게다가 몽골 측에 굴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한다는 사실은 마지막 생존권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었다.

삼별초가 1270년 5월 23일 무기고를 열어젖힌 것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의 표현이었다. 삼별초가 무기고를 털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원종은 상장군 정자여를 강화도에 보내며 이들을 타이르게 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원종은 5월 27일 개경으로 입성했다. 이때에는 몽골에서 돌아온 원종을 맞으러 비빈들도 개경에 나와 있었으므로 왕실과 중신들은 거의 다 환도한 셈이었다. 따라서 왕이나 문신들은 반기를 든 삼별초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몽골과도 화해한 상황이라 그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결국 삼별초를 해산시키기로 결심한 원종은 그들의 명부를 거둬갔다.

그러자 삼별초 명부를 몽골에 전하여 자신들을 처벌할 것이라 판단한 장군 배중손과 지유·노영희는 6월 1일 다음과 같이 외치며 반란을 일으켰다.

“몽골군이 다시 쳐들어와서 백성을 마구 죽이려 한다. 나라를 구할 생각이 있는 자는 모두 격구장으로 모여라.”

배중손의 명령이 떨어지자 강화도는 그 뜻에 호응하여 격구장으로 달려가는 자들과 배를 타고 도망치려는 자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배중손은 삼별초를 동원하여 강화도를 탈출하려는 배를 막았다.

“양반 신분으로 배에서 내려오지 않는 자는 모조리 죽일 것이다.”

배에 탔던 사람들이 겁을 먹고 내려왔다. 그중에는 기어이 개경으로 도망치려고 배를 저어 나가다가 사살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놀란 백성들과 귀족들은 숲 사이로 뿔뿔이 흩어져 숨었다. 아직 피하지 못한 어린애와 부인들은 울부짖으며 길을 헤맸다. 그 사이 배중손은 군사들에게 무기를 나누어 주며 강화도 방비를 굳히고, 왕손인 승화후 온(현종의 왕자인 평양공 기의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며 관부를 설치했다. 이 새로운 정권은 원종의 개경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신세력이었다. 따라서 원종의 개경정부가 문신을 중심으로 한 강화파라면 배중손의 강화도 정부는 무신을 중심으로 한 항몽파였다.

용장산성

삼별초가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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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원종 이하 일부 중신들이 비록 개경에 가 있었으나 강화도에는 많은 문무 지배계급과 그들의 가족이 머물고 있었다. 또 많은 물자와 선박이 남아 있어 삼별초는 충분히 항쟁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배중손은 강화도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육지와 가까운 강화도가 전략상 좋지 못하리라 판단한 배중손은 곧 배를 모아 온갖 재물과 가족, 심지어는 노비까지 태우고 이튿날 강화도를 떠났다. 이때 바다에 뜬 배는 무려 1천여 척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에 앞서 관원들은 모두 몽골에서 돌아온 원종을 영접하러 개경에 나가 있는 중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처자가 모두 삼별초에게 붙잡혀 바다로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대성통곡하였다. 육지는 이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강화도를 떠난 삼별초는 서해 일대의 섬들을 차례로 약탈하면서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가 두 달 반 뒤인 그해 8월 19일 전라도 진도에 도착했다. 이것은 원종이 몽골에 굴종하기 때문에 그들의 공세를 피하여 멀리 남쪽 해상으로 옮겨 간 것이므로 성격상 최이 때의 강화 천도와 비슷한 것이었다.

배중손이 남하하여 진도에 진을 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진도는 남쪽 섬들 중에서 상당히 면적이 넓은 편이므로 웬만큼 많이 모여 살아도 불편할 것이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진도는 위치상 해로의 요충지여서 관군을 막는 데 좋았다. 또한 도참설의 영향도 있었다. 당시 강화도에는 안방열이라는 술사가 있었다. 그는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강화도 봉은사의 태조 진전에서 점을 쳐 보았다. 그랬더니 ‘반존(半存)·반망(半亡)’이라는 아리송한 점괘가 나왔다. 이에 ‘망’을 육지로 떠나는 것, ‘존’을 삼별초를 따라 바다로 떠나는 것이라 판단한 안방열은 배중손을 따라 남하하였다.

