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

장강삼협 크루즈 여행3일째

문수산 아래 2016. 10. 23. 18:21

*날  짜 : 2016년 03월 28일 .맑음.15~20도.

*일  정 : 백제성~구당협~무협~신녀계~삼협댐통과

*센츄리 레전드 크루즈 선승 후 3일째 아침을 맞아 선상에서 아침을 먹고

 오늘의 일정을 시작 합니다.



*장강 삼협중 멋진 구당협 입구와 기문등 많은 문화 유적들은 많은 시인들의

 관심을 끌었다.이태백,두보,백거이,육유,유우석,등의 유명한 시인들은 이곳

 에서 많은 시를 남겼고,그 중 두보는 1년3개월 동안 머물면서 일생동안의 3

 분의 1에 해당하는 시를 이 곳에서 남겼다한다.

 이 때문에 백재성이 위치한 봉절현은 시성이라고 불리운다.

*백재성으로 들어 갈려면 이 나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삼협댐이 생기기 전에는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다해요.

*다리를 건너 가면서 바라본 양쯔강의 모습.

*백재성이 보이네요.


 

공손술(公孫述)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촉왕(蜀王)이라고 칭하면서 우선 성도(成都)를 도읍으로 삼았다가 후에 봉절(奉節 당시엔 어복현(魚腹縣)이었음)로 옮겼습니다.

궁전 앞에는 샘이 하나 있었는데 항상 샘에서 하얀 김이 하늘로 올라가곤 하여 좋은 길조라고 생각하여 백제(白帝)라고 바꿔 부르게 했습니다 백제성이란 이름을 얻게 된 배경 이야기입니다


*삼국 시대 촉나라의 정치가. 자는 공명으로 흔히 제갈공명이라고도 불린다.
유비의 책사로 탁월한 지략을 이용해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크게 물리치고 형주를 차지했다.
221년 촉한이 건국된 후 승상이 되었으며, 유비 사후 여러 차례 위나라 정벌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전설이 된 책략가

제갈량은 낭야군(瑯邪郡) 양도현(陽都縣) 출신으로, 촉한 유비의 책사로 활약해 유비가 촉의 황제가 되자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다. 유비가 천하 통일의 대과업을 이룩하지 못했으므로 그 또한 통일 중국의 재상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비와 촉에 대한 충의를 지키고 당당한 패자의 길을 선택했기에 중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제갈량


제갈량의 자는 공명(孔明)으로 낭야군의 하급 지방관이던 제갈규(諸葛珪)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양친을 잃은 제갈량은 예장(豫章) 태수인 숙부 제갈현(諸葛玄) 아래에서 자랐다. 제갈현이 옛 친구인 형주 자사 유표에게 의탁할 때 그도 숙부를 따라 함께 갔다. 197년 서성 백성들의 반란으로 제갈현이 죽자, 제갈량은 형주 양양 근처의 융중산(隆中山)에 초가집을 짓고 살면서 농사와 독서를 하며 지냈다.

제갈량은 27세 때 황승언의 딸 황아추를 아내로 맞이했다. 황승언은 면남의 명사이자 유표와 함께 형주 최대의 가문인 채씨 가문의 친척이었다. 아내로 맞이한 황아추는 재능은 뛰어났지만 못생기기로 유명했다. 때문에 제갈량이 추녀인 황아추를 아내로 삼은 것은 그녀의 아버지 황승언을 염두에 두고 혼인을 이용하여 관직의 연줄을 얻으려 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출신, 가문, 계급을 따지는 풍조가 만연하던 당시 천하를 구하고 공적을 세우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그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실제로 제갈량은 황승언의 사위가 된 후 형주의 세력가와 명사로부터 관심을 받게 되었으며 평판도 높아졌다.

또한 당시의 양양은 형주의 정치·문화적 중심이었던 곳으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제갈량은 그곳에서 석도(石韜), 서서(徐庶), 맹건(孟建)과 같은 명사들을 사귀고 학문을 교류했다. 형주에서의 제갈량은 방덕이 그를 ‘와룡(臥龍)’이라고 표현했던 시기로, 그는 이 시절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듯이 보였으나 실상 명성을 쌓고 시대의 변화를 읽으며 때를 기다렸다.

제갈량의 출사는 207년 유비를 만나면서 이루어졌다. 조조에게 패해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던 유비는 한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인재를 모으고 있었다. 서서의 추천에 따라 처지가 절박했던 유비는 제갈량을 직접 찾아 나섰다. 유비는 제갈량의 초가를 친히 세 번이나 방문했는데 두 번은 만나지도 못하고 세 번째에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삼고초려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가 군사로 맞이했다는 일화에서 나온 고사성어로, 인재를 진심으로 예를 갖추어 맞이하는 것을 비유할 때 쓰인다.


제갈량은 유비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관측한 정세를 피력하고 중원을 차지할 계책을 내놓았다. “북으로는 조조가 굳건하여 그와 더불어 싸울 수 없으며, 남으로는 손권이 강동을 3대째 지배하고 있어 백성들은 그에게 의지하고 현명한 사람은 이미 그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를 도울 수는 있어도 도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형주의 유표와 익주의 유장은 백성을 보살피는 역량이 부족하고 서툴러 그들의 안위를 지켜 주지 못할 것이 분명하오니 먼저 형주와 익주를 취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십시오. 그 후 동쪽으로는 손권과 연합하여 북쪽의 조조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로, 그는 더 나아가 근거지를 탄탄히 해 국력을 키운 다음 위나라에 난이 일어났을 때 공격하여 난을 평정하면 천하 통일의 과업을 이룩하여 한 황실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비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었으며 제갈량 또한 그를 성심으로 보좌할 것을 다짐했다.

