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알프스 둘레길(국제신문)

국제신문 영남알프스 둘레길7코스(청도 삼계리~청도군 운문사).14km |

문수산 아래 2018. 2. 12. 10:48


*영남알프스 둘레길 7코스를 가다.

*날   자 : 2018년 01월 21일 토요일

*날   씨 : 맑음.-3~5도

*코   스 : 삼계리~천문사~나선폭표~통점마을~운문사~운문사 주차장 (14k

              m.4시간 15분)


*한 겨울의 중간을 달리고 있는 지금 우리 부부는 휴일을 맞아 영남알프스 둘

 레길 7코스를 걷기위해 집에서 승용차로 출발점 청도 삼계리 천문사입구에

 차를 주차를 하고 천문사 나선폭포를 보기위해 정면의 쌍두봉을 향하여 반갑

 게 인사를 하고 오늘도 무사 종주를 위해 화이팅!!!을 외치고 출발.

 오늘의 코스가 천문사 나선폭포를 왕복을하고 도로를 따라 운문사까지 진행

 이라 위험한 인도가 없은 도로를 걸어야 하므로 상당히 조심을 해야할 구간

 입니다.


*천문사입구에 주차를 하고 천문사방향으로 진행합니다.(9/15분)

*신원천에는 갈대가 무성하게 피어 있네요.

*아침햇살을 받아 쌍두봉의 봉우리만 보이네요.

*천문사는 올때구경하기로 하고 나선폭포쪽으로 진행.

*이정표를 따라진행.*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 직진방향은 배넘이재 가는길 우리는 우측으로

 진행 나선폭포.

 

*저멀리 나선폭포의 얼음기둥이 보이기 시작하네요.

*겨울 가뭄으로 올 겨울의 얼음기둥이 초라하기 짝이 없어요.

 겨울이면 울산지방의 빙벽훈련 연습장으로 많은 분들이 이용하고

 있는 곳인데...

*아쉬움은 남지만 여기서 흔적을 남기고...

*40m 높이의 나선폭포 영남알프스의 한 부분을 찾이하고 있는 유명한 폭포가

 지금의 모습은...

*내년을 기약하면서...

*고드름으로 바위가 장식을 하고 있네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출발점으로 진행.

*참나무 6형제 이해하기 쉽게 소개되어 있네요.

*여기서 좌측으로 오르면 쌍두봉가는길....

*천문사 주차장의 운문산 생태.경관보전지역 안내판.

*천문사 경내의 장독대의 모습.

*천문사 경내 관람.

*최근에 신축건물인지 색채가 선명하네요.

*지장보살의 근엄한 모습.


그는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쁜 꿈에 시달리는 자 등의 구원자로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자의 영혼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중국에서 지장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신행이 삼계교를 세우면서부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진평왕 때 원광이 '점찰보'를 설치하면서부터 지장신앙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지장보살은 삭발 승려로, 머리 뒤에는 서광이 빛나고 두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고통 받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윤회의 여섯 세계에 상응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지장보살은 명부전, 지장전, 시왕전이라 불리는 법당의 주존으로 모시고 있다.


지장보살(Ksitigarbha)

석가모니불의 열반 후 무불 시대에 육도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보살

그는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쁜 꿈에 시달리는 자 등의 구원자로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된 모든 사자(死者)의 영혼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전생에 브라만 집안의 딸로 태어나 석가모니에게 헌신적으로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사악한 어머니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 적도 있다. 중국에서 찬술한 〈지장본원경 地藏本願經〉에는 효행을 주제로 한 지장보살에 관련된 전설들이 많이 실려 있다.

