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제 = 01월 26일 수요일 맑음 종일 2~7도
*누구와 = 임무용,최현숙(부부)
*코 스 = 귀성삼거리~진도미르길~고산둑~진도남도진성~동령개공원~서만항(3시간30분소요)
코스개요
- 헌복동에서 서망까지 가는 길은 바다를 끼고 구불구불, 오르락 내리락 하는 오솔길
관광포인트
- 삼별초에서 몽고에 항쟁한 배중손장군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사당 '배중손장군사당'
- 조선 초기 왜구침입에 대비해 축성한 석성 '진도 남도진성'
교통편) 진도공용터미널에서 농어촌 탑립- 죽림방향 버스 승차 '귀성리'정류장에서 하차 후 도보 15분
- 종점: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서망항
- 아리랑마을 관광지는 봄꽃 명소로도 이름이 난 곳
- 코스 외곽에 세월호참사를 기억하고자 세월호 기억의숲이 조성되어 있음
*이번주도 우리부부는 서해랑길9~10코스 걷기를 위해 울산에서 오전6시40분 출발 남해고속도로를
달려 출발지 진도 귀성삼거리에 11시20분 도착 걷기를 시작합니다.
이번 두코스는 비교적 짧은 코스라 여유가 있을것 같아 다음11~12코스가 둘다22km라 이번에 2시간
정도 미리 걷기를 하기로 한다.
*울산에서 5시간을 달려 출발지 국립남도국악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9코스 안내판 앞에서 인증샷 합니다.
*걷기의 동반자 우리부부는 오늘도 서해랑길 한코스를 시작합니다.
*종합 안내판 도로건너 전봇대에 9코스 시작점 패널이 있습니다.
*시작점에서 도로따라 오르막 올라 갑니다 .
*귀성 삼거리 도착 아리랑마을 조형물이 눈에 들어 오네요.
*귀성 삼거리에서 좌측 도로따라 진행.
*한참 진행 후 마을앞 신호등 앞에서 좌측 농로길로 진행.
*도로에서 농로길 진행 삼거리에서 우측 농로길로 진행.
*좌측으로 하천 우측으로 벌판이 농로길 끝까지 진행.
*농로길 끝에는 도로와 합류 좌측 다리를 건너 갑니다.
*다리건너 걷기길은 좌측 산 허리로 진행.
*도로에서 좌측으로 시멘트 포장로 따라 진행.
*작은 고개를 넘어 길은 직진으로 계속진행.
*다시 도로와 합류 좌측으로 진행.
*도로를 따라 내려가요 인도는 없어도 도로에 차량통행이 별로 없어 걷기에는 좋아요.
*눈 앞에는 바다가 보이네요.
*여기서 부터는 진도 바다가 보이는 걷기길 미르길과 함께해요.
*좌측으로 바다를 끼고 해안길따라 진행.
*마을앞 갯벌은 밑물로 바닥을 보이고 있네요.
*해안가 마을 중만마을앞 통과 중.
*해풍에 꼬들꼬들 마르고 있는 장어포 양념장 숯불에 구워 소주한잔 어때요......
*고산 윤선도선생 사적비.
*대표적 작품 윤선도 어부사시가.
1651년(효종 2)에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 작가인 윤선도(1587~1671)가 지은 연시조.
윤선도가 65세 때 벼슬을 그만 두고 전라남도 보길도의 부용동에 들어가 은거할 무렵에 지은 것으로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지은 노래이다. 세상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과 한 몸이 되어 강호한정(江湖閑情)에 빠지는 것이 주제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을 각 10수씩 40수로 하고 여음이 붙어 있다. 여음은 배를 띄우는 것에서부터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따라 말을 붙였다. 고려 후기의 <어부가>를 이어받아 다시 창작한 것으로 이현보의 <어부사>나 그 밖의 어부가에 속하는 노래는 한시에 여음이 붙어 있으나, <어부사시사>는 순우리말로 여음을 새롭게 썼다. 또한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하였다. <오우가>와 함께 윤선도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고산유고>에 실려 전한다.
