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

북인도 여행 8일차(델리 여행)

문수산 아래 2017. 6. 10. 23:02

*일정 :2017년05월 06일(토) 맑은.30~37도

*코스 : 인디아게이터~라지가트~꾸뜹미나르~바하이 사원

*북인도 여행 7박9일 마지막 일정의 날이 밝았네요.

 연일 한낮에는 폭염으로 매일 더위와 싸워 왔는데 그래도 일정의 끝에서 무

 사히 아무 사고없이 마무리 할수 있었어 다행이였습니다.



*델리 최고의 볼거리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터키 궁정의

 노예였던 꾸뜹 웃딘 에이백이 터키의 도움을 받아 델리를 중심으로 인도 중

 부를 정복한 후 이슬람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승전탑과 인도 최초로 이슬

 람 사원을 세운 곳이다.

*이번의 여행의 말미에 여성 분들의 기념 단체 사진.


요약

12세기 말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의 술탄 꾸뜹우드딘 에이백(Qutab-ud-din Aybak)이 델리 정복을 기념하여 세운 거대한 승전탑이다.

꾸뜹미나르 유적군

인도의 델리 남부에 위치한 꾸뜹미나르는 술탄 꾸뜹우드딘 에이백이 세운 탑이라는 뜻으로 미나르는 탑이라는 의미다. 원래는 이슬람 사원과 다양한 건축물이 함께 있던 거대한 유적군이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파괴되고 흔적만이 남아 있으며 장례용 건물과 인도·이슬람 건축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알라이 다르와자(Alai-Darwaza)문, 북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 등의 유적이 거대한 승전탑을 둘러싸고 있다.

높이 72.5m인 5층의 거대한 탑은
술탄 꾸뜹이 1193년 델리의 마지막 힌두 왕국을 정복한 기념으로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세운 승전탑으로 사암과 대리석으로 각 층의 색이 구별되어 있고 1층은 힌두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2·3층은 이슬람 양식으로 지어져 독특함과 아름다운 조각이 인상적인 탑이다. 각 층마다 발코니가 있고 좁은 380여 개의 계단이 있다. 과거에는 탑의 내부 관람이 가능했으나 1979년 단체여행을 온 학생들이 사고로 사망하면서 현재 탑의 내부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델리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아름답게 가꾸어진 정원.

*돌담으로 된 문을 통과 하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인도 최대 미나르. 뉴델리에서 남쪽 교외로 약 15km 떨어진 넓은 평야에 우뚝 솟아 있는 탑이다. 현재까지 델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12세기 유적군이자 델리 최고의 볼거리로 꼽힌다. 꾸뜹미나르 유적군은 노예왕조의 술탄이었던 꾸뜹 웃딘 에이백(Qutab-ud-din Aibak)이 힌두교도에 대항해 이슬람 세력의 승전을 기념하며 세웠다. 본래 이곳에 있었던 힌두교와 자인교 사원을 파괴한 뒤 세운 이슬람 사원과 첨탑 등이 남아 있다. 여러 명의 왕이 100여 년에 걸쳐 건설하고, 첨탑 공사 기간 동안 이슬람 사원을 중심으로 부속 시설이 하나씩 늘어났다.

인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꾸뜹미나르는 웅장하고도 독특한 건축 양식이 압권이다. 높이 72.5m, 지름 15m의 원통형 탑은 1층부터 3층까지 사암, 4층과 5층은 대리석과 사암으로 지어졌다. 1층은 힌두 양식, 2층과 3층은 이슬람 양식으로 설계된 이 미나르는 힌두와 이슬람 양식의 융합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미나르의 외벽에는 코란의 구절들이 새겨져 있다. 내부에는 층마다 델리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발코니가 있고, 나선형 계단 379개가 정상으로 이어지는데 현재는 2층까지만 올라가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정상까지 공개되었으나 통로가 좁은 탓에 1979년 단체여행을 온 학생들의 압사사고가 발생한 이후 출입이 통제되었다.