중국에서 지장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신행(信行:540~594)이 삼계교(三階敎)를 세우면서부터이다. 그는 당시를 말법 시대로 규정하면서, 그러한 시대에는 지장보살을 숭배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고 하여 말법 사상에 기초한 지장신앙을 널리 전파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진평왕 때 원광(圓光)이 〈점찰경 占察經〉에 의거한 신도 조직인 '점찰보'를 설치하면서부터 지장신앙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점찰경〉이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지장보살에게 예배하여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고쳐나갈 것을 권하는 경전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지장신앙은 윤리적 특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지장보살은 9세기경부터 널리 숭배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어린이들의 보호자이자 서민들에게 여러 가지 축복을 주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흔히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 머리 뒤에는 서광이 빛나고 두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또한 한 손에는 지옥의 문이 열리도록 하는 힘을 지닌 석장(錫杖)을, 다른 한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들고 있다. 지장보살은 고통받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윤회의 여섯 세계, 즉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에 상응하는 6가지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중국 안후이 성[安徽省]에 있는 주화 산[九華山]은 지장의 성지로서 불교의 순례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지장보살은 사찰에서 독립적으로 세워지는 명부전(冥府殿)의 주존으로서 신앙되고 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이 주존으로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이라고도 불리며, 명부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이 있다고 해서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이 법당에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봉안하고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脇侍)로 봉안한다.

그리고 그 좌우에 시왕을 안치하며 그 앞에 동자상을 안치하고, 판관(判官)·녹사·장군(將軍) 등의 존상(尊像)을 갖춘다. 또 대개의 경우 지장보살상 뒤에는 지장탱화, 시왕상 뒤에는 시왕탱화의 후불탱화(後拂幀畵)를 봉안한다. 


*천문사 삼존불.


 

보통, 우리 나라의 사찰 전각 안에는 대부분 주불(主佛)이 좌우보처를 거느린 삼존불의 형태로 봉안되어 있다.

석가모니를 본존불로 모신 대웅전(大雄殿)에는 일반적으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협시보살로서 봉안된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와 만행(萬行:수행)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석가모니의 지혜와 권능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모든 본존불과 협시보살과의 관계는 본존불의 권능을 협시보살이 대변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또, 이 두 협시보살은 항상 서로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살피게 된다.

즉, 문수보살은 끊임없이 지혜의 빛을 발현시키면서도 보현보살의 자비로운 만행을 배우고자 힘쓰고, 보현보살은 만행을 실천하면서 문수의 지혜를 돌아보면서 그 지혜에 입각한 만행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양쪽 협시보살의 뚜렷한 장점을 하나로 완성한 분이 본존불로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의 협시보살로는 때때로 부처님의 대표적인 제자인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으로 모셔지기도 하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봉안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불을 불교의 교주로 삼고 있는 특별한 상황 때문이다.

또, 때로는 불국사(佛國寺)의 대웅전과 같이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彌勒菩薩)과 갈라보살(竭羅菩薩)을 봉안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현재불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미래불인 미륵보살, 과거불인 정광여래(定光如來)의 보살 때의 명호인 갈라보살을 함께 취하여 삼세불(三世佛)로써 삼존불을 삼은 경우이다.

또한 대적광전(大寂光殿)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게 된다. 이는 비로자나불을 법신(法身)으로 삼고 노사나불을 보신(報身), 석가모니불을 화신(化身)으로 삼는 삼신설(三身說)에 근거한 삼존불이다.

극락전(極樂殿)에는 보통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봉안되는 것이 통례이다.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협시로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지장보살이 고통받는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어서 지장신앙이 강해진 데 따른 변형이다.

약사전(藥師殿)에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일광(日光)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좌우협시로 봉안되고, 명부전(冥府殿)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좌우협시로 봉안되며, 영산전(靈山殿)이나 응진전(應眞殿)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가섭과 아난 존자가 봉안된다.

이 밖에도 용화전(龍華殿)에는 미륵삼존불이, 관음전(觀音殿)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중심으로 남순동자(南詢童子)와 용왕(龍王)이 각각 보처를 대신하는 등 불교의 모든 불보살, 나아가서는 호법의 중심 신(神)들까지도 좌우 보처를 거느려서 삼존불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들은 우리 나라의 탱화나 불교의식 속에 잘 반영되고 있다.