융중대

제갈량이 유비에게 정치, 군사상의 천하삼분지계를 설명한 글.


208년 원소를 정벌한 조조는 형주와 동오(東吳)를 취하고자 기세등등하게 남하했다. 이때 형주 자사 유표가 죽고, 아들 유종이 조조의 대군이 두려워 바로 항복해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괴멸의 위기에 몰린 유비는 제갈량을 오나라에 파견했다. 제갈량은 형주가 조조의 손에 넘어가면 오나라도 조조의 압력을 받아 결국 형주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며, 손권과 유비가 연합하여 조조의 대군을 물리쳐야만 서로가 살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손권을 설득했다. 결국 손권은 주유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다.

하구에서 유비의 군사와 합류한 주유는 조조의 수군과 긴 대치 끝에 208년 말 적벽에서 화공으로 조조군을 크게 격퇴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일화처럼 제갈량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손권과 유비 연합군에게 유리한 동남풍이 불게 한 일은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제갈량의 활약으로 손권과의 동맹이 성사되고, 적벽대전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적벽대전의 승리로 유비는 형주를 취해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유비는 제갈량의 천하 통일 전략의 기초가 되는 삼국 정립의 기틀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214년 익주까지 취한 유비는 221년 촉한을 건국하고 제갈량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2년 후 유비는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얻은 병이 깊어져 숨을 거두었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과 뒷일을 부탁하며, 만약 유선이 촉한을 다스리기에 부족하다면 그 자리를 취해도 좋다는 유언을 남겼다. 제갈량은 유비의 유언에도 유선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당시 촉한의 불안정한 대내외적 상황을 수습하는 데 착수했다. 내적으로는 후주(後主) 유선을 보좌할 뜻을 확실히 표명하고 백성들이 생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으며 군대를 정비하는 한편 인재를 등용했다. 또한 법을 집행함에 있어 공정함을 잃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일이 없게 했다. 한편 외적으로는 형주 소유권 문제로 깨진 오나라와의 동맹 관계를 회복시켜 위나라를 경계했으며, 남쪽 지역의 이민족을 평정하여 후방을 안정시켰다.

225년 제갈량은 후방의 불안 요소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남정(南征)에 나섰다. 유비가 죽은 후 남쪽에서 옹개(雍闓), 고정(高定), 주포(朱褒) 등이 모반을 일으켰고, 이에 제갈량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반란을 평정했다. 이때 옹개를 대신하여 왕이 된 맹획(孟獲)을 일곱 번 생포했으나 일곱 번 풀어주고 화친을 맺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맹획은 이 ‘칠종칠금(七縱七擒)’ 후 진심으로 제갈량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제갈량의 남정은 단순히 반란을 평정하는 것이 아니라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준비 단계이기도 했다.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배후를 튼튼히 할 필요가 있는데다 남정으로 풍부한 노동력과 재력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이에 더해 남정에서의 승리는 저하되어 있던 군대의 사기를 상승시켰다.

227년 제갈량은 북쪽의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렸다. 이는 천하 통일에 대한 오랜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자 촉한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제갈량의 1차 북벌은 228년 봄에 이루어졌다. 제갈량이 먼저 기산을 점령하자 위나라의 남안(南案), 천수(天水), 안정(安定)은 곧 항복했다. 그러나 가정(街亭)에서 마속(馬謖)이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그릇된 군사행동을 하여 촉한군은 위나라군에게 대패했다. 제갈량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자신이 중용했던 마속을 목 베고 스스로 벼슬을 낮추는 등 1차 북벌을 실패로 마무리했다.

228년 겨울 군을 재정비한 제갈량은 유선에게 다시 출사표를 올리고 2차 북벌에 올랐다. 그는 진창(陳昌)을 포위했지만 위나라 장수 학소의 격렬한 저항으로 20여 일이 지나도록 점령하지 못했다. 그동안 위나라의 지원군이 합류하고, 군량 보급로가 끊겨 결국 제갈량은 철수를 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제갈량은 229년 촉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무도와 음평을 공격했으나 역시 대패했다.

231년 봄 제갈량은 북벌의 실패 원인을 물자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 데 있다고 생각하고 농서 지방에서 보리를 재배, 수확해 군량을 확보했다. 그러나 위나라는 전투를 장기전으로 이끌었고 결국 제갈량은 한중으로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네 차례에 걸친 북벌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북벌 실패 후 제갈량은 3년간 국력을 키워 30만 대군을 양성했다. 드디어 234년 봄 5차 북벌이 시작되었다. 제갈량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오장원에 진을 치고 위나라와 대치했다. 그러나 천운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제갈량은 위나라와 대치한 지 100여 일도 지나지 않아 병에 걸리고 말았다. 234년 8월 제갈량은 천하 통일의 뜻을 뒤로한 채 군영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이후 촉한은 더 이상 북벌을 시도하지 않았고 끝내 위나라에 멸망당했다.

