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1,800km)

*서해랑길 43코스(선운사 버스정류장~사포버스정류장)21.1km

문수산 아래 2022. 9. 15. 20:29

*언   제 = 09월 13일 화요일 흐음 22~26도

*누구와 = 임무용,최현숙(부부)

*코  스 = 선운사 버스정류장~연기제~미당서정주 생가~상포마을~사포버스정류장11.6km(6시간40분소요)

 

*지난 06월22일 43코스 연기제까지 마치고 2개월 반만에 서해랑길 이어 걷기를 시작합니다.

 그동안 서울에서 장모님이 오셨어 1개월 7월 폭염으로 1개월 추석으로 9월에도 미루다 보니 벌써 초가을

 날씨를 맞이하게 되었네요 우리 부부는 울산에서 5시간을 달려 43코스 연기제 도착 했습니다

 일기예보가 오후 2시부터 빗방울이 있다고 하여 출발 하면서 준비를 하고 오랜만에 서해랑길 속으로

 몸을 맏깁니다.

 

 코스개요

 ㅡ서해안 열린 하구로멸종위기생물 등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습지보호지역을 지나는

    코스

 ㅡ숲길과 마을길을 두루 거치며 갯벌을 따라 바닷길을 걸을 수 있는 코스

 

 

관광포인트

 ㅡ미당 서정주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는"미당시문학관"

 ㅡ국가습지보호구역지역으로 지정된 "반암교ㅡ용선교 일대"

 

여행자 정보

 ㅡ시점=고창군 아산면 삼안리 선운사버스정류장

 교통편) 고창공용버스터미널에서 심원(신사,아산,선운사)방향 농어촌버스승차 "선운

 산"정류장 하차

 ㅡ종점=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사포버스정류장

 ㅡ썰물때 맞춰 가면 발아래서 펼쳐지는 갯벌이 품은 생명의 기적을 확인할수 있음

 

43코스 21.1km, 7시간30분, 선운사버스정류장~선운교~정금자할매풍천장어~유신식당~신덕식당~삼인교차로~원조연기식당~연기교~연기길~연기제~질마재~선운제~마호네펜션~미당서정주생가~미당시문학관~인촌로~반월길~반월화목교회~반월길~상포길~상포마을회관~사포상암로~김소희길~사포경로원~반석교회~사포버스정류장

 

 

*선운사 버스 정류장 앞 관광안내소 앞에 43코스 시작점과 안내판이 있네요.

*43코스 안내판 앞에서 인증샷 출발합니다.

*43코스 출발 신고합니다.

*금연 캠페인 조형물앞 통과 중 

*선운산 도립공원 표지석 앞에서......

높이 334.7m이다. 도솔산이라고도 했으나, 유명한 거찰 선운사가 있어 선운산이라 불리고 있다. 산마루는 비교적 급경사를 이루며, 동쪽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인천강에 유입하여 곰소만으로 흘러든다. 1979년 12월 이 일대 43.7㎢가 선운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입구에서 약 4㎞에 걸쳐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84호)이 펼쳐져 있으며, 봄에는 꽃병풍을 이룬 계곡의 아름다움이 절경을 이룬다. 남동쪽 사면에 있는 선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선운사에서 서쪽으로 1㎞ 정도 떨어져 있는 참당암 대웅전은 보물 제80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밖에 진흥굴·도솔암·천인암·내원암·용문굴·봉수암·선학암·수리봉 등이 절경을 이룬다. 자연의 집-구황봉-연기교-소요사-선운사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다.

높이 334.7m. 도솔산(兜率山)이라고도 했으나, 유명한 거찰 선운사가 있어 선운산이라 불리고 있다. 주위에 소요산(逍遙山 : 444m)·개이빨산(345m)·황학산(黃鶴山 : 109m) 등이 있다. 서쪽과 북쪽으로는 서해와 곰소만이 있으며, '호남의 내금강'이라고도 한다.

산마루는 비교적 급경사를 이루며, 동쪽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인천강에 유입하여 곰소만으로 흘러든다. 1979년 12월에 이 일대 43.7㎢가 선운산도립공원(禪雲山道立公園)으로 지정되었다. 입구에서 약 4㎞에 걸쳐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84호)이 펼쳐져 있으며, 봄에는 꽃병풍을 이룬 계곡의 아름다움이 절경을 이룬다. 남동쪽 사면에 있는 선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경내에는 대웅전(大雄殿 : 보물 제290호)·금동보살좌상(金銅菩薩坐像 : 보물 제279호)·금동지장보살좌상(金銅地藏菩薩坐像 : 보물 제280호)·선운사석씨원류(禪雲寺釋氏源流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 등 보물 3점, 도지정문화재 8점 및 비지정문화재 30여 점이 있다. 또한 절 입구에는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 시비(詩碑)가 있다. 선운사에서 서쪽으로 1㎞ 정도 떨어져 있는 참당암 대웅전은 보물 제8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운사에서 도솔암에 오르는 길목에 있는 진흥굴(眞興窟)은 좌변굴(左邊窟)이라고도 하며,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중생구제를 위해 도솔왕비와 중애공주를 데리고 입산·수도한 곳이다. 도솔암(兜率庵)은 선운사 남서쪽 약 2.5㎞ 지점에 있으며, 깊은 계곡과 울창한 소나무·대나무 숲, 절벽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암자 앞에는 높이 20m가 넘는 천인암(千因巖)이라는 절벽이 있으며, 서쪽 암벽 위에는 상도솔암(上兜率庵)이라고도 하는 내원암이 있다. 그 밑의 절벽에는 미륵장륙마애불(彌勒丈六磨崖佛)이 조각되어 있는데, 머리 위에는 거대한 공중누각을 만들어 보호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용문굴(龍門窟)은 기출굴(起出窟)이라고도 하는데, 검단선사가 절을 짓기 위해서 도솔암 서쪽 용태에 살고 있던 용을 몰아낼 때 용이 가로놓인 바위를 뚫고 나간 구멍이라 하며 그 터[址]가 내원암 남쪽에 남아 있다. 그밖에도 봉수암(鳳首巖)·선학암(仙鶴巖)·수리봉 등이 절경을 이루며, 이름 없는 동굴이 곳곳에 있다. 또한 선운사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청소년수련원인 자연의 집이 있으며, 낙조대(落照臺)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일몰광경이 장관이다. 자연의 집-구황봉-연기교-소요사-선운사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다. 5월에는 문화예술제인 동백제가 선운사 경내에서 열리며, 매년 10월에는 민속축제인 성밟기 모양성제(牟陽城祭)가 열린다. 호텔 등의 숙박시설과 식당·상가 등 각종 위락·편의 시설이 있다. 정읍시와 고창에서 선운사까지 버스가 운행된다.