*천문사의 삼천불전.

*천문사 대웅전.

*삼층석탑인가.

*천문사 경내.

*천문사 와불의 모습.


*천문사 입구에서 들어가는 길의 담쟁이 덩굴.

*천문사 .

*천문사 구경 후 신원천을 끼고 삼계리로 ....

*다시 출발점 도착 여기서 좌측도로를 따라 운문사까지 도로로 진행.

*6코스에서 소개된 삼계리 서낭당의 모습.

*신원천의 모습.

*도로로 따라 진행중.

*6코스에서 내려온 수리덤계곡의 모습.

*인도가 없어 조심을 해야하는 구간.

*신원천을 우측에 끼고 가끔식 보이는 개천의 모습.

*도로와 신원천이 계속같이 가요.

*가로등의 색시한 모습.

*통점마을을 통과 중....

*운문사 1km 지점 통과 중.

*이쁜 까페 자동차.

*시원한 도로를 따라 진행.

*가끔식 보이는 아름다운 전원주택단지의 모습.

*신원리 방지 초등(문명분교).

*신원리의 양(용)바위의 모습.

 양반들이 소풍놀이를 즐겼다고 해서

 양바위, 또는 용을 닮았다고 해서 용바위로 불리는 바위다.

*신원리 마을의 모습.

*신원리를 떠나 운문사 가는 길.

*운문사 가는길에서 바라본 복호산의 모습.

*운문사 주차장과 식당촌 도착.

*운문사 버스 정류장 여기서 청도나 언양으로 갈수 있다.

*운문사 주차장의 모습.

*호거대의 모습.

 운문사 터 잡은 호거산은 어디?
- 청도 사학계 "호거대가 바로 호거산"
둘레길 제7코스의 핵심은 역시 종착지인 천년고찰 운문사(雲門寺)다. 그런데 범종루에 걸려 있는 현판에는 '운문산 운문사'가 아니라 '호거산(虎距山) 운문사'라고 돼 있어 호기심 많은 순례객이 머리를 갸웃거리곤 한다. 공식 지형도 그 어디에도 없는 이름인 호거산. 한자의 뜻 대로만 보면 '호랑이가 걸터앉은 모양의 산'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 문제를 놓고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여전히 정확한 답은 없다. 다만 이

문제를 풀기위해 고심하고 공부하다 보면 운문사는 물론 영남알프스 일대를 좀 더 깊이 알아 가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청도 지역 향토사학계의 의견과 고지도 등에 나타난 호거산의 위치 등을 종합해 간략하게나마 고찰해 본다. 우선 호거산 위치에 대한 여러 주장들부터 살펴보자. 절의 남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인 현재의 운문산(1195m)을 원래의 호거산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고, 억산과 범봉 일대를 통틀어 일컫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내원암 사리암 청신암 등과 함께 운문사의 4대 부속 암자이면서 운문사 창건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모암(母庵)으로 알려진 북대암이 자리잡은 북동쪽의 복호산(伏虎山·678m)과 지룡산(池龍山 또는 地龍山·659m)을 합쳐서 호거산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운문사 매표소 오른쪽(서쪽) 산등성이 위에 커다란 바위가 얹혀 있는 모습이 보이는

'호거대(일명 장군바위 등선바위 등심바위·516m)' 주변 일대 산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각 주장마다 나름대로의 근거도 있다. 하지만 향토사학계의 해석과 김정호 작 대동여지도 등에 나타난 호거산위치 등을 고려할 때 '호거대=호거산' 설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우선 대동여지도를 살펴보자.그런데 먼저 주목할 것이 바로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운문산의 위치다. 고산자 선생은 지동에서 운문산의 위치를 현재의 운문산과 판이한 곳에 표시했다. 가지산과 고헌산 사이 봉우리에서 북쪽으로 뻗은 큰 산줄기 상의 높은 산으로 표시한 것. 즉 현재 문복산의 위치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산에서 서쪽으로 흐른 지능선은 현재의 옹강산 줄기로 보이고 그 맥은 큰 하천 두 개가 합수되는 지점, 즉 현재의 신원천과 운문천이 만나는 운문면 신원리

