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 둘레길90km

금정산 둘레길7구간(청룡암~어린이 대공원)9.5km

문수산 아래 2016. 12. 5. 22:26



*코스=금정산둘레길 7코스

         청룡암~사상정~선암사~바람고개~어린이대공원(9.5km)4/20분

*일 시=2016년 12월 04일(흐림)8~15도

*누구와=동생부부와(4명)


*이번 7코스는 두여동생부부 와 같이 6명이 처음으로 찬조출연으로 모 처럼

 시끌벅적한 금정산 둘레길7코스 걷기로 변하였다,

 다들 산을 좋아하는 가족이라 오랜만에 즐거운 가족걷기 행사로 시작 마무리

 역시 집에서 가마솟 토종닭백숙으로 마무리...



*신라대학교에서 금정산둘레길 7코스시작점

*백양산갈맷길 안내도

*신라대학교에서 청룡암가는길.

*군데군데 테마길이 조성

*7코스 시작점 청룡암도착 우측으로 진행

*군데군데 시를 계시했네요.여기는 이별의 노래(정호승)


 

1929년충주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시 좌경서적을 읽다가 발각되어 정학처분을 몇 차례 당하고는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1935년서울로 다시 올라와 조선문학사를 열어 문예지 『조선문학』을 지봉문(池奉文)·이무영(李無影) 등과 함께 간행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에 기울어져 8·15광복 직후, 남로당에 입당하였고, 남북협상차 북행하는 김구(金九)를 따라 북한에 갔다가 청주교도소에 1년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출감 이후, 줄곧 도피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을 맞게 되었다. 그때 그는 고향인 충주에서 예술동맹위원장을 맡아 좌경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였다.

그의 시작활동은 1939년 조선문학사에서 간행된 시집 『모밀꽃』 이전까지 3∼4년으로 국한되며, 시집 수록분을 포함하여 40편 가까운 시작품을 지상에 발표하였다. 그의 시 대부분이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고향에서 보낸 성장기의 체험과 연관된다.

그의 이런 체험이 좌익성향과 결부되어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고발하는 시작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향토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이념성의 원리가 훨씬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번7코스는 임도로 끝까지 가요.

*잠깐의 간식타임.

*가을이면 생각나는 시(낙엽)

*황토 맨발산책로 겨울에는 발이시러워 누가 맨발로 갈려나....

*여기는 건강공원 입구.

*휴식시설 만점 줍니다.

*보리피리(한하운)


 

1932년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 1937년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39년동경 세이케이고등학교(成蹊高等學校) 2년을 수료하였다. 그 해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1943년 북경대학 농학원을 졸업하였다.

1944년부터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하였으나 1945년 한센씨병(나병)의 악화로 관직을 사퇴하고 서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는 함흥 학생데모사건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바도 있다. 그 뒤 치료비로 가산을 탕진하고 1948년 월남, 유랑의 생활을 하였다.

그 뒤 자신의 투병 생활과 함께 1950년성혜원(成蹊園), 1952년신명보육원(新明保育院) 등을 설립, 운영하였고, 1953년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으로 취임하여 나환자 구제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66년에는 한국사회복귀협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무하문화사(無何文化社)라는 출판사도 경영한 바 있다.

그의 창작 활동은 학창시절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문단 활동은, 1949년이병철(李秉哲)의 소개로 『신천지(新天地)』 4월호에 「전라도길」 외에 1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같은 해에 첫 시집 『한하운시초』를, 1955년에는 제2시집 『보리피리』를, 1956년에는 『한하운시전집』을 펴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시를 거의 쓰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나환자라는 독특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감상으로 흐르지 않고 객관적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서정적이고 민요적인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도 그의 시적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유해는 경기도 김포군 장릉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저서 외에,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1957), 자작시해설집 『황톳길』(1960), 『정본(定本)한하운시집』(1966) 등이 있다.


*산에서 큰다(이해인)


 

본명은 이명숙, 해인은 필명이다. 자연과 삶, 수도자의 바람 등을 서정적으로 써 내려간 시인이다. 어려서 시재(詩才)가 있었고, 언니가 가르멜 수도회에 입교, 수녀가 되는 것을 보았고, 고등학교 시절에 수도자의 삶을 살기를 결심했다. 성의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후 1964년 부산의 올리베타노의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입회 후 가톨릭 계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소년〉에 해인이라는 필명으로 시를 투고했다. 수도자 서원 후 필리핀 성 루이스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종교학을 공부했고, 서강대학교에서 종교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다. 1992~97년 수녀회 총비서직을 수행했고, 1998~2002년 부산 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시집으로 〈민들레의 영토〉(1976), 〈내 혼의 불을 놓아〉(1979),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83)를 비롯해 10권의 시집을 냈다.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주례동의 모습

*곳곳에 휴계장소는 많이 조성

*개금동 이야기..

