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 둘레길90km

금정산 둘레길5구간(화명정수장~만덕종합사회 복지관)11km

문수산 아래 2016. 9. 17. 09:11

*코스=금정산둘레길 5코스

         화명정수장~성황당~상학약수터~석불사~구민의 숲~만덕사회복지관

*일 시=2016년 09월 11일(흐림)20~24도

*누구와=아내와 둘이서

*6월부터 시작한 금정산둘레길도 벌써 오늘이 5코스를 걷게 되었네요.

 금정산 허리를 한바퀴 도는 코스로 낙동강의 흐름을 다시한번 보면서 코스마

 다 거리 배분도 10km정도로 3~4시간 코스로 누구나 쉽게 접근할수 있게 멋

 진 코스로 여겨 지면서 특히 여름에는 강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피서겸 산행이 좋은 코스러 여겨져 생각 보다는 멋진 코스라 생각이 들어요.


*화명정수장에서 5코스출발 좌측이 화명정수장 담장

*유림 어린이집 건물옆으로 난 데크로 진입

*산 오름길 우측으로 유림 아파트의 모습

*임도길 좌측에 성황당이 있네요 .우리나라 동네를 지켜주는 대표적인 토속

 신앙의 산물이죠.

*군데군데 좋은글귀를 읽어볼수 있게 이런 시설이 있네요.여기는 윤동주님의

 서시가 있어요.

 (윤동주 시인)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이며, 아버지는 윤영석(), 어머니는 김룡()이다. 1931년(14세)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 용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와 당숙인 윤영춘()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 <초한대>를 썼다. 발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인 <쉽게 쓰여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1948).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1968).


*산에는 일자의 소나무 군락지도 자주 눈에 띄어요.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낙동강의 모습 가슴이 펑 뚤려요.

 너무나 멋진 한 장면입니다.

 (낙동강)


 하천연장 400.7㎞, 유로연장 510.36㎞, 유역면적 2만 3384.21㎢이다. 발원지에 관해서는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에 있는 황지연못을 비롯하여 태백시 함백산 천의봉 북동쪽 계곡의 너덜샘, 너덜샘 아래쪽의 용소(), 태백산 장군봉 아래의 용정()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태백시에서는 황지연못만을 발원지로 인정한다. 《동국여지승람》《척주지》《대동지지》 등의 옛 문헌에는 황지연못이 발원지라고 했으며, 《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 편에 따르면, 태백산 황지와 경상북도 문경의 초점(), 순흥 소백산에서 나온 물이 합하여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고 했다.

상류부에서는 안동을 중심으로 반변천()을 비롯한 여러 지류를 합치면서 서쪽으로 곡류하다가 함창() 부근에서 다시 내성천()·영강() 등 여러 지류를 구심상()으로 받아들이고, 유로()를 남쪽으로 돌려 상주() 남쪽에서 위천()을, 선산() 부근에서 감천(), 대구() 부근에서 금호강(), 남지() 부근에서 남강()을 합친 뒤 동쪽으로 유로를 바꾸어 삼랑진() 부근에서 밀양강()을 합치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남해로 들어간다.

상류부에서는 편마암()과 중생층() 사이의 구조선을 따라 유로를 취하다가 중류부에서는 중생층, 하류부에서는 분암() 지대를 흐른다. 낙동강은 경사가 매우 완만하여 400㎞ 상류의 안동에서도 해발고도 100m에 달하지 못하고, 퇴적이 심한 하류부에서는 천정천()을 이루는 데다가 삼랑진에서 물금() 사이의 약 19km 구간은 홍수 때 강물의 소통이 잘 안되는 협착부()를 이루어, 지류 남강에 댐이 건설되기 전까지 범람이 심했다.