선운산

선운산의 절경

*선운사입구에 설치된 특색있는 소공원의 모습.

*공사구간 통과 중.

*가로수가 있는 도로 우측 인도로 진행.

*입구는 온통 풍천장어 식당으로 도로 양옆으로 즐비하네요.

 가격대가 조금 부담 스런 가격대네요.

 자연산 풍천장어는 거의 볼수가 없다네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선운산 일대에 서식하는 뱀장어.

내용

일찍부터 작설차(雀舌茶)·복분자술[覆盆子酒]과 함께 선운산의 3대특산물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강물과 바닷물이 어울리는 곳에서 잡히며, 산란기가 되면 서해바다를 거쳐 태평양 깊숙한 곳에까지 가서 새끼를 낳는데, 이 새끼장어들은 회귀성이 있어서 무리를 지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주로 숯불 구이로 요리되는데, 다른 곳에서 잡은 장어와는 달리 그 맛이 아주 담백하고 구수한 것이 특징이다.

그 때문에 식도락가들에게는 이 장어를 안주 삼아 복분자술을 먹어보는 것이 큰 희망이다. 그러나 근래에 이 장어새끼가 대일본수출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고, 또 선운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풍천장어의 남획에 대한 대책이 요청되고 있다.

*도로를 따라 교차로까지 진행.

*선운사입구 교차로 도착 도로건너 직진 앞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감.

*도로건너 다리를 보고 건너감.

*선운사권에서 다리를 건너 연기제 방향으로 도로따라 진행.

*진행길 오른쪽 밭 가운데에 고인돌로 보이는 돌무덤이 보입니다.

*연기마을을 벗어나 무성한 가로수길따라 연기제 오르막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연기제 도착 앞,뒤로 시원하게 시야가 펼쳐지고 있어요.

 

                                                                              ◇선운산 아래에 자리한

                                                                          선운사를 뒤로하고 주차장에서 

                                                                     43코스 시작점을 출발 풍천장어 거리를

                                                                통과  교차로에서 직진 다리를 건너 도로따라 진행

                                                          전형적인 시골마을 연기마을을 통과하여 양 옆으로 푸르른 

                                                    가로수길 따라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면 여기가 연기제 저수지 규모가

                                                         있네요, 여기서 앞,뒤로 보여주는 풍경이 오른쪽으로는 우리가

                                                               걸어온 길과 연기마을이 아래로 보이네요. 한편 좌측으

                                                                   로는 저수지의 맑은 물과 소요산 계곡의 모습이

                                                                       시원하게 보여 주네요.여기서 부터는 이제

                                                                            임도길따라 소요산 중턱까지 진행

                                                                                우리는 아름다운 동행을 시작

                                                                                                   합니다.

                

*연기제 표지석앞에서 잠시의 여유를 가져 봅니다.

*잠깐의 여유 한숨 돌리고 우리의 갈길을 갑니다.

*주위에 꽃무릅이 가을을 알려주네요.

*자!!! 우리는 갈길을 갑니다 연기제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맏으면서 둑방길을 걸어 갑니다.

*연기제 둑방길에서 바라 본 오른쪽 발아래 펼쳐진 지나 온 연기마을의 모습.

*저수지를 바라보면서 쉼 호흡을 한번 하고 갑니다.

*본격적으로 임도길 진행 너무나 아름다운 길이 이어지네요.

*잠시후 오른쪽 언덕위에 대단위 꽃무릅 군락지가 보입니다 아직 절정은 아니라도 제법 모습을 보여 주네요.

 선운사 꽃무릅이 전국적으로 유명한데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들을 시간이 있을런가??????

꽃무릇

Red spider lily석산, 石蒜, 독산, 獨蒜, 독무릇, 산오독, 산두초, 피안화, 彼岸花
학명꽃말
Lycoris radiata
참사랑

특징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정읍 내장사, 이 가을에 꽃무릇 꽃의 화려한 연출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 매년 추석 무렵이면 만개하는데 계곡 전체 심어놓은 정원이나 공원 모두 바닥에 불난 것처럼 빨갛게 장식되어 있다.