1192년 인도에 세워진 최초의 모스크로 알려진 쿠와트울 이슬람 사원(Quwwat-ul-Islam Mosque) 앞에 서 있는 높이 7.2m의 쇠기둥도 볼만하다. 4세기 굽타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녹슬지 않아, 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은 유적이다. 또한 당시 기술로 순도 99%의 쇠기둥을 어떻게 제작했는지도 불가사의다. 이 쇠기둥에 얽힌 전설도 흥미롭다. 기둥에 등을 대고 양팔을 뒤로 젖혀 손가락으로 깍지를 낄 수 있는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온다고 한다. 지금은 기둥을 둘러싸고 울타리가 세워져 아무도 시도해 보지 못하고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 기둥에는 산스크리트어로 이곳이 “굽타 왕국의 비슈누 사원 정원”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밖에도 꾸뜹미나르의 부지 내에는 볼만한 유적들이 여럿 있다. 약 27m 높이의 미완성 탑인 알라이 미나르(Alai Minar), 쿠와트울 이슬람 사원에서 봉사했던 성자를 추모하며 1537년 지어진 이만 자민의 무덤(Tomb of Iman Zamin), 꾸뜹미나르의 아치형 정문에 해당하는 알라이 다르와자(Alai Darwaza), 알라 웃딘의 학교(Ala-ud-din’s Madrasa), 꾸뜹미나르의 2층과 3층을 건설한 왕인 일투미시의 무덤(Tomb of Illtutmish) 등이 자리한다.




*건물 주변에는 정원도 이쁘게....

*탑을 배경으로....

*탑의 높이 72.5m.1층 지름 15m 의 승전탑 - 꾸뜹미나르.

*인도인들도 여기에서 웨딩 촬영을 많이 한다네요.

*정원에 세원진 지금의 정자와 비슷한 역활을 하는 곳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의 모습.

*지금은 많은 건물이 사라 졌지만 웅장한 모습이 상상으로 ....

*신비의 쇠기둥이 있는 쿠와트 알 이슬람 사원의 안뜰로 통하는 문도 대단한

 규모여서 출입구 높이가 20m나 되었다.

*이슬람의 힘 이라는 뜻이 담긴 인도 최초의 이슬람 사원 "쿠와트 알 이슬람"

*힌두교에 대한 이슬람교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이 탑은 원래 4층

 짜리 건물이였지만 1326년 투글라크 왕조 때 5층으로 개축하면서 지붕에 돔

 도 씌워졌는데 1829년 지진으로 무너졌다고 한다.

*아쉽게도 일부의 건물과 벽면이 허물어지고 있어 안타갑네요.

*이후 영국의 잭 스미스 대령이 무글 양식의 새로운 돔을 얹었으나 탑 모양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거 했다고 하며,1982년 이전에는 일반에게 공

 개되어 탑 정상까지 오를수 있었으나 좁은 통로 때문에 사고가 빈번하여 막

 아놓았다고 한다.

*탑의 전면을 배경으로...

*흔적을 남기며...

*정복자 꾸뜹 웃딘 에이백은 당시 27개에 달하던 힌두 사원을 파괴하여 그 사

 원들을 받치고 있던 기둥들을 재활용하여 이슬람 사원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

 래서인지 건물들에서 힌두 사원의 흔적을 느낄수 있다.

*이슬람 사원의 북서쪽에 있는 벽돌로 쌓아올린 지름 25m의 또 하나의 승전

 탑- 알라이 미나르(탑) 이것은 탑이라고 할수 없은 형상인데 건설을 계획했

 던 알라 웃딘이 고작 1층만 완공시키고 암살 되었기 때문이다.

 꾸뜹 미나르의 1층 지름이 15m이니 이 탑의 전체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 규

 모였는지 짐작이 간다.

*기둥을 배경으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외

연꽃사원

[Lotus Temple ]

연꽃사원 대표 이미지

제작시기1986년
건축가파리보즈 사바
위치인도 델리
양식표현주의
재료콘크리트, 대리석

은유적으로 인생의 진창에서도 떠오르고 해방에서 피어나는 순수함의 상징. 바로 연꽃이 그 영겁의 세월 동안 인도에서 문화적 종교적 변화 속에서도 중요하게 받아들여져 온 이유이다. 건축가 파리보즈 사바(1948년생)는 델리의 바하이교 사원 설계에 믿음을 상징하는 이 상징적인 추상 형태를 사용했다. 무작위적으로 대지를 사용하고, 중세적이고 근대적인 운송 방법이 공존함으로 인해 혼란스러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완성된 이 바하이 사원의 웅장함과 우아한 단순함은 마치 힘든 세속적인 세계를 떠나길 바라는 구원의 탄식과도 같다.