낙동강 본문 이미지 1 충주호 금호강 형산강 감천 남강 황강 진양호 합천호 위천 임하호 안동호 밀양강

저산성 산지() 또는 구릉지를 흐르기 때문에 범람원()의 발달이 없다. 따라서 김해삼각주(김해평야)를 제외하고 강 연안을 따라 소규모의 평야가 펼쳐져 있을 뿐, 넓은 충적지는 비교적 적다. 주요평야는 상류부의 안동분지, 중류부의 대구분지, 하류부의 경남평야로 나뉜다. 안동분지는 여러 지류 연안의 침식분지들이 연결된 규모가 큰 평지이고, 대구분지는 본류와 금호강·감천 외 여러 지류 연안에 수지상()으로 분포하는 평야이며, 경남평야는 창녕() 이남의 본류 연안과 남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평지 및 김해삼각주를 포함한다.

낙동강 하구부에 형성된 김해삼각주는 남북 18㎞, 동서 16㎞의 대삼각주로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대충적평야를 이루는데, 낙동강은 구포() 상류 2㎞ 지점에서 2대분류()하면서 거대한 삼각주 하중도()를 형성하고, 다시 망상 분류()를 하면서 여러 작은 하중도를 분리시키고 있다.

낙동강은 유역의 논 약 86만ha의 농업용수와 여러 시읍()의 상수도용수 및 공업용수원이 되고 있다. 특히 1969년 남강에 건설된 남강댐과 1976년 건설된 안동댐은 수자원의 효과적인 이용에 기여하는 한편, 각각 1만 2600kW, 9만kW의 전력을 생산함으로써 유역의 농업·공업 발전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옛날에는 내륙지방의 교통동맥이 되어 조운() 등에 크게 이용되면서 강기슭에 하단()·구포·삼랑진·수산()·풍산()·안동 등의 선착장이 번창했고, 6·25전쟁 당시에는 유엔군의 최후 방어선 역할을 했다. 한편 김해삼각주 말단부에 있는 을숙도() 일대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철새도래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낙동강 [洛東江] (두산백과)



*조망권이  있는 곳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한참을 쉬어갈수 있어요.

*함박봉에 도착.해발 357m의 이 봉우리는 부산 북구 향토지에 화명 수정마을

 의 동산으로 함박꽃처럼 생겼다하여 함박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함박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함박봉에서 좌측으로 계속 직진.

*너무나 아름다운 산책길에서 ....

*좋은글귀 김지헌=산에 가거든

 (김지헌님)


 

출생 - 사망1928년 ~ 2015년
출생지평남 진남포()
직업시인, 시나리오 작가

시인 · 시나리오 작가. 평남 진남포() 출생. 본명은 최연(). 경동고교()를 졸업. 1955년 시 〈종()〉으로 〈현대문학〉에 추천을 받은 후 1956년 〈무제()〉 등을 발표하였다. 그 뒤 시나리오 작가로 전향하여 《구름은 흘러가도》 · 《서울의 지붕밑》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지헌 [金志軒]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산책로 중간중간에 잠시 쉬었다 갈수있는 휴식공간을 여러 곳에 만들어 놓

 았네요.

*석불사 방향으로 진행

*상학 약수터 도착

*깨끗하게 정리된 약수터의 모습 .식수사용도 가능하다고 적혀 있네요.

*약수터에 간단한 운동시설도 있어요.

*가다가 힘들면 이렇게 잠시 휴식을....

*가다가 몸이 뻐근하면 이렇게 몸풀고 가요.

*오늘은 솔향도 한없이 맡으며 ....

*상학초등학교 도착 보이네요.

*김소월님의 산유화


 [ ]

김정식(김소월)

김정식(김소월)1902-1934. 시인. 대표작 ≪진달래꽃≫. 동아일보사 제공

1902∼1934. 시인.

개설

본관은 공주(). 본명은 김정식(). 평안북도 구성 출생. 아버지는 김성도(), 어머니는 장경숙()이다.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되어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사립인 남산학교()를 거쳐 오산학교() 중학부에 다니던 중 3·1운동 직후 한때 폐교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하였다.

1923년 일본 도쿄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을 교장으로 서춘(椿)·이돈화()·김억()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특히, 그의 시재()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단의 벗으로는 나도향()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 경영하였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에 빠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활동은 저조해졌고 그 위에 생활고가 겹쳐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에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다.