제갈량의 뛰어난 재능과 반복된 노력에도 그의 북벌이 성공하지 못한 데는 다양한 이유들이 제시된다. 대표적으로 촉한과 위나라의 현격한 국력 차이, 촉한의 인재 부족에 더해 제갈량의 군 지휘 능력과 임기응변 부족, 조심스럽고 완벽을 기하는 성격 등이 꼽힌다. 하지만 지략과 정세 파악 능력이 뛰어났던 제갈량이 북벌에 불리했던 촉한의 객관적인 사실까지 간파하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가 다섯 차례나 북벌을 감행한 데는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인 위나라의 멸망보다는 유비의 죽음으로 세력이 약해진 촉한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알리고, 국력을 신장시켜 촉한을 유지하고자 한 이유가 클 것이다.



*제갈량의 출사표


 

구 산계의 글 ‘중국의 3대 명문’이라는 제목에 솔깃하여 호기심에 열어 보았다


제갈량의 출사표와 이밀의 진정표, 한유의 제십이랑문 등의 글제목과 함께 그 글들을 읽으면 누구나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문구를 곁들여 두었다. 특히 출사표를 읽고도 눈물을 흘리지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나는 제갈량이 삼국지에 나오는 실존 인물로 조조와 쌍벽을 이루는 전술가, 지략가 정도로밖에 알지 못하고 있다. 연전, 중국에서 만들어 웹에 올려 놓은 동영상 ‘삼국지’를 105회인가에 걸쳐 다 보았다. 흰 깃털부채를 천천히 흔드는 제갈량의 모습에서 범접할 수 없는 품위를 찾을 수 있었으나 내용 중에 출사표가 나온 것 같기도 하고 못 본 것 같기도 하여 확실하지 않다.

내친 김에 정말 눈물을 흘리게 되는지 글 전문을 원문과 해석본을 읽어 보기로 하고 웹을 뒤져 여기로 가져와 편집하였다.

편집에 골몰해서인지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나는 충신이 아니란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명문장이라는 찬사에는 걸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은 출사표가 전, 후 두 차례 쓰여졌다는 것과 출사표의 ‘師’라는 글자가 내가 주로 알고 있는 ‘스승’이라는 뜻 말고도 ‘旅’와 함께 군대의 규모를 나타내는 글자라는 것이다. ‘師團’, ‘旅團’이라는 군부대의 명칭에 이런 글자들이 들어가는 것도 그래서 이해가 되었다.

  

유비[劉備, 본문의 선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유선[劉禪, 본문의 후주]에게 북벌을 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이 전출사표이고 지금까지 그 원문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1차 북벌에서 실패한 후, 전세를 재정비한 뒤 후주인 유선에게 올린 두 번째 상소가 후출사표이다. 내용이 전출사표와 더불어 매끄럽기는 하나 후세 사람의 윤색이라는 평이 있고 심지어 조작된 것이라는 평도 있다고 한다.

 

읽는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참고할 만한 내용을 [  ]안에 주를 넣었다.

읽으시면 눈물이 날 것입니다.


<前出師表>

 

臣亮言

 신 량은 아뢰옵나이다.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然侍衛之臣 不懈於內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선황제 폐하께옵서는 창업하신 뜻의 반도 이루지 못하신 채 중도에 붕어하시고, 이제 천하는 셋[위, 촉, 오]으로 정립되어 익주가 매우 피폐하오니, 참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급한 때이옵니다. 하오나 폐하[유선]를 모시는 대소 신료들이 안에서 나태하지 아니하고 충성스런 무사들이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음은 선황제 폐하께옵서 특별히 대우해주시던 황은을 잊지 않고 오로지 폐하께 보답코자 하는 마음 때문이옵니다.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폐하께서는 마땅히 그들의 충언에 귀를 크게 여시어 선황제의 유덕을 빛내시오며, 충의 지사들의 의기를 드넓게 일으켜 주시옵소서. 스스로 덕이 박하고 재주가 부족하다 여기셔서 그릇된 비유를 들어 대의를 잃으셔서는 아니되오며, 충성스럽게 간하는 길을 막지 마시옵소서.

 

宮中府中 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若有作姦犯科及爲忠善者 宜付有司論其刑賞 以昭陛下平明之理 不宜偏私 使內外異法也。

 또한, 궁중과 부중[관아]이 일치 단결하여 잘한 일에 상을 주고 잘못된 일에 벌을 줌에 다름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만일 간악한 짓을 범하여 죄지은 자와 충량한 자가 있거든 마땅히 각 부서에 맡겨 상벌을 의논하시어 폐하의 공평함과 명명백백한 다스림을 더욱 빛나게 하시고, 사사로움에 치우치셔서 안팎으로 법을 달리하는 일이 없게 하시옵소서.

 

侍中侍郞 郭攸之費褘董允等 此皆良實 志慮忠純 是以先帝簡拔 以遺陛下。愚以爲宮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然後施行 必能裨補闕漏 有所廣益。

 시중 곽유지와 비의, 시랑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진실하오며 뜻과 생각이 고르고 순박하여 선황제께서 발탁하시어 폐하께 남기셨사오니, 아둔한 신이 생각하건대 궁중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그들에게 물어보신 이후에 시행하시면 필히 허술한 곳을 보완하는 데 크게 이로울 것이옵니다.