이용

선운사의 경우 꽃무릇의 알뿌리가 장마 때 계곡을 따라 흘러내려오다 물가의 둔치나 평평한 곳에 흩어져 거기서 뿌리를 내려 꽃이 핀 것이다. 덕분에 가을이면 계곡 전체가 붉은색으로 채색된다. 화단용으로 좋으며 꽃꽂이용 소재로도 훌륭하다.

기르기

꽃무릇은 추위에 좀 약한 편으로 중부이북에서는 월동이 불안전하다. 하지만 서울에서도 햇볕이 잘 들고 습기가 유지되는 곳에서는 화단용으로 충분히 즐길수 있다. 옮겨심기는 봄이나 가을에 꽃이 진뒤 하면 된다.

분류 및 자생지

꽃무릇(=석산)은 수선화과 Lycoris속에 속하는 알뿌리식물로 우리가 흔히 아는 상사화랑 한 집안 식물이다. 그래서 통상 상사화라고도 부르지만 그것은 속을 대표하는 명칭이기 때문에 굳이 전체를 통칭하여 부른다면 상사화류 라고 불러야 맞다.

 

*임도길 삼거리 도착 우리는 직진 좌측으로는 저수지 상류방향.

*임도길 오목 거울 앞에서 잠깐의 모습을 보여주고 갑니다.

*이어지는 임도길은 완만한 오르막으로 걷기에는 최적의 코스 우리 부부는 오손도손 좋은 시간을 가져봅니다.

*임도길 내내 칡꽃향기가 오염된 우리의 내면을 깨끗하게 정화를 시켜주네요.

*임도길 삼거리 도착 여기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갑니다. 커피도 한잔. 간식도 먹고 신발도 벗어 발도

 숨을 쉬어 줍니다.

*30분 휴식을 하고 이제 출발 임도길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살짝진행 곧바로 우측 산속으로 들어 갑니다.

 여름에는 산길 진행보다 임도길따라 진행 질마재 입구에서 만나 진행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산길에는 산모기가 너무많아 임도길 추천합니다.

*칡꽃이 향기와 함께 너무 아름답게 보이네요.

Kudzu Vine ,  , クズ葛
콩과
Pueraria lobata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두고두고 충절을 굽히지 않았던 정몽주에게 태조 이방원이 던진 시 한 수다. 만수산 칡넝쿨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듯이 풍진(風塵) 한 세상 별스럽게 굴지 말고 서로 협조하여 잘 살아보자는 뜻이다. 이 시는 오늘날도 적당히 부정을 저질러 누이 좋고 매부 좋게 다 같이 잘 살아보자는 의미로 널리 쓰인다. 그러나 이것은 칡의 생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착각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칡은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서 사이좋게 살지 않는다.

콩과 식물에 속하는 칡은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고, 생명력이 왕성하여 숲속에 웬만한 틈만 보이면 얼른 자리를 잡고 나서는 것부터가 문제다. 일단 터만 잡으면 하는 짓마다 망나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이웃 나무줄기를 빙글빙글 감고 순식간에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광합성을 위해 피나는 경쟁으로 확보해놓은 공간을 몽땅 점령해버린다. 조금의 나눔도 없이 혼자 전부 갖겠다는 놀부 심보가 들어 있다. 더욱이 넓적한 잎을 수없이 펼쳐, 잎 아래에 있는 나무에게는 단 한 줄기의 빛도 들어가지 못하게 거의 완전히 햇빛을 차단해버린다. 당한 나무는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린다. 공생(共生)이라는 산림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주범이 바로 칡이다. 숲의 가장자리에서 흔히 이 녀석이 주위를 몽땅 뒤덮어버린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산림의 질서를 위해서는 사람들이 일일이 칡을 캐내야 한다. 죽이는 약재도 있지만 돈도 많이 들고 효과도 절대적이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골길 전봇대를 타고 올라가 전선을 얼기설기 엮어 놓는다. 그러고는 비 오는 날 전기합선을 일으키는 못된 짓을 서슴없이 한다. 고육지책으로 전봇대를 지탱하는 철사 줄에 커다란 고깔모자를 뒤집어씌워 더 이상 올라가지 못 하게 하는 수고를 끼치기도 한다. 오늘날 칡은 나무 키우는 일에 매진하는 삼림공무원이나 한국전력공사 직원에게는 악명 높은 훼방꾼일 따름이다. 말 그대로 ‘칡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워낙에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녀석이라 언제나 사람이 밀린다.

그러나 역사의 바늘을 조금만 거꾸로 돌려보면 칡은 정말 고마운 식물이었다. 뿌리, 줄기, 잎, 꽃 모두 요긴하게 쓰였다. 갈근(葛根)이라 불리는 칡뿌리는 흉년에 부족한 전분을 공급하는 대용식이었으며, 갈근탕을 비롯한 여러 탕제(湯劑)에 쓰였다.