시작활동은 1920년 『창조()』에 시 「낭인()의 봄」·「야()의 우적()」·「오과()의 읍()」·「그리워」·「춘강()」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 『개벽』에 실린 「금잔디」·「첫치마」·「엄마야 누나야」·「진달래꽃」·「개여울」·「제비」·「강촌()」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삭주구성()」·「가는 길」·「산()」,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의 「왕십리()」 등이 있다.

그 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별로 살펴보면,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꽃촉()불 켜는 밤」(1925)·「무신()」(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노래」(1924)·「옷과 밥과 자유」(1925)를, 『조선문단()』에 「물마름」(1925)을, 『문명()』에 「지연()」(1925)을 발표하고 있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개벽』에 시론 「시혼()」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調)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첫치마」·「금잔디」·「달맞이」 등에서 피고 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시 「진달래꽃」·「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먼후일」·「꽃촉불 켜는 밤」·「못잊어」 등에서는 만나고 떠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한 삶의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민요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생에 대한 인식은 시론 「시혼」에서 역설적 상황을 지닌 ‘음영의 시학’이라는, 상징시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 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시로는 「들도리」(1925)·「건강()한 잠」(1934)·「상쾌()한 아침」(1934)을 들 수 있고, 삶의 고뇌를 노래한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1926)·「팔벼개 노래」(1927)·「돈타령」(1934)·「삼수갑산()·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1934) 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율격은 삼음보격을 지닌 7·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또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화자()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을 눈뜨게 하였다.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비가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 생전에 출간한 『진달래꽃』 외에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1939), 하동호()·백순재() 공편의 『못잊을 그사람』(1966)이 있다.

참고문헌

  • 『김소월전집』(김용직,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 『한국현대시인연구』(김재홍, 일지사, 1986)
  • 『시와 상상력의 구조』(김현자, 문학과 지성사, 1982)
  • 『김소월 연구』(신동욱 편, 새문사, 1982)
  • 『꿈으로 오는 한 사람』(오세영 편, 문학세계사, 1981)
  • 『현대시론』(정한모, 민중서관, 1973)
  • 『문학과 인간』(김동리, 백민문화사, 1948)
  • 「임과 집과 길」(유종호, 『세계의 문학』, 1977.봄호)

    [네이버 지식백과] 김소월 [金素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바위에서 잠간의 휴식

*보이는 꽃이 조화인가 했어 만져보니 누군가가 심어놓은 생화네요.

*금정산 숲속 둘레길과 같이 가요.

*석불사 도착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

*일주문 앞에서 석불사를 배경으로 ..

*석불사 일주문의 모습.여기에 전에도 와본 기역이 나네요.

*석불사 경네에서 바라본 정면의 해운대 장산의 모습

*석불사 범종각의 모습

*석불사 대웅전의 모습


 

석불사

[ ]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1동 금정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의 말사.

건립 경위 및 변천

석불사()는 금정산의 다른 사찰과 암자에 비해 창건 역사가 아주 짧은 편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 승려 조일현이 창건했는데, 그가 주지로 있는 동안 이곳 암벽에 석불을 조성하였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조각으로 이어 붙인 듯이 석불이 조성되어 있어 사찰의 이름도 석불사로 칭했으며, 병풍암에다 많은 석불을 새겨 두었다고 하여 일명 ‘병풍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병풍암의 장관 때문에 ‘병풍암 석불사’로 부른다.

현황(조직, 시설 현황 포함)

석불사는 거대한 자연 암석들 사이에 세운 사찰 건물도 그렇고 출입구가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것도 그렇고 여느 사찰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무엇보다 높이가 무려 40m와 20m가량 되는 직벽의 암석을 깎아 여러 불상들을 조각해 놓은 것이 눈길을 끈다. 이들 석불들은 규모도 크지만, 정교하게 새긴 예술성 또한 뛰어난 것으로 평가 받고 있어 현대 불교 미술의 한 면모를 보여 준다.