 

將軍向寵 性行淑均 曉暢軍事 試用於昔日 先帝稱之曰能 是以衆議擧寵爲督。愚以爲營中之事 悉以咨之 必能使行陳和睦 優劣得所

 장군 향총[촉의 무장]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치우침이 없으며 군사에 밝은지라 지난날 선황제께서 향총을 시험삼아 쓰신 뒤 유능하다 말씀하시었고, 그리하여 여러 사람의 뜻을 모아 그를 도독으로 천거했사오니, 아둔한 신의 생각으로는 군중의 대소사는 향총에게 물어 결정하시면 반드시 군사들 사이에서 화목할 것이오며,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모두 적재적소에서 맡은바 임무를 성실히 다할 것이옵니다.

 

親賢臣 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 遠賢臣 此後漢所以傾頹也。先帝在時 每與臣論此事 未嘗不歎息痛恨於桓靈也。

 전한[前漢] 황조가 흥한 것은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탐관오리와 소인배를 멀리했기 때문이오며, 후한 황조가 무너진 것은 탐관오리와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한 때문이오니, 선황제 폐하께서는 생전에 신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일찍이 환제[桓帝 후한의 11대 황제], 영제[환제 다음의 황제] 때의 일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하셨사옵니다. 

 

侍中尙書長史參軍 此悉貞良死節之臣 願陛下親之信之 則漢室之隆 可計日而待也

 시중과 상서, 장사와 참군 등은 모두 곧고 밝은 자들로 죽기로써 국가에 대한 절개를 지킬 신하들이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들을 가까이 두시고 믿으시옵소서. 그리하시면 머지않아 한실은 다시 융성할 것이옵니다.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신은 본래 하찮은 포의[벼슬 없는 선비]로 남양의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선황제께옵서는 황공하옵게도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려 세 번씩이나 몸을 낮추시어 몸소 초려를 찾아오셔서 신에게 당세의 일을 자문하시니, 신은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황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그 뜻에 응하였사옵니다.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閒 爾來二十有一年矣。

 그후 (한실의) 국운이 기울어 싸움에 패하는 어려움 가운데 소임을 맡아 동분서주해온 지 어언 스무해 하고도 한해가 지났사옵니다.

 

先帝知臣謹愼 故臨崩寄臣以大事也。受命以來 夙夜憂歎 恐託付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선황제 폐하께옵서는 신이 삼가고 신중한 것을 아시고 붕어하실 때 신에게 탁고[託孤 고아의 장래를 믿을 마한 사람에게 부탁함]의 대사를 맡기셨사옵니다. 신은 선황제의 유지를 받은 이래 조석으로 근심하며 혹시나 그 부탁하신 바를 이루지 못하여 선황제의 밝으신 뜻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끝에, 지난 건흥[발해 10대 宣王의 연호]  3년[225년]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었사옵니다.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獎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姦凶 興復漢室 還于舊都。此臣所以報先帝 而忠陛下之職分也。

 이제 남방은 평정되었고 인마와 병기와 갑옷 역시 넉넉하니, 마땅히 삼군을 거느리고 북으로 나아가 중원을 평정시켜야 할 것이옵니다. 늙고 아둔하나마 있는 힘을 다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고 대한[大漢] 황실을 다시 일으켜 옛 황도로 돌아가는 것만이 바로 선황제 폐하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드리는 신의 직분이옵니다.

 

至於斟酌損益 進盡忠言 則攸之褘允之任也。

 손익을 헤아려 폐하께 충언 드릴 일은 이제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몫이옵니다.

 

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靈。

 원컨대 폐하께옵서는 신에게 흉악무도한 역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킬 일을 명하시고, 만일 이루지 못하거든 신의 죄를 엄히 다스리시어 선황제 폐하의 영전에 고하시옵소서.

 

若無興德之言 則責攸之褘允等之慢 以彰其咎。

 또한 한실을 바로 일으키는 데 충언이 올라오지 아니하거든 곽유지, 비의, 동윤의 허물을 책망하시어 그 태만함을 온 천하에 드러내시옵소서.

 

陛下亦宜自謀 以諮諏善道 察納雅言 深追先帝遺詔。

 폐하께옵서도 마땅히 스스로 헤아리시어 옳고 바른 방도를 취하시고, 신하들의 바른 말을 잘 살펴 들으시어 선황제 폐하께옵서 남기신 뜻을 좇으시옵소서.

 

臣不勝受恩感激。今當遠離 臨表涕零 不知所言。

 신이 받은 은혜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옵나이다. 이제 멀리 떠나는 자리에서 표문[表文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올리니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씀을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後出師表>

 

先帝慮漢賊不兩立 王業不偏安 故託臣以討賊也 以先帝之明 量臣之才 固知臣伐賊 才弱敵强也。

 선황제 폐하께옵서는 한나라와 역적과는 양립할 수 없으며, 황업[皇業]은 천하의 한귀통이로만 안주할 수 없다 하시어 신에게 역적의 토벌을 당부하셨나이다. 선황제께서 그 밝으심으로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니 역적을 벌함에 신의 재주가 얕고 역적은 강함을 아셨사옵니다.

 

然不伐賊 王業亦亡 惟坐而待亡 孰與伐之 是以託臣而弗疑也。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아니한다면 황업 또한 망할 터이니,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린다면 누구와 더불어 역적을 징벌하오리까. 이 때문에 신에게 탁고하시고 의심하지 않으신 것이옵니다.