이후로 그는 반란군을 달랠 목적으로 “용손이 12대에서 끝나고 남쪽에 제경(帝京)을 세운다.”는 참위설을 인용하며 그 증험이 이제야 나타난 것이라 했다. ‘용손’은 고려의 왕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왕인 원종이 용녀 전설의 주인공 원창왕후의 아들 세조로부터 정확히 12대째에 해당하였므로 이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삼별초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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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는 주변의 30여 도를 휘하에 두고 일대 해상 왕국을 이루었다. 남해안 일대를 석권한 배중손은 지방 세력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해로를 장악하여 경제적으로도 중앙에 큰 타격을 주고 있었다. 삼별초의 세력이 이처럼 강해지자 몽골에서도 삼별초의 저항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삼별초의 사기는 드높았다. 고려·몽골 연합군과 싸워 번번이 승리로 장식했고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마음만 먹으면 물러터진 고려·몽골군쯤은 언제든지 쳐부술 수 있다고 방심하고 있었다.

원종 12년 5월 15일, 드디어 총공격전이 전개되었다. 김방경·힌도·홍다구가 3군으로 나누어 군사를 이끌고 삼별초군을 3면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방심하고 있다가 불의의 습격을 받은 삼별초군은 잘 싸웠다. 그러나 삼별초는 작전상의 실수와 연합군의 신무기에 눌려 패주하고 말았다.

연합군 사령관이던 김방경은 도망치는 삼별초를 추격하여 1만여 명의 남녀를 생포하고 전함 수십 척을 노획했다. 이와 함께 새로운 몽골군 지휘관으로 임명된 좌군의 홍다구는 총공세를 감행하여 진도를 함락시켰다. 진도를 함락한 홍다구는 승화후 온과 그의 아들 환을 잡아 죽였고 배중손도 이때 살해되었는지, 그 뒤로는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배중손이 실종된 후 삼별초의 나머지 군사들은 김통정의 인솔로 탐라(제주도)로 내려갔다. 여기서 삼별초는 제2의 항전을 계속하다 원종 14년(1273) 4월 김통정의 자살과 함께 3년에 걸친 대몽 항전의 막을 내렸다. 이로써 무신 집정기를 일관한 대몽 투쟁은 종말을 고하고 바야흐로 고려는 몽골의 지배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용장성의 현재 주변모습.

*우리는 다시걷는 대한민국 코리아 둘레길 서해랑길6코스 완료.

*해파랑길.남파랑길 완주 이제 강화도로 향하여 북진은 계속된다.

 

*오늘 하루종일 눈보라 속에서 자연과의 싸움 우리가 승리 오랜만에 울산에서는 보기 어려운 

 새로운 세상을 가슴으로 느끼고 눈으로 즐기고 아름다운 동행이 였습니다.

 6코스가  볼거리 많아 지루함 없이 여기까지 길찾기 어려움 없고 리본과 방향스티커만으로도 

 여기까지 충분이 올수 있었어 좋았어요 .진도구간 지킴이분에게 다시한번 감시 전합니다.

 

출발 도착 차량 주행거리 = 진도 습지공원~울산 =417km

                                     

*누적 주행거리 =2,155km

 

*2차 통행료 = 왕복 = 14,000원

*누적 통행료 = 84,000원

*기타경비 =1) 차량회수 1일차 택시요금 진도 습지공원~해남 송정마을=33,120원

                                2일차 용장성~습지공원=28,000원

                2)1일차 저녁 나주 곰탕=20,000원

                3)1일차 해남 고구마빵 선물=46,000원

                4)1일차 숙소=50,000원

    합계 = 177,120원

 

*6코스 거리 = 15.5km    .누적거리 = 91.2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