질긴 껍질을 가진 칡 줄기는 삼태기를 비롯한 생활용구로 널리 이용되었고, 크게는 다리와 배를 만들고 성을 쌓은 데도 활용된 예가 있다. 세종 15년(1433)에 정흠지는 “다리를 만드는 데에는 갈대와 칡을 많이 쓴다”라고 하였으며, 숙종 37년(1711)에는 북한산의 축성을 논의하면서 “성을 쌓는 역사를 할 때에 숯과 칡 등을 수납했다”라고 했다. 또 정조 17년(1793)에는 배다리를 놓은 방법으로 “두 배의 머리를 서로 마주 잇닿게 하고 말뚝을 마주 세워 박은 다음 칡 밧줄로 야무지게 묶는다”라고 했다. 나라를 지키는 군수물자로 요긴하게 쓰인 셈이다. 이 외에도 임금이나 부모의 상을 당하여 상복을 입을 때 매는 허리띠는 다듬어진 칡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칡은 전국 어디에서나 양지바른 곳이면 잘 자라는 덩굴나무다. 줄기는 흑갈색인데, 갈색 또는 흰빛의 털로 덮여 있다. 잎은 세 개씩 나오고, 각각의 잎은 어른 손바닥만 할 정도로 크다. 가장자리는 밋밋하거나 얕게 셋으로 갈라지고, 잎자루는 길고 털이 있다. 원뿔모양의 꽃차례가 잎겨드랑이에서 나와 곧추서고 여름에 짧은 꽃자루가 달린 붉은보랏빛 꽃이 핀다. 열매는 길이 5~10센티미터의 콩꼬투리로서 갈색의 거친 털이 덮여 있고 가을에 익는다.

최근에는 미국에서 들어온 가시박이란 초본 덩굴식물까지 칡과 함께 나무들을 못살게 군다. 가시박은 1년생이지만 주로 습지에서 자라면서 줄기 길이가 12미터나 되어 나무를 완전히 덮어버린다.

 

*임도길과 만나는 질마재입구 입니다.

*산속의 이정표 우리는 미당시문학관 방향으로 진행.

*소금짐 지고 쉬어쉬어 넘던 "질마재"

 소요산 자락을 넘어 선운리에 이르는 약2km 의 구간으로 질마는 소나 말의 안장을 뜻하는 길마의 사투리다.

 소금농사를 업으로 살아가는 심원 사람들이 좌치 나루터를 넘어와 부안 알뫼장터에서 곡물과 교환 하는데 꼭

 필요한 길이었다.성황당이 있는 소금샘은 잠시 쉬어가며 밥을 해먹었던 장소로 아직도 샘터거 남아 있다.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로 더 유명한데,사오십년을 신혼첫날밤의 자세로 앉아 기다린 신부를 고향으로 비유해,

 회귀의 정서로 심금을 울리고 있다.

*질마재 옛길은 거의 흔적만 있고 우리가 걷기에는 약간의 조심구간이네요.

*앞에 보이는 나무 다리를 건너지 말고 계곡따라 조금더 내려가면  건너는 곳이 있어요 

 여기서 조금 길찾기 조심 구간입니다.

*조금전 나무 다리에서 조금 내려오면 무너진 다리가 보입니다 여기로 건너 진행합니다.

*더디어 산길에서 벗어나 민가가 보입니다 

 질마재 계곡이 습하고 산모기와 정비된 길이 아니라 조금은 정비가 필요한 구간입니다. 

*산에서 내려와 도로와 합류 좌측으로 도로따라 진행.

연기제에서 

시원한 계곡 바람을 

맏으면서 소요산 임도길따라 

완만한 경사길을 천천히 자연과 함께

모처럼 여유로운 걷기를 이어갑니다 임도길 능선

갈림길 정자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질마재 방향으로 옛숲

길로 임도길을 버리고 진행 합니다 그러나 숲길은 여름에는 모기와

습도로 인하여 걷기에 어려움이 있네요 여름에는 정자에서 임

도길로 계속 내려가 T자 갈림길에서 좌측 임도길로 조금 

가면  옛길과 합류 권장 합니다 질마재 계곡길도 

길의 흔적만 있어 걷기에 조심스러운 구간

이네요 조금은 정비가 필요한 구간

 입니다 특히 비가 내리면 위험

곳이라 참조 바랍니다

*좌측으로 도로따라 조금 진행.

*진행길 오른쪽으로 보여지는 선운리 들판의 모습 전형적인 시골 풍경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앉은 모습 우리 마음의 고향.

*도로따라 진행 잠시 후 이정표 도로에서 좌측으로 진행.

*도로애서 이탈 마을 농로길따라 진행.

*잠시 후 갈림길 도착 우리는 직진으로 진행.

*진마마을 쉼터 도착 팽나무가 제법 수령이 있어 보이네요 .

 여기서 우측으로 꺽어  마을길 진행.

*조용한 농로길따라 진행 양 옆으로 가을의 수확을 기다리는 각종 농작물들이 즐비 하네요.

*펜션앞에서 우측으로 마을길 진행.

*마을 입구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

*마을길 진행 좌측으로 옛 우물터 "웃돔샘"지금은 사용을 하지앉아 물은 지저분 하네요. 이야기가 있는 샘입니다.

 "웃돔샘 = 우리 생명의 원천은 물입니다.

                  삼년 가뭄에도 마르지 앉은다는 샘입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마도 상고 때부터 있었을 겁니다.

                  소식의 교환과 여론의 발상터 였지요.

                  미당 선생은 이 샘에 얽힌 이야기를 소재로 간통 사건과 우물이라는 시를 쓰셨습니다.

*우물을 지나 만나는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

*마을길 곳곳에는 이야기가 있는 조형물들이 많이 보이네요.

*조형물 마다 개성이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네요 .