신원교 인근까지 뻗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합수지점 서쪽의 능선상에서 작은 글씨로 호거산을 표시했다. 현재의 운문천 서쪽 자락 능선이다. 또 호거산 표기 지점의 동쪽을 흐르는 운문천 줄기에 '약야계(若耶溪)'

가 표시돼 있다. 현재도 운문사 서쪽 하천을 약야계라고 부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결국 고산자 김정호는

호거대 또는 그 주변을 호거산으로 봤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 청도 향토사학회장 겸 경북 향토사학회장인

박윤재 선생도 호거산의 위치를 현재의 호거대라고 단언한다. 박 회장은 "운문사 절 서쪽에 호거산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호거산이라는 이름은 신라 때 원광법사가 중국 유학을 다녀온 후 운문사에서 주석을 할 때 중국 소주의 호구산(虎丘山) 이름에서 음을 따 온 것으로 보인다. '호랑이가 걸터 앉은 모습의 산'을 뜻하

는 '호거산'의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원광법사는 중국 유학시절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수도였던 소주(蘇州)의 호구산에 들어가 그곳에서 수도하며 평생을 마칠 생각을 한 바 있었다. 그러나 사람

들의 청에 못 이겨 펼친 강론에 청중들이 감화되는 것을 보고 세상에 나가 중생계도를 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고 전한다. 그만큼 높이 37m의 비록 아주 낮은 언덕 같은 산이지만 호구산은 원광법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또 하나 현재 운문사 약야계도 소주 호구산과 연관돼 있다.

오왕 합려가 죽은 후 제위에 오른 부차가 아버지의 무덤을 만든 곳이 호구산이고, 부차는 월나라 출신 미녀

서시에게 빠져 결국 패망의 길을 걷는 인물이다. 서시는 호구산에서 오왕 부차와 자주 노닐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약야계'란 범려가 서시를 발견한 절강성 소흥의 아름다운 하천 이름이다. 그 약야계가 운문사 옆

하천의 이름이 됐다. 우연의 일치일까. 사실 '호거대=호거산' 설도 정답이 아닐 수 있다. 김정호 선생도 틀릴

수 있기에. 다만 이런 고찰을 통해 영남알프스 둘레길의 이야기가 더욱 풍요로워 질 수는 있다.

*운문사 주차장에서 바라 본 지룡산의 모습.

*운문사 매표소를 지나 소나무 숲으로 운문사 진행.

*소나무 숲에서 올려본 모습.

*오랜세월을 힘들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삶과 별반 차이가 없네요.


*운문사 가는 길.

*운문천에는 갈대가 가득하네요.

*운문사 가는길....

*운문사 가는길에는 소나무와 좌측의 운문천 조화로운 산책로를 솔바람길.

*겨울 냇가에는 얼음과 바위의 조화.

*지금걷고 있는 이길이 솔바람길.

*운문사 경내의 처진 소나무의 모습.

 천연기념물 180호로 지정된 500년된 처진소나무의 모습

매년 봄 가을로 막걸리 25말을 마신다는 유명한 처진소나무다.

삼월삼짇날(음력 3월3일)에 막걸리 드리는 행사를 볼 수 있다. 

*만세루의 모습.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사에 있는 누각.


[개설]
운문사 구 대웅보전 동편에 있는 누각 건물로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위치]
운문사 중심 영역에 있는 구 대웅보전 동쪽에 있다. 구 대웅보전과 동일하게 남향을 취하고 있으나, 구 대웅보전의 주향과는 달리 남서쪽으로 약간 더 틀어져 배치되어 있다.