 

臣受命之日 寢不安席 食不甘味。思惟北征 宜先入南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幷日而食 臣非不自惜也 顧王業不可偏安於蜀都 故冒危難以奉先帝之遺意。

 신은 선황제 폐하의 명을 받은 이래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사옵니다. 북쪽을 칠 생각을 하니 우선 남방부터 평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지난 건흥 3년[225년] 5월 노수[중국 운남성에 있는 강으로 양쪽 기슭 봉우리에 살기가 있어 여름에 건너지 못하는데 제갈량이 5월 심한 더위에 이 강을 건너 남만을 정벌함]를 건너 불모의 땅 깊숙이 들어가 하루의 양식으로 이틀을 먹는 고생을 한 것은 신이 몸을 아끼지 않음이 아니라, 황업을 생각하면 촉 땅에서 편안히 지내서는 천하를 통일할 수 없어 위험과 고난을 무릅쓰고 선황제의 유지를 받든 것이옵니다.

 

而議者謂爲非計 今賊適疲於西 又務於東 兵法乘勞 此進趨之時也 謹陳其事如左。

 그런데 따지기 좋아하는 무리들은 이것이 올바른 계책이 아니라고 하나이다. 이제 역적은 마침내 서쪽에서 고달파지고, 다시 동쪽에서 오나라의 군사들과 싸워 지쳐 있사옵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적이 피로할 때를 타 공격하라 하였으니, 지금이 바로 과감하게 나아갈 때라 사료되옵니다. 이에 신은 삼가 몇가지를 아뢰옵나이다.

 

高帝明幷日月 謀臣淵深 然涉險被創 危然後安 今陛下未及高帝 謀臣不如良平 而欲以長策取勝 坐定天下 此臣之未解一也

 옛날에 고황제[제나라를 세운 황제] 폐하께옵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고 신하들의 재주가 연못처럼 깊었으나 험난한 일을 당하고 상처를 입으며 위태로움을 겪으신 뒤에야 비로소 평안해지셨사옵니다. 이제 폐하께옵서는 고황제에 미치지 못하시고 신료들 또한 감히 장량[한 고조의 신하 호 子房]과 진평[한 고조의 신하]같은 자가 없는데도,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 좋은 계책으로만 승리하여 가만히 앉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니 이는 신이 이해할수 없는 첫 번째 일이옵니다.

 

劉繇 王朗各據州 論安言計 動引聖人 群疑滿腹 衆難塞胸 今歲不戰 明年不征 使孫權坐大 遂幷江東此臣之未解二也。

 또한 유요[후한 말의 정치가]와 왕랑[후한 말의 정치가]은 각각 주와 군을 다스리며 안위와 계책을 말하면 입만 열면 성인을 운운하고 벗속에는 의심이 가득하여 여러 어려움 앞에서는 겁내고 두려워 하였사옵니다. 그리하여 올해도 싸우지 않고 다음해에도 싸우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손책[孫策 후한 말의 군벌로 오나라의 추존 왕]이 앉아서 강동을 차지하였으니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째 일이옵니다.

 

曹操智計 殊絶於人 其用兵也 彷彿孫吳 然困於南陽 險於烏巢 危於祁連 逼於黎陽 幾敗北山 殆死潼關 然後僞定一時耳 況臣才弱 而欲以不危而定之 此臣之未解三也。

 조조는 지모와 계책이 남달리 뛰어나 그 용병술은 손자와 오자[吳子병법을 지은 사람]를 닮았으나 남양[중국 허난성 남서부의 현]에서 어려움에 처하고 오소[황하 동부에 있는 지명]에서 험한 일을 겪고 기련에서 위태로움에 처했으며 여양[하남성의 한 지역]에서 핍박을 당하고 북산[길림성의 한 지역]에서 거의 패배하고 동관에서는 죽을 뻔한 뒤에야 비로소 한때나마 거짓으로 천하를 평정했는데도 재주도 미약한 신하들이 어찌 위태로움을 겪지 아니하고 천하를 평정하려 하니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 일이옵니다.

 

曹操五攻昌覇不下 四越巢湖不成 任用李服 而李服圖之 委任夏侯 而夏侯敗亡。先帝每稱操爲能 猶有此失 況臣駑下 何能必勝 此臣之未解四也。

 조조는 다섯번이나 창패[중국 동해군의 지명]를 치고도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였고 네번이나 소호[중국 5대 담수호의 하나]를 건넜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복을 등용하였으나 오히려 배반당하고 하후연에게 일을 맡겼으나 하후연이 패망하였사옵니다. 선황제 폐하께서 항상 뛰어난 인물이라고 칭찬하신 조조조차도 이렇게 실패하곤 하였는데 하물며 신같은 아둔한 사람이 어찌 쉽게 이기기만 바라겠나이까.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네 번째 일이옵니다.

 

自臣到漢中 中間期年耳 然喪趙雲 陽群 馬玉 閻芝 丁立 白壽 劉合 鄧銅等 及曲長屯將七十餘人 突將 無前 賓 靑姜 散騎 武騎一千餘人 此皆數十年之內 所糾合四方之精銳 非一州之所有。若復數年 則損三分之二也 當何以圖敵此臣之未解五也。

 신이 한중에 온지 이제 1년 남짓 되었사오나, 그 동안 조운, 양군, 마옥, 염지, 정립, 백수, 유합, 등동 등 70여명의 곡장[골짜기를 지키는 군장]과 둔장[성을 지키는 장수]을 잃어 선봉장으로 앞장설 사람이 없사오며 종수, 청강, 산기, 무기 등 1천여 명을 잃었사오니 이는 모두 수십 년 동안 사방에서 모아온 정예병이지 익주 한 주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옵니다. 만약 또 다시 몇 해를 보내면 셋 중 둘을 잃게 될 터이니 그때는 무엇으로 역적을 도모하겠사옵니까. 이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다섯 번째 일이옵니다.