*아직도 색을 밝이고 있네요.

*여기는 당감동 이여기판.

*저멀리 백양산이 보이네요.


 

높이 642m. 태백산맥 말단에 솟아 있으며, 주위에 금정봉(397m)·불웅령(611m) 등이 있다. 북서쪽 사면을 제외하면 비교적 완경사를 이룬다. 북동쪽과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각각 성지곡지와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삼나무·젓나무 등 수목이 울창하며, 남쪽 기슭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선암사와 운수사·용문사 등이 있다.

북동쪽 산록에 위치한 성지곡지는 1910년 일본인에 의해 부산 시민의 식수확보를 위한 상수도원으로 개발된 수원지였으나, 낙동강 상수도 공사가 이루어져 1972년부터 용도를 변경해 유원지로 이용하게 되었다. 1974년 이곳에 어린이회관 등의 건물을 지어 1978년 부산 어린이대공원으로 개칭했다.

부산 어린이대공원은 면적 4.62㎢에 실내수영장·반공전시관·과학전시실·우주산업전시실 등이 있는 어린이회관을 비롯해 각종 놀이시설·동물원·휴식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어린이들의 꿈을 키우는 정서교육과 자연·과학 등의 산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시민들에게는 좋은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도 멧돼지가 출몰한다고 주의 구간 설정 조심해야지.

*당감동 체육공원

*선암사 전경


 

신라 문무왕 15년(675)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선암사의 처음 이름은 견강사(見江寺)였는데 뒷산 절벽 바위에서 신라의 국선 화랑도들이 수련하였다 하여 '선암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선암사가 위치한 당감(堂甘)동은 본디  제의를 올리는 신성한 곳으로, 당은 신이 내리는 신성한 나무를 모시는 집이고 감은 감로수를 뜻하는 말이다. 선암사 약수가 유명한 것도 그로부터 연유하며, 일찍이 이곳은 우리 조상들이 한 마음으로 공동체를 이루면서 기도를 드린 신성한 도량이었다고 한다.

 

선암사기에 의하면 고려말 왜구들이 불상을 약탈해다가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재앙이 잦아지면서 비명으로 목숨을 잃은 자가 많았다. 그래서 그 불상을 다시 배에 실어 웅천(지금의 진해시 응천동)으로 보내서 성흥사에 모시고 있다가 현재의 극락전에 모시게 되었는데 기도를 올리면 영험이 수승하다.

 

조선 성종 14년(1483년)에 각초선사가 중창, 선조 원년(1568) 신언스님, 숙종(1718) 때 선오스님이 중수하였고 근세 선지식으로 유명한 혜월선사, 석암스님이 주석하시면서 지금의 사격을 이루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극락전, 명부전, 조사전, 칠성각, 산신각, 요사채와 석축 위 동백나무가 매우 수려하다.

 

이 절의 색다른 특징은 용왕을 모신 용왕단이 있다는 점이다. 일제시대 이전까지 바다였던 부산진이 백양산 바로 앞에 있었던 점, 그리고 고려시대 이후 왜구들의 배를 타고 출몰하는 약탈이 많았던 지역의 특징이 불교사찰에 용왕을 모시는 향토적인 특색으로 정착된 것이 아닌가 한다.

 


*선암사 경내의 기풍있는 소나무.

*선암사 명부전

*선암사 일주문의 모습

*선암사 일주문에서....

*다시 산길을 따라 어린이 대공원으로 진행

*백양산 공룡발자국 화석 설명

*편백나무 숲에서..

*울창한 편백숲으로 지나가요

*편백숲에서 피톤치드향기를 듬북마시고 가요.

*계곡에는 계곡물이 제법 흐르네요.

*어린이대공원으로 내려가요.

*마지막 단풍

*어린이 대공원도착.

*사명대사 집현전 입구의 모습

*사명대사의 동상

 조선 중기의 고승인 유정(惟政, 1544∼1610)을 말함. 풍천 임씨로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다. 경상남도 밀양출신이며,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상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 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해인사에서 머물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1권 등이 있다.