[변천]
2006년 구 대웅보전 해체 수리 시 상량문과 함께 「순치 십이년 대웅전 중건시 가람 현상 등본(順治十二年大雄殿重建時伽藍現狀謄本)」[1655년(효종 6)], 「경상북도 청도군동 호거산 운문사 사적(慶尙北道淸道郡東虎距山雲門寺事蹟)」[1718], 「소화 십년 사월 일 대웅전 중편시 가람 현상표(昭和十年四月日大雄殿重編時伽藍現狀表)」[1935] 등의 기록이 확인되었다. 이 중 만세루라는 전각명은 1935년 기록에만 보인다. 1655년의 「순치 십이년 대웅전 중건시 가람 현상 등본」에는 현 만세루 위치에 미륵전이라는 건물이 표기되어 있다. 현 건물의 구조 및 양식이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어, 미륵전이 현 만세루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형태]
만세루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 단층 팔작 기와집이다. 건물은 2단의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우고 주상부는 주간 상에 창방을 걸고 주두를 놓은 뒤 이익공의 공포로 짜 올렸다. 익공은 초익공 위에 다시 익공과 행공을 ‘十’자형으로 짷고 그 위에 재주두를 놓은 뒤 대량과 도리를 결구하였다. 그리고 각 주칸 사이의 창방과 처마도리 밑 장혀사이에는 화반 대공 1구씩을 끼워 보강했다.

익공의 외단은 초익공·이익공 모두 수서형이며, 두공은 양단을 둥그렇게 조각한 운공형이다. 내단은 대량의 단부를 받치도록 간결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내부는 전체가 창호나 벽체 없이 개방된 구조에 우물마루가 깔려 있다. 건물 사방 하인방과 기단 사이의 고멕이에는 붉은 벽돌을 쌓아 마감하였다. 우물마루 바닥은 기단에서 사람들이 걸터앉을 정도로 낮게 설치되어 있다. 우단에서 좌측으로 2번째 칸 후열에는 법고, 좌단 앞 10칸에는 범종이 각기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좌단에서 우측으로 2번째 칸 기둥 사이에 괘불이 동쪽을 향해 설치되어 있다. 내부 천장은 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지붕 가구는 건실한 전후퇴 7량가이다. 전후 퇴보 상부에는 동자주를 세우고 중앙의 대들보 위쪽으로는 접시대공을 놓아 전후 퇴보에서 출발한 중량를 받치고 있다. 중량 위쪽으로는 접시대공을 나란히 양쪽으로 놓아 종량을 받도록 했다. 종량 위쪽으로 다시 동자주를 놓아 종도리를 받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에 한식 기와를 이었고, 추녀 네 귀에는 활주를 세웠다.


[현황]
건물 내부에 법고와 범종 및 괘불이 설치되어 있어 사찰의 대중 행사용에 주로 사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운문사 만세루는 구조 및 공포 등의 수법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건물로, 운문사 기록에 만세루라는 전각명은 1935년 기록에만 보인다. 위치상 구 대웅보전과 동일 축선상의 중심 영역에 있으면서도 사방 창호 없이 개방하고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설치한 누각인 점은 영남 지역 타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마치 호남 지역의 사찰 누각과 흡사한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운문사가 평지 가람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처진 소나무를 배경으로.

*운문사 대웅보전 건물의 모습.


*경내의 모습.

*화랑도의 지켜야할 도리.

*극락교의 모습.

*운문사 삼층석탑과 함께.

*운문사 오백전.

 고려 원응국사가 창건하고 운악화상이 중수를 하였다고 전해지며,근대에 들

 어서는 금광스님이 대대적으로 중수하고 오백나한상을 채색하였다.

 오백명의 아라한상이 모셔져 있어서 오백전이라 하며,주불로 석가모니불과

 좌측 제화갈라보살,우측 미륵보살이 모셔져 있다.아라한을 줄여서 보통 나한

 이라고 하는데,부처님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제자들을 이르는 말이

 다.자유분방한 모습을 하고 있는 운문사 오백나한상 각각에게 공양을 올리는

 오백미 전통이 있다.