*미당 서정주 생가터 조금은 관리가 깔끔 하지가 앉네요 .뭔가 조금은 허술함이 보이네요 

서정주

 
서정주
徐廷柱
작가 정보출생사망국적직업학력경력본관종교필명활동기간장르배우자자녀형제친지
1915년 5월 18일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고창군
2000년 12월 24일(85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시인
중앙불교전문학교 중퇴
경기대학교 대학원 교수
신민당 당무위원
달성
불교
아호는 미당(未堂), 궁발(窮髮)
일본식 이름은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
1936년 ~ 1998년 9월
시문학
방옥숙
2남 5녀
서정태(아우)
김관식(아랫동서)
방옥례(처제)

서정주(徐廷柱, 1915년 5월 18일 ~ 2000년 12월 24일)는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시인이며 교육자이다. 토속적, 불교적, 내용을 주제로 한 시를 많이 쓴 한국의 이생명파 시인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출신이며, 본관 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 궁발(窮髮), 뚝술이다. 탁월한 시적 자질과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해방 전후에 걸쳐 한국 문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및 반인륜 행적과 신군부 치하에서의 처신 등으로 역사적 평가에 있어 논란의 대상이다.

생애[편집]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출생하였고 전라북도 부안에서 성장하였다. 서정주의 아버지는 인촌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다. 이를 두고 서정주 본인은 <자화상>에서 "애비는 종"이었다고 고백했다. 노비의 자식으로 서럽기만 했다던 서정주는 대를 이어온 노비의 신분을 벗어던짐으로써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고 노비의 설움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자 그리고 내면에서 솟아나는 문학적 욕구를 펴고자 했다.[1] 서정주는 14세에 서울로 상경해 중앙보통학교에 다녔다.

1933년 겨울, 개운사 대원암에서 영호당 박한영 스님 밑에서 수학했다. 1936년 경성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36년 김광균·김동리·오장환 등과 함께 잡지 《시인부락》을 창간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전시 체제 때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로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 강점기 말기에 태평양 전쟁과 카미카제 같은 전쟁범죄들을 찬양하며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을 통해 친일 행위를 하였다. 훗날 이 전범 행위가 불거지자 서정주는 이때 전범행위를 종천순일파라고 자칭하며 일본에게 친일행위는 했으나 받은 대가가 없다는 식으로 변명하다가[2], 나중에 자서전에서 그의 친일 행위에 대하여 “일본이 그렇게 쉽게 질 줄 몰랐다.”라는 식으로 변명한다.[3]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당시 총 11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다.[4]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해방 후에는 당시 문학계를 풍미하던 좌익 계열의 문학적 흐름에 반대하여, 이른바 순수 문학의 기치를 내걸고 우익 성향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대결하였다. 서라벌예술대학 동국대학교 등에서 오랫동안 교수를 역임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고, 다수의 문학 단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줄곧 한국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일제 강점기뿐만 아니라, 군부 독재와 유신독재 치하에서의 처신 등으로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문학적 명성과는 별도로 그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 관악구에 그의 고택이 2000년대 후반 정부에 의해 복원 전 잠시 폐가로 버려져 있었다.

2000년 12월 24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현재 그의 고향 고창군에 미당문학관과 그가 살았던 서울 관악구에 미당이 살았던 집이 있다. 실제로 관악구와 고창군은 미당의 인연을 계기로 자매결연도시로 있다.[5][6]

가족 및 인척 관계[편집]

논란과 의혹[편집]

친일행적[편집]

 
1944년 12월 9일, 매일신보에 서정주가 쓴 시문인 '마쓰이 오장 송가'.

서정주는 일제 말기 일제에 대한 찬양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선전에 그의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였으며, 목숨을 걸고 일제와 항쟁하며 고난찬 가시밭길 속에서 산화했던 여러 의사들과 열사, 지사들과는 달리, 개인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 조국을 배신하고 민족을 파는 친일, 매국행위를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는 것은 일본 천왕이 반도인에게 부여한 크나큰 영광이라고 참전을 강권하고, 일본군의 종군 기사를 쓰는 일을 무척이나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인물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더불어 친일 행위 가운데는 카미카제라는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미화도 있어서 단순히 민족에 대한 매국을 넘어서 전인류적으로도 심각한 반인륜적 행동이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해방 이후, 민족반역자 처벌보다 그들을 비호하고 자신의 정치기반 확대에 이용코자 민족반역자들의 대부노릇을 한 이승만에 의하여 일제잔당 세력들은 민족반역행위에 대한 처벌대신 면죄부를 받음과 동시에 일제강점시 쌓아올린 지위와 재력을 이용, 더 높은 직책과 더 큰 명예와 더 많은 부를 얻게 되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며 미당 서정주 또한 그러한 부류중 하나로 반공을 국시로 했던 이승만정권과 유착하여, 남한문학계에서 그 지위를 공고히 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문하에 수많은 후배와 제자를 거느린 거목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문학적 성과 이면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문제로 그 강도와 형태에 관계없이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며 그 죄과가 명확히 밝혀지고 본인들의 사죄와 가시적인 반성의 결과물로서 구체적 행동이 선행돼야 한다는 당위적 도덕적 주장과 시대상황이 부여한 선택의 한계와 생존이라는 현실문제에 직면한 현실속 인간에게 있어 적용되는 보편적 불가피성이 참작되어야만 한다는 옹호론이 오늘날에도 모든 분야 모든 지식인들의 친일행적에 대한 비판에 있어 첨예한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으며 대상자의 친일행적이 진정 강요에 의한 절대불명의 상황속에서 이루어진 친일이었나 아니면 자신의 영달을 위한 자발적인 행위였나하는 평가에 대한 시각차가 논쟁의 핵심 쟁점으로 남아 있다. 미당은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서 자신의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변론한 바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 여러 친일 문인 혹인 일본인들 가운데서도들도 서정주처럼 가미카제라는 반인륜 범죄에 대한 홍보와 미화를 했던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생각해보면 서정주의 행보가 살기위해 어쩔수 없이 친일행위를 했다는 변호의 신빙성은 부족해보인다.