*성지곡 수원지의 모습ㅈ


 

바다를 한 쪽 편으로 두고 걸어가는 것도 충분히 좋지만 눈이 시원해지는 초록색의 숲 속을 거니는 것도 그에 못지않다.

파도소리와 바다의 짠 내음이 바다가 주는 선물이라면 풀과 나무에서 나는 향기는 숲이 우리에게 주는 보너스일 것이다.

 

초읍에 있는 성지곡 수원지는 내가 좋아하는 산책지이다. 아마도 부산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곳이 아닌가 싶다.

아시다시피 부산은 멋진 해안선으로 절경을 만끽할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숲을 즐길 곳은 적다.

우거진 숲으로 산책하려면 비교적 큰 산으로 가야 하고 그러려면 도심을 벗어나야 한다.

일단 차를 타고 나가게 되면 차가 막히거나 주차 문제 등 때문에 그 자체가 즐거움보다는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또 막상 가더라도 산책로가 굴곡이 제법 많아서 체력이 달려서 힘이 들어 오래 걷기가 힘들다.

특히 노인분들이나 갓난쟁이들을 데리고 가는 분들에겐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 모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초읍의 성지곡이다.

초읍은 도심의 중심인 서면에서 버스로 약 10분 정도이니 더 이상 편하기도 쉽진 않다.

또한 체력도 걱정하지 마시라. 초입 쪽의 약간 경사만 지나면 평평하고 좋은 숲길이 나오니 어린아이들도 쉽게 기분 좋게 걸을 수 있다.

큰길로 한 바퀴 돌아도 약 4km 정도라 비교적 짧은 편이고 앞에 말했듯이 입구만 지나면 거의 평평하다.

그저도 마저 통행 데크를 설치하여 경사도를 완만하게 만들어 놓아서 유모차 등도 쉽게 다닐 수 있게 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는 다 유모차와 아이들을 다 들고 한참을 올린 기억이 난다.

 

일제시대에 만든 성지곡은 수원지로 사용하기 위하여서 주변을 삼나무나 편백 나무 등을 심고 가꾸어서 숲 속의 나무들도 크고 우거져서 햇볕을 만날 필요가 없고,

호수가 공원 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서 시원한 느낌도 준다.

그리고 숲과 호수 주변으로는 곳곳에 휴식을 할 곳이거나 간단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소풍"을 할 곳으로 여기만큼 괜찮은 곳이 잘 없다.

널찍하고 평평하면서도 아울러 사방이 확 트여있으면서 자외선을 피해야 하는 곳은 여기 성지곡뿐이다.....

실제로 가면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곳곳에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음식도 나누어 먹고 휴식도 취한다.

산책만으로 좀 심심하게 느끼는 분들은 등산로로 올라가셔 백양산과 금정산으로 가시면 된다. 등산로도 잘 갖추어 있고 실제로 등산객들도 많다.

 

성지곡은 안팎으로 변화가 좀 있었다.

동물원이 오랜 준비를 마치고 개장을 하였다. 재2의 도시치고는 놀이공원도 변변한 것도 없고 동물원도 금강원이 폐쇄한 이후로 오랫동안 없이 지냈는데

이제야 문을 열었으니 아이들에게는 좋은 공간이 될 것이다. 성지곡에 있었던 놀이기구는 노후로 철거했지만 어린이 과학관은 그대로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내부뿐만 아니라 성지곡과 가까운 부산 시민공원이 생겼다. 바로 전 하야리아 부대 터이다. 초읍 공원 입구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이니 같이 다 둘러볼 수 있다.

만약 쳬력이 허락한다면 며칠 전에 개장한 송상현 공원마저 지척에 있으니 팩케이지로 둘러보실 수 있다. 물론 모두 공원의 입장료는 없다.(동물원은 유료)

 

도심 가운데에 이런 녹지공간을 가지는 것은 부산시민에게 축복이다.

이 공간을 가장 많이 찾는 세대는 노인세대이다. 그다음은 어린아이들이다.

즉 세대를 아울러 이 공간을 사랑하고 즐기고 아낀다.

우리 앞선 세대가 지켜내듯이 우리 세대들이 더 잘 가꾸어서 우리 아이들이 커서도 즐거운 공간이 되면 좋겠다.

 

아름다운 "성지곡 수원지"이다.

 


*성지곡수원지 입구 표지석


*오늘은 여기까지 여기서 택시로 신라대학교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