*비로전

 신라시대에 세운 운문사는 여러 차례 보수를 거졌는데 지금의 절은 조선 숙

 종 44년(1718년)에 있었던 네 번째 보수 때의 것이다.비로전도 이때 세운 것

 으로 추정한다.앞면 3칸 옆면3칸 규모이며 기둥사이의 간격을 넓게 잡아서

 같은 규모의 건물보다도 크다.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을 한 팔

 작지붕으로 꾸몄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

 와 기둥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다포계 건물들과

 는 달리 장식으로 치우치지 않았다.앞면에는 꽃무늬를 넣은 문을 달았는데,

 특이 가운데 칸은 넓어 5짝 여닫이문을 달았다.안쪽은 큰 기둥을 하나만 세

 워 넓고 탁 트인 공간을 꾸미고 있다.천장의 가운데는 우물정자 모양의 천장

 으로 꾸미고 화려하게 채색해 놓았다.건물의 짜임이 조선 중기 양식을 잘 나

 타내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청도군 운문면 호거산이 있는 운문사는 신라 때인 560년(진흥왕21년)에 신

 승이 창건하였으며 608년에는 원광국사 신라 말기에는 보양국사가 중건하

 였고 고려 숙종때 원응국사가 중창하였다.현재의 대웅보전은 임진왜란때

 소실된 뒤에 중건 한것으로 짐작되며,조선중기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의 운문사는 네번째로 사찰을 중창한 조선시대인 1718년(숙종44년)에

 지은 건물로 대웅보전도 이 무렵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대웅보전은 목조건

 물로 크기는 정면 3칸,측면3칸의 큰 규모이고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이다.다포

 계의 공포를 구성하였고,포작은 외삼출목,내사출목으로 짜여졌다.단청은 금

 단청으로 칠하였고 처마는 겹처마로 추녀 끝부분에 활주를 세워 지붕의 하중

 을 받게 하였다.가구의 양식은 1고주 5량가로 천장은 네 면에 빚천장을 돌리

 고 중앙에 우물천장을 꾸미고 화려하게 채색하였다.건물의 앞면에는 꽃살무

 늬를 넣은 분합문을 달아 출입하였는데 특이 가운데 칸은 간격이 넓어 5짝

 의 분합문이 달려있다.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다퍼계 건축물이다.

*운문사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678호. 높이 540cm. 원래 기단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부 보수되었으며 특히 상층기단의 팔부중상에 새로운 석재가 첨가된 흔적이 남아 있다. 2기의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여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형식으로, 크기나 양식 면에서 거의 동일한 특징을 보여준다.

운문사

운문사3층석탑(통일신라), 보물 제678호, 높이 540cm,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하대석은 지대석과 붙어 있는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2개씩 새겨져 있고 그 위를 넓고 편평한 갑석이 덮고 있다. 상층기단에는 각 면에 우주와 1개의 탱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팔부중상을 1구씩 조각했다. 팔부중상은 손과 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 좌우에는 천의가 날리고 있으며, 뒤에 부분적으로 보수되어 다소 어색한 느낌을 주는 상도 있다. 탑신부는 옥개석과 옥신석이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전체 비례로 보아 1층 옥신이 조금 높은 편이다.

옥신석에는 각 층마다 우주가 표현되어 있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처마 끝이 수평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두 탑 모두 사각형의 받침대 위에 노반·복발·앙화가 놓여 있다.


*운문사 경내.

*운문사 법륜상.

 

법륜은 부처님의 교법이 수레가 굴러가듯 머물지 않고 항상 전하여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안치된 윗단은 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의

올바른 생활실천 윤리인 八正道(팔정도)를 상징하며

아랫단은 부처임 최초의 설법지인 녹야원(鹿野苑)에서 五比丘에게 법을

설함으로써 비로소 佛法僧三寶(불법승삼보)가 이루어진 것을 상징하는

初轉法輪相(초전법륜상)입니다.