친군부 행적[편집]

전두환과의 관계[편집]

1980년대 초 서정주는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통령 선거 때 전두환 지지연설을 했다. 전두환의 56회 생일을 맞아 '전두환 예찬시'를 썼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동료 문인과의 관계[편집]

1960년 4.19 때 사망한 안종길과 인연이 있는 편으로 알려졌다. 당시 안종길은 10대 소년으로 미당으로부터 시 작문을 전수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습작시를 보면서 시인 랭보를 비유하기도 하였다.

철학가로 알려진 김범부와도 인연이 있으며 신라의 역사를 통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의를 하였다.

승려인 성철과도 인연이 있는 편이다.[7]

학력[편집]

명예 박사 학위[편집]

작품성[편집]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중 한명으로 탐미적인 경향이 보인다. 그의 고향 전라도의 사투리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미당의 시 언어는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 것으로 평가된다.[8]

시집[편집]

   
  • 《화사집》, (1941)
  • 《귀촉도》, (1946)
  • 《시선》, (1955)
  • 《신라초》, (1960)
  • 《동천》, (1968)
  • 《질마재 신화》, (1975)
  • 《늙은 떠돌이의 시》, (1993)
  • 번역 시집 《만해한용운한시선역》, (예지각, 1983) : 한용운의 한시를 가려 뽑아 번역한 시집

일화[편집]

  • 서정주는 말년에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아침마다 세계의  1,624개와 각 나라의 수도 이름을 외웠다고 한다.
  • 시〈자화상〉에서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라고 고백하였고, 이 구절은 그의 삶을 거론할 때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유복한 성장기를 보냈다.

기타[편집]

그의 시 중 하나인 <푸르른 날> (1968년 간행된 시집 <동천>에 수록됨)은 가수 송창식에 의하여 곡이 붙여져 노래로 불리기도 했다.

*미당 생가터를 지나 우측 하천 건너편에 선운리 마을회관이 보입니다.

*회관 옆에는 미당 시문학 체험관 건물이 보이네요.

*우리 고유의 향 방아잎이 길가에 꽃을 만개 하고 있네요 .너무나 좋아하는 향신료 추어탕. 민물 매운탕.삽겹살 먹을때

  영남 지방에서는 없었어는 안되는 식물이죠.

**마을길 입구에는 이런 구조물이 보이네요  용도가???????

미당 서정주 시문학관

위치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질마재로 2-8

미당시문학관은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이자 영면지인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마을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그의 사후 다음 해인 2001년 가을, 이호종 전 고창군수의 적극적인 도움에 힘입어 개관하였다. 개관일은 11월 3일인데 이는 미당의 중앙고보 재학시절 광주학생의거 지원 시위 사건(1929년, 1930년 2회)을 기념하기 위해서 정해졌다. 이 기념관은 고향의 생가와 묘역 근처에 있어서 더욱 뜻 깊은 공간이며, 폐교된 선운초등학교 봉암분교를 새롭게 단장하여 지었으므로 <친환경>과 <배움>의 건축미학을 지향하고 있다.

 

*마을입구 도로변에 진마마을 표지석 .

소요산과 질마재

를 내려와 만나는 선운리

진마마을을 통과 하면서 여기가 

미당 서정주 시인의 태어난곳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네요 생가터가 복원 관리되고

 있고 미당 시 문학관도 있어 한번쯤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면 미당 서정주 흔적을 두루두루 둘러보고 가는 

좋을것 같네요.이제 계절이 가을로 접어들고 있

어 들판에는 농사의 마지막 수확을 기다리

고 있네요 벼가 황금색으로 변하고

감나무에는 붉은 홍시가 달

리고 들깨가 알터지는 

소리 모든것이

이 가을에

*진행길은 도로건너 하천변따라 진행 직진.

*선운리 진마마을을 뒤로하고 하천길 진행 갈림길에서 철제 다리를 건너 좌측 하천변으로 진행.

*갈림길 좌측 조그만 공터에 들깨 향기와 꽃이 만개 했네요 .한달 후면 여기에 들깨열매로 변화를 주겠지요.

*철재 다리를 건너 바로 좌측 하천변으로 진행.

*둑방길의 모습 뭔가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주네요 너무 정겨운 여운을 주는 길이네요.

*진행 잠시 후 갈림길에서 우측 농로길로 방향 전환.

*농로길 끝까지 직선길 진행 농로변 한그루의 나무 그림을 살려 주네요.

*농로길 끝에서 살짝 우측으로 진행 곧 바로 좌측 농로길 진행.

*좌측 농로길로 진행.

*다시 직선 농로길 끝까지 진행.

*농로길 끝에서 좌측으로 꺽어 진행.

*현재 우리는 서해랑길 43코스 진행중  여기서 우측으로 진행.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

*해변가 도착 여기서 우측으로 진행.