 

今民窮兵疲 而事不可息 事不可息 則住與行 勞費正等 而不及早圖之 欲以一州之地 與賊持久 此臣之未解六也。 

 바야흐로 백성은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사오나 대사를 그만둘 수 없사옵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지키고 있는 것이나 나아가서 싸우는 것이나 그 노고와 비용은 같은데도 속히 도모하지 아니하고 오직 한 주에만 머물러 역적과 더불어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사오니 이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여섯 번째 일이옵니다.

 

難平者 事也 昔先帝敗軍於楚 當此之時 曹操拊手 謂天下已定。然後先帝東連吳越 西取巴蜀 擧兵北征 夏侯授首 此操之失計。而漢事將成也 然後吳更違盟 關羽毁敗 秭歸蹉跌 曹丕稱帝。凡事如是 難可逆見。

 무릇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나 천하의 일인지라, 옛날 선황제 폐하께옵서 초 땅에서 패하셨을 때 조조는 손뼉을 치며 천하는 평정되었다고 좋아했사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선황제께옵서는 동쪽의 오월[吳越]과 손을 잡으시고, 서쪽으로는 파촉[西蜀이라고도 함]을 취하고 군사를 일으켜 북쪽을 쳐서 하후연의 목을 베셨사옵니다. 이는 바로 조조의 실수로 한나라의 대업이 이루어지려 하였사오나 동오[東吳]가 맹약을 어겨 관우를 죽이고 선황제께옵서는 자귀에서 패하시오니 조비가 황제를 참칭했사옵니다. 이렇듯 일은 미리 헤아리기가 어렵사옵니다.

 

臣鞠躬盡力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逆竟睹也。

 이제 신은 엎드려 몸을 바치고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일할 뿐이오니, 일의 성패와 이해에 대하여서는 신이 미리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백재성 계단이 삼협댐으로 800계단에서 현재는 많이 줄어도 아직도 힘들어

 하는 분들을 위해 가마가 운행중

*백재성 입간판

*절경이라는 구당협을 배경으로 역광으로 ....

*구당협


 

장강 3협중 첫번째 버는 구당협

장강 3협 중 가장 먼저 마나는 협곡이 구당협이다.

전체 길이는 8km 밖에 안되지만 가장 웅장하고 험준한 협곡이다.





*

백제성의 백제묘(白帝廟) 입니다

애곳은 원래 공손술의 사당이었으나 나중에 유비릐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백제성은 청나라 강희제 이후에 수리복원 된 것이며, 명량전(明良殿),무후사(武侯祠),


관성루(觀星樓) 등이 있으며, 전의 양 측면에는 수나라 때의 것을 비롯한 석비(石碑)들이 70여 개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제 백제성 안으로 들어왔다. 흰 용이 우물에서 나왔다는 백제성의 고사. 조각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조각품 의미가있을듯 한되?????



*관성전 앞에서

*관성전 앞에서..

*탁고당

*제갈공명이 별을 보면서 길흉의 점을 쳤다고 하는 관성전

*백재성에서 바라본 양쯔강의 모습


*탁고당

유비(劉備, 161 ~ 223, 재위 221 ~ 223)가 이릉(夷陵)전투(221 ~ 222)에서 대패한 후 이곳 백제성에서 병을 얻어 죽음을 앞두고 제갈량(181 ~ 234)에게 아들 유선(劉禪, 207 ~ 271, 재위 223 ~ 263)을 맡기는 의식을 재현한 탁고당(托孤堂)은 가장 중요한 볼거리의 하나로서 백제성 가장 높은 곳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삼국지에서 조자룡이 장판교에서 품에 안고 살려내어 유비에게 데려간 아기가 아두(阿斗)인 유선이거니와 유비가 네놈 때문에 훌륭한 장수를 잃을 뻔하였다고 하면서 고함을 치며 화를 내었다고 하는데 그때 아두가 땅바닥에 내던져져 머리를 다쳐 아둔해졌다는 이야기를 가이드가 들려준다.

​탁고당의 '탁고'는 한자로 托孤 또는 託孤로 쓰이는데 孤는 부모를 잃은 아이 孤兒라는 의미로서 즉, 탁고는 고아의 장래를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을 말한다. 그 유선은 유비의 사후 제갈량, 동윤, 강유 등 중신들의 도움으로 무난히 국정을 이끌다가 후기에는 환관 황호를 총애하여 환락과 부패에 빠져 결국은 황제로 40년 재위의 말년에 기습 공격해온 위나라의 등애에게 항복을 하고 낙양으로 이주하여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져 8년을 더 살다가 65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어언 175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백재성을 내려 오면서...

*백재성을 갈려면 보이는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다리 내부의 모습

*다리 위에서 장강을 배경으로...

*크루즈선에서 건너편의 산위에 있는 백재성의 모습

*장강의 수위를 표시한것 같아요.

*삼협이란?