이 땅에 부처님의 진리가 영원히 전하여져서 일체중생의 삶이 안락하고

행복하며 세계는 평화롭고 佛日(불일)이 항상 빛나기를 염원(念願)하면서

여기 法輪相(법륜상)을 새겨 모십니다.


불기 2532년 10월 18일.

주지 전명성 합장


해설

법륜(法輪)이란 간단히 말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수레바퀴가 거침없이

나아가듯 부처님의 법(法)이 세상의 번뇌를 부순다는 비유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설법하는 것을 '법륜을 굴린다'라고 표현합니다.

위 문장의 첫 부분에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법륜상(法輪相)은 법륜의 형상, 모습이란 뜻입니다. 동상(銅像)에서처럼 像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동상은 모습을 그대로 본 딴 것이지만 법륜이란 것은 실제 바퀴가

아니라 비유 혹은 상징일 따름이기 때문에 相자를 쓴 것입니다.


그 다음은 8정도(八正道)가 나오는데, 부처님이 말씀하신 8가지 바른 길을 말합니다.

이것을 열심히 실천하면 깨달음을 잘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활하고, 바르게 정진하고,

바르게 깨어 있고, 바르게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법륜상의 아랫부분에는 다섯 사람이 보입니다. 이들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을 때의

전후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부처님의 아버지(왕)이 아들이 걱정되어

이들을 보내 지키게 했는데, 이들도 부처님을 따라서 도를 닦았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어 자기들도 이끌어주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자신들의 생각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해서 실망하고 다른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부처님의 행동은 실제로는 깨달음을 얻는 중도(中道)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셨고, 그것이 확실함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

비로소 내려오셔서 그 다섯 명을 만나서 처음으로 깨달음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 다섯 사람도 부처님께서 정말 깨달음을 얻었음을 알고 따랐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행한 부처님의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합니다.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렸다'는

뜻입니다. 출가하여 불문에 들어간 사람을 비구(比丘)라 부릅니다. 五比丘는 다섯 명의

비구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 장소가 녹야원(鹿野苑)이라는, 인도 중부에 있는 숲입니다.


이곳에는 불(佛: 부처님), 법(法: 가르침), 승(僧: 수행자)이 모두 있고, 이들 세 가지는

불교에서 보석 같이 귀중한 것이라서 삼보(三寶)라 불립니다.


마지막의 불일(佛日)은 부처님의 광명(光明), 곧 밝음을 태양에 비유한 말입니다. 부처님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불교의 진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처진 소나무의 모습.

*운문사 범종루

 (운문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4 원광서학(圓光西學) 및 보양이목조(寶壤梨木條)에 원광법사와 운문사는 관련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처진 소나무

운문사에 있는 처진 소나무, 천연기념물 제180호


〈사적기 寺蹟記〉에 따르면 고려시대인 937년(태조 20) 중국 당(唐)나라에서 법을 전수받고 돌아온 보양국사(寶壤國師)가 까치떼의 도움으로 이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 했으나, 943년 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보양국사가 절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많은 전답과 함께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105년(숙종 10)에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한 이후로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인 1690년(숙종 16) 설송(雪松)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萬歲樓)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운문사사천왕석주

보물 제318호. 높이 제1석주 152cm, 제2석주 164cm, 제3석주 153cm. 4개의 길다란 석주에 사천왕상을 1구씩 부조로 조각했는데 부분적으로 채색을 칠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운문사사천왕석주

운문사사천왕석주(왼쪽), 작압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 좌우에 2개씩 배치되어 있다, 보물 제318호,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사사천왕석주

운문사사천왕석주(오른쪽), 작압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 좌우에 2개씩 배치되어 있다, 보물 제318호,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이 석주는 원래의 위치를 알 수 없고 그 용도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각 상의 이름을 밝히기가 어렵다. 그러나 손에 들고 있는 지물에 의해 대체로 삼고저를 쥐고 있는 제1석주의 사천왕상은 남방의 증장천으로 생각되며, 제2석주는 탑을 든 북방의 다문천상, 제3석주는 불꽃[火峰] 또는 꽃가지를 든 서방의 광목천상, 제4석주는 양손으로 칼을 받치고 있는 동방의 지국천상으로 추정된다.