*우리는 반월마을 방향으로 진행 주변마을의 상세도.

*마을 입구에서 좌측 마을 안길로 진행.

*반월마을 골목길 진행.

*반월화목교회 앞 통과 중.

*교회 담벼락에 능소화가 담을따고 만개 했네요.

능소화

Chinese trumpet creeper타태화, 墮胎花, 금등화, 金藤花, 양반꽃
분류학명
능소화과
Campsis grandiflora

여름이 깊어 갈수록 주변은 온통 초록의 바다가 된다. 그러나 늘 푸름도 너무 오래가면 금세 신물이 나서 화사한 봄꽃의 색깔이 그리워진다. 이럴 즈음, 꽃이 귀한 여름날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능소화가 우리의 눈길을 끈다. 고즈넉한 옛 시골 돌담은 물론 삭막한 도시의 시멘트 담, 붉은 벽돌담까지 담장이라면 가리지 않는다. 담쟁이덩굴처럼 빨판이 나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달라붙어 아름다운 꽃 세상을 연출한다. 가장자리가 톱날처럼 생긴 여러 개의 잎이 한 잎자루에 달려 있는 겹잎이고, 회갈색의 줄기가 길게는 10여 미터 이상씩 꿈틀꿈틀 담장을 누비고 다니는 사이사이에 아기 나팔모양의 꽃이 얼굴을 내민다.

꽃은 그냥 주황색이라기보다 노란빛이 많이 들어간 붉은빛이다.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느낌이 든다. 다섯 개의 꽃잎이 얕게 갈라져 있어서 정면에서 보면 작은 나팔꽃 같다. 옆에서 보면 깔때기 모양의 기다란 꽃통의 끝에 꽃잎이 붙어 있어서 짧은 트럼펫이 연상된다. 꽃이 질 때는 꽃잎이 하나하나 떨어져 날아가 버리는 보통의 꽃과는 달리 동백꽃처럼 통째로 떨어진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흔히 처녀꽃이란 이름으로도 불려진다. 꽃은 감질나게 한두 개씩 피지 않고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붙어 한창 필 때는 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이 핀다. 한번 피기 시작하면 거의 초가을까지 피고 지고를 이어간다.

흔히 능소화 꽃가루에는 갈고리가 달려 있어서 눈에 들어가면 심지어 실명한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식물의 꽃가루는 대체로 0.01~0.05밀리미터 크기의 원형이나 타원형이며, 종류마다 형태가 다르고 표면에 돌기가 있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러나 능소화 꽃가루는 크기 0.02~0.03밀리미터 정도의 타원형으로 전자현미경으로 확대해보면 표면이 그물모양일 뿐1) 갈고리 같은 흉기는 없다. 사실 돌기가 있는 코스모스 등의 꽃가루도 크기가 너무 작아 일부러 눈에 넣고 비비지 않는 다음에야 눈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의 《시경(詩經)》에 나오는 소지화(笤之華)란 이름의 꽃나무는 능소화로 짐작된다. 이를 미루어 보아 적어도 3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심고 가꾸었던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능소화는 시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짐작할 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19세기 초 유희가 쓴 《물명고(物名攷)》2) 에 보면 능소화는 ‘자위(紫葳)’라 하였으며, “야생의 덩굴나무로 영산홍과 같이 붉은 황색을 띠며 꽃에 작은 점이 있고, 8월에 콩꼬투리 같은 열매가 열린다”라는 기록이 있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산속에서도 어쩌다 만날 수 있다. 들어온 지가 오래된 식물은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자라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나 동물이 옮겨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동의보감》에서도 자위라 하였으며 줄기, 뿌리, 잎 모두 약재로 기록되어 있다. 처방을 보면 “몸을 푼 뒤에 깨끗지 못하고 어혈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과 자궁출혈 및 대하를 낫게 하며, 혈을 보하고 안태시키며, 대소변을 잘 나가게 한다”라고 나와 있다. 부인병에 널리 쓰이는 약재로 일찍부터 재배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는 귀한 약나무에서 관상용으로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줄 뿐이다.

능소화는 원래 남부지방에서 주로 심던 나무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꽃이었다고 한다. 《화하만필(花下漫筆)》3) 에는 “서울에 이상한 식물이 있는데, 나무는 백송이 있고 꽃에는 능소화가 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옛날보다 날씨가 훨씬 따뜻해진 탓에 지금은 서울을 포함한 중부지방에서도 잘 자라고 있다. 겨울에 들어서서 잎이 지고 나면 마치 가느다란 실을 세로로 덕지덕지 붙여 놓은 것 같은 회갈색의 줄기가 특별히 눈에 띈다. 줄기는 세월이 그렇게 많이 지나지 않아도 고목 줄기의 느낌을 준다. 능소화는 겨울 줄기가 볼품없지만 앙상함이 아니라 그 나름의 기품을 잃지 않는다.

근래 들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능소화 외에 최근에 들여온 미국능소화를 주로 심고 있다. 미국능소화는 꽃의 크기가 작고, 거의 위로 향하여 피며 더 붉은색을 띠는 것이 보통 능소화와의 차이점이다.

 

*반월마을길 끝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

*진행길 좌측으로 바다가 보이고 들판에는 가을색으로 변화를 주고 있네요.

*언덕길 진행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

*좌측으로 진행길 방향전환 다시 농로길 진행.