어초은묘, 고산유적지 녹우당, 사적 제167호,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윤선도 오우가.
우가(五友歌)(윤선도)
오우가(五友歌)(윤선도)의 작품
ⓒ (주)천재교육 | BY-NC-ND
ⓒ (주)천재교육 | BY-NC-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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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가(五友歌)(윤선도)의 핵심 정리
[이 작품은] 물, 바위, 소나무, 대나무, 달을 벗으로 의인화하여 이들이 지닌 속성을 인간의 덕으로 환원해서 예찬한 전 6수의 연시조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윤선도의 대표작이다.
*갈래 : 연시조(전 6수)
*성격 : 예찬적, 찬미적(讚美的)
*제재 : 물, 바위, 소나무, 대나무, 달
*주제 : 오우(五友; 수·석·송·죽·월) 예찬
*특징
① 대상의 속성을 예찬의 근거로 제시함.
② 자연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인간 중심의 가치관을 드러냄.
*연대 : 조선 인조
*출전 : “고산유고”
오우가(五友歌)(윤선도)의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윤선도가 56세 때 유배지에서 돌아와 전라남도 해남 금쇄동에 은거할 무렵에 지은 전 6수의 연시조로 ‘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다.
〈제1수〉는 문답법을 통해 〈제2수〉부터 〈제6수〉에 걸쳐 등장할 다섯 ‘벗’에 대해 소개하는 서시(序詩)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제2수〉는 가변적 존재인 구름 · 바람과 달리 맑고 깨끗한 물[水]의 불변성을, 〈제3수〉는 순간적인 꽃 · 풀과 달리 영원한 바위[石]의 덕성을 예찬하였다.〈제4수〉는 눈서리를 이겨 내고 뿌리조차 곧은 소나무[松]의 지조와 절개를, 〈제5수〉는 언제나 푸르른 대나무[竹]의 지조와 절개를 예찬하였다. 〈제6수〉에서는 광명의 존재이면서 과묵함의 미덕을 지닌 달[月]을 예찬하면서 마무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시조에서 영원불멸의 자연물은 작가에게 심미적 대상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덕성을 유추해 낼 수 있는 유교적 이념을 표방하는 매개물로 예찬되고 있다.
오우가(五友歌)(윤선도)의 작품 연구실
‘오우가’의 시상 전개 방식ⓒ (주)천재교육 | BY-NC-ND
수석과 송죽에 달을 더하여 지상에서 천상으로 시선을 넓혀 작가의 인식 범위 또한 넓히고 있다.
는 ‘분수’와 ‘만족’을 이르는 표현으로 동양적 체(諦; 깨달음, 머무름)관을 보여 준다. 또한 소유에 대한 의식을 지양하고 자연물을 통한 자연 친화(自然親和),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드러낸다.
‘오우가’에 반영된 윤선도의 자연관전 생애 가운데 20여 년을 귀양살이로, 10년을 은거 생활로 보낸 윤선도에게 자연이란 현실 속에서의 좌절감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였다. 따라서 작가는 이상적 인격체로 관념화된 자연을 벗 삼으려는 노력을 하며 자연을 곧 자기 수양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다.
작가 소개 - 윤선도(尹善道, 1587 ~ 1671)
호는 고산(孤山). 당쟁의 와중에서 여러 차례 유배 생활을 하였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는 작품을 창작하였고 ‘어부사시사’ 등 많은 시조를 써, 조선 시대 3대 가인(三大歌人)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오우가(五友歌)(윤선도) 함께 읽어보기
‘바위’, 유치환/바위의 속성을 통해 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유치환의 ‘바위’는 굳센 바위와 같이 현실을 초극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소망을 강인한 어조로 노래한 작품이다. 대상(바위)의 속성에 주목하여 시적 동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오우가’와 동일하다. 그러나 ‘오우가’에서는 자연물의 속성을 인간(선비)의 덕성에 대응시켜 예찬하고 있지만 ‘바위’에서는 자연물의 속성을 통해 화자의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고산 윤선도선생 사적비건립내역 안내.