 싼샤(三峽)는 양쯔(揚子)강의 3대 협곡인 시링샤(西陵峽,서릉협), 우샤(巫峽,무협), 취탕샤(瞿唐峽,구당협)를 총칭하는 말이다
동쪽의 후베이(湖北)성 이창(宜昌)시 난진관(南津關)부터 서쪽의 충칭(重慶)시 펑제(奉節)현 바이디청(白帝城)까지 전체 길이 192km에 이른다 

*구당협


 취탕샤는 동쪽의 우산현 다시(大溪)진부터 펑제현 바이디청까지 8km로 가장 짧지만 싼샤 중 지세가 가장 험난하다
삼국지의 유비(劉備)가 오(吳)에 대패한 뒤 임종 직전 제갈량(諸葛亮)에게 후사를 부탁했다는 곳인 바이디청,
제갈량이 진을 펼친 흔적이라는 팔진도(八陣圖), 이백(李白)의 시 ‘촉도난(蜀道難)’으로 널리 알려진
고잔도(古棧道·절벽 옆에 걸린 나무다리) 등이 있다

 

 

                                      




*

이백의 노래와 유비의 한, 구당협

 

 나삼협이란 구당협(瞿塘峽 쥐탕샤) 무협(巫峽 우샤) 서릉협(西陵峽 시링샤) 세 개의 협곡을 뜻한다. 장강삼협을 둘러보는 크루즈도 다닌다. 구당협은 중국 지폐에도 나오는 곳이다. 바위 절벽엔 1천여 년 전 만들어진 폭 1m, 높이 2m의 고잔도(古棧道)가 있다. 고잔도는 시성으로 불리는 이백의 명시 촉도난(蜀道難)으로 후세에 유명해진 길이다. 촉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는 뜻인데, 먼저 이백의 시 한 구절만 들어보자. ‘아득하게 높구나 / 촉나라 길은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네 / (중략) / 산은 6마리 용마차도 우회할 정도로 높은 봉우리이고 / 아래는 파도 치는 강물이구나. / 황학도 날아 넘기 어렵고 / 원숭이조차 모서리 잡고 기어오르기를 겁낸다니 / 청니의 산길은 얼마나 꾸불꾸불한가 / (중략) / 촉나라 금성(成都의 옛 이름)이 비록 좋다지만/ 집에 돌아가는 것이 차라리 낫겠네 / 촉나라 길은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려우니 / 몸을 옆으로 돌려 서쪽 바라보며 길게 탄식할 뿐이구나.’ 이백의 이름을 중원에 떨치게 했던 명문장이다. `촉도난이란 시를 본 하지장이란 원로 문인은 이백을 ‘보통 사람이 아니고 인간세계로 귀양온 신선’이란 뜻으로 ‘적선인’(謫仙人)이라 칭하고 황제에게 천거했다고 한다. 촉나라, 요즘으로 치면 쓰촨성에서 태어난 이백은 이 길을 세 번이나 지났다. 협곡을 거슬러 오면 이백의 말이 실감난다. 좁게는 폭이 90m, 넓게는 400m의 강줄기. 양쪽은 험준하기로 유명한 우산(巫山)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중일전쟁 때 이창까지 진격한 일본군들도 차마 충칭을 넘보지 못했다고 한다.


 충칭의 별식은 훠궈(火鍋). 일종의 샤브샤브다. 육수는 크게 뱀, 자라, 두꺼비에다 20가지 약초를 넣은 것과 동충하초와 한약재로 끓인 매콤한 육수 두 가지가 있다. 여기에 채소나 고기를 넣어 익혀 먹는다. 덩샤오핑이 좋아했다는 오리내장, 뱀장어, 돼지신, 오리고기 등 온갖 고기와 상추, 배추, 시금치, 버섯 등 채소를 넣어 먹는다. 훠궈는 원래 양쯔강 주변의 인부들이 먹던 서민 음식. 중국의 황제가 이곳에 들렀다가 훠궈의 향기에 취해 음식을 맛보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

8㎞의 구당협은 삼협 중 가장 짧다. 암벽에는 1천5백 년 전의 펑상샤(風箱峽)가 보인다. 사람이 죽으면 동굴에 집어넣는 풍장(風葬)의 흔적이다. 펑상샤를 지나면 협곡은 더 좁아지고 웅장해진다. 중국돈 5위안짜리 지폐의 그림이 바로 구당협 기문이다. 끝머리에는 강기슭에 유비가 숨을 거뒀다는 백제성(白帝城)이 있다. 오나라와 위나라의 협공으로 숨진 관우의 한을 갚기 위해 70만 대군을 끌고 출병했다가 촉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한을 삭이지 못하고 여기에서 숨을 거두며 제갈공명에게 유언을 남겼다. 아들 유선이 영특하면 그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나라를 맡아달라고 했단다. 하류에는 장비묘도 있다. 부하에게 암살당한 뒤 버려진 장비의 머리를 어부가 그물로 건져냈던 곳으로 장비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다.

 


*구당협을 지나면 무협이다. 무협의 명물 중 하나는 장강의 지류인 선룽시(神農溪)다. 선룽시는 말 그대로 농사와 약신(藥神)인 신농씨에서 이름을 따왔다. 신농씨가 이곳에서 1백 가지 약초를 맛보고 한약을 처음 만들었단다. 중국인들의 정신적인 고향인 셈이다. 계곡수는 선룽쟈산(神農架 3,052m)에서 흘러나온다. 상류는 원시림으로 뒤덮여 있으며 아직도 원주민들이 옛날 방식 그대로 살고 있다. 관광객들은 나룻배를 타고 이 지역을 돌아봤다. 계곡은 길이가 60㎞. 관광객들이 들어갈 수 있는 코스는 룽창샤까지 6㎞이다. 계곡수는 본류와는 다르게 물이 맑고 깨끗하다. 나룻배는 토가(土家)족이 밧줄을 묶어 끌고 간다. 수심이 깊은 상류에서는 갈고리를 바위벽에 걸어 끌어당긴다. 토가족은 옛날엔 모두 알몸으로 지냈다고 한다. 선룽시를 빠져나오면 강줄기는 12봉우리가 강 양쪽에 뻗어 있다는 길이 40㎞의 우샤로 이어진다. 이 중 신녀 요희가 사람들을 도왔다는 전설이 있는 신녀봉이 가장 높고 유명하다. `운우지정(雲雨之情)이란 말도 신녀봉에서 유래됐다. 옛날 초의 양왕이 신녀를 사모해 그녀를 보러 왔으나 만나지 못하고 꿈으로만 뜻을 이뤘다고 한다.

