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

북인도 여행 7일차:델리 관광

문수산 아래 2017. 6. 8. 23:39

*북인도 여행 7일차:바라나시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델리 도착 중식 후 국립

 박물관~후마윤 묘


*델리 국립 박물관.

*박물관의 야외 전시물.

*야외 전시물.

*델리 국립 박물관 입구.

*태양의 신 수리아.

*사라스바티(Saraswati, 산스크리트어: सरस्वती)는 예술, 학문 등을 관장하는 힌두교의 여신이다. 사라스바티란 물(호수)의 소유자라는 뜻으로, 물과 풍요의 여신이라고도 한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 리그 베다에서는 성스러운 강인 사라스바티 강(그 실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의 화신이었다가 흐르는 강이 변하여 흐르는 모든 것(말, 웅변, 지식, 음악 등)의 여신이 되었다. 언어의 신인 바치와 동일시되기도 하는데 산스크리트와 그것을 기록하기 위한 데바나갈리 문자를 창조했다고 한다. 음율과 찬가의 여신 가야트리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사라스바티는 물가 주변에서 주로 그려진다. 그녀는 4개의 팔을 가지고 있으며 한 쌍의 팔에는 염주와 베다 그리고 다른 한 쌍의 팔에는 비나(Vina)라고 불리며 비파와 비슷한 현악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백조나 공작새의 등 또는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백조와 공작은 사라스바티의 탈 것이다.


사라스바티는 힌두교에서 창조의 신인 브라흐마의 아내(배우자신)이다. 신화에 따르면 본래 브라흐마는 자신의 몸의 일부로 사라스바티를 창조했으나 그 지극한 아름다움에 반해 아내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사라스바티는 브라흐마의 구혼을 거부하며 그를 피해다녔다. 브라흐마는 자신에게서 달아나려고만 하는 사라스바티를 언제나 지켜볼 수 있도록 전후좌우 사방에 머리를 달았다. 사라스바티가 그를 피해 하늘로 사라지가 그녀를 보기 위해 다섯번째 머리(이후 시바신에게 목을 베인다)가 생겼고 브라흐마는 그녀에게 '인간과 수라, 아수라 모든 종류의 생명체를 낳자'고 구혼했다. 그의 구혼을 뿌리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라스바티는 브라흐마와 결혼하여 인류의 시조인 마누를 낳았다. 


 사라스바티는 조로아스터교의 아나히타와 기원이 같다고 추정된다. 아나히타에는 하라흐바티・아루드뷔・스라(Harahvatī Arədvī Sūrā)라는 별명이 있는데, 하라흐바티는 언어학적으로 사라스바티를 페르시아어로 발음한 것으로,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인도・이란의 공통시대부터 신앙되어 온 여신이 민족이 분열되면서 둘로 나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1층 박물관 내부의 모습.

*완전체 미이라의 모습.

*조각상 앞에서.

*복을 받을려나.

*이 분이 시바신 입니다.힌두교 삼신 중 파괴를 맡은 신이니다.위 조각은 시

 바 댄싱입니다.이 세상이 더 이상 회복 할수 없을때 시바가 나타나 춤을 춥나 더.그러면 세상의 종말이 된다는 그러한 춤입니다.그러니까 시바 댄싱은 세상

 을 파멸하는 마지막 행위입니다.위 조각은 델리 중앙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로 .시바 댄싱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비쉬누는 세상을 유지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그때 그때를 맞춰

 신분을 바꾸게 되는데 그것이 비쉬누의 아바타입니다.비쉬누의 아바타는

 모두 10가지 입니다.물고기의 화신 마츠야,거북이의 화신 쿠르마,멧돼지의

 화신 바라흐,사자의 화신 나라심하, 난장이 바마나,라마야냐의 라마,도끼를

 든 파라수라마,푸른색의 피리부는 사나이 크리쉬나,붓다,그리고 세상의 끝에

 에 인간을 구원하러 나타날 칼키입니다.현재까지 비쉬누는 모두 아홉번 몸을

 바꾸어 세상을 구했는데 아직 칼키의 모습으로는 나타자지 않았습니다.칼키

 는 세상의 끝에 백마를 타고,큰칼을 들고 나타나 세상의 정의를 구원하고,마

 침내 세상이 순수와 평화로 가득차게 되면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석가모니의 진실 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

*상아로 만든 제단 18~19세기 왕족에 의해 만들어짐

*부처님의 일생을 정교하게 새겨놓은 코끼리 상아입니다.