*고산 윤선도 사적비앞에 윤 고산둑(방조제)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대단합니다
윤선도
尹善道1587년 |
1671년 |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향하다 보길도에서 은거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 문제와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했다.
시조에 뛰어나 한국어의 새로운 뜻을 창조했으며, 정철과 더불어 조선 시가의 양대 산맥이라 불린다.
우리말의 가락을 살려 우리 글자로 쓰다
윤선도는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일찍부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주옥같은 시조를 남겼다. 그러나 정치 생활은 순탄치 않아 당파싸움에 휩쓸려 17년을 유배지에서 보냈고, 19년 동안 세상을 떠나 자연 속에서 살았다.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 고집과 칼날 같은 성품을 지녔지만 백성을 아끼는 따뜻한 인정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윤선도는 서울에서 윤유심(尹唯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명문가였고 고조부인 윤효정은 전라도 해남에 넓은 땅을 가진 대부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난한 백성을 보살피기에 앞장섰는데, 생활이 어려워 세금을 내지 못하고 옥에 갇힌 사람을 대신해 여러 번 세금을 내 줄 정도였다고 한다.
윤선도는 여덟 살 때 숙부인 관찰공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를 어여뻐한 숙부는 그에게 직접 글을 가르쳤고,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깊은 산속의 절에 머물게 하며 학문을 닦을 수 있게 했다. 외로운 산속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그는 자연을 살피고 아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독학으로 학문 연구에 몰두해 26세 때 진사에 수석으로 급제했다.
그러나 당시 조정 상황은 어지러웠다. 이이첨 일파가 광해군을 에워싸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선도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벼슬을 단념했다. 그가 이렇게 단칼에 벼슬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강직한 성품 때문이기도 했지만 부호 가문에서 태어나 풍요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윤선도는 1616년(광해군 8) 대담한 상소문을 올렸다. 이이첨의 횡포와 영의정 박승종, 왕비의 오빠인 유희분이 국정을 그르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상소문을 미리 본 이이첨 일파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윤선도를 죄인으로 몰아 변경 지역인 경원, 기장 등으로 유배를 보내고, 그의 양아버지 윤유기도 관직에서 추방했다.
그는 유배지에서 농사를 짓고 시를 짓는 등 조용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이이첨 일파가 처형되자 윤선도도 귀양에서 풀려났다. 인조는 윤선도를 의금부 도사에 임명했지만 그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고향인 해남에서 지냈다. 1628년(인조 6)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로 추천을 받은 그는 왕자들의 교육에 전력을 쏟아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호조 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 문학에 이르기까지 주요 요직을 거쳤지만 그의 지나치게 솔직한 태도가 눈엣가시였던 우의정 강석기의 시샘을 받아 경상도 성산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에는 현감직마저 박탈당했지만 그는 해남으로 돌아와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해남의 젊은이와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왕자와 왕족들이 피란해 있는 강화도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강화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청나라에 함락된 뒤였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항복하고 서울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했다.
장수들이 전쟁을 지휘하던 곳으로 병자호란의 통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항해 도중 들렀던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낙서재(落書齋)라는 정자를 세워 이곳을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그가 병자호란으로 고초를 겪은 임금에게 문안도 드리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그를 다시 영덕으로 유배 보냈다. 1년 정도의 유배 생활을 마친 그는 보길도로 돌아와 시와 음악을 즐기며 살았다.