전체 27개 꽃잎으로 이뤄진 9면 연꽃의 형태를 한 사원은 10헥타르의 불규칙한 대지 위에 세워졌다. 9면의 기단이 물 위에 세워져 있어, 마치 사원이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환영을 일으킨다. 각 꽃잎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그 위에 백색의 그리스 대리석을 덧입혔다. 꽃잎 부분의 다양한 곡선 때문에, 대리석 조각이 먼저 각각의 방향과 모양에 따라 입혀진 뒤, 각 위치에 조립되었다. 34미터 높이의 사원은 상부 구조물이 전체적으로 빛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가장 중심부의 꽃잎은 봉오리를 형성하는데, 봉오리 끝의 공간을 통해 빛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그 뒤에 연이어 겹쳐지는 꽃잎은 이 봉오리를 보강한다. 모든 숭배자들을 위한 명상의 피난처인 연꽃사원은 신성함의 아우라를 풍기며 도시의 혼란스러움 한복판에 세워졌다. 게다가 이는 현대 신앙의 구조물에 고대 모티브의 변형을 잘 표현한 성공적인 아이콘으로 평가받고 있다. 재즈 음악가인 디지 지레스파이는 이 사원을 본 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이것은 신의 창조물이다."라는 감탄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연꽃사원
연꽃사원



*최근에 조성된 사원이라 그런지 현댁식 정원의 냄새가 난다.냄

*사원 들어가는 양 옆으로 조성된 정원의 모습.

*일부는 개방을 하지 않았네요.

*바하이 사원을 볼려고 하는 사람ㄷ들이 많다.

 이란 출신의 건축가 파리부즈 사바의 설계로 1986년에 완공되었다.햐얀대리

 석으로 27개의 연꽃잎을 표현한 35m의 반쯤 핀 모습을 형상화 한다.

 가장 중심부의 꽃잎은 봉오리를 형성하여 끝의 공간을 통해 빛이 잘 들어 올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모든 종교가 신성한 근원에서 하나이고 인류는 한 겨

 레이며 지구는 한 나라 라는 바햐울라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종교이다.

*사원에 들어 갈려면 신발을 벋어 들고 가야 한다.

*연꽃사원의 사면을 물로 채워져 있다.

*연꽃 사원의 입구 모습.


*

라지가트는 1948년 1월 30일에 극우파 힌두 청년에게 암살당한 간디의 유해를 화장한 곳으로, 잔디밭 중앙에는 검은 대리석의 네모난 대좌가 있으며, 그 중앙에는 간디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인 ‘오 신이여!’가 새겨 있다.

간디 기념 박물관은 간디에 관한 자료, 유품, 사진, 도서가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최후의 순간에 입고 있던 검소한 의복이 진한 감동을 준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네루 집안의 3대(네루, 산자이 간디, 인드라 간디)의 화장터인 샨티바나가 있으며, 더 북쪽으로는 제2대 수상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의 화장터인 비자이가트가 있다.


*라지가트의 입구는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다. 입구를 지나 잘 정리된 잔디를 지나 10분정도 걸어가면,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의 화장터가 나온다. 1948년 1월30일에 극우파 힌두 청년에게 암살당한 간디의 유해를 화장한 곳으로 중앙에는 검은색 대리석에 그 중앙에는 간디가 남긴 마지막말이라는 '헤이 람(오 신이여!)'가 새겨져 있다. 그 앞에는 향을 놓을수있는 단을 마련해 놓고있다. 관광객은 들어갈 수 없다.
간디 기념 박물관은 인도 건국의 아버지인 간디에 관한 자료, 유품, 사진, 도서가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항상 민중에 둘러싸여 있는 때로는 고독하고, 고뇌하는 간디의 표정이 인상적이며, 최후의 순간에 입고 있던 검소한 의복이 진한 감동을 준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네루 집안의 3대(네루, 산자이 간디, 인드라 간디)의 화장터인 샨티바나가 있으며 더 북쪽으로는 제 2대 수상의 화장터인 비자이가트가 있다.


*

인물



마하트마 간디 (Mohandas K. Gandhi) 정치인
생몰
1869년 10월 2일 (인도) ~ 1948년 1월 30일 (향년 78세)
학력
런던 대학교
경력
1947 힌두, 이슬람 융화 활동  외 2건




 *

생애 초기[편집]

간디는 인도 서부의 사우라슈트라 주의 항구도시 포르반다르의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부모에게서 인도의 전통종교중 하나인 자이나교의 교육을 받으며,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수상으로 부임한 라지코트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배움은 없었으나 아들의 말을 믿어주고 배려하는 분이었으며, 어머니는 힌두교교리전통을 성실하게 지키는 신실한 힌두교 신자였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간디에게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한 성격과 성실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청년기[편집]

결혼[편집]

1902년의 간디와 그의 아내 카스투르바 간디.