*아름다운 장신구들.








*부처님상이네요.

*박물관 내부의 시원함으로 휴식중.


*후마 윤 묘입구의 모습.

*웅장한 모습의 묘.

*이사칸 묘의 모습.

*이사 칸 묘, 8각형의 기단위에 8각형으로 축조되어 있습니다.가운데 돔을 올

 린것은 무슬림 양식인것 같지만 후마 윤 묘와는 기본 양식이 다릅니다.아마

 도 이런 형식이 무굴양식 이전의 무슬림 양식이었던 것 같습니다.나중에 보

 게 될 로디 왕조의 무덤을 보면 이와 비슷함을 찾을수 있습니다.물론 제국

 과 술탄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사칸 묘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배치된 묘의 모습.

*크기에 놀라고 정교함에...

무굴(Mughal) 건축양식의 초기 발생 단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후마윤의 무덤은 무굴 건축사에서 이정표 역할을 한다. 제방과 수로가 있는 현존하는 무굴의 정원식 무덤의 전형으로 알려졌다. 후마윤의 무덤은 이중구조를 이루는 돔과 장대한 키오스크(kiosks)로 이루어진 대표적 건축물이다. 이러한 양식은 1세기 후에 완성된 타지마할에서 극치를 이룬다. 이러한 양식의 최초로 규격화된 작품임에도 후마윤의 무덤은 건축학적으로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인도 무굴 제국의 2대 황제인 후마윤의 무덤은 후마윤의 미망인인 비가 베굼(Hajji Begum) 왕비가 후마윤이 죽은 후 14년 뒤인 1569년~1570년에 150만 루피라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건설하였다. 건축가는 미라크 미르자 기야트(Mirak Mirza Ghiyath)이다. 이후 많은 통치자와 그들의 권속들의 무덤이 되었고 현재 150구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이곳을 예부터 무굴 왕조의 공동묘지라고 불렸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무덤은 거대한 정원 한가운데에 있다. 정원은 수로로 연결된 연못들이 있는 차하르바그 양식(char baah, 네 겹)으로 이루어졌다. 정문은 남쪽에 있으며 서쪽에 또 다른 출입구가 있다. 동쪽 벽과 북쪽 벽 중앙 부분에 각각 정자와 목욕탕이 있다. 단독 묘는 높직한 넓은 계단식 기단 위에 놓였으며 사방에 아치형의 작은 묘실이 딸려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4면은 길고 4면은 짧은 불규칙한 팔각형이다. 높이 42.5m의 대리석으로 만든 이중 돔을 무덤 꼭대기에 얹었고 그 옆에는 기둥 측면에 장식을 한 키오스크(chhatris)가 있다. 이들 한가운데는 거대한 둥근 아치 천장으로 덮였고 아치 천장 주변에는 더 작은 아치 천장들이 서로 마주보게 배치되었다. 실내 구조는 따로따로 구분된 아치 천장이 덮고 있는 거대한 팔각형 방으로 갤러리와 통로로 서로 연결되었다. 이 팔각형의 구조는 2층에서 다시 나타난다.