그 후 그가 가르쳤던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부름이 있었으나, 그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보길도에서 시를 지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윤선도가 유배에서 풀려난 후 보길도에서 풍류를 즐기며 불우한 자신의 생활을 풍자투로 지은 단가 2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고산유고》의 일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즈음 그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썼다. 당시 어민들 사이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어부가가 불리고 있었는데 한문투가 많아 실제로 부르기에는 어려웠다. 그는 이 노래를 어부들의 살아 있는 언어를 이용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의 노래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그는 이렇게 어민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효종은 거듭 윤선도를 조정으로 불렀다. 1652년 예순여섯 살의 그는 정4품 성균관 사예가 되어 관직에 다시 나아갔다. 효종은 곧 그를 동부승지로 승진시키고 곁에 머물게 했으나, 반대파의 견제가 심해지자 그는 건강을 핑계로 사직을 요청했다. 그러나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승들의 횡포를 보게 되면 반드시 그 잘못을 짚었다. 그러다 보니 조정 관료들의 비방을 면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다시 보길도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자신을 기다려 주는 훌륭한 정원과 서가, 그리고 제자들이 있었다. 비록 조정에서 배척받은 입장이었지만 문화적으로는 풍요로운 생활이었다.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뜨자 윤선도는 왕릉을 모실 장소를 심의하는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고른 장소는 반대파의 반대에 부딪혀 선택되지 않았다. 게다가 효종의 계모(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이나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남인인 윤선도는 송시열, 송준길 등 노론에 맞서 3년을 주장하며 상소로 항쟁했으나 과격하다고 하여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었다.
삼수는 혹독하게 추운 곳이었다. 73세의 노인을 그렇게 험한 지방으로 유배 보내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워낙 반대파의 주장이 강력하여 그는 이곳에서 6년이나 보내야 했다. 그는 귀양지로 떠나면서 아들인 인미(仁美)에게 편지를 남겼다. 주로 《소학》의 실천윤리를 강조하면서 ‘적선’과 ‘근검’이 집안의 융성을 위한 최고의 덕목이므로 이를 꼭 지켜 나가기를 당부하는 편지였다.
그 후 전라도 광양으로 옮겨졌다가 2년 후인 1667년(현종 9) 81세에 겨우 석방되었다.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힘들게 보냈으면서도 여전히 정정했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았다.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시문집에는 〈어부사시사〉 외에도 〈오우가(五友歌)〉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삼았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산둑앞에 고산 윤선도선생 사적비 모습.
*좌측으로 고산둑 도로를 따라 진행.
*잠시 후 굴포 삼거리 이정표에서 우측으로 농로길 진행.
*굴포 삼거리에서 우측 농로길 진행.
*잠시 후 농로길 삼거리에서 좌측 다리를 건너감.
*다시 도로와 합류 도로를 건너 우측 도로변으로 진행.
*앞에 보이는 마을앞까지 진행.
*마을입구에서 좌측길로 진행.
*마을길 진행 첫번째 갈림길에서 좌측 길로 진행.
*마을길에 동백꽃이 만발.
*마을길 끝에서 우측으로 곡각지점.
*걷기길은 마을을 둘러 산허리로 진행.
*지나 온 남선마을 발 아래에 내려다 보이네요 .
*마을을 뒤로하고 논밭 사이로 진행 코로 파냄새가 향긋하게 나네요.
*길은 산 허리를 따라 진행.
*잠시 후 도로와 합류 좌측으로 진행 동령개삼거리 도착 걷기길은 우측으로 진행.
*도로변 동령개 버스종류소 통과.
*일반국도 18번도로따라 진행.
*도로변 좌측으로 소공원 여름에는 걷다 쉬어갈수 있는 멋진 장소네요.
*고개마루에서 좌측으로 임도길 진행.
*임도길 구간3km 난,분재 채취금지 자연을 훼손하면 안되죠.
*임도길 차단막.
*걷기에는 너무나 완벽한 아름다운길 좋아요.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정화를 하고 갑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길입니다.
*임도길 도로와 합류 여기서 우측으로 도로따라 내려갑니다.
*도로따라 내려가니 다시 좌측으로 바다가 보입니다.
*산림유전자보호구역 팻말과 여기는 국립공원지역 표시.