 


*

장제스(蔣介石)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패해 대만으로 넘어갈 때 온갖 보물을 다 싣고 가면서도 삼협을 두고 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는 장강. 자연과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강은 이름만큼이나 도도하고 아름답다.

 



*

서릉협은 길이 76㎞로 삼협중 가장 길다. 안개 속에 반쯤 몸을 가린 시링샤는 경외감이 느껴질 정도로 신비스럽다. 계곡 양쪽은 깎아지른 벼랑. 안개를 밀치고 바위벽을 한번 휘돌면 또 다른 석벽이 나타난다. 삼협은 1년에 절반 이상 비가 내리고 안개로 덮여 있어 평생을 살아도 별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 옛 시인들은 천길 절벽보다 안개가 더 아름답다고 했다. 실제로 동양화 속의 선계(仙界)나 무릉(武陵)이 바로 이곳이구나 싶다. 장비뇌고대와 삼류동이 서릉협의 명물이다. 장비뇌고대는 장비가 북을 치며 군사를 모았다는 곳. 바위 절벽 끝머리엔 장비상이 서 있다. 삼류동은 뇌고대 옆의 동굴로 당나라 때에는 백거이와 백행진, 원진이 머물며 시를 지었고, 송나라 때에는 소동파 3부자가 머물렀다고 한다. 강물은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황톳물이다. 산성을 띠고 있는 붉은 토사가 끊임없이 쓸려 내려오기 때문이다. 삼협을 제대로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2008년 혹은 2009년 삼협댐이 최종 완공되면 삼협 중 많은 부분이 물에 잠기게 된다. 현재도 공사를 한 단계 마칠 때마다 수위가 올라가 풍경이 예전만 못하다. 삼협댐이 최종 완공될 경우 삼협크루즈도 존속할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른다. 80년 전 쑨원(孫文)이 구상하고, 50년의 조사 끝에 1993년부터 공사를 시작한 삼협댐은 세계 최대의 댐이다. 길이 2,225m, 높이 185m, 중국 전력 발전량의 10분의 1이 생산된다. 소양호의 27배나 된다.

  

 


*산위의 건물이....

  무협(巫峽,우샤)

초(楚)의 시인 굴원(屈原)이 태어난 쯔구이와 한(漢)의 미인 왕소군(王昭君)의 출생지인 샹시에는 이들의 유적이 있다
우샤는 후베이성 바둥(巴東)현 관두커우(官渡口)부터 충칭시 우산(巫山)현 다닝허(大寧河)까지 45km 구간으로 수려한 풍광으로 유명하다
무산 12봉(峰) 중 신녀봉(神女峰)에는 초양왕(楚襄王)과 무산신녀의 애정 고사가 전해진다





*서릉협


 

3000만∼4000만년 전 히말라야 지각변동으로 호수였던 지형이 융기하면서 싼샤가 만들어졌다
가장 동쪽에 위치한 시링샤는 이창시 난진관부터 쯔구이(자歸)현 샹시(香溪)까지 76km로 싼샤 중 가장 길며
병서보검협(兵書寶劍峽) 황우협(黃牛峽) 등 명승지가 있다

 


*계곡에는 폭포도 간간이 보이네요.

*앞으로 장강주변을 대대적으로 관광지로 개발한다네요.

*신녀계


*신녀봉

*가을의 구당협의 모습(사진촬영)

*이런 바위도...

*기운봉이라...

*신녀계곡을 관광하기 위해 여기서 작은배로 이동.

*토가족들의 공연장

*신녀계곡의 경치

*지금은 삼협댐 건설로 계곡의 수량이 많아 그래도 좋아요.

 댐건설 이전에는 조그만 계곡의 물살이 엄청빨라 배운행에 엄청 힘들었다네요.

*여름보다는 단풍이 있는 가을이 더 좋을것 같네요.

*어떤 구간은 상당히 좁네요.

*아름다운 경치

*보이는 구멍들이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관을 넣어 보관하는 묘역활 

*한가한 뱃놀이 여기에 막걸리에 구수한 트롯트 한가락 어때요.

*기념으로...

*부부의 흔적을 남겨요.

*이번에 같이한 회사 동료부부

*여기도 ....

*남자들의 한때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 하고 크루즈 승선 하면서

*여기도 흔적을...

*우리도...

*저녁만찬에서 하루의 마무리를 한잔의 와인으로 ...

*드디어 자정 무렵에 삼협댐 갑문 통과중.

*갑문이 열리는 모습

*갑문 통과 벽과의 거리가 아쓸아쓸한 공간으로 진행

 3일째 일정을 마무리 합니다.내일을 위하여 방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