이 사천왕상은 모두 원형의 두광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무인형으로 악귀를 밟고 천의자락을 날리면서 서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또한 신체는 장대하지만 대체로 조각적인 양감이 줄어들었고, 서 있는 다리의 자세가 엉거주춤하며 갑옷의 띠주름이 굵어지고 세부표현이 정교하지 못한 점 등은 9세기경의 통일신라 석탑이나 부도에 새겨진 사천왕상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운문사삼층석탑

보물 제678호. 높이 540cm. 원래 기단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부 보수되었으며 특히 상층기단의 팔부중상에 새로운 석재가 첨가된 흔적이 남아 있다. 2기의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여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형식으로, 크기나 양식 면에서 거의 동일한 특징을 보여준다.

운문사

운문사3층석탑(통일신라), 보물 제678호, 높이 540cm,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하대석은 지대석과 붙어 있는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2개씩 새겨져 있고 그 위를 넓고 편평한 갑석이 덮고 있다. 상층기단에는 각 면에 우주와 1개의 탱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팔부중상을 1구씩 조각했다. 팔부중상은 손과 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 좌우에는 천의가 날리고 있으며, 뒤에 부분적으로 보수되어 다소 어색한 느낌을 주는 상도 있다. 탑신부는 옥개석과 옥신석이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전체 비례로 보아 1층 옥신이 조금 높은 편이다.

옥신석에는 각 층마다 우주가 표현되어 있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처마 끝이 수평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두 탑 모두 사각형의 받침대 위에 노반·복발·앙화가 놓여 있다.


운문사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7호. 높이 불상 63cm, 대좌 41cm, 광배 92cm.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호분이 너무 두껍게 입혀져서 원래의 모습을 잘 알 수가 없다.

운문사석조여래좌상

운문사석조여래좌상(통일신라), 보물 제317호, 높이 불상 63cm, 대좌 41cm, 광배 92cm,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머리와 높다란 육계에는 나발이 표현되었고, 얼굴은 네모난 편으로 눈·코·입 등이 섬세하지 않고 조그마하게 처리되어 있어 부처의 위엄을 찾아볼 수 없다. 목부분은 거의 표현되지 않아 짧은 편이며 좁은 어깨에는 통견의 법의를 걸쳤는데 옷주름선이 형식적이고, 밋밋한 가슴 위로는 승각기가 표현되어 있다. 두 손은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서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나 불신에 비해 손이 작고 조각기법이 정교하지 못해 투박한 느낌을 준다.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광배는 두광과 신광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연꽃무늬와 화염무늬가 장식적으로 얕게 새겨져 있다. 대좌는 특이한 육각형으로 상대석에는 타원형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고, 중대와 하대석은 1개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특히 하대석에는 복련이 돌아가면서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전반적으로 양감이 줄어들면서 평면성이 강조되어 있으며, 위축된 자세나 장식적인 광배 문양 및 대좌의 표현 등에서 시대가 다소 내려가는 통일신라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운문사동호

보물 제208호. 높이 55cm, 입지름 19.5cm, 몸지름 31cm. 몸체의 어깨부분에 새겨진 명문인 "咸雍三年六月日改造童海重參拾斤都監大德成念"에 따르면 1067년(문종 21)에 개조되었고 무게는 30근이었다고 한다. 그 용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감로준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어 절에서 사용했던 불구의 하나로 추측된다. 몸체는 원통형으로 뚜껑과 높은 굽이 달려 있으며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몸체의 좌우에는 여의두무늬 모양의 손잡이 고리가 붙어 있고 뚜껑은 중앙에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 위에 연판과 십자형의 화염무늬가 장식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의 꼭지가 달려 있다.

*영남알프스 둘레길 7코스를 운문사를 거처 안내도 앞에서 마무리 합니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주어진 하루를 아름답게 마무리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