*바로 보이는 태양광 패널이 보이는 쪽으로 진행.

*진행길 끝에는 다시 해변가 도착 여기서 우측으로 해변가따라 진행.

*43코스 종점까지 7km 남았네요.

*진행길 좌측으로 물빠진 바다는 갯벌만 보여주네요 .서해 해변에서 바다 형태를 구경하기 힘드네요.

*마을입구 해변가에서 우측 마을길로 진행  갈림길 안내판에는 썰물때는 위험하니 마을길로 우회 하라는 

 안내문이 있네요 .

*상포마을 골목길따라 진행.

*상포마을 회관앞 도착 마을의 중심지 여기서 좌측  마을길 진행.

*상포마을의 핵심 마을회관앞 도착 .

*마을길 끝 갈림길에서 우측 해변가로 진행.

*진행길 좌측으로 왕새우 양식장이 이어지는 길따라 진행.

*여기서 진행길은 좌측으로 진행.

*다시 도로와 합류 여기서 좌측 으로 포장길따라 진행.

*더디어 오늘의 종점 사포마을앞 해변 도착 해넘이가 시작되는 시간 철새들이 가득 합니다.

*다시 도로와 합류 도로따라 마을앞으로 진행.

*도로에서 우측으로 김소희 생가 쪽으로 진행.

김소희

金素姬김순옥, 金順玉, 만정, 晩汀
1917. 1. 14, 전북 고창
1995. 4. 17, 서울
한국

요약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보유자가 되었으며, 1972년 국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카네기 홀 무대에서 판소리를 열창했다, 뮌헨 올림픽 대회 참가공연, 유럽 순회공연 등을 통해 세계에 한국 판소리의 정수를 들려주었다.
국창 송만갑으로부터 <심청가>, <홍보가>를 이수했으며, 정정열에게 <춘향가>, <수긍가>를 배웠다. 이밖에도 김계문에게 향제가곡을, 이승환에게 거문고를, 김종기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으며, 양금과 고전무용, 서예 등에도 다재다능했다. 1937년 창극좌에 입단했고, 1945년에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의 전신인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다. 1982년 한국 국악대상, 198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을 수상했다.

김소희

김소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기·예능보유자, 고창판소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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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순옥(順玉), 아호는 만정(晩汀). 15세에 흥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부터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국창 송만갑(宋萬甲)의 문하로 들어가 〈심청가〉·〈흥보가〉를 이수받고, 17세에는 정정열(丁貞烈)에게 〈춘향가〉·〈수궁가〉를 배웠다. 이밖에도 김계문에게 향제 가곡을, 이승환에게 거문고를, 김종기(金鍾基)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우는 등 거문고·양금·고전무용·서예 등에도 다재다능했다.

1937년 창극좌에 입단했고, 1945년에는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의 전신인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다. 한편 빅타레코드사에서 정정열·임방울·이화중선 등과 〈춘향전〉을 전편 취입했는데 이때 춘향역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62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9회 '국제민속예술제'에 참가했고, 그밖에도 유럽 각국과 미국 등지의 순회공연에 참가했다.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보유자가 되었다. 1972년 국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카네기 홀 무대에서 판소리를 열창함으로써 그곳의 비평가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은 김소희는 뮌헨 올림픽 대회 참가공연, 유럽 순회공연 등을 통해 일찍부터 세계에 한국 판소리의 정수를 들려주었다. 1993년 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해 1994년 '국악의 해' 기념 국악제를 지휘하기도 한 김소희는 숨을 거두기 얼마 전 "광대는 대중을 자기 속으로 끌어들이지만 기생은 자신이 대중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광대와 기생이 다른 점이다."라고 말해 철저한 예인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명창 박윤초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는 특히 후진 양성에 많은 정성을 쏟아, 신영희·안숙선·이명희·박소영 등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2년 한국 국악대상, 198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을 수상했다. 그녀가 숨을 거두자 정부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으며, 후학들은 국립국악원 박물관에 만정기념실을 설치했다.

*김소희 생가터를 지나 사포마을 골목길 지나 언덕위의 반석교회앞 통과.

*오늘의 목적지 서해랑길 43코스 종점 사포마을 버스정류장 도착 .(소요시간 =6시간40분)

 오늘도 우리 부부는 무탈하게 주어진 한코스를 마무리합니다.

 매회 출발은 걱정으로 도착은 환희로 이런 기분을 잊지못해 다시 내일도 길위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들판길과 해안가길

을 반복하여 걷기를 하면서 

비교적 장거리 코스 43코스 21km

를 간간히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때로는

우산을 들고 들판길 걷는 모습 뒤에서 보니 그것도

한폭의 멋진  그림으로 보여 주네요 몇개의 마을을 통과

하여 해변가 도착 물빠진 바다는 갯벌만 우리에게 보여주고 

진전한 서해바다 모습은 언제 우리에게 보여 줄런지

쉬엄쉬엄 걸어 도디어 사포마을앞 해변도착 석

양을 바라 보면서 사포해변은 철새들과

공존하는 아름다운 해안가 보여

주네요 김소희 생가를 구경

명창이 태어난곳을

뒤로하고 일정

을 마무리

 

 

*출발.도착 차량 주행거리 =울산~연기제=334km                     

*누적 주행거리 =13,738km

*1차 통행료 = 19,000원

*누적 통행료 = 638,000원

*43코스 거리 =640.7 + 21.1km = 661.8km