내부는 장식한 돌로 만들었으며 대리석 가장자리에 흑백 무늬를 새겨 넣은 적색의 사암을 입혔다. 구내에는 이 밖에도 후마윤의 무덤 남동쪽에 세련된 정사각형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1590년〜1591년에 만들어진 ‘이발사의 무덤(Barber’s Tomb)’으로 알려졌다. 무덤과 주변 구조물은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근대의 손길을 최소로 받아 최고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무굴 건축의 발달사에서 후마윤의 무덤이 지니는 중요성은 실로 크다. 후마윤의 무덤은 장기간에 조성된 최초의 왕의 무덤이며 여러 면에서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정원식 무덤을 인도 아대륙에 전파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후마윤은 이슬람 세계로 폭넓은 여행을 했으며, 특히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를 다녀온 후 자신의 무덤에 건축예술을 도입할 생각을 품었다. 결국 미망인의 지시에 따라 이 무덤에 후마윤의 생각을 적용하였다. 후마윤의 무덤은 역사적으로도 가치를 존중받았으며, 그 덕분에 원래 상태대로 온전히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특성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올드 델리의 도시 풍경은 잃어버린 무굴 제국의 과거로 정의된다. 이곳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슬람 인도의 수도였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유산은 그 건축물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거대한 붉은 요새와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 모스크가 비좁은 미로 같은 거리 속에서 공간감과 아름다움을 창조해낸다. 올드델리의 골목과 길고 좁은 계곡은 교통 정체와 사원, 모스크, 거지, 시장으로 분주하다. 그리고 뉴델리의 넓고 잘 구획된 대로들은 영국인들이 목적에 맞게 건설했으며, 오늘날에는 현대 인도의 행정 중심으로 쓰이고 있다. 뉴델리는 구시가지의 폐소공포증에서 빠져나온 뒤끝의 안도감으로 다가오지만, 올드델리의 로맨틱한 요새 따위는 없다. 대신 후마윤의 묘가 있다.

무굴제국의 2대 황제 후마윤의 페르시아인 부인으로 이곳에 묻힌 하지 베굼이 1570년에 건설한 이 묘는 무굴제국 초기 건축의 아름다운 예이자 그 디자인 요소들을 보여준다. 야트막한 건물, 높은 아치의 출입문, 둥글납작한 돔, 그리고 산책을 하기에 완벽한 정형 정원은 훗날 아그라에 있는 웅장한 타지마할의 견본으로 쓰였다. 이발사 역시 페르시아풍 정원에 함께 묻힌 걸 보면, 후마윤은 자기 이발사를 상당히 좋아했나 보다. 묘를 돌아본 뒤에는 정형 정원을 거닐며 잘 정돈된 녹색의 잔디밭과 복원해 놓은 분수를 구경하자. 조심스러운 인도인 연인들이 나무 아래에서 살며시 손을 잡고 걷는다. 인도멀구슬나무, 타마린드나무, 아르주나 나무가 널찍한 그늘을 만들어 주며, 오후의 낮잠을 즐기기에 완벽한 장소가 되어 준다



*묘를 배경으로....

*타지마할과 비슷하네요.

*묘 주변에는 나무들로 시원함을 느끼게 하네요.

*묘로 들어오는 입구의 모습.

*묘 2층에서.

*같은 장소에서.

*묘 내부의 모습.

*격자창의 모습.

인도 뉴델리의 남쪽 3.2km에 있는 이슬람 건축. 무갈조 제2대 왕 후마윤(재위 1530~56)의 묘묘()로서, 1565년에 완성했다. 페르시아인 미라크 미르자 기야스의 설계로 된 전형적인 이란 양식의 건축이다. 첨두() 아치의 회랑을 갖는 대() 위에 묘묘의 중핵건물이 있고 네귀가 없는 방형평면. 내부는 각 면을 3분하여 9실로 나누고 그것을 각각 낭()으로 연결하는 복잡한 구성을 보이며, 후의 타지 마할 묘에도 영향을 주었다. 중앙 상부에 높이 솟아있는 대돔은 지붕과 천정과의 이중구조를 쓰며, 무갈조의 이란풍 건축의 선구가 되고 있다. 돔이나 아치의 곡선과 윤곽의 직선이 자아내는 간단명료한 배합, 또한 균제()가 취해진 배열, 적사암()에 백대리석을 상감()한 배색()은 지극히 훌륭하다.



*잠시 휴식을 무지 더워요.

*나무에는 노랑 꽃으로....

*엄청 큰 나무를 안아봅니다.

*하늘을 향하여...

*열심이 뛰어 봅니다.

*이번에는 성공 하늘로...

*후마 윤 묘를 뒤로하고 ....

*델리 시내의 소형차량의 10대중 3~4대는 으리나라 현대 차량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