정면에는 11면 관음보살 입상과 상단에 미륵불 좌상이 있다. 우측 암벽에는 약사여래불상과 사천왕, 좌측 암벽에는 사천왕과 비로자나불상이 새겨져 있으며 그 옆으로 좌측에 팔나한과 석가모니불상, 우측에 팔나한이 있어 모두 29상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석불사의 석불 가운데 미륵불의 정교함은 단연 두드러진다. 이러한 조각 작품들이 모두 이 절을 창건한 승려 조일현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유산이다. 더구나 사찰을 둘러싼 자연 암석에 새긴 것이어서 더 가치가 있다. 금정산에 산재한 여러 사찰과 암자들 중 휴정암과 호국사 등에서도 병풍암 석불처럼 자연 암석에 석불을 조각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석불사는 80여 년의 짧은 연륜을 지닌 작은 규모의 사찰이지만 금정산의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독창적인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석불사

석불사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 금정산에 있는 1930년에 창건한 석불사의 모습이다. 일주문과 대웅전, 범종각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석불사 [石佛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또 한개의 종각이 있네요

*석불사 대웅전옆의 석불사의 대표적인 석가마애불상과 석굴의 모습

*석불사 마애불상군

[ ]

 

석불사는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 금정산 자락에 위치한다. 수려한 자연 경관 속에서 특히 거대한 자연 암석들과 더불어 석재 및 금속 재료를 통해 조성된 석불사는 조용선 선사에 의해 1930년에 창건되었다.

석불사 마애불상군()은 대웅전과 칠성각 위쪽으로 약 20m와 40m 높이의 자연 암석에 스물아홉 구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불상 왼쪽 암벽에 스물 네 구의 불상이, 불상 오른쪽 암벽에 다섯 구의 불상이 확인된다. 불상 왼쪽 암벽에 좁아지는 암벽 위쪽으로 조각된 불상을 Ⅰ군, 앞쪽으로 세 구의 불상을 Ⅱ군으로 구분한다. 불상 오른쪽 역시 좁아지는 암벽의 정면에 두 구의 불상을 Ⅲ군, 앞쪽으로 세 구의 불상을 Ⅳ군으로 나눈다. 신상균이 1950년에 Ⅰ군과 Ⅱ군 중 정면 위쪽에 조각된 불상을 조각하였다. 원덕문이 1950년대에 Ⅲ군을 제작하였다. 권장학이 1950년부터 1960년 사이에 Ⅱ군의 정면 아래쪽에 서 있는 불상과 Ⅳ군의 불상을 제작하였다.

Ⅰ군에는 편단우견()의 형식으로 입고 항마촉지인()을 결한 불좌상이 있다. 그 좌우측으로 보살 입상 두 구, 십육 나한상, 신장상 두 구가 서 있는 것이 확인된다. 나한상은 통견식()과 변형 편단우견 형식으로 입고 얼굴의 표정 및 앉은 자세도 반가좌(), 결가부좌(), 우슬착지() 등으로 다양하여 나한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Ⅱ군에서 정면 상단에 위치한 불상은 오른쪽 어깨를 살짝 걸친 변형 편단우견의 형식으로 입었으며, 오른손은 선정인()을 하고 왼쪽 팔꿈치를 허벅지에 대고 어깨 높이까지 왼손을 올려 보주를 손바닥 위에 두고 있다. 정면 하단의 불상은 십일면 관음보살 입상으로 형식과 양식적 특징이 경주 석굴암 석굴()의 십일면 관음보살상을 계승하고 있다. Ⅰ군과 Ⅱ군 위쪽의 불상은 법의에 드러나는 돋을 주름의 표현과 대좌 형태 등 양식적 표현 등이 같아 조각가가 같음을 쉽게 알 수 있으며, Ⅱ군 하단 불상은 표현하는 기법과 양식적 특징이 Ⅰ군의 불상과 달라 조각가가 다름이 드러난다.