7살 때 이미 그는 약혼을 했었지만 약혼녀들이 모두 차례로 죽어, 세 번째 약혼녀인 상인 집안의 딸인 카스투르바이 마칸지와 13세에 결혼한다. 간디는 아내와 잠자리를 가지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 사건 때문에 그는 깊이 반성하고 금욕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된다.[1] 그 뒤 방탕한 생활을 버리고 힌두교의 교리를 충실히 지키며 성욕을 자제하기도 했다. 그는 정액은 생명력의 근원이고 정액의 배출은 머리를 약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뒤로 일생 동안 수많은 여성의 사랑을 받고 그들을 가까이 두었음에도 직접적인 성행위나 사정은 자제하였다 한다.[2] 그는 보어 전쟁아프리카 전쟁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고 영국군에 지원했으나 참전하기 며칠 전 결핵에 의한 염증에 걸려서 포기해야만 했다.

영국유학[편집]

1887년 인도 사밀러스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 아버지 친구의 권유로 영국 유학을 결심하였는데, 당시 힌두교에서는 그의 유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온 청년들이 서방의 자유로운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힌두교 전통을 무시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힌두교 원로지도자들은 간디를 배웅하면 벌금을 물리기로 결의할 정도로 격렬하게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3년간의 영국유학생 시절 간디는 공부에 열중했으며, 개인적인 도덕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인도와는 다른 런던의 도시생활과 음식, 예절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힌두교 전통에 따라 채식을 고집하여, 멀리 떨어진 채식식당까지 가서 밥을 먹을 만큼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채식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알려주는 책과 식당을 알게 되었으며, 런던 채식주의협회 집행위원이 되었다.[3] 그는 어린시절 영국처럼 강해지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한 친구의 말에 감화되어 고기를 먹은 적도 있었지만, 힌두교 신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간디는 영국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University College London: UCL) 에 입학, 법학을 공부하여 1891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독립운동[편집]

네루와 간디

그 뒤 남아프리카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귀국 전 이미 별세한 뒤였다. 인도 라지코트와 봄베이에서 변호사생활을 시작했지만 법정에서 말 한 마디 못하고 물러날 정도로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간디는 1년간의 계약으로 남아프리카인도계 상사에서 근무하였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생활은 간디가 백인들에게 교통시설 이용, 취업 등에서 차별당하는 동족들을 보면서 독립운동을 다짐하게 했다.

1893년 남아프리카의 나탈에 부임하여,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인도인들이 받고 있는 차별 대우를 깊이 체험하여 인종 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만들었다. 또한 톨스토이 주의에 의거한 '비폭력 투쟁'의 단서를 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트란스발 정부가 인도인 이민 제한을 위해 부과한 지문 등록을 거부하는 운동을 일으키다가 여러 번 투옥되었으나, 마침내 철회에 성공하였다.

남아프리카프리토리아에서 살던 시절 간디는 동포들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찾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1894년 6월, 1년 계약이 끝나고 환송잔치 자리에서 우연히 나탈 의회가 인도인의 선거권 박탈을 입법화하려 한다는 신문기사를 읽게 됐다.[3]

1894년 7월 정치운동가로 변신한 그는 나탈 지방의회와 영국 정부에 보낼 탄원서를 작성하고 수백 명의 서명을 받았다. 인도인 차별법의 입법은 막는 것에는 실패하였으나 나탈·영국·인도에까지 나탈 인도인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홍보하는 데 성공했다. 1894년 더반에 머무르기로 결심한 그는 '나탈 인도국민회의'를 창설하고 인도인의 단결심을 고취시켰다. 또한 인도인에 대한 차별대우의 실상을 국제사회의 여론에 널리 알렸다.[3]

제1차 대전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노동 운동, 민족 해방 독립 운동의 지도에 전념하였다. 1915년 이후 1918년까지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기는 했지만 정치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했던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1919년 반영운동을 하면 체포영장 발부 등의 적법한 절차없이 무조건 잡아갈 수 있는 즉, 반영운동을 이전보다 더욱 가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롤래트 법이 제정되자 그는 영국의 지배에 다시 반기를 들고 "빵을 구하는 데 돌을 준다"고 항의하면서 전 인도인에게 영국 상품의 불매·납세 거부·공직 사퇴 등 영국에 대해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 1919년 봄 그는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선언하고 봉기가 발생했지만 400명의 인도인이 영국군의 무자비한 발포로 학살당하면서 운동은 잠시 주춤하기도 했다.[3]

1922년 체포되었으나 병으로 출옥하였으며, 1925년 국민 회의파 의장이 되었다. 1942년 영국에 대하여 인도 철퇴의 요구, 불복종 운동을 일으키다 투옥되었다. 석방된 후에도 인도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델리에서 인도와 파키스탄과의 융화에 전력하였다.