*작은 어촌마을이 보이네요 저기가 남동마을 입니다.
*남동마을 우측으로 진도남도진성 사대.
*남도진성 입구에 쌍운교 및 단운교가 있어요.
*안내판.
*진도 남도진성의 모습.
진도 남도진성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
사적 제127호(1964.06.10 지정) |
※ 보수 공사로 인해 방문 전 확인 요망
진도는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번창해서 옥주라고도 부른다. "한 해 농사지어 삼년을 먹는다"라는 말이 아직까지 내려올 정도로 물산과 인심이 넉넉한 고장이다. 진도는 예향이면서 워낙 외진 곳이기에 유배지로도 활용되었고, 군사적 요충지라서 군사 관련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남도석성은 백제 시대 매구리현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여겨지는데, 고려 삼별초군이 몽고군과의 항쟁을 위해 이곳에 성을 다시 쌓았으며, 그 후 1438년(조선 세종 20년)에 또다시 성을 보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도석성은 높이 4~6m, 폭은 2.5∼3m 가량 되는 성으로 둘레가 610m이다. 둥그런 성벽과 동.서.남문이 거의 그대로 있으며, 서문 양옆에 밖으로 튀어나온 치가 남아있다. 성 안에는 민가가 수십 호 들어서 있고, 마을 사람들은 이 옛 성문을 통해 출입한다. 남도석성 남문 앞으로 흘러가는 가느다란 개울 위에는 쌍운교와 단운교 두 개의 운교(무지개다리)가 놓여있다. 두 개 모두 편마암질의 판석을 겹쳐 세워 만든 것으로 규모는 작지만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양식이다.
*진도 남도진성앞 교차로에서 우리는 좌측으로 진행.
*걷기길 우측으로 남동마을이 있습니다.
*걷기길은 4km 정도 도로따라 진행 .
*걷기길 우측 언덕위에 전남대학교 자연학습장 건물이 보이네요.
*여기도 배추가 한 덜판 하네요.
*1시간을 도로따라 걸어서 앞에 보이는 서망항도착.
*서망항입구 교차로에서 횡단보도 건너 마을길로 내려갑니다.
*서망마을 골목길따라 진행.
*서망마을 표지석.
*서망마을 회관앞 통과.
*마을 골목길 벗어나 해안가 도착 .
*앞에 보이는 큰건물 항로표지 사무소앞까지 진행.
서망항
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
전남 진도군 서망항은 가을 꽃게잡이가 풍어를 이루는 전국 꽃게 주산지다. 진도에서도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서망항은 진도읍에서 약 40분 정도 소요된다. 진도군 조도면 해역에 매일 40여 척이 출어해 1척에 200kg가량을 잡아 하루 위판량이 3t~5t에 달한다. 냉수대가 형성돼 플랑크톤 등 먹이가 풍부한 진도 조도면 해역은 갯바위 모래층으로 꽃게 서식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또 연중 적조가 발생하지 않는 청정해역으로 다른 지역보다 꽃게의 상품성이 좋아 관광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 곳이다. 서망항에는 싱싱한 횟감과 수산물을 살 수 있는 수산물 시장과 맛집들도 있다 .
*해양경찰서앞 정자에서 우측으로 진행 조금 후 다시 우측으로 진행.
*11시30분 9코스 시작 오후3시 9코스 종점도착3/30분 소요 현재시간 오후3시 우리는 계속 10코스 두시간
더 걷기로 하고 걷기를 진햅니다.
*9코스는 도로구간이 많아 지루한 느낌이 있으며 도로변에 인도가 없어 차량이 지나갈때 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도로에 차량통행이 빈번하지가 않아 조금은 안심이 되네요.
*출발 도착 차량 주행거리 = 울산~국립남도국악원 주차장 =377km
*누적 주행거리 =3,372km
*1차 통행료 = 울산~진도 = 14,700원
*누적 통행료 = 128.100원
*9코스 거리 = 12km .누적거리 = 139.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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