Ⅲ군의 불상은 도상 명칭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데, 앞쪽으로부터 서방 광목천왕(西), 북방 다문천왕(), 비로자나불 입상이다. 일반적으로 서방 광목천왕은 용과 여의주 혹은 뱀과 여의주를, 북방 다문천왕은 탑과 깃발을 지물로 가지며 석불사의 두 사천왕상의 지물도 마찬가지이다. 비로자나불상의 수인()은 지권인()인데 석불사의 것은 약간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Ⅳ군의 불상은 앞쪽으로부터 남방 증장천왕(), 동방 지국천왕(), 약사불 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남방 증장천왕은 검, 동방 지국천왕은 비파, 약사불 입상은 약 합을 지물로 가졌다. 검, 비파, 약 합은 남방·동방 천왕과 약사불이 가지는 일반적인 지물이다. 이외 석불사 마애불상군의 사천왕상 중 유일하게 Ⅱ군 불상에 포함된 서방 광목천왕만 의좌()이다.

지국천왕상은 4.75m, 광목천왕상은 4.45m, 증장천왕상은 4.60m, 다문천왕상은 6.90m, 약사불상은 4.45m, 석가불상은 1.45m, 십육 나한상은 62㎝~83㎝이다.

특징

석불사 마애불상군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불상의 양식적 특징이 현대 불상의 양식에 적절히 녹아들어 조화를 이룬다. 특히 Ⅰ군의 조각과 Ⅱ군의 상단 불상은 연화좌, 얼굴, 옷 주름의 모습 등에서 고려 말기의 불상 양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와 함께 Ⅰ군의 조각상은 도상 구성과 표현이 여러 군상들 중 가장 특징적이다. 일반적으로 편단우견의 항마촉지인 상은 대표적인 석가모니의 도상이다. 그리고 좌우에 조각된 십육 나한상은 본존이 석가모니임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본존을 모시고 좌우에 서 있는 보살상의 보관()에는 아미타불상의 좌우 협시 보살로 등장하는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어 흥미롭다.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일반적으로 보관에 화불과 정병이 나타나 쉽게 판별할 수 있다. Ⅰ군의 본존 좌측 보살의 보관에 화불이 확인되며 우측 보살의 보관에는 정병과 함께 작은 탑이 조각되어 있다. 고려 시대가 되면 대세지의 보관에 정병 대신 탑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Ⅰ군 불상의 전체적인 양식이 고려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석불사 마애불상군의 전체 불상 중 동방 지국천왕과 그 옆에 서 있는 동방 유리광세계()의 주인인 약사불 입상을 중심으로 방위를 보았을 때 Ⅰ군의 본존불의 방위는 서쪽이 되므로 아미타불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석불사 마애불상군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의 불상 조각으로 현대 불교 조각 미술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 작품이다. 특히 고대 삼국 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약사불의 도상 형식, 고려 시대 조각의 양식적 특징, 조선 시대 사천왕상의 형식, 현대에 들어와 새롭게 변용해 본 대세지보살의 보관에 정병과 탑을 함께 조각한 점, 마지막으로 십일면 관음보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양식이 계승된다는 불변의 진리 등이 모두 어우러져 있다. 따라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뛰어난 현대 불교 조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석불사 마애불상군 [石佛寺 磨崖佛像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석굴을 배경으로 산신각에서 내려오는길.

*석불사 방향으로 700m의 가파른 오름길을 왕복 그래도 보람이 있어요.꼭 다

 녀 오세요.길따라 내려 오다가 좌측 산길로 진입.

*요런 한적한 길로 가요.

*여기는 천주교 공동묘지.

*더디어 만덕고개 도착(만덕고개와 빼빼영감 전설)

*만덕2터널 위의 모습

*터널위의 데크길에서...

*산어귀 전망대 올라가는 424계단

*산어귀전망대 도착(여기가 쇠미산 정산360m)

*철학로 (쇠미산) 희망등산로 소개글

*전망대에서 바라본 해운대 장산의 모습

*전망데에서 부산 시가지를 배경으로...

*방금 올라온 전망대 오는길 424계단의 모습

*이런 돌담이 많이 있네요 유래가 궁금하네요.

*울창한 소나무숲 구민의 숲 도착



*솔숲을 배경으로

*이제 하산 합니다.

*디지털 도서관 방향으로 하산


*오늘은 어제 종일 비가오는 데도 벌초한다고 힘을 쓰고나니 힘든 산행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