독립 이후[편집]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드디어 영국에게서 독립을 했으나, 이슬람교도는 파키스탄으로, 힌두교도는 인도로 가는 민족분열이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종교갈등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하자, 간디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일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은 극단적 보수파 힌두교 신도들에게는 이슬람교도를 편드는 것처럼 보였으며, 결국 1948년 1월 30일뉴델리에서 열린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반이슬람 힌두교 급진주의 무장 단체인 라시트리야 세와크 상가나투람 고드세에게 을 맞아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는 79세였다.

1930년 그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4] 간디는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자에 4번이나 올랐으나 끝내 수상하지 못하였다.[5]




요약 인도의 정치가, 민족주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 서벵골 구자라트 주의 작은 나라 포르반다르의 총리였던 카람찬드 간디와 그의 네 번째 부인 푸틀리바이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런던 대학에서 법률을 배웠고 남아프리카 원주민의 자유 획득을 위하여 활동했다. 1914년에 인도로 돌아와 무저항·불복종·비폭력·비협력주의를 원칙으로 영국에 대한 독립 운동을 지도하였다. 1920~22년, 1930~34년, 1940~42년에 그가 펼친 3번의 운동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전후에 인도가 독립할 수 있는 한 요소가 되었다. 1946~47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유혈 충돌이 계속 일어나고, 47년 8월에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이 결정되자 간디는 양족의 비난을 무릅쓰고 두 종교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여 단식에 들어갔다. 간디의 단식으로 폭동이 가라앉고 휴전이 이루어졌으나 불과 며칠 뒤 간디는 힌두교 광신자에게 암살당했다.



*간디 박물관 울타리에는 원숭이들이...

 우리는 박물관에 휴관이라.....

*델리 중심가의 모습.

*여기가 인도 최고의 거리 중심가 대통령 궁과 중요 건물이 여기에....

*인도 행정의 중심가...

*로타리의 분수.



*인디아 게이트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뭄바이의 건축물에 대해서는 인도문 (뭄바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인도문

인도문(印度門, 힌디어: इंडिया गेट, 영어: India Gate)은 인도 델리의 기념물이다. 파리개선문을 바탕으로 에드윈 루티언스에 의해 설계된 문 모양의 기념비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영국인도 제국의 군인 약 8만 5천명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높이 42m의 아치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인도 병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인도 뉴델리의 중앙 교차로에 서 있는 전승기념물. 무장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이곳은 영국 식민 시절, 영국의 독립 약속을 믿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인도 군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위령탑이다. 뉴델리 설계를 주도한 영국인 건축가 에드윈 루티엔스(Edwin Lutyens) 경이 설계를 맡아 1921년에 착공하고 10년 만에 완성되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과 비슷한 웅장한 건축물이며 오늘날 뉴델리의 상징물이다. 

높이가 무려 42m에 달하는 인디아 게이트의 아치에는 영국군의 말단 병사로 전쟁터에 나가 전사한 9만여 명의 병사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72년에는 인도 독립 25주년을 기념하며 아치 아래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불멸의 불(Amar Jawan Jyoti)’이 점화되었다. 밤에는 인디아 게이트에 은은한 조명을 밝혀 건축물이 더욱 돋보인다. 

인디아 게이트 바로 뒤편에는 아치형 불꽃 모양의 조형물이 하나 더 있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희생된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인디아 게이트를 방문할 때 함께 둘러볼 만하다. 인디아 게이트 주변에 조성된 넓은 공원은 델리 시민들의 가족 나들이 장소로 인기가 높다. 특히 여름철에는 열대야를 피해 이곳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며 인디아 게이트의 아름다운 야경을 즐기는 인파로 붐빈다. 

인디아 게이트 일대는 뉴델리의 중심지다. 인근에는 대통령 관저(Rashtrapati Bhavan), 국회의사당, 정부청사 등 국가의 상징적인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인도 공화국 창건일에는 인디아 게이트를 지나는 라즈 파트(Raj Path) 대로를 따라 각종 퍼레이드가 펼쳐지기도 한다

*저녁이라 그런지 많은 시민들이 찾은 장소네요.

*인도 여행의 마지막을 인도 개선문에서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